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같은 사람이 연인이라면 좋겠네요. 부러워요. 아차, 애인 없다고 했죠?"
수아는 쓰게 웃으며 잔을 내려놓았다. 미성년이지만 손에 든 것은 알콜이 듬뿍 들어간 독한 위스키. 이런 것을 주문하는데도 잠시 주인 대신 가게를 봐주고 있다는 그녀는 수아를 말리지 않았다. 그런 점이 좋았다. 수아도 주인이 있을 때는 시키지 않는 메뉴를 자유롭게 시키고 남들 앞에서 하지 않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러면 그녀는 언제나처럼 편한 미소로 수아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다. 그런 점이 미안하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찾듯 수아는 그녀가 있는 시간에 가게를 찾았다. 오늘처럼 단 둘이 있는 일은 드물었지만 자주 만날 수 있는 것만으로 좋았다. 단지 그것만으로 어딘가 구원받은 기분이었다.
수아의 넌지시 떠보는 말에도 그녀는 웃기만 했다. 머리카락과 같이 고운 적회색 눈썹이 상냥하게 굽어졌다.
"수아씨는 사귀는 사람 없어요?"
그녀가 물었다. 수아는 픽 웃었다.
"있어보이나요?"
"네. 미인이고 능력도 있고. 인기 많을 것 같아요."
그녀의 대답과 함께 넘어가는 위스키가 썼다. 수아는 잔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세상에 여자가 자기보다 능력있는 걸 좋아하는 남자는 없어요."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가요?"
그렇게 말하고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잘 모르니까요."
그녀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수아는 그녀의 붉은 눈을 지긋이 살폈다. 아름다운 눈. 무엇을 보려고 했던 것인지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순진무구한 사람이었다.
"미기."
수아는 그 순간 자신이 왜 그렇게 말했는지 몰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말할 타이밍이 아니었는데.
"나랑 사귀지 않을래요?"
미기는 또 웃었다. 이번엔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명랑하게 카페를 울렸다. 수아는 그녀가 대답을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누구라도 이런 갑작스런 이야기에는 할 말이 없겠지.
그리고 긴장했다. 어차피 허락받지 못할 걸 알면서도 마음이 그리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가게를 나서면 울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들었다. 저도 모르게 얼굴이 딱딱해졌다.
미기는 한참을 웃었다. 수아가 지칠 때까지 웃었다. 수아는 차마 그녀를 제촉하지 못했다.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열었을 때는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좋아요. 그럼 오늘부터 1일이네요? 나 100일이니 투투니 챙기는 거 해보고 싶었어요. 발렌타인 데이도요."
정말로 무너질 줄은 몰랐었지만 그 정도로 긴장한 것이 사실이었다. 수아는 자기가 대답할 수 없게 될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할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도 몰랐다. 어리벙벙하니 미기를 바라보기만 했다. 미기는 또 웃으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제가 뭔가 잘못 말했나요?"
그러더니 그제야 표정이 바뀌며 허둥거렸다.
"어머, 농담인데 진지하게 대답했나 봐요. 미안해요. 그런 게 어려워요. 다들 하는 농담 같은 것 말이에요."
미기는 어쩔줄 몰라하다가 여전히 굳어있는 수아를 보고는 이번에는 다른 사과를 했다.
"웃은 것 때문이에요? 미안해요. 비웃은 게 아니에요. 마침 저도 비슷한 생각을, 사귄다는 건 아니었는데 수아씨가 아깝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런 이야기를 들어서 웃겼거든요. 농담이라면 성공이었어요."
그 말에도 수아는 조용했다. 미기는 정말로 당황했는지 표정이 나빠졌다. 수아는 무언가 말해야한다고 생각했지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정말로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수아가 한 말은 고작 이 한마디였다.
"좋아해요."
왈칵 눈물이 났다. 갑자기 왜인지 몰랐다. 미기는 뜬금없는 그 말과 당황한 수아의 얼굴을 눈만 깜빡이며 바라보고 있었다. 급히 냅킨을 찾아 눈꺼풀을 누르는 수아를 살피듯 보았다. 수아는 조용하면 안될 것 같은 느낌에 급히 말을 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하는 지 몰랐다.
"처음 봤을 때부터 계속 신경쓰였어요. 미기랑 친한 사람이랑 있는 것도 신경쓰이고, 늘 미기가 오는 날에 맞춰서 찾아오고, 미기가 혼자 있을 거라기에 오늘은 화장도 하고, 이런 못난 얼굴 보여주려고 한 게 아닌데.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나도,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스스로 들어도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말이 빠르게 나왔다. 수아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한탄만 하는데도 늘 들어주고, 나랑 같이 있어줘서 고마워요. 미기랑 같이 있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계속, 계속 생각했는데, 오늘은 이런 말 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안 될거라고 생각했는데, 그치만 하더라도 이렇게 엉망으로 하면 안 됐는데, 너무 엉망이어서 미기가 실망했을 게 틀림 없다고 분명히 생각했는데, 그치만…."
수아는 눈을 들었다. 미기와 눈이 마주쳤다. 손이 따뜻했다. 미기의 손이다. 쉼없이 돌아가던 혀가 겨우 멈춰주었다. 그녀는 또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정말 예쁜 눈이었다. 보석 같은 붉은 눈. 수아는 분명히 팬더같은 얼굴이 되어있을 자기 눈가를 생각하며 부끄러워졌다. 거울을 찾을 수도 없었고, 손은 미기가 잡고 있기도 했다.
미기는 수아의 반대편 손까지 끌어당겨 꼭 쥐었다. 따뜻하다. 수아는 미기의 손을 쳐다보았다. 손가락이 길죽하니 예쁜 손이지만 손톱은 뭉툭하고 굳은살이 눈에 띄었다. 곱지만은 않은 손이다.
"수아."
미기는 조용히 수아를 불렀다. 수아는 머뭇거리며 그녀를 마주 보았다. 미기는 어쩐지 조금 기뻐보였다.
"나도 수아가 좋아요."
그렇게 말해주었다.
"수아랑 처음 이야기했을 때 기억하고 있어요. 얼마나 친구들을 생각하는 사람인지도 알고 얼마나 열정적으로 사는 사람인지도 들었는걸요."
차분한 미기의 음성이 수아를 진정시켰다. 수아는 부끄럽고 미안하고 고마웠다. 눈도 돌릴 수 없었다. 그녀의 손, 제 손의 물기까지 분명하게 느껴졌다.
"걱정이에요. 수아는 나에 대해 그만큼 많이 알지 못하니까요. 나에 대해 알게 되면 수아는 나를 싫어하게 될지도 몰라요. 하지만 수아는 그런 사람이 아니죠? 그렇게 말했었으니까. 그래서 내가 수아의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거예요."
미기의 얼굴에서는 서서히 웃음이 사라졌다. 진지한 얼굴이 아름다웠다. 수아는 홀려버린 것 같았다. 그렇게 둘은 눈을 마주했다.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수아는 자기 얼굴이 바보 같을 거라고 생각했다. 미기는 그저 아름다웠다. 정신을 차리라는 이성의 외침도 속절없이 아름다워서, 수아는 또 눈물이 났다. 이번에는 눌러 참았다. 수아가 그렇게 잘 우는 사람은 아니다.
"미기."
부르자 대답해온다.
"네, 수아."
수아는 미기가 쥐고 있는 자신의 손을 살짝 빼서 그녀를 마주 잡았다.
"내일도 또 와도 될까요?"
미기는 푸훗, 하고 소리내어 웃어버렸다. 가늘게 휘어지는 눈, 말려 올라가는 입술, 한껏 솟아오르는 광대, 살짝 움츠리는 어깨, 흔들리는 머리카락. 그녀에게서 향기가 났다. 어디선가 맡아본 듯한, 향과 비슷한 냄새.
"물론이에요. 또 와주세요."
미기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건강한 피부. 아기처럼 보드라워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햇빛과 바람에 거칠어진 풍아와는 전혀 다르다. 탱탱하니 건강함을 뽐내고 있는 피부에서는 모공도 찾을 수 없다.
"내일도 있나요?"
바로 지근거리에서 본 미기의 눈은 멀리서 볼 때보다 아름다웠다. 카페라떼에 올라간 휘핑같이 따스한 적회색. 빠르게 깜빡이더니 천천히 눈꺼풀이 내려왔다.
"물론이에요."
자연스러운 살냄새가 기분 좋았다. 수아는 후회했다. 화장하지 말걸. 미기가 불쾌할까 걱정스러웠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는 순간은 영영 잊을 수 없을 게 분명했다. 입술은 피부가 얇다더라니 방금 보고 맡은 것의 열 배로 미기가 느껴졌다. 미기가 여기 있었다. 수아는 땀이 찬 손을 살짝 떼며 그녀를 느꼈다. 또 눈가가 아찔해졌다. 오늘따라 눈물샘이 고장난 것 같았다.
눈물을 참자 호흡이 거칠어졌다. 훅, 콧김을 뿜게 되었다. 미기가 풋하고 웃었다. 수아는 비어있는 손을 꼭 쥐었다. 멋쩍게 입술을 떼고 물러난다. 미기는 뭐가 재밌는지 쿡쿡거리고 웃고 있었다.
크흠. 수아는 헛기침을 했다.
미기는 그제야 그녀를 보며 웃음을 멈추었다. 눈이 마주쳤다. 수아도 웃어버렸다.
미기가 수아의 손을 잡았다. 미기의 손은 보송보송했다. 수아는 새삼 땀이 차는 제 손이 미워졌다. 둘은 또 별다른 말도 없이 손만 만지며 서로를 보았다. 먼저 말을 꺼낸 건 미기였다.
"시간이 늦었네요."
수아는 뒤를 돌아보았다. 카운터에서는 시계가 한 눈에 보이지만 바에 앉아서는 제대로 보이지 않게 되어있었다. 미기는 그 말을 하고는 조용했다. 수아는 미기를 한번 보고 아쉽게 손을 뺐다.
"내일 또 올게요."
"언제든지 오세요. 내일은 계속 있을 거예요."
수아는 가방에서 손거울을 꺼내 얼굴을 살폈다. 끔찍하게 엉망이었다. 눈은 온통 시커멓고, 입술은 다 날아가고, 얼굴은 눈물 자국대로 허옇게 떠있었다. 미기는 수아의 표정을 보더니 또 쿡쿡거리고 웃었다.
"씻고 올게요."
수아는 한숨을 섞어 말했다. 미기는 다녀오라고 말하며 자기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운터를 정리하려는 모양이었다.
수아는 화장실로 들어가며 그녀를 돌아보고 문을 닫았다. 거울을 앞에 두자 웃음이 나왔다. 고백했다. 사귀기로 했다. 그제서야 실감이 났다. 수아는 노숙자 분장을 한 것 같은 얼굴로 행복하게 웃는 자신을 마주보며 울고 웃었다. 소리가 들릴까 입을 틀어막고 수도를 열어놓고 훌쩍훌쩍 울었다. 너무 행복해서 나는 눈물은 처음이었다. 어떻게 해야할지 감도 잡히지 않아 수아는 그냥 울었다. 크게 울진 못했지만 꽤 오래 울었다.
한참 울고보니 씻을 시간이 모자랐다. 화장실에는 클렌징 폼이 있어서 지우는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미기가 이상하게 생각할까 급히 얼굴을 씻었다. 손잡이를 잡으니 맨얼굴인데 괜찮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지만 화장품을 들고 다니지 않는 수아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왜 여자들이ー특히 목아가ー그 조그만 핸드백 가득 화장품만 넣어가지고 다니는지 처음으로 이해가 됐다.
화장실에서도 소리가 들리니 알고 있었지만 카페에는 여전히 손님이 없었다. 원래 이렇게 손님이 없는 카페가 아닌데 하늘이 도운 걸까. 다 울고 나니 절로 웃음이 났다. 수아는 실실 웃음을 지었다가 급히 얼굴을 굳혔다. 바보같아 보일 게 뻔했다. 미기는 그런 수아를 보고 또 웃었다.
"오래 걸렸네요."
미기가 말했다.
"얼굴이 워낙 엉망이어서요."
수아가 대답했다.
수아는 일어날 준비를 하고 미기는 구경했다. 카페는 아직 문을 닫을 때가 되지 않았고 슬슬 주인이 돌아온다던 시간이었다. 수아는 주인 얼굴까지는 보고 싶지 않아서 손을 빠르게 했다. 세수를 했지만 얼굴에는 울었던 흔적이 남아있었다.
수아가 가방을 들고 일어서자 미기가 따라 일어났다. 처음이었다. 수아는 의아해했다. 미기는 카운터를 나와 수아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문 앞까지 마중을 나왔다.
"내일 봐요."
그렇게 말하고 뺨에 입을 맞췄다. 수아는 미기 얼굴만 쳐다봤다.
"내일 봐요."
앵무새처럼 그녀의 말을 따라한다. 미기는 또 쿡쿡 웃으며 손을 꼭 잡아주었다. 따뜻한 기운이 물씬 올라오는 손길. 수아는 그제야 따라 웃으며 미기의 뺨과 눈가에 입 맞췄다.
"꼭 올게요."
그렇게 덧붙였다. 미기는 "네,"하고 대답하고 수아의 손을 놓아주었다. 수아는 아쉽게 따라 놓으며 카페를 나섰다. 몇걸음 가서 돌아보자 미기는 수아가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수아는 살며시 손을 흔들었다. 미기도 마주 손을 흔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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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걷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언제부터 걷고 있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안난다. 소년은 낯선 거리를 두리번거리다가 끝내는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가느다란 두 어깨가 감당하지 못한 옷자락이 팔뚝으로 흘러내렸다. 소년은 무의식 중에 옷을 추스르다가 문득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예쁘게 탄 갈색 피부를 가진 작은 손. 여자아이마냥 예쁜 손을 이리저리 뒤집어 보았다. 고민하다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원래 이랬던가?"

 알고 있던 것 보다 좀 작은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했지만 확인할 길은 없었다. 곰곰히 생각을 되짚어 보아도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왜 여기 있는거지? 처음부터 맨발로 걷고 있었나? 이렇게 옷이 컸던가? 여기는 어디지? 아니, 그 전에…

대체 난 누구지?

 놀라운 질문을 떠올린 소년은 잠시 생각을 멈추었다. 당연히 떠올라야 할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잠시 조용한 거리는 소년에 맞추어 시간이 멈춘 듯 했다. 출근 시간이 되어가고 있었지만 새벽의 주택가는 아직도 조용하기만 하다. 소년은 다시 발을 떼었다. 걸음과 함께 생각도 흘러간다. 어쩌지, 기억이 안 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뭘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다. 그나마 날씨가 따뜻한 때인 것이 다행이지만 이대로 거리에서 노숙을 하는 건 좀―,

 ―쾅.
 "갹!"

 꽤나 장엄한 소리가 조용한 골목을 울렸다. 생각에 잠겨 걷다가 갑자기 열린 대문에 정통으로 해골을 얻어맞은 소년은 머리를 감싸쥐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거의 동시에 부딪친 종아리도 통증을 호소해온다. 울상이 된 소년의 머리 위에 옅게 그림자가 드리웠다.

 "어, 미안. 괜찮아?"
 "으으…."

 소년은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휘저었다. 아래로 보이는 깨끗한 구두를 보니 출근하는 길일텐데 소년에게 길게 쓸 시간은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걱정을 받고 있을 소년이 아니기는 했지만 본인의 머리에서는 계산되지는 않는 것이다. 상대방은 잠시 머뭇거리는 듯 하다가 소년이 전혀 도움을 받을 생각이 없어보이자 발을 돌려 사라졌다. 소년은 가만히 발소리에 귀를 귀울이다가 상대가 완전히 코너를 돌자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그렇게 얼굴도 보지 않고 상대를 보낸 것이 잘한 것인지 잠시 의문이 들었지만 낙천적인 소년은 이내 아무렴 어때, 라며 생각을 떨쳐버렸다.

 자, 그럼 이제 어떻게 한다.

 낮은 지붕들과 저 멀리보이는 산등성이 너머로 해가 빠끔이 고개를 내미는 것이 보였다. 찌는 듯한 더위가 시작되겠지. 머리를 묶을 수 있다면 좋을텐데 끈이 없네―. 소년은 길디 긴 머리카락을 손에 말아쥐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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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의 시작은 어딘지 알 수 없는 숲이었다. 밤인지 어두침침한 숲은 어딘지 익숙해서 저도 모르게 발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본다. 기억이 있는 듯 없는 듯 하지만 친숙한 곳이다. 앞서 걷던 검은 로브의 누군가는 청년이 따라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함께 멈추었다. 발길을 멈추게 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지 쯧, 하고 혀를 찬 그─인지 그녀인지 모를 일이지만 일단 목소리가 낮은 걸 보아 남자인 듯한 누군가─는 청년의 앞에 되돌아와 팔짱을 꼈다. 가만히 노려는 시선이 검은 로브에 가려 얼굴도 보이지 않는데도 강렬하게 느껴진다. 조금 섬찟하다고 생각하며 청년은 헤죽, 웃었다.

 "안녕?"

 검은 로브에 휩싸여 있는 반응을 정확히 살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이 불쾌해 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느껴졌다. 이거이거, 뭔가 잘못한건가? 작게 한숨 소리가 난 것도 같았다.

 "귀찮아졌군."

 뭐가 귀찮아졌다는 것일까. 이해는 가지 않지만 청년은 상대방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상대방이 무엇을 할 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가 준비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가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말그대로 '아무것도 알고 있는 것이 없다.' 상대방이 누구인지 이곳이 어디인지 하는 문제는 미뤄놓고라도 일단 자신의 이름부터 기억나지 않아서야. 하지만 청년의 앞에 선 그는 그런 사정따위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조금 빠르게 말했다..

 "내 이름은 게이트(Gate). 다른 세계에서 넘어오는 자들을 안내하기 위한 사자다."
 "여기가 어딘지 궁금하겠지. 이 곳의 이름은 웨버랜드(W.ever Land)다. 별로 중요한 건 아니지만 상식이니 기억해두도록."

 에헤. 청년은 다시 히, 하고 웃어보였다. 어찌보면 그냥 바보같아 보이는 표정에 게이트는 인상을 찌푸렸다. 로브 탓에 보이지는 않았겠지만. 게이트는 청년도 알아차릴 정도로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죽, 말을 늘어놓았다.

 "그대가 살던 세계는 어떤지 모르나 웨버랜드에는 여러 종족이 있지. 요정족으로 페어리와 드워프, 임프. 그리고 수인족이라 하는 동물과 융합한 사람들이 있다. 요정족의 페어리는 15~25cm정도 되는 작은 키의 소인족으로 밝고 낙천적인 성격에 진지해지질 못하는 소란스러운 종족이지. 동정심이 많아서 사람들 부탁을 잘 들어주긴 하지만 사고체계가 어떻게 된건지 일반적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대책을 내놓기 때문에 가능하면 부탁하지 않는 쪽이 좋다. 드워프는 손재주가 굉장히 뛰어난 난쟁이족이다. 평균 키가 120cm정도 밖에 안되지. 다들 수염마니아에 술을 좋아하지. 드워프들이 만드는 것들은 기능성도 내구성도 좋다. 임프는 페어리보다는 조금 크지만 50cm를 넘지 않는다. 작지. 박쥐날개에 푸른색이나 녹색계열 피부색을 가졌다. 위험한 장난을 좋아하니 가능하면 가까이 가지 않는 게 좋아. 수인족은 말그대로 인간과 동물이 합체된 형태인데 주로 육지형, 조류&파충류형, 해양형으로 분류된다. 이쪽은 대충 들으면 어떤 기준인지 알겠지? 육지형은 육체파, 해양형은 마법파, 조류&파충류형은 그 중간으로 원거리 공격 무기도 선호한다."

 다다다다다다 내뱉어진 긴 설명에 청년의 눈이 크게 뜨였다. 흐에─, 하고 운을 떼더니 한마디 한다.

 "숨 안차?"
 "그래서,"

 청년의 말 뒤로 곧장 즉각적으로 다시 말이 이어진다. 아무래도 그냥 숨을 고른 것 뿐인 모양이었다. 청년은 얼떨떨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래서?"
 "지금부터 골라라. 어떤 모습으로 갈 것인가. 네가 이 쪽을 구경하고 고르겠다고 했지만 그냥 지금 하는 게 나을 듯 하다."

 청년은 질문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 두 눈을 껌뻑였다. 바보같이 벙찐 얼굴로 쳐다보는 모습에 게이트는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네가 원하는 걸 고르면 돼."
 "모르겠는데."
 "…끙."

 게이트는 고민에 잠겼다. 청년이 멀뚱멀뚱 쳐다보고 침묵이 지났다.

 "아."
 "응?"
 "지금 그대로 가는 것도 괜찮다."

 다시 껌뻑껌벅. 청년의 시선에 게이트는 또 끙, 앓는 소리를 했다. 뭔가 설명방법을 찾는 지 말이 없는 게이트를 향해 청년은 툭 한마디 내뱉었다.

 "그냥 갈래."
 "하?"
 "간다구."
 "……좋아, 그럼 됐다."

 푹, 하고 한숨쉬는 게이트를 청년은 의아한 얼굴로 올려다 보았다. 괜히 짜증스레 흥, 하고 콧방귀를 뀐 게이트는 청년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 그리고는 잠시 멈춘다.

 "왜?"
 "보기보다도 가늘군."

 헤, 청년이 웃는다.

 "그래?"

 그리고는 자기도 한번 잡아보았다. 오오, 하고 혼자 감탄하는 바보짓에 게이트는 다시 절래절래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이만 보내주지. 하지 마라!"

 신기한 듯 로브를 들춰보는 청년의 손을 탁 쳐내고 게이트는 다시 팔짱을 꼈다. 여전히 싱글거리는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기억도 없는 게 너무 당당하잖아.

 "가면 뭐 좋은 거 있어?"
 "모른다."
 "그럼 나 여기 있으면 안 돼?"
 "……."

 게이트의 시선이 얼굴에 곧장 느껴져서 청년은 괜히 어깨를 으쓱하며 시선을 피했다.

 "네 이름은 에스트다. 에스트 아이렌."
 "에?"
 "나이는…원래는 20살이라고 들었던 것 같군. 지금은 17~8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건 그 정도다."
 "어떻게 알아?"
 "다 방법이 있다."

 부. 청년의 볼이 부었다. 어떤 사정으로 넘어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선한 미소를 가졌던 청년은 자신의 이름을 에스트 아이렌이라고 소개했었다. 장난기 가득한 눈빛이 아니면 표정 탓에 나이가 많다고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갓 스무살이 넘은 청년이라고 보기엔 너무…인자해 보이는 미소를 띄고 있었다. 차근히 설명을 듣고 곰곰히 생각한 뒤 대답하는 모습은 누가보아도 믿음이 갈만한 청년이었다.
 완전히 이 곳으로 넘어오자 외양부터 훨씬 가늘어진데다가 이제보니 기억도 잃었지, 하는 짓도 어린애 같아져서 조금 걱정이 되긴 했지만─이제 헤어질 시간.

 "웨버랜드가 네게 즐거운 곳이 되길 바라지."
 "될거야."

 자신만만하게 웃는 얼굴은 조금 전과 닮은 것도 같다.

 "이대로 죽 가면 작은 마을이 나온다. 열심히 돌아다녀봐라. 도와줄 사람이 있을테니. 부탁이니 말썽은 부리지 말도록."

 에스트는 그대로 사라지는 게이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쩐지 웃은 것 같은데. 아닌가?"

 고민해 보아도 대답해 줄 사람은 모습을 감추었다. 에스트는 흠, 하고 게이트처럼 팔짱을 끼었다가 발을 땠다.

 "가면 뭔가 있겠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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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峨 美哀 01


무엇을 위해

written by. 我捐

 

 

 


이름만 들어온 사막이라는 곳을 찾았다. 사막마저 당연하다는 듯이 존재하는 도원에 조금 감사한 마음을 가져본다. 공격하듯 내리쬐는 강렬한 햇볕과 숨 막히는 더위에 고스란히 노출되자 마치 그 안에 갇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뜨거운 바람이 온 몸을 옭아매는 것 같았다.

“이런 곳이구나.”

어쩐지 즐겁다. 소리 내어 웃어볼까 하다가 관두었다. 몸에 밴 겸양이 누가 보기라도 하듯 머리를 긁적이게 했다. 코만 마르지 않는다면 계속 여기 있어도 좋을 것 같았다. 마르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냄새에 둔해지는 생소한 감각이 재밌었다.

“덥다.”

산책을 하듯 사막을 걷는다. 모래 속에 발이 푹푹 빠지고 숨쉬기조차 어려운 메마른 공기에 빠르게 지쳐가는 것이 느껴졌다. 무의식중에 혀를 내밀었다가 모래를 한바가지 씹었다.

‘물을 가져올 걸 그랬나.’

처음 찾은 사막인데다 시간감각 없는 것은 어디서도 마찬가지여서 미애는 지금 자신이 얼마를 걸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발자국이라도 남아있으면 얼마나 왔는지 짐작이라도 해보련만. 거센 바람에 지형이 바뀌는 곳에서 걸어온 흔적을 되짚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확실한 것은 슬슬 한계가 다가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본래 개이기 때문에 땀이 적은 편인데도 온몸이 물기로 축축했다. 뜨거운 태양열에 현기증이 일었다.

“돌아가야 하려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째서인지 돌아갈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앞을 뚫어져라 바라보아도 거리가 가늠되지 않는다. 모래바람이 시야를 가려 그나마 가까운 거리도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다. 당연하지만 코는 바싹 말라 마비된 지 오래였다. 앞으로 더 간다고 뭔가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가고 싶은 곳은 없었고 감각을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에서 목적지가 있다한들 도착할 수 있을 리도 없었지만……,

“돌아가야지.”

그리고 걸었다. 보통은 한걸음 내딛으면 풍경이 바뀌는데 변하지 않는다. 이상하다. 의아하긴 했지만 계속 걷는다. 언젠간 바뀌겠지. 느긋하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몸은 그리 느긋한 상황이 아닌 모양이었다. 목이 타는 것도 열을 받아 온몸이 뜨거운 것도 마치 자신의 것이 아닌 듯 했지만 생각대로 현실이 바뀌어주진 않았다. 세상이 흔들렸다.

“어?”

얼굴에 닿은 모래가 뜨겁다. 쓰러졌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의식이 까맣게 꺼져 들어가는 때였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낯선 천장. 일어나려는 것을 제지당했다.

“누워있어. 아직 어지러울 거다.”

베이스 톤의 낮은 목소리와 함께 이마에 차가운 것이 닿았다. 눈만 돌려 바라보자 시원스러운 미소의 청년이 눈에 들어온다. 미애는 자신도 모르게 다시 몸을 일으켰다. 아니, 정확히는 일어나려다 다시 막혔다.

“어허, 안된다니까.”

여전히 기분 좋게 웃는 얼굴에 전혀 개의치 않는 다는 말투였지만 어쩐지 거역해서는 안 될 것 같다. 미애는 일어나기를 포기하고 조용히 사과부터 했다.

“죄송합니다. 폐를 끼친 모양이네요.”

그러자 청년이 어이없다는 듯 허, 하고 웃었다.

“제일 먼저 하는 말이 그런 거야?”
“뭔가 잘못됐나요?”

보통 저런 질문을 할 때는 당황이라거나 호기심이라거나 하는 감정이 얼굴에 드러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눈앞의 뻣세 보이는 하얀 머리칼의 청년은 여전히 싱글싱글 웃고만 있다. 독특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미애는 웃었다. 그러자 청년의 입 꼬리가 더 올라간 것 같았다. 미묘한 변화라 확실하진 않았다.

“보통은 여기가 어디냐는 질문이 먼저 아닌가? 내가 누구냐, 던 가.”

그 말에 미애가 오히려 웃었다. 아, 물론 아까부터 웃고 있었다. 다만 조금 진심이 되었을 뿐이다.

“그렇습니까.”
“그렇지.”

보통은 그렇다는데 할 말은 없다. 그리고 청년 쪽에서는 말이 없었다. 대화의 흐름을 끊어버린 것 같아 조금 당황했지만 이미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어 미애는 화제를 바꾸었다.

“죄송합니다, 물 좀 주실 수 있을까요?”
“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내미는 물 컵에 잠시 대꾸할 말을 잃었다.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다시 웃는다.

“일어나겠습니다.”

상체를 일으키는 순간 머릿속이 핑글 돌았지만 무시하고 그가 내민 컵을 받아 쥐었다. 깔깔하던 목에 미지근한 물이 넘어가자 조금 긍정적인 기분이 되는 것도 같다. 물 좀 마신다고 그렇게 된다면 살아오며 지금까지 한 모든 쓸모없는 일은 하지 않을 수 있었을 테지만. 한 모금씩 꼴깍꼴깍 마시는 것을 참을성 있게 지켜본 청년은 미애가 절반정도 마시고 더 이상 컵을 입에 댈 기미가 안보이자 곧장 컵을 빼앗아 가더니 미애의 어깨를 잡았다. 똑같이 웃는 표정인데 뭔가 단호하다.

“자, 도로 눕자?”

이런, 바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미애의 난처한 표정은 못 본건지 못 본 척 하는 건지 청년은 컵과 수건을 적시던 대야를 들고 방을 나가버렸다.

“나가면―, 혼나려나.”




꾸벅 인사하고 돌아서는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다 돌아섰다. 보내도 되나,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본인이 안 내켜 하는 것을 붙잡을만한 핑계가 없었다.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서휘도 처음 보는 영물을 끝까지 챙겨줄 정도로 그저 맘씨가 좋진 않다.

“아.”
“왜 그래?”

가볍게 으쓱하고 돌아선다.

"이름 물어보는 걸 깜빡했어."
"뭐?"

스스로 생각해도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지만 상대방의 분위기에 휩쓸린 모양이라고 생각하니 말이 된다. 따로 상기를 시켜주었는데도 그런가요, 라며 웃던 모습이 떠올랐다.

"다음에 또 만나겠지, 뭐."

유휘의 어이없어하는 표정이 시야 안에 들어왔지만 휘휘 넘겨버린다. 거기에 해줄 말은 없는지 그저 고개를 젓고는 긍정의 말을 남긴다.

"그래, 도원에 머무르는 한 곧 보게 될거다."
"그런거지."

유휘의 어깨를 툭 치며 지나가자 시선이 따라왔다.

"은휘한테 갈건데, 같이 갈래? 아니, 같이 가자."
"질문이 아니네."
"너한테 질문을 하느니."
"너무한데."
"준비…해서 나올테니 기다려."
"그래."

준비하고 나오라고 하려다가 따로 준비가 필요없음을 깨닫고는 말을 바꾸었다. 이 곳이 인간세상과는 달리 태평스럽기 짝이 없다는 사실을 또 잊고 있었다. 얼마나 지나면 적응하려나. 수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가도 전혀 변함이 없는 서휘의 뒤로 햇빛이 하얗게 드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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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야야, 뭐하는 짓이야, 비켜.

으르릉, 해보았지만 지나치게 서로에게 익숙한 파트너는 그런 지아의 반항을 완전히 무시하곤 빠르게 옷을 걷어 올렸다. 방심한 사이에 어느 샌가 긴 머리카락을 잡아매고 있던 끈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공들여 관리해온 머리카락이 사락사락 사방으로 흩어졌다. 자연스럽게 머리카락을 손에 감고 키스를 해오는 바람에 거부할 틈도 없이 입술이 맞닿았다. 고개를 흔들며 밀어내어도 막무가내로 몸을 붙여왔다.

이자식이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애인 있다며, 잣샤!!!!

비명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수법이 뻔하다. 입을 여는 순간 혀가 밀고 들어올 것이 당연했다. 힘으로 밀쳐내야 하건만 오랜만에 다른 사람의 손길을 접한 몸은 흐믈흐믈해져선 힘을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안되는데, 안되는데. 알고는 있었지만 생각은 이미 뒷수습을 어떻게 하나, 까지 가있다. 적당히 욕구를 풀어줬어야 하는 건데, 하고 후회해보아도 이미 늦었다. 집요하게 지아의 예민한 부분을 공략하는 손길에 반쯤 눈이 풀릴 지경이었다. 그대로 끝까지 가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래도 안 돼, 라고 마지막으로 이성의 끈을 당겨 손을 들었다. 더듬더듬 올라간 손끝에 털 뭉치같이 보들보들한 감촉이 닿자 망설임 없이 잡아당겼다.

“윽.”
“정신이 드냐, 인마.”

헉헉, 작게 숨을 몰아쉬는 지아의 얼굴을 화아는 마치 처음 본다는 듯이 말가니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이 녀석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지아는 숨도 고를 겸 한숨을 포옥 내쉬고는 발로 화아를 걷어내고 일어났다. 화장실에 가야한다. 이대로는 내가 덮치고 말거야. 혼자 고개를 휘휘 저으며 한걸음 옮기는데 다시 허리를 잡혔다. 퀭한 눈으로 생각에 잠긴 듯 앞만을 응시하던 화아가 매달리듯 붙어있었다. 부쩍 말라서 안쓰러운 형상의 화아가 그러고 있으니 전처럼 밟아주고 외면할 수가 없는 지아였다.

“야, 놔봐.”
“화장실 좀 가자.”
“야.”
“어이.”

대답한마디 없다. 이걸 어쩌나. 머리를 토닥토닥 쓸어주며 떨어져라, 라고 속으로 주문을 외워도 그대로다. 이걸 어쩌나. 오늘의 화아는 뭔가 평소와 달랐다. 물론 이렇게 병든 닭 몰골을 하고 있는 것부터가 평소와는 많이 달랐지만 그것과는 관계없이 뭔가 지아가 함부로 할 수 없게 만드는 부분이 있었다. 대체 뭐지.
머릿속으로는 이것저것 고민을 해보면서 일단 화아를 달고 침대에 가서 앉았다. 질질 끌려오는 폼이 영락없이 떼쓰는 어린애. 방에 들어오자마자 덤벼들어서 떨어지지 않는 꼴을 보아하니 이 녀석도 욕구불만인가 싶다. 곤란한데.

“야.”
“기분 좋게 해줄 테니까 좀 놔봐.”

어떻게? 라고 묻는 얼굴로 곁눈질 한다. 아아―, 그래서 이상했구먼. 언제나 질린다 싶을 정도로 똑바로 눈을 마주쳐오던 화아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지아의 눈을 보지 않았다. 얼핏 스치지 조차 않았다. 아니, 그전에 얼굴이나 똑바로 봤던가? 지아는 잠시 눈을 크게 뜨고 화아를 바라보다가 이내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어떤 심정의 변화가 있으면 이런 본능적인 행동이 바뀔까. 화아는 지아의 표정이 변하자 땅만 쳐다보고 있었다. 일단은 이 녀석 기분을 풀어주는 게 먼저겠지. 후, 하는 숨과 함께 생각을 날려버리고 팔을 잡아당겼다.

“일어나, 이 녀석아.”
“왜.”

고집 피우는 중에는 단 한마디도 대꾸하지 않는 화아지만 어째서인지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지아의 얼굴은 바라보지 않는다. 지아는 조금 생각을 바꿔보았다. 혹시 나한테 뭔가 잘못한 게 있나? 안타깝게도 이번역시 대답을 스스로 내릴 수 있었다. 자꾸 다른 곳을 쳐다보긴 해도 아예 고개를 돌리고 외면할 화아는 아니다. 지아는 정말 이대로 화아를 붙들고 대체 무슨 일이냐고 심문하듯 다그쳐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은 그저 가슴 한구석에 묻어둔 체 조용히 화아의 바지버클을 끌러낼 뿐이었다. 화아는 그 손길을 전혀 거부하지 않고 그저 지켜보았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문득 느껴질 정도로 강렬한 시선이 이번만큼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이 오히려 지아에게는 강렬하게 인식되었지만 그것은 화아로서는 불가능한 게 아닌가 싶었을 던 맑고 평범한 시선이었다.

“시우야.”
“?!”

나직한 목소리에 지아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놀라 고개를 드니 처음 보는 표정의 화아가 있었다. 요즘의 화아는 새로움의 연속인지라 딱히 더 놀랄 일도 없다고 생각했건만 실수였다. 서글서글한 표정의 화아라니. 저건 대체 누구야. 본명을 부른 것에 한번 놀라고 화아의 표정에 놀라고 나니 지아로서는 더 이상 뭘 해야 할 지 모를 심정이었다. 그렇게 눈을 마주친 체 잠시간의 정적이 지났다.

―덜컹.

갑작스런 소리와 싸늘한 찬바람이 두 사람을 덮쳤다.

“힉?!”

저도 모르게 파다닥 화아에게서 떨어진 지아와

“카르노멘.”

묘하게 침착한 화아. 평소와 닮은 듯 전혀 다른 풍경에 낯선 얼굴이 들어섰다. 아니, 지아에게 이 사람을 낯설다고 할 수 있을까. 분명히 자주 본 사람은 아니지만 강렬한 기억의 한 귀퉁이에 남아있는 얼굴이다. 지아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갔다. 그리고 지아가 파래지는 만큼 더더욱 강렬해지는 시선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 은빛 머리카락이 세찬 바람에 정신없이 팔락거렸다. 언제나 의미모를 미소를 띠고 있는 예쁘장한 얼굴이 오늘만큼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그뿐이랴. 살기 띈 시선을 받은 지아는 ‘죽었다,’는 느낌이었다. 속으로는 온갖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밖으로는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물러서고 싶은데 손가락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으아, 큰일 났다.’

물론 위기 상황에도 생각만큼은 천연덕스러운 것이 지아의 특징이긴 하다. 하지만 몸은 바짝 긴장해서 얼어있는데 머릿속이 태연한 괴리감 가득한 상황은 전혀 달가운 것이 아니었다. 상황정리에만은 도움도 되었지만.

‘제발 긴장 좀 하자, 나님. 그나저나 이걸 어쩐다. 아니, 그 전에 이 인간은 대체 왜 남의 방 창문을 넘어와서 분노해 있는 거야. 어, 잠깐. 진짜 그러네. 대체 왜지?’

아무리 태연하게 생각을 이어간 다해도 현실은 변하지 않는 법이다. 여전히 살벌하다 못해 눈빛으로 바퀴벌레도 잡을 듯 한 카르노멘이 다가오고 있었고, 몸은 안 움직였고, 화아는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러고보니 아까……,

“힉?!”

저도 모르게 파다닥 화아에게서 떨어진 지아와

“카르노멘.”

묘하게 침착한 화아.

설마, 설마하니 사귄다는 게……?’

지아의 곁눈질을 못 본건지 화아의 시선은 카르노멘 붙박이였다. 카르노멘이 어떤 모습으로 어디로 향하고 있느냐는 신경 쓰이지 않는 걸까. 정말 신경 안 쓰이니, 화아?! 분위기는?! 걸음도 점점 빨라지는데?! 잠시 울고 싶은 기분이 된 지아였다. 걸어오며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를 들자 무슨 장치가 되어있는 건지 무언가 쏘아져 나왔다. 동체시력도 운동신경도 좋은 지아지만 바짝 얼어 있다가 바로 움직이는 것은 무리. 반사적으로 피하려고 움직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약간 빗나간 탓인지 엄청나게 아팠다.

“으갹!”

정확히 무슨 용도의 무엇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덕분에 얼굴근육 빼곤 움직일 수 없어진 지아는 눈물만 찔끔, 짜냈다. 어쩐지 놀란 표정의 화아가 눈에 들어왔다. 쟨 또 왜 저래. 뭐 별일은 없는 모양이니 다행, 이라고 생각하려고 했지만 여전히 눈빛이 무서웠다. 힐끔, 눈치를 보고 있자니 다시 지팡이의 끝이 같은 곳을 향해왔다. 설마, 또?! 질린 지아의 표정에 보답하듯 뭔가가 날아왔다.

‘보이는 데 못 피하니 미칠 노릇이군.’

괜히 헛생각을 하며 현실도피 해보았다. 당연히 아팠다. 맞은 데만 아픈 게 아니라 맞는 순간 온몸을 관통하는 통증에 저도 모르게 끄아악, 비명을 지르며 침대 위를 구르게 되었는데도 지아의 딴생각은 그치지 않았다. 그래, 심지어 이런 장면을 생중계로 포착해내고 놀라워 할 정도로. 그것이 비록 고통을 외면하기 위한 필사적인 딴생각일지라도 그렇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화아가 눈물을 흘린다. 즉, 울고 있었다.

크게 뜨인 두 눈, 작게 벌어진 입, 놀란 기색이 역력한 화아의 얼굴에 두 줄기 눈물방울이 흐르고 있었다. 카르노멘은 지아에게 집중한 나머지 보지 못한 듯 했다. 좀 보라고 하고 싶었는데 입에서 나오는 것은 괴성뿐이어서 화가 나는 지아였다. 몇 번이나 눈이 마주쳤다. 울지 마, 라고 구박해줄 수 없어서 답답했다.

“그만.”

작은 목소리에 반듯이 정장을 차려입은 신사가 뒤돌아섰다. 딱딱하게 굳은 그의 얼굴에도 놀라움이 담긴다. 지아도 몇 번 본 기억이 없는 화아의 눈물이라니, 놀라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도, 두 사람이 ‘연인戀人’이라면 절대로 놀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기왕이면 난 좀 보내주고 놀라면 더 좋겠지만.’

본인도 이상한지 뺨을 감싸는 화아의 눈에 자꾸만 자꾸만 물기가 차올랐다. 차다 못해 자꾸만 바깥으로 넘치는 눈물을 닦아내지도 그렇다고 막지도 못하는 손은 그저 이마나 뺨을 더듬으며 자리를 잡지 못했다. 뭔가 말을 할 듯 입을 벌렸다가 다물고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숙이는 꼴이 어지간히도 당황한 모양이었다.

“흐…….”
“화아.”

작게 들려오는 신음소리는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저도 모르게 눌러 삼킨 것일 테다. 카르노멘의 입에서 나직이 화아의 이름이 읊어졌다. 뭐라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카르노멘은 화아의 앞에 앉았다. 잔뜩 움츠린 화아의 어깨에 한손을 얹고 얼굴로 손을 뻗었다. 카르노멘의 조심스러운 손길이 화아의 뺨에 닿자 놀란 듯 확 얼굴이 물러났다. 하지만 곧바로 어깨를 붙든 손이 힘을 주어 화아의 몸을 끌어당겼다. 별로 힘을 주고 있지 않았던 화아는 카르노멘의 강한 손에 끌려가버렸다. 물기어린 뺨에 엷은 냉기를 머금은 정장칼라가 닿았다. 빠져나가려 몸부림치는 화아를 카르노멘의 양손이 꼭 붙들었다. 꼭 껴안긴 형상이 되어버린 화아는 이를 악물고 있었다. 자꾸만 눈물이 아니라 울음이 터지려고 했다. 카르노멘을 마주 안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벗어나지도 못한 체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화아는 덜덜 떨리는 손을 부여잡았다. 손을 잡자 팔이 떨려오고 떨림은 온몸으로 번져서 어느 샌가 화아는 펑펑 울음을 토하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 싫은지는 한마디 언급도 없이, 싫었노라고, 정말 싫었노라고 계속해서 되뇌고 또 되뇌며 짜내듯 터뜨리듯 카르노멘의 가슴에 울분섞인 눈물을 토해내었다. 카르노멘은 한마디 대꾸도 없이 그저 화아의 등을 쓸고 또 쓸어주었다. 그렇게 저녁은 밤이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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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안하다. 좀처럼 표정이 굳지 않는 지아의 얼굴이 심각했다. 눈앞에는 작게 미간을 찌푸린 모습으로 화아가 널부러져 있었다. 화려하기 짝이 없는 붉은 머리칼은 아직 그 빛을 잃지 않았지만 결은 푸석했다. 안그래도 하얀 얼굴은 어느샌가 창백하게 색이 빠져 병색이 완연했다. 눈밑이 검게 물들고 입술은 마른데다 전과는 다르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을만큼 말라버렸다. 어째서 이렇게 된 걸까. 화아가 원체 고민하는 일이 없어 신경쓰지 않았던 것이 함정이었다. 세상에 무심해 어느 것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화아였기에 표현이 적다해서 세심하게 돌봐주지 않아도 되었었다. 어디서부터 틀어진 걸까. 조금만 신경을 썼더라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라고 지아는 자신을 탓해보았다. 이렇게 티날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땀에 젖어 달라붙은 머리칼을 떼어주고 싶었지만 그것마저도 힘겹게 든 수면에 방해가 될까 시도할 수 없었다. 지아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입술을 깨물고 지켜보는 것 뿐이었다.

  정확히 언제부터 인지는 몰랐다. 평소와 똑같이 먹고 똑같이 나가서 똑같이 들어왔기에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화아가 먹은 것을 단 하나도 소화시키지 못하고 전부 토하고 있다던지, 매일같이 침대에 누워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다던지. 그것도 아니면 평소 같았으면 쉬지않고 공을 튀기고 있을 시간에 태양 아래 죽은 듯이 늘어져있다는 것까지도. 심지어 부르러 가지 않아도 꼬박꼬박 제시간에 들어온다는 사실까지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연아마저도 뭔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무엇이 문제인지는 깨닫지 못했다. 누구보다도 아끼는 한가족이라 여기는 친구들이었는데. 화아의 상태를 알아차리고 다른 칠인의 정령아들은 각자 충격에 빠져 의기소침해져 있었다.

  창을 통해 드는 바람에 지아는 정신을 차렸다. 안그래도 약해진 몸이라 감기 들기 쉬울 터인데 창문을 열어놓고 잠들다니. 지아는 작게 고개를 젓고 발소리를 죽여 창가에 섰다.

  "……ㅡ노멘…?"
  "미안. 깨웠네."

  전혀 소리가 나지 않았는데도 어떻게 알았는지 화아가 목소리를 냈다. 지아가 창문을 닫는 사이 화아는 부시시 몸을 일으켰다. 지아는 위태로워보이는 화아를 붙들었다.

  "좀 더 자둬."
  "됐어."

  지아는 자신을 밀어내고 창을 여는 화아를 보며 결국 들었던 손을 내리는 수 밖에 없었다. 결코 따뜻한 날씨가 아닌데 화아는 절대 창문을 닫으려 하지 않았다.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 화아를 향해 화도 내보고 얼러도 보았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무엇이든 정령아들의 한마디면 투덜거리긴 해도 어기지 않는 화아였지만 이번만은 고집을 피웠다. 곁에 누군가 붙어있는 것조차 거부했다. 창문을 열고는 지아를 방밖으로 끌어낸다. 단호한 손길을 지아는 떨쳐내지 못했다. 닫힌 문에 기대어 지아는 참았던 한숨을 내뱉었다.

  "내가 다 기운 빠지는 느낌이야……."





  화아는 침대에 걸터앉아 허공을 쳐다보았다. 정확히는 창 밖이지만 촛점이 맞지 않는 화아의 눈은 하늘을 그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렇게 기다리면 올 것이다. 그는. 분명히. 알고 있는데 어째서 이렇게 목을 매고 기다리게 되는 것일까. 반드시 그는 올 것인데. 기다리지 않으면 오지 않을 것 같아서 안달하게 되었다. 어째서지, 어째서 이렇게 불안한 것일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왜. 온몸에서 힘을 빼자 상체가 풀썩 침대 위로 쓰러졌다.

  친구들은 이래저래 걱정하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사실 화아는 어째서인지 먹은 것을 소화시킬 수 없다는 점을 빼고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가끔 견딜 수 없이 불안하고 화가 났지만 그것은 그 나름대로 견딜만 했다. 갑자기 눈물이 나는 때도 헛구역질이 올라올 때도 화아는 그냥 몸에 뭔가 문제가 있겠거니 했다. 아무 생각 없이 허공을 보고 있는 중에 일어나는 일이니 그렇게밖에 해석할 수 없었다. 병원을 가보긴 해야겠지만 조금 미뤄도 큰 문제가 생길 병은 아니겠거니 생각했다.

  카르노멘의 얼굴을 보면 반가웠다. 그저 무뚝뚝하게 맞을 뿐이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분명하게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시간. 언젠가부터 그 이후에는 허전함이 찾아왔지만 그런 것쯤은 무시할 수 있을 정도의 행복이었다. 커다란 대가가 뒤따랐지만 그럼에도 놓을 수가 없었다. 마주친 두 눈이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어도 다른 곳에 넘겨줄 수는 없었다. 은빛 속눈썹에 그늘진 은보라빛 눈이 싱긋 미소짓고 있었다.

  "카르노멘."
  "안색이 많이 안좋아. 병원, 아니면 양호실에라도 가봐야 하는 것 아니야?"
  "조만간 갈거야."

  웃으며 머리를 쓸어넘기는 카르노멘의 손에 살짝 머리를 부볐다가 몸을 일으켰다. 상체를 일으키자마자 입술을 부딪쳐 들어간다. 짧은 입맞춤으로 밀착된 몸을 더더욱 붙이며 속삭였다.

  "하자."
  "안 돼. 곧 가봐야해."
  "잠깐만이라도."

  말하는 중에도 손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카르노멘의 교복 상의 자켓은 이미 반쯤 벗겨져 있었다. 카르노멘의 손이 화아의 손목을 붙들었다. 화아의 얼굴이 대번에 찌푸려졌다.

  "왜."
  "안된다니까."

  사탕뺏긴 꼬마처럼 꽁해진 얼굴을 쓰다듬으며 카르노멘이 웃었다. 어린아이를 어르는 투로 속삭이며 화아를 떼어놓는다.

  "주무실 땐 창문을 닫아 둬. 감기들라."
  "올거잖아."
  "잠궈도 들어올 수 있어."
  "그래도 싫어."
  "어린애구나."
  "그러니까 하자."
  "안 돼."
  "……."

  더이상 말하진 않았지만 화아는 여전히 불만 가득한 표정이었다. 카르노멘은 그의 어깨를 도닥도닥 두드려주곤 몸을 일으켰다.

  "잠깐 짬이 생겨서 왔을 뿐이니까. 이제 가야해."

  '가까이서 상태를 확인해 보고 싶기도 했고 말이지. 병원에 가라고 한다고 들을 것 같지는 않고 따로 의사를 부르는 편이 나을 것 같군.'

  카르노멘은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화아에게 고갯짓으로 인사를 하고 그대로 사라졌다. 또 방에 혼자 남은 화아는 퀭한 눈으로 카르노멘이 서있던 자리를 바라보다가 다시 침대 위로 쓰러졌다. 붉은 머리카락이 하얀 시트 위로 흐트러졌다.





  처음 그와 '만난' 것은 봄날이었다. 변덕스러운 날씨 중에서 유난히 포근하고 따뜻하던 그 날, 화아는 봄의 한복판에서 '겨울'을 보았다. 한 겨울의 메마른 눈이 그곳에 흩날리고 있었다. 말도 안되는 환상같은 풍경에 화아는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다. 계속해서 쫓아다니던 시선도 신경쓰였지만 그 때의 행동은 단순히 본능이었다. 있을 수 없는 것이지만 아름다워서 놓칠 수 없다는 본능적인 움직임. 엷게 깔린 가루눈, 별 없는 밤의 하현달.

  온기어린 물방울이 뺨을 타고 떨어져 머리카락 속으로 스며들었다. 하얀 천장이 눈이 시려 옆으로 돌아 누웠다. 있지도 않은 손톱이 손바닥에 배길만큼 주먹을 꽉 쥐었지만 물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흐릿해지는 시야가 분해서 화아는 눈을 있는대로 부릅떴다.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화아의 눈물을 닦아줄 하얀 손도 그의 곁에는 남아있지 않았다.

  "윽."

  아무리 자존심을 세워봐도 흐르는 눈물은 멎지를 않아서 화아는 결국 웅크리고 말았다. 터질 듯한 마음에게서 등을 돌리고 숨죽인 울음을 삼키다가 체해 밭은 기침을 토하며 침묵 속에 침잠해간다.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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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같은 녀석이다. 이것이 첫 인상이었는지 같은 건 기억나지 않지만 기억력이 좋지 못한 편인 내가 이렇게 일관적으로 느끼고 있다는 건 역시 저녀석 문제겠지. 뒤통수를 간지럽히는 시선을 느끼며 지내는 것도 벌써 반년째. 이제는 없으면 허전할 정도가 되었다.









 

 

 

   어느 겨울에
     I wrote to congraturations on Hwa-a&Karnomen's 200th day. I love you Dears.


  먼 곳에서 봐도 반짝반짝 빛나는 붉은 머리카락을 쫓기 시작한 지 어언 199일째. 어찌보면 기념할 만한 날이지만 카르노멘은 오늘도 그저 조용히 그를 바라보는 것을 택했다. 화아는 여자애들이 손가락 꼽으며 센 기념일 따위에 신경쓰는 사람도 아니었고 뭣보다 두 사람은 그 긴 시간동안 제대로 대화 한 번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걸 기념 삼기에는 굉장히 애매한 관계였다. 이런 상황에서 그에게 내일이면 두 사람이 만난 지, 아니 정식으로 교제하기로 한 지 200일째라는 말을 하는 것은 무리였다. 이해도 못할 것이다. 대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되물어오는 것을 듣느니 차라리 생각하지 않는 게 나았다. 사실, 그런 걸 말하는 성격도 못되긴 했다.

"카르노멘, 손님이 오셨습니다."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가 카르노멘의 귓가를 맴돌았다. 메세지 마법이 그의 감사실 책상에 있는 작은 거울과 그의 귀에 걸린 귀걸이 하나에 연동되어 걸려있어 카르노멘이 있는 장소, 그의 의사와 관계없이 상대방의 말을 전달해준다. 그 전언에 답을 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카르노멘의 의지였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대답을 하는 쪽이 감사실의 다른 학생들을 위해 좋았다. 그들은 감사장이 직접 나서서 처리해야하는 일부의 업무를 제외하고는 모든 업무를 스스로 해낼 수 있는 유능한 인재들이다. 카르노멘에게 연락이 온다는 것은 그들로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문제가 닥쳤을 때 뿐. 답하지 않아서야 카르노멘도 좋을 게 없었다. 가끔 일방적으로 모든 연락을 끊고 사라질 때가 있기는 했지만.

  "금방 가겠습니다. 잠시만 붙잡아주세요. 매번 고맙습니다, 레엔."
  "그렇게 전달해드리겠습니다. 이만"

  그의 인사와는 별개의 답변이 돌아오고 통신이 끊겼다. 조곤조곤한 어조와는 다르게 결코 레엔은 감정이 담긴 말에 답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신이 내린 저주같은 능력때문에 인간적인 교류를 완전히 끊고 지냈다. 방금 카르노멘이 건낸 것 같은 사소한 감사인사조차 듣지 못한 척 흘려넘겼다. 감사실의 모두는 레엔의 쌀쌀맞음에 적응해있었다. 물론 페레넬에서 조금만 지내다보면 웬만큼 이상한 사람들에는 다 적응할 수 있게 되기도 했다.

  "그럼 가볼까요."

  그렇게 말하며 모자를 고쳐 쓴 카르노멘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아름다웠다. 딱, 하고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와 동시에 남은 것은 햇빛에 하얗게 반짝이는 엷은 은빛 빛무리 뿐. 아무도 알아차린 사람은 없었다. 그가 앉아있던 장소는 사람들 눈에 꽤나 잘 띄는 벤치. 페레넬의 이상한 사람들 중에서도 카르노멘이 유별난 축에 든다는 것이 그렇게 놀라운 사실은 아니리라. 하지만 카르노멘마저도 그가 사라진 자리를 한참 농구공을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학생들 중 한 사람이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사라졌다. 처음엔 쉽게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가 있는지 혹은 자리를 떠났는지 확인하는 것이 쉬워졌다. 화아가 예민해진 것인지, 그가 허술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저 서로에게 익숙해졌기 때문이라고 짐작해볼 뿐이다. 소년은 어쩐지 시들해져버린 농구에서 손을 놓고 코트를 빠져나왔다. 게임을 하던 멤버들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몸이 안좋아서, 라는 한마디로 가볍게 물리쳐버렸다. 언제나 소리없이 나타나서 조용히 바라만 보다가 또 소리없이 사라져버리곤 했는데 오늘따라 그것이 왜이리 신경쓰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역시 신경쓰여."

  학생 감사실에 찾아가는 것은 조금 거북했다. 이 여자때문이다. 온몸을 가리는 까만 드레스에 베일까지 쓴 보는 것만으로 뭔가 불편해보이는 여자다. 이름이 뭐랬더라. 기억나지 않았다.

  "감사장은 현재 중요한 손님과 대면하고 계십니다. 나중에 다시 찾아와주시겠습니까."

  감사실의 입구를 맡은 그녀는 화아의 말재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지만 사람같지 않은 억양없는 말투에 접근하기 힘든 분위기를 풍겼다. 그래서 화아는 언제나 최대한 빨리 그녀의 앞을 벗어나고 싶어했고, 그것은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화아는 대답도 제대로 하지 않고 도망쳐나왔다. 중요한 손님이라니 얘기가 길어지겠지? 벌써 저녁시간이 가까워 오니 오늘은 패스하고 내일 만나는 게 좋겠다.

  "오랜만에 제대로 일하는 군, 저녀석."

  오늘의 모임 장소는 식당가 입구였던가. 오랜만에 먹는 바깥밥이다. 언제나 손수한 집밥을 먹는 입장에서 사치라고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가끔은 일부러 불량식품을 사 먹는 기분으로 밖에서 밥을 사먹고 싶어진다. 물론 오늘 저녁이 외식이 된 건 단순히 식사담당이 게으름을 피운 탓이겠지만. 간만의 외식이 반갑기도 하지만 외식이라고 생각하면 반드시 가야한다는 의무감이 사라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화아는 멀리 돌아가는 길에 발을 들였다. 귀찮아, 라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유치원 시절부터 몸에 익혀둔 버릇은 알아서 그를 약속 장소로 이동시켰다. 절대로 도망쳤을 때 뒤따라오는 잔소리가 무서워서 가는 것이 아니다. 어릴적부터 철저하게 훈련된 습관일 뿐이다.

  "쳇."

  스스로에게까지 변명해야하는 처지가 제법 한심스럽다. 화아는 괜히 머리를 한번 긁었다. 간지러운 것 같네. 슬쩍 돌아간 고개 탓에 시야도 함께 이동했다. 저건 뭐지. 학생노점상인가. 페레넬은 조건이 되는 사람들 중에서도 재주많은 이들만을 학생으로 받아들여 굉장한 스파르타식의 교육을 시키지만 그 외의 생활에는 거의 무제한적인 자유가 주어졌다. 아주 기본적인 몇가지 규칙만 지키면 학교를 떠나는 순간까지 무슨 짓을 해도 용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페레넬의 학생으로서 모든 생활비를 제공받으며 어떻게든 재산을 불리는, 아니, 정확히는 불리려고 노력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그 악착같은 노력의 결과로 학교에 입학할 때는 땡전한푼 없는 빈털털이였는데 졸업할 때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거부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고로, 이렇게 학교 내에서 노점상을 벌여 용돈벌이를 하는 경우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물론 페레넬의 캠퍼스는 커다란 섬 하나를 전부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크기이기 때문에 안에는 식당가도 상점가도 따로 있지만.

  "이거, 귀걸이?"
  "50Dion입니다. 선물하시려고요?"
  "음……."
  "아하핫, 천천히 고르세요."

  그가 집어든 것은 은빛 사슬이 여러가닥 얽혀 있는 귀걸이였다. 다른 장식이 없어 단정하면서도 심심하지 않은 상당히 세련된 디자인이었다. 정작 관심을 보이고 있는 화아가 그런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이 안타까울만큼 잘만들어진 귀걸이였다. 그리고 그런 것에는 관심도 없는 화아의 시선은 끝에 매달린 영롱한 푸른빛의 보석에 못박혀있었다.

  "얼마라고요?"
  "50dion입니다, 손님."
  "잠깐만요."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지며 화아의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은 단 하나. 귀걸이에 달린 푸른 보석이 카르노멘의 반짝이는 은발에 굉장히 잘어울릴 것이라는 생각뿐이었다.

  "선물하실 건가요? 그러면 이쪽 상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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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요한 손님=얘기가 길다
2 카르노멘이 다른 감사들한테 떠넘기고 일을 안하는 줄 알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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