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카 타입 자캐 커미션입니다

1편

2편

3편






 유하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뭐라 말을 걸어볼 여유도 없이 음식이 나왔다. 회전율이 좋은 가게답게 입가심을 위한 전채 요리는 거의 대기시간이 없었다. 정성스럽게 플레이팅된 핑거푸드는 작품처럼 예뻤고 다시마 말이와 연어가 들어간 월남쌈은 비린내 없이 담백했다. 괜찮은 음식점이었다. 유하가 간단히 코스 설명을 대신했다. 메인 요리를 해치우기까지 우리는 거의 대화하지 않았다. 평소에도 유하는 식사 중에 말이 없는 편이었다. 광어 캐비어, 샐러드, 밤으로 만든 수프, 흑마늘 갈비찜과 봄나물로 만든 김치, 송로버섯이 들어간 대보름 밥으로 이어지는 코스가 차례차례 지나갔다. 맛있는 음식을 먹다 보니 불편한 기분도 차츰 나아졌다.

 차츰 배가 불러오자 대화의 물꼬가 트였다. 유하는 내 섣부른 고백과 사과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대화는 평소와 다름이 없어서 나는 완전히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디저트가 나왔을 때쯤에는 아까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거의 잊어버렸을 정도였다.

 “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잠시 소재가 떨어져 이야기가 멈춘 사이, 유하는 뜬금없이 그렇게 말했다. 상황을 잊어가던 나는 깜짝 놀랐지만, 유하는 담담하기만 했다.

 “연우 씨가 제게 사랑한다고 한 게 무슨 의미인지, 방금 한 사과가 무엇인지 솔직히 모르겠어요.”

 머릿속이 하얗게 비는 느낌이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까.

 “가족으로서 정을 말씀하신 게 아니라면, 저는 남자입니다. 연우 씨도 마찬가지고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목적이 있어서 그런 말을 하실 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유하는 시선을 내려 테이블을 보았다. 일반적으로 예쁘고 귀엽게 꾸며지는 디저트와 달리 시커먼 덩어리가 있다. 접시를 들고 온 점원이 으깬 고구마에 팥앙금을 묻힌 거라고 설명한 음식이었다. 유하는 자기 잔에 차게 식힌 오미자차로 입술을 적혔다.

 “더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그 말에 나는 제일 먼저 안도하고 말았다. 저 입에서 남자라는 말이 나왔을 때, 부드러운 거절이라고 확신하고 있던 탓이었다. 유하는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었다. 어쩌면 나는 현명한 판단을 했던지도 몰랐다. 시간은 걸렸지만, 이 정도로 부드러운 말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래. 급하게 생각하지 마.”

 나는 바로 상황을 마무리 지었다. 유하는 내 눈을 들여다보았고, 나 역시 그랬다. 우리는 말 없이 서로의 심정을 눈에서 읽었다. 곧 유하가 나직하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나는 괜찮다고 답했다.

 그대로 일어나기엔 아직 남은 음식이 있어 우리는 테이블에서 시간을 더 보내야 했다. 대화는 일상으로 옮겨갔고, 자연스럽게 연아와 세하 이야기가 나왔다. 결과적으로 유하와 나를 이어준 두 사람이었다. 내 동생 지연아와 유하의 쌍둥이 동생 임세하는 대학 진학 후 각자 집에서 독립해 동거 중이었는데, 동생 걱정이 많은 형이기는 나나 유하나 마찬가지라 우리 대화에 두 사람이 빠지는 일은 드물었다. 유하가 정기적으로 들러 상황을 봐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으면 허락하지도 않았을 동거였다.

 연아는 독립심이 어찌나 강한지 가족끼리 만나도 자기 이야기는 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유하에게 많은 부분을 의탁하고 있었다. 유하와 세하가 어떤 사인지는 모르지만, 유하가 그 집에 자주 들르는 건 확실했다. 어떤 면으로는 연아와 한집에 살 때보다 유하에게서 듣는 연아 이야기가 더 많은 것 같기도 했다. 유하는 연아가 좋아하는 음식, 싫어하는 음식, 잠버릇과 좋아하는 색과 음악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일부는 나도 알고 있었지만,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유하가 나도 모르는 사실을 알아오는 건 놀라웠다.

 유하는 아무리 바쁜 와중에도 항상 두 사람의 집에 들렀다. 집안일을 돕고 생활편의를 챙기는 모양이었다. 가끔 만난 세하가 불평하는 걸 들어보면 굉장히 세심한 부분에까지 유하의 손길이 닿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게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나 회복 중인 연아를 위해 따로 음식이나 한약을 챙겼다. 과한 참견이 아닌가 싶으면서도 마음이 고마웠다.

 오늘도 유하는 연아가 동아리에 가입했으며 성실하게 참가하고 있다는 완전히 새로운 소식을 가져왔다. 한 달은 지난 일이란다. 유하는 내가 모르는 쪽을 신기해했다. 연아는 정말로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연아는 회화동아리에 들어가 처음으로 그림을 배우며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하는 행위에 사로잡혀있었다. 나는 조만간 연아에게 좋은 그림 도구를 선물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유하가 계산을 하는 사이 나는 먼저 밖에 나와 기다렸다. 저녁이 다 된 길거리에는 사람이 많아졌다. 공간이 없어 사람과 자주 부딪혔다. 유하와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반소매 아래로 맨살이 닿을 때마다 끈적한 느낌이 들었다. 괜히 유하 표정을 살폈다. 특별히 불쾌한 기색은 없었다.

 스쳐 가는 간판에는 하나둘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지만, 우리는 이르게 거리를 빠져나왔다. 유하는 음주를 전혀 하지 않아서 시간이 늦으면 갈 곳이 없었다. 일자리에서 어쩔 수 없이 입에 대는 것 외에는 식사에 곁들이는 와인도 거의 하지 않았다. 다음날을 위해 이르게 헤어지거나 집에 들어가서 담소를 나누다 헤어지는 게 통이었다.

 주차장 입구 간판에도 불이 들어왔고 자리는 꽉 차서 만석이었지만 사람은 없었다. 우리는 바로 차를 찾았다. 서로 들어온 위치와 앉을 좌석이 맞지 않아서 자리를 바꿨다. 안전띠를 매는 동안 다시 한번 팔뚝이 스쳤다. 유하가 닿은 쪽 팔을 자기 쪽으로 당겼다. 의식한 동작인지 의식하지 않은 동작인지 알 수 없었다. 유하는 평소처럼 무덤덤한 표정이었고, 나는 굳어버렸다.

 차 키를 꽂고 시동을 걸 때까지 나쁜 생각에 사로잡혔다. 완곡한 불쾌함의 표현인지 자연스러운 동작인지 알 수 없었고, 여름철 무더위로 인한 불쾌함인지 나와 살이 닿은 것에 대한 불쾌함인지도 알 수 없었다. 유하는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너무 의식하고 있는 거라고 자신을 타일렀다. 나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거의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내가 조용하니 유하도 말이 없어서 귀갓길은 아주 조용했다. 우리는 짧은 인사로 만남을 끝냈다. 나는 올라가다 말고 서서 유하가 탄 차가 골목을 빠져나갈 때까지 뒤를 지켜보았다.

 근 반년이 지났다. 유하와 나는 그 이후로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했다. 유하가 바쁘기도 했고, 나 역시 공부에 매진해야 할 때였다. 게다가 내가 마음이 불편해서 만나자고 하기가 힘들었다. 유하도 만나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연락은 꾸준히 주고받았다.

 󰡔오늘 애들 보러 가요󰡕

 󰡔안부 전해줘. 특히 세하한테. 연아 울리면 각오하라고󰡕

 󰡔그럴게요󰡕

 유하의 메시지는 담백하다. 잡담을 거의 하지 않았다. 사진이나 일상 이야기도 없어서 평소에는 거의 내가 먼저 보낸 메시지로 대화가 시작되었다. 하루에서 이틀 간격으로 갱신되던 메시지가 일주일에서 한 달 간격으로 변한 것은 반년쯤 전부터였다.

 나는 아직도 어떻게 행동할지 결정하지 못했고, 유하는 말이 없었다. 나는 나대로 공부에 매달리고 유하는 회사 일로 바빴다. 유하는 한가할 때가 별로 없었다.

 덕분에 충실한 하반기를 보내며 나는 생각보다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순조롭게 챕터를 넘어가며 가끔 아버지 회사에 들러 일을 도왔다. 돈이 필요했다. 일하면 할수록 서둘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내 소유가 될 회사, 넘겨받을 때가 되었다.

 며칠 전 연아에게서 메시지를 받았다. 정기적으로 만나 함께 저녁을 먹는 날이었다. 나는 졸음에 취한 상태로 스마트폰을 들었다. 연말이 가까우니 저녁을 취소하고 조만간 다 같이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미리 써놓고 아침에 맞춰 보낸 예약 문자 같았다. 뺀질거리며 웃는 세하의 얼굴이 떠올라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 연아를 차지한 건 물론이요, 만만치 않은 성격도 있어 예뻐하기 힘든 녀석이었다. 나는 콧방귀를 한 번 뀌고 수긍하는 답변을 보냈다. 연아가 곧 날짜와 함께 집으로 찾아오라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미리 정해놓고 인제야 통보하는 티가 났다. 유하는 참석하지 않냐고 물었더니 일이 있어 늦을 예정이란다. 그 말은 유하에게도 먼저 말을 했다는 소리다. 연아가 가장 먼저 말을 꺼낸 게 나라니 기분이 상했다. 그래도 티는 내지 않고 알았다고 답했다.

 세하와 연아의 집으로 향하기 전에 먼저 이맘때쯤 만나면 교환하는 연말 선물을 챙겼다. 연아 선물을 최우선으로 고르고, 유하와 세하 선물도 골랐다. 연아 것은 붓 세트, 유하에겐 커프스단추와 넥타이, 세하를 위해선 전부터 고민하던 새 마이크를 샀다. 거기에 먹고 마실 걸 사니 짐이 제법 많았다. 나는 차를 탈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어서 와.”

 내가 마련해준 맨션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누르자 연아가 나왔다. 나는 연아에게 음식이 짐을 떠넘겼고, 연아는 물건을 들고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에서 보이는 실내는 하얀 톤으로 깨끗한 느낌이 강하게 드는 민무늬 벽이었다. 벽지를 선택한 건 연아였다. 처음 봤을 때부터 쭉 병실 같다고 생각했지만, 연아에게 그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물었다. 연아가 좋으면 됐지 병실 같은 게 무슨 상관일까.

 “뭘 이렇게 가져왔어.”

 세하가 내가 가져온 간식과 주류를 들고 말했다. 시선이 백 안에 고정된 걸 보니 반가우면서 하는 소리였다. 나는 세하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함께 사는 멘션은 적당한 개조를 거쳐 현관에서는 집안이 보이지 않는 구조로 되어있었다. 두어 발짝 안으로 들어갔을 뿐인데 시야가 탁 트였다. 전체적으로 하얀 색조에 가구가 적어 남는 공간이 많은 집이었다. 그래도 가구는 전보다 늘었다.

 한쪽 구석에 창을 등지고 서 있는 건 누가 어느 모로 보나 명백한 캔버스였다. 연아가 그림을 배운 뒤로 들여놓은 물건이었다. 위가 천으로 덮여 있어 뭘 그리다 말았는지는 보이지 않았고, 옆에는 그림 도구가 가지런히 정리된 서랍장이 있었다. 거기서 연아의 행복이 느껴졌다.

 책장도 몇 개 늘어났는데 책장마다 책이 꽉꽉 채워져 있었다. 두꺼운 전공 서적이 반, 취미 삼아 모아놓은 것 같은 책과 CD가 반이었다. 제목을 훑고 헤드폰이 같이 걸려있는 걸 확인했다면 이게 세하의 물건이라는 걸 놓칠 수가 없었다.

 입구 근처, 현관을 열지 않으면 아예 보이지 않는 사각에 들어간 부엌에는 사람을 불러 시킨 게 분명한 음식이 예쁜 무늬가 수 놓인 덮개에 가려져 있었다. 매년 비슷한 행사를 거치니 다들 요령이 생기고 있었다.

 집안을 대충 살피고 거실로 향하자 연아와 세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연아는 세하에게 허리를 붙들려 몸을 밀착한 채로 속삭이듯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자세가 더할 나위 없이 자연스러워서 머리가 아팠다.

 “피곤하진 않아?”

 “아무것도 안 했잖아.”

 “그래도 힘들면 말해.”

 “응.”

 연아와 달리 세하는 가까이 다가온 나를 한 번 쳐다보았다. 씩 웃으며 연아에게 입을 맞추는 게 얄미웠다. 솜털 같은 키스였지만, 입술에 남기는 입맞춤이 이성간 교제의 말하는 건 명백했다. 화가 나고 동시에 우스웠다. 어이가 없어 웃어버리니 세하는 곧 포옹을 풀었다. 연아는 조금 느리게 세하의 몸에서 떨어져나왔다. 아쉬운 듯한 동작이었다.

 “요즘 어때. 유하랑 안 만난다며.”

 세하가 말했다. 나를 의식하긴 하고 있었나 보다.

 “유하가 바쁘잖아. 나는 공부하니까.”

 “시험은?”

 “아슬아슬하게 과락. 올해는 분위기 볼 겸 본 거니까 내년에 잘해야지.”

 세하와 잠깐 밀린 이야길 나누는 사이 연아가 쟁반에 물과 쌀과자를 담아왔다. 당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담백한 과자에 꽃봉오리 같은 찻잔에 물을 마시며 우리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림은 할 만해?”

 내가 물었다. 그러고 보면 연아가 자기 입으로 그림 그리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벌써 반년이 넘게 그리고 있으면서 한마디도 제대로 해주지 않는 게 서운했다.

 “재밌어. 이런 게 재밌을 줄 몰랐어.”

 연아는 천으로 덮어놓은 캔버스를 바라보았다.

 “요즘은 정말 그럴듯해. 성적도 괜찮고.”

 “전공 바꿔보는 건 어때? 하고 싶으면 해도 돼.”

 “그 정도는 아냐. 취미 생활 정도가 좋아.”

 허락을 구하고 캔버스를 열어보자 거기엔 풍경화가 있었다. 어디인지 모를 쓸쓸한 들판이었다. 사람도 나무도 동물도 없고 잔디와 땅에서 흔들리는 빛나는 풀꽃만 빛나는 밤 들판. 땅에서 오른 솜뭉치 같은 빛이 하늘의 별이 되고 있었다. 존재하지 않는 적막에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어디야?”

 연아는 고개를 저었다. 실제로 있는 풍경이 아니었다. 사진 모작으로 시작한 연아의 풍경화는 상상 속의 풍경을 그려내는 단계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매진했다고 하나 겨우 반년. 연아에게 그림의 재능이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내가 말을 잃은 사이 세하와 연아는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연아가 그리는 풍경을 놓고 몇 번이나 한 것 같은 대화였다.

 “여행 가자. 가서 보고 그리는 거야.”

 “괜찮아.”

 “가보고 싶은 곳 없어?”

 연아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연아와 변변찮게 놀러 가본 적이 없었다. 어릴 적에는 너무 어려서 멀리 나갈 수 없었고, 나이를 먹은 뒤로는 서먹해졌다. 같이 여행을 가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려면 다 같이 가야지. 둘이선 안 돼.”

 “요즘 세상에 누가 보호자랑 여행을 가.”

 “내가.”

 “괜찮은데…….”

 세하와 둘이서 여행을 둘이 보내느냐 다 같이 가느냐로 말다툼하는 사이, 현관 벨이 울렸다. 말없이 앉아있던 연아가 가장 먼저 일어났지만, 세하가 연아를 막았다. 세하가 유하를 마중 나가면서 소소한 다툼도 일단락이 났다.

 “늦는다더니?”

 “금방 끝났어.”

 세하가 유하의 가방을 들고 들어왔다. 가방만 봐도 유하가 회사에 들렀다가 바로 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유하는 정장 차림에 머리를 깔끔하게 넘긴 모습으로 나타났다. 세하는 유하의 가방을 한쪽에 내려놓고 식탁 위에 덮어두었던 천을 걷었다. 유하가 옷을 갈아입는 사이 우리는 식탁에 둘러앉았다.

 연말의 시작이었다.

 네 사람이 연말에 자리를 함께하게 된 건 이것으로 세 번째. 연아와 세하가 만난 지는 거의 오 년이 흘렀다. 고마운 일도 원망스러운 일도 있었다. 재작년에 세하를 봤을 때는 몹시 화가 났다. 처음에는 연아를 다치게 만든 게 세하라고 오해했고, 그다음엔 갈 곳 없는 분노를 쏟아낼 곳이 세하 밖에 없었다. 보호자로 자처하고 나선 유하는 가여웠지만, 나는 쉽게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형제와 나 사이의 골은 꽤 깊게 새겨졌다.

 겨우 되찾은 즐거운 연말은 다행히 분위기가 괜찮았다. 오랜만에 만나는 유하와 어색하지는 않을까 염려한 것이 무색했다. 우리는 근사한 와인과 함께 식사를 마치고 거실에 둘러앉아 간식을 먹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가 지겨워지면 게임을 꺼냈고 게임이 지겨우면 영화를 틀었다. 밤이 지나고 태양이 오를 때까지 그렇게 보냈다.

 파티 끝난 건 첫차가 출발하기 한 시간쯤 전이었다. 나와 유하는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새벽에 집을 나섰다. 연아와 세하가 차를 세운 주차장까지 마중을 나왔다.

 “조심해서 들어가. 들어가면 연락하고.”

 “들어가. 갈 테니까.”

 “본격적으로 배워보고 싶으면 꼭 말해. 지원해줄게.”

 “괜찮아.”

 유하가 끌고온 차를 내가 운전했다. 유하는 아직도 와인의 여파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저녁 이후로 술은 전혀 입에 대지 않았는데도 피곤해 보였다. 단순히 그동안의 피로가 터진 여파일 수도 있지만, 유하에게 맡기긴 위험했다. 저번에 얻어먹은 게 있으니 그 대가라며 유하를 뒤로 밀었다. 유하는 뒷자리를 거부하고 조수석에 앉았다.

 유하는 조수석 의자 등받이를 뒤로 기울이고 등을 기대자마자 눈을 감았다. 저렇게 피곤한 얼굴을 하고선 무슨 운전을 하겠다고. 세하와 연아가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시동을 걸었다.

 “저번에 말씀드린 거 있잖아요.”

 유하는 눈을 감은 채 말했다.

 “그 무대 감독 일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유하가 찾아와 털어놓은 사연이었다. 꼭 환심을 사둬야 하는 유명 무대 감독이 자길 건드린다는 이야기. 갑자기 이야기를 꺼내는 연유가 짐작이 갔다.

 차는 부드럽게 굴러 주차장을 나왔다. 나는 큰길을 향해 핸들을 꺾었다. 날은 아직 어슴푸레하고 어두워서 전조등을 켰다. 밝기만 보면 완전히 밤이었다.

 “성희롱으로 고소당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동안 조용했는데 누가 피해자를 모았나 봐요. 수가 꽤 된다네요.”

 유하는 내게 하는 말인지 혼잣말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나직하게 말했다. 평소보다 목소리가 낮았다.

 “그런데 듣자 하니 고소 준비에 들어간 게 올 팔월이라고 하던데요.”

 앞에 보이는 신호가 빨간 등으로 바뀌었다. 나는 고민 끝에 액셀을 밟았다. 좌우에는 사람이 없었고, 이 길은 한 번 신호에 걸리면 벗어날 때까지 쭉 신호에 걸리게 되어있었다. 시야가 시원하게 흘러갔다.

 “타이밍이 안 좋았구나. 너무 속상해하지 마.”

 유하는 잠이 들었는지 말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자라고 말을 아꼈다. 다음 신호등은 파란색이었다.

 “괜찮아요.”

 유하는 그렇게 말하고 집에 도착하기까지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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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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