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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5.29 해솔원 :: [애러랫] 첫만남인데…….

 대체 어쩌다 이런 상황이 되었을까.

 "끼야, 보들보들해, 몽실몽실 솜털 같아요! 머리 관리 어떻게 해요?"
 "딱히 관리 같은 건 하지 않아요."
 "정말이예요? 이럴수가, 세상의 가장 귀중한 정보 중 하나가 여기 감춰져 있었어! 있죠, 괜찮다면 제가 당신을 잠깐 실험해보면 안될까요?"
 "네, 넷?! 아뇨아뇨아뇨, 그건 조―옴!"
 "안타까워라. 이렇게나 감촉이 좋은데요."
 "하으―…, 가능하면 조금 떨어져 주시면 안될까요…."

 애러랫은 자신의 머리칼을 붙들고 행복한 듯이 만지작 거리고 있는 분홍머리칼의 아가씨 곁에서 가능한 떨어지기 위해 조금 더 몸을 사렸다. 느닷없이 만나 느닷없이 대화를 나누게 된 이 사람은 만나자마자 대뜸 자신의 이름을 홍 분이라고 소개하더니 이내 눈을 반짝이며 머리칼을 붙들었다. 뭔가 다른 이유로 말을 걸었다는 느낌이었지만 애러랫에게는 그걸 따질만한 용기가 없었다. 머리가 길어서 거리를 꽤 벌릴 수 있다는 사실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눈을 똑바로 마주쳐 오며 자꾸만 말을 걸어오는 이 사람에게서 도망갈 길이 없어 곤란했을 터였다.
 그러고보니 조금 이상하긴 했다. 흘끔거리며 살짝 올려다본 눈이 매번 마주치는 것도 그렇고 이 분이라는 사람은 신기할 정도로 입안에서 웅얼거리는 애러랫의 말을 알아들었다. 처음에는 답답한지 크게 말하라고 하더니 지금은 전혀 무리 없이 알아듣고 있었다. 몇번을 얘기해도 부족할 정도로 신기한 일이었다. 혹시 도깨비들은 귀가 좋은걸까, 라고 생각했지만―얼핏 올려다 보았을 때 머리에 달린 뿔이 보였다―딱히 그렇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었다. 그냥 이 사람의 특징인걸까. 그게 아니면 애러랫의 말을 들으려고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니 도망가려고만 했던 자신이 떠올라 굉장히 죄송해졌다.
 이럴수가, 죄송합니다. 습관적으로 손등을 꼬집었다. 옆에서 높은 목소리가 울렸다.

 "어마! 손은 왜 꼬집으세요! 아프겠다―."
 "엣, 아뇨, 그렇지 않아요, 아프지 않아요."
 "빨개졌는데 아프지 않다니, 말도 안돼요."
 "진짠데…."

 아픈 것이 일상이라 아프나 안아프나 별 차이가 없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분이는 다른 화제를 꺼내고 있었다.

 "이름이… 뭐랬죠?"
 "애러랫―입니다."

 먼저는 잘 듣지 못한 것 같다고 느꼈는데 역시, 였던 듯 했다.

 "그럼 애러랫씨. 있죠, 시간 있어요?"

 시간? 애러랫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여졌다.

 "에, 네, 있어요."
 "그럼 저랑 같이 식사 안하실래요?"

 그녀는 아까부터 몇번이나 보여준 환한 미소를 보여주곤 애러랫의 손을 이끌었다. 분이는 말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유쾌한 어조는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웠지만 애러랫으로서는 전혀 템포를 따라갈 수 없었다. 이런 식이었다.

 "제 머리색 예쁘지 않아요? 원래 빨강머리인데 염색한 거예요."
 "예쁘네요. 염색인 줄 몰랐어요."
 "제가 생각해도 확실히 전 빨강머리보다 분홍머리가 더 잘어울리는 것 같아요. 뭔가 머리가 더 가벼워진 느낌? 색만 바꾼 것 뿐이지만 기분이 가볍잖아요."
 "그, 그렇군요."
 "그러고보니 머리에 뿔이 있다는 게 가끔은 불편할 때도 있어요. 태어날 때부터 달려있는 거니까 딱히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아니지만 뿔이 있는 쪽의 머리는 마음대로 바꿀 수가 없잖아요? 할 수 없는 머리모양을 보면 속이 상하기도 하죠."
 "예―…."

 빨랐다. 정말 지나치게 빨랐다. 여자들은 다 이런 것일까, 아니면 그녀만 그런 것일까. 여자들끼리 이야기하는 걸 보면 이게 보통인 것 같았다. 점점 할말이 없어지면서 어쩐지 애러랫은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이제까지 얼떨떨해서 나지 않던 눈물이 이제야 한꺼번에 몰려오는 느낌. 전부 내 탓이야.

 "저,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해요?"

 동그랗게 뜬 붉은 눈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냥, 아무것도 아니예요. 갑자기 할일이 생각나서 가보겠습니다."
 "할일이 있다면 별수 없지만 아쉽네요. 그럼 다음에 또 뵈요!"
 "안녕히 계세요."

 다행히 그녀와 멀어질 때까지는 멀쩡한 얼굴이었던 듯 했다. 잰 걸음으로 아무도 없는 곳을 찾아 들자 그제야 눈물이 났다. 소리내어 엉엉 울었다. 대체 왜 우는 건지 스스로에게 반문하면서도 울음이 멈추질 않았다.

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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