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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4.02.20 [ 정령의 아이 ] 11화 - 죽음 혹은 삶 1

방금 그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세 사람 모두 알았다. 섬이, 섬에 있는 ‘그들’이 돌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분노했다. 격한 소란이 일었고 그 여파가 바람과 파도의 형태로 배를 덮쳤다. 잎새와 은아가 최대한 노력해 가벼운 진동으로 그쳤으나 그 잠깐 사이에 하루가 바다에 던져졌다. 그리고 은아는,
“찾아올게.”
“안 돼.”
눈이 시뻘개져 있었다.
우연은 당장 바다에 뛰어들 기세인 은아를 붙들고 선장을 향해 외쳤다.
“빨리 가주세요. 섬에 가서 구조를 요청해야겠어요.”
“아니, 조금만 기다리면….”
“어서요!”
선장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우연을 노려보다가 결국 돌아섰다. 언젠가부터의 사람을 가리지 않고 제 발언권이 꽤 강하다는 것을 느꼈는데, 바로 지금 같은 순간이 있어서였다. 우연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정신차려, 임 은아. 네가 지금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된다는 거 알잖아.”
“내가 못 찾을 리가 없어.”
“지금 못 하고 있잖아.”
“지금이 아니면 못 구할 수도 있어.”
우연의 입이 딱 다물렸다. 잠깐 멈췄던 배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빠진 건 평범한 사람이야. 내가 아니라고.”
은아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우연은 저게 평범한 걱정이 아니라는 걸 안다. 아마 걱정보다는 자존심에 입은 상처가 더 큰 이유일 테지만 저 말은 맞았다. 은아는 바다 속에서 십 분을 넘게 버티고 섬에서 여기까지 혼자 헤엄쳐 올 수도 있었지만 하루는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 속에서 섞여지낸다고 해서 자기가 평범한 게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 사실이 갑자기 뼈저렸다.
우연은 은아를 놓았다.
“다녀와.”
“부탁해.”
“어떻게든 해볼게.”
은아가 잎새를 보며 눈짓했다. 당장 행동에 나선 건 은아지만 정말 위험한 게 잎새라는 건 우연도 알았다. 은아가 설렁설렁 몸을 풀었다. 연아는 천천히 잎새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첨벙 소리와 함께 은아가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잎새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은아가 갔어.”
“괜찮을 거야.”
“알지?”
잎새는 거의 보이지도 않는 몸짓으로 느리게 고개를 끄덕인다.

눈을 꽉 감고 있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주변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몸이 빠르게 가라앉고 있었다.
- 정말 내 얘기를 들어줄 거야?
목소리가 물었다. 하루는 강하게 생각했다.
그래. 들어줄테니까 말해봐. 숨이 차기 전에. 누군가가 찾으러 오기 전에.
- 괜찮아. 아무도 오지 않을거야.
어떻게? 아니, 그 전에 그럼 나는 어떡해.
- 걱정 마. 너는 죽지 않을테니까.
뭐?
그 순간 갑자기 몸을 감싸는 압력이 사라졌다. 놀라서 저도 모르게 입을 땠다가 황급히 다물었다. 그런데 물이 들어오지 않았다.
어라.
- 눈을 떠.
천천히, 눈을 뜬다. 눈 앞은 어두웠지만 물이 들어오지는 않았다. 숨을 뱉는다. 숨이 쉬어졌다. 주변을 둘러본다. 하루는 여전히 물에 가라앉고 있었다. 뭔가 물 같지는 않은 것이 하루를 감싸고 있을 뿐이었다. 공기와 거의 유사했지만 하루는 이게 공기가 아니라고 직감했다. 일단 이게 정말 공기방울이면 물에 가라앉을 리가 없으니까. 그럼 왜 숨이 쉬어지지?
- 숨이 뭔지 알아?
무슨 말이야?
분명히 소리를 내서 말했다. 그런데 제 귀에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목소리가 웃었다.
- 네 생각이 맞아. 이건 공기가 아니야. 너는 숨을 쉬고 있는 것도 아니지.
그게 무슨 소리야, 대체.
하루가 조금 짜증스레 말했다.
- 숨은 생명이야. 살아있는 것은 모두 각자의 숨을 가지고 있어. 물에도 흙에도 자기만의 숨이 있단다.
그게 뭐야. 그럼 내가 죽었단 거야?
- 그런 셈이지.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소리 내어 웃었다.
- 내 이름은 죽음이야. 반가워. 은 하루.
그 말과 함께 사방이 돌에서 뻗어나온 어둠으로 물들었다.
제 손과 발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카만 어둠이었다. 하루는 손에 쥐고 있던 돌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촉감으로만 확인한 돌은 분명 그 자리에 있었지만, 뭐랄까, 느낌이 좀 달랐다. 숨결이 느껴진다고 해야할까. 그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그 생각이 맞아.”
죽음이 말했다. 목소리가 희미하게 울렸다. 커다란 동굴 안에 있는 것 같은 소리였다.
“나는 지금 숨을 쉬고 있어. 오직 이곳에서만 가능한 일이지.”
“숨을 쉬는 건 살아있다는 뜻이라고 하지 않았어?”
하루가 물었다.
“맞아. 나는 살아있지.”
“근데 왜 죽음이야?”
후후.
“그건 이 곳이 곧 죽음이기 때문이지.”
하루가 눈살을 찌푸렸다.
“짜증내지 마. 설명해줄게.”
죽음의 이야기는 이랬다.

태초에 삶과 죽음이 있었다.
삶은 늘 넘치는 숨으로 가득했다. 그래서 그것을 모두에게 나누어 주었다. 숨을 얻은 생명들은 날고 뛰며 치열하게 살아갔다. 숨이 있는 곳은 어디나 전쟁터였다.
죽음은 늘 숨이 모자랐다. 모두가 뱉은 숨을 받아먹었지만 죽음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죽음은 다른 생명이 가진 숨을 탐낸 나머지 곧잘 그들이 가진 숨을 모조리 빨아먹었다. 가진 숨을 모두 빼앗긴 생명은 빠르게 무너졌다. 그들이 구가하던 치열한 삶도, 숨을 받아마실 몸뚱어리도 모두 무너졌다.
생명들은 죽음을 두려워했다. 숨을 빼앗긴 뒤의 변화가 그만큼 급격했기 때문이고, 더는 치열하지 않게 된 자신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줄을 타는 생활은 불안했다. 이에 생명들은 삶에게, 정확히는 다양한 모양을 가진 삶의 대리인들에게 죽음을 물리쳐달라고 빌었다.
여러 대리인을 통해 더는 죽음에게서 달아나는 삶을 살고 싶지 않다는 소망을 전달받은 삶은 고민했다. 삶과 죽음은 사이가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딱히 나쁘지도 않았다. 삶에게는 숨이 넘치게 많았으므로 죽음이 숨을 좀 탐한다고 하여 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생명에게 숨은 하나였고, 그들이 죽음을 두려워한다고 하여 가여워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삶은 죽음과 대화를 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성사된 적 없는 대담이었다.
< 죽음이여. 나의 오랜 동족이여. >
< 삶이여. 나의 오랜 형제여. >
<< 우리가 이렇게 한 자리에 모였으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
삶과 죽음은 처음으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리고 서로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깨달았다. 둘은 서로를 끌어안았다. 수없이 숨이 교차했다. 뿜어내고 빨아들이는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마치 폭탄이 터지는 것 같았다. 아니 폭발이었다. 거대한 세상의 시작이었다.
그 후로는 어떤 생명도 삶과 죽음을 볼 수 없었다.
“정확히는 너무 잘게 흩어져서 누구도 그들을 알아볼 수 없었지.”
죽음이 나른하게 말했다.
“이곳은 죽음의 조각 중 하나야. 나는 그 속에 남은 삶의 씨앗이지.”
“씨앗?”
하루가 물었다.
“그래, 씨앗. 살아있기는 한데 아직 삶의 모양은 갖출 수 없는 발아하지 못한 씨앗이야. 숨은 충만하지만 몸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라고 할까.”
이런 씨앗이 지구 곳곳에 숨어있다고 죽음은 말했다.
“삶과 죽음이 서로 뒤섞일 때 떨어져나온 조각이 모두 나같은 형태인 건 아니야. 반대인 곳도 있고 섞여있지 않은 것도 있어. 그런 경우는 보통 티가 나니까 대부분은 알려져.”
자기처럼 애매하게 삶과 죽음이 균형을 이루는 경우는 많지 않다고 죽음이 말했다.
“그럼 너는 죽음이 아니네?”
“눈치챘구나. 맞아. 나는 삶이야. 정확히는 삶 쪽의 조각이지. 그래도 크게 다르지는 않아. 애초에 삶과 죽음은 쌍둥이처럼 닮았기도 하고, 나는 죽음과 거의 한 몸이니까.”
“그럼 너를 뭐라고 불러야할까?”
“편할 대로 해. 죽음이라고 불러도 좋고 삶이라고 불러도 좋아.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흠. 하루는 신음했다.
“그건 그렇다치고. 할 이야기는 이게 다야?”
돌멩이를 흔든다. 혹시 목소리라도 흔들릴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아니. 이제 시작이야.”
죽음 혹은 삶이 흔들림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은아는 곧장 하루가 빠진 곳으로 향했다. 그곳이 어디인지 아무리 물이 흐르고 위치가 변해도 은아는 알 수 있었다. 문제는 하루가 어디있느냐는 것이다. 물 속에 빠지는 것을 눈으로 보고 어딘지 가늠까지 했는데 물에 빠진 순간부터 줄곧 하루가 어딨는지 느껴지지가 않았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존심이 상했다. 자신이 물 속에 있는 것에 대해 모른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혹시나 싶어 이곳저곳 수소문해보았지만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몰랐다. 물속에 깃든 영 중 아무도 하루의 위치를 몰랐다.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 그보다 들어봐.
그들이 말했다. 그들은 늘 이랬다. 인간의 사정 따위는 알 바 아니라는 듯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기에 바빴다. 누군가는 은아에게 정령의 축복을 받았다고 하지만, 은아는 수다쟁이 친척들이 잔뜩 있는 집의 아이와 자신이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 아까 무서운 게 들어왔어. 봤어?
순간 귀가 확 트였다. 온갖 소음 속에서 그 목소리를 찾아 매달렸다.
“어디서? 어디서 봤어?”
- 여기서. 여기서 봤어.
목소리의 주인이 까르르 웃었다. 은아가 제게 말을 걸어준 게 기뻐서였다.
- 아래로 쭉 떨어졌어.
- 아까부터 쭉 아래로 떨어져.
- 엄청 빠르게 떨어지고 있어.
- 언제까지 떨어지는 걸까?
- 돌아오기는 하는 걸까?
- 다시는 안 왔으면 좋겠다.
그치? 그치. 하고 서로 주고받는다. 재잘대는 소리들이 한꺼번에 귀로 밀려왔지만 은아는 능숙하게 그 속에서 필요한 정보를 걸러냈다. 이 아래로 쭉 떨어졌다. 물 속에 빠진 사람이라고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떨어지고 있다. 그 돌 때문이다.
이런 일이 일어날 걸 예상해야 했다. 은아는 이를 악물었다. 조마조마한 마음은 있었지만 설마 사고가 날까 싶었다. 아무리 마을 일이 급하다고 해도 사람을 죽일 수는 없었다. 은아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구해야 한다. 이 순간까지도 멍청하게 돌멩이를 꽉 쥐고 있는 저 순진한 아이를. 제 손으로 사지로 밀어넣은 생명을 구해야 했다. 은아는 몸을 돌려 거의 일직선으로 바다 밑바닥을 향해 헤엄쳐갔다. 베일듯이 날카로운 수영이었다.

죽음 혹은 삶은 말했다.
“네 몸을 빌리고 싶어.”
하루가 대답했다.
“싫어.”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었다.
“아, 좀!”
“아, 싫다고!”
벌써 몇 번째 주고받은 공방이었다. 둘 다 물러섬이 없었다. 죽음 혹은 삶이 땡깡부리는 어린아이처럼 볼멘소리를 냈다.
“네 몸을 함부로 움직이거나 하는 게 아니라니까? 그냥 같이 다니자고. 네 몸에 깃들게만 해줘.”
“싫어. 그래놓고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하루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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