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이 아름다운 밤이었다. 리히트는 달에 가려 얼마 보이지도 않는 별을 헤아리며 문 앞에 앉아있었다. 숄을 두르고 따뜻한 코코아를 타서 나왔지만, 날이 제법 쌀쌀했다. 머그잔에 손을 덥히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야경을 보고 있자니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몰랐다.

 리히트가 밤중에 밖에서 시간을 보내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다. 어제도 그랬고 그제도 그랬고 저번 주에도 두 에이아 이상 잠든 날이 없었다. 한밤중의 고요함은 리히트에게 익숙한 것이 되어있었다. 싫지는 않았다. 낮과는 또 다른 짙은 빛의 밤하늘도 매일 달라지는 달과 별도 마음에 들었다. 밤에 잠이 깨면 반드시 밖에 나와서 바라보았더니 이제 대화도 나눌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전혀 혼자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무서운 것은 아무도 없는 방과 복도였다. 무엇보다도 둔켈의 빈자리가 컸다. 둔켈이 있다면 지금쯤 방에서 같이 웃으며 차를 마시다가 다시 잠들었을 터였다. 그런 생각을 하자 곤란한 듯 웃는 둔켈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올라 한숨이 나왔다.

 리히트는 입술 사이로 새는 한숨을 참으며 문설주에 머리를 기댔다. 머리가 닿자 자연스럽게 팔도 닿았다. 나무인데도 싸늘하게 느껴졌다. 리히트는 어깨를 움츠리며 기대기를 포기하고 바로 앉았다. 몸이 많이 식은 모양이었다.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 여기 앉아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리히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입속으로 셋을 셌다. 하나, 둘, 셋.

 "하아."

 기어코 참고 있던 한숨이 나왔다. 옷자락이 땅에 닿지 않도록 조심스레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깔고 앉을 손수건조차 들고나오지 않아 더러워져 있을 게 뻔했다. 이대로 침대에 들어갈 수는 없으니 잠들기 전에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잠옷을 더럽혀도 잔소리할 사람은 없다. 별로 기쁘진 않았다. 리히트는 미지근해진 코코아를 후루룩 마셨다. 단번에 잔이 비었다. 그리고 후회했다. 모두 잠든 시각에 세면대를 사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리히트는 결국 소리 없이 두 번째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할 수 없이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서 이를 닦기로 다짐하고 리히트는 문을 열고 어두운 복도로 발을 뻗었다. 잠들 자신은 없었지만 홀로 자장가라도 외워볼 시간이었다.

 침대에 누우니 다시금 둔켈의 그림자가 겹쳤다. 차가운 손끝으로 리히트의 이마를 쓸어넘기고 솜털처럼 가벼운 키스를 남기는 소년의 다정한 미소, 그림자에 까맣게 물든 창백한 뺨. 그 상냥한 손길이 너무도 그리워 울적해졌다. 고작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반평생 자리를 비운 것 같다.

 리히트는 어제도 꿈을 꿨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죽고, 비명 지르고, 공포에 떠는 꿈이었다. 악몽은 리히트의 발목을 잡고 성큼성큼 기어올랐다. 매일 누군가 죽었다. 어제는 겨우 젖을 뗀 어린아이였다. 그제는 장성한 청년이었고, 그 전날에는 수명이 다한 노인이 가족들 품에 안겨 숨을 거뒀다. 때로는 전쟁터였다가, 어느 날은 누군가의 침실이었고, 또 어느 날은 평범한 시가지였다.

 죽음은 어디에나 있었다. 리히트는 모든 죽음을 바라볼 의무가 있었다. 어린 시절에는 어쩌다가 한두 번 찾아오던 죽음의 현장이 이제는 시시때때로 리히트를 찾아왔다. 눈을 감아도, 떠도, 잠이 들어도 불현듯 다가오는 죽음의 순간에서는 달아날 수 없었다.

 세상의 모든 죽음을 알고 있다는 것은 자만이다. 리히트는 아무것도 몰랐다. 자신이 겪는 죽음이 어디에서 어떻게 찾아오는 것인지. 자신을 찾아오는 죽음에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리히트는 이불 속에서 웅크린다. 아아. 밤이 깊으면 깊을수록 소년의 부재가 컸다. 죽음이 주는 무력감이 작은 몸을 뒤덮고 삶을 물들인다.

 ‘자고 싶지 않아.’

 밤이 되면 죽음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정신이 휴식에 들어간 틈을 노려 찾아온 현실은 더욱 매서운 것들뿐이었다. 죽거나 죽이거나 죽임당하거나. 죽음이 턱 끝까지 차오른 순간의 공포가 싫었다. 정신이 들었을 때 찾아오는 죽음이 단순한 편린이라면 수면에 빠져있을 때 찾아오는 죽음은 온전한 체험이다. 리히트는 밤만 되면 겪어야 하는 끔찍한 순간들이 싫었다.

 소녀는 매일 죽거나 죽이거나 죽임당했다. 죽음은 단 오 분만 정신을 놓아도 반드시 찾아왔다. 리히트는 때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살해당했고, 즐겁게 학살했다. 사고 현장에 홀로 살아남아 며칠씩 아슬아슬한 정신을 유지한 채로 버텨보기도 했고, 짐승에 뜯겨 죽은 적도 있었다.

 ‘싫어.’

 리히트는 눈을 부릅떴다. 눈알이 얼음물에 담근 것처럼 시렸다.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 수면의 마수는 모든 감각을 무디게 하지만 도무지 침대로 가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고통만은 예외였다.

 결국 리히트는 악랄한 수법을 이기지 못하고 잠에 빠져들었다. 아아, 꿈은 결국 소녀를 집어삼키고 오랜 고통에 연약해진 정신이 비명을 질렀다. 받아줄 곳은 어디에도 없다. 곁에 남았던 단 하나의 온기는 꿈속으로 스러졌다. 오늘도 소녀는 심장에 칼을 꽂는다.



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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