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가미 나츠미는 부자였다. 넓은 집에 고용인을 두고 살았다. 재화는 언제나 넉넉해서 원하는 것이 생기면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세상에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은 많지만, 돈이 있으면 그런 것쯤은 아무렇지 않게 넘겨버릴 수 있었다. 나츠미는 돈과 그에 따라오는 권력을 사랑했다. 무엇이든 마음 내키는대로 휘저을 수 있는 힘이 그에게는 있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은 나츠미를 이루는 모든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는 지배하고, 거머쥐고, 휘두르는 사람이었다. 나츠미는 그 사실이 언제나 만족스러웠다. 그에 실증이 나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사람이 필요하면 사람을 사고, 권력이 필요하면 권력을 산다. 나츠미는 살아오며 모자란 게 없었다. 누군가는 그의 삶을 보고 불행하다 하겠지만, 코웃음이 나올 뿐이다. 세상에 작은 불행 하나 없는 이가 누가 있겠으며, 흠없는 완전한 행복이란 존재하는가. 나츠미는 제 불행을 그 정도의 수준 낮은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불행에 취해있는 건 취향이 아니다. 그는 언제나 유쾌하고 천진난만한 지상 낙원의 주인이었다.

 나츠미는 생각했다. 불행이란 그저 우스운 말장난일 뿐이라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자기 처지를 서술하기 위해 만들어낸 단어일 뿐이노라고. 하지만, 정말 그런 것이었을까? 그는 반문한다.


 내려앉은 금빛 속눈썹이 붉은 눈동자를 반쯤 가렸다. 침잠한 시선이 아래로 꽂혔다. 창에서 흘러들어오는 빛을 받아 반짝이는 유리관 속에 오색 꽃송이가 만발했다. 흐드러진 꽃잎 사이로 단정한 얼굴의 청년이 반듯하게 누워있었다. 아직은 살아있는 이였다. 느리게 가슴이 오르내리고, 꿈을 꾸는 듯 이따금 표정이 바뀌었다. 그가 잠든 것이 벌써 몇시간 전인지 몰랐다. 나츠미는 그의 곁에 앉아 단정하고 고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깔끔하게 빗어도 금세 삐쳐나가는 억센 검은 머리는 꽃속에 파묻혀 있었고, 하얀 얼굴은 평온하게 잠들었다. 저 분홍빛 입술에 키스한 적이 몇 번이더라. 지금이라도 끝까지 채워진 셔츠 단추를 풀어헤치고 키스를 남기고 싶다.

 바라보면 볼수록 마음도 몸도 기울어진다. 나츠미는 어느새 유리관에 달라붙어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우스운 일이다. 사랑하는 그를 잠재워 유리관에 가둔 것은 자신일진데 만질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깨끗한 유리에 덕지덕지 묻어나는 지문이 시야를 방해해 황급히 소매로 닦는다.

 아직은 안 된다. 나츠미는 자신을 추슬렀다. 조금 더 잠재워둬야 했다. 당장이라도 그를 일으키고 싶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됐다. 이 손이 닿으면 그는 저 먼 곳으로 가버릴 터였다. 공주, 사랑스러운 이여. 나츠미는 웃어버렸다.

 츠키모토 히메라는 이름을 가진 이 아이는, 나츠미에게 처음으로 그림자를 알려준 이였다. 모자란 것 하나 없이 언제나 자신의 눈부심에 취해있던 나츠미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이였다. 과정 하나하나 달콤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거부할 수조차 없는 악랄한 함정을 들이민 이였다.

 히메를 만나고부터, 나츠미는 자신의 연약함을 알았다. 누군가가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감정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지킬 것이 생겼다. 함부로 내어줄 수 없는 무언가가 차가운 가슴 깊은 곳에 돋아났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깊이 뿌리를 내려 있었다. 그저 달콤한 케이크인 줄 알았던 것이 저주의 씨앗이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입맞추고 싶다. 나츠미는 또 생각했다. 유리관은 던져버리고 뜨거운 혀를 섞고, 매끄러운 살갗을 더듬어 잠을 깨우고 싶다. 아, 안 돼. 그래서는 안 돼. 한 번 드러난 약점은 반드시 또다시 공격당한다. 지금 없애두지 않으면. -않으면?

 등 뒤에서부터 냉기가 느껴졌다. 나츠미는 차츰 파고드는 차가운 감촉을 떨쳐내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붙잡은 유리관에서도 바닥에서도 냉기가 피어올랐다. 마른 공기에 뿌옇게 김이 끼기 시작했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다. 손바닥이 유리에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공포가 심장을 조여온다.

 나츠미는 삐걱거리는 관절을 억지로 잡아당겼다. 추위에 얼어붙은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더듬거리며 보물처럼 유리관을 끌어안는다. 지켜야하는 것인지 버려야하는 것인지도 구분할 수 없는 것을 소중히 끌어안고 새하얗게 바래버린 머릿속을 어떻게든 되살리려 노력한다. 없애버리면 간단한 것을 그러지 못하는 자신이 어리석고 또 어리석어서 그저 웃음이 난다.

 이럴 때면 항상 옆에서 도닥여주던 손길은 유리관 너머에서 고이 잠들어 있다. 저 손이 머리를 쓸고, 등을 보듬을 때 얼마나 많은 위로를 받았던가. 자신의 연약함을 처음으로 깨닫게 만든 손이었다. 원망을 했던가? 아니, 그런 건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해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는 언제까지나 나츠미의 곁에 있겠다고 했지만, 그를 떼어낸 것은 나츠미였다.

 멍청하게도 없애버리면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처음처럼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던 그 때로 돌아갈 수 있어야했다. 아버지는 적어도 그런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았어. 하지만 아버지 따위 무슨 상관이지? 그 인간이 내 인생에 참견할 자격이 있나? 물론이다. 아버지는 나츠미의 오너였으니까.

 그래, 그랬다. 나츠미는 이 사태의 원인을 알았다. 무엇이 되었든 그에게서 빼앗아가는 게 문제이지 않은가. 내것을 내가 가지고 있겠다는데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나츠미는 옳았다. 츠키모토 히메는 카가미 나츠미의 것이었고, 카가미 마나부가 카가미 나츠미에게 얼마만큼의 지분을 가지고 있건 거기에 손대는 것은 옳지 않았다. 지분을 가지고 있기는 했던가? 옳던, 옳지 않던, 무엇이 누구의 소유이건 사실 그게 무슨 상관이겠냐만서도.

 나츠미에게 중요한 건 단 한 가지였다. 자신의 것을 지키는 것. 아무도 빼앗아갈 수 없게 하는 것. 뭐든지 내 마음대로 할 것. 그래서 이 손으로 끝내려고 했다. 곤란해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 손으로 그 목숨을 거두고자 했다. 닿지 않는 곳까지 멀리 보내느니, 제 입으로 떠나겠다는 선언을 듣느니 그게 나으리라 여겼다.

 나츠미는 어리석었다. 냉정하고 똑똑하던 그는 벌써 십년도 더 전에 사라진지 오래였다. 무슨 판단을 해야 옳았을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아무것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다짐했으므로, 그렇게 될 것이었다.

 붉은 눈이 번쩍이며 불길한 빛을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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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 찾으려고 가볍게 쓴 조각글. 어째 남 보여줄 게 못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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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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