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9'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17.09.27 텟님 커미션 (8)
  2. 2017.09.26 MxS 토막글
  3. 2017.09.21 미스즈와 가터벨트
  4. 2017.09.21 ff14 기반. 전사x학자 콤비.
  5. 2017.09.02 피피님 커미션

자캐 커미션입니다





 회천당문 분가 제자 당소유가 한숨을 포옥 길게도 쉬었다. 옆에 앉아 노닥거리던 분가 제자들이 질색했다. 옆에서 소란을 피우건 말건 소유는 그저 침울한 표정이다. 보다 못한 랑랑이 소유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재수 없게 뭐하는 거야. 날도 좋은데. 무슨 일 있어?”

 “랑랑, 유 소저는 왜 아녀자인 걸까?”

 밑도 끝도 없는 한탄이었다. 랑랑은 다급히 소유의 입을 틀어막았다. 누가 들었을까 무섭다.

 “얘가 무슨 소리야. 손님한테 그렇게 함부로 말하면 어째?”

 소유가 랑랑의 손을 찰싹 소리나게 때렸다. 따끔한 통증에도 아랑곳 없이 랑랑은 소유를 호당전으로 이끌었다. 소유가 손을 깨물고자 덤볐다. 순식간에 두 합을 주고받고 거리를 벌렸다. 지나가던 간청관 관리가 방을 어지르지 말라고 한소리했다. 소유는 입을 댓 발 내밀고 투덜거렸다.

 “생각해봐.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정명하고 곧은 기개며 드높은 무공 실력. 최소한 례화 아가씨랑 동급이거나 그 이상이 틀림없어. 우리 아가씨 실력이 보통 대단한 게 아니지만 기백부터가 다르잖아? 아, 유 소저가 사내기만 했더라면.”

 “했더라면? 유 소저에게 청혼이라도 하려고?”

 “바보야. 례화 아가씨랑 혼인할 수가 있잖아.”

 소유의 손이 랑랑의 어깨로 쇄도했다. 랑랑은 한 손을 들어 소유의 손을 가볍게 흘리고 역으로 소유의 정수리를 후려쳤다. 소유는 맨손으로 펼쳐지는 회천당문의 절초를 가볍게 잡아챘다. 분가의 자식이라도 회천당문의 제자. 두 사람이 장난처럼 주고받은 손짓에는 당가 무술의 요체가 담겨있었다.

 “대체 례화 아가씨가 왜 유 소저와 결혼하냔 말이야. 두 사람이 유랑 중에 눈이라도 맞았대?”

 “네가 두 분이 얘기 나누는 걸 못 봐서 그런다. 어찌나 다정한지 옆에 있기가 민망할 정도란다. 례화 아가씨 눈에서 꿀이 떨어지더구나.”

 “에엑?”

 소유는 랑랑의 손을 밀치고 휘적휘적 방으로 들어갔다. 적당히 주저앉아 다시 긴 한숨을 폭 내쉰다. 랑랑이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을 하곤 쫓아 들어왔다.

 “그게 무슨 소리야. 자세히 좀 얘기해봐.”

 “너 두분이 서로를 별명으로 부른다는 거 알고 있니?”

 “별명?”

 “례화 아가씨는 유 소저를 연랑, 유 소저는 아가씨더러 화매라 부른단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때부터 어찌나 좋아 죽던지. 내 간질간질해서 죽는 줄 알았다.”

 랑랑은 움찔움찔 솟아오르는 입꼬리를 간신히 붙들었다. 세상에. 이렇게 재밌는 소식이 있었다니. 소유 요 녀석은 아가씨 따라 나갔다 온 지가 언젠데 이제야 이걸 불어? 당장이라도 달려가 친구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좀 더 이야기를 들어두지 않으면 곤란했다. 어디서 어떻게 만나서 그렇게 되었는지를 들어두어야지! 어라, 그런데 유 소저는 소저인데 괜찮으려나?

 “착각한 게 아니냐? 아가씨가 예쁜 애들 좋아하는 게 하루이틀 일도 아니잖아. 예쁜 소녀만 보면 데려다 먹이고 입히고 예뻐하지 않았어. 이번에도 그런 거겠지.”

 “아유, 말을 마라. 아무렴 그걸 헷갈리려고. 이래뵈도 아가씨 호위로 따라다닌 게 십년이야. 어느모로 보나 확실한데 도무지 반길 수가 없는 소식이라 이 말이다.”

 하아. 소유는 또다시 길게 한숨을 뱉었다. 랑랑이 소유의 등을 철썩 때렸다. 소유는 등을 북북 문지르며 이를 갈았다.

 “복 달아난다, 이것아. 그건 그렇고 아가씨가 그 정도로 진심이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씨를 받을 남정네 하나 들여서 혼인만 올리면 누구와 다정하게 지내건 아무도 뭐라할 수 없는데.”

 “그렇기야 하지만. 유 소저가 사내면 모든 게 완벽할텐데 하늘은 대체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글쎄다. 그 아리따운 분을 남정네로 만들었다간 하늘의 분노를 사게 될걸.”

 “모르는 말씀. 유 소저는 사내여도 눈 부시게 아름다울 거야. 미인은 남녀를 가리지 않는 법이다.”

 랑랑이 쯔쯔 혀를 찼다. 소유는 콧방귀를 뀌며 간식을 가져오라 소리를 높였다. 랑랑이 소유를 쥐어박았다. 또 투닥투닥 장난 같은 대련이 벌어졌다. 지나가던 곤주당 하인이 건물을 부수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소유와 랑랑이 사이좋게 연무를 주고받는 사이 담장을 사이에 두고 맞붙은 백엽궁에는 때이른 봄바람이 불고 있었다. 하기사 무덥기로 유명한 회천 지방에서는 봄보다는 겨울이 밀어를 주고받기에 어울릴지도 모른다.

 “있잖아요, 연랑(燕娘).”

 “부르셨어요, 화매(花妹).”

 다정한 목소리는 연인의 그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삼단 같은 머리채를 어깨 너머로 길게 늘어뜨린 아리따운 처녀들은 생긴 것만큼이나 고운 목소리로 애틋하게 서로를 불렀다. 랑랑이 보았다면 눈이 휘둥그레졌을 풍경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다 남의 이야기. 본인들이 어떻게 보이는지 알 리 없는 두 여인은 그저 청명한 날씨와 아름다운 정원을 즐겼다. 호위도 시중 드는 사람도 없이 둘이서 시간을 보내는 건 처음이었다. 두근두근 설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리라.

 먼저 운을 뗀 폐월소접 당례화가 수줍게 웃었다. 백지처럼 새하얀 뺨 위로 붉게 노을이 졌다. 부끄러운 듯 달싹이는 입술은 이슬에 젖은 매화 빛깔이다.

 “줄곧 궁금하던 게 있답니다. 차마 실례가 될까 하여 여쭙지 못했지요.”

 “어찌 말씀을 꺼리셔요. 자매가 되자 하지 않으셨어요. 화매와 소녀 사이에 실례될 질문이 무에 있습니까.”

 창산제일봉 유연리는 그리 말하며 례화의 손을 붙들었다. 따뜻한 온기가 손에서 손으로 전해진다. 례화는 한층 수줍어 고개를 모로 꼬았다. 반짝이는 은발이 어깨를 넘어 사르르 흘러내렸다. 하얀 머리에 하얀 피부, 하얀 비단 옷까지 어느 한군데 희지 않은 곳이 없는 례화의 흰 속눈썹이 바르르 떨린다.

 “사람 마음이 바람과 같아 쉬이 변한다 하였습니다. 연랑이 소중하기에 함부로 하였다 잃을까 두렵답니다. 하면 연랑, 소녀가 사소한 질문을 하나 하여도 되겠는지요.”

 “물론이에요. 걱정이 많으십니다, 화매.”

 례화는 바람 없는 날 연못처럼 잔잔히 웃으며 다정히 연리를 마주보았다. 연리도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미인의 미소에 바람조차 소리를 죽였다.

 “연랑은 어인 연유로 길을 떠나게 되었나요? 여인의 몸으로 홀로 여행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압니다. 시중도 호위도 없이 홀로 떠나는 것이 불안하지는 않으셨나요.”

 연리는 낮은 신음과 함께 입을 다물었다. 례화의 고운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미안해요. 연랑이 어떤 사내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실력을 갖췄음은 알아요. 그대는 창산제일봉인걸요. 허나 소녀는 한낱 보잘것 없는 여인이라 쉬이 마음이 놓이지 않더이다. 여인네 홀로 여행이라니 이 폐월소접 당례화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어요.”

 례화는 소매로 얼굴을 가렸다. 그 모습이 청초해 새가 울었다. 연리는 실소하며 고개를 저었다. 연지도 바르지 않은 옅은 입술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당치 않아요. 화매, 나는 화나지 않았습니다. 어찌 답해야할지 고민이 되어서요. 어째서 길을 떠났느냐 물어도 할 말이 없어요.”

 연리는 조심스런 손길로 례화의 손을 붙잡아 내리고 상냥하게 웃으며 그를 이끌었다.

 맑은 하늘에 몽실몽실 뭉게구름이 흘렀다. 나란히 걷는 처녀들의 뒷모습이 그와 같았다. 바람이 없어 잔잔한 연못이 그 모두를 담았다. 넓은 궁에 사람이라곤 둘 뿐인 것처럼 사방이 고요했다.

 연리는 가볍게 눈을 감았다.

 “작년 일입니다. 언제나처럼 창산에 올랐는데 바람이 시원하더군요. 상쾌하고 기분 좋은 바람이었어요. 그런데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니 산봉우리에서 내려다 보이는 풍경이 바람에 못 미치지 않겠습니까? 매일 보아온 풍경인데 그날따라 이상하게도 좁고 갑갑해보이더랍니다.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여행을 떠나야겠다고.”

 그대로 눈을 떠 하늘을 올려다본다. 연리는 마음 속으로 그날 보았던 하늘을 그려보았다. 땅은 갑갑하니 좁기만 한데 하늘만은 탁 트이게 넓어서 마음이 편해지던 높고 파란 하늘을.

 “그리 마음을 먹으니 한시도 지체할 수가 없었어요. 서둘러 방으로 돌아가 짐을 쌌습니다. 맨손이나 다름 없는 상태로 길을 나서려던 저를 스승님이 붙드셨지요. 그렇게 떠났다가는 반나절도 못 버티고 돌아오게 될 거라고 한참을 잔소리 들었어요.”

 연리는 쿡쿡 웃는다. 례화가 그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여행 중에는 제대로 관리도 할 수 없을텐데 분도 없이 희고 고른 피부결과 노을이 진 저녁 무렵 하늘처럼 짙은 푸른 머리칼이 녹음 속에 어우러졌다. 례화가 꽃과 나비라면 연리는 연못에서 물을 마시는 한 마리 학이었다.

 “그렇게 떠난 길이었습니다. 답이 되었을까요?”

 연리가 례화를 마주하며 눈웃음쳤다. 단정한 이목구비가 자신을 향하자 례화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보잘것 없는 이야기였지요. 그래도 화를 내지는 마세요. 예쁜 얼굴이 망가집니다.”

 “연랑도 참. 제가 늘 화나 내는 여인으로 보이십니까.”

 례화가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연리가 낮게 소리내서 웃었다.

 화해 아닌 화해를 하고 두 여인은 풍양교를 건너 삼묘원으로 향했다. 삼묘원은 례화가 백엽궁을 들어갈 때 벌인 대공사의 결실이었다. 회천당문의 역대 후계가 거쳐온 역사 깊은 정원이지만 엎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최고의 정원사를 모시고 토대부터 다시 쌓은 정원은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났다. 이름하여 차일정(遮日庭). 례화의 바람대로 꽃과 새, 작은 동물들이 어우러진 아기자기하고 사랑스러운 정원이었다.

 례화는 구석구석 자신만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어진 차일정을 어느 한군데 빠질 것 없이 사랑했으나 아무리 사랑하는 자식이라도 개중 특별히 눈에 밟히는 아이가 있는 법이다. 아리따운 이에게 아리따운 것만 보여주고 싶어 례화는 연랑과 함께 영미원으로 향했다.

 연리가 입을 떡 벌리고 감탄했다. 붉은 꽃, 노란 꽃, 푸른 꽃이 넓은 화원을 수놓고 있었다. 같은 종의 꽃이 거의 없고 저마다 색과 형태가 다른데도 전체가 조화를 이루어 하나의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었다.

 례화는 뿌듯함을 감추지 못하고 샐쭉 웃었다. 그 모습이 또 참 예뻤다. 연리가 화단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이 꽃은 무엇이고 저 꽃은 무엇이라 일러주었다.

 “잘 아시네요. 꽃에 조예가 깊으신 줄은 몰랐습니다.”

 “수줍어요. 영미원은 제가 직접 가꾸었답니다.”

 연리는 여인을 돌아보고 다시 한 번 감탄하고 말았다. 온화하게 웃는 례화의 뒤로 오색찬란한 꽃밭이 펼쳐져 있는데 그 화려한 색채가 색조가 없는 례화를 장식해 미모가 한층 빛나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진정 꽃밭의 주인이었다. 꽃들이 례화의 미모를 찬양하는 것 같은 풍경 속에 자신이 자연스럽게 섞여 있음은 깨닫지 못한 채였다.

 “이 꽃은 무엇입니까?”

 “산하엽이라 합니다. 물에 젖으면 꽃잎이 투명하게 변한답니다. 수정꽃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리지요.”

 “꽃잎이 투명해진다고요? 신기하군요. 이건 뭐라고 하나요?”

 “그건 멀리 서역에서 구해온 꽃입니다. 설융화라고 부르지요. 눈이 내리는 높은 산 바위틈에 피는 꽃이라더군요.”

 “이건 압니다. 목련이군요.”

 “맞습니다. 잘 알고 계시네요.”

 례화의 설명을 들으며 화원을 한바퀴 둘러본 연리는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꽃들이 가득했다. 제각기 다른 기후와 다른 토지에서 자라는 꽃들을 한자리에 모아 동시에 피워냈다. 또 피지 않은 꽃과 만개한 꽃을 섞어 어느 한 군데 비어보이지 않도록 배치한 솜씨는 또 어찌나 절묘한가. 연리가 이를 언급하자 례화는 시기별로 돌아가며 화원을 장식할 수 있도록 순서대로 배치했을 뿐이라며 시선을 떨궜다.

 영미원의 아름다움에 크게 감동한 연리는 삼묘원을 전부 둘러보고 싶었다. 례화에게 말하자 기뻐하며 안내해주었다. 새를 기르는 제화원과 작은 동물들을 기르는 미려원을 순서대로 들렀다. 손이 덜 가는 탓인지 관리하는 하인이 보이지 않던 영미원과 다르게 제화원과 미려원에서는 례화를 발견한 하인이 달려나와 문을 열었다. 동물들과 항시 함께 지내는 하인들은 연리의 질문 공세에도 차분하게 대답했다.

 “이 아이가 제가 제일 아끼는 친구랍니다. 설화라고 해요.”

 례화가 무늬 없이 하얀 털을 가진 고양이를 안아들며 웃었다. 연리가 따라 웃었다. 옅은 회색 눈을 가진 고양이는 례화의 팔에 나른하게 고개를 얹고 고롱거렸다.

 “화매를 닮았네요.”

 연리가 쓰다듬으려고 하자 설화는 이를 드러내며 손을 피했다. 례화가 미간을 모으고 고양이를 야단쳤다. 연리는 례화를 말렸다.

 “괜찮아요. 말도 못하는 짐승인걸요. 호되게 대하지 마세요.”

 “연랑.”

 “정말 괜찮아요. 그렇지?”

 연리는 설화와 눈높이를 맞추고 웃었다. 거리를 지키니 설화도 물러서지 않았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연리를 쳐다보던 설화는 야옹하고 울었다. 사람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것 같은 반응에 연리가 웃었다. 레화는 속이 상했는지 기운 없는 표정으로 설화를 내려놓았다. 설화는 례화의 발치를 맴돌았지만 반응이 없자 곧 떠났다.

 연리는 토라진 례화와 함께 미려원을 나왔다. 례화는 계속 속상해했다. 두 사람은 초록빛 산책로를 느긋하게 걸었다.

 “개의치 마세요. 저는 초대받은 것만으로도 기뻤습니다.”

 “설화가 연랑을 훨씬 기쁘게 해줄 줄 알았어요.”

 “기뻤어요. 눈처럼 새하얀 털을 가진 고양이는 처음 보았습니다. 화매와 함께 있으니 마치 자매 같았어요.”

 “연리도 그렇게 생각했나요? 그래서 이름이 설화(雪花)랍니다.”

 례화가 섭섭함을 떨치고 밝게 웃었다. 옥구슬이 구르는 듯한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퍼져나갔다. 연리는 처음 보는 례화의 큰 웃음에 놀라워했다.

 례화는 연리와 팔짱을 끼고 호관단을 올랐다. 서로의 팔을 붙든 손이 겹쳤다. 오후의 마지막 햇살을 받아 푸르른 차일정이 반짝반짝 빛났다. 조금 있으면 노을이 질 터였다. 하루종일 둘이 함께 거닌 정원을 내려다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례화가 연리에게 살짝 기대자 연리가 마주 뺨을 붙였다. 두 사람은 꼭 붙어 서서 노을이 지기를 기다렸다.

 “누각에서 화매와 함께 아침을 먹은 건 잊을 수 없을 겁니다. 안개낀 호수가 무척 아름다웠거든요.”

 “저는 수미경을 걸은 게 좋았어요. 저녁이면 그때와는 또 다른 풍경을 볼 수 있답니다.”

 “앉아서 쉬는 것도 화매와 함께 하니 즐거운 놀이가 되었어요. 하는 일 없이 정원을 거니는 것만으로 이렇게 즐거울 수 있는 상대는 화매가 유일합니다.”

 “어머? 그런 말씀을 하시면 연랑을 사모하는 사내들이 눈물 지어요.”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그런 말에 굴하는 사내라면 저도 관심 없어요.”

 례화가 소리 죽여 웃었다. 연리도 함께 웃는다.

 처녀들이 키득거리며 한담을 나누는 사이 하늘에는 붉게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기대선 채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서쪽 하늘을 중심으로 세상이 평소와는 다른 색으로 물들어갔다. 단풍이 없는 회천의 나무들은 매일 이 때를 기다린다. 왕의 색으로 몸을 장식할 수 있는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울긋불긋 아름답게 치장했다. 례화의 은빛 머리칼과 하얀 옷자락도 연리의 푸른 머리칼과 옷가지도 붉게붉게 물들었다.

 두 사람은 노을이 완전히 사그라지기까지 그곳에 서있었다. 몸을 꼭 붙이고 온기를 나누며 서있었다. 풍경을 바라보는 동안은 긴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제각기 지나간 시간을 떠올리며 아련한 추억에 잠겨 있었다.

 빛이 사그라지고 태양이 은수성 담장 너머로 모습을 감추었다. 례화와 연리는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까르르 종달새처럼 울었다.

 “한 바퀴 더 돌고 들어갈까요?”

 례화가 제안했다.

 “날이 어두워지면 침소로 찾아가는 길을 잃어버릴텐데요.”

 연리가 웃었다. 두 사람은 천천히 수미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날은 어둡지만 두 사람에겐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례화가 아직도 차일정을 거닐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백엽궁 하인이 등롱을 들고 찾아왔다. 례화와 연리는 하인을 앞세우고 느긋하게 오늘의 마지막 산책을 즐겼다.

 “친구집에서 그런 걸 걱정하는 게 아니랍니다. 제 궁에서 주무시고 가지 않으시겠어요?”

 “화매의 침궁에서요?”

 연리가 휘둥그레지고 례화는 소리 죽여 웃었다.

 “농담이어요. 여염집 여인들은 침소를 나누며 우애를 다지기도 한다기에 한 번쯤은 해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지요. 그 일이 생각났을 뿐이랍니다.”

 “그런 소박한 소망이 있으셨나요. 같은 방에서 자는 것뿐이라면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닌데요.”

 “연랑은 다른 사람과 한 방에서 자본 적이 있나요?”

 이번엔 례화가 놀랄 차례였다. 연리는 난처한 듯 웃었다.

 “어릴 때는 제자들 여럿이 같은 방을 썼으니까요. 청무문은 그리 규모가 크지 않아서 모두에게 독방을 줄 여유는 없답니다. 돌아가면 제 방은 없어졌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럴수가. 연랑의 방을 빼앗으면 제가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례화가 진지하게 화를 냈다. 연리는 웃어넘겼다.

 저녁에 보는 수미경은 례화가 오전과는 다른 멋이 있었다. 군데군데 세워진 쇠기둥 꼭대기에 하인들이 불을 붙이자 불빛과 그림자가 어울려 한 폭의 근사한 산수화처럼 보였다. 그림자가 생기는 모양을 고려해 만들어진 미로였다. 잘 보니 그냥 산수화가 아니라 유명한 그림을 정원으로 모작한 형태였다. 아, 이렇게 섬세한 작품이라니. 연리는 또 한 번 감동하고 말았다.

 “이곳을 꾸민 정원사가 어느 분이라고 하셨지요? 정말 놀랍습니다. 천재에게는 한계가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례화는 연리와 함께 수미경을 걷는 동안 정원을 이렇게 꾸미게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했다. 새로 백엽궁에 들어온 례화가 정원을 처음부터 갈아 엎게 된 이유, 걸맞는 정원사를 섭외하기까지의 과정, 공사 중에 일어난 우여곡절과 완성된 후에 정원사와의 인연에 이르기까지. 연리는 좋은 청자였고 사위는 고요해 세상에 둘만이 남은 것 같은 시간이었다. 례화와 연리는 마지막까지도 산책이 끝나는 것을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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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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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xS 토막글

story in my world 2017. 9. 26. 08:15

예쁘장한 웃는 얼굴. 보면 볼수록 기분 좋아지는 미모였다. 마음이 시키는대로 손을 뻗어 어루만졌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뺨을 붉히는 게 귀여워 입을 맞춘다. 부끄러워하면서도 열심히 응하는 모습이 사랑스럽다. 미스즈는 쿡쿡 웃으며 아직도 소년 같은 연상의 연인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동안 누누이 일러온 대로 자연스럽게 허리를 감싸안는 팔이 든든하다. 미스즈가 소이치로의 얼굴에 키스하자 가뿐하게 안아들었다. 처음에는 놀랐지만 이제는 익숙해진 동작에 미스즈는 편하게 몸을 맡겼다.
넓은 품에 머리를 기대자 졸음이 몰려왔다. 집에 돌아오면 녹초가 되어버리는 건 전부 소이치로 탓이라고 속으로 되뇌인다. 전에는 어떻게든 집안을 돌보며 일을 병행했는데 이제는 집에 발을 들이면 잠부터 왔다. 아니, 집은 커녕 소이치로를 마주치면 피로가 몸을 덥쳤다. 처음에는 쑥쓰러워 거절했던 달랑 안아드는 손길이 없으면 곤란한 것이 되었다.
어린애 취급이라도 좋다. 미스즈는 진심으로 생각했다. 소이치로의 품에 안겨있으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과분한 행복인데 소이치로는 미스즈를 먹이고 입히려 애썼다. 집안은 반짝거리고 매일 먹는 음식의 질이 달라졌다. 감당하기 힘든 애정에 허둥거리던 것도 옛날 이야기. 지금은 아무래도 좋으니 소이치로가 하는 대로 맡기게 되었다. 소이치로는 맡겨놓으면 뭐든지 알아서 해주는 만능 연인이었다.
꾸벅꾸벅 조는 사이 미스즈를 차에 실어 집으로 이동한 소이치로가 다시 미스즈를 안아들었다. 조느라 정신이 흐린 와중에도 착실하게 소이치로를 끌어안는다. 일년도 채 되지 않은 사이에 몸에 붙은 습관은 때로 미스즈를 불안하게 했지만 동시에 매우 즐거웠다.
“소이치로.”
“더 자. 다 왔어.”
“응.”
그저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불렀는데 다정한 말이 돌아왔다. 행복한 마음으로 다시 눈을 감았다. 소이치로의 입술이 머리 위에 닿는 게 느껴졌다. 내일은 주말이다. 데이트라도 해줘야겠다는 의무감과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탈력감이 동시에 들었다. 소이치로에게 맡겨야지. 미스즈는 생각했다. 데이트가 하고 싶으면 가자고 할 것이고 아니면 꼭 끌어안고 뽀뽀를 할테다. 그걸로 충분했다. 소이치로는 괜찮다.

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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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라면 누구나 인생에 한 번쯤은 스커트를 입어야할 때가 있다. 승부수라던지 그런 로맨틱한 의미가 아니다. 문장이 가리키는 그대로 여자에겐 때로 스커트를 걸치고 그것이 아니면 자신을 가꾸는 수단이 없는 것처럼 행동해야할 때가 있다. 시이나 미스즈에게도 그런 때가 있었다. 아니, 그런 시절이 있었다. 자라나는 성장기 청소년에게 강제로 활동을 제약하는 의상을 입히고 규격에 맞춰 방긋방긋 웃는 훈련을 시키는 나라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는 스커트도 교복도 좋아하지 않았지만, 거부할 권리가 없었기에 십년이 넘는 세월을 하반신 노출로 인한 냉증에 시달려야했다.

 그 흔적이 이것이다.

 미스즈는 서랍 구석에 박혀있던 낡은 가터벨트를 꺼내 옆에 던져두었다. 사용한 지 오래되어 어디에 뒀는지 기억도 하지 못했지만 없는 세간에서 물건을 찾아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정돈은 못해도 어지르지는 않는 습관 덕분이다. 미스즈에겐 더이상 스커트를 입으라고 강요할 사람이 남아있지 않았지만, 이 물건이 남아있는 이유는 단순하다. 추억이 깃든 물건이었다.

 고등학생 때였다. 뛰어난 성적으로 장학금까지 받으며 들어간 학교임에도 큰 기대는 없었다. 지금보다 더 세상을 미워하고, 사람을 믿지 못하던 15살의 미스즈는 새 학교가 아무리 뛰어난 명문학교일지라도 어차피 자기 자리는 없으리라고 미리부터 단정하고 있었다. 설령 환영받는다 해도 마찬가지다. 가장 중요한 것이 달라지지 않는 한 미스즈의 인생에는 변화가 없을 테니까 기대할 게 없었다. 그래서 미스즈는 예비소집일을 거치고 입학식을 마친 후에도 시큰둥한 상태였다.

 고등학생 쯤 되면 대다수의 학생들은 입학과 졸업이라는 연속 행사에 큰 감동을 느낄 수 없게 된다. 이르게는 유치원부터, 보통은 초등학교부터 수차례 겪어온 행사기 때문이다. 그나마 졸업식은 선후배와 이별하는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축제 분위기로 변하기도 하지만 입학식은 차라리 탐색전에 가까웠다. 앞으로 삼년을 부딪히게 될 면면을 확인하고 편안한 위치와 든든한 동료를 얻기 위한 눈치싸움.

 미스즈가 입학한 고등학교는 전교순위에 들어가는 명문진학고여서일까. 중학교 때와는 또 분위기가 달랐다. 구김 하나 없는 새 교복을 입은 학생들은 크게 떠들지도 않고 예의바르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서로 아는 사이도 있었지만, 꽤 많은 학생들이 안면이 없어보였다. 중학교 때에 비해 주변에 관심 없는 학생이 많았다. 미스즈는 그런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신입생 대표로 연설한 탓에 관심을 가지고 인사하러 오는 학생이 있었으나 미스즈는 냉랭하게 인사하고 관심을 끊어버렸다. 먼저 인사한 아이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덕분에 더이상 말을 걸어오는 학생은 없었다.

 근처에 앉은 아이들과 말을 섞으며 조금씩 교실이 소란스러워지는 중에 담임이 나타났다. 이렇다할 특색이 없는 사람이었다. 적당한 키에 적당한 몸매, 선생님다운 차림을 한 여자. 그리 길지 않은 갈색 머리를 하나로 묶었다.

 “인사.”

 특색이 없다는 말은 취소. 담임은 아주 우렁찬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었다. 학생들은 약 9년간 단련된 습관대로 입을 맞춰 인사했다.

 나타나마자마 우렁우렁하게 출석을 부른 담임은 자신을 토야마 요시코라고 소개했다. 시원시원한 인상에 학생들 표정이 밝았다. 아침조회와 종례를 빠르게 끝내주는 담임만큼 좋은 담임도 별로 없다. 안내해야할 사항을 안내한 담임은 곧 교실을 빠져나갔다.

 “시이나 따라오렴.”

 미스즈도 데리고 갔다.

 새 담임은 좋은 선생님이었다. 미스즈는 앞으로 자신에게 일어날 변화를 알지 못했지만, 그것만은 분명하게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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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박사박. 눈이 흙처럼 밟혔다. 사방이 눈 투성이였다. 하얀 세상. 모래바람이 부는 고장에서 나고 자란 이는 새하얀 대지가 낯설기만 하다. 어린아이처럼 몸집이 작은 여인은 양손을 비비며 추위를 물리쳤다. 생소한 풍경에 감동해 넋을 놓고 서있기에는 날이 너무 추웠다.

 추위를 견디다 못해 발을 동동 구르자 지켜보던 경비대원이 낡은 털가죽을 건내주었다. 여러 사람이 돌려 사용해온 것이 분명한 가죽을 어깨에 두르자 조금은 한기가 가시는 듯 했지만 그것도 잠시. 비엔나는 무기를 내려놓고 주변을 뛰기 시작했다. 얼떨결에 도끼를 맡게 된 경비대원이 휘청거렸다.

 팀을 모은 사람이 가장 먼저 나와서 일행을 기다리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솔직히 오늘은 조금 후회스럽다. 시간 맞춰 나올걸. 비엔나는 자진해서 때아닌 뜀박질을 하고 있는 제 처지를 한탄했다. 모험가로 이름이 높아지는 건 반가워도 이렇게 추운 곳은 사절이다. 아, 정말 먹고 살기 힘드네.

 멀리서 길죽한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손발에 온기가 돌아올 정도로 열이 오른 비엔나는 뜀박질을 멈췄다. 본디 엘레젠이 많은 지역이라 이 거리에서는 일행인지 아닌지 판가름할 도리가 없었다. 비엔나는 경비대원에게 손짓해 신호를 남기고 낯선 사람을 향해 달려갔다.

 낯선 엘레젠은 비엔나를 보고 반가운 얼굴을 했다. 청년은 비엔나가 오늘 함께하기로 한 일행임을 확인하고는 뒤를 향해 큰소리를 내며 손짓했다. 천천히 걸어오던 휴런이 서둘러 달렸다.

 창을 든 창백한 엘레젠 청년은 레너드, 활과 화살통을 맨 휴런 여인은 에이라라고 소개했다. 레너드 쪽은 팀을 모을 때 직접 만났으니 안면이 있지만 에이라는 초면이었다. 두 사람도 원래 아는 사이는 아니었다. 아도넬 점성대 근처에서 만나서 함께 오게 되었단다.

 비엔나는 두 공격수와 함께 돌방패 경계 초소 앞으로 돌아왔다. 비엔나에게 털가죽을 건넨 경비대원이 세 사람을 맞아주었다.

 “이렇게 셋이 가는 건 아니죠? 치유사는요?”

 “글쎄. 아직 안 왔네요.”

 비엔나는 눈을 데록 굴렸다. 약속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일행을 모은 입장에서 시간 약속을 어기는 사람은 질색이다. 목숨을 맡길 사람인데 벌써부터 신뢰가 꺾였다. 하지만 조금 더 기다리기로 한다. 사람이 하는 일, 알고 보면 용서할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르지 않은가.

 비엔나는 두 사람에게 이제부터 수행할 임무와 돌방패 경계 초소의 위험성에 설명했다. 두 사람도 어느정도는 조사를 마치고 왔는지 이해가 빨랐다. 레너드와 에이라는 이슈가르드에서 줄곧 골머리를 썩히고 있는 용족이 점령한 장소라는 것과 들어가보지 못한지 오래되어 상황이 얼마나 악화되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듣고도 겁먹은 기색이 없었다. 좋은 동료였다. 비엔나는 만족스레 웃었다.

 “이건 초소의 설계도예요. 내부가 상하거나 무너져서 길이 바뀌거나 함정이 생겼을 수도 있지만, 제가 앞서가면서 인도할 테니까 적당히 거리를 두고 따라오세요. 여차하면 몸으로 받아낼테니까요.”

 “괜찮겠어요? 정말 위험할지도 몰라요.”

 “나만 믿어요. 괜히 도끼를 들고 있는 게 아니니까.”

 비엔나는 돌려받은 도끼를 어깨에 얹어보였다. 조그만 라라펠 몸에 맞춰 제작된 앙증맞은 크기였다. 허나 노련한 모험가인 에이라는 그 작은 도끼가 단련된 전사의 손에서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알고 있다. 아직 경험이 모자란 레너드는 걱정스러운 기색을 완전히 거두지 못했지만, 반론도 하지 않았다. 목숨을 맡길 사람을 출발하기도 전부터 의심해봐야 좋을 게 없었다.

 문제는 치유사였다. 브리핑이 완전히 끝났는데도 소식이 없는 치유사 탓에 일행의 얼굴에는 그늘이 졌다. 비엔나는 미간을 팍 찌푸렸다.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거야.

 그때였다.

 “저기. 모험가님들. 혹시 누구 기다리고 계신가요?”

 마침 교대하는 타이밍인지 무기를 챙겨 자리를 옮긴 경비대원 하나가 세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지만 이렇게 높은 모자를 쓰고 안경을 낀 라라펠 모험가님을 찾으시는 거라면 안에 계실 거예요. 먼저 안을 살펴보겠다고 했거든요.”

 “그걸 왜 이제 말해?”

 비엔나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경비대원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강한 힘으로 아래로 당겨진 키 큰 경비대원은 얼빠진 소리를 내며 비틀거렸다.

 “제가 어떻게 압니까. 제대로 자기 소개도 안하고 멋대로 자긴 들어가야겠다고 박박 우겨서 들어갔단 말입니다. 아무리 말려도 안 들어먹으니까 죽어도 우리 책임 아니라고 하고 들여보냈다고요. 차림새가 모험가보다는 골방 학자 같아서 결사적으로 말렸는데 경비 중인 우릴 기절시키고 들어갔어요. 들키면 대장님한테 죽습니다.”

 “뭐야?”

 비엔나는 황망하게 외쳤다. 레너드와 에이라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치유사 혼자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짓을.”

 “지금까지 나오지 않은 걸 보면 죽은 거 아니에요?”

 “경비 둘을 혼자 눕힌 거 보면 실력자잖아요. 얼른 따라가면 괜찮을지도 몰라요.”

 세 사람은 허둥지둥 무기를 챙겨들었다. 정비할 시간도 고민할 시간도 없었다.

 “만약 위험해지면 바로 도망쳐야해요. 우린 치유사가 없으니까.”

 “무사히 살아있으면 좋을텐데.”

 “그럼 진작 나왔겠지. 말도 안 돼. 이런 일이 될줄이야.”

 비엔나는 도끼를 세워들고 어서 문을 열라고 독촉했다. 뒤에서 두 사람이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어서, 어서 들어가보지 않으면.

 찰캉. 쇳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하얗게 서리가 앉은 돌벽이 세 사람을 반겼다. 먼 안쪽에서 기이한 울음소리가 들린다. 용족의 울음소리예요. 나직이 중얼거린 건 레너드였다. 세 사람의 뒤에서 다시 찰캉, 문이 잠겼다. 마음 같아서는 문을 열어두라고 하고 싶지만, 일행과 다른 경로로 용족이 몰려나오면 큰일이다. 경비 둘이서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가죠.”

 비엔나가 성큼 앞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레너드와 에이라도 무기를 다잡았다.

 “지각지각지각.”

 통통통. 장난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머리와 등을 두드리는 둔탁한 감촉에 일행은 놀라 돌아섰다. 높은 학사모를 쓰고 동그란 안경을 낀 라라펠이 두꺼운 책을 한 손에 들고 씩 웃고 있었다.




2.

 세 사람이 모두 어처구니 없어 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라라펠 여인은 뺨 근처까지 기른 단발머리를 찰랑거리며 즐겁게 웃었다. 비엔나는 어이가 없어 말을 잊었다. 이건 뭐야?

 치밀어오르는 짜증을 꾹꾹 눌러담는 사이 눈치코치 없는 그가 발랄하게 책을 펼치곤 수식을 읊었다. 비엔나는 미처 생각이 머리까지 닿기도 전에 도끼를 치켜들었다. 술식을 외우는 마술사는 처치한다. 선수 필승이 목숨을 지킨다. 힉. 짧게 숨을 들이킨 정체불명의 라라펠이 양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타임!”

 절박한 외침이 또 엉뚱했다. 잠깐도 아니고 타아임? 비엔나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높이 치켜든 도끼에 무게 중심이 쏠려 자세를 유지하기가 편치 않다.

 “당신이 뭔지 모르겠지만 얻어맞고 그냥 넘어가는 성정이 못 돼서요.”

 미안하네요. 입 속으로 중얼거리며 비엔나는 치켜든 도끼를 내리찍었다. 도끼날은 얼어붙은 그의 왼쪽 바닥을 찍었다. 돌과 쇠가 부딪혀 깡하는 소리가 났다. 비술사로 추정되는 마술사(책을 들고 있으니 비술사가 틀림없다고 비엔나는 생각했다.)는 생글생글 웃는 얼굴 그대로 굳어버렸다. 밖에서 경비병이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비엔나는 상대가 얼어붙은 것에 만족했다. 그대로 뛰쳐나가면 어쩌나 걱정이 들었지만 이 뻔뻔한 자는 회복이 빨랐다. 

 “멋진 도끼네요. 믿고 따라갈 수 있겠어요.”

 넉살 좋게 깔깔 웃는 모습이 얄미웠다. 비엔나는 복잡한 머리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이 몰상식 덩어리는 대체 어떻게 상대해야하나.

 “자자, 진정해요. 해치려는 게 아니니까. 보호 마법은 두르고 가야죠? 프로테스라고요.”

 또 두서없이 주문부터 외우려고 한다. 비엔나는 강제로 책을 덮어버렸다. 라라펠 비술사가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떴다.

 “압수하기 전에 가만히 있어봐요. 확인 좀 합시다. 당신이 오늘 돌방패 경계초소 공략에 지원한 치유사인가요?”

 “네, 맞아요. 마침 저도 여기 들어와야했는데 일정이 딱! 맞는 곳이 있지 뭐예요. 이건 운명이다 싶어서….”

 “여기서 대체 뭘 한 거죠? 한참 기다렸잖아요.”

 “정찰이죠. 사전 답사는 기본, 준비 완료랍니다.”

 늘어질 기세기에 말을 잘랐는데도 그는 마냥 즐거웠다. 기가 막혀 입을 다물자 묻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설명을 시작했다. 준비성은 좋지만 이런 사람에게 등을 맡겨야하나? 아니, 절대 무리다. 비엔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모습을 본 치유사(라고 주장한 라라펠)은 설명을 멈췄다. 어느새 초소 내부 도면까지 펼쳐들고 있었다. 실랑이에 말을 보태지 않고 있던 레너드와 에이라는 설명에 귀를 기울이다 비엔나를 쳐다보았다. 주목 받게 된 비엔나는 미간을 팍 찌푸렸다. 오늘은 정말 느낌이 좋았는데.

 “미안하지만 해산하죠. 선금을 지불했으니 불만은 접수하지 않겠어요.”

 “네?”

 레너드와 에이라가 깜짝 놀랐다. 치유사(라고 주장한 라라펠)도 마찬가지였다.

 “돌아가죠. 오늘은 날이 아닌가 보네요.”

 “왜요?”

 치유사(라고 주장한 라라펠)가 물었다. 그제야 웃음을 지우고 딱딱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진작 그랬으면 좋았을걸. 비엔나는 못잖게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치유사 없이 진입할 순 없어요. 용은 사납고 강해요. 당신이 혼자 둘러볼 수 있는 곳만해도 그런데 더 안쪽엔 뭐가 있을지 어떻게 알겠어요?”

 “제가 치유사예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당신 비술사잖아요? 치유술 가지고 감당할 곳이 아니에요.”

 비엔나의 말에 레너드와 에이라도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도 그게 걱정이었나보다.

 치유는 환술사에게. 모험가로서 관록이 있건 없건 그건 기본적인 상식이다. 비술사도 주술사도 자체적인 치유술은 가지고 있지만 환술사가 모험자 무리의 회복을 책임지게 된 것은 아주 간단한 이유였다. 절대적인 회복량의 차이 때문이다. 개인에게 부여하는 치유술 밖에 존재하지 않는 다른 마술사에 비해 환술사는 일행 모두에게 부여하는 광역 치유술인 메디카, 치유술인 케알의 상위 호환 마법, 케알라와 케알가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 세 가지 마법으로 개인과 일행 전체의 회복을 담당하는 동시에 독이나 저주를 정화하는 에스나로 일행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한다. 고작해야 소량의 회복만 가능케하는 치유술 하나로 승부하기엔 비교가 되지 않는 기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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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카 타입 자캐



 끈적거리는 습기에 일본에 서있다는 실감이 났다. 섬나라는 끈적거린다. 바다의 습기를 머금은 끈적하고 소금기 어린 공기가 모국의 공기였다.

 미스즈는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가방끈을 추스르고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민가에서 이어지는 길에 하얀 건물이 우뚝 서있다. ○○○ 종합 병원. 편의점과 산책로가 이어지는 뒷문으로 진입하자 오래된 병원의 낡고 깨끗한 내부가 미스즈를 반겼다.

 두개 시를 합쳐 가장 큰 종합 병원이니만큼 외래환자도 적지 않다. 미스즈는 복잡한 대기석을 포기하고 주변을 살폈다. 전화를 할까 고민하는 사이 기다리는 사람이 나타났다.

 진한 검은 머리에 말갛고 순한 인상의 젊은 남자였다. 아직 마흔도 채 되지 않은 듯 깨끗한 얼굴과 선한 눈매는 미스즈가 그리워하던 사람과는 많이 달랐지만 웃는 옆얼굴, 하얀 목덜미가 닮았다. 미스즈는 가볍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케미 소이치로씨인가요?”

 “안녕하세요. 시이나 미스즈씨죠? 처음 뵙겠습니다.”

 아케미 소이치로는 다정스럽게도 웃으며 미스즈의 손을 잡았다. 생각보다 손이 컸다.

 * 

 두 사람은 소이치로의 집으로 향했다. 병원에서 무척 가까운 작은 집이었다. 몇 년 전까지만해도 조카와 함께 그럴듯한 집에서 살았지만 독립을 원하기에 집을 넘겨주고 자기가 나왔다고 했다. 미스즈는 무심코 그리운 사람을 떠올리고 만다. 희생정신도 상냥함도 그 사람을 닮았다.

 남자 혼자 사는 집치고는 깨끗하고 아기자기한 집안을 둘러보는 사이 소이치로가 다과와 앨범을 들고 왔다. 그 위에 쌓인 건 아마도 비디오. 요즘 저게가 있을까? 미스즈는 신기해하며 그가 들고 온 것들을 살펴보았다.

 소이치로가 들고 온 앨범에는 미스즈가 몇 년을 그리워했는지 모를, 그리운 그 사람의 얼굴이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빛은 다소 바랬지만 분명히 그 사람이었다. 아케미 마리. 어린 미스즈를 돕고자 했던 몇 안 되는 소중한 추억의 그 사람. 사진 속 마리는 웃음기 없는 딱딱한 표정이었지만 미스즈는 마리의 미소를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누나는 항상 어려운 사람에게 관심이 많았어요. 하지만 직접 인연이 있는 사람이 찾아온 건 처음이네요. 누나의 지인들은 대부분 누나의 동료였거든요.”

 소이치로는 김이 오르는 커피잔을 들고 그리운 눈으로 앨범을 훑었다. 그는 무척 적극적이어서 미스즈는 마리에 대해 궁금해하지 못한 부분까지도 들을 수가 있었다.

 “당시의 누나는 무척 마음이 약해져 있었어요. 절대 그렇게 포기할 사람이 아닌데 그렇게 가버렸죠.”

 소이치로는 눈물을 훔쳤다. 마리가 세상을 뜬지도 벌써 이십년이 지났다. 아직도 눈물이 나오는 것일까. 미스즈는 무덤덤하게 소이치로를 바라보았다. 남이 흘려주는 눈물이 고마웠다. 미스즈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매마른 미스즈의 가슴은 눈물 대신 통증을 호소했다. 심장 언저리, 정확히는 그보다 조금 아래쪽 배인지 허리인지 모를 곳이 찌르는 듯이 아팠다. 내색하지 않고 소이치로가 미스즈의 요청대로 진하게 내려준 커피를 한모금 머금었다.

 “혼자 사는 형제분이 이런 걸 다 가지고 계시는군요.”

 아, 그게요.

 그렇게 운을 뗀 소이치로는 기다렸다는 듯 기쁜 얼굴을 하고 옛날 이야기를 떠들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독립적이고 부모님에게 반항적이었던 큰 누나의 이야기였다. 어린아이의 눈으로 바라본 마리가 얼마나 멋있었는지 느껴졌다. 미스즈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아홉살 여름이었다. 그날도 부친은 주민등록에도 올라있지 않은 미스즈의 생모와 뒹굴기 위해 어린 미스즈를 길바닥으로 쫓아냈다. 막내는 장에 들어가 소리도 없이 잠들었으므로 쫓겨난 건 미스즈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막내까지 데리고 길거리에 앉아있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간을 보내기 위해 해도 뜨지 않은 놀이터 그네에 앉아 시간을 보내던 중이었다. 머리를 허리까지 기른 예쁜 여자 어른이 놀이터를 지나다 미스즈를 발견했다. 우연이 그들을 비껴갔는지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만난 마리는 부친의 폭력과 굶주림에 시달리는 미스즈를 집으로 데려가 먹이고 씻겼다. 긴 만남은 아니었다.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건 기뻤지만 아버지의 눈을 피해 혼자서 빠져나오는 게 힘들어 몇 번 보지 못했다.

 미스즈가 만난 마리는 특이하긴 했지만, 마냥 상냥하고 다정하고 예쁜 사람이었다. 소이치로가 이야기하는 어린 시절의 마리, 대학 시절의 마리는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하지만 그런 소이치로의 이야기 속에서도 미스즈가 아는 마리가 살아있었다. 소이치로의 얼굴에서 부분부분 마리의 그림자가 스치는 것처럼 그렇게 마리가 보였다.

 남의 이야기에 호응하는 기술이 모자란지라 제대로 대꾸도 해주지 못했는데 소이치로는 한참을 이야기했다. 그 이상 하라고 해도 할 수 없는 미스즈는 그런 소이치로의 넉살이 고마웠다. 그리운 사람의 흔적이 보일 때마다 고개를 주억이고 몇마디 던졌을 뿐인데 소이치로는 무척 기뻐보였다. 미스즈도 기뻤다. 마리의 추억은 온전히 미스즈의 것이어서 아무와도 공유할 수 없었던 세월이 무려 이십년이었다.

 서로 다른 소파에 앉아있던 두 사람은 비디오를 보기 위해 같은 소파에 모여앉았다. 소이치로가 말하길, 앨범의 사진과 비디오는 진작에 디지털 데이터로 업로드를 마쳐둔 상태라고 했다. 비디오도 사진도 자꾸 만지면 닳고 망가지니까 잘 꺼내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것을 마리를 아는 사람이 찾아와 오랜만에 꺼낸 것이라고. 다는 아니지만 많은 사진에 마리의 손길이 한번씩은 닿았다고 했다. 그저 마리의 모습을 보고 기뻐했던 앨범이었는데 감회가 새로웠다.

 비디오는 마리의 유언과 임종을 담은 것이었다. 창백한 안색을 하고도 여전히 아름다운 젊은 여인이 병실 침대를 배경으로 반듯하게 앉아있었다. 환자복이 아닌 평범한 실내복이었다. 소이치로는 마리가 그렇게 찍기를 희망했다고 설명해주었다. 막판에는 거의 삶의 의지를 놓은 듯했지만, 마지막 자신의 모습을 환자복으로 마무리하기는 싫다며 투덜거렸다고 소이치로는 말했다. 임종 비디오를 보며 소이치로가 서럽게 울어서 한참을 달래야했다.

 “처음 뵙는 분께 이런 모습 보여서 면목이 없네요. 누나 이야길한 건 정말 오랜만이에요. 요즘은 누나 생각을 해도 눈물이 나지 않았는데 옛날 이야기를 해서인가봐요.”

 소이치로는 촉촉한 눈으로 수줍게 웃었다. 마리를 닮은 얼굴이 예뻐서 미스즈는 무심코 키스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냥 생각만 했다.

 미스즈가 일본에 온 뒤로 갑자기 잡은 약속이라 소이치로는 쉬는 날이 아니었다. 약속한 시간이 훌쩍 지나 미스즈가 떠나려 하자 소이치로가 붙들었다. 실무를 보는 종합 병동 의사는 불규칙하게 병원에 매여있으니 호출이 없을 땐 이야기하고 자리를 좀 더 비워도 이해해준다고 했다. 소이치로는 근 오십에 가까운 나이니 그렇게 말단도 아니었다.

 “식사라도 하지 않으시겠어요? 직장 동료 외의 다른 사람과 함께 식사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에요. 시이나씨와는 조금 더 이야기하고 싶어요.”

 누나에 대해 궁금한 게 있으면 뭐든지 알려주겠노라고 소이치로는 마치 그걸 대단한 보화나 되는 것처럼 이야기했다. 미스즈는 고민했다. 더 궁금할 것도 없었지만, 소이치로의 간절한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이러니 저러니해도 그는 마리와 무척 닮았다. 게다가 드물게 예쁜 사람이었다.

 미스즈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어디로 갈까요?”

 소이치로는 표정을 감출 생각이 없는지 너무나도 행복한 얼굴을 했다. 그날 저녁은 무려 소이치로가 직접 차렸다. 갑작스러운 손님이라 제대로 차리지 못했다고 겸손을 떠는 것치고는 무척 솜씨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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