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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담장이 보인다. 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언제나 그랬다. 바깥 풍경은 언제나 삼엄한 철창 너머에 있었다.
출입이 불가능했던 건 아니다. 마리아 루첼라이는 원할 때면 언제든 외출을 하고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가 더 자주 나가기를 원했다. 신전과 공방에 갇힌 듯이 살고 있는 딸이 안쓰러운 탓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창가에 우두커니 앉아 바깥 풍경을 보는 일을 더 좋아했다. …좋아했다.
마리아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있었다. 고요히 앉아있는 모습은 마치 잘 만들어진 인형 같다. 공방에서는 누구보다 바쁘게 일하는 그지만, 집에서는 마치 영혼이 빠진 듯 그렇게 앉아있을 때가 많았다. 바깥 일에 지친 탓이다. 어머니는 그런 딸을 볼 때마다 깊은 시름에 신음하곤 했다. 마리아는 종종 그 고통스러운 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나곤 했다.
“마리아.”
루첼라이 부인이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마리아는 천천히 일어나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괴로워하는 어머니의 뺨에 입을 맞추고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미의 무릎에 뺨을 대자 루첼라이 부인의 따뜻한 손이 마리아의 머리 위에 얹혔다. 마리아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정적 속에서 시간이 흐른다. 루첼라이 모녀는 그렇게 말 없이 함께 시간을 보냈다.

마리아 루첼라이는 루첼라이 가문의 양녀다. 루첼라이 부인은 제 배 아파 낳지 않은 소녀를 무척이나 아꼈다. 마리아는 그런 어머니를 극진히 따랐다. 교회일도 공방일도 어머니 말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무척이나 순종적인 딸이었고 마음씀씀이가 섬세했다. 루첼라이 부인의 마음이 상할 일은 하지 않았고, 기뻐할만한 일은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했다. 불행한 사고로 두 손을 잃지만 않았어도 누구보다 자랑스러운 딸이었으리라.
루첼라이 부인은 종종 마리아의 잃어버린 두 손을 붙들고 오열하곤 했다. 그런 부인을 마리아는 냉랭한 표정으로 바라보곤 했는데 그것은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모자라서가 아니었다. 함께 아파하는 것으로 어미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는 섬세한 배려였다. 마리아는 손이 없어도 바느질을 하고 기도를 할 수 있었다. 저에게 아무것도 아닌 일들을 어미가 아파하는 것을 두고 보기 마음 아파 그토록 차갑게 구는 딸이었다. 루첼라이 부인은 때로 그런 마리아의 눈초리에 속상해하곤 했지만 근본적으로 어쩔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마리아는 병약했다. 곧잘 앓았지만 아픈 내색을 하지 않았다. 공들여 분을 칠해 핏기 없는 뺨을 숨겼고 아프고 힘들어도 허리를 굽히지 않았다. 남 몰래 앓는 소녀의 진정한 모습을 아는 것은 고작해야 어미인 루첼라이 부인이 다였다. 부인은 자존심 강한 딸의 의사를 존중해 바깥으로 마리아가 아프다는 소문이 돌지 못하도록 하인들을 단속했다. 정기적으로 몸상태를 살피러 오는 의사는 신심 깊은 루첼라이 부인이 교회에서 구한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마리아는 어머니의 꼼꼼한 배려 속에서 외부 사람들을 거의 만나지 않고 살았다. 루첼라이 부인의 바람대로 정원에 나가 바람을 쐬기는 했다. 외출은 자유로웠으나 나가고 싶지 않았다. 신심 깊은 세르미어의 신자들이 사는 마을에서 피라도 토했다가는 눈도 깜빡하기 전에 소문이 퍼질 터였다. 손이 없는 양녀를 거둔 어머니는 마리아가 몸도 연약하다는 사실에 가여운 시선을 받을 터였다. 자존심 강한 어머니가 그런 소리를 들었을 때 어떻게 반응할지는 자명했다.
처음에는 자상하게 물을 것이다. 어쩌다 밖에서 피를 토했니. 많이 힘들었니. 왜 내게 말해주지 않았니. 마리아는 순종적으로 대답할테지만 그 어떤 대답도 어머니를 만족시킬 수 없을 것이다. 어머니에게 뭇 부인들 사이에서 도는 소문은 너무도 중요해서 조금이라도 나쁜 이야기가 돌면 크게 마음이 상했다. 그럴 때는 어떤 위로도 소용이 없었다. 마리아는 침묵을 지키다가 어머니가 조금 진정되면 연신 사죄를 하곤 했다. 그렇게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 말고는 어떤 행동도 소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외출을 좋아하지 않았다. 밖에 나가는 것보다 저택에 앉아 평온하게 바깥을 바라보는 것이 훨씬 좋았다.

몇 년 전의 일이다. 마리아 루첼라이는 여신 세르미어의 지팡이이자 재봉사였으므로 때로는 신의 사도다운 일을 해야할 때가 있었다. 시계탑 공방에 앉아 아름다운 옷을 자아내는 것으로는 해낼 수 없는 일이다. 때로는 죽음과 마주해야하는 험한 일을 하기 위해 어머니의 곁을 떠난 적이 있었다. 어머니와 떨어져 지낸 것이 실로 얼마만의 일이었는지 마리아는 알지 못했다. 분명한 것은 어머니가 그립지 않았다는 사실 뿐이었다.
험난한 모험이었다. 환자를 치료하다가 피를 쏟기도 하고, 위기 끝에 목숨을 잃을 뻔한 일도 있었다. 죽음이 제 코 앞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마리아는 이를 악물었다. 살아남겠다. 살아남을 것이다. 그렇게 다짐했다.
왜 그렇게 살고 싶었는지는 몰랐다. 그저 살고 싶었다. 죽음보다 못한 삶일지라도 살아 숨쉬고 싶었다. 아픔이 오히려 살아있다는 감각을 생생하게 일깨워주었다. 어머니 곁에서는 느끼지 못한 삶이었고, 일상 속에서 잊고 있던 생이었다. 살고 싶었다.
거친 바람 탓이었을까. 죽음이 너무 가까워 위기의식이 느껴졌기 때문일까. 아니, 그저 비린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한 가지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렸다. 아주 강렬하고 지극히 단편적이고 의미 없는 기억이었다. 그는 새카만 파도 위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바람인지 물인지 분간하기 힘든 거센 폭풍우, 뇌까지 흔들리는 듯한 파도,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와 입 안을 가득 매운 소금기가 기억이 났다. 그저 그 뿐이었다. 무엇을 하는 도중이었는지, 어째서 배에 올랐었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 기억이 아직까지도 떠올랐다. 근 오년이 다 되어가는 일이었다. 마리아는 당장 배 위에 서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만큼 생생한 기억을 곱씹으며 눈을 깜빡였다. 정갈하고 아름다운 세르미어의 화원에는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오늘 마리아는 어머니와 함께 교회에 왔다. 주일 예배를 막 마친 참이었다. 사제인 마리아보다도 교회 일에 적극적인 루첼라이 부인이 자리를 비웠고, 마리아는 먼저 집으로 돌아갈지 어머니를 기다릴지 고민하고 있었다. 정원을 산책하기로 한 것은 순전히 바람이 쐬고 싶어서였다. 그러니 마리아가 그 아이를 만난 것은 전적으로 우연의 일치였다.
단아한 세르미어의 정원에는 사람이 제법 많았다. 주일이고 루첼라이 모녀가 다니는 이 곳은 세르미어 교단의 총본산으로 근방에서 가장 큰 교회니 당연한 일이었다. 마리아는 인파를 피해 구석진 곳으로 들어갔다. 사람을 피하다보니 정원을 가로질러 건물 뒤쪽 으슥한 곳에 발길이 닿았다. 일꾼들이나 오가는 이런 곳은 인적이 드물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때로 기묘한 상황에 놓이게 되기도 한다. 바로 지금처럼.
“사제님!”
저를 보자마자 울먹이며 달려온 여자아이를 마리아는 황당하게 바라보았다. 짧은 단발머리를 찰랑이며 다가온 소녀는 마리아보다 머리 반개는 작았고 앳된 뺨에는 붉은 생기가 감돌았다. 소녀는 동그란 눈 가득 두려움을 일렁이고 있었는데, 마리아는 그런 모습이 불쾌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마리아는 소녀의 애타는 손길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손은 떨리고 있었지만, 옷 위로 전해지는 체온은 따뜻했다. 그 느낌만큼은 나쁘지 않았다. 어머니의 손은 늘 건조하고 차가웠고, 같이 일하는 동료나 환자와 손을 맞잡을 일도 없었다. 마리아에게는 위로를 건낼 손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 정말 토벌대에 끼게 되는 건가요?”
“…….”
“그렇군요. 정말로 용 토벌전에 참가하게 되는 거군요.”
소녀는 체념한 듯 중얼거렸다. 마리아는 말 없이 소녀를 바라보았다. 예비 사제에게 주어진 복장을 단정히 갖춘 모습을 보니 떠오르는 게 있었다.
'아직 어린아이한테 너무 심한데요.'
'메디치 가문의 일입니다. 저희도 손 쓸 방도가 없군요.'
'자질이 풍부한 아가씨를 이렇게 보내다니….'
루첼라이 부인이 저택을 찾은 사제와 나눈 대화였다. 마리아는 어머니에게 절대 거역하지 않는 딸이었기에 부인은 마리아 앞에서 숨기는 것이 없었다.
린네 그라임스라고 했던가. 마리아는 루첼라이 부인이 언급한 이름을 잊는 법이 없었다. 그것이 어머니의 입에서 다시 나올 이름이건 그렇지 않건 그랬다. 그 이름이 어머니의 입에 올랐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기억할 가치는 충분했다.
저승길에 등을 떠밀린 소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어깨를 떨었다. 안쓰러울 정도로 떨리는 어깨를 마리아는 말 없이 지켜만 보았다. 자신을 누구로 착각했는지 몰라도 이 아이도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운명이란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을.
린네는 그저 서있을 뿐인 마리아의 앞에서 제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여전히 마리아의 팔목을 붙든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커다란 초록색 눈동자가 물기를 머금어 보석처럼 빛난다.
“많이 고민했어요. 부모님은 사제 같은 거 그만두라고 하셨거든요.”
린네는 코를 훌쩍였다.
“사실 그렇잖아요. 목숨만큼 중요한 건 없는 거잖아요. 저도 알아요. 제 실력에 가서 도움이 될지도 알 수 없다는 거요.”
마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딱히 할 말도 없었고, 괜히 입을 열었다가 분위기를 망치는 것이 꺼려졌다. 만날 사람이 누구였건 이 아이가 사지로 떠나야한다는 사실은 변할 리 없으니 잠시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정도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치만요.”
린네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저 도망치고 싶지 않아요.”
마리아도 눈을 깜빡였다. 앳된 소녀의 얼굴이 점멸했다.
“여기서 도망치는 건 제가 지금까지 배우고 익힌 것들을 모두 부정하는 것만 같아서 그러고 싶지 않아요.”
“세르미어께서는 늘 말씀하셔요. 배움을 두려워하지 말라. 앎은 곧 선이니. 두려움은 무지에서 오느니라. 저는 앞으로 제게 올 미래를 알지 못해요. 그러니 배워야해요. 앞길에 무엇이 있든, 배우지 않으면 나아갈 수 없어요.”
“사악한 용을 물리치고 무지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사제의 일이겠지만, 제게는 아직 그 자격이 없어요. 저는 아마 이 일을 해내지 못할 거예요.”
“죽을 생각은 없어요. 그저 제 힘이 모자랄 뿐이죠.”
“하지만 사제님.”
마리아는 문득 린네의 눈동자가 봄날에 돋아나는 새 이파리와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직은 여리고 연약하지만, 질기게 성장할 어린 잎사귀.
“저는 악의 위협에 굴복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렇게 하고 싶어요. 변명하듯 덧붙인 마지막 말은 혼잣말처럼 작았다. 마리아는 그런 린네를 담담하게 바라보았다. 소녀는 헤헤 웃더니 뒤늦게 부끄러워했다.
“아이참. 제가 너무 감상적이었죠. 이야기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저는 이만 해야할 일이 남아있어서 가볼게요.”
린네는 새삼스럽게 두 손으로 마리아의 팔목을 꼭 붙들고 몇 번이나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마리아는 뛰어가는 린네의 치맛자락을 시야 한 구석에 담으며 제 팔목을 내려다보았다. 화끈거리는 열기가 사라지질 않았다. 귓가에서 바람이 웅웅거렸다.

마리아는 곧 그 일을 잊어버렸다. 시계탑의 일상은 매일 정신없이 바빴고, 마리아는 몸이 좋지 않아서 사소한 일에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루첼라이 부인은 린네의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기 때문에 더더욱 기억할 필요가 없었다.
마리아가 기억의 바다 속에서 린네의 이름을 재발견한 것은 순전히 시계탑의 특수성 때문이었다. 토벌대에서 발생한 부상자가 시계탑에 실려왔다는 소리다.
“사제님.”
토벌대에서 떨어져나와 시계탑에 눌러앉은 환자는 흰 머리가 제법 근사한 중년의 남자였다. 그는 어디서 들었는지 마리아가 이전 토벌대에서 환자를 돌보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꾸만 말을 거는 그를 매번 쫓아내기도 귀찮아서 대충 이야기를 받아주었더니 이제는 마리아를 찾아오는 지경이 되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그게…….”
무어라 떠드는 것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수선에 매진하는 마리아의 귀가 익숙한 이름을 잡아냈다.
“방금 뭐라고 하셨나요?”
“이번 토벌대는 확실히 지원 상태가 좋지 않았어요. 어찌나 밥이 맛이 없던지….”
“그거 말고요.”
“네?”
그는 마리아가 반응을 보이자 눈에 띄게 기뻐했지만, 마리아가 무엇에 관심을 보인 건지 몰랐다. 한참을 끙끙거린 끝에 겨우 두 사람은 이야기를 맞춰갈 수 있었다.
“아아, 린네라는 아이 말이군요. 참 귀여운 애였죠. 너무 어려서 걱정했는데 제법 솜씨가 좋더군요.”
“그런가요.”
“어린 여자애가 그런 험지를 돌아다니니 다들 안쓰러워 많이 챙겨줬지요. 불행한 사고만 없으면 살아 돌아올 겁니다.”
그는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마리아는 왠지 그 말에 가슴이 일렁이는 묘한 경험을 했다. 환자는 한참이나 수다를 떨었지만 마리아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토벌대가 돌아왔다. 마리아는 자신과 아무 관계도 없는 토벌대의 귀환을 보기 위해 처음으로 혼자 외출을 했다. 본관 앞 정원은 토벌대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가 한창이었다.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고, 한쪽에선 시계탑과 협력하는 사제들이 환자를 돌볼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마리아는 자연스럽게 시계탑 공방의 사제들과 섞였다. 토벌대는 늦은 저녁에 도착했다. 멀리서부터 소란이 번졌다. 마리아는 이유 모를 초조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환자들이 다른 토벌대원들보다 빠르게 이송되어 왔다. 시계탑의 천막은 분주해졌다. 마리아는 차분하게 환자를 보면서 정문을 흘끔거렸다. 마리아만의 일은 아니었다. 토벌대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는 아마도 모두가 그럴 것이다.
대부분의 응급조치가 끝나갈 무렵, 토벌대 본대가 정원에 들어섰다. 사방에서 우는 소리와 비명 소리, 가족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마리아는 상대적으로 상처가 가벼운 환자를 보면서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엄마, 아빠!”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마리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어째서인지 잊지 못한 목소리와 얼굴이 거기 있었다. 울먹이는 소녀가 짐을 내팽개치고 달려갔다. 곱게 차려입은 중년 부부가 마찬가지로 울먹이며 소녀에게 달려들었다. 마리아는 세 가족이 서로를 부둥켜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진찰을 받던 환자가 마리아를 부를 때까지 계속 그랬다.
세 가족은 곧 마리아의 앞을 떠나갔다. 토벌대를 위한 식사가 준비되었다는 외침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마리아는 그들이 곁을 떠나는 것을 어쩐지 아쉽게 느끼며 환자를 보았다. 린네는 다친 곳이 없는 듯했다. 진찰을 받아보자는 부모의 요청에도 돌아오는 길에 검사를 받았다며 사양했다. 마리아는 왜 가슴이 술렁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만찬이 시작되자 시계탑의 천막은 금방 한가해졌다. 본대까지 걸어올 수 있는 환자 중에 중환자는 없었고, 그나마도 처치를 끝내놓으니 다들 천막을 떠났다. 마리아는 빈 천막에 앉아있었다. 만찬이 끝나고 천막을 걷으면 시계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마리아.”
낯익은, 아니, 친숙한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그는 갈등했다. 아까부터 술렁이던 가슴이 폭풍우를 만난 듯 날뛰고 있었다.
“얘, 마리아.”
루첼라이 부인은 그가 제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여겼는지 다시 한 번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 목소리가 아주 멀었다.
바람이 불고 있었다. 파도가 높게 일고, 바람인지 파도인지 분간하기 힘든 폭풍우가 몰아쳤다. 배가 뒤집히지 않게 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어서 손에 들고 있는 것이 검인지 총인지도 몰랐다. 바다는 목숨을 탐내 날뛰었고, 그는 살아남기에 바빴다.
“마리아. 대답을 해야지!”
마침내 루첼라이 부인이 소리를 쳤다. 늘 우아하고 차분한 부인 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는 그제서야 자신을 부른 것이 루첼라이 부인임을 알아챘다.
아, 그랬다. 루첼라이 부인이었다. 그 날 자신을 건져낸 것은.
그는 천천히 돌아섰다. 비로소 얼굴을 마주한 루첼라이 부인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정신을 빼놓고 있구나. 불렸으면 대답을 하렴.”
그는 침묵했다. 루첼라이 부인의 고운 이마에 주름이 졌다.
“저는 마리아가 아니에요.”
그가 말했다. 루첼라이 부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부인은 당황한 듯 어색하게 웃었다.
“무슨 소리니, 얘야.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보구나.”
그는 처음으로 부인 앞에서 인상을 찌푸렸다. 루첼라이 부인, 아니, 자케트 루첼라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무래도 네가 많이 아픈가보구나.”
자케트가 말했다. 노부인의 눈빛은 장군과도 같았다. 데일 듯이 뜨겁게 타오르는 눈길을 정면으로 마주보았다.
“아니요. 루첼라이 부인. 저는 아프지 않아요.”
“마리아!”
“당신의 마리아는 죽었습니다, 부인.”
그는 가볍게 눈을 감았다 떴다. 금빛으로 빛나는 눈동자가 석양을 받아 붉게 빛났다.
“나는 이리누슈카(Иринушка). 바다와 겨루고 바다를 다루는 어부입니다.”
바람이 불었다. 파도는 거칠었다. 양손에는 장총과 검의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거대한 괴물이 배 밑에서 맴돌았다. 두려웠다. 그리고 즐거웠다. 바다와의 목숨을 건 사투가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리누슈카의 삶이었고, 모든 것이었다. 소녀는 여인이 되었다.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리누슈카는 파도 앞에 섰다. 바다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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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슬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그날은 드물게도 아르시니가 컨디션이 좋았고, 땅에서는 풀 내음이 났으며 바람이 거의 불지 않고 선선했다. 마샤는 그날 아르시니와 걸었던 스콜로프 저택의 정원을 기억했다. 짧은 봄이 시작되어 장미가 화사하게 피어있었다. 정원에 심은 것치고는 특이하게도 송이가 작은 품종이었다. 장미는 산책로의 주인이 아니라 다른 꽃과 어우러져 주변을 화사하게 밝히고 있었다. 정원사의 솜씨가 돋보이는 배치였다. 소박한 장미를 고른 것도 정원사의 요청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르시니는 우산을 들어주겠다는 마샤의 청원을 끝끝내 거절하고 제가 우산을 들었다. 아직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았던 시기였다. 그래서 마샤는 어린 동생의 어리광을 기꺼이 받아주었다. 공국을 이끄는 위대한 네 마법사 가문 중 하나의 주인이 이런 잡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충고도 하지 않았다. 몇 번이고 말을 해보았지만, 우산을 드는 정도야 숙녀를 에스코트하는 예우라고 태연하게 대꾸할 뿐이다. 그런 동생이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도 이제는 어색한 나이였다.

 남매는 정원을 한 바퀴 돌고 유리로 벽을 세운 정자에 마주 앉았다. 사용인이 미리 준비해둔 찻주전자에서 김이 올라왔다. 날이 따뜻해졌다지만, 비가 오고 기온이 높지 않은 날이었다. 마샤는 아르시니를 보았다. 소년은 앳된 얼굴에 어른스러운 미소를 띤 채 비 내리는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감기 걸리겠다. 숄을 두르렴.”

 “과보호야, 마샤.”

 아르시니는 낮게 웃었다. 마샤는 눈살을 찌푸렸다.

 빗줄기는 아주 가늘었다. 유리 벽 한쪽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도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처럼 가늘었다. 비는 고이지 못하고 땅을 가볍게 적셨다. 꽃과 이파리가 촉촉한 공기를 한껏 빨아들여 싱그러웠다.

 “마샤는 내가 언제까지 살았으면 좋겠어?”

 아르시니가 물었다.

 “안 죽었으면 좋겠다.”

 마샤는 대답했다. 아르시니가 키득거렸다.

 “그건 내가 할 말이야. 마샤야말로 항상 위험한 곳을 돌아다니잖아. 죽으면 안 돼. 내 장례식에 와줄 가족은 이제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고.”

 “그런 말을 함부로 하면 백작님이 슬퍼하신다.”

 “마샤만 비밀로 해주면 돼.”

 아르시니는 태연하게 말하며 찻잔을 들었다. 미지근해진 물을 버리고 차를 따랐다. 꽃과 풀에서 나는 싱그러운 냄새와 비, 비에 젖은 흙냄새를 뚫고 새콤달콤한 향기가 뜨거운 물에서 퍼져 나왔다. 마샤도 잔을 비우고 차를 따랐다. 아르시니는 눈을 감고 향을 맡고 있었다.

마샤는 동생의 낯선 모습에 두어 번 눈을 깜빡였다. 스콜로프 저택에 들어간 이후로 하루하루 귀족적인 품위를 갖추어 가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침착한 성정은 타고난 것이며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은 마법사의 특성인지라 별로 달라졌다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저 만날 때마다 무럭무럭 자라는 것이 놀라웠다. 점점 고상해지는 몸짓이며 말씨도 그저 좋은 교육을 받았구나 생각했다.

 “장례식 하니까 말인데.”

 마샤가 생각에 잠긴 사이 아르시니는 운을 떼었다. 입속을 감도는 차향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는지 부드러운 미소가 감도는 채였다.

 “내가 죽으면 마샤가 첫 번째로 꽃을 주면 좋겠어.”

 “그건 직계 가족이나 가능한 거지.”

 “마샤가 내 가족이잖아.”

 아르시니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소년의 노란 눈동자가 좁은 틈새로 반짝였다. 마샤는 할 말이 없어 허탈하게 웃었다.

 “유언장을 쓸 거야. 사실 지금도 쓰고 있어. 이건 마샤가 가면 적을 거야.”

 “백작 부인이 서운해하실 거다.”

 아르시니는 마샤의 말을 한 귀로 흘려버렸다. 못 들은 척 찻잔을 들어 올리는 손가락이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마샤의 책망하는 눈을 마주하고 아르시니는 조용히 미소지었다.

 “춥다.”

 그렇게 말하고는 시선을 내린다. 영악한 소년은 누나의 잔소리를 틀어막는 방법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마샤는 문득 오렌지가 먹고 싶어졌다. 그래서 아르시니가 찻잔을 내려놓는 순간 옆에 있는 숄을 집어 던졌다. 기겁한 아르시니가 얼굴을 뒤덮은 숄을 허둥지둥 끌어 내렸다. 곱게 단장한 머리가 다 흐트러졌다. 아르시니가 골난 소리를 냈다. 마샤는 그런 아르시니를 비웃어주었다. 아무리 나이를 먹고 덩치가 커졌어도 고작해야 말을 타고 정원을 도는 게 다인 도련님이 사관학교를 졸업한 직업 군인을 이길 수는 없었다.

 

 *

 「마샤 알렉산드라 스미노르바양에게,

갑작스러운 편지를 받고 적잖이 놀라셨으리라 예상합니다. 봄을 맞이하여 새 단장을 하던 중, 미처 손길이 닿지 않았던 곳에서 귀인의 물건을 발견하였습니다. 구리로 테를 두른 카드 상자입니다. 어머니께서는 귀인을 그리워하여 상자를 스콜로프 저택에서 보관하길 바라셨지만, 상자의 연식과 상태를 보아 스미노르바양과의 추억의 물건으로 사료됩니다. 반환을 원하신다면 답변을 부탁드립니다. 스콜로프 저택은 언제나 귀하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새로운 계절에 어울리는 새로운 행복을 기원하며, 나탈리야 스콜로프 드림.」

 근 일 년 만에 찾은 스콜로프 저택은 여전히 중후한 맛이 있는 멋진 건물이었다. 정원은 완전히 갈아버렸는지 아르시니가 허둥지둥 달려 나오던 길은 모양만 겨우 남았을 뿐 완전히 풍경이 달라져 있었다. 정원사가 바뀌었던지, 단단히 마음을 먹고 정원을 새로 꾸민 모양이었다.

 마샤는 정문을 지키는 문지기의 정중한 인사를 받아가며 스콜로프 저택에 발을 들였다. 수도 안에 있는 저택이지만, 스콜로프의 이름이 무색하지 않은 크기와 웅장함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평민 출신 신입 장교가 발을 들이밀기엔 너무 멋진 곳이었지만, 마샤는 긴장하지 않았다. 마샤에게 있어서는 두 번째 집 같은 곳이었다. 적어도 죽는 순간에 스콜로프의 이름을 댈 수 있을 정도로는 사랑하는 곳이었다.

 건물에 도착하자 하인이 문을 열고 마샤를 맞아들였다. 모자와 겉옷을 벗어 건네자 공손히 고개를 숙인다. 안에서 나온 하녀가 마샤를 안내했다.

 봄맞이 새 단장을 했다는 이야기는 진짜였다. 마샤는 작년과는 딴판으로 달라진 실내를 둘러보며 감탄했다. 묵직하고 우아한 색조로 꾸며져 있던 복도는 선명한 파란색을 기조로 시원하게 바뀌어 있었다. 벽에는 못 보던 그림이 많아져 있었다.

 훈훈한 날씨 탓인지 응접실은 활짝 열려있었다. 잠시 기다리자 연한 바닐라 색 드레스 자락을 끌고 스콜로바의 여주인, 엘리자베타 스콜로바가 나타났다. 사르륵 비단 천 자락이 양탄자를 스쳤다.

 “매정한 아이야. 한 번쯤 들러야겠다는 생각이 그리도 들지 않았니.”

 곱게 주름진 얼굴로 눈웃음치며 엘리자베타가 말했다. 마샤는 마주 웃었다.

 “그래서 편지를 보냈잖아요.”

 “내가 보고 싶어 할 거라곤 생각도 안 했지? 아르시니 그 애도 그렇고, 너희 남매는 너무 매정해.”

 엘리자베타는 소파에 궁둥이를 붙이며 투덜거렸다. 비단 스커트가 마샤의 초라한 구두 끝을 스쳤다.

 “잘 지냈니?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 요즘은 나탈리야도 쌀쌀맞고 집안이 쓸쓸하게 느껴지지 뭐니. 그래서 봄을 맞아 산뜻하게 꾸며보았단다.”

 엘리자베타가 호호, 웃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마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화사한 실내는 마샤가 알던 스콜로프 저택의 장엄한 분위기와는 많이 달라졌지만, 오래전부터 엘리자베타가 바라던 모습이었다. 이곳에 들를 때마다 엘리자베타가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읊던 계획을 알고 있는 마샤로서는 드디어 꿈이 이루어졌다는 느낌이었다.

 “아주머니, 치사해요.”

 곧이어 티 트레이를 끌고 나타난 것은 베네라였다. 아르시니에게는 사촌 누나가 되는 베네라 스콜로프는 엘리자베타를 대신해 마샤에게 차를 대접했다. 본래라면 주인인 엘리자베타가 준비할 일이나 마샤는 이미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이인 데다 일개 군인 신분인지라 적당히 양보한 것이다.

 엘리자베타와 베네라는 기품 있고 상냥한 귀부인이었다. 변방을 돌다 보니 도시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마샤가 대화에서 겉돌지 않도록 챙겨주면서도 이야기가 끊겨 어색해지지 않도록 능숙하게 대화를 이끌어나갔다. 마샤는 아르시니가 있을 때와 다름없이 편안한 기분으로 스콜로프 저택에서의 티타임을 즐겼다. 두 사람은 옷과 실내장식, 음악과 연극에 관해 이야기하고, 때로 두려워하며 요마와 오염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멀쩡한 생물도 오염을 뒤집어쓰면 요마로 변한다면서요?”

 “네. 그래서 부상자나 사망자가 생기면 긴급히 호송 조치합니다.”

 “무서워라. 그럼 우리가 아는 사람이 요마가 될 수도 있겠네요.”

 “그렇지요.”

 베네라는 레이스 장갑을 낀 손을 모아쥐며 진저리쳤다. 마샤는 웃으며 덧붙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수도에까지 그런 일이 생길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 저희가 싸우는 거니까요.”

 “하지만, 마샤. 네가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밤에 잠이 오지 않을 지경이야.”

 “맞아요. 마샤, 그런 위험한 일은 그만두고 수도로 올라오는 게 어때요?”

 엘리자베타와 베네라의 시선을 받고 마샤는 그저 웃었다. 죽음을 옆에 끼고 있다는 자각은 있다. 매 순간, 그것을 자각하지 않고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마샤는 그들의 걱정 어린 시선에서 사랑만을 고맙게 받아들였다.

 “살기 위해 몸을 사리고 있어요. 마샤 스미노르바, 쉽게 죽지 않습니다.”

 마샤는 두 사람을 안심시키기 위해 자신 있게 미소지어 보였다. 엘리자베타도 베네라도 그것으로는 진정이 되지 않는지 착잡한 얼굴이었지만, 더는 말이 없었다. 짧은 침묵이 지나고,

 “어머, 나도 참. 잠시만 기다리렴.”

 엘리자베타가 짐짓 발랄하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베네라가 웃으며 빈 티팟을 정리하고 하녀를 불러 자리를 정돈하게 했다.

 “이렇게 이야기한 것도 오랜만인데 좋은 소식은 없나요?”

 베네라는 참으로 다정한 여인이었다. 마샤는 그런 다정함이 부담스러웠다.

 “군인이 연애할 시간이 어딨어요.”

 “앞날이 창창한 젊은 청년들과 함께 보내고 있잖아요. 마샤도 나이가 들었지만, 아직은 피가 끓을 나이 아니던가요.”

 그렇게 묻는 베네라는 마샤보다 어리다. 나이가 한참이나 떨어진 아르시니와 비슷한 나이였다. 하지만 베네라는 혼기가 차자마자 집안에 걸맞은 남편을 찾아 결혼한 귀부인이었다. 마샤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르시니도 살아있었다면, 살 가능성이 있었다면 결혼했을까.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유부남과 꼬맹이 사이에서 혼사를 생각할 수가 없더라고요. 저도 이제 나이가 있으니 젊은 혈기로 밤을 보내는 일도 줄어들었어요.”

 베네라가 안타깝다는 듯 한마디를 덧붙이려 할 때 엘리자베타가 돌아왔다. 뒤따라오는 하녀가 편지에 언급된 상자를 들고 있었다.

 “즐거운 나머지 그만 중요한 걸 잊었지 뭐니. 마샤는 이걸 위해서 온 건데 말이야.”

 엘리자베타는 하녀에게서 상자를 받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하녀가 뒤돌아 나가고 연이어 다른 하녀가 들어오며 간단한 다과상을 차렸다.

 구리로 테를 두른 작은 고동색 상자였다. 손때가 타 반질거리는 상자는 카드텍 하나가 들어가면 딱 맞을 크기다. 액세서리를 담기에는 투박하고, 값싼 소재로 되어있었다.

 엘리자베타는 구리로 된 모서리를 손끝으로 어루만지다가 이내 마샤 쪽으로 상자를 밀어주었다. 마샤는 이 상자를 알고 있다. 남매의 생모, 알렉산드라가 어린 시절 마샤에게 선물해준 카드 상자였다. 항상 자기를 대신해 어린 아르시니를 돌보는 마샤에게 고맙고 미안하다며 사준 것이었다.

 “받으렴. 이 집에 남은 마지막 물건이야.”

 엘리자베타의 목소리가 먹먹했다. 상자에서 눈을 들어 바라보자 아름다운 눈동자에 눈물이 어린 것이 보였다. 고운 귀부인의 마음에 이 물건이 얼마나 큰 것인지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샤는 천천히 손을 들어 상자를 집었다.

 송구하게도 마샤는 엘리자베타에게 상자를 선뜻 선물할 수가 없다. 이것은 아르시니의 유품이자 어머니 알렉산드라의 유품이었다. 마샤는 문득 가족이 모두 떠나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떠올렸다.

 “고맙습니다.”

 엘리자베타는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구나. 네게도 소중한 물건일 텐데, 내가 욕심을 내고 말았어.”

 “그만큼 아르시니를 아껴주셨으니까요.”

 마샤도 따라 고개를 저었다. 엘리자베타는 결국 손수건을 들어 눈가를 훔쳤다.

 “아르시니도 너도 내게는 자식이란다. 그 사실만큼은 잊지 말아줬으면 좋겠구나.”

 마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티타임은 머지않아 끝났다. 엘리자베타가 슬픔에 젖어 더는 대화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베네라는 엘리자베타를 달래느라 마중을 나오지 못하고, 마샤는 혼자서 응접실을 나왔다.

 안내 없이 걸으며 복도를 다시 한번 찬찬히 둘러보았다. 청량한 색으로 꾸며진 실내는 엘리자베타답게 소박하면서도 화사한 장식을 둘러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귀엽다고 자랑하는 아르시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안녕하세요, 스미노르바양.”

 생각에 잠긴 마샤의 뒷덜미를 당기듯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문을 바로 앞에 둔 참이었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엄숙한 드레스를 갖춰 입은 소녀가 마샤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탈리야였다. 아르시니보다도 어린 앳된 소녀는 전신을 무겁게 내리누르는 듯한 드레스를 입고 딱딱한 표정으로 마샤를 바라보았다. 전신에 철갑을 두른 듯, 차갑고 절도있는 모습이었다.

 “안녕하세요.”

 마샤는 가볍게 묵례했다. 나탈리야는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이쪽으로 드시지요. 아버지께서 뵙기를 원하십니다.”

 마샤는 나탈리야의 뒤를 따랐다.

 나탈리야는 마샤를 정원 쪽으로 이끌었다. 전부터 저택의 다른 방에 비해 상대적으로 화려했던 탓인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마샤는 괜히 아르시니와 걸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는 비가 오고 있었다.

 “들어가시지요.”

 나탈리야는 온실 앞에서 멈춰섰다. 마샤는 나탈리야의 안내에 따라 온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유리문 너머로 나탈리야가 자리를 떠나는 것이 보였다.

 풀과 나무 사이로 멀리 보이는 테이블과 그 앞에 앉은 남자가 보였다. 그는 마샤가 기억하던 것보다 많이 늙어있었다. 아주 피곤해 보였고, 쇠약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로만.”

 마샤가 바로 옆에 다가갈 때까지도 로만은 못 박힌 듯 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꽃은 붉게 핀 장미였다. 탐스럽고 송이가 컸다. 비싼 장미다. 마샤는 아르시니는 그런 장미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로만 옆에 섰다.

 “앉으렴.”

 로만이 말했다. 마샤는 준비된 자리에 앉았다. 치마를 추스르는 사이 로만은 마샤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아르시니의 유품이 나왔다고 하더구나.”

 “네. 그걸 받으러 왔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로만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테이블에는 차도 커피도 없었다. 와인병과 로만의 잔이 놓여있을 뿐이었다. 로만이 말을 않자 마샤도 말을 할 수 없었다. 사람이 입을 다물자 다른 소리들이 자리를 찾듯 주변을 메웠다. 온실을 유지하는 기계장치가 돌아가는 소리, 온실 밖에서 하인들이 대화하는 소리, 나뭇가지에 오른 새소리까지. 로만은 한참을 아무 말이 없었지만, 마샤는 기다렸다. 대기하는 것은 익숙했다.

 “벌써 석 달이나 지났구나.”

 로만이 말했다.

 “그렇게 되었군요.”

 마샤는 맞장구쳤다. 로만은 그제야 마샤를 돌아보았다. 깊게 팬 주름이 석 달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마샤는 이렇다 저렇다 말을 붙이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너와의 인연도 제법 오래되었지.”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게 어디 네가 할 말이더냐. 다 늙은이들의 업보인 것을.”

 로만은 마샤에게 와인을 권하려다가 말고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네. 나탈리야에게 전권을 위임한 뒤로 예전 같지가 않아.”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와인을 따르기 위해 몸을 일으키는 로만 대신 마샤가 일어났다. 로만은 손을 휘저었다.

 “나탈리야가 아르시니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건 알고 있나?”

 로만은 와인으로 목을 축이고 다시 장미를 한 번 보았다가 마샤를 쳐다보았다. 마샤는 고개를 저었다.

 “내게도 형이 있었지. 마법사였고, 평민 출신이었네. 아르시니와도 비슷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어. 항상 밝고,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이었지. 어쩌면 마법사란 모두 그런 종족인지도 몰라.”

 마샤는 당황했다. 로만이 꺼낸 것은 오랜 마법사 집안의 치부라고도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나탈리야가 마법사가 아니기에 로만이 아르시니를 들였듯, 로만의 부모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린 로만은 그것이 참을 수가 없었다.

 위대한 가문의 적자 태어나 가주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평범한 상인으로 태어나 길러진 마샤로서는 그게 어떤 기분인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마샤는 언제나 가족과 함께 살아남는 것만을 생각했고, 이제는 가족조차 없기에 자신의 생존 말고는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로만은 달랐으리라. 나탈리야도 다를 것이다. 마샤는 나탈리야가 자신을 적대하는 이유를 몰랐으나 로만의 이야기에 그 답이 있었다.

 자신의 것이었어야 마땅한 권리이자 영광인 가주의 자리는 어디서 태어나 어떻게 자랐는지도 모를 아이에게 돌아간다. 가주에 적합한 교육도 받지 않았고, 그만한 품위도 없는 아이다. 후계자로 교육받은 로만이나 나탈리야 같은 적자는 그들과 함께 교육받으며 그 아이들의 어설픔과 야만스러움을 지겹도록 보고 듣고 익혔다. 경멸하지 않는 것만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 아이들이 가주의 자리를 물려받는 것은 채 성인이 되기도 전의 일이다. 마법사의 수명이 짧기 때문에, 그들은 하는 일도 없이 가주라고 불리며 대대로 가문을 이어온 적손의 섬김을 받는다. 그것은 귀족으로, 남을 다스리는 자로 살아온 마법사 가문의 혈통이라면 누구나 져야 하는 굴욕이었다.

 로만은 증오의 대상이었던 가주가 하루하루 쇠약해지다가 결국은 죽고 말았던 날을 기억했다. 어린 마음은 크게 상처 입었지만, 그것을 인정하지 못했다. 유난히 가주에게 다정했던 부모님이 미웠고,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이 미웠다. 그래서 로만은 자신이 부모의 입장이 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준비하지 못했다.

 결국, 아르시니를 입양하기로 결정이 났을 때부터 로만은 줄곧 스미노르바 남매를 피해왔다. 가끔 마샤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는 했지만, 후견인으로서 만남을 가진 것뿐이었다. 아르시니에게는 한층 더 냉랭했고, 나탈리야에게도 다정하게 대하지 못했다. 전쟁과는 먼 곳에서 살아왔지만, 죽음은 로만의 삶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명랑하기 짝이 없는 마법사라는 생물의 짧은 삶이 흉터가 되었다. 로만은 아르시니를 제대로 마주하지도, 그렇다고 아껴주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 어린 소년의 죽음은 로만은 늙게하고 말았다. 마샤는 그 부산물이었다. 그래서 로만은 마샤에게 허물이 없었다.

 마샤는 아르시니가 로만이 무섭다고 했던 것을 떠올렸다. 마샤에게는 한없이 자상해 마치 아버지가 있다면 이런 사람이 아닐까 싶은 사람이었기에, 아르시니의 그 말이 스콜로프 저택에 적응하는 중에 생긴 고충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마샤는 새삼 늙어버린 로만의 얼굴을 살폈다. 후회로 찌들어버린 얼굴이었다.

 “멀리하면 괜찮을 줄 알았지. 죽어도 신경 쓰이지 않을 줄 알았어. 그거 아는가? 나는 아르시니를 한 번도 내 자식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네. 그런데도 이렇게 마음이 아파.”

 로만은 끝내 눈물을 보였다. 마샤는 아버지 같은 로만의 등을 감싸 안았다.


 *

 스콜로프 저택에서 내준 마차를 타고 마샤는 좁은 방으로 돌아왔다. 아직 해가 질 시간이 아닌데 날이 어둑해져 있었다.

 마샤는 오랜만에 입은 낡은 드레스를 벗어 걸어놓고, 편안한 차림으로 갈아입었다. 비로소 자신의 자리에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스콜로프 가문의 사람들이 마샤의 가족과 같다는 것은 거짓이 아니지만, 마샤는 스콜로프 저택의 일원이 아니었다.

 카드 상자를 옆에 던져두고 솜도 없이 삐걱거리는 침대에 몸을 뉘었다. 눈을 감자 하루 동안 두 번이나 보고 만 눈물이 떠올랐다.

 ‘마샤는 내가 언제까지 살았으면 좋겠어?’

 마샤는 대답했다.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 말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아르시니가 죽은 뒤로 마샤는 한 번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마침 비가 내리는 날이었기에 하늘이 대신 울어주는구나 싶었을 뿐이다. 무덤에 들어간 아르시니의 비석을 보고서도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이렇게 짧은 삶이었구나 싶었을 뿐이다.

 허전했다. 이제 마샤에게는 어머니도, 동생도 없었다. 없어도 살아가는 것에는 문제가 없다. 본래도 있는 듯 없는 듯한 삶이었다. 편지를 보낼 곳이 하나 줄어들었을 뿐이다. 비록 아르시니가 가장 자주 편지를 주고받는 대상이었다고는 하지만, 편지 보낼 곳이 하나 줄어들었다고 먹고 사는 것에는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특별히 아르시니와의 편지가 즐거웠던 것도 아니다. 그저 일기를 쓰듯이 일상을 보고해왔을 뿐. 아르시니도 크게 다르진 않았을 터였다.

 마샤는 마음으로 편지를 썼다.

 하늘에 있는 아르시니, 내가 울지 않는다고 해서 서운해하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나보다 많은 사람이 널 위해 울어주고 있지 않니. 너는 정말 괜찮은 삶을 살았다. 사랑받지 않았느냐. 나도 널 사랑한단다. 보고 싶다. 아르시니.

 마샤는 눈을 번쩍 떴다. 눈가가 촉촉해져 있었다. 아르시니가 없어도 마샤는 괜찮았다. 그런데 눈물이 났다.

 아르시니, 나는 네게 정말 좋은 누나였니? 결국, 첫 번째로 꽃을 주지 못했어.

 뺨을 타고 눈물방울이 굴러떨어졌다. 창밖에서는 아르시니와 정원을 걸었던 그 날처럼 가느다란 보슬비가 흩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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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런던의 기후와 영국 문화에 밝지 않습니다. 원작 설정과도 동떨어진 부분이 있습니다.



 런던에는 오늘도 비가 내렸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런던 시민의 친구 같은 것인지라 세실은 결코 좋다고는 할 수 없는 날씨가 제법 달가웠다. 굳이 따지자면 좋아하는 것은 맑은 날이다. 밖에 나가서 자유롭게 몸을 움직일 수도 있고, 따뜻한 볕을 쐴 수 있는 것도 좋다. 하지만 비에서는, 그것도 이토록 답답한 비에서는 런던의 냄새가 난다. 비록 그것이 달가운 것은 기분이 좋을 때 한정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날씨야 어쨌건 세실은 기분이 좋았다.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가는 벽난로의 불꽃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음악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이런 날에는 세상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고 해도 거짓이 아닐 것이다.

 팬케이크 접시를 한 손에 끼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커피잔을 들고 벽난로 앞 안락의자에 자리를 잡자 오웬이 혀를 찼다. 그 소리를 한 귀로 흘려버리며 포크를 집어 들었다.

 형제는 달칵거리는 소리와 벽난로의 나지막한 흐느낌을 공유했다. 코끝을 물들이는 커피 향. 타오르는 불꽃이 습기를 잡아 뺨에 닿는 공기는 그다지 눅눅하지 않았다.

 “여자에게 데이트를 청해본 적이 있느냐.”

 오웬은 마치 자기가 질문을 받은 것처럼 물었다. 한껏 당황해있었다는 소리다. 짙고 곧은 아미를 찌푸리며 곤혹스러워하는 모습이 마치 해선 안 될 일이라도 하는 것 같아 세실은 웃어버렸다.

 “그럼 물론이지. 이 나이까지 데이트 한 번 해본 적 없는 사람은 드물걸.”

 오웬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인연이 그렇게 가볍게 다루어도 되는 것이 아니다.”

 “교제하자는 게 아니잖아. 데이트 정도는 누구나 해. 식사 한 끼, 차 한 잔. 어려울 것 없잖아.”

 “하지만…….”

 “왜, 데이트하고 싶은 상대라도 있어?”

 여상하게 질문을 던졌다. 명백히 오웬을 위한 행동이었다. 자신이 이런 화제로 대화를 한다는 것 자체를 낯설어하고 있는 청년에게 베푸는 사소한 친절이었다.

 “그런 게 아니다!”

 그마저도 과했는지 오웬이 버럭 소리를 쳤다. 세실은 픽 웃고 벽난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세실이 침묵하자 오웬은 입술을 깨물었다. 언성을 높인 것을 후회하고 있는 것이다.

 못마땅한 것이라도 있는 듯 잔뜩 찌푸려진 얼굴이 오웬의 당황을 설명했고, 꽉 쥐어진 주먹이 긴장을 호소했다. 세실은 그저 웃고 만다. 그의 형제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순진했고, 지나치게 우직한 나머지 세상의 모든 부드러움을 적으로 삼아버린 듯했다.

 세실은 그저 오웬이 진정하기를 기다렸다. 오웬은 불편한 듯 거친 숨을 몇 번 들이키고 입술을 두어 번 떼었다가 붙이고는 마침내 나직이 말했다. 미안하다. 세실은 무심히 흘려넘겼다. 스큅이라는 이유로 본가에 들어가지도 못하는 자신보다 부모님 밑에서 편안하게 살고 있는 오웬이 더 힘들게 사는 것은 성격 탓이다. 사서 고생하는 것도 죄라고 세실은 마음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누구야?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는 이유.”

 오웬은 점잖게 헛기침을 하려다가 사레가 들려 콜록거렸다. 세실은 웃으며 물을 떠다 주었다. 오웬은 겨우 두어 모금을 마시고서야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의 이름은 에리카 그라우플뤼겔이라고 한다.”


 호그와트 마법학교에는 남학생들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는 마돈나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카리나 벨리니. 아름다울 뿐 아니라 공명정대하여 그야말로 헬가 후플푸프의 환생이 아니냐는 소문마저 도는 소녀였다. 물론 소문은 어디까지나 소문이어서 벨라 혼혈인 카리나가 후플푸프의 환생이라고 진지하게 믿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소문에 감히 반박할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그녀는 아름다웠고, 또 뛰어난 실력과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은 벨리니양의 스케줄이 비어있을까?”

 “다음 주까지 약속이 꽉 차 있다고 하던데.”

 학기 중이라면 남학생들끼리 이런 이야기를 속닥이는 것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밀려드는 데이트 신청에, 여학우들과 친목을 도모하고 여러 소모임에서 활동하고 있는 카리나는 비는 시간이 없을 정도로 유명인사였다.

 그런 카리나에게는 누구보다 절친한 친구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에리카 그라우플뤼겔양이다. 윤기 흐르는 긴 생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리고 조곤조곤 사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그녀가 바로 오웬의 사랑하는 그대 되시겠다.

 미모로는 카리나와 비교해 모자란 것이 없을 정도로 섬세하고 아름다운 에리카였으나 그녀는 친구와 달리 조용하고 소극적인 성격이었다. 에리카는 여자 친구들끼리의 모임에는 자주 참석했으나 남학생들 사이에는 잘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그나마도 잠시 얼굴을 보이는가 싶으면 데이트 신청을 하는 남학생들에게 둘러싸이기 마련이었다.

 개중에는 꿩 대신 닭이라고 카리나를 대신해 에리카에게 대시하는 남학생도, 어떻게든 카리나와 가까워지기 위해 에리카에게 접근하는 남학생도 있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남학생들은 종종 카리나와 에리카를 놓고 누가 더 아름다운지 목소리를 높여 토론하곤 했다. 어디까지나 두 사람의 추종자에 한하는 일이기는 했다.

 당연하게도 세실의 형제 오웬은, 성실하다 못해 꽉 막혀 인생의 재미를 느끼고는 있는지 의문스러운 오웬은 그런 무리에 끼어본 적이 없다. 그저 먼 발치에서 몇 번 바라보고, 친구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을 뿐이다.

 실제로 데이트 신청을 받는 횟수는 카리나양보다 에리카양이 훨씬 많다거나 그만큼 승낙이 쉽게 난다는 이야기 같은 것들.


 “잠깐만.”

 세실은 오웬의 이야기를 끊었다. 오웬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세실은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는 오웬의 표정을 보고 고개를 기울였다.

 “이미 좋아하는 거야?”

 오웬은 눈을 깜빡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불길이 안정되어 조용해진 벽난로의 장작이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렇군.”

 세실은 고개를 주억거리곤 마저 이야기하라며 손짓했다.


 그랬다. 오웬 허츠는 이미 옛날에, 기억도 나지 않는 과거의 언젠가부터 연심을 품고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오웬 본인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입학식에서 모자를 쓴 에리카를 처음 보았을 때였던가? 아니면 처음으로 기숙사 대표가 되어 퀴디치 시합을 뛰다가 하늘에서 관객 사이에 섞여 있는 에리카를 발견했을 때? 어쨌든, 시작 같은 건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오웬은 에리카를 연모했으나 한 번도 데이트를 신청하거나 추종자 무리에 끼지 않았다. 그저 에리카는 눈부시게 아름다우니 지금 소란스러운 인원 말고도 자신 같이 마음을 숨기고 있는 이가 많으리라 짐작했을 뿐이다.

 그런 오웬이 이제 와서 갑자기 데이트 신청을 생각하게 된 것은 아주 사소한 계기였다. 아니, 사랑에 빠진 이에게 사소하다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세실이 아는 대로 오웬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야만 움직이는 신중한 청년이었고, 그에게는 에리카의 고운 두 손에 꽃다발을 안겨야만 하는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


 “결투를 했다.”

 “뭐?”

 오웬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세실은 황당했다. 머글 사회에서 결투가 사라진 게 몇 년 전이던가. 마법사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일찌감치 그들과 떨어져 살아온 세실은 그런 말이 형제의 입에서 아무렇지 않게 나온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입으로 에리카양의 명예를 더럽히는 학우가 있기에 혼내주었지.”

 차마 당황한 표정을 채 감추지 못한 세실을 향해 오웬이 한쪽 눈썹을 들어 보였다. 세실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웃었다. 차마 하고픈 말을 뱉을 수가 없었다.

 “걱정 말아라. 이겼으니까.”

 오웬은 당시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침 식사 시간이었다. 긴 탁자를 두고 전교생이 거대한 홀에 모여앉는 호그와트의 식사시간은 마치 성 전체가 함께 식사하는 중세를 떠올리게 한다. 물론 식탁에 앉은 학생들은 그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호화로운 음식과 세련된 식사예절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여앉은 이들의 대화가 근처로 흘러 들어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오웬은 언제나처럼 이른 시간에 식사를 마치고 남들보다 약간 이르게 일어나려는 참이었다. 오웬의 주변에는 친구들과 다른 학년 학생들이 뒤섞여 있었다. 남학생과 여학생 자리를 구별하지 않고 섞여 앉을 수 있었지만, 대개는 친구들끼리 뭉쳐 앉으므로 여학생 자리는 멀었다.

 테이블은 진수성찬이 넉넉하게 놓일 정도로 넓었지만, 건너편과 대화를 나누기에 불편한 넓이는 아니었다. 옆 테이블, 혹은 건너편에 앉은 친구와 대화하며 시끄러운 학생은 언제나 있었다. 그날은 마침 같은 그리핀도르 학생이었다.

 오웬보다 한 학년 어린 남학생이었다. 오웬은 이름을 말하지 않았지만 알고 있는 듯했다. 그 남학생은 오웬에게 바로 목소리가 들릴만한 자리에 있지는 않았지만, 친구들과 무슨 이야기를 하는 도중이었는지 그만 기세가 올라 큰 소리로 말하고 말았다.

 “그라우플뤼겔하고 친해지면 벨리니가 데이트를 받아준단 말이야?”


 세실은 진지하게 그 말이 결투할 정도의 말이었는지 고민했다. 기분 좋은 말이 아님은 분명하다. 하지만 결투는 대개 목숨을 거는 일이며, 목숨을 잃지 않더라도 크게 다칠 가능성이 높았다. 어떻게 들어도 에리카보다는 카리나를 모독하는 말이 아닌가. 에리카를 향한 연심으로 나설 일이 맞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세실은 제 형제가 애정은커녕 원수라 할지라도 부당한 명예훼손에는 분개할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행히 시간이 이른 탓인지 카리나와 에리카는 보이지 않았다. 오웬은 그 자리에서 결투를 신청했고, 결투가 행해진 것은 그다음 날 오전이었다. 오웬은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말했다.

 “내가 이겼다.”

 세실은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그 일은 오웬에게 기폭제가 되었다. 에리카와 그녀의 친구에게 이런 종류의 소문이 도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에 분노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그녀들의 친지와 가족들이어야 했다. 그래서 잠자코 있었으나 이렇게 당당하게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도 네가 못 보았을 뿐 비슷한 일은 있었을 거야.”

 “알고 있다. 하지만 보지 못했으면 모를까 보고 묵과할 수는 없는 법이야.”

 “그거랑 데이트가 무슨 상관인데?”

 “친구가 되면 내가 그라우플뤼겔양의 이름을 대신해 싸울 수 있어.”

 오웬은 대답했다. 세실은 픽 웃었다. 친구로 지내는 게 가능하기만 하다면 훌륭한 생각이다.

 “친구가 되려는데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잖아.”

 “하지만 상대는 숙녀야.”

 세실은 말을 목구멍 너머로 꿀꺽 삼켰다. 세상 어느 남자가 여인과 친구가 되기 위해 선물과 꽃다발을 준비한단 말인가. 놀랍게도 이 선물이라는 것은 세실에게 찾아오기도 전에 오웬이 마련했다.

 많은 이야기를 해봐야 한 단어도 들어가지 않을 테니 말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세실은 그저 시간이 해결해주리라 믿었다.


 크리스마스 연휴가 막 시작한 다음 날이었다. 느긋하게 기숙사를 떠나려는 에리카에게 꽃과 편지가 날아들었다. 집요정의 힘을 빌렸는지 어느샌가 침대 곁에 내려앉은 편지봉투를 발견한 에리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것을 집어 들었다. 편지 아래에는 벨벳으로 장식된 고풍스러운 보석함이 놓여있었다. 뚜껑을 열자 조명을 받은 투명한 보석이 은빛으로 반짝거렸다.


 ‘하늘과 땅이 당신의 빛깔로 물들었습니다. 그대와 함께 이 풍경을 보고 싶습니다. 언제라도 좋으니 원하시는 시간을 정해 상자 아래 놓아주세요. 당신의 마음은 집요정이 전해주기로 했습니다. 원치 않으신다면 무시하셔도 좋습니다.


당신을 사모하는 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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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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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캐 커미션입니다





 회천당문 분가 제자 당소유가 한숨을 포옥 길게도 쉬었다. 옆에 앉아 노닥거리던 분가 제자들이 질색했다. 옆에서 소란을 피우건 말건 소유는 그저 침울한 표정이다. 보다 못한 랑랑이 소유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재수 없게 뭐하는 거야. 날도 좋은데. 무슨 일 있어?”

 “랑랑, 유 소저는 왜 아녀자인 걸까?”

 밑도 끝도 없는 한탄이었다. 랑랑은 다급히 소유의 입을 틀어막았다. 누가 들었을까 무섭다.

 “얘가 무슨 소리야. 손님한테 그렇게 함부로 말하면 어째?”

 소유가 랑랑의 손을 찰싹 소리나게 때렸다. 따끔한 통증에도 아랑곳 없이 랑랑은 소유를 호당전으로 이끌었다. 소유가 손을 깨물고자 덤볐다. 순식간에 두 합을 주고받고 거리를 벌렸다. 지나가던 간청관 관리가 방을 어지르지 말라고 한소리했다. 소유는 입을 댓 발 내밀고 투덜거렸다.

 “생각해봐.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정명하고 곧은 기개며 드높은 무공 실력. 최소한 례화 아가씨랑 동급이거나 그 이상이 틀림없어. 우리 아가씨 실력이 보통 대단한 게 아니지만 기백부터가 다르잖아? 아, 유 소저가 사내기만 했더라면.”

 “했더라면? 유 소저에게 청혼이라도 하려고?”

 “바보야. 례화 아가씨랑 혼인할 수가 있잖아.”

 소유의 손이 랑랑의 어깨로 쇄도했다. 랑랑은 한 손을 들어 소유의 손을 가볍게 흘리고 역으로 소유의 정수리를 후려쳤다. 소유는 맨손으로 펼쳐지는 회천당문의 절초를 가볍게 잡아챘다. 분가의 자식이라도 회천당문의 제자. 두 사람이 장난처럼 주고받은 손짓에는 당가 무술의 요체가 담겨있었다.

 “대체 례화 아가씨가 왜 유 소저와 결혼하냔 말이야. 두 사람이 유랑 중에 눈이라도 맞았대?”

 “네가 두 분이 얘기 나누는 걸 못 봐서 그런다. 어찌나 다정한지 옆에 있기가 민망할 정도란다. 례화 아가씨 눈에서 꿀이 떨어지더구나.”

 “에엑?”

 소유는 랑랑의 손을 밀치고 휘적휘적 방으로 들어갔다. 적당히 주저앉아 다시 긴 한숨을 폭 내쉰다. 랑랑이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을 하곤 쫓아 들어왔다.

 “그게 무슨 소리야. 자세히 좀 얘기해봐.”

 “너 두분이 서로를 별명으로 부른다는 거 알고 있니?”

 “별명?”

 “례화 아가씨는 유 소저를 연랑, 유 소저는 아가씨더러 화매라 부른단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때부터 어찌나 좋아 죽던지. 내 간질간질해서 죽는 줄 알았다.”

 랑랑은 움찔움찔 솟아오르는 입꼬리를 간신히 붙들었다. 세상에. 이렇게 재밌는 소식이 있었다니. 소유 요 녀석은 아가씨 따라 나갔다 온 지가 언젠데 이제야 이걸 불어? 당장이라도 달려가 친구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좀 더 이야기를 들어두지 않으면 곤란했다. 어디서 어떻게 만나서 그렇게 되었는지를 들어두어야지! 어라, 그런데 유 소저는 소저인데 괜찮으려나?

 “착각한 게 아니냐? 아가씨가 예쁜 애들 좋아하는 게 하루이틀 일도 아니잖아. 예쁜 소녀만 보면 데려다 먹이고 입히고 예뻐하지 않았어. 이번에도 그런 거겠지.”

 “아유, 말을 마라. 아무렴 그걸 헷갈리려고. 이래뵈도 아가씨 호위로 따라다닌 게 십년이야. 어느모로 보나 확실한데 도무지 반길 수가 없는 소식이라 이 말이다.”

 하아. 소유는 또다시 길게 한숨을 뱉었다. 랑랑이 소유의 등을 철썩 때렸다. 소유는 등을 북북 문지르며 이를 갈았다.

 “복 달아난다, 이것아. 그건 그렇고 아가씨가 그 정도로 진심이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씨를 받을 남정네 하나 들여서 혼인만 올리면 누구와 다정하게 지내건 아무도 뭐라할 수 없는데.”

 “그렇기야 하지만. 유 소저가 사내면 모든 게 완벽할텐데 하늘은 대체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글쎄다. 그 아리따운 분을 남정네로 만들었다간 하늘의 분노를 사게 될걸.”

 “모르는 말씀. 유 소저는 사내여도 눈 부시게 아름다울 거야. 미인은 남녀를 가리지 않는 법이다.”

 랑랑이 쯔쯔 혀를 찼다. 소유는 콧방귀를 뀌며 간식을 가져오라 소리를 높였다. 랑랑이 소유를 쥐어박았다. 또 투닥투닥 장난 같은 대련이 벌어졌다. 지나가던 곤주당 하인이 건물을 부수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소유와 랑랑이 사이좋게 연무를 주고받는 사이 담장을 사이에 두고 맞붙은 백엽궁에는 때이른 봄바람이 불고 있었다. 하기사 무덥기로 유명한 회천 지방에서는 봄보다는 겨울이 밀어를 주고받기에 어울릴지도 모른다.

 “있잖아요, 연랑(燕娘).”

 “부르셨어요, 화매(花妹).”

 다정한 목소리는 연인의 그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삼단 같은 머리채를 어깨 너머로 길게 늘어뜨린 아리따운 처녀들은 생긴 것만큼이나 고운 목소리로 애틋하게 서로를 불렀다. 랑랑이 보았다면 눈이 휘둥그레졌을 풍경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다 남의 이야기. 본인들이 어떻게 보이는지 알 리 없는 두 여인은 그저 청명한 날씨와 아름다운 정원을 즐겼다. 호위도 시중 드는 사람도 없이 둘이서 시간을 보내는 건 처음이었다. 두근두근 설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리라.

 먼저 운을 뗀 폐월소접 당례화가 수줍게 웃었다. 백지처럼 새하얀 뺨 위로 붉게 노을이 졌다. 부끄러운 듯 달싹이는 입술은 이슬에 젖은 매화 빛깔이다.

 “줄곧 궁금하던 게 있답니다. 차마 실례가 될까 하여 여쭙지 못했지요.”

 “어찌 말씀을 꺼리셔요. 자매가 되자 하지 않으셨어요. 화매와 소녀 사이에 실례될 질문이 무에 있습니까.”

 창산제일봉 유연리는 그리 말하며 례화의 손을 붙들었다. 따뜻한 온기가 손에서 손으로 전해진다. 례화는 한층 수줍어 고개를 모로 꼬았다. 반짝이는 은발이 어깨를 넘어 사르르 흘러내렸다. 하얀 머리에 하얀 피부, 하얀 비단 옷까지 어느 한군데 희지 않은 곳이 없는 례화의 흰 속눈썹이 바르르 떨린다.

 “사람 마음이 바람과 같아 쉬이 변한다 하였습니다. 연랑이 소중하기에 함부로 하였다 잃을까 두렵답니다. 하면 연랑, 소녀가 사소한 질문을 하나 하여도 되겠는지요.”

 “물론이에요. 걱정이 많으십니다, 화매.”

 례화는 바람 없는 날 연못처럼 잔잔히 웃으며 다정히 연리를 마주보았다. 연리도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미인의 미소에 바람조차 소리를 죽였다.

 “연랑은 어인 연유로 길을 떠나게 되었나요? 여인의 몸으로 홀로 여행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압니다. 시중도 호위도 없이 홀로 떠나는 것이 불안하지는 않으셨나요.”

 연리는 낮은 신음과 함께 입을 다물었다. 례화의 고운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미안해요. 연랑이 어떤 사내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실력을 갖췄음은 알아요. 그대는 창산제일봉인걸요. 허나 소녀는 한낱 보잘것 없는 여인이라 쉬이 마음이 놓이지 않더이다. 여인네 홀로 여행이라니 이 폐월소접 당례화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어요.”

 례화는 소매로 얼굴을 가렸다. 그 모습이 청초해 새가 울었다. 연리는 실소하며 고개를 저었다. 연지도 바르지 않은 옅은 입술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당치 않아요. 화매, 나는 화나지 않았습니다. 어찌 답해야할지 고민이 되어서요. 어째서 길을 떠났느냐 물어도 할 말이 없어요.”

 연리는 조심스런 손길로 례화의 손을 붙잡아 내리고 상냥하게 웃으며 그를 이끌었다.

 맑은 하늘에 몽실몽실 뭉게구름이 흘렀다. 나란히 걷는 처녀들의 뒷모습이 그와 같았다. 바람이 없어 잔잔한 연못이 그 모두를 담았다. 넓은 궁에 사람이라곤 둘 뿐인 것처럼 사방이 고요했다.

 연리는 가볍게 눈을 감았다.

 “작년 일입니다. 언제나처럼 창산에 올랐는데 바람이 시원하더군요. 상쾌하고 기분 좋은 바람이었어요. 그런데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니 산봉우리에서 내려다 보이는 풍경이 바람에 못 미치지 않겠습니까? 매일 보아온 풍경인데 그날따라 이상하게도 좁고 갑갑해보이더랍니다.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여행을 떠나야겠다고.”

 그대로 눈을 떠 하늘을 올려다본다. 연리는 마음 속으로 그날 보았던 하늘을 그려보았다. 땅은 갑갑하니 좁기만 한데 하늘만은 탁 트이게 넓어서 마음이 편해지던 높고 파란 하늘을.

 “그리 마음을 먹으니 한시도 지체할 수가 없었어요. 서둘러 방으로 돌아가 짐을 쌌습니다. 맨손이나 다름 없는 상태로 길을 나서려던 저를 스승님이 붙드셨지요. 그렇게 떠났다가는 반나절도 못 버티고 돌아오게 될 거라고 한참을 잔소리 들었어요.”

 연리는 쿡쿡 웃는다. 례화가 그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여행 중에는 제대로 관리도 할 수 없을텐데 분도 없이 희고 고른 피부결과 노을이 진 저녁 무렵 하늘처럼 짙은 푸른 머리칼이 녹음 속에 어우러졌다. 례화가 꽃과 나비라면 연리는 연못에서 물을 마시는 한 마리 학이었다.

 “그렇게 떠난 길이었습니다. 답이 되었을까요?”

 연리가 례화를 마주하며 눈웃음쳤다. 단정한 이목구비가 자신을 향하자 례화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보잘것 없는 이야기였지요. 그래도 화를 내지는 마세요. 예쁜 얼굴이 망가집니다.”

 “연랑도 참. 제가 늘 화나 내는 여인으로 보이십니까.”

 례화가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연리가 낮게 소리내서 웃었다.

 화해 아닌 화해를 하고 두 여인은 풍양교를 건너 삼묘원으로 향했다. 삼묘원은 례화가 백엽궁을 들어갈 때 벌인 대공사의 결실이었다. 회천당문의 역대 후계가 거쳐온 역사 깊은 정원이지만 엎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최고의 정원사를 모시고 토대부터 다시 쌓은 정원은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났다. 이름하여 차일정(遮日庭). 례화의 바람대로 꽃과 새, 작은 동물들이 어우러진 아기자기하고 사랑스러운 정원이었다.

 례화는 구석구석 자신만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어진 차일정을 어느 한군데 빠질 것 없이 사랑했으나 아무리 사랑하는 자식이라도 개중 특별히 눈에 밟히는 아이가 있는 법이다. 아리따운 이에게 아리따운 것만 보여주고 싶어 례화는 연랑과 함께 영미원으로 향했다.

 연리가 입을 떡 벌리고 감탄했다. 붉은 꽃, 노란 꽃, 푸른 꽃이 넓은 화원을 수놓고 있었다. 같은 종의 꽃이 거의 없고 저마다 색과 형태가 다른데도 전체가 조화를 이루어 하나의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었다.

 례화는 뿌듯함을 감추지 못하고 샐쭉 웃었다. 그 모습이 또 참 예뻤다. 연리가 화단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이 꽃은 무엇이고 저 꽃은 무엇이라 일러주었다.

 “잘 아시네요. 꽃에 조예가 깊으신 줄은 몰랐습니다.”

 “수줍어요. 영미원은 제가 직접 가꾸었답니다.”

 연리는 여인을 돌아보고 다시 한 번 감탄하고 말았다. 온화하게 웃는 례화의 뒤로 오색찬란한 꽃밭이 펼쳐져 있는데 그 화려한 색채가 색조가 없는 례화를 장식해 미모가 한층 빛나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진정 꽃밭의 주인이었다. 꽃들이 례화의 미모를 찬양하는 것 같은 풍경 속에 자신이 자연스럽게 섞여 있음은 깨닫지 못한 채였다.

 “이 꽃은 무엇입니까?”

 “산하엽이라 합니다. 물에 젖으면 꽃잎이 투명하게 변한답니다. 수정꽃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리지요.”

 “꽃잎이 투명해진다고요? 신기하군요. 이건 뭐라고 하나요?”

 “그건 멀리 서역에서 구해온 꽃입니다. 설융화라고 부르지요. 눈이 내리는 높은 산 바위틈에 피는 꽃이라더군요.”

 “이건 압니다. 목련이군요.”

 “맞습니다. 잘 알고 계시네요.”

 례화의 설명을 들으며 화원을 한바퀴 둘러본 연리는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꽃들이 가득했다. 제각기 다른 기후와 다른 토지에서 자라는 꽃들을 한자리에 모아 동시에 피워냈다. 또 피지 않은 꽃과 만개한 꽃을 섞어 어느 한 군데 비어보이지 않도록 배치한 솜씨는 또 어찌나 절묘한가. 연리가 이를 언급하자 례화는 시기별로 돌아가며 화원을 장식할 수 있도록 순서대로 배치했을 뿐이라며 시선을 떨궜다.

 영미원의 아름다움에 크게 감동한 연리는 삼묘원을 전부 둘러보고 싶었다. 례화에게 말하자 기뻐하며 안내해주었다. 새를 기르는 제화원과 작은 동물들을 기르는 미려원을 순서대로 들렀다. 손이 덜 가는 탓인지 관리하는 하인이 보이지 않던 영미원과 다르게 제화원과 미려원에서는 례화를 발견한 하인이 달려나와 문을 열었다. 동물들과 항시 함께 지내는 하인들은 연리의 질문 공세에도 차분하게 대답했다.

 “이 아이가 제가 제일 아끼는 친구랍니다. 설화라고 해요.”

 례화가 무늬 없이 하얀 털을 가진 고양이를 안아들며 웃었다. 연리가 따라 웃었다. 옅은 회색 눈을 가진 고양이는 례화의 팔에 나른하게 고개를 얹고 고롱거렸다.

 “화매를 닮았네요.”

 연리가 쓰다듬으려고 하자 설화는 이를 드러내며 손을 피했다. 례화가 미간을 모으고 고양이를 야단쳤다. 연리는 례화를 말렸다.

 “괜찮아요. 말도 못하는 짐승인걸요. 호되게 대하지 마세요.”

 “연랑.”

 “정말 괜찮아요. 그렇지?”

 연리는 설화와 눈높이를 맞추고 웃었다. 거리를 지키니 설화도 물러서지 않았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연리를 쳐다보던 설화는 야옹하고 울었다. 사람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것 같은 반응에 연리가 웃었다. 레화는 속이 상했는지 기운 없는 표정으로 설화를 내려놓았다. 설화는 례화의 발치를 맴돌았지만 반응이 없자 곧 떠났다.

 연리는 토라진 례화와 함께 미려원을 나왔다. 례화는 계속 속상해했다. 두 사람은 초록빛 산책로를 느긋하게 걸었다.

 “개의치 마세요. 저는 초대받은 것만으로도 기뻤습니다.”

 “설화가 연랑을 훨씬 기쁘게 해줄 줄 알았어요.”

 “기뻤어요. 눈처럼 새하얀 털을 가진 고양이는 처음 보았습니다. 화매와 함께 있으니 마치 자매 같았어요.”

 “연리도 그렇게 생각했나요? 그래서 이름이 설화(雪花)랍니다.”

 례화가 섭섭함을 떨치고 밝게 웃었다. 옥구슬이 구르는 듯한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퍼져나갔다. 연리는 처음 보는 례화의 큰 웃음에 놀라워했다.

 례화는 연리와 팔짱을 끼고 호관단을 올랐다. 서로의 팔을 붙든 손이 겹쳤다. 오후의 마지막 햇살을 받아 푸르른 차일정이 반짝반짝 빛났다. 조금 있으면 노을이 질 터였다. 하루종일 둘이 함께 거닌 정원을 내려다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례화가 연리에게 살짝 기대자 연리가 마주 뺨을 붙였다. 두 사람은 꼭 붙어 서서 노을이 지기를 기다렸다.

 “누각에서 화매와 함께 아침을 먹은 건 잊을 수 없을 겁니다. 안개낀 호수가 무척 아름다웠거든요.”

 “저는 수미경을 걸은 게 좋았어요. 저녁이면 그때와는 또 다른 풍경을 볼 수 있답니다.”

 “앉아서 쉬는 것도 화매와 함께 하니 즐거운 놀이가 되었어요. 하는 일 없이 정원을 거니는 것만으로 이렇게 즐거울 수 있는 상대는 화매가 유일합니다.”

 “어머? 그런 말씀을 하시면 연랑을 사모하는 사내들이 눈물 지어요.”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그런 말에 굴하는 사내라면 저도 관심 없어요.”

 례화가 소리 죽여 웃었다. 연리도 함께 웃는다.

 처녀들이 키득거리며 한담을 나누는 사이 하늘에는 붉게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기대선 채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서쪽 하늘을 중심으로 세상이 평소와는 다른 색으로 물들어갔다. 단풍이 없는 회천의 나무들은 매일 이 때를 기다린다. 왕의 색으로 몸을 장식할 수 있는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울긋불긋 아름답게 치장했다. 례화의 은빛 머리칼과 하얀 옷자락도 연리의 푸른 머리칼과 옷가지도 붉게붉게 물들었다.

 두 사람은 노을이 완전히 사그라지기까지 그곳에 서있었다. 몸을 꼭 붙이고 온기를 나누며 서있었다. 풍경을 바라보는 동안은 긴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제각기 지나간 시간을 떠올리며 아련한 추억에 잠겨 있었다.

 빛이 사그라지고 태양이 은수성 담장 너머로 모습을 감추었다. 례화와 연리는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까르르 종달새처럼 울었다.

 “한 바퀴 더 돌고 들어갈까요?”

 례화가 제안했다.

 “날이 어두워지면 침소로 찾아가는 길을 잃어버릴텐데요.”

 연리가 웃었다. 두 사람은 천천히 수미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날은 어둡지만 두 사람에겐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례화가 아직도 차일정을 거닐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백엽궁 하인이 등롱을 들고 찾아왔다. 례화와 연리는 하인을 앞세우고 느긋하게 오늘의 마지막 산책을 즐겼다.

 “친구집에서 그런 걸 걱정하는 게 아니랍니다. 제 궁에서 주무시고 가지 않으시겠어요?”

 “화매의 침궁에서요?”

 연리가 휘둥그레지고 례화는 소리 죽여 웃었다.

 “농담이어요. 여염집 여인들은 침소를 나누며 우애를 다지기도 한다기에 한 번쯤은 해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지요. 그 일이 생각났을 뿐이랍니다.”

 “그런 소박한 소망이 있으셨나요. 같은 방에서 자는 것뿐이라면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닌데요.”

 “연랑은 다른 사람과 한 방에서 자본 적이 있나요?”

 이번엔 례화가 놀랄 차례였다. 연리는 난처한 듯 웃었다.

 “어릴 때는 제자들 여럿이 같은 방을 썼으니까요. 청무문은 그리 규모가 크지 않아서 모두에게 독방을 줄 여유는 없답니다. 돌아가면 제 방은 없어졌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럴수가. 연랑의 방을 빼앗으면 제가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례화가 진지하게 화를 냈다. 연리는 웃어넘겼다.

 저녁에 보는 수미경은 례화가 오전과는 다른 멋이 있었다. 군데군데 세워진 쇠기둥 꼭대기에 하인들이 불을 붙이자 불빛과 그림자가 어울려 한 폭의 근사한 산수화처럼 보였다. 그림자가 생기는 모양을 고려해 만들어진 미로였다. 잘 보니 그냥 산수화가 아니라 유명한 그림을 정원으로 모작한 형태였다. 아, 이렇게 섬세한 작품이라니. 연리는 또 한 번 감동하고 말았다.

 “이곳을 꾸민 정원사가 어느 분이라고 하셨지요? 정말 놀랍습니다. 천재에게는 한계가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례화는 연리와 함께 수미경을 걷는 동안 정원을 이렇게 꾸미게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했다. 새로 백엽궁에 들어온 례화가 정원을 처음부터 갈아 엎게 된 이유, 걸맞는 정원사를 섭외하기까지의 과정, 공사 중에 일어난 우여곡절과 완성된 후에 정원사와의 인연에 이르기까지. 연리는 좋은 청자였고 사위는 고요해 세상에 둘만이 남은 것 같은 시간이었다. 례화와 연리는 마지막까지도 산책이 끝나는 것을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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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카 타입 자캐



 끈적거리는 습기에 일본에 서있다는 실감이 났다. 섬나라는 끈적거린다. 바다의 습기를 머금은 끈적하고 소금기 어린 공기가 모국의 공기였다.

 미스즈는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가방끈을 추스르고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민가에서 이어지는 길에 하얀 건물이 우뚝 서있다. ○○○ 종합 병원. 편의점과 산책로가 이어지는 뒷문으로 진입하자 오래된 병원의 낡고 깨끗한 내부가 미스즈를 반겼다.

 두개 시를 합쳐 가장 큰 종합 병원이니만큼 외래환자도 적지 않다. 미스즈는 복잡한 대기석을 포기하고 주변을 살폈다. 전화를 할까 고민하는 사이 기다리는 사람이 나타났다.

 진한 검은 머리에 말갛고 순한 인상의 젊은 남자였다. 아직 마흔도 채 되지 않은 듯 깨끗한 얼굴과 선한 눈매는 미스즈가 그리워하던 사람과는 많이 달랐지만 웃는 옆얼굴, 하얀 목덜미가 닮았다. 미스즈는 가볍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케미 소이치로씨인가요?”

 “안녕하세요. 시이나 미스즈씨죠? 처음 뵙겠습니다.”

 아케미 소이치로는 다정스럽게도 웃으며 미스즈의 손을 잡았다. 생각보다 손이 컸다.

 * 

 두 사람은 소이치로의 집으로 향했다. 병원에서 무척 가까운 작은 집이었다. 몇 년 전까지만해도 조카와 함께 그럴듯한 집에서 살았지만 독립을 원하기에 집을 넘겨주고 자기가 나왔다고 했다. 미스즈는 무심코 그리운 사람을 떠올리고 만다. 희생정신도 상냥함도 그 사람을 닮았다.

 남자 혼자 사는 집치고는 깨끗하고 아기자기한 집안을 둘러보는 사이 소이치로가 다과와 앨범을 들고 왔다. 그 위에 쌓인 건 아마도 비디오. 요즘 저게가 있을까? 미스즈는 신기해하며 그가 들고 온 것들을 살펴보았다.

 소이치로가 들고 온 앨범에는 미스즈가 몇 년을 그리워했는지 모를, 그리운 그 사람의 얼굴이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빛은 다소 바랬지만 분명히 그 사람이었다. 아케미 마리. 어린 미스즈를 돕고자 했던 몇 안 되는 소중한 추억의 그 사람. 사진 속 마리는 웃음기 없는 딱딱한 표정이었지만 미스즈는 마리의 미소를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누나는 항상 어려운 사람에게 관심이 많았어요. 하지만 직접 인연이 있는 사람이 찾아온 건 처음이네요. 누나의 지인들은 대부분 누나의 동료였거든요.”

 소이치로는 김이 오르는 커피잔을 들고 그리운 눈으로 앨범을 훑었다. 그는 무척 적극적이어서 미스즈는 마리에 대해 궁금해하지 못한 부분까지도 들을 수가 있었다.

 “당시의 누나는 무척 마음이 약해져 있었어요. 절대 그렇게 포기할 사람이 아닌데 그렇게 가버렸죠.”

 소이치로는 눈물을 훔쳤다. 마리가 세상을 뜬지도 벌써 이십년이 지났다. 아직도 눈물이 나오는 것일까. 미스즈는 무덤덤하게 소이치로를 바라보았다. 남이 흘려주는 눈물이 고마웠다. 미스즈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매마른 미스즈의 가슴은 눈물 대신 통증을 호소했다. 심장 언저리, 정확히는 그보다 조금 아래쪽 배인지 허리인지 모를 곳이 찌르는 듯이 아팠다. 내색하지 않고 소이치로가 미스즈의 요청대로 진하게 내려준 커피를 한모금 머금었다.

 “혼자 사는 형제분이 이런 걸 다 가지고 계시는군요.”

 아, 그게요.

 그렇게 운을 뗀 소이치로는 기다렸다는 듯 기쁜 얼굴을 하고 옛날 이야기를 떠들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독립적이고 부모님에게 반항적이었던 큰 누나의 이야기였다. 어린아이의 눈으로 바라본 마리가 얼마나 멋있었는지 느껴졌다. 미스즈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아홉살 여름이었다. 그날도 부친은 주민등록에도 올라있지 않은 미스즈의 생모와 뒹굴기 위해 어린 미스즈를 길바닥으로 쫓아냈다. 막내는 장에 들어가 소리도 없이 잠들었으므로 쫓겨난 건 미스즈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막내까지 데리고 길거리에 앉아있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간을 보내기 위해 해도 뜨지 않은 놀이터 그네에 앉아 시간을 보내던 중이었다. 머리를 허리까지 기른 예쁜 여자 어른이 놀이터를 지나다 미스즈를 발견했다. 우연이 그들을 비껴갔는지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만난 마리는 부친의 폭력과 굶주림에 시달리는 미스즈를 집으로 데려가 먹이고 씻겼다. 긴 만남은 아니었다.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건 기뻤지만 아버지의 눈을 피해 혼자서 빠져나오는 게 힘들어 몇 번 보지 못했다.

 미스즈가 만난 마리는 특이하긴 했지만, 마냥 상냥하고 다정하고 예쁜 사람이었다. 소이치로가 이야기하는 어린 시절의 마리, 대학 시절의 마리는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하지만 그런 소이치로의 이야기 속에서도 미스즈가 아는 마리가 살아있었다. 소이치로의 얼굴에서 부분부분 마리의 그림자가 스치는 것처럼 그렇게 마리가 보였다.

 남의 이야기에 호응하는 기술이 모자란지라 제대로 대꾸도 해주지 못했는데 소이치로는 한참을 이야기했다. 그 이상 하라고 해도 할 수 없는 미스즈는 그런 소이치로의 넉살이 고마웠다. 그리운 사람의 흔적이 보일 때마다 고개를 주억이고 몇마디 던졌을 뿐인데 소이치로는 무척 기뻐보였다. 미스즈도 기뻤다. 마리의 추억은 온전히 미스즈의 것이어서 아무와도 공유할 수 없었던 세월이 무려 이십년이었다.

 서로 다른 소파에 앉아있던 두 사람은 비디오를 보기 위해 같은 소파에 모여앉았다. 소이치로가 말하길, 앨범의 사진과 비디오는 진작에 디지털 데이터로 업로드를 마쳐둔 상태라고 했다. 비디오도 사진도 자꾸 만지면 닳고 망가지니까 잘 꺼내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것을 마리를 아는 사람이 찾아와 오랜만에 꺼낸 것이라고. 다는 아니지만 많은 사진에 마리의 손길이 한번씩은 닿았다고 했다. 그저 마리의 모습을 보고 기뻐했던 앨범이었는데 감회가 새로웠다.

 비디오는 마리의 유언과 임종을 담은 것이었다. 창백한 안색을 하고도 여전히 아름다운 젊은 여인이 병실 침대를 배경으로 반듯하게 앉아있었다. 환자복이 아닌 평범한 실내복이었다. 소이치로는 마리가 그렇게 찍기를 희망했다고 설명해주었다. 막판에는 거의 삶의 의지를 놓은 듯했지만, 마지막 자신의 모습을 환자복으로 마무리하기는 싫다며 투덜거렸다고 소이치로는 말했다. 임종 비디오를 보며 소이치로가 서럽게 울어서 한참을 달래야했다.

 “처음 뵙는 분께 이런 모습 보여서 면목이 없네요. 누나 이야길한 건 정말 오랜만이에요. 요즘은 누나 생각을 해도 눈물이 나지 않았는데 옛날 이야기를 해서인가봐요.”

 소이치로는 촉촉한 눈으로 수줍게 웃었다. 마리를 닮은 얼굴이 예뻐서 미스즈는 무심코 키스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냥 생각만 했다.

 미스즈가 일본에 온 뒤로 갑자기 잡은 약속이라 소이치로는 쉬는 날이 아니었다. 약속한 시간이 훌쩍 지나 미스즈가 떠나려 하자 소이치로가 붙들었다. 실무를 보는 종합 병동 의사는 불규칙하게 병원에 매여있으니 호출이 없을 땐 이야기하고 자리를 좀 더 비워도 이해해준다고 했다. 소이치로는 근 오십에 가까운 나이니 그렇게 말단도 아니었다.

 “식사라도 하지 않으시겠어요? 직장 동료 외의 다른 사람과 함께 식사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에요. 시이나씨와는 조금 더 이야기하고 싶어요.”

 누나에 대해 궁금한 게 있으면 뭐든지 알려주겠노라고 소이치로는 마치 그걸 대단한 보화나 되는 것처럼 이야기했다. 미스즈는 고민했다. 더 궁금할 것도 없었지만, 소이치로의 간절한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이러니 저러니해도 그는 마리와 무척 닮았다. 게다가 드물게 예쁜 사람이었다.

 미스즈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어디로 갈까요?”

 소이치로는 표정을 감출 생각이 없는지 너무나도 행복한 얼굴을 했다. 그날 저녁은 무려 소이치로가 직접 차렸다. 갑작스러운 손님이라 제대로 차리지 못했다고 겸손을 떠는 것치고는 무척 솜씨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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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나 타입 자캐 커미션입니다.





 페리아 파그메의 밤. 지상은 요정의 춤으로 물들고, 창공에서는 달이 축복하는 아름다운 시간. 사람들은 되찾은 풍요에 흥겨워했다. 닷새를 이어진 축제에도 지치는 기색은 보이지 않고, 생기가 넘쳐흘렀다.

 무대의 막이 올랐다. 그것은 벌써 삼십여 년 전의 이야기.

 수도가 아직 눅진한 평화에 물들어 자신을 잃어가고 있던 시절. 아름다운 한 청년이 있었다. 그는 반짝이는 금발과 장밋빛 뺨을 가진 아주 사교적인 사람이었다. 누구나 그를 보면 사랑에 빠져 온갖 파티에 불려 다니지 않는 곳이 없었다.

 청년에게도 한가지 흠이 있었으니, 얼음장같이 차가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교계의 모든 여인이 그의 마음을 한 줌이라도 얻어볼까 갖은 애를 썼지만, 그는 애타는 갈구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마음을 허락한 적이 없었다.

 보석처럼 아름다운 청년이 이름은 엘리엇 샬마르크. 그에게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 하나 있었다. 이야기는 엘리엇이 갓 청년이 되던 데뷔탕트의 무도회장에서 시작된다.

 「저기 있는 저 여인을 보아라. 어쩜 저리 아름다운지.」

 허름한 차림의 인형술사가 나무막대를 흔들자 왕자 인형이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푹푹 쉬었다. 구경하는 아이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왕자 인형 옆에서는 검은 머리에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 인형이 길게 하품을 했다. 곧이어 왕자 인형은 정중하게 여자 인형에게 절을 하고 두 인형은 함께 춤을 추었다.

 「레이디는 정말 아름답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당신과 혼인하고 싶어요.」

 「오, 엘리엇. 나도 정말 그러고 싶네요.」

 과장되게 간드러진 목소리에 객석에서는 까르르 웃음을 터진다. 마침 옆에서 악단이 연주를 시작해 인형극은 한층 그럴듯해졌다. 시간은 흘러 흘러 엘리엇은 이름 모를 여인을 향한 연심에 불타올랐다. 마침내 청혼을 결심한 엘리엇. 그은 그때까지도 이름을 모르던 여인에게 이렇게 요청했다.

 「사랑하는 여인이여.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제발 내게 알려줘요.」

 왕자 인형이 무릎을 꿇고 사랑을 고백했다. 여자 인형은 무정하게 돌아섰다. 왕자 인형은 찢어지는 마음에 고개를 푹 떨궜다.

 「내게는 필요한 게 있어. 그대를 사랑할 순 없어요.」

 「그대가 원하는 거라면 내 무엇이든 마련해주겠소.」

 인형술사의 연기는 여전히 우스운 하이톤이었지만, 이제는 웃는 이가 없었다. 지나가던 행인이 인형극을 보고 발을 멈췄다.

 여자 인형이 왕자 인형을 향해 돌아섰다. 왕자 인형은 고개를 들어 여자 인형을 반겼다.

 「그게 정말인가요?」

 「물론이요.」

 「무엇이든?」

 「무엇이든!」

 두 인형이 점차 가까워지며 양손이 맞닿으려는 찰나,

 “어, 줄 끊어졌어요.”

 한 아이가 말했다. 방금까지 멀쩡하던 여자 인형의 머리 쪽 줄이 끊어져 덜렁거렸다. 인형 목이 뜯어져 솜이 보였다. 인형사는 망가진 인형을 집어넣고 새 인형을 꺼냈다. 아주 흡사하지만, 짧고 활동적인 드레스를 입은 인형이었다. 인형사가 손잡이를 붙들자 바닥에 축 늘어져 있던 왕자 인형이 벌떡 일어났다. 인형극은 다시 계속된다.

 금화를 인형사의 가방에 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들어가는 길에 눈에 띄어 끝까지 보고 갈 셈이었는데 인형이 망가지는 바람에 흥이 떨어졌다. 반짝이는 동전에 아이들과 인형사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그 눈빛을 즐기며 광장을 떠난다.

 오늘로 이 즐거운 시간도 끝이라고 생각하니 참으로 아쉬웠다. 촉박한 시간을 아껴 굳이 길거리로 나온 건 그런 이유였다. 잠시라도 좋으니 감시에서 멀어지고 싶은 마음 반, 앞으로 최소 일 년은 오지 않을 향락을 즐기고 싶은 마음이 반. 번쩍이는 수도의 거리는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성을 빠져나올 만한 가치가 있었다. 사람들 얼굴에 흐르는 생기는 그 자체로 구경거리였다. 인형 같은 표정을 한 귀족들 사이에 서 있는 건 너무 지루해서 그대로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한껏 차려입은 아름다운 아가씨들도 위안이 되지 못했다. 사람이 과자만 먹고 살 수는 없는 법이다. 생기 넘치는 거리가 어떤 보약보다도 좋았다.

 올해의 페리아 파그메는 조금 특별한 축제였다. 길거리는 언제나와 같았지만, 도성은 달랐다. 밖에서도 눈에 띄게 빛나는 홀이 있었다. 한창 일꾼들이 바쁘게 일하고 있을 때였다. 홀에 도착할 때쯤이면 이미 시작하고도 남을 터이다.

 왕의 이름으로 주최되는 가장무도회. 매해 한두 가문은 꼭 빠지던 저녁 만찬과는 다르게 모든 귀족 가문은 반드시 참석하라는 명이 있었다. 디히터가에서는 가주인 플로리안이 참석하는 것으로 진작 결정이 났다. 나는 군더더기이자 들러리, 홀을 장식하는 예쁜 꽃이었다.

 플로리안은 축제 첫날부터 성에 머물렀다. 나는 텔레포탈을 넘자마자 디히터의 위엄을 지키며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그와 조우했다. 플로리안은 집에서 지낼 때보다 혈색이 좋아 보였다. 나는 체면치레가 맞는 인간이 따로 있는 모양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플로리안은 나를 무척 반겼다. 왜 나를 찾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플로리안이 떠나고 그 어느 때보다도 평화롭고 즐거운 한때를 예상하며 몸을 풀던 나를 불러낸 건 플로리안이었다. 반드시 가장무도회에 참석하라고 가문의 문장까지 썼다. 그가 무얼 생각하는지는 짐작이 갔다. 나와 미케일라의 행복한 시간을 방해할 겸, 날 이용해 하나라도 더 지지세력을 끌어모을 셈이었다.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수였다. 그렇지. 그렇고말고. 아무리 멍청해도 대륙 정반대 편에 있는 귀족이 한 지붕 아래서 휘두르는 칼을 막아주리라 믿지는 않을 거야.

 괜히 웃음이 났다. 그까짓 권력이 뭐라고 목숨을 걸고 칼부림을 하는지. 귀찮기만 한 것을 굳이 지켜내려는 플로리안도, 아득바득 뺏으려는 미케일라도 놀라운 위인들이다. 나는 휘파람을 불며 마차에 올랐다. 금실이 수 놓인 제복을 입은 마부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무도회장은 눈이 부셨다. 성 밖에서부터 유난히 빛나던 홀은 대낮과도 차이가 없을 만큼 밝았다. 밤하늘을 걷는 양 아름다웠던 밤거리를 비웃듯 무도회장을 꼼꼼히 수놓은 광원은 고작 서민들의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 빛이 눈송이처럼 흩날리도록 천장에 걸어둔 마법, 가격을 깜박 잊은 듯 홀 곳곳을 장식한 전구들. 거기에 빛이라기보다는 분위기를 위해 세워둔 듯한 촛불이 아른아른 빛났다. 초와 마법이야 기본적인 장식이지만, 마도공학의 정수라 불리는 전구를 한 자리에서 이렇게 많이 보는 건 또 처음이었다.

 홀에 들어섰을 때 개회식은 모두 끝나있었다. 느긋하게 산책을 마치고 도착한 보람이 있어 폐하의 근사한 말솜씨를 견문할 기회는 놓치고 말았다. 오호통재(嗚呼痛哉)라. 나는 안타까운 마음을 차마 감출 수 없어 촉촉한 눈가를 훔쳤다. 앳된 아가씨 하나가 나를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쉿. 회심의 미소는 비밀이에요.

 홀 깊숙이 들어가 사람들 사이에서 목표물을 탐색했다. 비싼 돈을 들여 텔레포탈을 타고 수도까지 날아온 보람을 줄 존재, 바로 오늘의 무도회에 어울리는 향기로운 꽃이 필요했다. 휴식을 방해받은 대가는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아름답게 피어난 아가씨가 없다면 맛 좋은 가십거리도 괜찮다.

 홀을 가득 메운 참가자들은 가장무도회에 걸맞게 짙은 분장이나 화려한 가면으로 자신을 가리고 있었다. 왕이 직접 내리고 실천하는 명령을 함부로 거역하는 간 큰 인사는 몇 없었다. 그는 자신이 푸른 하늘을 먹구름으로 덮으려고 했다는 것을 알까. 가면을 든 손을 살짝 옆으로 기울이자 내 쪽을 훔쳐보던 귀부인이 손 키스를 보냈다.

 마왕이 저지른 오 년간의 악행과 전쟁으로 나라가 한 번 무너졌다. 오백 년의 긴 평화와 풍요는 신기루처럼 바스러졌다. 마왕이 마왕이라고 불리는 것은 마에서 시작된 존재여서가 아니다. 다른 세상에서 온 탓도 아니다. 그건 그가 마왕의 이름을 가지게 된 계기에 지나지 않았다. 마왕이 마왕이 된 것은 전쟁과 학살을 즐기는 잔혹한 성정 탓이었다. 실리도 예법도 무시하고 그저 육체의 즐거움만을 쫓는 무도한 치세 탓이었다. 백성들은 공포와 증오를 담아 그를 마왕이라 일컬었다. 그 이름은 피와 영혼을 싣고 오래도록 전해졌다. 오백 년의 긴 역사가 모든 걸 묻어버리기 전까지는.

 약 오 년간 이루어진 마왕의 치세는 나라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망가진 국토가 너무 넓었다. 잃어버린 사람이 너무 많았다. 기름진 대지에는 붉은 비가 내리고 눈물이 모여 강이 흘렀다. 고작 오 년. 그 오 년 동안 삶이 완전히 망가졌다. 아직도 마왕의 치세를 견딘 이들은 마왕을 향한 두려움에 떨었다. 삼십 년을 잊으려 노력했지만, 악몽이 가시지 않았다. 마왕을 겪지 못한 어린 청년들은 황폐한 땅과 메마른 인심 속에서 공포와 적의를 배웠다.

 귀족들 사이에서는 아직도 마왕의 치세동안 안온히 집을 지켜낸 지방과 그렇지 못한 지방 사이 갈등이 심했다. 삼십 년이라는 절대 짧지 않은 시간은 사랑하는 가족과 충성을 맹세한 주군을 잃은 상실감을 지워주지 못했다. 마왕이 사라지고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긴장감이 사라지자 삶을 송두리째 빼앗긴 비탄이 찾아왔다. 땅과 집과 가족을 잃은 이들의 원성이 빗발쳤다. 고통은 귀족과 평민을 가리지 않았다. 온 나라가 통곡했다.

 갓 왕위에 오른 실라나이우스는 갈 곳 잃은 분노를 마왕과 그의 치세를 가져온 반역자들에게 돌리기 위해 노력했다. 훌륭한 왕이었지만, 한 사람의 인간이었다. 왕은 어떤 노력으로도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을 통제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갖은 노력 끝에 많은 아픔이 마왕의 탓이 되었지만, 사람들은 슬픔을 견뎌내기 위해 이웃을 원망했다. 마왕에게 협력한 가문과 세력을 모두 쳐냈지만, 감정의 골은 전혀 좁아지지 않았다. 가장 힘든 순간에 도움을 거부한 이웃과 살아남기만도 벅차 모든 손을 놓아버린 이들이 서로를 원망했다. 살라나이우스의 뒤를 이어 왕관을 물려받은 녹스 E. 네레우스는 선왕이 살린 나라를 안정시키려 부단했다.

 그 결과가 여기 있었다. 나는 웃었다. 우스꽝스러운 가면이 사람들을 실에 꿰인 인형처럼 만들었다. 넓은 홀은 인형극 무대였다. 사방이 옷과 머리에 엄지손톱만 한 큐빅을 덜렁이며 만면에 행복을 그린 인형으로 가득했다. 막이 오르자 일곱 빛깔 보석이 광채를 발하고, 인형들은 일제히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이곳 어딘가에 숨어있을 엘리엇 샬마르크에게 경배를. 비록 멍청한 얼굴을 한 인형이었지만, 눈먼 용기만큼은 존경할 만 했다.

 나는 무대에 선 인형답게 저 멀리 높은 곳에 앉은 광채에게 절한다. 우스꽝스러운 광대놀음에 빠지는 건 예로부터 의자가 높은 자의 특권이지요. 아무리 광대놀음에 눈이 멀고 귀가 먹어도 당신의 발등에 입 맞춘 신하를 잊지 마시길.

 파티장을 느긋하게 돌았다. 음식을 나르는 시종의 접시에서 바질과 캐비어를 얹은 카나페를 집어 든다. 큰 행사를 맞아 화사하게 단장한 여인들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어디 보자.

 벽에 붙어 와인을 홀짝이는 저 소녀는 테샬리트 가주가 사랑하는 꼬마 아가씨다. 듣자 하니 마력은 대단치 않지만, 지력이 뛰어나 마법은 물론 갖은 학문에 능통하단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젊은 남자들이 잔뜩 몰려있다. 사랑을 갈구하는 전도유망한 기사들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들 머리 위로 삐죽 솟아 있는 얼굴은 위풍당당하면서도 아름답다. 그녀는 도블링 영지에 속한 사무엘가 출신 검사로 실력이 뛰어나고 아름다웠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팬이 많아 각지에서 팬레터가 날아든단다.

 저녁을 대충 길거리 음식으로 때운 탓인지 얼마 걷지 않았는데도 배가 고팠다. 나는 시종을 아예 불러 세웠다. 체면도 모르고 연달아 음식을 집어 먹자 경악한 표정을 했다.

 “왔구나, 디트리히.”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식사를 포기했다. 시종은 내 손이 멈추자마자 달아나듯 떠나버렸다. 나는 혀에 남은 카나페의 잔여물을 아쉽게 삼키며 돌아섰다. 천상의 미소가 나를 반겼다. 플로리안은 마치 처음으로 꽃이 피는 순간을 목격한 어린 소녀처럼 맑게 웃었다. 나만큼이나 아름다운 이 미청년은 긴 은발을 말총처럼 늘어뜨리고 짙은 푸른색 코트를 걸쳤다는 것을 제외하면 나와 거의 흡사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와 나의 분위기는 천지 차이로 달랐다.

 “개회식에 보이지 않더구나. 즐거운 일이 있었니?”

 플로리안은 상냥하고 아름답게 웃으며 물었다. 가면에 가려져 있는 형의 얼굴이 눈만 보고도 마음속에 그려졌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을 바라보는 듯한 다정한 미소는 동생을 향하기에 흠이 없었다.

 “형도 나가보는 게 어때. 올해 같은 페리아 파그메는 또 없을 거야.”

 나는 플로리안 디히터의 꿀이 떨어질 듯한 애틋한 눈빛을 건조한 미소로 받아쳤다. 훔쳐보는 영애들의 안타까운 한숨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네가 그렇게 추천할 정도라니 나도 꼭 보고 싶다. 같이 나가볼 걸 그랬어.”

 플로리안은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나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형의 혼신을 다한 역할 수행은 이미 지루함으로 말라붙고 있던 내 마음을 적셨다. 이토록 플로리안이 최선을 다하는데 이 정도도 해주지 못할쏘냐. 나는 마음을 담아 플로리안에게 대답했다. 지금은 볼거리가 많이 줄었겠지만, 형과 함께라면 당장에라도 마차를 준비하겠노라고. 사랑하는 플로리안은 곤혹스레 웃으며 내년에는 꼭 함께 축제를 구경하자는 약속을 남겼다.

 플로리안이 떠나고 나는 또 다른 접시에서 스파클링 와인을 집었다. 달콤한 향을 콧속 깊은 곳까지 빨아들이며 근처에 있는 서랍장에 몸을 기댔다. 삼삼오오 모여있는 인파 속에는 알아볼 수 있는 인물이 제법 끼어있었지만, 어디에도 즐거운 모임이 없었다. 외로운 아가씨도 없고, 흥겨운 음악도 없었다. 영광스러운 자리를 만들어주신 하늘의 가장 높은 영광이 계시면 인사라도 올려볼 것을. 보아하니 개회식에 지친 몸을 달래느라 자리를 비운 듯했다.

 입술을 적시고 이것저것 음식을 집어 먹다 보니 어느덧 배가 불렀다. 슬슬 움직여볼까 하는 찰나에 음악이 바뀌었다. 잔잔하게 귓가를 간지럽히던 리듬이 흥겨워졌다. 인파를 헤치고 돌아다니던 시종들이 자취를 감췄다. 홀 가장자리로 사람들이 밀려 나왔다. 살과 살을 맞대고 진정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중앙에서 밀려 나온 사람 중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나는 반가움에 성큼 그에게 다가갔다. 꽉 조인 허리 아래로 한껏 부풀린 스커트는 고귀한 보랏빛. 한 떨기 제비꽃처럼 아리따운 그를 이 팔에 가둬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심장에 바람이 든 듯 가슴이 설렜다. 그 이름하여 마하 로즌기프트. 이름에서부터 느껴지는 장미 향이 매혹적인 여인이었다.

 어두운 자줏빛 레이스 장갑 위로 검은 나비를 붙잡은 그는 어딘가 지친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뒤늦게 도착한 나와 달리 처음부터 자리를 지켰다면 지칠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발걸음을 늦췄다. 망상이라고 해도 좋지만, 위화감이 들었다. 마하 로즌기프트가 이 정도 파티에 지칠 사람이던가? 절로 고개가 기울여졌다.

 과거 그와의 만남을 되짚는다. 운명적인 첫 만남은 데뷔탕트였다. 날씬한 허리와 가녀린 팔은 내 마음을 사로잡을 만했다. 지금이니 단언하지만, 나는 그에게 첫눈에 반했다. 누군가는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걸 죄악이라 한다. 그러나 내 사랑에는 한 점 부끄러움이 없었다. 눈을 가진 이가 아름다움에 빠지는 것은 벌과 나비가 꽃을 찾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일이다. 갓 성인이 된 꽃다운 그는 낯선 만남에 모두가 긴장하고 있는 가운데 홀로 봄바람이 되어 나부끼는 여인이었다.

 그 후로 나는 그를 찾아 헤매었다. 혹여나 우연이 겹쳐 만나지 않을까 많은 살롱에 참가했다. 목적은 이루지 못했지만, 무척 즐거웠음은 부정하지 않으리라. 살롱을 꾸리는 부인이란 희귀한 것과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생물이고, 나는 그 두 가지 모두였으니 내가 어느 살롱에 가나 환영받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말인즉, 나는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사내의 안부인과 안면이 있다.

 놀라운 것은 전국의 살롱을 다 돌아다녔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조우한 것은 고작 두 번이었다는 점이다. 가끔은 그가 경계해 달아나는 게 아닌가 싶은 순간도 있었다. 안타깝게 만남을 놓친 어느 날에는 쓸쓸함에 술과 시와 노래로 감상적인 밤을 보내기도 했다. 나는 한참을 우울해 있었지만, 다음날 참석한 살롱에서 그가 모임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그날은 정말 즐거운 하루였다.

 그토록 애타게 기다린 만남이었다. 아주 사소한 것도 잊을 수 없었다.

 마침내 그와 조우한 것은 사이어드 부인의 소개로 초대받은 티파티에서였다. 테샬리트가의 영애가 새로 맞춘 승마복을 선보이기 위해 준비한 자리였는데, 고르고 골라 어렵게 장만한 승마복처럼 참가자도 아주 까다롭게 골랐기 때문에 영애와 친밀한 사이어드 부인의 살롱이 아니었다면 내게 기회가 돌아오진 않았을 터였다. 그랬으면 나는 한동안 실의에 빠졌을 테지.

 어쨌든 벼르고 별러 조우한 마하는 내 기억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나는 충격에 얼어붙었다. 나는 나 말고 아름다움이 성장하는 이를 본 적이 없었다. 마하는 내 미화된 기억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나는 이미 반해 있었지만, 그 순간 내 심장에는 붉은 꽃이 폈다.

 그날의 티파티가 어땠는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수많은 살롱에 참가하며 어떤 손님과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하는 게 특기인 내게는 지금도 생소한 일이다. 기억나는 건 마하가 플로리안과 비슷한 미소를 짓는다는 사실과 그의 굽이치는 검은 머리가 무척 예쁘다는 것뿐이었다. 수많은 아가씨의 허리를 끌어안고 가슴에 얼굴을 묻어본 지금도 나는 마하의 머리카락을 만져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얼굴을 보자마자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온 과거의 기억과 대조된 마하는 한층 기이했다. 지친 마하라. 세 번 만나 두 번 인사한 사이였다. 내가 그를 모르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나는 내 눈을 믿었다. 마하는 여유롭고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왕이 직접 소집한 파티에서 피곤한 모습을 보일 사람이 아니었다. 비록 꿀처럼 달콤한 미소 속에 무엇이 숨어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결코 웃음을 잃을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드디어 진저리 나는 권태가 떠나가고 있음을 느꼈다. 심장이 두근두근 소리를 냈다. 이로써 명확해졌다. 마하 로즌기프트, 그는 내 인생을 바꿀 키였다. 못생긴 인형들 속에서 살아 숨쉬는 단 하나의 보석. 나는 거침없이 그에게 다가갔다.

 이건 그저 호기심이고 못된 장난이었다. 단순히 컨디션이 나쁜 날일 수도 있다. 아주 못생긴 남자를 봤을 수도 있겠지. 마하가 평소와 조금 다르다고 이상한 일이라고 단정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평소와 다른 모습에 끌리는 순간이란 진정한 사랑의 서막 같은 것. 나는 이것이 운명임을 확신하며 안색이 나쁜 마하의 뒤에 그림자처럼 붙었다.

 마하는 막 샬마르크가의 도련님을 떠나보내는 중이었다. 춤 상대를 요청했다가 퇴짜맞은 청년의 어깨가 축 처져있었다.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마하에게 오늘의 첫 파트너를 부탁하기로 마음먹었다.

 “좋은 밤 되고 계시는지요, 레이디 마하.”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손을 내밀었다. 마하는 놀라지도 않고 태연하게 돌아섰다. 형식적인 미소는 역시 어딘가 평소와 다르다. 그가 내 손등에 입 맞추고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마하는 평소처럼 상냥하게, 그러나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미소를 머금고 채 내게 답했다.

 “절 기억하고 계셨군요.”

 “어디 아프십니까? 안색이 안 좋네요. 예쁜 얼굴에 그늘 지면 안 되지요.”

 “눈썰미가 좋으시군요. 아침부터 줄곧 정장을 하고 있었더니 피로하네요.”

 특별히 귀엽다고 칭찬이 자자한 미소에도 마하는 흔들리는 기색이 없었다.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그림처럼 미소 짓는 그가 원망스러워 괜스레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살롱의 부인들만큼 호락호락하지는 않으리라 예상했지만, 날 이렇게 박대할 수가 있을까. 살며시 내리뜬 하얀 눈꺼풀이 나를 향했다. 마하는 막대 손잡이가 달린 가면을 얼굴로 바짝 들이대며 생긋 웃었다. 벌침처럼 따끔한 미소였다. 거절이 분명한 표정이었지만, 쉽게 물러갈 생각은 없었다.

 “저와 한 곡 추시겠습니까?”

 마하에게 팔꿈치를 내밀었다. 마하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한층 진해졌다.

 “보시다시피 손이 없어서 힘들겠네요. 디히터경께서도 경을 원하는 분과 함께하시는 쪽이 즐거울 테고요.”

 “아리따운 분과 함께라면 어느 때고 즐겁지 않겠습니까. 저는 레이디와 함께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떨리는데요.”

 가면 사이로 그에게 윙크했다. 간지러운 대화를 즐기기 위함이라면 못 이기는 척 팔에 손을 때가 지났음에도 마하는 움직임이 없었다. 자세를 바르게 하고 마하를 마주 보았다. 고요한 미소가 차가운 거절을 말하고 있었지만, 나는 아직 포기할 마음이 없었다.

 “레이디.”

 다정하게 부르자 마하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나는 성큼 그에게 다가섰다. 한껏 부풀린 스커트가 내 다리를 휘감았다. 반사적으로 뒤로 빠지려는 마하의 어깨를 한 손으로 붙들었다. 가엽게도 가녀린 어깨가 긴장해 있었다.

 “협조하지 않으면 정체를 까발리겠어.”

 협박은 아니다. 생감자인지 익은 감자인지 확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마하에게서 떨어지며 주변을 살폈다. 이목을 끈 것 같지는 않았다. 마하는 예쁜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있었다. 아직은 확신할 수 없다.

 “함께 춤추실까요?”

 그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나는 승리를 자축했다.

 손에 들고 있던 가면을 미리 준비한 끈으로 머리에 고정하고 손잡이는 허리춤에 따로 고정했다. 마하는 단장할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기껏 단장한 머리를 망가뜨리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마하를 기다리며 무대를 감상했다. 막 시작된 댄스 타임은 가볍고 빠른 템포로 다 함께 추는 곡이었다. 일반적으로 오늘처럼 주최가 또렷한 파티라면 주최자나 그날의 주인공을 선두로 세우지만, 오늘은 참가자들의 화합을 위한 파티다. 어느새 돌아왔는지 의장을 일부 덜어낸 듯한 차림의 왕이 상석에 앉아 홀을 굽어보고 있었다. 무대를 장식한 것은 젊은 청년들이었다.

 시작은 미리 언질을 받았음이 분명한 한 무리의 아가씨들이었다. 마하에게 말을 걸기 전에 그들이 대형을 이루어 춤을 시작하는 것을 보았다. 파트너가 필요한 대목에 들어서면서 신사들이 뛰어들었다. 그들 역시 아직 파릇한 나이의 젊은이들인 것을 보아 미리 손을 맞춘 게 틀림없었다. 나는 일사불란한 청년들 속에서 플로리안의 얼굴을 발견하고 웃었다. 마하가 그런 나를 곁눈질했다.

 음악에 맞춰 파트너가 바뀌는 시간이 되자 홀로 지켜보던 이들도 하나둘 대형에 끼어들었다. 점점 커지는 원을 보며 갈등하는 사이 마하가 돌아왔다. 신호하기도 전에 그가 먼저 앞으로 나섰다. 나는 재빨리 마하를 따라잡으며 대형에 끼어들었다. 막 파트너 교체가 끝난 참이었다.

 허리를 감싸 안자 자연스럽게 어깨 위로 마하의 팔이 감겼다. 손가락 끝에 느껴지는 코르셋의 단단함과 아찔하리만치 가는 허리가 생생했다. 상상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둘레였다.

 음악에 맞춰 스텝을 밟았다. 마하는 숙련된 솜씨로 리듬을 맞춘다. 대형이 고정되어 사람들은 각자의 파트너에게 집중했다. 나는 내 품에 안긴 이의 희고 창백한 피부와 날카로운 턱선, 그리고 무엇보다 붉은 기가 도는 자줏빛 눈에 정신을 빼앗겼다. 웃고 있는 입가와는 정반대로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였다. 은은하게 독한 꽃향기가 났다.

 나도 모르게 새기 시작한 마하의 깜빡임이 열두 번에 이르렀을 때 마하가 말했다.

 “영식에게 사람을 놀리는 취미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제게 장난을 거실 줄은 몰랐네요.”

 레이스처럼 만들어진 검은 가면 너머로 열세 번째와 열네 번째 깜빡임이 보였다. 경쾌한 박자에 맞춰 춤을 추며 말하는 건 보기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난 만남이 보통 즐거운 것이었어야지요. 틀림없이 응해주실 줄 알았어요.”

 애교 있게 웃어보았지만, 마하는 전혀 반응이 없었다. 미소에도 말에도 반응이 없는 그를 상냥하게 지켜보았다. 흐르는 음악에 맞춰 경쾌하게 앞으로 두 번, 뒤로 세 번, 오른쪽으로 두 번을 뛰고 허리를 감싼 팔을 풀었다. 손을 놓고 뒤로 빠져 안무를 하고 돌아오니 이번엔 마하가 손짓으로 안무하며 내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따로 맞추지 않고도 정연한 군무였다.

  “디히터가의 둘째 아들이 상상 이상의 망나니라는 건 유명한 이야기지요. 부인들 사이에서 굉장히 유명하시더군요.”

 다시 마하의 허리를 붙들고 다리를 앞과 뒤로 흔들었다. 마하는 숙련된 댄서여서 이 안무가 있을 때면 으레 생기는 사고가 없었다. 누군가 파트너의 다리를 걷어찼는지 작게 앓는 소리가 들렸다. 호기심이 들었지만, 그보다는 마하의 딱딱한 표정이 걸렸다.

 “반항아로 지낸 세월이 길어 이름을 잊은 건 아니신지요.”

 눈동자가 맑게 빛나고 입술연지를 듬뿍 바른 아가씨들에게 비하면 창백한 얇은 입술이 빙그레 웃었다. 나는 얼굴 근육을 활용해 한껏 아쉬운 표정을 만들어냈다.

 “서운합니다. 그렇게 어리석어 보였습니까? 제가 조금 자유분방하나 아름다운 로즌기프트의 영애를 앞에 두고 본분마저 잊는 사람은 아닙니다. 오히려 레이디의 눈부신 미모를 영접하니 긴장해서 숨이 다 가쁜걸요.”

 나는 과장스레 심호흡하는 시늉을 했다. 마하는 수수께끼 같은 미소를 머금었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아름다운 분께,”

 한 손을 맞대고 한 걸음 멀어졌다가 빠르게 교차하며 자리를 바꿨다. 마하는 거리가 멀어지자 입을 다물었다. 안무에 맞춰 거리를 좁히면서 평소 춤추면서 보는 걸이보다 가깝게 얼굴을 마주했다.

 “어떻게 그런 실례를 저지르겠습니까.”

 나는 자연스레 자신만만하게 미소 지었다가 마하의 냉랭한 표정에 얼굴을 굳혔다. 안무에 맞춰 바싹 다가붙은 댄서들은 뒤로 한 번 걸음 물러나 파트너와 동시에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았다.

 “당신에 대한 소문은 알고 하는 말인가요?”

 “제 귀는 당신만을 향해 있답니다.”

 다시 허리에 팔을 감자마자 튀어나온 질문에 빠르게 답했다. 마하는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고운 미간에 그늘이 졌다.

 “제 마음을 맞춰보시겠어요?”

 마하는 도발하듯 턱 끝을 치켜들고 눈을 반쯤 내리떴다. 가면의 눈구멍 사이로 긴 속눈썹이 조명을 받아 녹색으로 빛났다. 가면에 날카로운 콧날이 가려진 게 아쉽다. 대형을 맞춰 마하와 함께 빙글빙글 돌았다.

 “디히터씨와 대화하니 즐겁다?”

 “아하?”

 마하는 비뚜름히 미소 지은 입가에 더불어 한쪽 눈썹까지 치켜들었다.

 “디히터씨는 잘생겼다?”

 마하가 코웃음 쳤다. 놀랍게도 마하는 그 소리마저 예뻤다.

 “이것도 아니라면 뭘까요, 이렇게 멋진 사람과 함께 있는데 딴생각을 할 리도 없고.”

 악단의 연주는 주 멜로디를 마치고 다시 후렴구에 들어섰다. 처음 우리가 끼어들었을 때처럼 대형이 다시 원형으로 바뀌었다. 춤을 추던 사람들이 빈자리를 찾아 들어가며 홀이 어수선해졌다, 나는 마하를 이끌고 안쪽의 작은 원에 섰다.

 “힌트 없어요? 다들 나만 보면 뭐라도 더 주고 싶어 하는데 뭔가 알려주고 싶지 않아요?”

 왼쪽 눈을 찡긋거리며 애교를 부려봤지만, 그는 가소롭다는 표정이었다. 정말로 이 사람에게는 미인계가 먹히지 않는 모양이다. 아쉬워라.

 음악이 흐르고 대형이 완성되자 느긋하게 흐르는 선율에 맞춰 사람들은 파트너의 손을 놓고 원의 안팎으로 벌어져 인사를 했다. 이제 남자가 제자리에서 왼쪽으로 한 번, 오른쪽으로 한 번 뒤쪽으로 돌아보듯 스텝을 밟고 왼쪽으로 한 바퀴를 빙글 돌면 그동안 여자가 옆으로 이동해 파트너가 바뀌는 안무였다. 나는 마하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고 놓지 않았다.

 “직접 졸라주지 않으셔도 제 허리는 이미 코르셋이 단단히 조이고 있어요.”

 마하는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속삭였다.

 “아직 답을 듣지 못했어요. 말씀드렸잖아요. 저는 당신만 보고, 당신의 말만 듣고 있답니다.”

 마하의 손에서 힘이 빠지기를 기다려 놓아주었다. 내가 아무 일 없는 듯 안무를 따르자 마하도 안무에 맞춰 추되,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 무도회에 익숙한 귀족들은 돌발상황에도 자연스레 자리를 찾아갔다.

 빠른 템포의 음악과 함께 파트너가 한차례 바뀌자 다시 음악이 느려졌다. 사람들은 새로운 파트너와 인사하고 손을 맞잡았다. 물론 내가 잡은 것은 마하의 손이었다.

 “답을 맞힐 자신이 있으니 큰소리를 쳤겠지요?”

 나는 실없이 웃었다. 자신 같은 건 없었다.

 “마하 로즌기프트가 어서 돌아왔으면 좋겠다?”

 마하가 정색했다.

 “농담이 과하군요.”

 “농담에 이끌려온 분이 하실 말씀은 아니지요.”

 “당신의 놀음에 흔들렸다고 생각하나요.”

 “그럴 리가요.”

 원형 대형을 유지하며 안무가 이어졌다. 나는 마하의 가느다란 허리에 깃털만큼이나 가볍게 손을 얹고 있었다.

 “현명한 로즌기프트가의 장녀분이 저 같은 망나니 귀족에게 어디 눈길이나 주시겠습니까. 제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확인하려 하셨겠지요.”

 마하는 싸늘하게 나를 쳐다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이번엔 내가 정색할 차례였다.

 “디히터 가는 최근 가주 경쟁이 치열하다더군요.”

 “말 돌리시깁니까?”

 무도회장에서 웃는 얼굴은 무기다. 나는 내 무기를 쉽게 내팽개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알기로는 마하도 그랬고 그게 내가 그에게 느꼈던 동질감이었지만, 대화할수록 느껴졌다. 이 사람은 마하가 아니었다. 마하는 이제 자신이 마하라고 주장하는 것에도 질린 듯했다. 그럼 나는 그를 무어라 불러야 할까.

 “장남이 가주 자리를 물려받기는 하였으나 장녀가 납득하지 못해 소란이 끊이지 않는다는 소문이 로즌기프트의 땅에까지 들려옵니다. 실제로는 들리는 것보다 더하지 않겠어요? 영식께서는 어떻게 건강히 지내고 계시는지요?”

 나는 매일 거울 앞에서 한 번쯤은 지어보는 그대로 아름답게 미소 지었다. 살롱에서 만난 부인과 영애들이 항상 보아왔던 바로 그 미소였다. 내가 웃으면 대체로 여인들은 혼이 나간 듯 넋 나간 표정을 했다.

 “겪어보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형제간 다툼이라는 게 그렇지요. 제 누이가 보통내기가 아니어서요.”

 마하, 아니, 이름 모를 그는 지금껏 그래왔듯이 내 미소에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미소는 가시 돋친 장미보다도 아름답다.

 “세력 싸움에 낀 차남 디트리히는 숨도 못 쉬고 그저 목숨을 부지하기 바쁘다던가.”

 그는 농담처럼 가볍게 읊조렸다.

 “하나뿐인 목숨인데 귀히 여겨야지요.”

 시작을 열었던 경쾌한 음악이 끝나고 짧은 정적이 찾아왔다. 곧 상대적으로 템포가 느린 잔잔한 음악이 시작된다.

 “제 누이가 그러더군요. 그 가문에서 가장 능구렁이는 차남 디트리히 디히터일 거라고.”

 마하의 얼굴을 한 그는 평소보다 약간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나는 그제야 마하의 동생을 떠올렸다. 이름이 네만이라고 했던가. 네만 로즌기프트. 그래, 마하에게는 동생이 있었다. 무척이나 사이가 좋은 꼭 닮은 자매라는 소문이 흘러 흘러 들어왔다. 그 존재가 의심될 정도로 목격한 이 하나 없는 동생이었다. 나는 내면의 놀라움이 겉으로 새어 나올까 활짝 웃었다.

 “드디어 제 매력을 알아주셨군요. 제가 보통 뛰어난 게 아니지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습니다.”

 대형은 서서히 흐트러졌다. 춤을 추던 사람들은 파트너를 끌어안고 춤을 출 자리를 찾기도 하고, 인사를 하고 헤어지기도 했다. 대형이 흐트러지자 사람이 빠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빈자리가 생기자 느긋하게 파트너와 춤을 즐기고 싶었던 이들이 새로 중앙으로 들어왔다.

 “당신의 누이도 당신을 똑 닮아 아름다운 분이시죠.”

 그가 코로 웃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네만으로 추정되는 내 파트너는 매혹적으로 미소하며 능숙하게 스탭을 밟았다. 그는 정말 춤을 잘 췄다.

 “개와 닭이 지붕을 사이에 두고 다투는데 고양이가 담장을 넘나들며 개도 닭도 이길 수 없도록 이간질을 하고 있다더군요. 덕분에 개는 제대로 대장 노릇을 하지 못한다고요.”

 나는 하하 소리 내 웃었다.

 “과찬이십니다.”

 그는 내 팔 안에서 투명한 보석 같은 눈을 빛내며 우아하게 웃었다. 본디도 키가 크고 자세가 곧은 여인이었다. 나는 나보다 반 뼘이 높은 그와 눈높이를 맞추고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그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제가 누구라고요?”

 “마하 로즌기프트, 로즌기프트가의 뛰어나고 아름다운 후계자이십니다.”

 나는 기쁘게 선언했다. 네만은 눈부시게 웃고 내 팔을 놓고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홀 바깥을 향해 걸어갔다. 우리가 춤을 추던 자리에는 다른 연인이 흘러든다. 나는 다급히 그를 따라갔다.

 “그래서 이름은 안 알려주실 겁니까?”

 “이미 알고 계시잖아요?”

 네만이 쏘아붙였다. 홀을 빠져나가려는지 문을 향해 곧장 걸어가는 그의 뒤를 따르며 커튼이 쳐진 발코니의 위치를 확인했다.

 “당신 입으로 말해주지는 않으실 겁니까?”

 “생각해보죠.”

 나는 잠시 고민하고 그대로 네만의 손목을 낚아챘다. 휘둥그레진 눈에 기뻐할 새도 없이 네만을 끌고 발코니로 다가가 커튼을 붙들었다. 이대로 놓치면 결코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다. 당신 입으로 말했지요. 디트리히 디히터는 디히터 가문에서 가장 능구렁이라고. 자, 내가 당신을 놓칠까요? 맞춰보세요.

 “어떠십니까, 레이디. 제게 당신의 소중한 것을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움켜쥔 네만의 팔을 느슨히 잡고 커튼을 반쯤 들어 올렸다. 예쁜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나를 바라보던 네만은 곧 손목을 비틀어 빼내고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 했다. 어느새 새침하게 돌아온 표정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했다. 네만이 발코니로 다가서기에 손을 더 높이 들어 사람 하나가 드나 들만한 공간을 만들었다. 네만은 발코니 앞에 서서 나를 돌아보았다.

 “앞으로는 품위 있게 행동하세요.”

 그날 네만의 구두 소리를 아마 평생 잊을 수 없으리라. 나는 그렇게 확신했다.

 페리아 파그메의 밤은 아침까지 이어졌다. 가면무도회는 아침까지 이어졌다. 나는 그날 살아생전 다시는 볼 수 없을 밤하늘을 보았다. 가장 크고 빛나는 별이 떨어진 밤하늘은 다시는 세상을 그토록 아름답게 비추지 못했다.

 왕자 인형은 끈이 떨어진 여자 인형을 무대 뒤에 몰래 숨겼다. 망가져 쓸모를 잃은 여자 인형은 다시는 무대에 설 수 없었지만, 연모하던 왕자 인형과 하나가 되었다. 무대에서는 이야기가, 무대 뒤에서는 현실이 우스꽝스럽게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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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2편

3편






 유하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뭐라 말을 걸어볼 여유도 없이 음식이 나왔다. 회전율이 좋은 가게답게 입가심을 위한 전채 요리는 거의 대기시간이 없었다. 정성스럽게 플레이팅된 핑거푸드는 작품처럼 예뻤고 다시마 말이와 연어가 들어간 월남쌈은 비린내 없이 담백했다. 괜찮은 음식점이었다. 유하가 간단히 코스 설명을 대신했다. 메인 요리를 해치우기까지 우리는 거의 대화하지 않았다. 평소에도 유하는 식사 중에 말이 없는 편이었다. 광어 캐비어, 샐러드, 밤으로 만든 수프, 흑마늘 갈비찜과 봄나물로 만든 김치, 송로버섯이 들어간 대보름 밥으로 이어지는 코스가 차례차례 지나갔다. 맛있는 음식을 먹다 보니 불편한 기분도 차츰 나아졌다.

 차츰 배가 불러오자 대화의 물꼬가 트였다. 유하는 내 섣부른 고백과 사과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대화는 평소와 다름이 없어서 나는 완전히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디저트가 나왔을 때쯤에는 아까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거의 잊어버렸을 정도였다.

 “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잠시 소재가 떨어져 이야기가 멈춘 사이, 유하는 뜬금없이 그렇게 말했다. 상황을 잊어가던 나는 깜짝 놀랐지만, 유하는 담담하기만 했다.

 “연우 씨가 제게 사랑한다고 한 게 무슨 의미인지, 방금 한 사과가 무엇인지 솔직히 모르겠어요.”

 머릿속이 하얗게 비는 느낌이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까.

 “가족으로서 정을 말씀하신 게 아니라면, 저는 남자입니다. 연우 씨도 마찬가지고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목적이 있어서 그런 말을 하실 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유하는 시선을 내려 테이블을 보았다. 일반적으로 예쁘고 귀엽게 꾸며지는 디저트와 달리 시커먼 덩어리가 있다. 접시를 들고 온 점원이 으깬 고구마에 팥앙금을 묻힌 거라고 설명한 음식이었다. 유하는 자기 잔에 차게 식힌 오미자차로 입술을 적혔다.

 “더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그 말에 나는 제일 먼저 안도하고 말았다. 저 입에서 남자라는 말이 나왔을 때, 부드러운 거절이라고 확신하고 있던 탓이었다. 유하는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었다. 어쩌면 나는 현명한 판단을 했던지도 몰랐다. 시간은 걸렸지만, 이 정도로 부드러운 말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래. 급하게 생각하지 마.”

 나는 바로 상황을 마무리 지었다. 유하는 내 눈을 들여다보았고, 나 역시 그랬다. 우리는 말 없이 서로의 심정을 눈에서 읽었다. 곧 유하가 나직하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나는 괜찮다고 답했다.

 그대로 일어나기엔 아직 남은 음식이 있어 우리는 테이블에서 시간을 더 보내야 했다. 대화는 일상으로 옮겨갔고, 자연스럽게 연아와 세하 이야기가 나왔다. 결과적으로 유하와 나를 이어준 두 사람이었다. 내 동생 지연아와 유하의 쌍둥이 동생 임세하는 대학 진학 후 각자 집에서 독립해 동거 중이었는데, 동생 걱정이 많은 형이기는 나나 유하나 마찬가지라 우리 대화에 두 사람이 빠지는 일은 드물었다. 유하가 정기적으로 들러 상황을 봐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으면 허락하지도 않았을 동거였다.

 연아는 독립심이 어찌나 강한지 가족끼리 만나도 자기 이야기는 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유하에게 많은 부분을 의탁하고 있었다. 유하와 세하가 어떤 사인지는 모르지만, 유하가 그 집에 자주 들르는 건 확실했다. 어떤 면으로는 연아와 한집에 살 때보다 유하에게서 듣는 연아 이야기가 더 많은 것 같기도 했다. 유하는 연아가 좋아하는 음식, 싫어하는 음식, 잠버릇과 좋아하는 색과 음악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일부는 나도 알고 있었지만,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유하가 나도 모르는 사실을 알아오는 건 놀라웠다.

 유하는 아무리 바쁜 와중에도 항상 두 사람의 집에 들렀다. 집안일을 돕고 생활편의를 챙기는 모양이었다. 가끔 만난 세하가 불평하는 걸 들어보면 굉장히 세심한 부분에까지 유하의 손길이 닿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게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나 회복 중인 연아를 위해 따로 음식이나 한약을 챙겼다. 과한 참견이 아닌가 싶으면서도 마음이 고마웠다.

 오늘도 유하는 연아가 동아리에 가입했으며 성실하게 참가하고 있다는 완전히 새로운 소식을 가져왔다. 한 달은 지난 일이란다. 유하는 내가 모르는 쪽을 신기해했다. 연아는 정말로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연아는 회화동아리에 들어가 처음으로 그림을 배우며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하는 행위에 사로잡혀있었다. 나는 조만간 연아에게 좋은 그림 도구를 선물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유하가 계산을 하는 사이 나는 먼저 밖에 나와 기다렸다. 저녁이 다 된 길거리에는 사람이 많아졌다. 공간이 없어 사람과 자주 부딪혔다. 유하와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반소매 아래로 맨살이 닿을 때마다 끈적한 느낌이 들었다. 괜히 유하 표정을 살폈다. 특별히 불쾌한 기색은 없었다.

 스쳐 가는 간판에는 하나둘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지만, 우리는 이르게 거리를 빠져나왔다. 유하는 음주를 전혀 하지 않아서 시간이 늦으면 갈 곳이 없었다. 일자리에서 어쩔 수 없이 입에 대는 것 외에는 식사에 곁들이는 와인도 거의 하지 않았다. 다음날을 위해 이르게 헤어지거나 집에 들어가서 담소를 나누다 헤어지는 게 통이었다.

 주차장 입구 간판에도 불이 들어왔고 자리는 꽉 차서 만석이었지만 사람은 없었다. 우리는 바로 차를 찾았다. 서로 들어온 위치와 앉을 좌석이 맞지 않아서 자리를 바꿨다. 안전띠를 매는 동안 다시 한번 팔뚝이 스쳤다. 유하가 닿은 쪽 팔을 자기 쪽으로 당겼다. 의식한 동작인지 의식하지 않은 동작인지 알 수 없었다. 유하는 평소처럼 무덤덤한 표정이었고, 나는 굳어버렸다.

 차 키를 꽂고 시동을 걸 때까지 나쁜 생각에 사로잡혔다. 완곡한 불쾌함의 표현인지 자연스러운 동작인지 알 수 없었고, 여름철 무더위로 인한 불쾌함인지 나와 살이 닿은 것에 대한 불쾌함인지도 알 수 없었다. 유하는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너무 의식하고 있는 거라고 자신을 타일렀다. 나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거의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내가 조용하니 유하도 말이 없어서 귀갓길은 아주 조용했다. 우리는 짧은 인사로 만남을 끝냈다. 나는 올라가다 말고 서서 유하가 탄 차가 골목을 빠져나갈 때까지 뒤를 지켜보았다.

 근 반년이 지났다. 유하와 나는 그 이후로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했다. 유하가 바쁘기도 했고, 나 역시 공부에 매진해야 할 때였다. 게다가 내가 마음이 불편해서 만나자고 하기가 힘들었다. 유하도 만나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연락은 꾸준히 주고받았다.

 󰡔오늘 애들 보러 가요󰡕

 󰡔안부 전해줘. 특히 세하한테. 연아 울리면 각오하라고󰡕

 󰡔그럴게요󰡕

 유하의 메시지는 담백하다. 잡담을 거의 하지 않았다. 사진이나 일상 이야기도 없어서 평소에는 거의 내가 먼저 보낸 메시지로 대화가 시작되었다. 하루에서 이틀 간격으로 갱신되던 메시지가 일주일에서 한 달 간격으로 변한 것은 반년쯤 전부터였다.

 나는 아직도 어떻게 행동할지 결정하지 못했고, 유하는 말이 없었다. 나는 나대로 공부에 매달리고 유하는 회사 일로 바빴다. 유하는 한가할 때가 별로 없었다.

 덕분에 충실한 하반기를 보내며 나는 생각보다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순조롭게 챕터를 넘어가며 가끔 아버지 회사에 들러 일을 도왔다. 돈이 필요했다. 일하면 할수록 서둘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내 소유가 될 회사, 넘겨받을 때가 되었다.

 며칠 전 연아에게서 메시지를 받았다. 정기적으로 만나 함께 저녁을 먹는 날이었다. 나는 졸음에 취한 상태로 스마트폰을 들었다. 연말이 가까우니 저녁을 취소하고 조만간 다 같이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미리 써놓고 아침에 맞춰 보낸 예약 문자 같았다. 뺀질거리며 웃는 세하의 얼굴이 떠올라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 연아를 차지한 건 물론이요, 만만치 않은 성격도 있어 예뻐하기 힘든 녀석이었다. 나는 콧방귀를 한 번 뀌고 수긍하는 답변을 보냈다. 연아가 곧 날짜와 함께 집으로 찾아오라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미리 정해놓고 인제야 통보하는 티가 났다. 유하는 참석하지 않냐고 물었더니 일이 있어 늦을 예정이란다. 그 말은 유하에게도 먼저 말을 했다는 소리다. 연아가 가장 먼저 말을 꺼낸 게 나라니 기분이 상했다. 그래도 티는 내지 않고 알았다고 답했다.

 세하와 연아의 집으로 향하기 전에 먼저 이맘때쯤 만나면 교환하는 연말 선물을 챙겼다. 연아 선물을 최우선으로 고르고, 유하와 세하 선물도 골랐다. 연아 것은 붓 세트, 유하에겐 커프스단추와 넥타이, 세하를 위해선 전부터 고민하던 새 마이크를 샀다. 거기에 먹고 마실 걸 사니 짐이 제법 많았다. 나는 차를 탈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어서 와.”

 내가 마련해준 맨션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누르자 연아가 나왔다. 나는 연아에게 음식이 짐을 떠넘겼고, 연아는 물건을 들고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에서 보이는 실내는 하얀 톤으로 깨끗한 느낌이 강하게 드는 민무늬 벽이었다. 벽지를 선택한 건 연아였다. 처음 봤을 때부터 쭉 병실 같다고 생각했지만, 연아에게 그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물었다. 연아가 좋으면 됐지 병실 같은 게 무슨 상관일까.

 “뭘 이렇게 가져왔어.”

 세하가 내가 가져온 간식과 주류를 들고 말했다. 시선이 백 안에 고정된 걸 보니 반가우면서 하는 소리였다. 나는 세하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함께 사는 멘션은 적당한 개조를 거쳐 현관에서는 집안이 보이지 않는 구조로 되어있었다. 두어 발짝 안으로 들어갔을 뿐인데 시야가 탁 트였다. 전체적으로 하얀 색조에 가구가 적어 남는 공간이 많은 집이었다. 그래도 가구는 전보다 늘었다.

 한쪽 구석에 창을 등지고 서 있는 건 누가 어느 모로 보나 명백한 캔버스였다. 연아가 그림을 배운 뒤로 들여놓은 물건이었다. 위가 천으로 덮여 있어 뭘 그리다 말았는지는 보이지 않았고, 옆에는 그림 도구가 가지런히 정리된 서랍장이 있었다. 거기서 연아의 행복이 느껴졌다.

 책장도 몇 개 늘어났는데 책장마다 책이 꽉꽉 채워져 있었다. 두꺼운 전공 서적이 반, 취미 삼아 모아놓은 것 같은 책과 CD가 반이었다. 제목을 훑고 헤드폰이 같이 걸려있는 걸 확인했다면 이게 세하의 물건이라는 걸 놓칠 수가 없었다.

 입구 근처, 현관을 열지 않으면 아예 보이지 않는 사각에 들어간 부엌에는 사람을 불러 시킨 게 분명한 음식이 예쁜 무늬가 수 놓인 덮개에 가려져 있었다. 매년 비슷한 행사를 거치니 다들 요령이 생기고 있었다.

 집안을 대충 살피고 거실로 향하자 연아와 세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연아는 세하에게 허리를 붙들려 몸을 밀착한 채로 속삭이듯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자세가 더할 나위 없이 자연스러워서 머리가 아팠다.

 “피곤하진 않아?”

 “아무것도 안 했잖아.”

 “그래도 힘들면 말해.”

 “응.”

 연아와 달리 세하는 가까이 다가온 나를 한 번 쳐다보았다. 씩 웃으며 연아에게 입을 맞추는 게 얄미웠다. 솜털 같은 키스였지만, 입술에 남기는 입맞춤이 이성간 교제의 말하는 건 명백했다. 화가 나고 동시에 우스웠다. 어이가 없어 웃어버리니 세하는 곧 포옹을 풀었다. 연아는 조금 느리게 세하의 몸에서 떨어져나왔다. 아쉬운 듯한 동작이었다.

 “요즘 어때. 유하랑 안 만난다며.”

 세하가 말했다. 나를 의식하긴 하고 있었나 보다.

 “유하가 바쁘잖아. 나는 공부하니까.”

 “시험은?”

 “아슬아슬하게 과락. 올해는 분위기 볼 겸 본 거니까 내년에 잘해야지.”

 세하와 잠깐 밀린 이야길 나누는 사이 연아가 쟁반에 물과 쌀과자를 담아왔다. 당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담백한 과자에 꽃봉오리 같은 찻잔에 물을 마시며 우리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림은 할 만해?”

 내가 물었다. 그러고 보면 연아가 자기 입으로 그림 그리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벌써 반년이 넘게 그리고 있으면서 한마디도 제대로 해주지 않는 게 서운했다.

 “재밌어. 이런 게 재밌을 줄 몰랐어.”

 연아는 천으로 덮어놓은 캔버스를 바라보았다.

 “요즘은 정말 그럴듯해. 성적도 괜찮고.”

 “전공 바꿔보는 건 어때? 하고 싶으면 해도 돼.”

 “그 정도는 아냐. 취미 생활 정도가 좋아.”

 허락을 구하고 캔버스를 열어보자 거기엔 풍경화가 있었다. 어디인지 모를 쓸쓸한 들판이었다. 사람도 나무도 동물도 없고 잔디와 땅에서 흔들리는 빛나는 풀꽃만 빛나는 밤 들판. 땅에서 오른 솜뭉치 같은 빛이 하늘의 별이 되고 있었다. 존재하지 않는 적막에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어디야?”

 연아는 고개를 저었다. 실제로 있는 풍경이 아니었다. 사진 모작으로 시작한 연아의 풍경화는 상상 속의 풍경을 그려내는 단계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매진했다고 하나 겨우 반년. 연아에게 그림의 재능이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내가 말을 잃은 사이 세하와 연아는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연아가 그리는 풍경을 놓고 몇 번이나 한 것 같은 대화였다.

 “여행 가자. 가서 보고 그리는 거야.”

 “괜찮아.”

 “가보고 싶은 곳 없어?”

 연아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연아와 변변찮게 놀러 가본 적이 없었다. 어릴 적에는 너무 어려서 멀리 나갈 수 없었고, 나이를 먹은 뒤로는 서먹해졌다. 같이 여행을 가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려면 다 같이 가야지. 둘이선 안 돼.”

 “요즘 세상에 누가 보호자랑 여행을 가.”

 “내가.”

 “괜찮은데…….”

 세하와 둘이서 여행을 둘이 보내느냐 다 같이 가느냐로 말다툼하는 사이, 현관 벨이 울렸다. 말없이 앉아있던 연아가 가장 먼저 일어났지만, 세하가 연아를 막았다. 세하가 유하를 마중 나가면서 소소한 다툼도 일단락이 났다.

 “늦는다더니?”

 “금방 끝났어.”

 세하가 유하의 가방을 들고 들어왔다. 가방만 봐도 유하가 회사에 들렀다가 바로 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유하는 정장 차림에 머리를 깔끔하게 넘긴 모습으로 나타났다. 세하는 유하의 가방을 한쪽에 내려놓고 식탁 위에 덮어두었던 천을 걷었다. 유하가 옷을 갈아입는 사이 우리는 식탁에 둘러앉았다.

 연말의 시작이었다.

 네 사람이 연말에 자리를 함께하게 된 건 이것으로 세 번째. 연아와 세하가 만난 지는 거의 오 년이 흘렀다. 고마운 일도 원망스러운 일도 있었다. 재작년에 세하를 봤을 때는 몹시 화가 났다. 처음에는 연아를 다치게 만든 게 세하라고 오해했고, 그다음엔 갈 곳 없는 분노를 쏟아낼 곳이 세하 밖에 없었다. 보호자로 자처하고 나선 유하는 가여웠지만, 나는 쉽게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형제와 나 사이의 골은 꽤 깊게 새겨졌다.

 겨우 되찾은 즐거운 연말은 다행히 분위기가 괜찮았다. 오랜만에 만나는 유하와 어색하지는 않을까 염려한 것이 무색했다. 우리는 근사한 와인과 함께 식사를 마치고 거실에 둘러앉아 간식을 먹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가 지겨워지면 게임을 꺼냈고 게임이 지겨우면 영화를 틀었다. 밤이 지나고 태양이 오를 때까지 그렇게 보냈다.

 파티 끝난 건 첫차가 출발하기 한 시간쯤 전이었다. 나와 유하는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새벽에 집을 나섰다. 연아와 세하가 차를 세운 주차장까지 마중을 나왔다.

 “조심해서 들어가. 들어가면 연락하고.”

 “들어가. 갈 테니까.”

 “본격적으로 배워보고 싶으면 꼭 말해. 지원해줄게.”

 “괜찮아.”

 유하가 끌고온 차를 내가 운전했다. 유하는 아직도 와인의 여파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저녁 이후로 술은 전혀 입에 대지 않았는데도 피곤해 보였다. 단순히 그동안의 피로가 터진 여파일 수도 있지만, 유하에게 맡기긴 위험했다. 저번에 얻어먹은 게 있으니 그 대가라며 유하를 뒤로 밀었다. 유하는 뒷자리를 거부하고 조수석에 앉았다.

 유하는 조수석 의자 등받이를 뒤로 기울이고 등을 기대자마자 눈을 감았다. 저렇게 피곤한 얼굴을 하고선 무슨 운전을 하겠다고. 세하와 연아가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시동을 걸었다.

 “저번에 말씀드린 거 있잖아요.”

 유하는 눈을 감은 채 말했다.

 “그 무대 감독 일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유하가 찾아와 털어놓은 사연이었다. 꼭 환심을 사둬야 하는 유명 무대 감독이 자길 건드린다는 이야기. 갑자기 이야기를 꺼내는 연유가 짐작이 갔다.

 차는 부드럽게 굴러 주차장을 나왔다. 나는 큰길을 향해 핸들을 꺾었다. 날은 아직 어슴푸레하고 어두워서 전조등을 켰다. 밝기만 보면 완전히 밤이었다.

 “성희롱으로 고소당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동안 조용했는데 누가 피해자를 모았나 봐요. 수가 꽤 된다네요.”

 유하는 내게 하는 말인지 혼잣말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나직하게 말했다. 평소보다 목소리가 낮았다.

 “그런데 듣자 하니 고소 준비에 들어간 게 올 팔월이라고 하던데요.”

 앞에 보이는 신호가 빨간 등으로 바뀌었다. 나는 고민 끝에 액셀을 밟았다. 좌우에는 사람이 없었고, 이 길은 한 번 신호에 걸리면 벗어날 때까지 쭉 신호에 걸리게 되어있었다. 시야가 시원하게 흘러갔다.

 “타이밍이 안 좋았구나. 너무 속상해하지 마.”

 유하는 잠이 들었는지 말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자라고 말을 아꼈다. 다음 신호등은 파란색이었다.

 “괜찮아요.”

 유하는 그렇게 말하고 집에 도착하기까지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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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얼흥얼 흘러나오는 콧노래에 사뿐사뿐 발걸음이 춤을 추었다. 공기를 따라 흐르는 음악 소리에 먼지떨이도 춤을 춘다. 보랏빛으로 물든 발자국. 콧대 높은 아가씨의 갈색 드레스를 하얀 삽살개가 헐레벌떡 따라갔다. 색색의 꽃망울이 산들산들 고개를 흔들고, 육중한 책장 신사도 무거운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날. 먼지 한 톨 없는 장식장에서 하얗게 반짝이는 식기들이 산책을 나섰다. 몸가짐을 단정히 한 마른 수건은 오늘 하루 집안의 메이드. 온 사방을 쏘다니며 집안 식구들을 보듬었다. 마당에는 따스한 햇볕에 몸을 맡긴 포근한 친구들이 일광욕을 즐기고 빠끔히 열린 창문 너머로 화분이 손을 내민다.

 에리카 그라우플뤼겔, 아니, 이제는 에리카 허츠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은 아름다운 여인은 흥에 겨워 절로 흥얼거리며 즐겁게 지팡이를 흔들었다. 지팡이가 향하는 방향에 맞춰 집안 물건들이 일제히 덩실거렸다. 빛나는 가구는 빗자루와 먼지떨이를 반기지 않는 게 틀림없었지만, 깨끗한 술을 찰랑거리는 춤꾼들은 지휘에 맞춰 움직이고 돌기를 반복했다. 장소를 가리지 않고 집 안 구석구석을 휘젓는 마른걸레들만이 먼지를 조금 끌어안았다. 집안 어디에서도 찾기 힘든 먼지를 찾아낸 용사들은 먼지가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몸을 말아 허공을 날았다.

 장식장을 빠져나온 식기들이 단체 목욕을 마치자 에리카는 손을 높이 들어 지팡이를 휘둘렀다. 음악이 멈췄다. 일을 끝낸 청소 용구가 집을 찾았다. 찰칵찰칵 소리를 내며 사방에서 창문이 눈을 감았다.

 에리카가 냉장고를 향해 손짓하자 음식물이 튀어나왔다. 주르륵 식탁 위에 늘어선다. 에리카는 잠시 재료를 가늠하더니 빙긋 웃었다. 차르륵 식재료들이 예쁘게 자리를 찾아갔다.

 날은 아직 화창하고 마당에 나선 에리카는 외출용 재킷을 걸쳤다. 뒤를 따라 나온 집요정이 자글자글한 손가락을 뻗자 햇볕을 쬐던 침구가 뿅 사라졌다.

 챙 넓은 모자가 뜨거운 햇볕을 가려주었다. 실크 블라우스는 옅은 분홍색, 상아색 스커트가 종아리 근처에서 살랑거린다. 넉넉하게 엉덩이 근처까지 내려오는 재킷은 최근 에리카가 즐겨 입는 포인트 아이템이었다.

 에리카가 발걸음도 가볍게 산책을 나선 곳은 머글의 장터였다. 오가는 차와 사람들로 거리는 소란스럽다. 아이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달려가기도 하고 장사치가 뭔가 공연을 벌이기도 했다. 에리카는 여상하게 머글들 사이를 지나쳤다. 옷차림도 태도도 자연스러워 아무도 어색해하지 않는다. 에리카는 한가득 꽃이 걸린 가게에 멈춰선다. 꽃집 주인이 에리카를 알아보고 반갑게 맞이했다. 오늘도 에리카는 마음에 드는 꽃을 골라 한 통씩 주문했다. 깊이 절을 하는 주인에게 배달을 맡기고 가뿐히 집으로 돌아온다.

 저녁이 오기까지 남은 시간은 두 시간 남짓. 에리카는 식탁과 거실을 꾸미며 꽃을 기다렸다. 삼십 분 정도가 지나고 꽃을 실어온 운전사에게 팁을 주고 나니 본격적으로 지팡이를 휘두를 때가 왔다.

 딩동. 익숙한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열자 단 하나뿐인 기사가 에리카를 보고 웃었다. 본인도 의식하지 못한 희미한 미소였다. 에리카는 만면에 행복을 띄우고 그를 맞았다.

 “다녀왔어요.”

 “어서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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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망의 11월 첫 번째 주말이 밝았다. 새파란 하늘 아래 붉은 사자와 녹빛 뱀 깃발이 휘날렸다. 관중석은 경기를 기다리는 인파로 소란스러웠다. 학생은 물론 교수까지도 승리를 점치며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한쪽에서는 짤랑거리며 내깃돈을 걷고, 한쪽에서는 고소한 냄새와 함께 누군가 꼬치를 팔았다. 엄숙한 얼굴을 한 교수들이 기꺼이 동전을 내니 분위기는 한층 더 달아올랐다.

 빨간 응원 도구를 두른 학생들이 목소리를 맞춰서 구호를 읊자 질세라 슬리데린 학생이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초록 광선이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 나간다. 광선은 뱀으로 변해 허공에서 붉은 사자와 뒤엉켰다. 뱀이 사자의 목을 조이자 사자가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붉은 광선이 하늘로 올랐다. 이번엔 사자가 뱀의 몸체를 날카로운 발톱으로 짓밟았다.

 관객석에서 기 싸움이 치열한 가운데, 경기장 안쪽에서는 선수들끼리 신경전이 한창이었다. 곧 입장 시각이라 각 팀 주장의 인도에 따라 줄을 서는 중에도 양 팀 선수들은 서로를 견제하기 바빴다.

 “벌써 겁먹었냐? 그래가지고 어디 10점이나 넣겠어?”

 “뒤통수 잘 간수해. 내 블러저에는 눈이 달렸거든.”

 슬리데린 추격꾼 스콧 홈이 으스대자 그리핀도르 몰이꾼 루시아 베이커가 위협적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루시아 옆에 서 있던 슬리데린 몰이꾼 게일이 콧방귀를 뀌었다. 루시아가 눈을 부라리자, 그리핀도르 수색꾼 에이든 알빈이 루시아를 도닥였다.

 “자자, 그만 싸우고, 이제 입장이야. 다들 준비됐지?”

 그리핀도르 주장 안젤라 에밋이 박수로 시선을 끌었다. 슬리데린 팀원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그리핀도르 선수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불타는 눈을 한데 모았다. 선수들의 뜨거운 시선을 받은 안젤라도 굳세게 빗자루를 움켜쥐었다.

 “그동안 연습한 대로만 하면 돼. 이기자!”

 그리핀도르 선수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팀에 대한 신뢰와 한데 모인 마음이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과 용기로 끓어오른다.

 그리핀도르 팀이 결의를 다지는 동안 슬리데린 주장 알버트 쿡은 늘어선 선수 하나하나 찾아가 말을 건다.

 “상대는 그리핀도르야. 반드시 이겨야 해.”

 “걱정 마. 퀘이플에 손도 댈 수 없게 해주지.”

 알버트와 대화를 나눈 선수에게선 이때까지의 느슨한 불안감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꼭 이기고야 말겠다는 순수한 열정만이 피어올랐다. 요란스러운 구호도 기합도 없지만, 도닥이는 알버트의 손에서 기숙사 전체가 응원하고 있다는 기운을 전달받은 슬리데린 팀은 소리 없이 전의를 가다듬었다.

 경기 시작을 알리는 나팔이 울리고 호그와트 마법학교 기숙사 대항 퀴디치컵이 시작되었다.

 오늘 시합을 치르는 그리핀도르와 슬리데린 기숙사가 나란히 경기장에 입장했다. 선수들이 보이자 관중석의 열기는 한층 뜨거워졌다. 함성과 휘파람, 북소리, 작은 나팔소리 같은 것들이 어우러져 경기장을 가득 메웠다. 갓 입학한 일학년부터 N.E.W.T.를 앞둔 7학년까지 전교생이 하나가 되어 하나가 되어 외치고 있었다.

 그리핀도르 추격꾼 오웬 허츠는 함성 속에서 잠시 자신을 잃는다. 입학하기 전부터 동경해왔던 것이 드디어 제 것이 되었다는 실감이 났다. 옆에 서 있던 그리핀도르 추격꾼 롤랜드 닉슨이 그런 오웬의 등을 툭 쳤다.

 “정신 차려. 시합 시작하잖아.”

 오웬은 퍼뜩 정신을 붙들었다. 방금까지 주변에 서 있던 선수들은 모두 빗자루를 타고 날아올라 준비된 진영을 갖추고 떠 있었다. 롤랜드가 땅을 박차자 남은 건 오웬뿐이었다. 주장 안젤라가 어서 올라가라고 손짓했다.

 오웬은 황급히 날아올라 제자리를 찾았다. 지나는 길에 스쳐 간 그리핀도르 몰이꾼 키티 포스터와 하이파이브도 했다. 심판이 하늘 높이 퀘이플을 던졌다. 삐익. 날렵한 그리핀도르 주장 안젤라가 공을 낚아챘다.

 슬리데린 주장이자 몰이꾼인 알버트가 씩씩거리며 방망이를 꺼내 들었다. 그 사이에 안젤라 양옆으로 슬리데린 추격꾼 둘이 바짝 몸을 붙였다.

 안젤라는 롤랜드에게 공을 넘기고, 롤랜드는 슬리데린 골을 향해 쇄도했다. 롤랜드 앞에는 아직 방해꾼이 없지만 만약을 대비해 오웬도 거리를 두고 뒤를 따랐다. 아래로 스치는 관객석에서 숨을 죽이고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항상 고고하던 교수님이 입을 헤 벌리고 있었다. 친구들은 찾지 못했지만, 사람들 표정이 선명하게 보여서 오웬은 그만 한눈을 팔고 말았다.

 “골인, 골인입니다. 그리핀도르의 첫 득점!”

 한 박자 이르게 터져 나온 환호성에 오웬은 다시 시합으로 돌아왔다. 롤랜드가 빗자루를 빠르게 회전시키며 묘기 비행을 하고 있었다.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게 치밀어 올랐다. 오웬은 롤랜드를 향해 함성을 질렀다. 일시에 선수들의 시선이 오웬에게 몰렸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슬리데린 파수꾼 할리 웹스터가 퀘이플을 슬리데린 진영으로 던졌다. 슬리데린 선수들은 하나같이 화가 나 있었다. 몰이꾼 두 사람이 방망이를 위협적으로 휘둘렀다. 블러져가 없으면 사람 머리라도 때릴 기세였다. 한 사람이 휘두른 방망이가 붕 소리를 내며 오웬의 팔뚝을 스쳐 갔다.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리핀도르 팀도 얌전히 당하고 있지는 않았다. 몰이꾼치고는 체구가 작지만, 눈썰미가 좋은 키티가 블러져를 향해 날아갔다. 퀘이플을 든 슬리데린 추격꾼 제레미 비숍은 거구와 어울리지 않게 곡예에 가까운 비행을 하며 추격을 따돌렸다. 오웬은 뒤를 바싹 따라붙으며 압박했다.

 제레미가 그리핀도르 골대를 향해 돌진하며 퀘이플을 들어올린 순간, 롤랜드가 진로를 가로막고 키티의 방망이가 불꽃을 튀겼다. 갑작스러운 진로 방해와 매섭게 날아든 블러져 탓에 제레미 손에서 퀘이플이 흘러내렸다. 잽싸게 밑으로 비행해 들어간 것은 오웬이었다. 작은 함성이 터졌다.

 그때였다. 바람을 일으키며 회전한 오웬의 눈에 관객석에 앉은 한 소녀가 들어왔다. 생머리를 팔꿈치까지 늘어뜨린 일학년 여자아이였다. 지혜를 앙망하는 파란 망토를 두르고 해맑게 웃고 있었다.

 오웬은 빗자루를 가슴 쪽으로 강하게 잡아당겼다. 수직으로 반원을 그리며 뒤엉킨 선수들을 피하자 블러저가 날아들었다. 뒤집힌 위아래를 바로잡으면서 고도를 높이자 쇠공에 스친 망토 자락이 펄럭였다.

 텅 빈 골문 앞을 자유롭게 날아 퀘이플을 던졌다. 마지막 순간 블러저가 달려들었지만, 이미 골은 들어간 뒤였다. 오웬은 빗자루를 놓고 팀원들 사이를 가르며 손바닥을 마주쳤다. 관객석 안쪽에 걸린 점수판이 20:0으로 바뀌었다.

 아까는 친구만 쳐다보고 있던 소녀가 오웬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기된 뺨을 한 친구가 머리 위로 박수를 치고 있었다. 노란 망토는 자애의 상징. 오웬은 두 소녀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레번클로의 에리카 그라우플뤼겔과 후플푸프의 카리나 벨리니였다. 퀴디치에 관심이 많은지 제 기숙사 경기가 아닌데도 신이 나서 응원을 하는 아이가 카리나, 웃는 낯으로 열심히 경청 중인 아이가 에리카였다. 고학년생들은 별 감흥이 없는 듯했으나 삼학년 남학생들은 기숙사 배정식 때부터 귀엽게 생겼다며 유명했다. 그리핀도르에는 자랑할 게 없어 신입생과의 인맥을 자랑하는 사람이 나올 정도였다.

 퀘이플은 다시 슬리데린 손에 넘어가 있었다. 추격꾼 조앤 쇼가 작은 몸짓과 날렵한 비행으로 순식간에 골문에 접근했다. 그리핀도르 팀이 막아설 시간조차 주지 않는 빠른 공격이었다. 키티가 방망이를 휘둘렀다. 블러저는 조앤의 옷자락조차 스치지 못했다. 퀘이플이 골대를 향해 날아갔다. 파수꾼과 공의 정면 대결. 그리핀도르 파수꾼 세실리아 윌록은 훌륭하게 막아냈다.

 세실리아가 던진 퀘이플은 멀리 있던 안젤라에게 닿았다. 추격꾼 세 사람이 주거니 받거니 공을 돌려가며 공을 돌린다. 덩치 큰 슬리데린 선수들이 몸으로 진로를 가로막았다. 롤랜드가 높게 띄워 올린 퀘이플이 커다란 포물선을 그렸다. 오웬이 가로막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뒤쪽에서 대치하던 안젤라와 스콧이 퀘이플을 향해 쇄도했다. 몸싸움하기엔 덩치 차이가 심했지만, 두 사람의 손끝은 거의 동시에 공에 닿았다. 운명을 가른 건 슬리데린 몰이꾼 게일 시드니가 휘두른 방망이였다.

 “그리핀도르 득점. 30대 0으로 앞서갑니다!”

 주장 안젤라는 기쁜 나머지 빗자루에서 물구나무서기를 하는 묘기를 선보였다. 그리고 오웬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양손으로 입을 막는 에리카를 발견했다. 골 하나가 들어갈 때마다 방방 뛰는 카리나에 비하면 미적지근한 반응이었다.

 오웬은 그 위를 지나쳐 멈춰섰다. 시야 안에 안정적으로 두 사람이 들어왔다. 카리나는 공을 쫓아 움직였지만, 에리카의 고개가 텅 빈 제 빗자루를 쫓아왔다. 오웬은 경기장을 넓게 살피는 척하며 그 모습을 눈에 담았다.

 퀘이플이 허공을 날자 슬리데린이 덤벼들었다. 몰이꾼의 거대한 덩치가 시야를 가렸다. 오웬은 어깨너머로 겨우 경기 정황을 살필 수 있었다. 에리카는 두툼한 팔뚝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각각 그리핀도르 선수들에게 하나씩 슬리데린 선수들이 붙어 있었다. 공을 잡은 건 슬리데린의 제레미였다. 안젤라가 몸싸움을 벌였지만, 제레미는 퀘이플을 단단히 쥐고 질주했다. 제레미가 그리핀도르 진영 깊숙이 파고들었다. 골문 앞에서 대기하던 파수꾼이 둘을 마중 나왔다. 안젤라의 손이 아슬아슬하게 퀘이플에 닿았을 때, 제레미는 공을 던졌다. 공은 정면이 아닌 뒤로 날아갔다. 날쎈 제비처럼 퀘이플을 낚아챈 조앤이 안젤라와 파수꾼 세실리아를 추월해 공을 던져넣었다. 슬리데린 관객석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점수판은 30 대 10으로 바뀌었다.

 슬리데린 선수들은 작전을 일대일 수비로 바꿨는지 자리를 옮기는데도 끈질기게 따라왔다. 오웬은 이번엔 조금 앞으로 나갔다. 가드로 나온 슬리데린 몰이꾼은 경기장 쪽을 날고 있어서 에리카와 카리나가 보였다. 카리나가 에리카에게 뭔가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에리카는 적극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대꾸를 하기도 했다.

 그리핀도르 골문에서 나온 퀘이플은 안젤라가 이어받았다. 슬리데린은 안젤라를 양쪽에서 압박하며 공격적으로 몰아붙였지만, 안젤라는 영리리하게 따돌렸다. 갑자기 허공으로 치솟다가 급하강한 것이다. 추락하는 듯한 모양에 관객석에서 비명이 터졌다. 안젤라의 특기였다.

 성공적으로 가드를 따돌린 안젤라는 롤랜드에게 공을 넘겼다. 뒤따르는 가드를 향해 몰이꾼들이 블러저를 쏘았고, 경기는 다시 순조롭게 그리핀도르의 승리를 향해 흘렀다. 롤랜드는 가드가 다가오자 바로 안젤라에게 패스했고, 안젤라는 그걸 곧장 오웬에게 던졌다.

 오웬 옆에 있던 가드는 중간에 롤랜드에게 날아가 아직 돌아오지 못했다. 그리핀도르 선수를 막느라 흩어진 탓에, 슬리데린 진영은 골문까지 일직선으로 비어있었다. 결정적인 기회였다. 오웬이 공을 떨어뜨리지만 않았으면 그리핀도르가 10점을 더 얻었을 것이다.

 “허츠!”

 “오웬!”

 그리핀도르 팀원들이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관객석을 보고 있던 오웬은 퍼뜩 정신을 차렸지만 퀘이플은 이미 오웬을 때리고 떨어지는 중이었다. 슬리데린 선수, 조앤이 잽싸게 공을 낚아챘다. 공을 둘러싼 치열한 다툼 끝에 공은 슬리데린 골대를 치고 날아갔다. 자기 실수에 놀란 오웬은 창백해져 있었다.

 오웬의 미스에도 불구하고 경기는 그리핀도르 우세로 진행되었다. 점수가 110점까지 벌어졌으니 그리핀도르 학생은 선수와 관중을 가리지 않고 축제 분위기였다. 오웬은 더는 실수하지 않았다. 카리나는 그리핀도르 팀이 얼마나 실력이 좋은지, 슬리데린이 무얼 실수했는지 에리카에게 설명했다. 에리카는 친구의 설명 덕분에 경기를 즐길 수 있었다. 때로 손에 땀을 쥐기도 했다.

 그리핀도르의 압도적인 승기에도 불구하고 경기는 슬리데린의 승리로 끝났다. 승패를 가른 건 골든 스니치였다. 경기 종결을 알리는 황금빛 공은 슬리데린 수색꾼 키에르 피클의 손에서 날개를 떨었다. 난데없는 승리에 슬리데린 선수들도 기쁨을 바로 느끼지는 못했다. 그들은 망토를 벗어 던질 정도로 기뻐했다. 경기 종료 휘슬이 울렸을 때 만세를 불렀던 그리핀도르 선수들은 말이 없어졌다.

 선수대기실로 돌아온 건 그리핀도르팀이 대부분이었다. 슬리데린은 놓고 간 물건을 챙겨 떠났다. 수색꾼 피클은 슬리데린의 영웅이 되어 들려 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세실리아가 한숨을 쉬었다. 안젤라가 수색꾼인 에이든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괜찮아. 다음엔 이길 거야.”

 롤랜드가 말없이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뒤를 따르듯 에이든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키티와 루시아, 몰이꾼 콤비는 가볍게 인사를 하고 나갔다. 오웬의 첫 퀴디치 경기가 이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천막을 열고 들어온 건 슬리데린의 게일이었다. 중간부터 계속 오웬을 가드를 맡았던 덩치는 침울한 그리핀도르 선수들을 보고 씩 웃었다. 그래도 시비 걸 생각은 없는지 조용히 자기 짐을 챙긴다. 천막 틈새가 살짝 벌어졌다. 게일을 제외한 학생들, 그리핀도르 선수 안젤라, 세실리아, 오웬은 동시에 그쪽을 쳐다봤다. 조그만 머리통이 천막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계십니까.”

 머뭇거리며, 그러나 낭랑한 목소리로 카리나가 인사했다. 게일은 자기 물건을 챙겨 나갔다. 카리나가 천막 안으로 들어오며 게일과 스쳤다. 밖에서 ‘엄마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카리나는 도로 천막을 나갔다. 카리나가 게일에게 화내는 목소리가 들렸다. 오웬은 화끈거리는 뺨을 손으로 가리며 혹시라도 팀원들에게 들킬까 돌아섰다. 안젤라가 오웬을 쳐다보았다. 오웬은 빗자루를 들고 후다닥 대기실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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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2편

3편




 예상은 했지만, 조금도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행동에 웃음이 나왔다. 기껏 이인분 아침 식사를 준비했는데 손도 대지 않고 가버리다니 매정한 녀석.

 「시간이 늦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유하가 남기고 간 쪽지였다. 아침 식사를 준비해놓고 잠시 눈을 붙인다는 게 깊이 잠들어버렸다. 아직 여덟시도 되지 않았는데 어디가 늦었다는 거야. 한 시간도 잠들어있지 않았는데 사라진 걸 보면 눈을 뜨자마자 부리나케 챙겨서 나간 듯했다. 불륜 현장도 아니고 이렇게 달아나는 게 더 수상해 보인다고는 생각도 못 했겠지.

 ‘요령이 없다니까.’

 쪽지를 내려놓고 기지개를 켰다. 오늘도 피할 수 없는 하루가 시작되었다. 가족도 사랑하는 사람도 만날 수 없지만, 사랑은 그리움으로 한층 깊이를 더해가겠지.

 정확히 사흘이 지난 후 점심, 유하에게서 전화가 왔다. 평소보다 조금 늦다. 바빴던지, 연락하기가 어려웠던 거겠지. 전화 한 통에 만감이 교차했다.

 「안녕하세요. 저 유하예요.」

 수화기를 들자마자 의미 없는 자기소개가 날아왔다. 평소보다 목소리가 가라앉은 게 아무래도 바빴던 모양이다.

 「오늘 저녁에 시간 되세요?」

 스케줄을 확인한다. 아슬아슬하게 저녁이 비었다. 선배가 저녁에 못 나온다고 했을 때는 야속하게만 느껴졌는데 이제 보니 천만다행이었다. 입가가 간지럽다.

 “마침 딱 저녁이 비네. 밥 사려고?”

 「네. 언제쯤 찾아뵈면 될까요?」

 유하는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그런 목소리마저 귀엽게 느껴지는 건 동생 연아에게 익숙해진 탓일지도 몰랐다. 그런 점은 참 많이 닮았다. 아마도 그게 원인이었다. 유하를 처음 만났을 때 느껴지던 묘한 친근감의 정체. 따져보면 생긴 것부터 재능, 취미, 가치관까지 하나도 닮은 게 없는데도 어쩐지 낯설지가 않았다.

 “어디서 볼래?”

 「제가 찾아갈게요.」

 “운전할 거야?”

 「네.」

 친동생이 연상되는 연하를 상대로 욕정 하는 건 금기된 사랑을 꿈꾸고 있었다는 증거일까. 이유야 어찌 되었든 동생이 아닌 다른 사람을 원하게 되었으니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일까. 거절당해 받은 상처를 이런 식으로 외면하고 싶은 걸지도 몰라.

 의미 없는 상념이 유하의 목소리와 함께 수신이 끊어진 휴대폰 근처를 맴돌았다. 이러지 않으려고 공부에 매달렸는데 사랑은 쉽게도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놓는다. 연우는 떨떠름하니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한 곳에 전화해보고, 세 사람에게 이메일을 돌리면 일단 오늘 할 수 있는 건 끝난다.

 멍한 상태로 다이얼을 돌렸다. 신호음이 흘러가는 동안 또 다른 상념, 후회가 밀려든다.

 지난겨울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삼십여 년간의 후회를 한꺼번에 해결하기라도 하려는 듯 사건이 몰아쳤다. 여린 동생들 앞에서는 내색하지 못할 무거운 죄책감이 어깨를 눌렀다. 그리고 그럴 때면 그 연약한 소년에게 기대고자 하는 자신이 괘씸해서 그게 또 견딜 수가 없다.

 온전히 자책의 물결에 휩쓸리기 전에 신호가 끊어졌다. 다이얼 화면으로 돌아온 휴대폰을 들고 이번에는 문서 어플을 켜서 이메일 초안을 작성한다. 세 사람이 아니라 네 사람에게 보내게 되었지만, 결과적으로 하는 일은 비슷했다. 조그만 액정을 붙들고 문서를 작성하는 게 답답하긴 해도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점심에서 저녁이 되기까지 여섯시간 남짓. 하루가 너무 길었다. 시곗바늘이 어찌나 느리게 움직이는지 직접 돌려놓고 싶을 정도였다.

 이메일 네 통을 보내는 일은 순식간에 끝났다. 말을 고르고 고르느라 문서를 작성하는 데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그나마도 며칠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던 내용이라 문장만 다듬으면 됐다. 한 시간 남짓 걸려 본문을 작성하고, 고스란히 옮겨 전송 버튼을 누르자 더는 할 게 없었다. 유하가 아무리 일찍 퇴근해도 앞으로 다섯시간 안에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결국, 공부를 해야 했다. 유하와 약속을 잡아둔 상태로 공부하는 건 고문에 가까운 일이었다. 글자가 하나도 뇌리에 들어오지 않아서 몇 리터씩 물을 마시고, 그만큼 화장실에 드나들었다. 방금 읽은 문장이 기억나지 않아 다시 읽기를 반복하다 보니 책이 넘어가질 않았다. 챕터와 과목을 바꿔보고 바람도 쐐봤지만, 결국 유하에게 연락이 올 때까지 계획한 진도를 마치지 못했다.

 유하는 약속대로 차를 끌고 나타났다. 평범한 청바지에 반소매 차림이었다. 편한 차림인데도 주름 없이 빳빳하게 당겨진 티와 몸에 잘 맞는 바지가 깔끔한 인상을 준다. 낮이 길어져 저녁임에도 쨍쨍한 태양 아래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서 있는 모습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유하는 전속 운전기사마냥 문을 열어주었다. 심지어 앉으라고 열어준 좌석은 운전석 뒷자리. 이런 것도 직업병이라면 직업병일 것이다. 괜찮다고 옆에 앉겠다고 하자 뒤늦게 깨달았는지 서둘러 차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어차피 같이 타야 한다는 건 까맣게 잊은 모양이다.

 차를 타자마자 서둘러 출발한다. 창밖으로 익숙한 건물들이 멀어졌다. 말을 걸어도 되겠지만 고요한 게 마음에 들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같은 공간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 갈망이 채워진다. 보고 싶었다. 네가 보고 싶었다. 꾹꾹 눌러 담았던 그리움이 새봄을 맞은 눈처럼 녹는다. 조바심이라는 발자국에 검게 물들었던 마음이 조금씩 본래 색을 되찾아간다. 사랑은 상대방의 마음도 현재 상황도 개의치 않고 제멋대로였다.

 차가 멈춘 곳은 젊은 사람들이 많이 오가기로 유명한 번화가였다. 능숙하게 주차장을 찾아 핸들을 꺾는다. 유료 주차장이라는 간판이 높게 솟아있었다.

 “조금 걸어야 해요.”

 유하가 말했다.

 금요일 오후지만 시간이 일러서인지 자리가 넉넉했다. 유하가 예상보다 일찍 도착한 덕에 저녁식사를 하기에는 어정쩡한 시간에 도착한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유하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주차장을 빠져나와 내게 물었다.

 “바로 식사하긴 그러니 카페라도 들어갈까요?”

 오랜만에 느긋하게 마시는 샴페인이 끌리는 날이었지만, 기꺼이 유하를 따라간다. 저녁 식사도 할 수 없는 시간에 여는 바가 없을뿐더러 유하가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

 친구들과 만날 때 자주 오는 거리였지만, 이곳도 많이 변했다. 고시 준비한다며 틀어박혀 있는 동안 공사하는 것조차 본 적 없는 대형 빌딩이 잔뜩 들어섰다. 특히 지하철역 위에 들어선 대형 영화관은 뜻밖의 장소였다. 묘한 기분이 들어 간판을 쳐다보고 있으니 유하가 흘끔 쳐다보았다.

 “영화 보실래요?”

 그동안 놓친 영화가 몇 편이더라. 영화를 특별히 즐기는 건 아니지만, 친구들과 대화하기에 이만큼 무난한 소재가 없는지라 기대작은 반드시 톡방에 올라왔다. 개중에는 간절히 보고 싶었던 것도 있는지라 가끔 기분을 바꾸고 싶은 날에는 핑계 삼아 보러 간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아니야. 어디 들어가서 앉자.”

 이 분위기에서 유하랑 영화를 보러 갔다간 내용이 귀에나 들어올지 모르겠다. 유하도 예의상 물어봤을 뿐인지 별말 없이 영화관이 있는 건물을 지나쳤다.

 골목으로 파고든다. 계획되지 않은 도시가 대개 그렇듯이 이 거리도 작은 건물들 사이로 집과 가게가 엉켜 있다. 사람들은 거미줄처럼 엉킨 골목길 사이를 재주 좋게 누비며 놀이를 즐겼다. 미로 같은 길거리를 헤매며 새로운 풍경을 찾아내는 걸 즐기는 이들도 있을 정도다.

 유하는 앞서 걸으며 길을 안내했다. 거세게 흐르는 강물 같던 인파가 잔잔한 시냇물로 변한다. 멈춰선 유하가 두 블록 떨어진 건물 간판을 가리키며 예약해준 식당이라고 했다. 한식 코스 요리 ○○반상. 유하다운 메뉴 선정이었다.

 바로 옆에 있는 조그만 카페로 들어갔다. 유하는 메뉴판 앞에서 생각에 잠겨있었다. 뒤에서 보니 새삼 자세가 곧다. 상의 실루엣으로 언뜻언뜻 비치는 척추가 곧게 직선을 그리고 있었다.

 “여긴 내가 살게.”

 “아뇨. 제가 부탁드린 거니까 제가 낼게요.”

 “밥 사는 사람이 차까지 내는 거 아니야.”

 유하는 더 말이 없었다. 먼저 앉으라는 뜻으로 유하의 어깨를 두드렸다. 유하는 못내 불퉁하게 우유 아이스크림을 주문하고 물러났다. 식전에 달콤한 간식을 먹는 게 의외였다. 그러고 보니 밖에서 뭘 먹은 적이 없었다. 유하에게는 갑작스러운 이야기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인제야 들었다.

 주문을 마치고 테이블에 앉은 유하에게 말을 걸었다.

 “유하야.”

 “저기.”

 동시에 말을 꺼내고 동시에 입을 닫는다. 잠시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재빨리 순서를 양보했다. 유하는 머뭇머뭇했다.

 “고맙습니다. 제대로 인사를 못 드렸죠.”

 “침대 비워준 정도로 인사는.”

 “그런가요.”

 유하는 옅게 웃었다.

 “일은 어때?”

 “똑같죠. 오늘은 성야 일정이 있어서 데려다주느라 빨리 끝났어요.”

 “사무실엔 안 나갔고?”

 “쇼 프로 녹화가 있어서 이번 주엔 더 안 갈 것 같아요. 쫓아다니다 보면 퇴근이니까요.”

 “다행이네.”

 안심했다. 당분간 성추행범과는 만나지 않는다는 소리다. 손을 빨리 쓰면 추가 피해는 막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한 사람을 점 찍으면 집요하게 손을 대는 자였다. 유하가 일을 그만두거나 남에게 넘기지 않는 이상 아예 만나지 않는 게 가장 좋다.

 “할 말 있는 거 아니었어요?”

 유하가 물었다.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유하가 알아봐야 좋을 게 없었다. 도움받는 걸 끔찍이 싫어하는 유하였다. 홀로 긴 시간을 버텨온 사람은 다들 그렇게 되는 걸까. 소중한 얼굴이 연달아 떠올랐다.

 음식이 나와서 각자 자기가 시킨 걸 끌어당겼다. 유하는 아이스크림, 나는 아메리카노였다. 평범하게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을 뿐인데 그게 귀여워서 한참을 쳐다보았다. 유하가 뭐 묻었냐고 물어볼 때까지.

 “아니야. 네가 식전에 아이스크림 먹을 줄은 몰라서 신기했어.”

 “아.”

 유하는 망설이다가 들고 있던 스푼을 내려놓았다.

 “먹어. 방해하려던 게 아니야.”

 “요즘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셔서 줄이려고 하는 중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반쯤 남은 아이스크림 위에 수저를 놓고 손을 테이블 아래로 내렸다. 정말로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난처하게 됐다. 괜히 나도 미안해서 커피에서 손을 뗐다.

 잠깐 침묵이 돌았다. 각자 핸드폰을 꺼내서 시간을 확인한다. 새로운 메일이나 전화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무것도 없었다. 유하는 뭔가 타이핑을 하고 있었다. 세하에게 보내는 저녁 잔소리일 거라고 지레짐작해본다. 저 형제가 어떤 관계를 쌓고 있는지는 대략 정보가 있다.

 각자 동생과 가족들, 뉴스에 대해서 대화하다 보니 삼십여 분은 금방이었다. 슬슬 저녁을 먹어도 무리가 없을 거라고 판단한 우리는 카페에서 일어나 식당으로 이동했다. 음식을 남기지 못하는 유하는 부끄러워하면서도 결국 아이스크림을 끝까지 먹었다. 내 커피는 반 이상 남았다.

 아직 저녁도 아닌데 대기자가 있었다. 다행히 한 팀. 카페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없었던 줄이라 바로 올 걸 그랬나 하는 이야기를 했다. 유하도 놀란 얼굴이었다.

 “주말에는 온 적이 없어서 몰랐네요. 평일 오전에는 한 번도 대기줄을 본 적이 없어요.”

 시간에 맞춰 예약석은 비어있었다. 입구로 들어가니 대기하던 사람이 부럽다는 듯 쳐다본다. 테이블에 자리를 잡는 사이 대기 줄은 두 팀이나 불어났다. 바로 들어온 건 좋지만, 느긋하게 먹기는 힘들겠다.

 주문은 유하에게 맡겼다. 내 입맛도 가게도 잘 알고 있는 유하니까 알아서 잘 골라주겠지. 내가 고른 건 와인뿐이었다. 아까부터 줄곧 와인 향기가 코끝을 맴돌아서 모른 척 넘어갈 수가 없었다.

 “자주 오는 곳이야?”

 “몇 번 왔어요. 성야가 이 근처를 좋아해서요.”

 유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음식점에서는 거의 들어본 적이 없는 한국 노래가 나왔다. 인디 음악 같은 걸까. 제목은 알 수 없었지만, 식사하면서 분위기를 즐기기에 좋은 선곡이었다.

 “여러모로 감사드려요.”

 유하가 말했다.

 “세하 일도, 저한테 신경 써주신 것도 전부 다요.”

 “아까 얘기 끝난 거 아니었어?”

 나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대꾸했다. 유하는 소리 없이 고개를 젓는다.

 “그동안에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신세 진 게 워낙 많아서 따로 인사를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특히 세하의 무례를 용서해주신 것 정말 감사합니다.”

 유하는 식탁 위로 고개까지 숙여 인사했다. 너무 정중해서 당황스럽다.

 “유하야.”

 “형으로서 동생의 행동을 잘 단속했어야 했는데 고생하시게 해서 죄송해요. 요즘도 제멋대로라서 면목이 없습니다.”

 “유하야 잠깐만.”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식탁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유하를 일으켰다. 때맞춰 나온 첫 번째 코스가 세팅되는 사이에 생각을 정리했다. 몰아붙이면 안 된다. 그렇게 되뇌었다.

 “요전에는 내가 성급했지. 부담스러웠으면 미안해.”

 음식만 쳐다보고 있던 유하가 날 바라본다.

 “나는 우리가 충분히 유대를 쌓았다고 생각했어. 널 불편하게 하려던 게 아니야. 나도 너희보다는 나이가 많지만, 평범한 사람이라서 실수를 했나 봐.”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에서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아 무서웠다. 그때는 바로 굳어지는 게 보여서 상처받았는데 이번엔 조용해서 무섭다니. 자신의 옹졸함에 수치심마저 들었다.

 “못 들은 거로 해줄래. 지금까지처럼 지내자. 친구로, 친한 형 동생으로. 응?”

 유하의 곧은 시선이 나를 원망하는 듯했다. 그럴 거면 대체 왜 말을 해서 괴롭혔냐고. 그렇게 외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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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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