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에 해당되는 글 166건

  1. 2009.06.29 단 하나, 너의 행복을 위해서.

 하늘을 보고 있었다. 긴 머리는 피에 젖어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가 밟은 것은 시체, 몸을 당기는 것은 핏덩어리. 평소라면 주름 하나 없이 단정했을 천자락은 넝마가 된지 오래였다. 짙은 검은색이 온통 피투성이가 된 신체를 가려주었다. 몇 사람이 다가왔다. 그들은 너덜너덜해진 앳된 청년을 멀리 두고 멈춰섰다. 파리하게 질린 얼굴에 흐르던 붉은 피가 검게 굳어가고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시원스럽게 미소짓는 얼굴로 한 남자가 말했다. 시체를 밟고 선 그의 유쾌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눅눅한 공기를 흔들었다. 피묻은 칼을 든 사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담담히 대꾸했다. 하얗게 된 얇은 입술에는 말라서 얇은 피부가 터진 탓인지 남의 것이 묻은 것인지 모를 피가 말라 붙어있었다.

 "왜 왔지?"

 소리는 작았지만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그 말을 받았다. 난장판에 선 그들의 차림은 깔끔하기 그지 없었다.

 "부탁하는 것이 한두번도 아니고 감사하고 싶어서 말입니다. 오늘이 마지막이기도 하고 말이죠."
 "……마지막?"

 청년은 그제야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억지로 짜낸 탓에 목소리가 갈라졌다. 근육이 없는 듯한 무표정으로 그는 절뚝이며 돌아섰다. 남자는 흥얼거리는 투로 연극하듯 과장되게 팔을 벌렸다.

 "마침내 살인하는 신부라는 타이틀을 떼어낼 수 있게 되었다 이겁니다. 기쁘지 않으신가요?"
 "……."
 "이런, 이런. 재미없는 사람. 당신이 직접 제시한 계약기간이니 당연한가요."
 "그랬던가."
 "잊어버린 거군요. 그럴 것 같았습니다만."

 남자의 뒤에 서있던 몸종이 청년에게 편지를 전했다. 손에 든 핏물로 종이에 붉은 자욱이 문질러졌다. 받자마자 떨어지는 손을 보며 남자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기간만료, 라는 계약서입니다. 보지 않는 겁니까?"
 "나중에."

 싸늘한 대답에도 남자는 웃을 뿐이었다.

 "이렇게 보는 것은 이걸로 끝이군요. 이후 조만간 찾아뵙겠습니다."
 "마음대로."

 청년은 사라지는 그들을 그저 바라보았다. 혼자 남아서도 움직일 줄 몰랐다. 무너지지도 움직이지도 않은 체 그렇게 서있었다.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어갈 때였다. 부러진 다리를 끌고 발에 채이는 시체를 피해 느리게 옮기는 걸음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했다. 시선은 먼 곳을 향하고 있었지만 보이는 것은 없었다. 피로가 극에 달한 나머지 눈이 제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벌써 쓰러져버렸을 일정에도 그는 움직일 수 있었다. 단 한 곳만을 바라보는 것으로 생겨나는 힘. 뿌연 시야도 그에 반해 극도로 민김해진 청력도 제대로 길을 찾아 걷는 것에만 집중해야 했다. 신경이 마비되어 팔다리가 제대로 움직이는 지도 알 수 없었다. 통각만이 살아 손가락 끝, 발가락 끝까지 기절할 것 같이 아프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본능적으로 몸상태를 점검했다. 왼쪽 아래서 세번째 갈비뼈와 오른쪽 허벅지 뼈에 금이 갔고 왼쪽 어깨가 빠지고 팔이 부러졌다. 단검에 찔린 배는 싸움이 끝나자마자 지혈을 했지만 돌아가면 바로 치료해야 했다. 베인 자리는 수도 없어 일일히 감각할 수도 없었다. 오른손 약지가 삐었는지 뜨거웠다. 필사적으로 지킨 얼굴만 입술이 터진 것을 제외하고는 생체기 하나 없었다. 조금 신경쓰이는 것은 아까 억지로 말하느라 갈라졌는지 비릿한 피맛이 올라오는 목이었다. 다른 곳에는 비교할 수 없는 작은 통증이 그 어느 것보다도 신경쓰였다.

 바라는 것은 단 하나. 환한 미소, 금빛 고수머리의 소녀가 언제나처럼 머릿속을 가득 매웠다. 괜찮아, 나는 괜찮아. 아프지 않아. 행복하다면 됐어. 괜찮아. 아무렇지 않아. 나는 아직 괜찮아. 그 무슨 일이 있어도 괜찮아.

 "…찮아. 아무렇지 않아. 괜찮아. 괜찮아."

 둔켈의 입에서 새는 숨이 어느샌가 속삭임이 되어있었다. 그렇게 소년은 자신에게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괴로운 미래를 보며 울부짖는 리히트의 등을 그러안고 늘 했듯이 괜찮다고 괜찮다고 계속해서 말해주었다.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아무렇지 않다고 말해주었다.

Posted by fa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