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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4.02.18 [ 정령의 아이 ] 10화 - 돌의 목소리 1

걱정이 무색하게도, 늘 보던 그 장소에 도착하자 잎새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잘못된 장소로 갔어도 거기서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신출귀몰했다. 마음이 가는 곳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럴 리는 없지만.
하루는 손을 흔들었다. 잎새가 쫑쫑 뛰어왔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그만 웃고 만다. 그러다가 한참 거리를 두고 우뚝 멈춰선다. 어리둥절한 체 쳐다보다가 문득 깨닫는다.
아차, 돌.
하루는 손을 내려다보곤 괜히 등 뒤로 숨겨본다. 잎새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안녕.”
하루가 울상을 짓고 인사했다. 잎새는 그런 하루를 말끄러미 쳐다보다가 앞서 걸었다. 저번보다 거리가 한껏 멀어진 것이 아쉬워서 가슴이 허해진다.
잠깐의 산책 후 도착한 곳은 우연과 미래의 집이었다. 잎새가 손을 들어 하루를 세우고는 홀로 집으로 들어갔다. 서운한 마음에 입술을 삐죽이며 기다리고 있으니 우연이 나왔다. 뒤따라 빼꼼 잎새가 고개를 내민다.
“미안. 가까이 갈 수가 없어서 여기서 대화해도 괜찮을까?”
“네, 뭐….”
불만스러운 어투에 우연이 픽 하고 웃는다. 잎새가 뒤에서 눈을 깜빡이고, 그 얼굴에 마음을 가라앉힌 하루가 차분히 오늘 생긴 일들을 설명했다. 우연의 얼굴이 차츰 굳어갔다.
“이상하네요.”
“그쵸. 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가요?”
“아뇨, 그게 이상한 게 아니에요.”
우연이 깊게 한숨을 뱉었다.
“하루양, 몸은 괜찮아요?”
네?
눈을 끔뻑인다.
“괜찮아요.”
“정말 이상해요. 그게 인체에 영향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만약 있는 거라면…. 하루양은 왜 멀쩡할까요?”
하루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라, 그런가?
생각해보니 그랬다. 동생의 방은 하루의 방과 벽을 하나 두고 옆에 있다. 베란다는 하루 방 입구 근처에 있었다. 둘 다 하루의 방과 가까웠다. 하룻밤 사이에 탈이 난 곳이 모두 하루의 방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손에 든 돌을 가만 내려다보았다. 이제는 평범한 까만 돌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까기 까만 돌을 주변에서 발견하기는 의외로 쉽지 않다는 점만 제외하면 이상할 것 없는 돌이었다. 하지만 하루는 기억한다. 이것을 처음 발견했을 때 뿜어져 나오던 기이한 빛을.
“하루양과 연결된 끈이 모두 느슨해졌어요.”
우연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굵고 강하던 끈들이 모두 축 늘어졌어요. 옆에서 잎새가 속삭인다.
“바람이 멈췄어.”
“하루양의 존재가 옅어졌어요.”
우연과 잎새가 거의 동시에 말했다.
갑자기 머릿속에서 톱니바퀴가 돌기 시작했다. 그래. 그랬구나. 수상했던 것들이 한 번에 짜맞춰졌다. 어제부터 기이할 정도로 사람들과 자주 부딪힌 것도, 인사를 받아주지 않던 가족들도, 유난히 조용한 밤이라고 느껴진 것도, 모두 이 돌덩어리 때문이었다.
“어떻게 아무렇지 않은 거죠, 하루양?”
물어도 알 리 없었다. 하루는 이 기이한 돌을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과 싸우기 시작했다.
상황이 급해졌다. 이걸 계속 집에 둘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제자리에 돌려놓을 수도 없었다. 서울에만 이런 장소가 다섯은 된다는데 대체 그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 거야? 하루가 투덜거렸더니 옆에서 우연이 설명했다. 그런 곳에서 귀신이 들었단 소문이 나곤 하지요.
세 사람은 급히 은아의 집으로 왔다. 골목 건너 건너 정도로 가까워서 금방이었다. 오는 길에 우연이 전화를 해서 은아가 건물 앞에 나와있었다.
“어떻게 할래요?”
은아가 물었다.
“모르겠어요.”
하루가 대답했다.
모르겠다. 우연은 자신들의 마을로 함께 가자고 제안했지만, 동시에 망설였다. 마을은 멀었고 내일은 월요일이었다. 하루에게 선택권이 넘어왔다. 하지만 하루도 결정하지 못 했다. 고민이 깊어갔다.
어지간해선 입을 열지 않는 잎새를 제외한 세 사람, 은아와 우연, 하루가 치열하게 고민한 끝에 우선은 은아의 차 트렁크에 보관하기로 했다. 빌라에는 화단이 없었고, 차고에서 밤을 지새우는 사람은 없을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대신 하루는 다음 주말에 함께 섬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이번에는 부모님의 허락을 반드시 받아야한다는 문제가 남아있긴 했지만 마땅한 다른 대책이 없었다.

하루는 한 주를 붕 뜬 기분으로 날려보냈다. 잎새를 처음 만났던 순간처럼 심각하지는 않았지만 쉬이 침착해지지가 않았다. 수험생이 수능 앞두고 잘 하는 짓이라며 몇 번이나 잔소리를 들었지만 결국 허락도 얻어냈다. 그치만요, 엄마. 내가 아니면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있다니까요? 물론 그렇게 말하진 않았다.
은아는 결국 그 주 내내 차를 움직이지 못 했다. 트렁크에 넣어뒀으므로 운전석에 앉을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거부감이 들었단다. 그래서 결국 차를 버리다시피 방치해두었다는 이야기에 하루는 마음이 급해졌다. 얼른 돌을 내다 버리고 싶었다.
“그걸로 뭘 한다고 했지?”
“…그들에게 겁을 줄거야.”
잎새가 내키지 않는다는 투로 말했다.
바다로 건너가 달라고 아무리 부탁해도 들어주지 않으니 약간 강압적인 수를 쓰는 거랬다. 베란다의 식물이 하루만에 시드는 모습을 본 하루로서는 정말 그게 ‘약간’이 맞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그렇다는데 딱히 할 말은 없었다. 참고로 베란다의 식물들은 그 날 후로 열심히 회복하고 있었고, 동생의 감기는 하루가 떠나자마자 나아졌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걱정이 들었다. 이걸 가져다 정령들을 겁 주는 데다 쓴다고 치고, 그리고 그게 마을의 문제를 해결해준다고 치자. 그럼 그 후에는? 이걸 다시 원래 자리에 돌려놓나? 바다에 던져버리나? 둘 다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물도 식물도 살 수 없는 땅에서 뭐가 살 수 있을까. 아무리 영향을 끼치는 범위가 좁다고 해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해도 소용 없는 고민을 하는 사이 주말이 찾아왔다.
토요일 이른 아침에 일어나 은아의 집으로 갔다. 이번에도 미래가 빠지고 은아와 우연, 잎새가 함께 가기로 했다. 본래라면 다다음 주에나 내려가기로 되어있던 것을 땡겨 가는 것이었다.
트렁크에 실은 돌멩이를 한 차례 확인하고 차에 올랐다. 긴 여정이 준비되어 있었다. 차라리 기차에 타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먼 길이었지만 사람이 많은 곳에 끼어있을 수가 없었다.
“그게 그런 식으로 발견될 줄은 몰랐어.”
우연이 말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해 잠시 어물거리는 사이 말이 이어졌다.
“돌 말이야. 당연히 그 자리에 그냥 있을 줄 알았거든.”
우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돌이켜보면 처음 발견했을 때도 그런 돌은 보지 못했는데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르겠어.”
그게 또 이상하다고 우연이 말했다.
“그런 장소는 다 직접 발견한 거라고 했지?”
“맞아. 찾으려고 했던 건 아니지만 알 수 밖에 없었으니까.”
우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돌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마을에 전해내려오는 노래가 있다고 우연이 말했다.
“이제는 문헌으로 밖에 남아있지 않아서 가락은 잊혀졌지만, 공인된 사료에 남아있는 거니까출처는 명확해.”
앞부분 몇 구절을 기억하고 있다며 우연이 중얼거리듯 읊조린다.

어디서 굴러왔나
검고 작은 돌멩이
빗발치는 아우성은
여기서 시작됐나
폭풍이 부네
파도가 치네

“대충 이랬던 것 같은데 좀 틀렸을거야.”
워낙 오래 전에 읽었다며 웃는다. 그러면서도 못내 표정이 불편한 것이 트렁크에 있는 돌덩이가 신경쓰이는 듯했다.
중간중간 휴게소에 들르고 네 시간 가까이 달려서야 겨우 섬으로 향하는 배에 올라탈 수 있었다. 그나마도 돌멩이를 가지고 타는 것이 불안해서 어떻게 섬에 들어갈지 격렬한 토론을 마친 후였다. 어차피 섬으로 갈 수단도 배 밖에 없었으니 무의미한 토론이었으나 결론은 났다. 은아가 있으니 괜찮다. 아무리 이게 위험해도 물의 아이인 은아를 두고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을 거라는 게 세 사람의 의견이었다. 하루는 그렇구나, 하고 넘겼다. 바다에서 물의 아이가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 아는 것은 세 사람 뿐이었다.
몸을 실은 것은 흔들림이 온 몸으로 느껴지는 쪽배였다. 근처 바다에 고기 잡으러 갈 때 쓰는 작은 배였지만 섬에 가기에는 충분했다. 섬은 육지에서 육안으로 눈에 보일 정도로 가까웠다.
“배 타는 건 처음이네.”
배에 오르며 하루가 중얼거렸다. 혼잣말이었다.
“처음이야?”
잎새가 물었다.
“응. 이렇게까지 흔들리는구나.”
좀 불안하다며 하루가 웃었다. 앞서 배에 탄 잎새는 돌멩이를 든 하루와 조금 거리를 두고 서있었다. 둥근 눈이 천천히 깜빡였다.
“걱정 마. 내가 지켜줄게.”
그렇게 말하는 잎새의 목소리가 차분했다. 믿음이 가는 동시에 가지 않았다. 돌맹이 때문이었다. 이걸 들고 있으면 근처에도 못 오면서 그렇게 말해도. 지금 상황은 정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며 하루는 별 말 없이 웃었다.
배는 금방 바다로 나갔다. 날씨도 좋았고 바다도 잔잔했다. 바다 한 중간에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섬 쪽에서 갑작스런 돌풍이 몰아쳤다. 바다가 울렁이며 흔들렸다. 진동은 크지 않았으나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이었고 한 손에 돌을 단단히 쥐고 있던 하루는 잡을 곳을 잃었다.
“은 하루!”
하루는 잎새가 저렇게 큰 소리도 낼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리고 그대로 물속에 잠겼다.
풍덩.
부르르르….

바닷속은 꽤나 시끄러운 곳이었다. 물에 가라앉는 하루의 고막으로 온갖 소리가 들려왔다. 배 위에 있는 사람들이 뱉는 비명소리로 추정되는 소리가 귀를 찔렀다. 한 손에는 돌멩이를 꽉 움켜쥐고 하루는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떨어지는 순간 숨을 깊게 들이쉰 덕분에 아직 숨은 차지 않았다. 이제 발버둥쳐 나가면 된다. 수영을 할 줄 모르는 것도 아니었고, 바다가 그렇게 거친 것도 아니었다. 할 수 있었다. 하면 됐다. 하지만 할 수 없었다.
하루는 들었다. 소음 속에서 전해지는 희미한 목소리를.
- 가지 마.
가지 말라는 애원을.
- 아직 안 돼. 가지 마.
애절한 부탁을.
- 제발 내 목소리를 들어줘!
그래. 들어줄게. 말해봐.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루는 바닷속 어둠 속으로 빨려들 듯 사라졌다.

배 위에 남은 사람들의 허망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은아의 얼굴이 창백했다. 바다에 대고 소리치다가 무너지듯 주저앉은 잎새의 표정은 분노로 들끓고 있었다. 은아가 그대로 바다에 뛰어들 기세여서 아무것도 모르는 배의 선장이 은아를 말리고 있었다.
“여기 얕아. 금방 나올 거야. 조금만 기다려.”
그럴 리 없었다. 은아는 알았다. 지금 저기 얕은 바다에 하루가 없었다.

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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