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리는 평생 자기 입으로 '그 말'을 하게 될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가능하면 피하고 싶었다. 아카리는 말해야한다고 생각했지만 입만 뻐끔거리다가 결국 딴소리를 내뱉었다.

 "선배, 눈이 삐었지?"

 노조무가 당장에 얼굴을 찌푸리고 대꾸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눈이 삔 게 틀림 없어."

 아카리는 노조무에게 다 들리도록 볼멘소리로 툴툴거렸다. 그런 소리를 듣고 얌전할 노조무도 아니었다.

 "고 귀여운 주둥아리를 하늘같은 선배한테 놀리는 거냐, 아키사키."
 "선배는 무슨 빌어먹을 선배. 후배가 남잔지 여잔지도 못 알아보는 선배 필요없습니다만?"
 "이 자식 아주 막나가네. 운동장 가서 좀 뛰고 올테냐?"

 아카리는 어이가 없어 입을 딱 벌리고 노조무를 쳐다보았다. 이 멍청한 인간이 제일 중요한, 아카리로써는 굉장히 힘겹게 내뱉은 요지를 쌈싸먹어 버렸다. 아카리는 진지하게 이 먹통같은 선배를 어떻게 응징해주어야 할지 고민했다. 노조무는 할말을 못 찾고 버벅이는 아카리를 한심스럽다는 눈초리로 쳐다보고 있었다. 아카리는 순간 열이 확 뻗쳤다.

 "눈이 삔 게 아니라 머리가 돈 거였수?"

 아카리의 말을 듣고 노조무도 결국 책상에 엉덩이를 걸친 느슨한 자세를 집어던졌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은 자리에서 파직파직 스파크가 튀는 듯 했다. 기싸움이 지속되는 상태에서 이번에도 아카리가 먼저 말했다.

 "한 판 뜰까?"
 "..."

 노조무는 잠시 아카리를 보았다. 그리고 이내 흥, 콧방귀를 끼곤 다시 책상에 기대섰다. 어쩐지 아카리를 상대론 경쟁심도 투지도 생기질 않았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고까운 녀석인데 그게 딱히 나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다른 녀석은 절대 이렇지 않은데 이상한 일이었다. 가끔은 예뻐보이기까지 했다. 사내새끼가 귀엽게 느껴지다니. 노조무는 그 사실을 깨달은 중등부 시절부터 그것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다만 최근 우연히 그 사실을 여동생 센쥬와 친척인 미캉의 앞에서 언급하고 말았는데, 두 사람은 적극적인 태도로 그것이 어쩌면 사랑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당시 노조무는 사랑하는 센쥬가 있으니 말도 안된다고 잊어버렸지만 방금 전에 바로 그 아카리에게서 두번째 고백을 듣고 난 시점에서는 전혀 달랐다. 약 일주일쯤 전에 있었던 첫번째 고백 이후 노조무는 아카리가 수돗가에서 머리를 감는 모습만 보아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오히려 고백한 아카리는 평소와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자타공인 여고생 애호가인 노조무가 자신의 성적 취향을 의심하게 될 줄이야.
 한참 생각에 빠진 노조무를 아카리가 곁눈으로 쳐다보다가 중얼거렸다.

 "역시 잘못 생각했나."

 그것을 혼잣말이었다. 하지만 아카리는 그 말을 노조무가 듣던 말던 개의치 않는 듯 했다. 평소와 같은 뚱한 표정이었지만 누가봐도 뚜렷할만큼 무언가를 꾹 참는 것이 보였다. 아카리의 눈시울이 붉었다. 노조무는 말은 잘했지만 위로는 잘 못했다. 그래서 침묵했다. 아카리도 말이 없었다. 저녁시간이 가까워 학교에는 사람이 없었고 둘 뿐인 학생회실은 운동장에 몇 안남은 학생들의 외침까지 들릴만큼 조용했다.

 초침의 똑딱이는 소리가 수없이 지났다. 비스듬하게 앉아 줄곧 창 밖만 보던 아카리는 흘끔 노조무가 선 쪽을 보았다. 위로는 시선을 주지 않았다. 눈물이 아직 고여있었다.
 감정이 격해져 부끄럽게도 눈물이 난 것이 창피했다. 대답을 들으려고 했을 뿐이었는데. 또 한 번 제 기세에 밀려 고백 아닌 고백을 한 것부터 그 뒤의 상황에 이르기까지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럴 바엔 말을 꺼내지 말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었다. 그 때는 꼭 그래야할 것 같았지만 그 순간을 참았다면 이런 상황에는 처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노조무가 자신을 한치 의심도 없이 남자로 알고 있었다는 것에 화가 났지만, 진정이 되자 아리스가와 노조무는 원래 이런 인간이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보다도 아카리가 바라던 것이었다. 자신이 남자인 것. 그래서 더욱 기분이 나빴다. 가장 원하던 것을 얻었다는 걸 깨닫자마자 그걸 내던져야 하다니. 문득 센쥬 생각이 났다. '아키사키군,'하고 자신을 부르던 목소리도 떠올랐다. 아카리는 시간을 몇 년쯤 되돌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노조무를 불렀다.

 "선배."

 노조무가 대꾸했다.

 "응?"

 아카리는 결국 말해야 했다. 유치원 시절부터 누군가 입 밖에 내면 온 힘을 다해 두들겨 주었던 '그 말'을.
 심호흡부터 했다. 그냥 툭 말하기엔 너무 오래 금기시 해왔다. 그러고도 말이 나오지 않아 아카리는 혀로 입술을 적셨다. 간신히 목소리가 나왔다. 아카리에게도 잘 들리지 않는 작은 소리였지만 어쨌든 말은 할 수 있었다. 작은 소리로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또 길게 숨을 뱉었다. 아무래도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쯤되니 아카리는 자신이 바보 같았다.
 결국 노조무가 짜증스레 말했다.

 "불렀으면 말을 해."
 "선배."
 "어."
 "……하아."

 아카리는 또 한숨만 쉬었다. 노조무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얼굴로 화를 냈다.

 "자꾸 말하다 말래? 말하려면 하고 아님 말아."
 "하아."
 "야!"
 "선배."
 "왜."

 아카리는 드디어 얼굴을 들었다. 아카리를 보고 있던 노조무와 정확히 시선이 맞았다. 닦지도 흘려보내지도 못해 여전히 눈물 고인 강한 눈매로 노조무를 바라보았다. 아카리는 결국엔 말했다.

 "나 여자야."

 '그 말'을. 그리고 각오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말에 크게 상처 받았다.

'story in my world > in tokyo & seoul'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데트 홈즈 In 네냐플 2  (0) 2009.12.24
오데트 홈즈 IN 네냐플(패러디 섞인 도쿄와 룬의 아이들 패러디 Mix)  (0) 2009.12.24
긴 꿈.  (2) 2009.06.29
오데트 홈즈Ordet Holmes  (0) 2009.04.05
LICHT  (0) 2009.04.05
Posted by fad
,

 오데트 홈즈는 어수선한 교실 안을 한번 휘둘러 보았다. 스쳐가는 시선 속으로 검은 두 눈동자가 보였다. 하지만 그대로 스쳐간다. 굳이 그의 의문에 대답해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폰 아르님이라는 성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 혈통은 물려받은 데모닉 오데트는 일련의 상황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다른 생각에 잠겼다.
 안젤리크가 쓰러진 이유는 알고 있다. 그녀는 강한 사람이지만 신체의 연약함은 그 정신을 버텨내지 못했다. 오데트는 굳이 안젤리크를 깨울 시도는 하지 않았다. 잠시 잠들어 있어도 좋을 것이다. 본인이 거부한다 하더라도 데모닉의 정신은 방대하여 휴식을 취할 기회는 극히 드무니 이런 기회를 굳이 자신의 손으로 걷어낼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물론 잠들어있는 중에도 절대 생각은 멈추지 않을 테지만.

 "오데트, 오데트 크리스토펠!"

 힐끔 올려다보자 단호한 표정의 루시안이 있었다. 허리에 양 손을 짚은 소년은 오데트의 반응이 평소같지 않아도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좋단말이지, 천진난만하다는 건.

 "언니가 쓰러졌잖아. 왜 꼼짝도 안하는 거야."

 잔뜩 노려보는 시선에서 고개를 돌리고 의자에서 뛰듯이 일어섰다. 사뿐사뿐 구름 위를 걷듯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교실을 빠져나간다. 뒤에서 버럭거리는 루시안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시끄러워. 속으로 말하고 오데트는 언니가 실려나간 경로를 따라갔다. 보리스가 들처업고 나갔겠지. 보지 않아도 환하다. 언니한텐 좋은 일일거야. 안제는 유령을 보는 것을 싫어하니까.

「꼬마 공주님, 무슨 생각해?」

 빙글빙글 웃는 얼굴이 불쑥 시야 안으로 들이밀어졌다. 오데트는 베, 하고 혀를 내밀곤 그를 제쳤다. 그닥 대화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다. 안젤리크처럼 쓰러지거나 하지는 않지만 오데트 역시 자신이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했다. 한번에 여러가지 생각을 할 수 있는 자신에게는 아무런 소용도 없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 언니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오데트의 머릿속에는 그때의 장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불타는 집. 처음만난 알폰스의 목소리. 그 때 있었던 일을 마법같이 그대로 그려낼 수 있었다. 왜 아버지 이야기를 들었는데 아버지가 아니라 집이 떠오르는 걸까. 이유는 알고 있었다. 그 집이 타버림으로 인해서 안제와 오데트에게 있었던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완전히 사라졌기에. 그것을 마음 깊은 곳에서 느껴버렸기에. 아버지, 어머니, 큰언니의 얼굴도 한번씩 떠올려 보았다. 아무런 감흥이 없는 자신이 쓰러지는 안젤리크의 옆모습과 대조된다. 이렇게 기억되고 싶지 않았다면 좀 더 버텨보지 그랬어요. 데모닉이 세운 계획에 이길 수 있을리는 없었겠지만.
 가족들이 참수되는 광경을 어른들은 보여주지 않으려 했지만 오데트는 보았다. 안젤리크는 오데트를 말렸지만 끝까지 붙들지는 않았다. 몰래 숨어들어간 처형대에서 공화정을 쓰러뜨린 주역이 아르님 가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걸 알자마자 곧장 떠올릴 수 있었다. 초상화조차 본 적 없는 데모닉 조슈아의 이름. 아르님 집안이 어린 후계자. 현 아르님의 공작의 이름은 지워버렸다. 그가 그런 책략가가 아니라는 것쯤은 어린 오데트가 배운 극소량의 지식으로도 충분히 판단할 수 있었다. 고작 12살이었지만 오데트는 알고 있었으니까. 자신이 데모닉이라고.
 아르님 집안의 재앙이자 축복 데모닉에 대한 것을 소문으로 듣고 당장에 흥미가 생겼다. 아무도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려주지 않았지만 오데트는 데모닉에 대해 조사했다. 모나 시드 학원에 다니고 있다는 현 데모닉 조슈아에 대한 정보를 주워듣기는 쉬웠다. 아직 안젤리크와 오데트를 어린 아이라고 귀엽게만 생각하는 선생님도 쌍둥이를 그저 총명한 딸들이라고 좋아할 뿐인 부모님이나 언니도 오데트가 궁금하다는 듯 물으면 뭐든지 알려주었다. 이상하다는 생각따위는 하지 않는다는 걸 오데트는 알고 있었다. 아르님 가문은 본래 공작가로 공화국의 적이다보니 자세한 이야기는 해주지 않았지만 오데트는 그 어렴풋한 정보만을 가지고 사실을 구성해 나갔다.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웬일이야, 에타스?"
「음? 뭐가?」
 "걱정을 다해주고."

 오데트의 표정이 '정말 궁금해,'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에타스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 아가씨를 한대 때려줘야 하는데, 하고 중얼거렸다. 오데트는 헤죽 웃을 뿐이었다.

「연기하지마.」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오데트가 대답했다.

 "뭐가 연긴데?"

 에타스는 짜증스레 흥, 하고 콧김을 내뿜었다. 오데트는 그 모습을 보고 성난 물소 같다며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에타스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오데트를 째려보았지만 아이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멀쩡해.」
 "그래?"
「그래. 그냥 정신적인 충격일 뿐이야.」
 "그럼 됐어."

 오데트는 에타스를 내버려두고 퐁퐁 뛰어갔다. 언니가 어디쯤 누워있을까, 라고 흥얼거리는 즐거운 목소리에 걱정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즐거운 아이. 그것이 오데트 크리스토펠, 아니, 오데트 홈즈. 데모닉 오데트. 그녀의 방대한 정신용량은 가벼운 감정의 동요를 모두 집어 삼켜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조금 이상한 여자아이로 보이게 했다. 스스로가 억누를 수 있는 감정의 잔량이 어느 정도일지는 본인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래봐야 남의 일이지만. 에타스는 괜히 걱정하고 있는 자신이 짜증나 마음 속으로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은 후 오데트를 따라갔다. 그녀는 어느샌가 안젤리크가 있는 방을 찾아낸 모양이었다. 추리해서 찾아낸 건지 운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굉장한 속도다. 에타스는 이런 인간말고는 이야기할 상대가 없는 자신이 처량해졌다.
 하지만 그녀라도 있으니까 다행이다.

'story in my world > in tokyo & seoul'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조무&아카리 :; 고백  (0) 2011.09.23
오데트 홈즈 IN 네냐플(패러디 섞인 도쿄와 룬의 아이들 패러디 Mix)  (0) 2009.12.24
긴 꿈.  (2) 2009.06.29
오데트 홈즈Ordet Holmes  (0) 2009.04.05
LICHT  (0) 2009.04.05
Posted by fad
,

 오늘의 조슈아 폰 아르님은 굉장히 곤란한 상황에 빠져있었다. 아니, 최소한 그렇게 생각되는 상황이었다.

 “왜. 좋잖아. 여자애가 따라다니고. 아, 너한테는 그렇게 드문 일이 아니던가?”

 믿고 있지만 이런 일에 있어서는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친구는 도움을 청하는 조슈아에게 그렇게 비웃음을 던지고는–,

 “대체 왜 그렇게 조슈아를 따라다니는데.”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었다.
 막시민과 눈을 마주친 여자아이는 안 그래도 커다란 금빛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발뒤꿈치를 들었다 놓았다 하며 불안정한 자세로 서 있었고, 그 결과 그녀의 놀라울 정도로 풍성한 금빛 곱슬머리가 두 소년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그녀가 대답했다.

 “에헷.”
 “…….”
 “…….”

 잠시 후, 조슈아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이마에 손을 짚고 자신의 앞으로 돌아온 막시민이 고개를 절래 절래 저으며 이렇게 말한 것이다.

 “항복. 쟤는 못 이기겠다.”
 “…….”
 “왜.”
 “아니, 네가 말싸움에서 지다니 어쩐지 신기해서……."
 “아예 아무 말도 안하는 걸 어떻게 이기라는 거냐!”

 막시민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고대로 이어 화풀이하듯 신경질적인 잔소리가 쏟아졌다. 덕분에 조슈아는 갑자기 자신에게 화살이 돌아온 막시민의 말을 받느라 한참 진땀을 빼야했다.

 “사이좋네?”

 막시민이 화가 잔뜩 섞인 발걸음으로 자리를 뜨자마자 들려온 목소리에 조슈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아까와 다를 것 없는 자세로 서서 뒷짐을 지고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고 있는 소녀는 조슈아가 대답을 하든 말든 상관이 없다는 듯 인형 같은 눈으로 소년을 빤히 바라보았다. 조슈아는 결국 대답을 해야했다.

 “그렇지.”

 그리고 덧붙였다.

 “그럴 거야.”

 조슈아의 말을 들은 건지 만 건지 여자아이는 눈만 더 크게 뜨고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잠시 그녀의 말을 기다리던 조슈아가 뭔가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녀는 가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조슈아는 순간 움찔하고 물러섰다. 그녀의 해맑은 웃음소리는 기억을 일으켰다. 잊을 수 없는 데모닉이 아니더라도 선명히 기억날 풍경. 천진난만한 웃음을 얼굴 가득 머금은 금발의 아가씨. 조슈아 폰 아르님의 누이, 이브노아 폰 아르님. 그녀는 누이와 닮아있었다.
 하지만 그런 조슈아의 상태와는 관계없이 소녀는 제 좋을 때까지 숨이 넘어갈 듯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리고서는 숨도 고르지 않고 갑자기 제자리에서 빙글 돌더니 폴짝 뛰어 조슈아의 발끝에 자신의 발끝을 붙이고 섰다. 고개를 완전히 꺾은 체로 조슈아를 올려다보는 눈이 다시 동그랗게 뜨였다가 사르르 미소 지었다.

 “내 이름은 오데트. 오데트 크리스토펠.”

 의미를 알 수 없는 발언에 조슈아가 뭐라 대답하지 못하자 오데트는 다시 방긋 웃고는 뒤로 한 발짝 가볍게 뛰어 물러섰다. 뭔가 말할 것 같은 얼굴이었으나 오데트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어째선지 조슈아는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자그마한 여자아이가 발끝으로 땅을 콩콩 차고 있으니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조슈아는 자신이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에 놀라고, 또 오데트의 일련의 동작이 자신이 보기에 한 치의 흠도 없었다는 점에 또 놀라고 말았다.

 “잘 부탁해요, 데모닉 조슈아. 절대 잊어버리면 안 돼?”

 수수께끼를 내는 듯한 말투였다. 조슈아가 데모닉인 것을 알고 있다면 잊어버릴 수 없다는 건–. 아, 하긴. 관계자 외에는 잘 모르는 사실이지. 조슈아는 의문을 띄웠다가 스스로 답했다. 이것은 거의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원래 생각이라는 것이 그렇지만 데모닉의 사고속도는 일반인의 그것에 비할 수 없는 것이다. 한데, 이 오데트라는 여자아이는 마치 ‘이제 알았지?’라고 말하는 듯 미소를 띠고 헤헷, 웃었다. 그리고 조슈아가 뭔가 말을 꺼낼 틈도 주지 않고 “안녕! 나중에 또 봐!”하고 등을 돌려 파닥파닥 뛰어가 버렸다. 그런 동작은 마치 아직도 걸음마를 배우는 어린아이마냥 불안정해서 조슈아는 아까 자신이 본 것이 눈의 착각이었던 것은 아닌지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결코 자신의 눈과 머리를 의심할 수 없는 조슈아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story in my world > in tokyo & seoul'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조무&아카리 :; 고백  (0) 2011.09.23
오데트 홈즈 In 네냐플 2  (0) 2009.12.24
긴 꿈.  (2) 2009.06.29
오데트 홈즈Ordet Holmes  (0) 2009.04.05
LICHT  (0) 2009.04.05
Posted by fad
,

 피곤했다. 푹 잠들었던 것이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아니, 푹 자지 못해도 좋으니 꿈을 꾸지 않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눈만 감으면 하나의 꿈을 꾸었다. 아주 오래도록 꾸어온 꿈이었다. 기억도 나지 않을만큼 어린시절부터 꾸었던 꿈.  언제나 이렇게 잦은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일년넘게 꾸지 않기도 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것이기에 이리도 괴롭히는 걸까 생각했다. 그는 나와 함께 자랐고 그에게 큰일이 생길 때는 꿈을 꾸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리고 그럴 때면 내 인생에도 커다란 바람이 불었다. 그와 같은 방향으로. 그의 뒤를 쫓듯이.

 거울 속의 남자는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싶을 정도로 검은 빛에 휩싸여 있었다. 단정히 묶은 새카맣고 긴 머리칼, 검은 신부복은 전신을 덮어 드러난 곳이 없었다. 온통 검기만 하여 답답할 정도였다. 안그래도 창백한 피부가 그 검은 빛에 대비되어 파리하게 보였다. 대낮이지만 조명이 필요할 어두운 방안에서 얼굴과 손만이 하얗게 도드라졌다. 텅 빈 무표정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빠져나온 팔이 허리를 끌어당겼다. 기대라는 의도가 분명한 당김을 무시했더니 그 쪽에서 몸을 붙여왔다. 거울에는 그의 얼굴이 비추고 있었다. 텅 빈 무표정에 눈을 맞추었다. 부드러운 바리톤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웃었다. 조금 간지러운 느낌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시나?"
 "아무것도."

 남자의 뜨거운 숨에 귓가가 뜨거워지고 있었다. 음험한 목적을 가진 손이 목끝까지 올라오는 신부복 위를 더듬고 있었다. 끔찍했다. 이 몸뚱아리는 결코 남자의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받은 것이 아닐터인 것을. 거기까지 생각하고 다시 거울을 보았다. 포주에게 부탁해 굳이 들여놓은 전면거울은 반짝이며 방안의 풍경을 비추었다. 그 안에 보이는 것은 남자의 손에 몸을 맡긴 신의 지팡이. 여인의 몸이라도 허락받지 못한 일을 남자인 자신이 행하고 있었다. 아아, 신의 노여워 하시는 음성이 머리 속을 웅웅 울리는 듯 하였다.

 "사제님께서는 나르시스트였군."
 "전혀. 아니야."
 "이런."

 그가 또 웃었다.

 "싸늘하군. 좀 더 기분좋은 말 해줄 생각 없어?"
 "당신은 그런 말을 즐기는 타입이 아니지 않았던가."
 "잘 아는군. 네 맞춤 서비스에는 늘 감사하고 있어."

 문득 큭큭거리고 웃는 잘생긴 얼굴이 너무도 익숙하다는 것에 소름이 돋았다. 내가 이 일을 시작한 지 몇 년째더라? 갑자기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팔을 강하게 잡혀 근육이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이 올라왔다. 섹스 후에 남는 것은 쾌락이 아니라 고통이었다. 정신적인 수치심과 절망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인 신체의 비명소리. 그것에 빠져 타락할 수 없는 것이 잘된 일인지 잘못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옷을 벗겨주는 것을 좋아하는 손님의 취향에 맞춰 그의 옷을 벗기며 손끝에 감각이 없다는 것을 실감했다. 감각이 없어도 벗기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눈앞이 흐려도 넘어지지 않고 걸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바래왔던 것이기에 불만은 없었다. 그 어떤 고통도 견딜 수 있었다. 이 한번 악물지 않았다. 오히려 정신력으로 움직일 수 있는 수준이라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였다. 이런 몸뚱아리따위 이런 정신따위 더더욱 망가져버려라. 그녀가 건강하고 행복하기 위해서 치르는 값이 고작 이런 것이라면 얼마든지 줄 수 있었다. 신께서 두 사람에게 이런 운명을 내린 것은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임에 틀림없었다. 자신을 모두 그녀에게 바치라고 만든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세상에게 축복받는 사랑스러운 사람이었으니까 그 불공평한 분배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희생을 필요로 했겠지. 그것도 자의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더더욱 부족함이 없으리라.


 감은 눈 너머로 아득하게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햇살이 눈부신 초록빛 벌판. 맑은 웃음소리가 서늘한 공기를 타고 퍼졌다. 반짝거리는 금발이 흔들리고 하얀 사제복이 흔들렸다. 돌아선 그녀의 얼굴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눈이 시릴만큼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그 얼굴만을 꿈처럼 그리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목소리만이 귓가를 울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볼 수도 들을 수도 느낄 수도 없었다.

 ―그렇게, 잠에서 깨어났다. 손가락만 까닥해도 전신을 울리는 고통에 일어날 수가 없었다.

Posted by fad
,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며 경쾌하게 리듬에 맞춰 뛰었다. 또각 딱 또각 톡톡. 두꺼운 구둣굽이 보도블럭과 부딪쳐 작게 소리를 낸다. 아, 탭댄스용 징이라도 박는다면 더 좋을텐데. 그치만 그랬다간 안그래도 무거운 구두가 더 무거워지겠지~. 안돼안돼, 그러면 발목을 접질리고 말거야. 통통 괜히 폴짝폴짝 뛰었다. 신호가 안바뀌어. 그냥 파다닥 달려가고 싶지만 조금만 참자. 빨간 불 저리가고 초록 불 이리오렴! 흥얼흥얼, 어딘가 음이 미묘하지만 아무려면 어때. 아, 초록색이다! 아까부터 동동거리며 시동을 걸어뒀으니 발진 준비―, 땅! 엄마야!

 "아직 빨간불이랍니다, 체셔고양이님."

 언제나처럼 흐릿하게 웃고있는 시이씨의 얼굴이 시야를 가-득 메워와서. 우아아, 깜짝이야. 귀신! 뿌, 해도 그냥 빙글빙글. 웃으면 기분나빠. 오데트는 엄청 놀랐는데. 귀신처럼 소리없이 천사님이 내려온 줄 알았어. 하얗고 하얀 색. 천사님의 색깔. 반짝반짝해. 파닥파닥 흔들자 목이 땡기지 않게 되었다. 맨날 블라우스를 움켜쥐어서는 곤란해요, 천사님. 흥. 아, 진짜 초록불이다! 아까 초록색은 뭐였을까나? 신호등보단 낮았을까나아―. 다음에 찾아봐야지! 초록불보다 진한 초록빛. 나뭇잎인가. 두리번 두리번해도 신호등 옆에 나무가 보이지 않는다. 그럼 대체 뭐였을까나~.

 "길은 알고 가는 겁니까?"

 뒤에서 쿡쿡 웃는 것 같은 목소리로 시이씨가 말했다. 언제나 눈을 마주치지 않으면 그렇게 말을 해. 정말로 소리를 내서 웃고 있는걸까? 하고 고개를 돌리면 어느샌가 시치미를 뚝. 못됐어, 천사님. 천사님은 착해야하는데 오데트 짝궁인 하얀 천사님은 심술궂다.

 그러고보니─,

 오늘은 오데트의 또다른 짝꿍, 또다른 천사님을 만나는 날이다. 다섯살이 되기까지 언제나 함께였던 다른 천사님은 오데트와 천사님이 다섯살이 되는 날 사라져 버렸다. 오데트는 다섯살 생일이 기억나지 않아. 천사님 얼굴도. 사실은 천사님과 함께였다는 시간이 전혀전혀 생각나지 않아. 깜깜한 밤이야. 천사님은 어떻게 생겼을까? 어떤 목소리일까? 뭘 좋아할까? 오데트처럼 인형놀이를 좋아하고 팔랑팔랑 예쁜 드레스에 두꺼운 통굽구두를 신었을까? 오데트랑 천사님은 얼굴은 조금 달랐지만 눈은 다른 색이었지만 정말로 한 쌍 같다고 엄마, 아빠가 그랬어. 그럴까? 오데트랑 천사님 한 짝일까? 원래 한짝이면 바로 알 수 있겠지? 만약 못 알아보면 어떻게 하지? 두근두근, 가슴이 뛴다. 퐁당퐁당 발걸음이랑 같이 두근두근 심장이 뛴다. 어쩐지 태어날 때부터 오데트랑 하나였다는 천사님은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하얀 날개가 달렸을 것만 같아!





 "와아아─!!!!!!!"
 "이런, 뛰지 마세요. 또 넘어지잖습니까."

 하얀 천사님의 잔소리도, 오늘만은 참아줄게!

Posted by fad
,
 소녀는 무슨 일에건 쉽게 적응했다. 놀람과 어색함은 한 순간 뿐이다. 기쁨도 슬픔도 행복도 괴로움도 아주 일시적인 것 뿐이다. 알고 있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다. 그저 이미 한 번은 겪은 괴로움을, 이미 한 번은 느낀 슬픔을 다시 한 번, 더 크게 느낄 뿐이다. 소녀는 생각했다. 기쁜 일도 미리 알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텐데. 부럽다고 생각했다. 아마쿠사 아키라. 리히트가 자신을 알고 두번째로 사랑한다고 생각한 사람. 모든 미래를 알고 있는 사람. 시간 앞에 누구보다도 당당한 사람. 소녀는 울었다. 나도, 기왕 미래를 먼저 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거라면 차라리, 행복도 미리 느낄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텐데. 내가 살아온 이십 구년, 짧은 인생은 두 배 큰 슬픔이 두 배 많이 찾아와 결국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그런 구조였다. 어째서, 어째서 신은 그리도 가혹하신가. 소녀는 신을 믿고 의지하고 받드는 자였다.

'story in my world > in tokyo & seoul'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긴 꿈.  (2) 2009.06.29
오데트 홈즈Ordet Holmes  (0) 2009.04.05
죽음에 대한 15제 _ 6.자학  (0) 2009.02.01
온통 새하얀 빛의 천사  (0) 2009.01.08
리히트, 아키라. 만남.  (0) 2009.01.08
Posted by fad
,
  잠들지 못한 밤이 벌써 몇일째일까. 눈이 시리고 뻑뻑했다. 소년은 꼿꼿한 자세지만 묘하게 불안정한 걸음으로 발을 내딛었다. 달빛을 받은 바닥이 반짝반짝 빛났다. 소년의 눈동자가 초점없이 흐릿했다. 거의 흰자와 구분이 가지 않는 옅은 회색빛 홍채는 달빛이 꽤나 밝은데도 불구하고 풀어져 동공이 크게 확대돼 있었다. 아무 것도 신지 않은 하얀 발이 닿은 바닥에는 붉은 눈송이가 점점히 박혔다.
  비틀, 소년의 몸이 균형을 잃고 작게 흔들렸다. 그리고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무의식 중에 바닥에 댄 손바닥에 힘을 주어 몸을 일으켰다. 들려진 손에서 붉은 눈송이가 떨어져 내렸다. 떨어지는 눈송이가 달빛에 반짝하고 빛났다. 몸을 일으킨 소년은 움직이지 않고 잠시 이마에 손을 짚은 체 그 자리를 지켰다.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었지만 소년은 느릿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허벅지까지 닿은 소년의 새까만 머리카락이 하이얀 달빛과 반짝이는 바닥에 대비해 구멍이 뚫린 듯 보였다.

  '오늘은 달이 참 밝다, 그치?'

  소년은 고개를 들었다. 흐릿한 두 눈이 초점을 찾았다. 몽롱한 표정을 한 소년이 다시 한걸음 한걸음 발을 옮겼다. 눈에 띌 정도로 휘청거리고 있었지만 쓰러지지는 않았다. 점점이 이어지던 붉은 눈송이는 조금씩 커져서 마침내 붉은 발자욱이 되었다. 한발짝 내딛을 때마다 급하게 꺾이는 무릎이 위태로웠다. 비틀, 비틀. 흔들거리며 힘겹게 몸을 옮겼다. 은빛으로 빛나는 길지 않은 길이 끝나고도 몇걸음인가 더 나아간 소년은 그대로 풀썩 쓰러졌다. 소년의 발이 닿은 마지막 자리까지 붉디 붉은 발자욱이 이어졌다. 등은 하얗기만 한 발의 바닥은 온통 붉었다. 붉은 조각이 발바닥을 온통 메웠다. 드디어 감긴 두 눈과 창백한 얼굴은 전혀 고통을 호소하지 않았다. 그대로 깊은 잠에 빠진 작은 소년은 평온한 표정이었다.

  '응, 둔켈도 행복한 꿈 꾸길. 잘 자.'

'story in my world > in tokyo & seoul'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긴 꿈.  (2) 2009.06.29
오데트 홈즈Ordet Holmes  (0) 2009.04.05
LICHT  (0) 2009.04.05
온통 새하얀 빛의 천사  (0) 2009.01.08
리히트, 아키라. 만남.  (0) 2009.01.08
Posted by fad
,

 복잡한 주택가, 좁은 골목을 굽이굽이 돌아가다보면 막다른 길. 좁지만 햇빛이 잘 드는 그 골목에는 카페가 하나 있다. 하얀 벽돌 건물에서 가게만이 오로지 갈빛 목재인지라 한눈에 들어오는 작은 카페. 내부 구조상 문을 열지 않으면 덧문이 달린 그리 크지 않은 창으로만 빛이 들어온다. 180이 넘는 장신의 주인이 간신히 서있을 수 있는 외부도 내부도 아담한 카페. 오너, 시이첸 아라마스는 매일 아침 덧문이 반쯤 열린 창문가에 서서 실눈을 뜨고 옅은 아침 햇빛을 즐기는 걸 좋아했다. 덤으로 이렇게 덧문을 살짝만 열어두면 언제나 감추고 있는 날개도 한번쯤 펴볼 수 있다. 안타깝게도 가개 내부가 너무 좁아서 엉거주춤 펴는 듯 마는 듯 할 수밖에 없지만.

 "미─…."
 "잇삐, 이제 들어왔나요?"
 "냐~"

 까만 민소매 원피스만 한장 걸친 작은 여자아이가 시이의 허리에 머리를 부비며 들어섰다. 샛노란 눈이 어두운 카페안에서 밝게 빛난다. 시이는 아이의 작은 머리를 가볍게 쓸어주었다. 가늘고 긴 손가락 탓에 아이의 머리가 한 손에 잡혔다. 이대로 콱 움켜쥐면 바스러질텐데. 햇빛에 지는 시이 얼굴의 음영이 더욱 짙어졌다.

 "배가 고픈가요?"

 사람의 목소리라고 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어보이는 갸르릉 거리는 소리로 아이가 응답했다. 제 주인에게만 온갖 애교를 부리며 달라붙는 이 아기고양이가 시이의 유일한 동거인. 그나마 지금은 동거'인'이라 불릴만한 모습을 갖추었지만 본래는 그저 객식구일 뿐인 떠돌이 짐승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사건'으로 인해 이 아이의 인생도 꽤나 많은 면이 뒤바뀌어버린 셈.

 "이런, 이렇게 붙어있으면 움직일수가 없잖습니까. 조금만 떨어져 주시겠어요?"

 그것은 갑자기 나타난 웬 아가씨의 한마디로부터 비롯된 일이었다.





 천계와 마계는 태고적에는 하나였다고 한다. 그것이 어찌하여 하나가 되었는지는……, 별로 알 필요 없겠지. 그것에 관련해서는 온갖 전승이 있지만 시이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천계와 마계는 하나가 아니고 서로 적대하고 있으며 시이는 그 경계를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는 것 뿐. 어릴 적에 수도없이 들었던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면 시이는 과거에 천계와 마계가 하나였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것이었다. 시이는 철저하게 자신이 바라보는 것, 자신이 해야하는 것 이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딱히 무언가를 좋아하거나 싫어해본 적도 없었고 별 것도 아닌 것에 열심히 의미를 갖다 붙이는 일에도 흥미가 없었다. 심지어 신에게조차, 관심따위는 없었다. 천사라지만 시이는 말단. 신을 만날 일따위는 평생을 기다려도 없을 것이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마계를 지키는 악마들과 눈싸움을 한다거나 오늘 식사 메뉴라거나 그런 시덥잖은 것들이 시이의 관심사의 전부였다. 요즘은 꽤나 평화롭긴 하지만 가끔 벌어지는 싸움에서 자신과 비슷한 말단 악마들의 머리를 부수는 일은 조금 좋아했다. 손끝을 타고 올라오는 그 감각이 좋았다. 조금 위험한 일이었지만 이래뵈도 시이의 전투력은 다른 말단 천사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으므로 죽을 걱정따위는 하지 않았다. 물론 죽을지 모른다고해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멈출 시이가 아니기도 했지만. 사는 것에도 별 아쉬움은 없는 시이였다. 그리고 약간의 위험은 작은 취미에 스릴을 더해주지 않는가.
 조금 지루하다고 생각했다. 무료했다. 평화로운 나날이 지겨워서 전쟁이라도 일어났으면, 하고 바랐다. 물론 전쟁이 일어나면 당장 군대에 동원되서 대기해야 하므로 귀찮으니 얼른 끝나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겠지만 상관 없었다. 그건 그때가서 귀찮을 일이고.

 "냐아오─."

 고양이가 자신의 발목에 머리를 부비다 못해 지쳐서 울음소리를 냈다. 임무를 설때면 언제나 그렇듯 자신의 거대한 낫에 기대어 서서 딴생각을 하고 있어서 알아채지 못했다. 평소라면 금방 알아차렸을 텐데 지루하다는 감각에 조금 깊게 빠져버린 모양이었다. 준비해둔 사료를 꺼내주자 늘 그렇듯 냄새를 맡으며 조심스레 주변을 맴돌았다. 2~3일에 한번씩 찾아오면 밥을 주는 이런 일정이 계속 된지 벌써 반년이 다되어가는데 의심이 많은건지 고양이라는 녀석들이 다 그런건지 아니면 그저 이녀석의 습관인지 확인에 확인을 거듭한다. 시이는 그런 고양이의 모습을 멀뚱히 지켜보았다. 경계 근무 중에 딴 곳을 봐도 되는 건가 싶지만 시이가 근무 중에 딴짓을 하는 건 늘 있는 일이고 그렇게 딴짓을 하면서도 결코 사소한 이상 하나 놓치지 않기 때문에 아무도 책하지 않았다. 시이는 자신의 임무에 관해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실수 하지 않았다.
 갑자기 주변이 술렁거렸다. 시이는 고양이의 사소한 행동을 바라보는 일은 꽤나 즐거워서 고개를 돌리고 싶지 않았지만 일단 보고는 해야하니 다시 경계임무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리고 그런 시이의 앞에 선 것은,
 여자아이?

 "안녕하세요."

 상냥하게 웃는다. 시이의 가슴께에밖에 오지 않는 여자아이는 그렇게 그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갑자기 천계와 마계의 경계에 나타난 소녀는 양 진영을 지키는 수많은 병사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시이의 앞에 섰다. 전선 가까이에 있는 모든 생물체가 두 사람만을 주목하는 듯한 정적이 흘렀다. 마주선 두 사람은 키부터 시작해서 닮은 부분이 하나도 없었지만 둘을 바라보는 이들은 모두 두 사람이 어딘가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전선의 싸이코, 시이첸 아라마스와 저 아름다운 소녀가 닮았다는 건 어쩐지 말이 맞지 않는 것 같았지만 그렇게 보였다. 소녀가 말했다.

 "시이첸 아라마스씨, 맞으시죠?"
 "예. 그렇습니다."

 거의 한사람이 말한 듯이 즉각적으로 대답이 이어진다. 자신을 아리스가와 센쥬라고 소개한 소녀는 그의 대답을 듣고 작게 쿡, 하고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며 시이 역시 언제나 입가에 매달고 다니는 미소가 조금 짙어진다. 병사들은 그 모습을 보고서야 간신히 이 사실을 상부에 전달해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부산해진 병사들의 심정은 아는지 모르는지 센쥬는 다시한번 시이에게 말했다.

 "저와 함께 가주시겠어요? 마법사님이 당신을 기다리고 계세요."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새하얀 빛인 천사의 얼굴이 센쥬의 말에 부드럽게 풀렸다. 그 전에도 분명히 상냥한 표정으로 웃고는 있었지만 더 부드러워 졌다는 느낌. 가늘게 뜬 두 눈이 더 가늘어졌다. 사랑스럽다는 듯 낫을 끌어안은 손 중 하나가 풀어져 나와 그의 가슴 위에서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살짝, 그의 상체가 기울어진다.

 "Yes, miss.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고개를 들어 센쥬와 시선을 맞춘 시이의 눈이 기분 좋게 미소짓고 있었다. 마주한 센쥬도 생긋 웃어보였다. 병사들의 표정이 어떠했을지는 모두의 상상에 맡기도록 한다.

'story in my world > in tokyo & seoul'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긴 꿈.  (2) 2009.06.29
오데트 홈즈Ordet Holmes  (0) 2009.04.05
LICHT  (0) 2009.04.05
죽음에 대한 15제 _ 6.자학  (0) 2009.02.01
리히트, 아키라. 만남.  (0) 2009.01.08
Posted by fad
,
『미래는 정해져있어. 그래서 그대와 나는 운명이지.』

 그 것이 '그'와의 첫만남. 내가 나의, 리히트라는 이름을 잊어버리고 그 이름을 불러줄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게 된다고 하더라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그는 자신만만하게 그렇게 말했다. 몇번을 더 죽는다 한들 잊을 수 없을 그 말. 나는 감격스러운 첫 만남에서, 감동적이기까지 한 그의 말을 듣고 울음을 터뜨려 버렸었더랬다.





 그것은 정말 갑작스러운 만남이었다. 태어난 곳과는 전혀 다른 세계의 처음 보는 낯선 길을 걷다가 30년 전에 연락이 끊어진 친우를 만난다 해도 이토록 놀랍지는 않았으리라. 나는 둔켈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하며 앞을 제대로 보지 않고 걷다가 그와 부딪칠뻔 하고는 급히 고개를 숙였었다. 그와 만난 첫날의 기억은,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헤어지기까지의 시간의 앞뒤는 뿌옇게 흐려져 있다. 그의 말대로 그와 내가 운명이기 때문일까? 운명의 사람을 만났다는 진실에 내 기억회로가 충격을 받아 멀쩡하던 앞뒤의 기억을 뒤흔들어놓은 걸지도 모른다고,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다.

 "어맛,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제가 그만 딴데를 보다가……!!"
 "괜찮아?"
 "에, 아, 예. 저…는 괜찮아요…."

 그는 균형을 잃은 날 붙들고 친절하게 빙긋 웃었었다. 그의 얼굴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웃는 입매만큼은 지금도 그릴 듯이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아름다웠다. 나도 모르게 말을 잇지 못할정도로 그렇게 아름다웠다. 나는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던 것 같다. 그때의 내 시간감각은 완전히 엉망이어서 그게 어느정도였는지는 알수가 없다. 그가 더 행복하게 웃는다고 생각했다. 뭔가 말해야한다고 생각했다. 멈춰버린 머리 속에서 꺼낸 문장은 어찌보면 흔하고 어찌보면 낯뜨거운 그런 말. 그리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내 귀로 들려온 단 두 문장은 내가 가질 이후의 길디긴 시간 속에 깊숙히 새겨져 영원히 빛이 바래지 않을 찬란한 보석이 되었다.

 "전에, 만난 적이 있나요, 우리?"

 그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미래는 정해져있어. 그래서 그대와 나는 운명이지."
 "……에?"

 종이 울렸다.

 뎅, 뎅, 뎅.

'story in my world > in tokyo & seoul'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긴 꿈.  (2) 2009.06.29
오데트 홈즈Ordet Holmes  (0) 2009.04.05
LICHT  (0) 2009.04.05
죽음에 대한 15제 _ 6.자학  (0) 2009.02.01
온통 새하얀 빛의 천사  (0) 2009.01.08
Posted by fa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