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소녀가 있다. 하염없이 걷고 또 걷는다. 어디로 가는지도 얼마나 걸어야하는지도 모른 체 그저 걷는다. 경쾌한 발걸음에 맞춰 치맛자락이 나풀거린다. 새하얀 나비처럼 나풀거린다. 나풀나풀. 나풀나풀.
소녀는 해맑게 웃으며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앞에 펼쳐진 길이 돌아가는 시선에 따라 어지러히 흔들린다. 흐르는 바람, 쏟아지는 햇빛, 멀리서 들려오는 새들의 노래. 그 모든 것이 소녀의 주의를 잡아끈다. 소녀는 아무런 고민도 없는 사람처럼 그저 행복하기만 하고 풍경은 정처없이 방랑하기를 계속한다.
소녀는 무심코 멈춰선다. 무언가 주의를 잡아끌었다고 하기엔 평온한 곳이었다. 방금 전과 별 다름 없이 새가 울고, 해가 빛났다. 소녀는 우두커니 서서 하늘을 바라본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빛바랜 푸른 빛이다. 어느샌가 바람은 사라지고 빈 자리를 어디선가 흘러든 생명의 고동이 채운다.
소녀는 주저앉는다. 아무것도 없는 흙바닥. 아니, 어쩌면 방금 개미가 걸어가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장소. 그대로 드러눕는다. 하늘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새카만 머리칼이 바닥에 흩어진다. 깜빡. 깜빡. 눈을 두어번 감았다 뜬다.
갑자기 나타난 비행기 한 대가 하늘을 반으로 가른다. 장난감처럼 자그만한 그것을 손을 뻗어 잡아본다. 말아쥔 주먹 안에서 그것은 참 쉽게도 빠져나간다.
허망한 손짓은 아쉬움의 불꽃 속에서 서서히 사그라든다. 소녀는 다시 하늘을 본다. 칙칙한 색도화지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속삭임과 식어가는 몸이 시간을 알린다.
더는 견딜 수 없을 때까지 누워있던 소녀는 마침내 벌떡 일어선다. 눈 앞에 펼쳐진 것은 끝 없는 길. 소녀는 끝내 제가 갈 곳을 잃었음을 알았다. 다시 한 번 하늘을 본다. 여전히 하늘은 답이 없다. 소녀는 한참을 그렇게 서있다가 천천히 걸음을 뗀다.
다시 끝을 알 수 없는 여정이 시작된다. 걷고 또 걷다보면 언젠가는 멈추게 될까. 소녀는 이제 행복하지 않다. 가슴에 품고 있던 빛과 함께 마음 속에 흐르던 노래도 사라졌다. 작은 발은 리듬을 잃고 하늘거리던 스커트는 어느샌가 움직임이 편한 바지로 바뀌었다. 언제 그렇게 변했는지도 모르게 소녀는 변해있었다.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변화가 소녀를 또다시 바꾼다.
생기를 잃은 얼굴엔 우울한 심연이 드리웠다. 팔다리를 잡아당기는 무게가 소녀를 진중하게 했다. 소녀는 어느샌가 여인이 되어 어두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하늘은 더이상 보지 않는다. 바람도 더는 느끼지 않는다. 주저앉는 일도 없다. 무엇을 위해 걷기 시작했는지, 어디에 가려고 했는지 잊은 눈은 더이상 목적지를 찾아 흔들리지 않는다. 그저 걷는 것만이 자신의 일이라는 듯 착실하게 걷고, 내일을 준비한다.
어느샌가 주변을 둘러보면 비슷한 동료가 늘었다. 때로는 이야기를 나누고 드물게 웃거나 우는 일도 생겼다. 함께 길을 걷는 이들에게 먹을 것을 건네고 잠자리를 함께한다. 흙바닥에 드러눕는 일은 사라졌다. 엉덩이는 따스하고 밥이 맛있었다.
요즈음의 일상은 퍽이나 유쾌하다. 힘든 일도 아픈 일도 줄어들었다. 추위는 가시고 갑작스러운 사고에 놀라는 일도 줄어들었다. 여인은 이것이 자신이 바랐던 것인가 한다. 드디어 ‘삶’을 배웠노라고 웃음짓는다.
그렇게 걷는 것이 익숙해졌을 때였다. 여인, 바람에 흔들리는 잎새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돌아섰다. 잊었던 노래가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홀린 듯이 돌아본 그녀가 웃음 짓는다.
‘안녕?’
상냥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넨다. 노래가 소리 높여 손을 흔든다. 잎새는 그것이 꽤나 유쾌하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다시 친구들에게로 돌아간다. 팔랑대는 노랫가락이 한때 그녀가 둘렀던 치맛자락처럼 하늘거린다. 그녀는 웃고 울고 조잘대다가 때로 화를 냈다. 걸리적거리는 감각이 낯설었다. 그러다가 문득 깨닫는다. 지나간 시간의 어느 부분에서 그것은 자신의 몸과 같았다.
깨닫고 나니 정말로 낯선 것은 현재의 자신이다. 잎새는 잠시 혼란에 빠진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지? 어디로 가고 있었지?
그러나 그녀는 잊고 있다. 처음부터 목적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최초의 한걸음. 그것은 그저 즐거움이었다.
혼란에 빠진 여인은 다시 소녀가 되어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혼란은 지독히 낯설었다.
잠깐의 혼란이 더 큰 혼란을 부르고 소녀는 이번엔 걷는 법을 잊어버렸다. 지극히 자연스럽게 해왔던 것이 자연스럽지 않았다. 소녀는 주저앉는다. 곧 목놓아 울고 싶어졌다.
오랜만에 다시 하늘을 본다. 하늘은 여전히 창백한 푸른 빛을 띄고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하다. 그 사실에 어쩐지 마음이 놓였다. 소녀는 지나간 시간 속 어느 때처럼 벌거벗은 흙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곧 드러눕는다. 새카만 머리칼이 바닥에 흩어진다.
제일 먼저 들리는 것은 바람 소리다. 귓가를 스치는 고요한 바람이 고막을 간질이고 지나간다. 소녀는 바람을 대신해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연이어 들려오는 것은 장난기 넘치는 옛 노래의 멜로디다. 소녀는 노래와 함께 흥얼거린다. 나풀나풀 나부끼는 노랫가락에 가슴 속을 간질거렸다. 소녀는 제채기한다. 커다란 탄성이 목에서 터져나왔다.
놀란 새들이 조잘거리기를 멈췄다. 소녀는 파하핫 웃음을 터뜨렸다. 한 번 터진 웃음이 멈추지 않아서 한참이나 깔깔거린다. 갑자기 소녀는 행복해진다.
소녀는 한참을 누워있다가 벌떡 일어난다. 이번에는 걸음을 떼는 것이 두렵지 않다. 소녀는 아무런 걱정이 없는 사람처럼 해맑게 웃었다. 발걸음이 경쾌하다.
소녀가 흥얼거리자 옛 노랫가락이 함께 흥얼거렸다. 노래는 어우러져 화음이 되고 소녀는 즐거이 웃는다. 어디로 갈까? 이번엔 어디로 가볼까?
소녀는 더이상 걷는 것이 두렵지 않다. 목적지가 없어도 괜찮아. 어디로든 가볼까. 노랫말이 속삭이고 소녀는 웃었다. 좋아. 어디로든!
발길이 향하는대로 소녀는 걷는다. 새로운 길을 친구 삼아 담소를 나누고 노랫가락과 춤을 춘다. 바람이 소녀의 여정을 기록하고 풀꽃이 소녀를 환영했다.
발이 닿는 곳이 집이고 등이 닿는 곳이 침대인 삶을 살아왔다. 그것은 소녀이자 여인인 자그마한 잎새의 여행. 돌아갈 곳은 있을까? 어쩌면 필요없는지도 모른다.
소녀는 목청을 다해 야호 소리질렀다. 먼 산이 야호 답해온다. 소녀는 실컷 웃고 다음 길에 올라탄다. 이 길은 어디까지 이어져 있을까.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며 소녀는 걷고 또 걷는다.
한 소녀가 있었다. 시간이 흘러 여인이 된 그녀는 옛 연인을 찾아 길을 떠났다. 하염없이 이어지는 여행길이 언제까지 계속될지도 모르는 채로 그저 걷고 또 걸었다. 그녀는 즐거웠을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려면 어떠랴. 푸른 잎은 가지를 떠나 낙엽이 되고 낙엽은 썩어 땅이 되는 법. 길이 어디까지 이어지든 자연스러운 순리대로 그녀는 걷는다. 그것이 삶이라는 이름의 생명.
길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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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똑. 똑. 똑.

 맑은 물방울이 붉디 붉은 속눈썹에 뭉쳐있다가 흘러내렸다. 물기를 머금고 파르라니 떨리는 길고 곧은 그것은 너무나도 깨끗한 순홍(純紅)이었다. 색이 없는 물방울이 붉게 물들었다가 투명한 빛으로 굴러떨어졌다.

 똑. 똑. 똑.

 고인 물방울이 넘치고, 넘친 물줄기는 좁은 길을 따라 흘렀다. 소녀의 하얀 무릎, 가느다란 종아리, 굳은 살 하나 없는 발을 넘어 새하얀 바닥에는 보이지 않는 길이 있었다. 푸른 언덕 위에 세워진 저택 가장 깊은 곳에서 숲 건너 평야를 지나 바다까지 이어지는 좁고도 넓은 길이었다.

 굽이굽이 이어지며 점차 거세지는 흐름은 숲에 생명을 불어넣고 힘차게 달려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간다. 새로운 이야기, 새로운 꿈을 찾아 주인이 바라는 대로 이야기를 주워담는다. 그것이 제 뜻인양. 마치 처음부터 이것을 원했다는 듯이. 그렇게. 그렇게.

 언덕을 타고 내려온 숲은 본디 그렇게 만들어진 것처럼 광활한 땅을 차지하고 드러누워 있었다. 사람보다 동물이 많고 동물보다 식물이 많은 곳. 수많은 삶이 한데 뒤엉킨 이곳에서 사람이 손댈 수 있는 건 너무 적었다. 사람들은 쫓긴 끝에 숲 언저리에 마을을 세우고 인생을 빚어 땅에 뿌렸다. 인생은 슬픔과 만나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웠고 사람들은 그 열매로 다음 생을 준비한다.

 아이는 열매를 땄다. 초라한 차림은 먼지를 뒤집어써 엉망이다. 머리는 산발을 하고 얼룩덜룩하게 때가 탔다. 완전히 지친 표정이지만 음식을 쥔 손아귀는 힘이 넘친다. 아이는 입을 한껏 벌려 열매를 통째로 입안에 욱여넣었다. 씹기도 힘든 부피에 턱이 빠질 것 같지만 부지런히 씹는다. 어디서 고함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아이는 고요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허리를 숙였다. 재빠른 손놀림으로 익은 열매를 골라 잡아당겼다. 거친 손놀림에 과육이 튀었다.

 열매는 양 주머니를 가득 채우고 앞치마에도 모였다. 아이는 정말로 누군가 고함을 지르기 전에 후다닥 달음질을 쳤다. 요령 없는 아이의 손길에 밭 한 구석이 엉망으로 망가졌다. 아이는 그런 것을 모른다. 그저 수로를 따라 숲으로 달려갈 뿐이다.

 사람 눈이 닿지 않는 곳에 이르러서야 아이는 겨우 숨을 돌린다. 모아쥔 앞치마를 펼치고 허겁지겁 입에다 열매를 쑤셔넣는다. 때로 떫거나 신 것이 있는지 오만상을 하면서도 먹기를 멈추지 않았다.

 간신히 허기를 달래고 아이는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밑창이 달랑거리는 가죽신으로 길도 없는 숲을 헤매며 아이는 무언가를 찾는 듯했다. 걷다가 걷다가 자리에 주저앉는다. 얼굴은 하얗게 질리고 식은땀이 흘렀다. 아이는 끙끙 앓으며 바닥을 살피지도 않고 나무에 기대 엉덩이를 붙였다. 서러움에 눈물이 났다.

 이전에 아이는 이토록 꾀죄죄하게 돌아다닌 적이 없었다. 늘 깔끔해 옅은 색 원피스를 입어도 혼날 때가 없었다. 엄마는 늘 아이가 얌전하고 어른스럽다고 했다. 아빠는 아이가 뭘 해도 함박웃음을 지었다. 아이는 이웃 어른들에게도 칭찬을 받았고 친구들은 선망했다. 아무도 아이를 업신여기지 못했다.

 아이가 좋아하던 옅은 새싹 빛깔의 원피스는 진흙에 범벅이 되었고 생일에 선물받기로 한 새 구두는 요원해졌다. 항상 달고 다니던 귀여운 빨간 리본은 어딘가로 사라졌고 머리는 봉두난발이었다. 어쩌다 이런 꼴이 되었는지 몰랐다.

 아이는 정말로 몰랐다. 아이의 집은 이 숲 가장자리에서 멀지 않은 마을에 있었다. 아이가 서리한 밭은 친구네 집에서 가꾸는 것이었고, 아이가 먹은 열매는 매년 이맘때면 식탁에 오르는 단골 메뉴였다. 아이의 부모님은 지금쯤 식탁에 둘러 앉아 저녁을 먹고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자 잦아들던 눈물이 도로 눈꺼풀을 비집고 나왔다.

 아이는 울면서도 배가 아파 앓았다. 고통에 눈물이 들어갈 듯하다가 서러움에 도로 터지고 다시 고통이 밀려들어 눈물샘을 자극했다. 그러기를 몇 번 하니 아이는 아파서 우는지 서러워서 우는지 모르게 되었다. 어쨌든 아이는 펑펑 울었고, 한없이 길게만 느껴지는 시간을 배를 끌어안고 주저앉아 있었다.

 작은 동물들이 기웃기웃 아이의 주변을 맴돌았다. 설치류 한 마리가 아이가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과육이 터진 열매를 훔쳐 달아났다. 아이는 앓으면서도 치마를 여며 과실을 숨겼다. 작은 짐승을 따라 크고 무서운 것들이 올까 무서웠지만 일어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날이 어두워지더니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아이는 여전히 배가 아팠고, 움직일 자신이 없었다. 이대로 해가 저물면 무서운 짐승이 나타나 아이를 물어갈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아이는 얼어죽을 것이다. 가을 밤이었다. 아이에게는 밤이슬을 피할 수 있는 지붕도 추위에서 몸을 지킬 이불도 없었다. 아이는 또 눈물을 똑똑 흘렸다. 이미 많은 눈물을 흘려보낸 머리가 지끈거렸다.

 도저히 못 일어날 것 같았지만 아이는 일어났다. 코를 훌쩍이며 마을을 향해 걸었다. 노을은 빠르게 사그라들고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으니 숲에서 계속 있을 순 없었다.

 아이는 걸음이 느렸다. 주저앉고 싶었지만 끝까지 버텼다. 마을 안에 들어갈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대신 첫번째 건물에 도착하자마자 무너졌다.

 벽에 기대 색색 숨을 뱉는다. 아이는 까무룩 정신을 놓았다가 눈을 떴다. 아직은 좀 더 걸어야한다. 이곳은 아이의 집이 아니었다.

 땅과 숲을 기반으로 사는 마을은 집과 집 사이의 거리가 멀었다. 아이는 느릿느릿 집들을 거쳐 그리운 곳으로 향했다.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이가 잠들던 곳. 아이의 방이 있고, 아이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었다.

 아이는 제 집이 보이는 곳에 이르러서야 걸음을 멈췄다. 계속 움직이니 배앓이도 조금은 덜해진 것 같다. 하지만 더 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아이는 저가 무엇하러 이곳에 왔는지 몰랐다. 그저 집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아이는 휘청거리다 주저앉았다. 길 한복판이었지만 더는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지쳤고 배앓이가 끝난 것도 아니었다. 아이는 거기서 사랑하는 집을 바라보았다. 하염없이. 그리움을 가득 담았다.

 그곳은 아이와 부모님의 보금자리였고, 아이의 세상 전부이던 곳. 그러나 이제는 아이의 자리가 없었다. 아이는 어제 넘어다 본 풍경을 떠올렸다. 행복하게 웃는 엄마와 아빠, 그리고 아이보다 훨씬 작은 아기가 있었다. 아이가 없는데도 엄마와 아빠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슬퍼하지도 않는다. 아이는 나흘도 넘게 밖에서 잠을 잤는데 엄마와 아빠는 아무것도 몰랐다.

 아기는 며칠 전 엄마의 뱃속에서 태어났다. 아이는 여자아이라는 이유로 엄마의 출산을 지켜보았다. 엄마 배를 가르고 나온 아기. 시뻘건 고깃덩이 같은 아기. 아이는 너무 징그러워서 저도 모르게 찌푸렸다. 동생이 생겨 기뻐했던 마음은 온데간데 없었다.

 그날 아이는 남몰래 못된 짓을 꾸몄다.

 엄마 몰래 아빠 몰래 아기를 버리자. 나는 이렇게 못생긴 동생은 싫어요. 곱게 머리를 빗기고 예쁜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놀러나가려고 했단 말이야.

 엄마는 아프고 아빠는 바쁜 사이 아기를 버리자. 어른들은 몰라요.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걸.

 아이는 못난 아기를 품에 안고 달렸다. 좁고 깊은 길을 달렸다. 어른들은 모르는 길. 아이들만의 길.

 길 끝에는 작은 아지트가 있다. 조그만 나무판자와 나뭇가지로 만들어진 집. 아이는 친구들과 만든 작은 세계에 아기를 버렸다. 미안해. 조그맣게 사과의 말도 속삭여본다. 너는 착하니까 용서해 줄거지? 아기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아이는 활짝 웃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간다.

 집안은 조용했다. 갓 낳은 아기가 사라진 것도 아이가 자리를 비운 것도 마치 없는 일인양했다. 아니, 엄마가 아기를 낳은 것 자체가 없는 일 같았다. 출산에 불려온 아주머니들도 동동거리며 집앞에서 발을 구르던 아빠도 없다.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집으로 달려간다.

 엄마가 지르던 무시무시한 비명과 새빨간 핏덩어리가 아이의 마음을 어지럽힌다. 엄마는 어디갔지? 아기를 낳으면 많이 아프니까 맛있는 걸 먹고 푹 쉬어야 한댔는데. 아주머니들이 맛있는 걸 해줄테니 기다리랬는데.

 ‘엄마!’

 아이는 외쳤다. 힘껏 문을 박차고 들어가자 엄마가 깨끗한 모습으로 아이를 반긴다. 아마색 앞치마에 젖은 손을 문지르며 조용히 웃는 것은 어여쁜 아이의 엄마다.

 ‘벌써 왔니? 친구들이랑 안 놀았어?’

 ‘엄마 괜찮아?’

 아이는 엄마의 치맛자락을 꼭 붙들었다. 엄마는 다정하게 아이를 끌어안아주었다. 언제나 그랬듯 따뜻한 품이었다.

 포근한 감촉과 달콤한 냄새에 아이는 눈을 감는다. 응, 우리 엄마다. 엄마는 괜찮아. 아이는 사랑스런 미소를 머금고 엄마를 꽉 끌어안았다. 엄마는 간지럽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고 아이는 엄마에게 칭얼거렸다.

 ‘엄마, 나는 동생 같은 거 필요 없어. 아주 예쁜 동생이 아니면 없어도 돼.’

 ‘얘도. 뭐라는 거니?’

 엄마는 아이가 우습다며 꺄르륵 소녀처럼 웃었다. 아이는 엄마의 품에 안겨 뺨에 뽀뽀를 했다. 엄마는 내 엄마다. 엄마, 사랑해요. 엄마는 아이가 어리광쟁이가 되었다며 장난스레 이마를 콩 쥐어박았다.


 사랑스럽다는 말 외에 그 무엇으로 칭하랴. 그렇다. 그들은 참으로 사랑스러운 가족이었다. 서로를 어여삐 여기고 항상 다정한 말을 나누었다. 아이는 금슬 좋은 부부의 품에서 행복했다. 부부가 아이에게 쏟아내는 애정, 아이가 느끼는 행복. 그 모두가 아이의 자랑이었다. 아이는 그의 가정을 사랑했다. 실로 사랑할만한 가정이었다.

 그리하여 아이는 기어코 생각하고 마는 것이다. 동생 같은 것은 처음부터 없는 것이 좋았으며 있지도 않았노라고.

 이 모든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은 아이가 저지른 끔찍한 죄 탓이었을까 아니면 부부의 숨은 욕심 탓이었을까. 이유야 어찌되었건 일은 벌어지고 말았다.

 어느 날부터였을까. 아이는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어리고 순진한 아이에게는 벅찬 꿈이었다. 아이는 매일밤 아기를 만났다. 제가 버린 아기는 마지막 모습 그대로 잎새로 햇빛이 내리쬐는 나무 그늘에 누워 새근새근 잠들어있고 아이는 그걸 바라보며 홀로 소꿉놀이를 하는 꿈이었다. 무엇이 그리 무서운지는 아이도 몰랐다. 하지만 너무 무서워서 아이는 잠에 들지 못했다.

 가장 이상하고 무서운 건 그 다음이었다.

 아이는 엄마에게 매달려 울었다. 숲에 버리고 온 동생이 자꾸만 꿈에 나온다고 두려워하며 울었다. 엄마는 자다 깨서 졸음에 겨운 상태에서도 방긋방긋 웃었다.

 ‘우리 아가 배고프구나. 맘마 먹을까?’

 ‘그런 게 아니야, 엄마. 내 말을 좀 들어줘요.’

 엄마는 밤이면 아이의 말이 하나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엄마, 어제 왜 그랬어요?’

 ‘무어가? 아유, 예뻐. 역시 내 딸이네.’

 엄마는 낮이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엄마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서 아이는 아빠를 찾았다. 아빠는 예쁜 딸애가 품에 엉기자 일에 쫓기면서도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아빠, 아빠. 엄마가 이상해요. 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나봐.’

 ‘밤에?’

 아빠가 물었다. 아이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밤에요.’

 ‘우리 예쁜 딸. 시끄러워서 깼나 보구나.’

 아빠는 아이를 번쩍 안아들었다.

 ‘아니야. 어제는 조용했어.’

 ‘우리 애기가 언제 이렇게 다 컸을까. 아빠는 기쁘구나.’

 ‘아빠 이상해.’

 ‘부끄러워할 것 없어요. 아기는 어려서 밤에도 계속 먹어야해. 그래서 시끄러운 거예요.’

 아기요?

 아이는 되물었다. 아빠는 무슨 오해를 했는지 아이가 착한 언니라고 칭찬했다. 아이는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악몽은 계속 되었다. 아기는 눈을 말똥말똥 뜨고 아이가 노는 것을 구경했다. 새카만 눈은 맑고 깨끗했다. 아이는 가끔 아기를 데려다 역할을 주었다. 엄마랑 아빠, 그리고 아기가 있는 세 가족의 아기 역할이었다.

 아이는 아침이 다가오면 이게 꿈이란 것을 깨달았다. 꿈 속에서는 대개 소꿉놀이 중 아기에게 밥을 먹이는 순간이었다. 흙을 한 스푼 크게 퍼서 나뭇잎을 올리고 호호 불어 아기에게 먹였다. 꿈속의 아기는 신기하게도 그것을 받아 먹었다.

 아이는 아기와 노는 꿈속의 자신에게 목이 터져라 함께 놀지 말라고 외쳤다. 하지만 꿈속의 아이는 아이의 말을 듣지 못했다.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아이는 끔찍함에 소리 지르며 깨어나곤 했다.

 아이가 비명을 질러도 엄마와 아빠는 듣지 못했다. 이웃에 사는 친구들도 몰랐다. 아이는 무서워서 매일 울었다. 아지트에는 다가갈 수조차 없었다. 친구들이 아무리 놀러가자고 해도 아이는 가지 않았다.

 ‘언니랑 놀고 싶어.’

 아기가 말했다. 갑자기 들려온 말소리에 꿈속의 아이가 깜짝 놀랐다. 아기는 새카만 눈을 커다랗게 뜨고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꿈속의 아이는 입술을 댓발 내밀고 투덜거렸다.

 ‘무슨 짓이야. 깜짝 놀랐잖아. 아-, 해야지.’

 아기는 조그만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흙으로 만든 수프를 받아 먹었다. 아기는 뭔가 더 말하려고 했지만 꿈속의 아이가 혼을 냈다.

 ‘음식을 입에 물고 말하면 안 돼.’

 ‘잘못했어요.’

 아기는 아주 착한 동생이었다.

 다음 날도 아이는 같은 꿈을 꾸었다. 이번에도 아기가 이야기했다.

 ‘나 언니랑 놀고 싶어.’

 ‘안 돼. 하루종일 놀 수는 없어.’

 꿈속의 아이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잠깐만 놀면 되잖아.’

 ‘매일 놀고 있잖아. 더 놀면 혼날거야.’

 ‘나랑 놀면 안 혼나.’

 ‘아니야. 혼나.’

 ‘내기할래?’

 ‘싫어. 그런 건 못된 애들이나 하는 거랬어.’

 두 번이나 거절당한 아기는 매우 침울해졌다.

 그 다음 날에도 아이는 꿈속에서 아기와 소꿉놀이를 했다. 아이는 혼자서 아빠와 엄마 역할을 모두 했다. 아빠일 때는 나무가 엄마였고, 엄마일 때는 나무가 아빠였다.

 ‘여보, 오늘은 조금 늦을 거예요.’

 ‘저녁까진 들어와요?’

 ‘힘들 것 같아요.’

 ‘일찍일찍 들어와요. 아기가 기다려요.’

 ‘흐아암.’

 아기가 하품을 했다. 꿈속의 아이는 화를 냈다.

 ‘바보야. 거기서 하품을 하면 어떡해. 그러면 아빠가 집에 빨리 들어오지 않잖아.’

 ‘그치만 졸린걸.’

 ‘그럼 그냥 자. 하품 같은 거 하지 마.’

 꿈속의 아이는 아기의 입을 틀어막았다. 아기는 숨이 막혀 바둥거렸다.

 그 다음 다음 날에 꿈속의 아이는 혼자 있었다. 아기가 없어도 소꿉놀이에는 지장이 없었다. 그 자리에 거의 아기만한 매끈매끈한 돌멩이가 있었다. 꿈속에서 아이는 그걸 아기 삼아 놀았다. 아기가 어디로 갔는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아기가 없어서인지 무섭지도 않았다.

 그날 아이는 행복한 꿈을 꾸었다. 아이는 오랜만에 기분 좋은 잠을 잤다.

 눈을 떴을 때는 이른 새벽이었다. 아이는 추위에 떨며 몸을 감싸안았다. 아이는 숲에서 눈을 떴다. 머리 위로 나뭇가지가 펼쳐져 밤하늘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꿈속에서처럼 연한 새싹빛 원피스를 입고 머리에는 빨간 리본이 달려 있었다.

 이상하다. 잠옷을 입고 있었는데?

 하얀 스타킹에 학교 갈 때 신는 가죽 신발. 아이는 아직도 꿈을 꾸나 싶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날씨와 시간이었지만 꿈이 틀림없었다.

 아이는 한달음에 집으로 향했다. 달리자 바닥의 찬 기운이 조금은 멀어졌다. 아이는 콩콩 문을 두드렸다.

 콩콩. 콩콩콩. 콩콩콩콩.

 엄마와 아빠는 깊이 잠들었는지 집은 조용했다. 까만 밤하늘이 조금씩 밝아오고 있었다. 아이는 자꾸만 문을 두드렸다.

 콩콩콩콩. 콩콩콩콩. 콩콩콩콩.

 아이의 언 손이 아파올 때쯤 문 너머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아빠였다.

 ‘누구세요?’

 ‘아빠, 나예요!’

 ‘누가 이 새벽에 장난질이야.’

 아빠는 짜증내며 멀어졌다. 아이는 놀라서 문에 달라붙었다. 아빠가 내 목소리를 못 들었나봐.

 ‘아빠! 아빠! 나예요. 아빠!’

 아이는 문을 쾅쾅 두드리고 발을 동동 굴렀다. 아빠. 나예요. 아빠. 문 열어줘요.

 마침내 아빠는 문을 열고 나왔다. 아이는 아빠에게 답싹 매달렸다. 아빠가 아이를 뻥 걷어찼다.

 ‘아빠!’

 ‘이 자식이 새벽부터 미쳤나.’

 아빠는 화를 내며 몇 번이나 발길질을 했다. 아이는 숨도 쉬지 못하고 꺽꺽거리며 몸을 웅크렸다.

 그날부터였다. 마을 사람들은 누구도 아이를 알아보지 못했다. 아이는 사람들에게 몇 번이나 더 걷어차이고 다시는 사람들 집에 접근하지 않았다. 아니, 그러려고 노력했다. 가고 싶지 않아도 배가 고파서 그럴 수가 없었다. 아이는 쓰레기통도 뒤지고 밭에서 작물을 훔쳤다. 그러다가 또 얻어맞았다. 너무 서럽고 무서웠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집에서 아이는 보았다. 제가 버린 아기가 엄마 품에 안겨 있었다. 아빠도 엄마도 행복했다. 아기는 보드라운 크림색 강보로 몸을 감싸고 새카만 눈을 데록데록 굴렸다. 그것밖에 할 줄 모르는 아기였다.

 아이는 엄마가 아이가 어릴 적에 쓰던 거라며 보여준 크림색 강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창 너머로 아기가 아이를 쳐다보았다. 방긋방긋 웃으며 입을 빠끔거린다. 아이는 도망쳤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아기의 입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언니. 같이 놀자.’

 날이 지고 아이는 까마득히 멀어지는 시야를 힘겹게 붙잡았다.

 고꾸라진다. 억울한 마음도 이제는 없다. 그저 이 상황이 싫었다. 아이는 엄마와 아빠가 그리웠고 따뜻한 집이 그리웠고 맛있는 식사가 그리웠다. 아픈 것도 추운 것도 싫었다. 길 한가운데 웅크리고 있으면 누군가 또 걷어찰지도 모른다. 아픈 건 싫다. 아이는 기어서 길가로 이동했다. 밤이슬에 축축한 풀이 아이의 맨살과 치맛자락을 적셨다.

 눈물이 퐁퐁 흐른다. 아이는 그저 슬펐다. 작은 몸을 꼭 끌어안고 웅크렸다. 아이는 그저 살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도 아이를 알아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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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빛이 아름다운 밤이었다. 리히트는 달에 가려 얼마 보이지도 않는 별을 헤아리며 문 앞에 앉아있었다. 숄을 두르고 따뜻한 코코아를 타서 나왔지만, 날이 제법 쌀쌀했다. 머그잔에 손을 덥히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야경을 보고 있자니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몰랐다.

 리히트가 밤중에 밖에서 시간을 보내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다. 어제도 그랬고 그제도 그랬고 저번 주에도 두 에이아 이상 잠든 날이 없었다. 한밤중의 고요함은 리히트에게 익숙한 것이 되어있었다. 싫지는 않았다. 낮과는 또 다른 짙은 빛의 밤하늘도 매일 달라지는 달과 별도 마음에 들었다. 밤에 잠이 깨면 반드시 밖에 나와서 바라보았더니 이제 대화도 나눌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전혀 혼자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무서운 것은 아무도 없는 방과 복도였다. 무엇보다도 둔켈의 빈자리가 컸다. 둔켈이 있다면 지금쯤 방에서 같이 웃으며 차를 마시다가 다시 잠들었을 터였다. 그런 생각을 하자 곤란한 듯 웃는 둔켈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올라 한숨이 나왔다.

 리히트는 입술 사이로 새는 한숨을 참으며 문설주에 머리를 기댔다. 머리가 닿자 자연스럽게 팔도 닿았다. 나무인데도 싸늘하게 느껴졌다. 리히트는 어깨를 움츠리며 기대기를 포기하고 바로 앉았다. 몸이 많이 식은 모양이었다.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 여기 앉아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리히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입속으로 셋을 셌다. 하나, 둘, 셋.

 "하아."

 기어코 참고 있던 한숨이 나왔다. 옷자락이 땅에 닿지 않도록 조심스레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깔고 앉을 손수건조차 들고나오지 않아 더러워져 있을 게 뻔했다. 이대로 침대에 들어갈 수는 없으니 잠들기 전에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잠옷을 더럽혀도 잔소리할 사람은 없다. 별로 기쁘진 않았다. 리히트는 미지근해진 코코아를 후루룩 마셨다. 단번에 잔이 비었다. 그리고 후회했다. 모두 잠든 시각에 세면대를 사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리히트는 결국 소리 없이 두 번째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할 수 없이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서 이를 닦기로 다짐하고 리히트는 문을 열고 어두운 복도로 발을 뻗었다. 잠들 자신은 없었지만 홀로 자장가라도 외워볼 시간이었다.

 침대에 누우니 다시금 둔켈의 그림자가 겹쳤다. 차가운 손끝으로 리히트의 이마를 쓸어넘기고 솜털처럼 가벼운 키스를 남기는 소년의 다정한 미소, 그림자에 까맣게 물든 창백한 뺨. 그 상냥한 손길이 너무도 그리워 울적해졌다. 고작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반평생 자리를 비운 것 같다.

 리히트는 어제도 꿈을 꿨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죽고, 비명 지르고, 공포에 떠는 꿈이었다. 악몽은 리히트의 발목을 잡고 성큼성큼 기어올랐다. 매일 누군가 죽었다. 어제는 겨우 젖을 뗀 어린아이였다. 그제는 장성한 청년이었고, 그 전날에는 수명이 다한 노인이 가족들 품에 안겨 숨을 거뒀다. 때로는 전쟁터였다가, 어느 날은 누군가의 침실이었고, 또 어느 날은 평범한 시가지였다.

 죽음은 어디에나 있었다. 리히트는 모든 죽음을 바라볼 의무가 있었다. 어린 시절에는 어쩌다가 한두 번 찾아오던 죽음의 현장이 이제는 시시때때로 리히트를 찾아왔다. 눈을 감아도, 떠도, 잠이 들어도 불현듯 다가오는 죽음의 순간에서는 달아날 수 없었다.

 세상의 모든 죽음을 알고 있다는 것은 자만이다. 리히트는 아무것도 몰랐다. 자신이 겪는 죽음이 어디에서 어떻게 찾아오는 것인지. 자신을 찾아오는 죽음에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리히트는 이불 속에서 웅크린다. 아아. 밤이 깊으면 깊을수록 소년의 부재가 컸다. 죽음이 주는 무력감이 작은 몸을 뒤덮고 삶을 물들인다.

 ‘자고 싶지 않아.’

 밤이 되면 죽음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정신이 휴식에 들어간 틈을 노려 찾아온 현실은 더욱 매서운 것들뿐이었다. 죽거나 죽이거나 죽임당하거나. 죽음이 턱 끝까지 차오른 순간의 공포가 싫었다. 정신이 들었을 때 찾아오는 죽음이 단순한 편린이라면 수면에 빠져있을 때 찾아오는 죽음은 온전한 체험이다. 리히트는 밤만 되면 겪어야 하는 끔찍한 순간들이 싫었다.

 소녀는 매일 죽거나 죽이거나 죽임당했다. 죽음은 단 오 분만 정신을 놓아도 반드시 찾아왔다. 리히트는 때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살해당했고, 즐겁게 학살했다. 사고 현장에 홀로 살아남아 며칠씩 아슬아슬한 정신을 유지한 채로 버텨보기도 했고, 짐승에 뜯겨 죽은 적도 있었다.

 ‘싫어.’

 리히트는 눈을 부릅떴다. 눈알이 얼음물에 담근 것처럼 시렸다.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 수면의 마수는 모든 감각을 무디게 하지만 도무지 침대로 가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고통만은 예외였다.

 결국 리히트는 악랄한 수법을 이기지 못하고 잠에 빠져들었다. 아아, 꿈은 결국 소녀를 집어삼키고 오랜 고통에 연약해진 정신이 비명을 질렀다. 받아줄 곳은 어디에도 없다. 곁에 남았던 단 하나의 온기는 꿈속으로 스러졌다. 오늘도 소녀는 심장에 칼을 꽂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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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엘은 앉아 있었다. 발아래에서는 시리다는 말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얼음보다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바람이 뒤엉키는 소리가 요란했다. 귀를 막고 싶을 만큼 시끄럽다고 생각하면서도 미엘은 움직이지 않았다. 먼 곳에서 들려오는 탓이기도 했고 또 그녀의 귀가 지나치게 성능이 좋은 것을 알고 있는 탓이기도 했다. 미엘은 확연한 차이가 없는 일에 굳이 움직일 정도로 부지런한 종족이 아니었다. 하얀 배경에 반해 핏줄이 비쳐 빨갛게 보이는 얇고 긴 귀가 쫑긋거렸다.

 하늘마저 새하얗게 질려버린 만년설의 산꼭대기에서 그녀 혼자가 색을 가지고 있었다. 바람마저 비켜간 고요한 산꼭대기에서 미엘만이 숨을 쉬고 있었다. 그것은 숨이 턱하고 막힐 만큼 쓸쓸했지만 미엘은 그 자체로 좋았다. 좋아서 일부러 이 자리를 찾았다. 궁상맞은 짓이라는 자각은 있었지만 이제 구박할 사람도 없으니 아무렴 어떠냐는 심정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탓이었을까 미엘의 뒤로 소리 없이 다가와 말을 거는 사람이 있었다.

 "여유 만만이시네요?"

 너무 놀라면 오히려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게 된다고 하던가. 잠시 대답이 없던 미엘의 귀가 바르르 가늘게 떨렸다. 마법이 풀리는 듯 느릿한 움직임으로 무릎을 끌어안고 있던 손이 내려와 바닥을 짚고 그제야 천천히 시선이 돌아왔다. 그리고 그 때는 이미 방금 전까지의 미엘처럼 새하얀 원피스 자락을 정리해 끌어안은 여자아이가 옆에 앉아있었다.

 "오늘은 제법 쌀쌀한데 괜찮으신가봐요?"

 소녀는 어깨에 걸친 숄을 정리하면서 미엘을 향해 웃어보였다. 두 사람이 딛고 앉은 것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그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단단하게 언 눈이라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린 듯했다. 더불어 미엘도 소녀도 맨발에 여름에나 어울릴 얇은 민소매 원피스라는 비현실적인 차림이라는 것도. 미엘은 그런 갭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지적해주지 않았다.

 "괜찮아."

 짧게 내뱉은 말과 함께 뿌연 김이 시야를 가렸다. 미엘은 단지 평범한 생물이 아닐 뿐 평범한 온도의 생명체였다.

 "바람이 없으니까."

 아―. 소녀는 깨달았다는 듯 대꾸했다. 미엘은 소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산 아래로 눈을 돌렸다. 소녀도 더이상은 할 말이 없는 지 두 사람은 침묵 속에서 함께 까마득하게 멀어보이는 세상을 보고 있었다.

 "근데."

 문득 들려온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미엘의 시야 가득히 소녀의 커다란 금빛 눈이 들어왔다. 언제나처럼 가볍게 웃는 인상의 예쁜 얼굴이 어쩐지 낯설었다.

 "왜?"

 운을 띄워놓고 소녀는 말이 없었다. 잠시 눈을 마주치고 있으니 이윽고 웃는 얼굴이 되었다. 그 모습을 보고 미엘은 반대로 가볍게 아미을 찌푸렸다.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굳이 대답을 들을 필요는 없겠다 싶어졌어요."

 하. 미엘은 나른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거면 사람 기다리게 하지마."

 소녀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있지."
 "예."

 이번에는 미엘이 운을 띄웠다. 가지런히 모은 무릎에 턱을 올리고 시선을 멀리 한 작은 엘프 소녀의 모습을 하이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마냥 귀엽게 생긴 외견과 매치되지 않는 특유의 나른한 분위기가 시선을 떼기 힘들게 하는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미엘은 말을 꺼내는 듯 하다가 하―, 하고 다시 한번 길게 숨을 내뱉었다. 가볍게 들이마쉬는 것과 동시에 긴 귀와 작은 날개가 살짝 떴다가 내려갔다. 무슨 말을 해도 상당히 시간이 걸리는 것을 언제나 봐 왔기 때문에 하이는 제촉도 않고 미엘의 말을 기다렸다. 사실 한번도 제촉이 필요했던 적이 없었기에 그런 것 자체를 모르는 하이이기도 했다. 그녀에게는 언제나 시간이 충분했으며 시간을 당기고 싶을 만큼 할 것이 많지도 않았다. 넘치는 시간이 부담스러웠던 적도 없었고 소녀는 언제나 자유로웠다.

 "내가 원망스러웠던 적 없어?"

 하이는 여전히 먼 곳만 바라보고 있는 미엘을 따라 같이 저 앞을 바라보았다. 온통 하얗기만 한 이 자리와는 정 반대로 초록빛이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짙푸른 녹빛이 흐르고 또 멈춰있었다. 웅장한 풍경이었지만 늘 하얀 세상에서 살아온 하이에게도 낯설지 않은 것이 신기했다. 곁눈으로 돌아보자 미엘의 살랑이는 단발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싱그러운 연두빛은 저 아래 펼쳐진 색과는 달랐지만 분명하게 파릇한 생명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전혀 없어요."
 "아직까지는, 인가."

 이어지듯 내뱉는 미엘의 말을 하이는 부정하지도 그렇다고 긍정하지도 못했다. 단지 묵묵히 '그럴지도요,'하는 모호한 대답을 입에 올렸다. 그리고 침묵이 흘렀다. 두 소녀는 꼼지락거리며 각자 움직일 뿐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새하얀 눈 속에서 멀리 까마득하게 펼쳐진 초록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미엘은 눈송이를 보았다. 완전히 얼어버린 고산 정상에서 발견한 눈 한 송이는 새파란 떡잎보다 어색했다. 미엘은 처음에 눈 앞에서 떨어지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깨닫지 못했다.

 "추워지겠어요."

 꿈속을 헤매듯 몽롱했던 정신이 목소리와 함께 손에 닿은 것에 현실로 돌아왔다. 너무 이상한 것이어서 바로는 느끼지 못했지만 알아차리자 손가락 끝에서부터 파르르 소름이 올라오며 온몸이 떨려왔다. 낌새를 알아챈 하이가 미엘을 돌아보았다.

 "괜찮아요?"
 "…응."

 조금 어색한 미소를 띄웠다 지우며 미엘은 하이의 눈을 피했다. 휭하고 찬 기운이 두 사람을 스쳐지나갔다. 아래서 불던 바람이 산등성이를 타고 올라온 모양이었다.

 "그럼 들어가요."

 미엘은 하이의 손길에 이끌려 가볍게 달렸다. 순간 확, 하고 펼쳐진 현실이 다시 눈과 귀에서 사라졌다. 손에 닿은 것에서 신경을 떼지 못하고 미엘은 팔랑이는 금발만 바라보며 뛰었다. 바람이 실어온 눈구름이 바삭거리는 하얀 가루를 흩뿌리고 있었다. 미엘의 눈에 하얀 눈밭 위에 흩날리는 하얀 눈송이와 그에 뒤섞여 흐트러진 하이의 웨이브진 금발, 그리고 그 너머 시야 한구석을 차지한 녹음의 숲이 환상처럼 멀게 보였다.

 바르작.

 작은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그 정체가 무엇인가 확인할 겨를도 없이 그저 달리고 있었다. 내딛는 걸음에서 미엘 자신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 문득 보인 자신의 손이 하얗게 얼어있었다.

 파짓, 키이.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 작은 소리는 거기서 들려온 것이었다. 미엘은 선명한 빨간 빛을 확인하고 나서야 아프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이의 긴 머리칼이 스친 자리마다 하얀 균열과 함께 엷게 피가 비치고 있었다.

 '이대로,'

 산산조각 날지도 몰라.

 하이가 돌아보았다. 미엘은 멈춰 있었고, 꼭 붙들고 있던 손은 허공을 맴돌았다. 미엘은 어떻게 손을 빼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감각 없이 차가워진 손을 빼내면서 부딪힌 몸이 싸늘하게 식었다는 것만 느낄 수 있었다. 손은 멀쩡했다. 애초에 미엘이 이 정도에 상처입을 리 없었다. 하이는 놀란 얼굴이었다.

 "……미안."

 하이는 천천히 편한 자세로 돌아왔다. 여전히 놀란 얼굴이었지만 정신을 수습하는 듯 했다. 미엘과 눈을 마주한 상태로 금발의 소녀는 옷차림을 정리했다. 고개를 살짝 갸웃하고 기울이며 눈을 감았다가 떴다.

 "가볼게요."

 언제나처럼 엷게 띄운 미소로 소녀는 돌아섰다. 어느샌가 커져버린 눈보라 너머로 사라지는 소녀의 뒷모습을 미엘은 끝까지 바라보았다. 하이의 모습이 눈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간신히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얼어있던 손은 오히려 처음보다 따뜻했다. 무엇이 그렇게 차가웠는지 이제와서는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로 몸 상태는 평범했다. 미엘은 그대로 그 자리에 서있었다. 온몸을 때리는 눈송이가 따가웠다.



 레―미엘―시아르테. 스스로 바꾸고 허락을 받은 이름은 아직도 어색했다. 완전히 속한 것도 그렇다고 아예 벗어난 것도 아닌 세계는 맞지 않는 옷을 걸친 듯 불편했지만 상관없었다. 그저 그 곳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좋다고 생각한 미엘이었다. 옛날과는 다른 모습을 한 것도 관심도 없는 것에 손을 빌려주고 있는 것도 단지 한가지 이유 때문이었지만 아아, 소녀는 생각했다.

 '어쩌면 여긴 나에게 맞지 않는 걸지도 몰라.'

 그래도 방법은 없었다. 이미 그녀는 자신이 마련한 장소에 짜맞춰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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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SS (*59. 춤추는 숲속의 소년) _with DUNKEL

 

 

 

 

 

 

 

 "하하, 하하, 하하하하, 하하하……."

 

 공허한 웃음소리는 멀리 퍼지지도 못하고 흩어진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새카만 빛으로 휩싸인 작은 소년은 그저 허탈한 웃음을 뱉어낼 뿐 움직임이 없었다. 소년의 품안에는 반짝이는 금발의 소녀. 하이얀 드레스가 피투성이로 붉게 물들어버렸다. 작디작은 소년의 품안에 역시 작디작은 소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앞으로도 영원히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햇빛이 반짝이며 부서져 내리던 금빛 고수머리도 바람과 함께 춤추던 작은 발도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던 고운 입도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거기에 있지만 없었다. 소년의 창백한 손이 소녀의 어깨를 끌어안은 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소녀의 손가락이 작게 경련을 일으켰다.

 

 

 

 

 “미엘, 미엘. 계속 잠만 잘 거예요? 그러지 말고 오늘은 다 같이 소풍가요. 시안씨랑 같이 맛있는 샌드위치 만들었단 말 이예요. 네? 같이 가요―."

 “므…우…, 귀찮아. 안아, 이거 저기 버려버리고 와…….”

 “아하하하.”

 

 아침부터 일어난 소동에 언제나처럼 거실 탁자 위에서 곤히 잠들어있던 시엘 마저 무슨 일인지 보러올 지경이었지만 미엘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수가 있음을 인식한 탓인지 발을 들일 수 없을 만큼 어둡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밝다고는 할 수 없는 방안에서 금빛 고수머리의 소녀는 벌써 몇 시간 째 씨름 중이었다. 사이에 낀 시안은 그저 곤란한 웃음만을 흘릴 뿐 그 어떤 수도 쓸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 모두 고집하나는 끝장나게 세기 때문에 중간 타협점을 받아들이게 할 수가 없었다. 괜히 끼어들었다가는 오히려 피곤해진다. 두 사람 모두와 긴 시간동안 함께 지낸 경험으로 시안은 그 사실을 눈물 나게 잘 알고 있었다.

 

 “난 잘래.”

 “아, 결정 나면 깨울게.”

 

 졸음에 반쯤, 아니, 거의 감겨있는 소녀의 눈을 보고도 붙들 수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 시안은 일주일쯤 전혀 못 잔 듯 보이는 모습으로 바닥에 웅크려 순식간에 잠든 시엘에게 얇은 이불을 덮어주었다. 마스터인 미엘이 심심하면 아무데서나 쓰러져서 자기 때문에 청소를 하지 않아도 청결함은 물론 온도까지 완벽하게 조절이 되는 방이었으므로 걱정할 것은 전혀 없었다. 단지 이 방에서 자면 앞으로 언제 일어날 지 알 수 없다는 건 문제일까. 미엘의 방은 모든 환경이 잠자기 좋게 조절되어 있어 아무리 잠이 적은 사람이라도 한번 잠들면 일어나기 힘든 곳이었다.

 

 “아우우, 적당히 자고 좀 일어나요! 그렇게 자면 머리 안 아파요?”

 “전혀.”

 “나가자니까―요―!!!!!!”

 “귀찮아…."

 

 두 소녀의―소녀라고 불릴 수 있는 나이같은 건 생각하지 않기로 하자―실랑이를 바라보며 시안은 다시 허탈하게 웃었다. 두 사람이 하는 모양새를 보면 나들이는커녕 오늘 하루 종일 이러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듯 했다. 정 나들이가 가고 싶으면 미엘을 빼고 가면 될 것을 ‘함께’라는 말을 포기할 수 없는 여자아이는 어떻게든 그녀를 바깥으로 데려갈 모양이었다. 마침내 여자아이는 두 팔을 걷어붙이고 미엘을 침대에서 끌어내기 시작했다. 물론 축 늘어진, 그것도 본인보다 덩치가 큰 사람을 끌어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서 그녀는 미엘의 팔을 붙든 채로 몇 번이나 헛발질을 했다. 그때였다.

 

 “적당히 일어나주지 그래.”

 

 서늘한 목소리가 조금 장난스러웠던 분위기를 단칼에 잘라내었다. 언제, 어떤 곳에 있어도 한눈에 들어올 새빨간 머리카락이 햇빛을 반사해 자극적으로 빛났다. 어두침침한 방안에서 갑자기 접한 햇빛이 눈부셔 시안은 눈을 가렸다. 스스로 빛을 내는 듯 한 붉은 두 눈이 미엘을 향했다. 여자아이는 자신을 향한 시선도 아니건만 손을 놓고 뒤로 물러섰다. 에트리아스는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쓴 미엘을 바라보며 작게 혀를 찼다.

 

 “어차피 져 줄 생각이라면 더 이상 고집부리지 않는 편이 좋아.”

 “부.”

 “일어나, 얼른.”

 “……칫, 에티는 봐주질 않는다니까. 매정해.”

 “그쪽에서 쓸데없이 고집피우지 않으면 안 그래.”

 “흥, 쳇, 피.”

 “그래서, 어디로 갈 건데?”

 “에, 에?”

 

 갑자기 자신에게 바통이 내밀어지자 금발의 여자아이는 까만 두 눈을 깜빡일 뿐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에트리아스는 창문에 다시 커튼을 치는 미엘을 바라보며 한 번 더 말했다.

 

 “싫으면 말아.”

 

 

 

 

 햇빛이 나뭇잎사이로 광선처럼 한줄기 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맑은 날이었지만 무성한 나뭇잎 아래는 빛이 닿지 않아 아직 어둑어둑했다. 상록수 숲 특유의 촉촉하고 상쾌한 공기가 가득한 오솔길을 조금 기묘한 일행이 걷고 있었다. 선두에는 파티장이라도 나온 듯 화려한 남성용 예복의 여자아이. 콧노래를 흥얼흥얼, 지팡이를 빙글빙글 돌리며 걸었다. 그녀의 뒤로는 화사한 금발의 소년, 소녀가 커다란 바구니를 들고 웃음꽃을 피웠다. 소년의 가슴 정도밖에 안 오는 작은 소녀는 복슬복슬한 곱슬머리 위에 보닛을 쓰고 하얀 나들이 원피스를 팔랑이며 걸었다. 그녀의 조잘거림에 대꾸하는 소년은 남자아이치고 큰 키가 아니었지만 주변에 온통 고만고만한 키의 여자아이들뿐이었기 때문에 껑충하게 머리가 위로 솟아있었다. 그리고 그런 소년의 뒤에 바짝 붙어 느릿한 걸음으로 전체의 속도를 늦추고 있는 것이 그의 동생. 손가락이 하얗게 될 만큼 소년의 옷을 꼭 쥐고 걸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와 떨어져 같은 일행이라 하기엔 멀고 모르는 사람이라고 치기엔 애매한 거리에 초록빛 숲속에서 눈에 확 들어오는 선홍빛의 소녀가 뒤를 따랐다. 평범하진 않았지만 즐거운 무리. 앞서 걷는 여자아이의 흥얼거림이 뒤쳐진 소녀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햇살은 따스하고 그늘은 서늘한 기분 좋은 나들이.

 

 “마스터, 어디까지 가는 건가요?”

 

 금발의 소년, 시안이 물었다.

 

 “갈 수 있는 곳까지.”

 

 흥얼거리던 박자에 맞추어 선두를 걷던 여자아이, 미엘이 대답했다.

 

 “나 힘들어.”

 

 시안에게 찰싹 붙어 걷던 시엘이 그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꽤 머네요.”

 

 흰 원피스 자락이 하늘거렸다.

 

 “적당히 쉬었다 가는 게 어때?”

 

 붉은 입술을 빠끔거리며 에트리아스가 중얼거렸다. 앞서 걷는 다른 일행은 아무도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으나 미엘만은 정확하게 알아듣고 그녀의 말에 대꾸했다.

 

 “안 돼, 안 돼,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엘이 너, 시안이한테 땡깡 피우면 혼난다?”

 “흥.”

 

 시엘은 와락 시안의 팔을 끌어안았다. 시안이 넘어질 뻔하며 작은 소란이 일어났고 소녀의 까르륵하는 맑은 웃음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흥얼흥얼흥얼, 노랫소리와 함께 흔들리는 나뭇가지들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대한 나무가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하늘 높은 곳까지 가지를 높고 넓게 펼치고 있었다. 나뭇잎이 무성했고, 그 둘레는 평범한 성인 남성 30명이 손에 손을 잡고 둥글게 서도 모자랄 것 같은 굵은 줄기를 가지고 있었다. 하늘을 떠받힌다는 전설 속의 나무처럼 엄청난 크기. 번듯한 집 한체가 안에 들어앉아있대도 믿어버릴 것 같은 나무를 미엘은 살며시 쓰다듬었다. 사랑하는 이를 만지듯 부드러운 손길이 차가운 나무껍질을 스쳤다. 소녀의 입가에 엷게 미소가 스며든다. 그녀는 휙 돌아서 돗자리를 깔고 바구니에 담아온 것들을 펼치기에 바쁜 세 사람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말했는지 모르겠는데 앞으로도 이 이상 넘어가면 안 돼. 다들 기억해둬.”

 “왜?”

 

 모두를 대표해 시엘이 물었다. 나머지 두 사람 역시 묻는 듯한 눈으로 미엘을 바라보았다. 미엘은 대답 대신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그녀의 입에는 어느 샌가 아직 꺼내지도 않은 샌드위치가 물려있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차린 시안이 한마디 했다.

 

 “그 것만 꺼내신 거예요? 안을 다 뒤집어놓으신 건 아니죠?”

 “이거 맛있다.”

 “다행히 괜찮아요. 하여간 못 말리는 사람이라니까요.”

 

 금빛 고수머리의 소녀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물론 미엘에게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그저 깔깔깔 한번 웃어주고는 맛있게 샌드위치를 씹을 뿐이었다. 소녀도 그녀의 미안해하는 모습 같은 것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지 뾰로통한 표정으로 하던 일을 계속했다.

 

 “에티, 에티도 와서 좀 먹어봐. 맛있어.”

 

 에트리아스는 부산한 다른 일행과는 달리 아직도 멀리 길 위에 서서 홀린 듯 한 표정으로 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엘은 즐거워 보이는, 그리고 조금은 오만한 미소를 입가에 걸치고 그녀의 목소리도 듣지 못한 듯 보이는 에트리아스를 지긋이 응시했다. 후後좌左우右에서 조잘거리는 대화를 배경음악삼아 사랑스러운 그녀의 인형을 감상한다. 언제나 싱그러운 푸른색으로 가득한 미엘의 숲에서 흰색과 붉은색으로만 치장된 인형은 이질적이지만 눈부시게 빛이 났다.

 

 ‘아름다워.’

 

 취할 듯 강렬한 풀잎의 향기가 와인의 향을 대신해서 감상에 흥을 더했다. 목으로 넘어가는 매끄러운 감각은 안타깝지만 샌드위치로 대신했다. 향기와 입안에 넣을 것. 미엘이 감상 시 필수로 여기는 두 가지였다. 무엇을 볼 때든 그것만은 잊지 않았다.

 

 “이거, 맛있다.”

 “엘아, 안된다니까!”

 “그렇지만 맛있어.”

 “그냥 다 꺼내놓을까요?”

 “그게 나을지도……, 하하하.”

 

 시안들은 먹느라 정리하느라 소란스러웠다. 샌드위치를 다 먹은 미엘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타박타박 걸어 에트리아스의 앞에 섰다. 그녀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지 시선을 위로만 향하고 있는 에트리아스의 뺨에 손가락을 얹었다. 뺨보다 뜨거운 손의 감촉에 에트리아스가 놀라 시선을 정면으로 떨구었다. 결코 기분좋아보이지는 않는 미소가 에트리아스를 향하고 있었다. 배회하던 시선이 미엘의 그 것과 얽히고, 소녀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사랑하는 에티. 나의 에트리아스.”

 

 미엘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다물어지며 달콤한 음성을 자아냈다. 범하는 것 같이 뜨겁고 은밀한 시선이 소녀의 온 몸을 훑었다.

 

 ‘미소. 불쾌함이라는 감정을 드러내기 위한 표정.’

 

 미엘의 두 손이 에트리아스의 뺨을 감쌌다. 붉은 미소가 더욱 진해지고 초점을 붙들린 에트리아스의 눈에 미엘의 얼굴이 선명하게 비쳤다.

 

 “훅.”

 

 자연스럽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숨결을 불어넣었다. 미엘의 웃음이 베시시 즐거운 듯 변했다. 불쾌한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조금은 장난스러운 미소. 미엘의 손이 움찔 떠는 에트리아스의 어깨를 붙들고 혀가 아랫입술을 핥았다. 소녀는 몸을 물리는 에트리아스를 눌러 잡고 그대로 입술을 붙였다. 반항 없이 입술이 벌어지고 미엘의 혀가 에트리아스의 입안을 휘저었다.

 

 “읏.”

 

 피부가 맞닿았다 떨어지며 생기는 츗, 하는 소리가 났다. 미엘이 곤란한 듯 당황한 듯 혼란한 듯 어색한 얼굴의 에트리아스를 끌어안았다. 도닥도닥 등을 쓰다듬는 손길이 다정하기만 했다. 얼어붙은 에트리아스를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었다.

 

 “자, 함께 소풍을 즐겨야지?”

 

 발랄한 목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어느 샌가 숨이 막힐 듯 강렬한 시선은 사라지고 없었다. 미엘은 방긋 웃으며 얼떨떨한 상태의 에트리아스를 끌고 돗자리로 돌아왔다. 금발의 여자아이가 밝은 목소리로 두 사람을 맞았다. 숨차게 떠드는 소리, 즐거운 웃음소리, 맛있는 간식. 즐거운 소풍이었다. 평소와 같이 즐거운 소풍이었다.

 

 

 

 

 미엘은 아이의 서투른 콧노래가 마음에 드는 지 기분 좋은 표정이었다. 에트리아스는 굳이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시안과 시엘은 이미 돌아가 자리에 없었다. 남은 것은 금빛 고수머리를 흰 옷자락과 함께 펄럭이며 가볍게 춤을 추고 있는 작은 소녀. 그리고 그 것을 그늘아래서 지켜보고 있는 미엘과 에트리아스 뿐이었다.

 

 “참 용하지 않아, 에티?”

 

 잔뜩 애교를 부린 귀여운 목소리였다. 한껏 기분이 업 되었을 때나 내는 교태어린 목소리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무것도? 그냥 구경중이야. 켈이가 저렇게나 귀여운걸.”

 “…….”

 

 손톱이 길었다면 좋았을걸. 미엘이 중얼거렸다. 손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꼭 움켜쥔 에트리아스의 한 손을 어루만지며 한 말이었다. 애매하게 일그러진 발그레한 뺨에 사랑스럽게 키스를 남긴다. 입맛을 다시듯 자신의 입술을 혀로 핥아내는 모습이 지독히도 사랑스러웠다. 천사의 목소리로 노래하던 소년의 어설픈 허밍이 귓가를 울리고 있었다. 금빛 저녁햇살에 물든 소녀의 하이얀 드레스가 꿈결처럼 아득했다. 그 어느 곳에 있어도 배경과 분리되어 그림자를 드리우던 아이는 그가 좋아하던 소녀와 같이 숲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흑과 백, 색채라고는 보이지 않던 작은 신체는 온갖 빛깔에 둘러싸여―.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

 “어째서? 이미 그렇게 되어 있는데.”

 “그런.”

 

 계속 말하려는 에트리아스의 입술에 미엘의 손가락이 가볍게 와닿았다. 쉿, 작게 속삭인 미엘은 너무도 즐거워 보이는 미소를 띄고 있었다.

 

 “분명히 그날 리히트는 죽었어.”

 “…….”

 “하지만 사라진 건 리히트가 아니지.”

 “…….”

 “지금 저기에 리히트가 있잖아.”

 “…….”

 “죽은 사람과 사라진 사람이 언제나 같은 건 아니야. 적어도,”

 

 미엘이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이 행복하게 온 얼굴로 방긋 웃었다.

 

 “꿈속에서는 말이지.”

 

 소년은 붉은 노을아래서 금빛으로 빛나는 머리칼을 흩날리며 하얀 원피스 자락을 가녀린 손가락으로 붙든 체 살랑거리는 바람과 함께 춤을 추었다. 흐릿하게 들려오는 음정이 맞지 않는 노래는 사람이 부르는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신비한 목소리로 연주되고 있었다. 눈웃음 치고 있는 오른쪽 눈은 동공의 부재로 까만 유리구슬 같았다. 나무들이 그의 춤에 맞추어 우수수 소리를 냈다. 까르륵 하는 작은 웃음소리가 섞여들었다.

 

 소년과 소녀가 있었다. 소녀는 세상의 사랑을 받아 반짝거렸다. 소년은 그런 소녀를 세상보다 더 사랑했다. 사람이 소녀를 시기해 칼을 들었다. 하늘이 울던 그날 소녀의 심장이 멈추었다. 소년은 자신의 심장을 소녀에게 주기로 했다. 하지만 끊어진 운명의 실은 다시 이어지지 않아서, 소년은 소녀만을 되찾기로 했다. 그래서 소년은 소녀가 되었다.

 그날 소녀는 죽었다. 그날 소년은 사라졌다.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렇지, 에티?”

 

 에트리아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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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 그럼, 시작할까요? _with RIMIEN SIARTE
02. 웃을 수 밖에 없는 가면
03. 낙원이라 불리는곳.
04. 들리지 않는 인어의 노래
05. 가시 철창속의 하얀 새
06. 눈이 내리지 않는 나라
07. 작은새가 인도해준 길
08. 인형의 숲
09. 아빠,어디계세요?
10. 아름다운 천사의 노래
11. 그 곳에서 잃은 아이
12. 달이 먼지가 되어 사라지던 날 밤
13. 이브의밤
14. 검은구두
15. 피투성이 작은 소녀
16. 짓밟힌 민들레꽃씨
17. 길을 따라가면
18. 지평선너머로 바라본세계
19. 신에게 바칠 제물
20. 어둠에게 잡아먹힐 것 같아요
21. 엄마, 아파요.
22. 그렇게 예쁜 미소 짓지 말아요
23. 바다밑에서들리는 아름다운 소리
24. 종소리울리는밤에
25. 파란색 나비,파란색 장미,파란색 하늘,빨간색 나.
26. 잘라진 분홍빛날개
27. 비오는날. 파란우산의 요정
28. 귀여운 나의 아기
29. 가족과 함께한 마지막 저녁식사
30. 조심하세요. 어두운 곳이랍니다.
* 31. 죽음이라는 이름의 무희가 춤을 춘다 _with Licht
* 32. 손에 피가 묻었어 _with Re―Miel―Siarte
33. 울지않았다. 웃지못했다. 울 수 없었다.
34. 혼자서 울고있었어요.
35. 마른 나뭇가지 위의 하얀 나비
36. 그냥 그대로의 표정으로
37. 마리아님, 저의 기도를 들어주세요.
38. 나비날개를 단 악마
39. 그 때, 하늘은 나에게 분노했죠
40. 비가내려요. 하늘에서 비가내려요.
41. 그림속에 있는남자
42. 검은색 무지개
43. 파란물고기
44. 이중으로 걷는자(도플갱어)
45. 천사. 심판을 받다.
46. 보라색 안개를 뒤집어쓴 못난이
47. 꿈속의 레퀴엠
48. 아득한 기억속 오르골이 연주한 피의 자장가
49. 끝나버린 멜로디
50. 은으로만든 빨간 십자가목걸이
51. 눈이 내리는 날의 장례식
52. 하얀 구두를 신고 춤추는 붉은 머리의 소녀
53. 크리스마스에 내리는 비
54. 앨리스의 나라
55. 당신을 파티에 초대합니다.
56. 산타클로스는 언제 죽었나요?
57. 나는 그 때 하늘의 분노를 느꼈죠.
58. 피로물든 드레스
* LOSS (59. 춤추는 숲속의 소년) _with DUNKEL
60. 들리지않고 보이지않고 말할수 없는 천사
61. 나의 휴식처가 되어주세요.
62. 푸른색 나무그늘 아래에서
63. 생일선물을 받았어요,아주 예쁜
64. 하늘에서 내리는 붉은 비와 붉은 우산과….
65. 카프리치오(광상곡)
66. 엄마를닮은 인형
67. 유리성의 겨울
68. 축제의 마지막날
69. 장미화관에 찔렸다.
70. 악마와의 교환으로얻은 목소리
71. 어릿광대의 가면
72. 눈물을 버리다.
73. 열어서는 안되는 방
74. 소녀를 죽인것은 칼이 아니에요,관이죠.
75. 환상. 무엇을보고있는가.
76. 눈. 내리는마을
77. 지옥에서 온 초대장
78. 단지 나만을 위한 파티
79. 영원히 계속되는 13일의 금요일
80. 장미덩쿨 미로
81. 가면무도회
82. 누구나 가면을 쓰고있죠.
83. 공중정원
84. 허상속의 소녀
85. 순수한 아이의 세계
86. 소녀만의 작은 비밀의정원
87. 함께 밤을 기다려주세요.
88. 축제의 마지막밤
89. 운명을 믿으세요?
90. 귓가에맴도는 겨울멜로디
91. 교회에 있는 소녀
92. 웃음짓는 아빠, 웃음짓는 엄마, 웃음짓는 아기. 어디에도 나는 없어요
93. 망령이 지배하는 나라
94. 자비로운미소. 추악한 소녀
95. 아무도 나를 바라봐주지 않아
96. 벌거벗은채 쫓겨난 아이
97. 이제 나는 나쁜아이인가요?
98. Good Bye - My little girl.
99. 신을 사랑한 이에게 내린 비극
100. 이제 끝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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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그럼 시작할까요 _with RIMIEN SIARTE

 “안아.”

 

 그녀는 나를 그렇게 불렀다.

 

 “안아, 안 자?”

 “벌써 여섯시인걸요. 아침이에요.”

 

 얇은 베일처럼 겹겹이 깔린 어슴푸레한 새벽의 어둠이 가볍게 흔들렸다. 거의 걷혀가는 새벽의 자취가 이 공간의 지배자에게 보일 수 있는 유일한 경외의 표시였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정작 경배를 받은 그녀 본인이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섯시? 우, 그럼 한참 꿈나라에서 헤엄치고 있을 시간이잖아.”

 

 그녀는 잠에 취해 비틀거리며 나를 향해 다가왔다. 한손으로는 늘 그녀의 침대에 뒹굴고 있는 강아지 인형을 끌어안고 나머지 한손으로는 눈을 가리고 있는 상태였다. 정오가 되어도 한밤중처럼 캄캄한 그녀의 방에 비하면 이미 하루가 시작된 이 곳, 거실은 눈이 부신 것이 당연했다. 나는 읽던 책을 내려두고 일어나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럼 다시 방으로 가요. 좀 더 자고 이따가 일어나세요.”

 “우우.”

 

 그녀는 투정부리듯 고개를 흔들었지만 달래면서 한 발짝 내딛자 눈앞의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방금 전까지는 환하게 빛이 들어오던 거실이었는데 지금은 어둑한 복도에 자리한 그녀의 방문 앞이었다. 집안의 다른 이들에겐 열리지 않는 비밀의 문 정도로 알려져 있는 방이지만 사실은 그녀의 침실. 그것도 지금같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때는 물론 그녀가 본체로 돌아갔을 때도 편히 쉴 수 있도록 준비해둔 특별한 장소였다. 문이 열리자 바깥과는 완전히 다른 공간인 듯 끝이 보이지 않는 아득한 어둠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 깜깜하네요.”

 “졸려-.”

 

 나는 바로 방의 윤곽도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워서 방이 아니라 문 너머로 구멍이 뚫린 듯한 그곳에 차마 발을 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거리낌 없이 자연스럽게 문턱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고, 그녀가 내 손목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나 역시 따라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방안은 말 그대로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태. 문에서부터 그녀의 침대까지 이르는 긴 직선상에 부딪칠만한 물건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녀는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가면서도 내 손을 놓지 않았다.

 

 “저 이만 가볼게요.”

 “싫어, 옆에 있어.”

 

 거의 잠에 빠져든 상태인 듯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내 손을 더욱 끌어당겨 아예 인형과 함께 품에 안았다. 난 완전히 침대위에 걸터앉게 되어버렸다. 놓아달라는 의미로 그녀의 손을 톡톡 두드려보았지만 그녀는 모르는 척 새근새근 고른 숨소리를 내었다.

 

 “자는 척이라니, 어린애처럼 굴지 마세요, 마스터.”

 

 조용히 불러 보아도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괜히 웃음이 나왔다. 아무것도 보이질 않아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머리를 찾아 침대를 더듬었다. 그녀가 자면서 신경 쓰이지 않도록 얼굴을 덮은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그녀의 이마를 쓸어 넘기는데 갑자기 강한 힘으로 손을 붙들고 있던 팔이 느슨해졌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끝까지 소매에서 떨어지지 않는 손을 조심스레 잡아 그녀의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이따가 낮에 일어나면 다시 손 잡아드릴게요. 그러니까 지금은 참으세요.”

 

 당연히 대답은 없었다. 나는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를 남기고 방을 나왔다. 언제나 그랬지만 이 방은 빠져나갈 때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은은한 빛이 나갈 길을 비추어 주었다. 마치 어느 누구의 접근도 반갑지 않다는 듯 들어오는 이에겐 인색하고 나가는 이에겐 후한 방이었다.

 

 

 

 

 시안이 나가고 문이 닫히자 방안의 풍경이 바뀌었다. 문과 문턱이 맞닿고 ‘잘각’하는 소리로 바깥 공간과 완전히 격리되었음을 깨달은 방이 자신의 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갑자기 방의 크기가 변하거나 벽지, 가구가 바뀌는 등의 큰 변동은 아니다. 방안에서 변한 것은 단 한 가지. 갑자기 나타난 것인지 단순히 커튼에 가려 있었는데 너무 어두워서 눈치 채지 못한 것인지 모를 작은 창문이 나타났을 뿐이었다. 창밖의 풍경은 집안의 다른 장소와는 다르게 한밤중이었다. 어두운 푸른 하늘에 달과 별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맑고 깨끗한 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와 갖가지 잡동사니로 가득한 수납장을 비추었다. 무대 위로 스포트라이트가 떨어지듯 곧은 직선을 그리며 들어온 달빛이 가장 환하게 빛나는 방의 구석에 ‘그녀’또래로 보이는 한 소녀가 서있었다.

 

 소녀는 달빛을 받아 붉고 시리게 빛났다. 붉었다. 소녀의 선명한 선홍색 머리카락은 귀를 덮고 좁고 가녀린 어깨를 만나 갈라졌지만 남은 머리숱만으로도 풍성해 어깨마저 덮고 빈약한 가슴과 등을 타고 흘러내려 통통한 엉덩이와 허벅지, 종아리를 지나 마침내는 바닥에 흩어져버렸다. 어둠 속에서 보아도 눈이 아플 만큼 자극적인 붉은색이 달빛을 받아 소녀의 전신을 감싸고 반짝였다. 가만히 달을 응시하는 그녀의 동그란 두 눈, 그것을 감싼 풍성한 속눈썹과 눈 위의 곧고 짙은 눈썹도 같은 빛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밀랍인형 만큼이나 창백한 그녀의 피부 위에도 머리카락만큼이나 붉은 곳이 있었다. 화장기라곤 전혀 없는 소녀의 양 뺨은 한눈에 띌 만큼 발그스름했고 앙다문 입술은 립스틱을 바른 아가씨의 입술보다도 붉었다. 붉은 빛에 가려져 거의 보이지 않는 여린 몸뚱아리엔 소녀의 피부만큼이나 하얀 민소매 원피스 한 장만이 걸쳐져 있었다. 그것은 마치 소녀의 붉음이 더욱 붉어 보이도록 배경으로 깔아놓은 흰 도화지 같았다.

 

 건조한 무표정과 미세한 움직임조차 없는 모습은 소녀를 살아 있는 생물이 아닌 것처럼 느끼게 했다. 얼핏 보기엔 숨도 쉬지 않는 것 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느린 박자로 가슴이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댕-. 댕-. 댕-.”

 

 창 너머 먼 곳에서 출처를 알 수 없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댕-. 댕-. 댕-.”

 

 느릿하게 퍼지는 종소리의 여운은 이미 깊은 잠에 빠진 아이에게 이불을 덮어주듯 방안을 포근하게 감싸주었다.

 

 “댕-. 댕-. 댕-.”

 

 종소리 사이로 뭔가 다른 소리가 들렸다.

 

 ‘일어나’

 

 숨소리 같은 속삭임.

 

 “댕-. 댕-. 댕-.”

 “지금이야.”

 

 마지막 종이 울리자마자 들린 것은 조금 전의 환청 같은 소리와는 달랐다. 들릴락 말락 작게 속삭이는 것은 같았지만 분명 방안에서 들려온 것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시작했다.”

 

 붉은 빛의 소녀였다. 소녀의 작은 입술이 달싹였다.

 

 “계속 자고 있을 건가.”

 “움…….”

 

 그녀가 몸을 뒤척이더니 옆으로 돌아누웠다. 소녀에게 등을 보이는 방향이었다. 그녀는 뭔가 불편한 듯 얼굴을 찌푸린 체 강아지 인형을 꼭 껴안았다.

 

 “그렇군.”

 

 

 

 

 소녀는 사라졌다. 처음 나타나서 내내 그림같이 한자리에 서 있던 소녀는 말을 끝내자 아무런 낌새도 없이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방안의 풍경은 붉고 커다란 점이 사라졌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바뀐 것이 없었다. 어느 샌가 창에는 속이 비치는 얇은 커튼이 쳐져 있었다. 그녀는 조금 더 어두워진 방안이 마음에 들었는지 행복한 미소를 띠고 편안히 잠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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