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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천당문 분가 제자 당소유가 한숨을 포옥 길게도 쉬었다. 옆에 앉아 노닥거리던 분가 제자들이 질색했다. 옆에서 소란을 피우건 말건 소유는 그저 침울한 표정이다. 보다 못한 랑랑이 소유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재수 없게 뭐하는 거야. 날도 좋은데. 무슨 일 있어?”

 “랑랑, 유 소저는 왜 아녀자인 걸까?”

 밑도 끝도 없는 한탄이었다. 랑랑은 다급히 소유의 입을 틀어막았다. 누가 들었을까 무섭다.

 “얘가 무슨 소리야. 손님한테 그렇게 함부로 말하면 어째?”

 소유가 랑랑의 손을 찰싹 소리나게 때렸다. 따끔한 통증에도 아랑곳 없이 랑랑은 소유를 호당전으로 이끌었다. 소유가 손을 깨물고자 덤볐다. 순식간에 두 합을 주고받고 거리를 벌렸다. 지나가던 간청관 관리가 방을 어지르지 말라고 한소리했다. 소유는 입을 댓 발 내밀고 투덜거렸다.

 “생각해봐.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정명하고 곧은 기개며 드높은 무공 실력. 최소한 례화 아가씨랑 동급이거나 그 이상이 틀림없어. 우리 아가씨 실력이 보통 대단한 게 아니지만 기백부터가 다르잖아? 아, 유 소저가 사내기만 했더라면.”

 “했더라면? 유 소저에게 청혼이라도 하려고?”

 “바보야. 례화 아가씨랑 혼인할 수가 있잖아.”

 소유의 손이 랑랑의 어깨로 쇄도했다. 랑랑은 한 손을 들어 소유의 손을 가볍게 흘리고 역으로 소유의 정수리를 후려쳤다. 소유는 맨손으로 펼쳐지는 회천당문의 절초를 가볍게 잡아챘다. 분가의 자식이라도 회천당문의 제자. 두 사람이 장난처럼 주고받은 손짓에는 당가 무술의 요체가 담겨있었다.

 “대체 례화 아가씨가 왜 유 소저와 결혼하냔 말이야. 두 사람이 유랑 중에 눈이라도 맞았대?”

 “네가 두 분이 얘기 나누는 걸 못 봐서 그런다. 어찌나 다정한지 옆에 있기가 민망할 정도란다. 례화 아가씨 눈에서 꿀이 떨어지더구나.”

 “에엑?”

 소유는 랑랑의 손을 밀치고 휘적휘적 방으로 들어갔다. 적당히 주저앉아 다시 긴 한숨을 폭 내쉰다. 랑랑이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을 하곤 쫓아 들어왔다.

 “그게 무슨 소리야. 자세히 좀 얘기해봐.”

 “너 두분이 서로를 별명으로 부른다는 거 알고 있니?”

 “별명?”

 “례화 아가씨는 유 소저를 연랑, 유 소저는 아가씨더러 화매라 부른단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때부터 어찌나 좋아 죽던지. 내 간질간질해서 죽는 줄 알았다.”

 랑랑은 움찔움찔 솟아오르는 입꼬리를 간신히 붙들었다. 세상에. 이렇게 재밌는 소식이 있었다니. 소유 요 녀석은 아가씨 따라 나갔다 온 지가 언젠데 이제야 이걸 불어? 당장이라도 달려가 친구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좀 더 이야기를 들어두지 않으면 곤란했다. 어디서 어떻게 만나서 그렇게 되었는지를 들어두어야지! 어라, 그런데 유 소저는 소저인데 괜찮으려나?

 “착각한 게 아니냐? 아가씨가 예쁜 애들 좋아하는 게 하루이틀 일도 아니잖아. 예쁜 소녀만 보면 데려다 먹이고 입히고 예뻐하지 않았어. 이번에도 그런 거겠지.”

 “아유, 말을 마라. 아무렴 그걸 헷갈리려고. 이래뵈도 아가씨 호위로 따라다닌 게 십년이야. 어느모로 보나 확실한데 도무지 반길 수가 없는 소식이라 이 말이다.”

 하아. 소유는 또다시 길게 한숨을 뱉었다. 랑랑이 소유의 등을 철썩 때렸다. 소유는 등을 북북 문지르며 이를 갈았다.

 “복 달아난다, 이것아. 그건 그렇고 아가씨가 그 정도로 진심이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씨를 받을 남정네 하나 들여서 혼인만 올리면 누구와 다정하게 지내건 아무도 뭐라할 수 없는데.”

 “그렇기야 하지만. 유 소저가 사내면 모든 게 완벽할텐데 하늘은 대체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글쎄다. 그 아리따운 분을 남정네로 만들었다간 하늘의 분노를 사게 될걸.”

 “모르는 말씀. 유 소저는 사내여도 눈 부시게 아름다울 거야. 미인은 남녀를 가리지 않는 법이다.”

 랑랑이 쯔쯔 혀를 찼다. 소유는 콧방귀를 뀌며 간식을 가져오라 소리를 높였다. 랑랑이 소유를 쥐어박았다. 또 투닥투닥 장난 같은 대련이 벌어졌다. 지나가던 곤주당 하인이 건물을 부수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소유와 랑랑이 사이좋게 연무를 주고받는 사이 담장을 사이에 두고 맞붙은 백엽궁에는 때이른 봄바람이 불고 있었다. 하기사 무덥기로 유명한 회천 지방에서는 봄보다는 겨울이 밀어를 주고받기에 어울릴지도 모른다.

 “있잖아요, 연랑(燕娘).”

 “부르셨어요, 화매(花妹).”

 다정한 목소리는 연인의 그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삼단 같은 머리채를 어깨 너머로 길게 늘어뜨린 아리따운 처녀들은 생긴 것만큼이나 고운 목소리로 애틋하게 서로를 불렀다. 랑랑이 보았다면 눈이 휘둥그레졌을 풍경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다 남의 이야기. 본인들이 어떻게 보이는지 알 리 없는 두 여인은 그저 청명한 날씨와 아름다운 정원을 즐겼다. 호위도 시중 드는 사람도 없이 둘이서 시간을 보내는 건 처음이었다. 두근두근 설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리라.

 먼저 운을 뗀 폐월소접 당례화가 수줍게 웃었다. 백지처럼 새하얀 뺨 위로 붉게 노을이 졌다. 부끄러운 듯 달싹이는 입술은 이슬에 젖은 매화 빛깔이다.

 “줄곧 궁금하던 게 있답니다. 차마 실례가 될까 하여 여쭙지 못했지요.”

 “어찌 말씀을 꺼리셔요. 자매가 되자 하지 않으셨어요. 화매와 소녀 사이에 실례될 질문이 무에 있습니까.”

 창산제일봉 유연리는 그리 말하며 례화의 손을 붙들었다. 따뜻한 온기가 손에서 손으로 전해진다. 례화는 한층 수줍어 고개를 모로 꼬았다. 반짝이는 은발이 어깨를 넘어 사르르 흘러내렸다. 하얀 머리에 하얀 피부, 하얀 비단 옷까지 어느 한군데 희지 않은 곳이 없는 례화의 흰 속눈썹이 바르르 떨린다.

 “사람 마음이 바람과 같아 쉬이 변한다 하였습니다. 연랑이 소중하기에 함부로 하였다 잃을까 두렵답니다. 하면 연랑, 소녀가 사소한 질문을 하나 하여도 되겠는지요.”

 “물론이에요. 걱정이 많으십니다, 화매.”

 례화는 바람 없는 날 연못처럼 잔잔히 웃으며 다정히 연리를 마주보았다. 연리도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미인의 미소에 바람조차 소리를 죽였다.

 “연랑은 어인 연유로 길을 떠나게 되었나요? 여인의 몸으로 홀로 여행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압니다. 시중도 호위도 없이 홀로 떠나는 것이 불안하지는 않으셨나요.”

 연리는 낮은 신음과 함께 입을 다물었다. 례화의 고운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미안해요. 연랑이 어떤 사내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실력을 갖췄음은 알아요. 그대는 창산제일봉인걸요. 허나 소녀는 한낱 보잘것 없는 여인이라 쉬이 마음이 놓이지 않더이다. 여인네 홀로 여행이라니 이 폐월소접 당례화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어요.”

 례화는 소매로 얼굴을 가렸다. 그 모습이 청초해 새가 울었다. 연리는 실소하며 고개를 저었다. 연지도 바르지 않은 옅은 입술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당치 않아요. 화매, 나는 화나지 않았습니다. 어찌 답해야할지 고민이 되어서요. 어째서 길을 떠났느냐 물어도 할 말이 없어요.”

 연리는 조심스런 손길로 례화의 손을 붙잡아 내리고 상냥하게 웃으며 그를 이끌었다.

 맑은 하늘에 몽실몽실 뭉게구름이 흘렀다. 나란히 걷는 처녀들의 뒷모습이 그와 같았다. 바람이 없어 잔잔한 연못이 그 모두를 담았다. 넓은 궁에 사람이라곤 둘 뿐인 것처럼 사방이 고요했다.

 연리는 가볍게 눈을 감았다.

 “작년 일입니다. 언제나처럼 창산에 올랐는데 바람이 시원하더군요. 상쾌하고 기분 좋은 바람이었어요. 그런데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니 산봉우리에서 내려다 보이는 풍경이 바람에 못 미치지 않겠습니까? 매일 보아온 풍경인데 그날따라 이상하게도 좁고 갑갑해보이더랍니다.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여행을 떠나야겠다고.”

 그대로 눈을 떠 하늘을 올려다본다. 연리는 마음 속으로 그날 보았던 하늘을 그려보았다. 땅은 갑갑하니 좁기만 한데 하늘만은 탁 트이게 넓어서 마음이 편해지던 높고 파란 하늘을.

 “그리 마음을 먹으니 한시도 지체할 수가 없었어요. 서둘러 방으로 돌아가 짐을 쌌습니다. 맨손이나 다름 없는 상태로 길을 나서려던 저를 스승님이 붙드셨지요. 그렇게 떠났다가는 반나절도 못 버티고 돌아오게 될 거라고 한참을 잔소리 들었어요.”

 연리는 쿡쿡 웃는다. 례화가 그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여행 중에는 제대로 관리도 할 수 없을텐데 분도 없이 희고 고른 피부결과 노을이 진 저녁 무렵 하늘처럼 짙은 푸른 머리칼이 녹음 속에 어우러졌다. 례화가 꽃과 나비라면 연리는 연못에서 물을 마시는 한 마리 학이었다.

 “그렇게 떠난 길이었습니다. 답이 되었을까요?”

 연리가 례화를 마주하며 눈웃음쳤다. 단정한 이목구비가 자신을 향하자 례화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보잘것 없는 이야기였지요. 그래도 화를 내지는 마세요. 예쁜 얼굴이 망가집니다.”

 “연랑도 참. 제가 늘 화나 내는 여인으로 보이십니까.”

 례화가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연리가 낮게 소리내서 웃었다.

 화해 아닌 화해를 하고 두 여인은 풍양교를 건너 삼묘원으로 향했다. 삼묘원은 례화가 백엽궁을 들어갈 때 벌인 대공사의 결실이었다. 회천당문의 역대 후계가 거쳐온 역사 깊은 정원이지만 엎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최고의 정원사를 모시고 토대부터 다시 쌓은 정원은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났다. 이름하여 차일정(遮日庭). 례화의 바람대로 꽃과 새, 작은 동물들이 어우러진 아기자기하고 사랑스러운 정원이었다.

 례화는 구석구석 자신만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어진 차일정을 어느 한군데 빠질 것 없이 사랑했으나 아무리 사랑하는 자식이라도 개중 특별히 눈에 밟히는 아이가 있는 법이다. 아리따운 이에게 아리따운 것만 보여주고 싶어 례화는 연랑과 함께 영미원으로 향했다.

 연리가 입을 떡 벌리고 감탄했다. 붉은 꽃, 노란 꽃, 푸른 꽃이 넓은 화원을 수놓고 있었다. 같은 종의 꽃이 거의 없고 저마다 색과 형태가 다른데도 전체가 조화를 이루어 하나의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었다.

 례화는 뿌듯함을 감추지 못하고 샐쭉 웃었다. 그 모습이 또 참 예뻤다. 연리가 화단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이 꽃은 무엇이고 저 꽃은 무엇이라 일러주었다.

 “잘 아시네요. 꽃에 조예가 깊으신 줄은 몰랐습니다.”

 “수줍어요. 영미원은 제가 직접 가꾸었답니다.”

 연리는 여인을 돌아보고 다시 한 번 감탄하고 말았다. 온화하게 웃는 례화의 뒤로 오색찬란한 꽃밭이 펼쳐져 있는데 그 화려한 색채가 색조가 없는 례화를 장식해 미모가 한층 빛나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진정 꽃밭의 주인이었다. 꽃들이 례화의 미모를 찬양하는 것 같은 풍경 속에 자신이 자연스럽게 섞여 있음은 깨닫지 못한 채였다.

 “이 꽃은 무엇입니까?”

 “산하엽이라 합니다. 물에 젖으면 꽃잎이 투명하게 변한답니다. 수정꽃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리지요.”

 “꽃잎이 투명해진다고요? 신기하군요. 이건 뭐라고 하나요?”

 “그건 멀리 서역에서 구해온 꽃입니다. 설융화라고 부르지요. 눈이 내리는 높은 산 바위틈에 피는 꽃이라더군요.”

 “이건 압니다. 목련이군요.”

 “맞습니다. 잘 알고 계시네요.”

 례화의 설명을 들으며 화원을 한바퀴 둘러본 연리는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꽃들이 가득했다. 제각기 다른 기후와 다른 토지에서 자라는 꽃들을 한자리에 모아 동시에 피워냈다. 또 피지 않은 꽃과 만개한 꽃을 섞어 어느 한 군데 비어보이지 않도록 배치한 솜씨는 또 어찌나 절묘한가. 연리가 이를 언급하자 례화는 시기별로 돌아가며 화원을 장식할 수 있도록 순서대로 배치했을 뿐이라며 시선을 떨궜다.

 영미원의 아름다움에 크게 감동한 연리는 삼묘원을 전부 둘러보고 싶었다. 례화에게 말하자 기뻐하며 안내해주었다. 새를 기르는 제화원과 작은 동물들을 기르는 미려원을 순서대로 들렀다. 손이 덜 가는 탓인지 관리하는 하인이 보이지 않던 영미원과 다르게 제화원과 미려원에서는 례화를 발견한 하인이 달려나와 문을 열었다. 동물들과 항시 함께 지내는 하인들은 연리의 질문 공세에도 차분하게 대답했다.

 “이 아이가 제가 제일 아끼는 친구랍니다. 설화라고 해요.”

 례화가 무늬 없이 하얀 털을 가진 고양이를 안아들며 웃었다. 연리가 따라 웃었다. 옅은 회색 눈을 가진 고양이는 례화의 팔에 나른하게 고개를 얹고 고롱거렸다.

 “화매를 닮았네요.”

 연리가 쓰다듬으려고 하자 설화는 이를 드러내며 손을 피했다. 례화가 미간을 모으고 고양이를 야단쳤다. 연리는 례화를 말렸다.

 “괜찮아요. 말도 못하는 짐승인걸요. 호되게 대하지 마세요.”

 “연랑.”

 “정말 괜찮아요. 그렇지?”

 연리는 설화와 눈높이를 맞추고 웃었다. 거리를 지키니 설화도 물러서지 않았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연리를 쳐다보던 설화는 야옹하고 울었다. 사람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것 같은 반응에 연리가 웃었다. 레화는 속이 상했는지 기운 없는 표정으로 설화를 내려놓았다. 설화는 례화의 발치를 맴돌았지만 반응이 없자 곧 떠났다.

 연리는 토라진 례화와 함께 미려원을 나왔다. 례화는 계속 속상해했다. 두 사람은 초록빛 산책로를 느긋하게 걸었다.

 “개의치 마세요. 저는 초대받은 것만으로도 기뻤습니다.”

 “설화가 연랑을 훨씬 기쁘게 해줄 줄 알았어요.”

 “기뻤어요. 눈처럼 새하얀 털을 가진 고양이는 처음 보았습니다. 화매와 함께 있으니 마치 자매 같았어요.”

 “연리도 그렇게 생각했나요? 그래서 이름이 설화(雪花)랍니다.”

 례화가 섭섭함을 떨치고 밝게 웃었다. 옥구슬이 구르는 듯한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퍼져나갔다. 연리는 처음 보는 례화의 큰 웃음에 놀라워했다.

 례화는 연리와 팔짱을 끼고 호관단을 올랐다. 서로의 팔을 붙든 손이 겹쳤다. 오후의 마지막 햇살을 받아 푸르른 차일정이 반짝반짝 빛났다. 조금 있으면 노을이 질 터였다. 하루종일 둘이 함께 거닌 정원을 내려다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례화가 연리에게 살짝 기대자 연리가 마주 뺨을 붙였다. 두 사람은 꼭 붙어 서서 노을이 지기를 기다렸다.

 “누각에서 화매와 함께 아침을 먹은 건 잊을 수 없을 겁니다. 안개낀 호수가 무척 아름다웠거든요.”

 “저는 수미경을 걸은 게 좋았어요. 저녁이면 그때와는 또 다른 풍경을 볼 수 있답니다.”

 “앉아서 쉬는 것도 화매와 함께 하니 즐거운 놀이가 되었어요. 하는 일 없이 정원을 거니는 것만으로 이렇게 즐거울 수 있는 상대는 화매가 유일합니다.”

 “어머? 그런 말씀을 하시면 연랑을 사모하는 사내들이 눈물 지어요.”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그런 말에 굴하는 사내라면 저도 관심 없어요.”

 례화가 소리 죽여 웃었다. 연리도 함께 웃는다.

 처녀들이 키득거리며 한담을 나누는 사이 하늘에는 붉게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기대선 채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서쪽 하늘을 중심으로 세상이 평소와는 다른 색으로 물들어갔다. 단풍이 없는 회천의 나무들은 매일 이 때를 기다린다. 왕의 색으로 몸을 장식할 수 있는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울긋불긋 아름답게 치장했다. 례화의 은빛 머리칼과 하얀 옷자락도 연리의 푸른 머리칼과 옷가지도 붉게붉게 물들었다.

 두 사람은 노을이 완전히 사그라지기까지 그곳에 서있었다. 몸을 꼭 붙이고 온기를 나누며 서있었다. 풍경을 바라보는 동안은 긴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제각기 지나간 시간을 떠올리며 아련한 추억에 잠겨 있었다.

 빛이 사그라지고 태양이 은수성 담장 너머로 모습을 감추었다. 례화와 연리는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까르르 종달새처럼 울었다.

 “한 바퀴 더 돌고 들어갈까요?”

 례화가 제안했다.

 “날이 어두워지면 침소로 찾아가는 길을 잃어버릴텐데요.”

 연리가 웃었다. 두 사람은 천천히 수미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날은 어둡지만 두 사람에겐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례화가 아직도 차일정을 거닐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백엽궁 하인이 등롱을 들고 찾아왔다. 례화와 연리는 하인을 앞세우고 느긋하게 오늘의 마지막 산책을 즐겼다.

 “친구집에서 그런 걸 걱정하는 게 아니랍니다. 제 궁에서 주무시고 가지 않으시겠어요?”

 “화매의 침궁에서요?”

 연리가 휘둥그레지고 례화는 소리 죽여 웃었다.

 “농담이어요. 여염집 여인들은 침소를 나누며 우애를 다지기도 한다기에 한 번쯤은 해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지요. 그 일이 생각났을 뿐이랍니다.”

 “그런 소박한 소망이 있으셨나요. 같은 방에서 자는 것뿐이라면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닌데요.”

 “연랑은 다른 사람과 한 방에서 자본 적이 있나요?”

 이번엔 례화가 놀랄 차례였다. 연리는 난처한 듯 웃었다.

 “어릴 때는 제자들 여럿이 같은 방을 썼으니까요. 청무문은 그리 규모가 크지 않아서 모두에게 독방을 줄 여유는 없답니다. 돌아가면 제 방은 없어졌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럴수가. 연랑의 방을 빼앗으면 제가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례화가 진지하게 화를 냈다. 연리는 웃어넘겼다.

 저녁에 보는 수미경은 례화가 오전과는 다른 멋이 있었다. 군데군데 세워진 쇠기둥 꼭대기에 하인들이 불을 붙이자 불빛과 그림자가 어울려 한 폭의 근사한 산수화처럼 보였다. 그림자가 생기는 모양을 고려해 만들어진 미로였다. 잘 보니 그냥 산수화가 아니라 유명한 그림을 정원으로 모작한 형태였다. 아, 이렇게 섬세한 작품이라니. 연리는 또 한 번 감동하고 말았다.

 “이곳을 꾸민 정원사가 어느 분이라고 하셨지요? 정말 놀랍습니다. 천재에게는 한계가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례화는 연리와 함께 수미경을 걷는 동안 정원을 이렇게 꾸미게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했다. 새로 백엽궁에 들어온 례화가 정원을 처음부터 갈아 엎게 된 이유, 걸맞는 정원사를 섭외하기까지의 과정, 공사 중에 일어난 우여곡절과 완성된 후에 정원사와의 인연에 이르기까지. 연리는 좋은 청자였고 사위는 고요해 세상에 둘만이 남은 것 같은 시간이었다. 례화와 연리는 마지막까지도 산책이 끝나는 것을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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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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