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랍이라 오타 검수 안함.






 수업은 기어코 점심시간을 훌쩍 넘기고서야 끝이 났다. 학생들이 앓는 소리를 하며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텅 빈 강의실에 혼자 남은 마리는 멍하니 앉아 다음 스케줄을 생각했다. 수업은 이걸로 끝이지만 하루 일정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지금이 오후 한시 반이니까 세시까지 식사를 하고 이동해야한다. 사무실은 학교에서 멀지 않았지만, 수업이 늦게 끝나는 바람에 시간이 빠듯해졌다. 당장 달려나가도 식당에서 제대로 식사를 할 수 있을까? 샌드위치나 김밥을 사서 당장 버스를 타면 겨우 숨 돌릴 틈이 남겠지.

 마리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저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이렇게 있으면 안 된다고 어서 일어나라고 외치는 마음 속 목소리와 기운이 없으니 조금만 더 여유를 가지자고 칭얼거리는 몸의 어리광이 맹렬하게 맞부딪혔다. 아무리 현실이 고달프더라도 타협하느니 죽겠다고 다짐한 마리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것만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타고난 지병으로 오랜 투병 세월을 보낸 마리가 스무해를 살아오며 체득한 것은 그뿐이었다. 그 어떤 위대한 뜻도 신체의 저항을 이겨낼 수는 없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짧은 경험을 통해 체득한 것이 세상의 진실은 아니다. 마리는 자신의 꿈이 그렇게 쉽게 좌절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공부를 통해 배웠다. 비록 마리가 지식을 얻은 경로 역시 마리가 타파해야할 부조리일지라도 말이다.

 하아.

 인간이라는 소음 발생기가 싹 치워진 강의실에서는 희미한 한숨 소리도 존재감이 남는다. 마리는 제 한숨을 신호탄 삼아 몸을 일으켰다. 쓰레기 같은 음식으로 연명하는 하루하루는 고단하기 짝이 없었다. 우스운 건 몸이 약한 마리가 제 몸을 망치지 않는 범위에서 벌 수 있는 금액이란 그런 음식으로 하루를 떼우기에도 모자라다는 점이다.

 몸 상태에 주의하며 느릿느릿 일어나는 마리의 시야에 이질적인 것이 잡혔다. 백색조 석조 바닥에 마치 눈에 띄라고 일부러 고른 것처럼 검은 물건이 놓여 있었다. 마리가 평소 남이 두고 간 물건까지 꼬박꼬박 챙겨줄 정도로 인정 많은 사람은 아니지만, 모른 척 넘어가기에는 다소 중요한 것이었다.

 ‘그 사람 거네.’

 마리는 곱게 무두질된 진짜 가죽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놀랍게도 마리가 주인을 아는 물건이었다. 전공이 다르고 수업도 거의 겹치지 않지만, 기억하고 있는 얼굴이 지갑 속에서 튀어나왔다. 꽤 근사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게 오히려 기분 나빴던 미쿠니 히사오미였다.

 미쿠니의 희고 깨끗한 피부, 매끈한 얼굴과 곧은 자세, 남성미가 느껴지는 세련된 향수 냄새까지 그에게 호감을 가지게 만드는 요소를 발견할 때마다 마리는 불쾌해졌다. 미쿠니는 본가에서 매순간 느껴야만 했던, 느낄 수 밖에 없었던 자본과 착취의 흔적을 덕지덕지 두르고 있었다. 자기혐오와 불합리한 세상에 대한 분노로 제 몸을 깎아먹는 일임을 알면서도 안락을 버리고 자유를 택한 마리에게 미쿠니는 존재만으로 물리쳐야할 악이나 다름없었다.

 증오는 때로 사랑보다 강렬하다. 항상 사람에 둘러싸인 미쿠니를 먼 발치에서 스치면서 마리는 학교에서 만난 누구보다도 미쿠니를 잘 알게 되었다. 미쿠니가가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지, 미쿠니의 아버지가 어떤 사업을 하는지, 그 집안이 정치적으로 얼마나 강한 입김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보지 않으려고 해도 눈에 뜨였고, 듣지 않으려고 해도 소문이 들렸다. 그리고 이 지갑은 마리가 갓 입학했을 무렵부터 그가 쓰던 것이었다.

 마리는 무심히 지갑을 주워 가방에 넣었다. 다른 마음은 없었다. 미쿠니에게 돌려줘야하니까 챙긴 것뿐이다. 바로 지갑을 두고 갔다는 걸 깨닫고 돌아올 시간은 이미 지났고, 지폐로 빵빵한 지갑을 사람 없는 강의실에 두고 가기엔 불안했다. 마리만해도 빽빽한 종이뭉치를 보며 이번 주까지 내야하는 공과금을 떠올렸을 정도니 다른 사람은 오죽할까. 마리는 인류의 희망찬 미래를 믿었지만, 인간 개인의 성실성에 기대 일을 그르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먹을 걸 사서 출근하는 길에 경찰서에 지갑을 맡기기로 하고 강의실을 나설 때까지는. 마리는 가난을 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싸구려 음식조차 없어서 급여일을 앞두고 물로만 연명할 때도, 전기가 끊겨 책을 읽기 위해 집 근처 마트 불빛에 의지해야했을 때도, 심지어 고된 생활로 거의 잊고 있던 지병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도 그랬다. 어떤 생활고도 마리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고, 마리는 그게 자신의 가장 큰 재산이라는 걸 알았다.

 “아케미 씨, 잠깐만요.”

 “네?”

 학교를 빠져나가는 마리를 조교가 붙들었다. 마리는 시간에 맞추려면 점심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다. 가는 길은 삼십분 정도였지만 중간에 버스를 갈아타야하는데다 교통이 불안해 버스가 제때 온다고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환승 정류장 근처에 음식을 파는 곳이 있으면 좋겠지만, 도로 한복판이었다.

 “행정실에서 전화가 왔어요. 내일까지 꼭 들르라던데요.”

 조교는 마리를 벽으로 끌어당기더니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렸다. 마리는 파리한 안색을 하고 있었다.

 “어제도 왔었는데 아케미 씨 항상 금방 가버리니까 전해줄 수가 없었어요. 이제는 정말 마지막이라고 내일까지 꼭 오래요.”

 그러고보니 바쁘다는 핑계로 며칠째 우편함을 확인하지 못했다. 들어찬 종이뭉치를 대충 서랍장에 던져놓고 잊어버렸는데 거기 학교에서 보낸 우편물이 섞여있었던 모양이다. 마리는 아찔한 감각을 견뎌냈다.

 “괜찮아요?”

 조교가 걱정스레 물었다. 마리는 정신을 수습했다.

 “괜찮아요. 알려줘서 고마워요.”

 딱딱하게 짧은 대답만을 남기고 마리는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등뒤로 조교가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마리는 점심을 포기하고 회사로 달려갔다. 버스가 제시간에 도착해서 지각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규 출근시각보다 이르게 도착한 덕분에 한숨 돌릴 여유가 생겼다. 그러나 마리는 지친 몸을 잠시 쉬게 해주기보다는 곧장 사장실로 달려가는 쪽을 택했다.

 “부탁드립니다.”

 다짜고짜 그렇게 말하며 허리를 숙인 마리를 앞에 두고 사장은 곤란한 듯 한숨지었다.

 “갑자기 그런 부탁을 해도 곤란해.”

 어차피 이판사판이니 억지로라도 고집을 피워보는 수밖에 없다. 마리는 사장이 승낙하기 전에는 고개를 들지 않을 셈이었다.

 영세 출판사에서 급여를 가불하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은 일임은 잘 알고 있었다. 마리가 일하는 출판사는 임금과 상품 양쪽 면에서 양심이 있는 회사였다. 좋은 상품을 제공하고 직원들이 보다 편안하게 일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노력하는 사장은 인간적으로 존경할만한 사람이었다. 좋은 우두머리 아래에 모인 사람들은 다들 뜻이 있는 사람들이었고, 마리는 여기서 긴 세월을 기약할만한 친구를 몇 만들었다.

 인물됨은 인적 자산을 끌어모으나 물적 재산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회사는 항상 자금 사정이 빠듯하고 살림에 여유가 없었다.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부탁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지만, 지금은 도리가 없었다. 마리는 염치불구하고 고개를 숙이며 마음 속으로 칼을 갈았다.




 




이건 삭제 분량





 마리가 일하는 사무실은 영세한 규모의 출판사였다. 번역일을 받아하는 동시에 사무보조를 겸하고 있었는데 비교적 일이 편하고 즐거운 대신 급여는 얼마 되지 않았다. 겨우 식비를 해결하고 나면 남은 게 없어서 옷도 사입을 수 없었지만, 마리는 그걸로 좋았다. 좋은 집과 옷을 탐냈다면 법적 성인이 되자마자 양친의 집을 뛰쳐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리가 원한 건 오로지 자치권과 악랄한 자본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부모인 아케미 부부는 부유한 사업가여서 마리는 모자람을 모르고 자랐다. 심장에 병을 타고난 탓에 어릴 때부터 병원을 집처럼 드나든 마리의 병수발을 들면서도 가족 모두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지고 즐기고 싶은 것을 즐기지 못할 때가 없었다. 아케미가의 사업은 위기조차 없이 순조롭게 성장해 이제는 일본 굴지의 대기업이 되었으니 마리가 얌전히 집에 붙어있기만 했다면 이렇게 엉뚱한 곳에서 값싸게 부려질 일은 없었다.

 그러나 마리는 집을 뛰쳐나왔다. 모든 것이 보장된 삶이었다. 부모님의 심기를 크게 거스르지만 않아도 평생을 편안하게 살 수 있었다. 가난의 고달픔도 깎여나가는 신체도 두렵지 않았다. 어차피 오래 살지 못할 몸이라면 정신만큼은 오염되지 않곘노라고 맹세했다. 돈으로 산 안락에서는 돼지 지린내가 났다.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자본이 어떻게 형성되어 누구에게 얼마나 분배되는지. 그 과정에서 몇 명이나 부당한 피해를 당하는지. 그게 가진 자에게 어느 정도의 이익으로 돌아오는지. 마치 내 일처럼 알고 있었다. 사장인 어머니는 호탕한 성격이라 그런 걸 자식들에게 숨기는 성격이 아니었다. 자세한 회사 일을 알려주지는 않았지만, 총명한 마리는 걸려오는 전화와 부모님간의 대화만으로도 많은 걸 짐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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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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