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in my world/original own story'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17.09.21 미스즈와 가터벨트
  2. 2014.06.25 좋아해요
  3. 2010.06.13 original Hayar Yute story ― 無題 (2)
  4. 2009.12.17 original Hayar Yute story ― 無題 (1)
  5. 2009.08.07 노래와 함께, 짧은 끄적임 열개.
  6. 2009.06.29 단 하나, 너의 행복을 위해서.

 여자라면 누구나 인생에 한 번쯤은 스커트를 입어야할 때가 있다. 승부수라던지 그런 로맨틱한 의미가 아니다. 문장이 가리키는 그대로 여자에겐 때로 스커트를 걸치고 그것이 아니면 자신을 가꾸는 수단이 없는 것처럼 행동해야할 때가 있다. 시이나 미스즈에게도 그런 때가 있었다. 아니, 그런 시절이 있었다. 자라나는 성장기 청소년에게 강제로 활동을 제약하는 의상을 입히고 규격에 맞춰 방긋방긋 웃는 훈련을 시키는 나라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는 스커트도 교복도 좋아하지 않았지만, 거부할 권리가 없었기에 십년이 넘는 세월을 하반신 노출로 인한 냉증에 시달려야했다.

 그 흔적이 이것이다.

 미스즈는 서랍 구석에 박혀있던 낡은 가터벨트를 꺼내 옆에 던져두었다. 사용한 지 오래되어 어디에 뒀는지 기억도 하지 못했지만 없는 세간에서 물건을 찾아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정돈은 못해도 어지르지는 않는 습관 덕분이다. 미스즈에겐 더이상 스커트를 입으라고 강요할 사람이 남아있지 않았지만, 이 물건이 남아있는 이유는 단순하다. 추억이 깃든 물건이었다.

 고등학생 때였다. 뛰어난 성적으로 장학금까지 받으며 들어간 학교임에도 큰 기대는 없었다. 지금보다 더 세상을 미워하고, 사람을 믿지 못하던 15살의 미스즈는 새 학교가 아무리 뛰어난 명문학교일지라도 어차피 자기 자리는 없으리라고 미리부터 단정하고 있었다. 설령 환영받는다 해도 마찬가지다. 가장 중요한 것이 달라지지 않는 한 미스즈의 인생에는 변화가 없을 테니까 기대할 게 없었다. 그래서 미스즈는 예비소집일을 거치고 입학식을 마친 후에도 시큰둥한 상태였다.

 고등학생 쯤 되면 대다수의 학생들은 입학과 졸업이라는 연속 행사에 큰 감동을 느낄 수 없게 된다. 이르게는 유치원부터, 보통은 초등학교부터 수차례 겪어온 행사기 때문이다. 그나마 졸업식은 선후배와 이별하는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축제 분위기로 변하기도 하지만 입학식은 차라리 탐색전에 가까웠다. 앞으로 삼년을 부딪히게 될 면면을 확인하고 편안한 위치와 든든한 동료를 얻기 위한 눈치싸움.

 미스즈가 입학한 고등학교는 전교순위에 들어가는 명문진학고여서일까. 중학교 때와는 또 분위기가 달랐다. 구김 하나 없는 새 교복을 입은 학생들은 크게 떠들지도 않고 예의바르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서로 아는 사이도 있었지만, 꽤 많은 학생들이 안면이 없어보였다. 중학교 때에 비해 주변에 관심 없는 학생이 많았다. 미스즈는 그런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신입생 대표로 연설한 탓에 관심을 가지고 인사하러 오는 학생이 있었으나 미스즈는 냉랭하게 인사하고 관심을 끊어버렸다. 먼저 인사한 아이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덕분에 더이상 말을 걸어오는 학생은 없었다.

 근처에 앉은 아이들과 말을 섞으며 조금씩 교실이 소란스러워지는 중에 담임이 나타났다. 이렇다할 특색이 없는 사람이었다. 적당한 키에 적당한 몸매, 선생님다운 차림을 한 여자. 그리 길지 않은 갈색 머리를 하나로 묶었다.

 “인사.”

 특색이 없다는 말은 취소. 담임은 아주 우렁찬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었다. 학생들은 약 9년간 단련된 습관대로 입을 맞춰 인사했다.

 나타나마자마 우렁우렁하게 출석을 부른 담임은 자신을 토야마 요시코라고 소개했다. 시원시원한 인상에 학생들 표정이 밝았다. 아침조회와 종례를 빠르게 끝내주는 담임만큼 좋은 담임도 별로 없다. 안내해야할 사항을 안내한 담임은 곧 교실을 빠져나갔다.

 “시이나 따라오렴.”

 미스즈도 데리고 갔다.

 새 담임은 좋은 선생님이었다. 미스즈는 앞으로 자신에게 일어날 변화를 알지 못했지만, 그것만은 분명하게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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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같은 사람이 연인이라면 좋겠네요. 부러워요. 아차, 애인 없다고 했죠?"
수아는 쓰게 웃으며 잔을 내려놓았다. 미성년이지만 손에 든 것은 알콜이 듬뿍 들어간 독한 위스키. 이런 것을 주문하는데도 잠시 주인 대신 가게를 봐주고 있다는 그녀는 수아를 말리지 않았다. 그런 점이 좋았다. 수아도 주인이 있을 때는 시키지 않는 메뉴를 자유롭게 시키고 남들 앞에서 하지 않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러면 그녀는 언제나처럼 편한 미소로 수아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다. 그런 점이 미안하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찾듯 수아는 그녀가 있는 시간에 가게를 찾았다. 오늘처럼 단 둘이 있는 일은 드물었지만 자주 만날 수 있는 것만으로 좋았다. 단지 그것만으로 어딘가 구원받은 기분이었다.
수아의 넌지시 떠보는 말에도 그녀는 웃기만 했다. 머리카락과 같이 고운 적회색 눈썹이 상냥하게 굽어졌다.
"수아씨는 사귀는 사람 없어요?"
그녀가 물었다. 수아는 픽 웃었다.
"있어보이나요?"
"네. 미인이고 능력도 있고. 인기 많을 것 같아요."
그녀의 대답과 함께 넘어가는 위스키가 썼다. 수아는 잔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세상에 여자가 자기보다 능력있는 걸 좋아하는 남자는 없어요."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가요?"
그렇게 말하고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잘 모르니까요."
그녀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수아는 그녀의 붉은 눈을 지긋이 살폈다. 아름다운 눈. 무엇을 보려고 했던 것인지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순진무구한 사람이었다.
"미기."
수아는 그 순간 자신이 왜 그렇게 말했는지 몰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말할 타이밍이 아니었는데.
"나랑 사귀지 않을래요?"
미기는 또 웃었다. 이번엔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명랑하게 카페를 울렸다. 수아는 그녀가 대답을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누구라도 이런 갑작스런 이야기에는 할 말이 없겠지.
그리고 긴장했다. 어차피 허락받지 못할 걸 알면서도 마음이 그리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가게를 나서면 울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들었다. 저도 모르게 얼굴이 딱딱해졌다.
미기는 한참을 웃었다. 수아가 지칠 때까지 웃었다. 수아는 차마 그녀를 제촉하지 못했다.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열었을 때는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좋아요. 그럼 오늘부터 1일이네요? 나 100일이니 투투니 챙기는 거 해보고 싶었어요. 발렌타인 데이도요."
정말로 무너질 줄은 몰랐었지만 그 정도로 긴장한 것이 사실이었다. 수아는 자기가 대답할 수 없게 될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할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도 몰랐다. 어리벙벙하니 미기를 바라보기만 했다. 미기는 또 웃으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제가 뭔가 잘못 말했나요?"
그러더니 그제야 표정이 바뀌며 허둥거렸다.
"어머, 농담인데 진지하게 대답했나 봐요. 미안해요. 그런 게 어려워요. 다들 하는 농담 같은 것 말이에요."
미기는 어쩔줄 몰라하다가 여전히 굳어있는 수아를 보고는 이번에는 다른 사과를 했다.
"웃은 것 때문이에요? 미안해요. 비웃은 게 아니에요. 마침 저도 비슷한 생각을, 사귄다는 건 아니었는데 수아씨가 아깝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런 이야기를 들어서 웃겼거든요. 농담이라면 성공이었어요."
그 말에도 수아는 조용했다. 미기는 정말로 당황했는지 표정이 나빠졌다. 수아는 무언가 말해야한다고 생각했지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정말로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수아가 한 말은 고작 이 한마디였다.
"좋아해요."
왈칵 눈물이 났다. 갑자기 왜인지 몰랐다. 미기는 뜬금없는 그 말과 당황한 수아의 얼굴을 눈만 깜빡이며 바라보고 있었다. 급히 냅킨을 찾아 눈꺼풀을 누르는 수아를 살피듯 보았다. 수아는 조용하면 안될 것 같은 느낌에 급히 말을 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하는 지 몰랐다.
"처음 봤을 때부터 계속 신경쓰였어요. 미기랑 친한 사람이랑 있는 것도 신경쓰이고, 늘 미기가 오는 날에 맞춰서 찾아오고, 미기가 혼자 있을 거라기에 오늘은 화장도 하고, 이런 못난 얼굴 보여주려고 한 게 아닌데.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나도,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스스로 들어도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말이 빠르게 나왔다. 수아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한탄만 하는데도 늘 들어주고, 나랑 같이 있어줘서 고마워요. 미기랑 같이 있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계속, 계속 생각했는데, 오늘은 이런 말 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안 될거라고 생각했는데, 그치만 하더라도 이렇게 엉망으로 하면 안 됐는데, 너무 엉망이어서 미기가 실망했을 게 틀림 없다고 분명히 생각했는데, 그치만…."
수아는 눈을 들었다. 미기와 눈이 마주쳤다. 손이 따뜻했다. 미기의 손이다. 쉼없이 돌아가던 혀가 겨우 멈춰주었다. 그녀는 또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정말 예쁜 눈이었다. 보석 같은 붉은 눈. 수아는 분명히 팬더같은 얼굴이 되어있을 자기 눈가를 생각하며 부끄러워졌다. 거울을 찾을 수도 없었고, 손은 미기가 잡고 있기도 했다.
미기는 수아의 반대편 손까지 끌어당겨 꼭 쥐었다. 따뜻하다. 수아는 미기의 손을 쳐다보았다. 손가락이 길죽하니 예쁜 손이지만 손톱은 뭉툭하고 굳은살이 눈에 띄었다. 곱지만은 않은 손이다.
"수아."
미기는 조용히 수아를 불렀다. 수아는 머뭇거리며 그녀를 마주 보았다. 미기는 어쩐지 조금 기뻐보였다.
"나도 수아가 좋아요."
그렇게 말해주었다.
"수아랑 처음 이야기했을 때 기억하고 있어요. 얼마나 친구들을 생각하는 사람인지도 알고 얼마나 열정적으로 사는 사람인지도 들었는걸요."
차분한 미기의 음성이 수아를 진정시켰다. 수아는 부끄럽고 미안하고 고마웠다. 눈도 돌릴 수 없었다. 그녀의 손, 제 손의 물기까지 분명하게 느껴졌다.
"걱정이에요. 수아는 나에 대해 그만큼 많이 알지 못하니까요. 나에 대해 알게 되면 수아는 나를 싫어하게 될지도 몰라요. 하지만 수아는 그런 사람이 아니죠? 그렇게 말했었으니까. 그래서 내가 수아의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거예요."
미기의 얼굴에서는 서서히 웃음이 사라졌다. 진지한 얼굴이 아름다웠다. 수아는 홀려버린 것 같았다. 그렇게 둘은 눈을 마주했다.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수아는 자기 얼굴이 바보 같을 거라고 생각했다. 미기는 그저 아름다웠다. 정신을 차리라는 이성의 외침도 속절없이 아름다워서, 수아는 또 눈물이 났다. 이번에는 눌러 참았다. 수아가 그렇게 잘 우는 사람은 아니다.
"미기."
부르자 대답해온다.
"네, 수아."
수아는 미기가 쥐고 있는 자신의 손을 살짝 빼서 그녀를 마주 잡았다.
"내일도 또 와도 될까요?"
미기는 푸훗, 하고 소리내어 웃어버렸다. 가늘게 휘어지는 눈, 말려 올라가는 입술, 한껏 솟아오르는 광대, 살짝 움츠리는 어깨, 흔들리는 머리카락. 그녀에게서 향기가 났다. 어디선가 맡아본 듯한, 향과 비슷한 냄새.
"물론이에요. 또 와주세요."
미기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건강한 피부. 아기처럼 보드라워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햇빛과 바람에 거칠어진 풍아와는 전혀 다르다. 탱탱하니 건강함을 뽐내고 있는 피부에서는 모공도 찾을 수 없다.
"내일도 있나요?"
바로 지근거리에서 본 미기의 눈은 멀리서 볼 때보다 아름다웠다. 카페라떼에 올라간 휘핑같이 따스한 적회색. 빠르게 깜빡이더니 천천히 눈꺼풀이 내려왔다.
"물론이에요."
자연스러운 살냄새가 기분 좋았다. 수아는 후회했다. 화장하지 말걸. 미기가 불쾌할까 걱정스러웠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는 순간은 영영 잊을 수 없을 게 분명했다. 입술은 피부가 얇다더라니 방금 보고 맡은 것의 열 배로 미기가 느껴졌다. 미기가 여기 있었다. 수아는 땀이 찬 손을 살짝 떼며 그녀를 느꼈다. 또 눈가가 아찔해졌다. 오늘따라 눈물샘이 고장난 것 같았다.
눈물을 참자 호흡이 거칠어졌다. 훅, 콧김을 뿜게 되었다. 미기가 풋하고 웃었다. 수아는 비어있는 손을 꼭 쥐었다. 멋쩍게 입술을 떼고 물러난다. 미기는 뭐가 재밌는지 쿡쿡거리고 웃고 있었다.
크흠. 수아는 헛기침을 했다.
미기는 그제야 그녀를 보며 웃음을 멈추었다. 눈이 마주쳤다. 수아도 웃어버렸다.
미기가 수아의 손을 잡았다. 미기의 손은 보송보송했다. 수아는 새삼 땀이 차는 제 손이 미워졌다. 둘은 또 별다른 말도 없이 손만 만지며 서로를 보았다. 먼저 말을 꺼낸 건 미기였다.
"시간이 늦었네요."
수아는 뒤를 돌아보았다. 카운터에서는 시계가 한 눈에 보이지만 바에 앉아서는 제대로 보이지 않게 되어있었다. 미기는 그 말을 하고는 조용했다. 수아는 미기를 한번 보고 아쉽게 손을 뺐다.
"내일 또 올게요."
"언제든지 오세요. 내일은 계속 있을 거예요."
수아는 가방에서 손거울을 꺼내 얼굴을 살폈다. 끔찍하게 엉망이었다. 눈은 온통 시커멓고, 입술은 다 날아가고, 얼굴은 눈물 자국대로 허옇게 떠있었다. 미기는 수아의 표정을 보더니 또 쿡쿡거리고 웃었다.
"씻고 올게요."
수아는 한숨을 섞어 말했다. 미기는 다녀오라고 말하며 자기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운터를 정리하려는 모양이었다.
수아는 화장실로 들어가며 그녀를 돌아보고 문을 닫았다. 거울을 앞에 두자 웃음이 나왔다. 고백했다. 사귀기로 했다. 그제서야 실감이 났다. 수아는 노숙자 분장을 한 것 같은 얼굴로 행복하게 웃는 자신을 마주보며 울고 웃었다. 소리가 들릴까 입을 틀어막고 수도를 열어놓고 훌쩍훌쩍 울었다. 너무 행복해서 나는 눈물은 처음이었다. 어떻게 해야할지 감도 잡히지 않아 수아는 그냥 울었다. 크게 울진 못했지만 꽤 오래 울었다.
한참 울고보니 씻을 시간이 모자랐다. 화장실에는 클렌징 폼이 있어서 지우는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미기가 이상하게 생각할까 급히 얼굴을 씻었다. 손잡이를 잡으니 맨얼굴인데 괜찮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지만 화장품을 들고 다니지 않는 수아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왜 여자들이ー특히 목아가ー그 조그만 핸드백 가득 화장품만 넣어가지고 다니는지 처음으로 이해가 됐다.
화장실에서도 소리가 들리니 알고 있었지만 카페에는 여전히 손님이 없었다. 원래 이렇게 손님이 없는 카페가 아닌데 하늘이 도운 걸까. 다 울고 나니 절로 웃음이 났다. 수아는 실실 웃음을 지었다가 급히 얼굴을 굳혔다. 바보같아 보일 게 뻔했다. 미기는 그런 수아를 보고 또 웃었다.
"오래 걸렸네요."
미기가 말했다.
"얼굴이 워낙 엉망이어서요."
수아가 대답했다.
수아는 일어날 준비를 하고 미기는 구경했다. 카페는 아직 문을 닫을 때가 되지 않았고 슬슬 주인이 돌아온다던 시간이었다. 수아는 주인 얼굴까지는 보고 싶지 않아서 손을 빠르게 했다. 세수를 했지만 얼굴에는 울었던 흔적이 남아있었다.
수아가 가방을 들고 일어서자 미기가 따라 일어났다. 처음이었다. 수아는 의아해했다. 미기는 카운터를 나와 수아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문 앞까지 마중을 나왔다.
"내일 봐요."
그렇게 말하고 뺨에 입을 맞췄다. 수아는 미기 얼굴만 쳐다봤다.
"내일 봐요."
앵무새처럼 그녀의 말을 따라한다. 미기는 또 쿡쿡 웃으며 손을 꼭 잡아주었다. 따뜻한 기운이 물씬 올라오는 손길. 수아는 그제야 따라 웃으며 미기의 뺨과 눈가에 입 맞췄다.
"꼭 올게요."
그렇게 덧붙였다. 미기는 "네,"하고 대답하고 수아의 손을 놓아주었다. 수아는 아쉽게 따라 놓으며 카페를 나섰다. 몇걸음 가서 돌아보자 미기는 수아가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수아는 살며시 손을 흔들었다. 미기도 마주 손을 흔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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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손이 천천히 베일을 걷는 동안 넓은 홀에는 소리 없이 정적이 내려앉았다. 베일 아래로 아이의 고운 얼굴과 눈처럼 깨끗한 은발이 모습을 드러냈다. 온통 새하얀 옷에 머리까지 새하얀 창백한 피부 빛의 어린아이는 하얗게 빛을 발하는 듯 했다. 베일 아래 눌려있었음에도 정전기조차 일지 않는 긴 생머리, 어린아이답지 않은 초연한 표정은 아이가 사람이기 보다는 신의 사자라는 느낌을 주었다. 작게 뒤척이는 소리마저도 크게 들리는 침묵 속에서 아이가 천천히 눈을 떴다. 반짝이는 흰 속눈썹이 느리게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슈베린은 호기심으로 눈을 크게 뜨고 어린 사제를 바라보았다. 모든 어린아이들이 다 그렇듯이 성별을 구분할 수 없었지만 슈베린은 아이가 남자라고 확신했다. 루니안의 돌연변이, 남성 사제에 관한 것은 아무것도 알려진 것이 없었지만 천진난만한 황자는 의심도 없이 순수하게 그렇게 믿고 있었다. 이윽고 사제가 눈을 뜨고 반듯한 시선으로 슈베린을 바라보았다. 

“……?!”
 

짙은 붉은 눈이 혈향血香을 안고 슈베린을 조여 왔다. 슈베린은 몸을 뒤로 뺐지만 황금빛 옥좌에 앉은 그에게는 도망갈 자리가 없었다. 소리만으로 공포심을 자극하는 거대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것이 무어라 말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슈베린은 와들와들 떨며 고개를 저었다. 몸의 떨림도 움직임도 점차 커져갔다.
순간 슈베린을 옭아매던 붉은 눈이 사라졌다. 

“왜 그래?”
 

샤린이 작은 부채로 입을 가린 체 슈베린을 흘겨보고 있었다. 슈베린의 반응이 어지간히 수상한 것이 아니었던지 평소 슈베린을 두둔하는 일이 없는 샤린의 눈에는 걱정이 묻어있었다. 황제는 그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그녀의 장갑 낀 손이 슈베린의 손을 붙들고 있었다. 격하게 뛰던 황자의 심장이 차츰 평온해졌다.
 

“왜 그러냐니까.”
 

샤린이 대답을 재촉했다. 슈베린은 픽, 콧방귀를 뀌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샤린의 얼굴이 과격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외면하고 슈베린은 어린 사제를 살펴보았다. 그의 눈은 이제 루비처럼 맑게 빛나고 있을 뿐이었다. 미처 진정되지 못한 심장이 사제의 성스럽기까지 한 분위기를 의심하게 만들고 있었다. 슈베린은 누이의 손을 가볍게 감싸 괜찮음을 알리고 작게 떨리는 손끝을 말아 쥐었다.
재상의 목소리가 홀로 홀 안에 울렸다. 

“이름을 고하시오.”
“하야르 유테입니다.” 

아이의 목소리는 여전히 작았지만 단호하고 깨끗했다.
작은 소년은 많은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침착하게 다시 예를 갖추어 인사했다.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꺾어 몸을 낮추는 절이었다. 찰랑거리는 천에 가려져 정확한 동작은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반듯하게 황실예법에 따른 황제에게 바치는 인사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폐하. 그리고 형제분들.”
 

소년의 미성에 홀 전체가 술렁였다. 대신들의 속닥임이 황제의 귀에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조용히,’라는 재상의 경고에도 소란은 굼뜨게 가라앉았다. 아실리아의 얼굴에는 변함이 없었다. 여황의 아름다운 얼굴은 사제가 갖추어서는 안 될 예의를 갖춘 것에도 나이어린 소년이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내뱉은 것도 다 예상했다는 듯 태연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으니 설명해 주지 않겠소, 사제여.”
 

언제나처럼 느릿하게 이어지는 말에는 진중한 위엄이 실려 있었다. 그 무게는 그녀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융단 위의 사람에게 모든 시선이 집중되게 되어있는 알현실 전체의 구조, 그리고 황제의 옥좌의 높이로 인해 위에서부터 내리누르는 형태로 사람을 압박하게 되어있었다. 짓눌릴 법도 하건만 소년은 조금도 위축됨이 없었다.
 

“그것을 말씀 드리기 위해 이곳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소년의 시선이 살짝 이동했다가 다시 황제에게 돌아왔다. 시선만 살짝 이동하는 미세한 변화였기에 대신들과 뒤에 서있던 다른 루니안의 사제들은 눈치 채지 못했지만 슈베린은 알았다. 아니, 알 수밖에 없었다. 소년의 시선은 슈베린을 지나갔다. 다시 누이에게 돌아간 소년의 시선을 따라 저도 모르게 옆을 보고 만 슈베린은 또다시 샤린과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좌우에서 무엇을 하고 있건 황제와 사제의 대화는 이어졌다. 

“그렇다면 말해보라.”
“이곳에서는 아니 됩니다, 폐하.”
“그럼?”
“제가 며칠 머물러도 되겠는지요.”
“황궁은 넓어서 비는 방이 많지.” 

소년이 엷게 미소 지으며 황제의 앞에 허리를 숙였다. 두 사람은 몇 마디를 더 나누었다. 남는 것은 소년 혼자라는 것과 파티를 간소하게 축소시킨다는 이야기가 오갔다. 간단히 이야기가 끝나고 황제의 퇴실 허가 명령에 사제들이 소리없이 조용하게 홀을 나갔다. 첫 세 걸음은 뒷걸음, 그리고 나머지는 그냥 돌아가는 것이 일반적인 예의지만 지키는 것은 하야르 유테라 이름을 밝힌 소년 하나였다.
관리들에게도 함께 내려진 퇴실 명령이었지만 움직이는 이는 없었다. 사제들의 모습이 닫힌 문 너머로 사라지자 제각각 목소리를 높인다. 누이와 리넨이 두서없는 말들을 받아들이고 잘라내고 정리했다. 슈베린은 잠시 그 모양을 바라보다가 양해를 구하고 홀을 빠져나왔다.




성인 남자가 셋은 편히 뒹굴면서 잘 수 있을 듯 보이는 커다란 침대에 걸터앉은 하야르는 얕은 한숨을 내뱉었다. 주어진 손님방은 호화롭기 짝이 없어서 안 그래도 또래에 비해 작은 아이는 한층 움츠러들어 있었다. 어지간한 서민 집보다 넓은 방 크기도 양 팔을 다 벌려도 두 아름은 남을 듯 한 거대한 샹들리에도 하야르에겐 무섭기만 했다. 제 몸보다 배는 큰 창가에는 몇 발짝 떨어져 구경할 엄두초자 내지 못했다. 창이 큰 만큼 한가득 넘어온 햇빛이 구석구석에 놓인 반짝이는 것들에 부딪혀 눈을 어지럽혔다. 은은한 빛이 감도는 신전에서만 살아온 하야르는 눈 둘 곳을 찾지 못하고 한 번 방안을 훑어보고는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의 긴 머리카락이 어깨 아래로 흘러내리며 방에 놓인 장신구인 양 희게 빛났다.  

“예쁘네.”
“?!" 

하야르는 화들짝 놀라 눈을 홉뜬 체 굳어버렸다. 소년이 모르는 새 열린 문가에는 흐드러진 금발을 매만지는 슈베린이 서있었다.
 

“그래봐야 나만은 못하지만.”
 

보란 듯이 얼굴 가득 비웃음을 띄운 체였다. 슈베린은 빠르게 말한 기세 그대로 거침없이 방을 가로질러 창가 티 테이블 앞 작은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그대로 하야르를 향해 차가운 시선이 꽂혔다. 슈베린은 정확히 뭐라고 표현하기는 어려웠지만 굉장히 기분이 나빠 보였다. 강렬한 감정이 얼굴에서도 몸짓에서도 강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적의에 하야르는 당황했다. 슈베린은 톡하니 쏘아붙였다.
 

“너 정말 남자야?”
“그럼 아닌 것 같습니까?” 

고운 소년의 아미가 흉하게 일그러졌다. 슈베린은 그런 하야르를 보고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배부른 고양이마냥 나른한, 이겼다는 듯 여유로운 미소였다. 하야르는 그런 슈베린에게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용건은 그것뿐입니까?”
“기분 나빠?”
“예.”

하야르의 단호한 대답에 슈베린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 투덜거렸다.
 

“기분 나쁜 건 난데 왜 네가 화를 내는 건지 모르겠어.”
 

소년의 붉은 눈이 슈베린을 향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무것도.” 

그렇게 말하지만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고 슈베린이 얼굴로 말하고 있었다. 하야르는 다시금 인상을 찌푸리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푹신한 양탄자가 발소리를 삼켰다. 슈베린이 소리도 없이 나타난 이유를 깨닫게 된 하야르는 안 그래도 불편하기만 하던 호화스런 궁이 더더욱 불쾌하게 느껴졌다.
 

“왜?”
 

테이블에 팔꿈치를 얹고 턱을 괴고 있던 슈베린이 자신의 바로 앞에 선 하야르를 바라보았다. 의자에 앉아서야 간신히 눈높이가 맞았다. 정면으로 바라보고 선 슈베린에게서 여유가 사라졌다. 하야르는 그 모습이 고소하다고 생각했지만 어째서 슈베린이 자신의 행동 사소한 하나하나에 흠칫거리며 반응하는 건지 의문이었다. 자신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까, 하고 지레짐작해 보았지만 아무리 봐도 그렇게는 보이지 않는다. 잠시 고민하던 하야르는 슈베린이 자신의 말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빨리 나가주셨으면 하는데요.”
“손님이 앉자마자 쫓아내는 건 루니안 교단의 예의인가?” 

처음 이 방에 나타났을 때부터 그랬지만 슈베린의 말에는 시퍼런 날이 서있었다. 이유를 알 수 없었고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도 알 수 없어 당황했지만 마구 휘두르는 칼에 두어 번 스치자 하야르의 얼굴에도 짜증이 새겨졌다.
 

“그럼 초대받지도 않은 곳에 쳐들어가서 화풀이 하는 건 하르미안 황가의 예의입니까?”
 

슈베린의 눈이 크게 뜨였다가 가늘어졌다. 그의 얼굴에서 희미하게 떠올랐다가 짙어지는 미소는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짐작하기 어렵게 만들 뿐이었다. 얼결에 짜증을 내고 주춤거리며 눈치를 보는 하야르를 슈베린은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왕권과 신권은 서로 침해하지 않는 것이 관습이지만 세상은 힘의 논리. 대륙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데다 원하는 대로 정세를 바꿀 수 있는 하르미안의 황실에 밉보인다면 신자도 적고 폐쇄적이라 세가 약한 루니안의 교단은 존속 자체가 위험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날 때부터 사제로 태어난 총명한 소년은 그런 사실이 현실에 어떻게 적용 되는 지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예의가 어떻다고?”
 

~ 2010/03/14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 좋아.”

황태자는 얼굴 가득 사랑스럽게 웃었다. 하야르는 외면했다. 그리고 갑자기 머리카락이 잡아당겨졌다.
 

“……이, 이건 무…!!”
“어린애는 좋구나.” 

슈베린은 하야르의 턱을 잡고 얼굴을 좌우로 돌려보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소년은 발버둥 쳤지만 10살짜리가 어른에게 당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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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싱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은 청년이 황제의 앞에 섰다. 그녀의 지위에 따른 권력을 여실히 느낄 수 있게 해주는 화려한 드레스 자락 앞에 허리를 숙이고 담담하게 말을 꺼낸다. 체구에서 짐작할 수 없는 베이스 톤의 목소리가 조용히 집무실의 공기에 녹아들었다.

 “내일 오후 1시쯤 도착한다는 소식입니다.”
 “고맙다. 이만 들어가 쉬도록.”

 전혀 돌아볼 생각도 않는 황제의 뒤에 보이지 않는 인사를 하고 물러나며 살짝 허리를 든 리넨은 이내 허리를 곧게 펴고 말았다. 창밖에서 들어온 밝은 빛에 까맣게 보이는 황제의 뒷모습이 가녀렸다. 그녀는 뛰어난 황제지만 동시에 한 사람의 여인이기도 한 것이다. 황제의 드레스 자락을 밟을 수는 없었기에 어깨에 손을 얹어 끌어당겼다. 황제의 날씬한 어깨는 그다지 체격이 큰 편이 아닌 리넨의 품에도 아무런 부담이 없다. 아찔한 높이의 힐 탓에 리넨보다도 키가 커 보이지만 그렇다고 쓰러져서야 여황제의 보좌로서 가치가 없다.

 “누가 황제의 몸에 손을 대도 좋다고 했지, 리넨 니르안 데 페르샤인?”

 권위 있는 목소리에는 명령을 내리는 사람 특유의 분위기가 여실히 배어 있었지만 이미 신하에서 오랜 친구로 돌아선 리넨은 웃었다. 수많은 장신구 때문에 가볍게 잡은 어깨에만 손을 붙여 그녀를 끌어안은 체 말을 잇는다.

 “매번 느끼지만 옷 정말 무겁다. 이걸 입고 어떻게 하루 종일 서있는 거야?”
 “여자들은 다 해. 네 덕분에 하녀들이 4시간동안 꾸며준 머리가 엉망이 됐잖아.”
 “어차피 더 이상 일정 없잖아. 이러고 있는 것도 굉장히 오랜만인데 조금은 놀란다거나 반가워해봐.”

 말하는 중에 어느 샌가 볼멘소리로 바뀐 리넨의 목소리에 아실리아는 풋, 하고 웃고 말았다. 아까보다 편안해진 듯 한 모습에 리넨의 얼굴에도 미소가 돌아왔다. 노리고 만들어낸 상황인 양 보였지만 그것은 그저 두 사람의 일상이었다.

 “힘들 때는 조금 우는소리도 해봐. 넌 너무 강한 척 하려고만 해서 문제야.”
 “너처럼 아무렇지 않은 척 하다 돌아서서 한꺼번에 징징거리는 건 사양인데.”
 “이봐.”

 아실리아는 리넨의 팔을 톡톡 쳐 포옹에서 벗어났다. 받쳐준다고 해도 무릎을 꺾은 체 서있는 일은 굉장히 힘들었다. 그것도 십일 센티 짜리 힐을 신고 있다면 더욱 그렇다. 그것도 편한 신발이라고 신은 것이지만. 황제는 책상 위에 놓인 거울을 보며 잠시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돌아섰다. 그렇게 그 날 하루 중 처음으로 아실리아와 리넨의 눈이 마주쳤다. 뚱한 표정이던 리넨은 그녀의 미소 앞에서 팔짱을 풀고 자세를 바로 했다. 태어난 순간부터 그녀의 신하로서 운명 지어진 리넨에게 저 위풍당당한 얼굴이 위력을 잃는 일은 결단코 없으리라. 아실리아의 영롱한 푸른 눈동자가 리넨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내 이름은 아실리아 루 엘 하르미안. 이 하르미안 제국의 황제이자 제국 내 셋 뿐인 소드마스터의 일인.”

 연지를 발라 붉디붉은 입술이 요염한 색을 머금었다.

 “나는 고작 내 신하에게 염려 받을 정도로 약하지 않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리넨 니르안 데 페르샤인 공작?”

 리넨은 한 손을 가슴에 얹고 다시 허리를 굽혔다. 짙은 청색 머리칼이 귀를 넘어가 아래로 흘러내렸다.

 “Yes, Her Majesty the Queen Asillia."

 자연스럽게 내민 손을 받아 키스하며 리넨은 다시 한 번 그녀에게의 충성을 다짐했다. 아실리아가 허리를 숙인 리넨을 내려다보다가 갑자기 씩, 장난스럽게 웃었다.

 “물론, 친구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만.”

 그리고 자기 손으로 리넨을 일으키고는 매달려 안긴다. 리넨은 자신의 목을 꼭 끌어안은 황제의 등을 같이 끌어안아 주었다. 그녀의 등이 작게 떨리고 있는 것은 모르는 척 그렇게.




 하늘하늘, 소년이 발을 뗄 때마다 화사한 적금발이 휘날렸다. 일부러 그렇게 날리라고 해도 나오지 않을 듯한 이상적인 흩날림에 지나던 하녀들의 시선이 흘끔흘끔 모이는 것은 당연했다. 왕궁의 복도를 소년처럼 뛰어다니면 보통은 꾸중을 듣기 마련이지만 그 넓은 제국 안에도 그를 막을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소년의 이름은 슈베린 루이얀 엘 하르미안. 현 황제 아실리아 루 엘 하르미안의 친동생인 황자이다. 올해로 19세. 이리 경거망동했다가는 후에 쏟아질 잔소리가 왕실 창고 하나를 가득 채우고도 남겠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슈베린의 호기심을 강렬하게 자극하는 재밌는 것이 들어오는 날이었다.
 어릴 적부터 탐험이랍시고 이 잡듯이 돌아다닌 성안을 날듯이 뛰어 알현실로 향하는 코너에 들어섰다. 거대한 알현실의 문이 눈에 들어오자 슈베린의 얼굴에 떠있던 홍조와 미소가 한층 진해졌다. 신나게 달려드는 슈베린을 경비들이 막으려 했으나 한낱 경비의 신분으로 황제가 지극히 아끼는 동생에게 제대로 손을 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슈베린은 간단히 경비들을 제치고 알현실의 문을 양손으로 떠밀고 들어갔다.
 붉은 융단이 문에서부터 황제가 앉은 옥좌가지 길게 이어져 있는 알현실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융단의 좌우로 많은 수는 아니지만 관리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장대한 풍경이었지만 슈베린은 전혀 수그러들지 않고 융단 위를 빠르게 달렸다. 높은 옥좌에 앉은 누이들을 바라보느라  주변 신하들의 당황한 표정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누님, 누님. 지금이지? ‘루니안’의 ‘남자’사제가 온다는 거!”

 슈베린의 반짝이는 두 눈이 아실리아를 향했다. 황제는 얼굴을 굳혔다. 사랑하고 사랑하는 동생이지만 사랑할수록 엄할 때도 있어야 하는 법이다.

 “진작 시종을 보내서 알렸건만 어째서 이제야 온 거니?”

 딱딱한 목소리에 슈베린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고개가 땅으로 꺼지고 시선이 사방을 배회한다.

 “그게……, 잠깐 일정을 벗어나서 시종이 나를 못 찾은 듯 하달까…, 그러니까…….”
 “하여간 어린애라니까. 또 시종들하고 숨바꼭질이라도 한 거겠지. 됐으니까 빨리 비켜. 네가 거기서 그러고 있는 사이에 도착하면 어떻게 할 거야.”

 아실리아의 것 좌우에 조금 낮게 자리한 두 옥좌 중 한 곳에 앉아있던 여인이 고고한 자세로 슈베린을 내리깔아보았다. 아실리아 못지않게 따가운 독설을 내뱉은 여인, 아니 여인이라기엔 소녀 테가 나는 여성은 으르릉 거리며 노려보는 슈베린을 본척만척 입을 가리던 부채를 살며시 흔들었다. 금을 녹여 실을 자은 듯 샛노란 금발을 양쪽으로 여러 가닥 땋아 말아 올린 아이는 어른과 아이의 경계에 선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미묘한 풋풋함을 온몸으로 뽐내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샤린 카르센 엘 하르미안. 아실리아 루 엘 하르미안의 동생이자 슈베린 루이얀 엘 하르미안의 쌍둥이 동생. 어릴 적부터 도도한 장미로 이름 높았던 소녀는 이제 곧 그 아름다움이 절정에 달해 흐드러지게 피어날 터였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전혀 관계없이 슈베린과 샤린은 극도로 사이가 나빴다. 슈베린이 예쁜 입술을 오물거리며 삐죽였다.

 “말 되게 예쁘게 한다. 그래서야 나중에 결혼이나 제대로 하겠어?”
 “걱정 마. 나 좋다는 남자 많아.”

 남매의 독기어린 말싸움에 분위기가 싸해졌다. 문무백관이 다 집합한 자리는 아니었지만 신하들이 모인 자리에서 벌어진 왕자와 공주의 어린애 같은 싸움질에 아실리아의 짙은 눈썹이 단번에 찌푸려졌다. 황제가 손짓하자 옥좌 뒤에 서있던 리넨이 앞으로 나섰다.

 “자, 자. 두 분. 아랫것들이 보기에 과히 좋은 모습이 아닙니다. 일단 황자님께서도 올라와 앉으시지요. 곧 귀빈들께서 도착하실 시간입니다.”

 샤린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고 슈베린은 잔뜩 인상을 찌푸린 체였지만 싸움을 이어가지는 않았다. 슈베린이 옥좌에 앉고 리넨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자 기다렸다는 듯 경비병의 목소리가 들렸다.

 “달의 여신 ‘루니안’님의 사제 분들의 도착입니다!”

 거대한 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품위 없어.”

 슈베린과 샤린의 작은 중얼거림과 함께 손님의 모습이 드러났다. 거리가 워낙 멀어서 인원이 셋이고 모두 하얀 옷을 입었다는 것 외에는 알 수 없었다. 그나마 한 사람이 유난히 키가 작다는 것 정도가 얻을 수 있는 정보의 다였다.

 “에이씨, 융단은 왜 저리 긴 거야.”

 만족스럽게 보이지 않자 짜증스러워진 슈베린의 투덜거림이었다. 샤린도 별말은 없었지만 손님들의 느릿한 걸음이―걸음이 느린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거리가 긴 것이 문제였지만―불만스러운지 부채를 접어 손바닥을 탁탁 두드렸다. 솔직한 두 사람의 반응에 리넨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본디는 짧지만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길디 긴 시간이 지나고 세 명의 사제가 옥좌 앞에 섰다. 신을 모시는 몸, 사제들은 허리만을 숙여 인사했다.

 “대 제국 하르미안을 향한 달빛의 가호가 영원히 계속되기를.”
 “달빛의 반짝임이 이곳에 직접 닿음에 감사하오. 갑작스러운 방문에 많은 것을 준비하지는 못했지만 잠시 머무르는 동안 즐겁기를 빌겠소.”

 형식적인 인사가 오갔다. 지금 이 홀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하인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것이었다. 그들은 홀 안을 가득 메워 인간 벽을 이룰 숫자의 신하들에 멋있는 식사에 귀족들이 모두 모일 연회까지 마련하느라 눈코 뜰 새도 없을 것이다. 긴급히 소집된 탓에 이 자리에 집결한 신하들도 절반이 체 못되는 수였다. 새벽에 갑자기 도착한 전갈에 성의 모든 고용인들은 고양이 손이 급할 상황이었다. 피부미용을 위해 오후까지 푹 자야한다는 게으름뱅이 귀족 아가씨들도 오늘만은 아침 해를 보았을 것이다. 그야말로 화려한 하르미안의 수도가 온통 뒤집힌 셈이었다. 이 자리에 선 세 사람을 위해 그렇게 많은 사람이 움직였다.
 한데, 이어진 사제의 말은 기다린 사람들에게는 뜻밖의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씨익 웃는 입술이 베일 아래로 아스라니 비쳐보였다.

 “저희는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여신을 모시는 몸, 오래 성지를 떠나있을 수는 없는 것이기에.”

 당황한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샤린의 눈이 동그래졌고 슈베린의 발간 뺨이 부풀었다. 리넨은 티는 내지 않았지만 얼굴에선 놀란 기색이 엿보였다. 침착한 것은 어깨 앞으로 흘러내린 짙은 보랏빛 머리칼을 하얀 손가락으로 가볍게 쓸고 있던 황제 아실리아 뿐이었다.
 소란에도 불구하고 움직이는 사람은 없었다. 말을 했던 사제도 황제도 침묵했다. 다들 자기들끼리 소곤거리긴 해도 대뜸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고, 그것도 이내 리넨의 제지에 조용해졌다.

 ― 사락.

 얇은 천이 끌리는 소리가 침묵 속에 흐릿하게 들렸다. 이런 소리가 들릴 곳은 단 한 곳뿐이기에 얼핏 들은 사람들은 바로 고개를 돌렸다. 듣지 못한 사람들도 옆 사람을 따라 시선을 고정시켰다. 베일 너머로 빠져나온 가냘픈 손이 마법처럼 주의를 끌었다. 홀 안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그 작은 손이 무슨 기적이라도 되는 양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반 어른들의 절반 정도 밖에 안 되어 보이는 작은 키의 사제가 다른 두 사람의 앞에 섰다. 속삭이는 듯 숨소리가 섞인 고운 목소리였다. 다들 숨조차 죽이고 있지 않았다면 아무도 듣지 못했을 작은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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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Pick a character, pairing, or fandom you like.
좋아하는 캐릭터, 커플링, 팬덤을 한 가지 고른다.
2. Turn on your music player and put it on random/shuffle.
랜덤으로 음악을 재생한다.
3. Write a drabble/ficlet related to each song that plays. You only have the time frame of the song to finish the drabble; you start when the song starts, and stop when it's over. No lingering afterwards!
음악이 재생되는 동안 그에 맞춰 글을 쓴다. 한 곡이 플레이되는 동안 하나씩. 음악이 시작할 때 쓰기 시작하고, 끝날 때 끝낸다. 다시 듣기 없기!
4. Do ten of these, then post them.
그렇게 열 편 써서 포스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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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을 보고 있었다. 긴 머리는 피에 젖어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가 밟은 것은 시체, 몸을 당기는 것은 핏덩어리. 평소라면 주름 하나 없이 단정했을 천자락은 넝마가 된지 오래였다. 짙은 검은색이 온통 피투성이가 된 신체를 가려주었다. 몇 사람이 다가왔다. 그들은 너덜너덜해진 앳된 청년을 멀리 두고 멈춰섰다. 파리하게 질린 얼굴에 흐르던 붉은 피가 검게 굳어가고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시원스럽게 미소짓는 얼굴로 한 남자가 말했다. 시체를 밟고 선 그의 유쾌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눅눅한 공기를 흔들었다. 피묻은 칼을 든 사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담담히 대꾸했다. 하얗게 된 얇은 입술에는 말라서 얇은 피부가 터진 탓인지 남의 것이 묻은 것인지 모를 피가 말라 붙어있었다.

 "왜 왔지?"

 소리는 작았지만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그 말을 받았다. 난장판에 선 그들의 차림은 깔끔하기 그지 없었다.

 "부탁하는 것이 한두번도 아니고 감사하고 싶어서 말입니다. 오늘이 마지막이기도 하고 말이죠."
 "……마지막?"

 청년은 그제야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억지로 짜낸 탓에 목소리가 갈라졌다. 근육이 없는 듯한 무표정으로 그는 절뚝이며 돌아섰다. 남자는 흥얼거리는 투로 연극하듯 과장되게 팔을 벌렸다.

 "마침내 살인하는 신부라는 타이틀을 떼어낼 수 있게 되었다 이겁니다. 기쁘지 않으신가요?"
 "……."
 "이런, 이런. 재미없는 사람. 당신이 직접 제시한 계약기간이니 당연한가요."
 "그랬던가."
 "잊어버린 거군요. 그럴 것 같았습니다만."

 남자의 뒤에 서있던 몸종이 청년에게 편지를 전했다. 손에 든 핏물로 종이에 붉은 자욱이 문질러졌다. 받자마자 떨어지는 손을 보며 남자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기간만료, 라는 계약서입니다. 보지 않는 겁니까?"
 "나중에."

 싸늘한 대답에도 남자는 웃을 뿐이었다.

 "이렇게 보는 것은 이걸로 끝이군요. 이후 조만간 찾아뵙겠습니다."
 "마음대로."

 청년은 사라지는 그들을 그저 바라보았다. 혼자 남아서도 움직일 줄 몰랐다. 무너지지도 움직이지도 않은 체 그렇게 서있었다.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어갈 때였다. 부러진 다리를 끌고 발에 채이는 시체를 피해 느리게 옮기는 걸음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했다. 시선은 먼 곳을 향하고 있었지만 보이는 것은 없었다. 피로가 극에 달한 나머지 눈이 제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벌써 쓰러져버렸을 일정에도 그는 움직일 수 있었다. 단 한 곳만을 바라보는 것으로 생겨나는 힘. 뿌연 시야도 그에 반해 극도로 민김해진 청력도 제대로 길을 찾아 걷는 것에만 집중해야 했다. 신경이 마비되어 팔다리가 제대로 움직이는 지도 알 수 없었다. 통각만이 살아 손가락 끝, 발가락 끝까지 기절할 것 같이 아프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본능적으로 몸상태를 점검했다. 왼쪽 아래서 세번째 갈비뼈와 오른쪽 허벅지 뼈에 금이 갔고 왼쪽 어깨가 빠지고 팔이 부러졌다. 단검에 찔린 배는 싸움이 끝나자마자 지혈을 했지만 돌아가면 바로 치료해야 했다. 베인 자리는 수도 없어 일일히 감각할 수도 없었다. 오른손 약지가 삐었는지 뜨거웠다. 필사적으로 지킨 얼굴만 입술이 터진 것을 제외하고는 생체기 하나 없었다. 조금 신경쓰이는 것은 아까 억지로 말하느라 갈라졌는지 비릿한 피맛이 올라오는 목이었다. 다른 곳에는 비교할 수 없는 작은 통증이 그 어느 것보다도 신경쓰였다.

 바라는 것은 단 하나. 환한 미소, 금빛 고수머리의 소녀가 언제나처럼 머릿속을 가득 매웠다. 괜찮아, 나는 괜찮아. 아프지 않아. 행복하다면 됐어. 괜찮아. 아무렇지 않아. 나는 아직 괜찮아. 그 무슨 일이 있어도 괜찮아.

 "…찮아. 아무렇지 않아. 괜찮아. 괜찮아."

 둔켈의 입에서 새는 숨이 어느샌가 속삭임이 되어있었다. 그렇게 소년은 자신에게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괴로운 미래를 보며 울부짖는 리히트의 등을 그러안고 늘 했듯이 괜찮다고 괜찮다고 계속해서 말해주었다.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아무렇지 않다고 말해주었다.

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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