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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카 타입 자캐 커미션입니다




 맹세해도 좋다. 오성급 호텔 프런트에서 이름을 말하는 건 일평생 가장 특별한 일일 것이다. 교통편을 찾기 위해 켠 지도 앱에서 오성급 호텔이라는 정보를 발견하고 얼마나 놀랐던가. 그때부터 이미 겁이 났다. 미사키 씨는 언제나 새로운 경험의 장을 소개해주는 사람이었지만, 이번 건 도가 지나쳤다. 오성급 호텔이라니. 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 걸까. 이런 곳은 한 끼 식사만 해도 어마어마한 액수가 적힌 영수증이 나온다고 했다. 무서워서 방 가격은 조사해볼 생각도 들지 않았다.

 호텔 직원의 안내를 받아 이동하면서도 자꾸 주변을 두리번거리게 되었다. 가격은 알 수 없지만, 높은 천장이나 심미적인 면모를 충분히 고려해 배치된 실내장식만 봐도 일상적으로 접하던 장소와는 격이 다르단 느낌이 왔다.

 “이 방입니다. 좋은 시간 되십시오.”

 두리번거리느라 호텔 직원이 멈추는 것을 보지 못하고 부딪힐 뻔했다.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직원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왔던 길을 돌아갔다. 저런 것도 프로 정신일까. 알 수 없다.

 이제 이 문만 열면 미사키 씨가 있는 방이다. 여기 도착하는 길이 얼마나 험난했는지 갑자기 눈가가 시큰거렸다. 호텔 이름 하나만 적혀있던 문자, 상상도 해보지 못한 스케일의 건물, 로비에서 길을 찾지 못하고 서 있는데 호텔 직원이 찾아와 말을 걸던 순간, 프런트 데스크에서 제 이름을 말해버린 부끄러움……. 작게 심호흡을 하고 똑똑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익숙한 목소리에 안심이 되는 동시에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언제 보아도 긴장되는, 좋아하는 건지 무서운 건지 알 수 없는 사람.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돌렸다.

 상상보다는 평범한 방이었다. 스위트룸이라는 말에 천장에 샹들리에가 달려있을 줄 알았는데 그보다는 미사키 씨의 방과 비슷했다. 일본 전통 가옥을 모던하게 표현한 느낌의 방이었다. 바닥에는 뜻밖에 제대로 된 다다미가 깔려있다.

 “이쪽이야.”

 룸에 딸린 미니 바에 앉은 미사키 씨는 방금 씻었는지 젖은 머리에 샤워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속옷을 걸치지 않아 자연스럽게 벌어진 가슴선이 샤워가운 사이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안녕하세요.”

 차마 계속 쳐다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고개를 돌렸다. 넓은 창 너머로 도쿄의 야경이 아름답다. 검은 하늘 위로 수 놓인 도시의 은하수가 미사키 씨의 검은 머리카락처럼 눈부시게 빛난다.

 “이리 와.”

 부드럽고 단호한 명령이었다. 어떻게 그의 곁으로 다가갈 수 있을까.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다. 바닥의 무늬를 세며 미사키 씨가 내어준 옆 자리에 앉았다. 달콤한 와인향이 났다.

 “어디 보는 거야?”

 “네? 글쎄요.”

 테이블 재질이 참 고급이다. 미사키 씨 집에 있는 가구들과는 확실히 분위기가 다르지만 모던한 생김 덕에 집에 있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날 봐야지.”

 웃음기 섞인 목소리였다.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다행이었다. 미사키 씨는 데이트 중에도 기분이 나쁘면 곧잘 심술을 부리곤 했다.

 “저 내일은 일이 있어요.”

 “알아.”

 역시 내일이 메이저 데뷔 일인 건 모르는 모양이다. 조금 김이 샜다. 모르고 있을 거라고 뻔히 짐작하고 있었는데 왜 마음 한구석이 허전한지 몰랐다. 그렇겠지. 미사키 씨는 바쁘니까 렌게 하나가 데뷔하는 데에 신경 쓸 수는 없었다. 그런 건 사장인 미사키가 아니라 담당 프로듀서가 할 일이었다.

 “날 보라니까.”

 미사키 씨는 자기 말에 복종하지 않는 걸 아주 싫어한다. 짜증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심장이 쿵쾅거리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대로 눈을 들어도 되는 걸까. 정말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언제나 미사키 씨는 오성급 호텔 프런트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여자다.

 “실례합니다.”

 눈꺼풀이 절로 떨렸다. 희고 매끈한 다리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흘러내린 검은 샤워가운과 그 사이로 드러난 흰 피부가 뇌리에 그대로 박히는 것 같다. 울고 싶어졌다. 길고 아름다운 손가락 위에서 찰랑거리는 붉은 와인과 빙그레 미소 짓는 붉은 입술이 보였다. 미사키 씨는 눈을 가늘게 뜨고 기특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다.

 이제 괜찮냐고 다시 눈을 돌려도 되냐고 묻고 싶은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지만, 미사키 씨의 눈에는 마력이 있다. 영혼을 사로잡힌 것처럼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힘. 젖은 머리카락과 하얗게 드러낸 피부가 너무도 자극적이라서 눈을 뜨고 있는 게 죄스럽다. 눈을 감을 수도 뜰 수도 없는 곤경 속에서 결국 눈물이 앞을 가렸다.

 “죄, 죄송해요.”

 “울지 마.”

 상냥하게 속삭이며 미사키 씨가 뺨에 입을 맞췄다. 달콤한 냄새. 벌써 꽤 많이 마신 모양이었다. 미사키 씨는 스치듯 나를 지나쳐갔다. 눈물을 닦느라 그가 무얼 하는지 몰랐다. 늘 그래왔듯 눈물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그가 돌아와 자리에 앉았을 때에서야 겨우 눈물이 멈춰서 앞을 볼 수 있었다. 눈물의 여파로 멍해 있는 내게 미사키 씨가 말한다.

 “입어봐.”

 뭘요? 하는 물음이 입술까지 차올랐다. 간신히 이성을 붙잡고 주변을 둘러보자, 붉은 옷감이 눈에 들어왔다. 저렇게 튀는 색인데 바로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바보 같다. 여전히 드러나 있는 미사키 씨의 살결에 시선을 빼앗긴 탓이었다.

 “이게 뭔가요?”

 차마 손을 댈 엄두가 나지 않아 우선 물었다. 예상대로 미사키 씨는 답이 없다. 그는 일에 관련된 것이 아니고서는 설명하는 일이 없었다.

 사락거리는 천이 펼쳐지지 않도록 양손으로 집었다. 매끄러운 감촉은 만지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질 정도였다.

 “잠깐.”

 다음 병을 열어 새 와인을 음미하던 미사키 씨가 말했다.

 “그건 놔두고 먼저 씻어.”

 “네.”

 오늘은 자고 가라는 것일까? 데이트가 끝나면 그때그때 집에 돌려보내 줬기 때문에 미사키 씨의 집에 들렀을 때도 따로 씻어본 적은 없었다. 낯설다. 욕실 방향을 가르쳐준 미사키 씨는 마지막으로 한가지 지시를 덧붙였다.

 “샤워가 끝나면 알몸으로 여기로 돌아와.”

 “……네?”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아니, 이해하지 못했다. 이게 무슨 소리지?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그가 잘못 말했을 리는 없으니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뭐해. 어서 씻어.”

 미사키 씨는, 미사키 야스하는 두 번 말하지 않는 사람이다. 결코 설명하지도 않는 사람이다. 몇 번이고 그를 거스르려 노력했지만,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 미사키 씨는 언제나 상냥하고 친절했는데 어째서일까. 나는 결국 제대로 되물어보지조차 못한 체, 뒤로 돌아섰다.

 샤워실은 룸 안의 다른 공간처럼 호화롭고 아름다웠다. 입고 있던 옷을 개워넣으면서도 어떻게 해야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쓸데없는 고민이다. 아무리 고민해도 결국 미사키 씨가 원하는 대로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알몸이라니.

 따뜻한 물에 몸을 맡기고 서있자니 문득 이곳이 호텔이라는 사실이 떠오른다. 설마? 그럴 리 없다. 아직도 미사키 씨는 중학생이고, 나는 이제 겨우 열여섯인데. 설마 그럴 리 없다. 하지만 그게 아니면 왜 호텔로 불렀을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렇게 잡생각이 많으니 씻는 둥 마는 둥 할 수밖에 없었다. 비누거품이 다 쓸려내려가고 나서야 제대로 문지르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라 새로 몸을 씻어야 했다. 머리를 감고 몸을 씻어내다가 또 멈칫거렸다. 결국엔 욕실에서 나갈 순간이 두려워 조금이라도 더 오래 씻기 위해 다시 온몸을 씻어낸다.

 아무리 노력해도 시간을 붙잡을 수는 없어서 결국에는 욕실 문 앞에 서고 말았다. 옷에 손을 대었다 떼기만 서너 번. 결국 마지막 타협점을 붙잡았다. 몸을 가리면 안 된다고는 하지 않았으니 수건을 둘렀다. 호텔에서 준비한 수건은 크고 보드라워서 한 바퀴 둘러도 가슴부터 허벅지까지 넉넉하게 가려졌다.

 “미사키 씨.”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는 홀로 흥취를 즐겼는지 발갛게 뺨이 달아올랐다. 평소에 볼 수 없는 가볍게 흐트러진 모습이 색다르고 매력적이라 눈을 뗄 수 없다.

 미사키 씨는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 건 전적으로 복장 탓이었다. 미사키 씨가 앉은 자리 앞에는 전면 유리창이 야경을 아름답게 담고 있었다. 걸음걸음이 무거워서 그의 손에 닿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아!”

 수건을 던져버리고 허리를 붙드는 미사키 씨의 손길에 온몸의 근육이 바짝 굳어버린다. 몸이 맞닿는 것과 동시에 입술이 합쳐지고 아아. 미사키 씨의 입에 남은 와인이 조금 흘러 넘어왔다. 향은 그렇게 달착지근했는데 생각보다 쓰다. 눈을 질끈 감았다. 처음 하는 키스도 아닌데 알코올 때문인지 아찔했다.

 미사키 씨는 만족스러울 때까지 머릿속을 휘젓고 떨어졌다. 그의 뺨에 오른 흥취가 내게도 옮아있겠지. 눈을 뜨는 게 무서웠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이 추위를 호소했다.

 “눈 떠.”

 미사키 씨가 명령했다. 그가 명령하면 따를 수밖에 없다. 나는 눈을 뜨고 탁자에 얌전히 놓여있던 붉은 천이 하공에 펼쳐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미사키 씨는 붉은 미니 드레스를 손에 쥐고 내게 입 맞췄다.

 “입어봐.”

 “지금요?”

 “응.”

 속옷도 입지 않고 드레스를? 물을 순 없는 질문이 입안을 맴돌았다. 나는 그냥 조용히 그의 말에 순종했다. 미사키 씨가 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브래지어도 걸치지 않았으니 태가 날 리 없다. 예쁠 리가 없는데 미사키 씨는 흡족해 보였다. 이거면 된 걸까. 어쨌든 그가 만족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러면 벗을 수 있겠지.

 “저, 미사키 씨.”

 “음?”

 “이 옷은 뭔가요?”

 “선물이야.”

 미사키 씨는 아찔한 미소를 짓는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지독히도 잔혹한 그 미소는 꼭 그 어느 때보다 다정한 목소리와 함께였다.

 “메이저 데뷔 선물.”

 “알고 계셨어요?”

 “당연하지. 누가 잡은 날짠데.”

 이건 정말로 놀랐다. 미사키 씨가 내 데뷔 일을? 직접 정했다고? 말도 안 돼. 우습게도 거짓말일 것 같았다. 미사키 씨는 단 한 번도 내게 거짓말을 한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왜. 놀랐어?”

 그는 상냥하게 웃으며 내 허리를 안아 침실로 이끌었다. 나는 어물어물 아니라고 답한다.

 “내가 직접 스카우트한 아이돌이야. 이 정도도 챙기지 않을 거라면 뭐하러 그런 짓을 했겠어.”

 안 그래? 하고 미사키 씨는 내 뺨에 입을 맞췄다. 화끈 얼굴이 달아오른다. 그랬다. 미사키 씨는 오디션 결과를 거부한 나를 집까지 찾아와 스카웃했다. 스카우터도 아니고 사장이 직접. 돌이켜보면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게 미사키 씨가 회사를 맡은 뒤에 처음으로 열린 오디션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오디션을 참관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설령 참가했다고 하더라도 사장이 직접 스카우트하기 위해 나서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미사키 씨.”

 “쉿.”

 퍼부어지는 키스에 놀라서 붙잡아보려 했지만, 간단히 거부당했다. 조금씩 조금씩 상체가 기울어진다. 마침내 키스 공세가 끝난 것은 침대에 완전히 드러누운 뒤였다.

 “자, 잠깐만요.”

 “렌게.”

 귓가에 속삭이는 낮은 목소리. 나는 직감했다. 이건 피해갈 수 없겠구나.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의 뜻대로 될 것이다. 그렇게 하고 말리라. 나는 두 눈을 감았다. 모든 걸 미사키 씨의 손에 맡기면 파도도 잠잠해질 것이다. 어떻게든 될 것이다. 틀림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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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커미션에서 이어집니다






 “웃어봐요.”

 야스하가 명령했다. 렌게는 눈만 깜빡였다.

 “어서.”

 렌게는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이 사람 기분이 상했구나. 렌게는 억지로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이렇게 근사한 슈트를 입은 사람이 렌게의 방에서 자신을 해칠 리 없다고 이성이 말하고 있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잘했어요.”

 야스하는 살갑게 웃는 얼굴 그대로 렌게에게 다가와 상체를 기울여 얼굴을 가까이했다. 렌게는 핀에 꽂힌 개구리처럼 얼어붙었다. 미소를 유지하는 것도 버거워 필사적이 되었다.

 “이렇게 예쁜데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여줘야죠. 세상에는 예쁜 걸 보고 숭상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주 많아요.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가 알아서 준비할 테니까. 요시노양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쉿.”

 렌게는 붉은 입술이 속삭이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꺼낼 수 있는 반론조차 없었지만, 할 말이 있었더라도 거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야스하는 아름답고 절대적이었다. 렌게는 야스하의 시선에 포박당한 채 방향키를 내어주고 말았다.

 “아침 아홉시에 기획사로 찾아오세요. 오디션 합격자라고 하면 안내해줄 겁니다.”

 “네.”

 야스하는 눈을 가늘게 뜨곤 귓속말이라도 하듯 렌게의 뺨 근처로 입술을 가져왔다. 뜨듯한 바람이 느껴져 렌게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코웃음 소리가 났다. 야스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스쳐 갔다. 렌게는 돌아볼 수조차 없었다.

 “나올 거죠?”

 그건 질문이 아니었다. 렌게는 허공에서 흔들리는 시선을 붙들며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았다. 손끝이 차갑게 식어있었다.

 “내일은 학교에 가야 하는데요.”

 희미하게 들린 건 분명 혀를 차는 소리였다. 렌게는 손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오디션에 합격했다고 하면 결석으로 처리되지는 않겠죠. 렌게양은 모범생이니까요.”

 허락한 적도 없는데 이름을 부른다. 렌게는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야스하와 등지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담임 선생님께도 회사에서 연락해야 하는 건 아니겠죠?”

 ‘설마,’ 하는 빈정거림이 들리는 것 같아 솜털이 쭈뼛 섰다.

 “아니에요. 그럼 내일, 내일 뵈어요.”

 “고작 연습생 수업에 사장이 일일이 참관할 필요는 없겠죠. 푹 주무세요. 내일은 고단한 하루가 될 테니.”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다정하지만 비참한 말을 남기고 야스하는 방을 나갔다. 부모님 쪽은 이야기가 쉽게 풀리지 않는지 점점 언성이 높아지고 있었다. 렌게처럼 호락호락할 리 없는 부모님이었다. 대학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는 부부는 대개의 고학력자가 그렇듯이 학구열이 높은 것은 물론 보수적이고 깐깐하기까지 한 사람들이었다.

 렌게는 최대한 바깥소리에 신경 쓰지 않으려고 애쓰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두근거리는 심장이 잠잠해지질 않았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마음을 가라앉혀보려는 렌게를 방해했다.

 “렌게양.”

 문이 열리더니 야스하가 들어왔다. 눈이 마주치자 자연스럽게 웃어 보이는 눈매가 예뻤다. 렌게가 얼이 빠져 있으니 야스하가 손을 잡아끌었다.

 “해줘야 할 얘기가 있어요. 당신만 할 수 있는 일이에요.”

 렌게는 부모님과 키쿠치 앞에 세워졌다. 겁먹은 렌게가 야스하를 돌아보았지만, 그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물어보세요. 렌게양이 제게 말했으니까요.”

 “저게 정말이니?”

 아버지가 역정을 냈다. 렌게는 당황했다.

 “뭘요?”

 “저 사람이 네가 아이돌이 되고 싶다고 했다는구나.”

 어머니도 한마디 거들었다. 렌게는 놀라서 야스하를 쳐다봤다.

 “꼭 아이돌이 되고 싶다고 했잖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야스하는 여전히 친절하게 웃고 있었다. 어깨를 붙든 손에 힘이 느껴지지 않았더라면 그게 무슨 말이냐고 항변할 뻔했다. 렌게는 부모님을 보았다가 엄한 눈초리에 기가 꺾였다.

 “정말이에요. 저 아이돌이 되고 싶어요.”

 야스하가 부드럽게 어깨를 토닥였다. 어머니가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아버지는 생각에 잠긴 듯했다.

 “학업이 중요하다는 두 분 말씀에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젠 아시겠지요. 따님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언 지를요. 렌게양은 워낙 모범생이고, 두 분의 의견을 존중하니까 말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몰래 오디션을 본 거죠. 따님의 꿈을 기어이 막으셔야만 행복하시겠습니까. 렌게양에게도 스스로 선택할 기회를 주셔야지요.”

 아버지는 긴 침음성을 뱉었다. 끝내 이긴 것은 야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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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절히 바라던 꿈이 정작 현실이 되면 뜻밖에 달갑지 않은 경우가 있다. 현실이 버겁기 때문인가. 어쩌면 정말 바라는 꿈이 아니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의심은 변명의 기회조차 주지 않고 점차 자라나고 있었다.

 요시노 렌게는 갓 데뷔한 아이돌이다. 아직 얼굴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서 자기 홍보를 위해 들어오는 일이라면 길거리 판촉이라도 마다할 수 없는 무명 아이돌. 렌게에겐 길게만 느껴지지만, 남들은 금세 데뷔했다고 부러워하는 연습생 기간을 거쳤다. 예쁜 아이들이 수도 없이 모여있는 아이돌 기획사에서도 눈에 띄는 미모 덕인지 먼저 오디션에 합격한 선배들을 제치고 데뷔가 결정됐다.

 오디션을 본 건 우연이었다. 소심하고 눈치를 많이 보는 렌게가 처음부터 아이돌을 꿈꿨던 게 아니었다. 길을 가다 스카우터에게 명함을 받았고, 그걸 누가 봤는지 학교에 온통 렌게가 아이돌 오디션을 본다는 소문이 퍼져서 차마 생각이 없다고 답할 수 없었을 뿐이었다. 준비한 것도 없는데 붙어버릴 줄 알았다면 무슨 핑계를 써서라도 빠졌을 것이다.

 놀라운 일은 그때부터다. 합격 통지와 함께 소집일을 통보받았지만, 렌게는 나가지 않았다. 오디션을 위해 무대에 섰을 때도 심장이 떨려 혼났는데 그런 일을 일상적으로 해야 한다니 끔찍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기획사 관계자가 렌게네 집을 방문했다.

 렌게에게 명함을 건넸던 스카우트와 채용 담당자라는 사람, 그리고 렌게 또래 아이가 있었다. 놀랍게도 그 애는 자신을 기획사 사장이라고 소개했다. 렌게는 물론 부모님까지 눈이 휘둥그레졌다.

 찾아온 용건은 간단했다. 자기들이 렌게를 데뷔시키겠다는 거였다. 렌게의 부모님은 둘 다 학술계 종사자로 방송계를 곱게 바라본다고 할 수는 없는 사람들이었다. 부모님 설득은 채용 담당자라고 밝힌 키쿠치가 도맡았다. 렌게의 마음을 돌린 건 사장, 미사키 야스하였다.

 거실에서 어른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렌게와 야스하는 렌게의 방으로 이동했다. 딱 맞는 검은 수트를 갖춰 입은 야스하에게서는 당당함과 품위가 느껴졌다. 야스하와는 어울리지 않는 소박한 방이었음에도 특유의 아름다움은 빛을 잃지 않았다. 렌게로서는 마주하는 것만도 만만치 않은 사람이었다.

 “왜 나오지 않았죠?”

 야스하가 물었다. 오디션 본 기획사에서 나왔다고 했을 때부터 예상하던 질문이었다. 다행히도.

 “제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니까요.”

 렌게는 애써 눈을 피하며 더듬더듬 대답했다. 자리도 권하지 않았는데 야스하는 렌게의 책상 의자에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합니까.”

 책망조로 들릴 수 있는 말이었지만, 야스하는 그저 궁금한 듯했다. 이유까진 생각해두지 않았던 렌게는 조금 당황했다.

 “무대에 서는 건 저한테 무리예요. 노래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춤도 못 추고, 사람들이 좋아할 리 없어요.”

 “오디션에 합격했잖아요?”

 “네?”

 “오디션에 합격했다는 건 당신이 매력적이라는 의미죠. 우리는 스타를 키워내는 일을 합니다. 그 정도는 알아볼 수 있어요.”

 야스하는 온화하게 웃었다. 날카로운 인상이 미소에 살그머니 누그러졌다. 렌게는 왜 이 사람이 아이돌을 하지 않는 걸까 의문스러웠다.

 “아니면 전문가의 판단을 의심하는 겁니까?”

 “그런 건 아니에요.”

 렌게는 곤혹스레 고개를 저었다.

 “그럼 뭔가 다른 이유라도?”

 “그게…….”

 렌게는 상대의 기분이 상하지 않을만한 좋은 대답을 고민했다. 건강이 안 좋아서? 학업에 전념하고 싶어서? 그도 아니면 아이돌이 적성에 맞지 않아서? 어느 쪽이라도 거짓말은 아니었다. 뭐라고 대답하면 야스하가 화내지 않을까. 전부 그럴듯하지만 뭐라고 해도 진짜 이유가 아니라는 걸 들킬 것만 같았다.

 “주목받는 게 무서운가요?”

 “……!”

 다른 모든 상황을 가정했지만, 이것만은 생각하지 못했다. 렌게는 호된 꾸중을 들은 어린애처럼 얼어붙었다. 야스하는 그런 렌게를 달래듯이 부드럽게 물었다.

 “사람들이 당신을 쳐다보는 게 싫습니까? 지금도 무서워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그, 그건…….”

 변명이라도 해볼 참으로 입을 열었지만, 그럼 그렇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렌게는 애꿎은 손끝만 쥐어뜯었다.

 “절 보세요.”

 야스하가 말했다.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오해의 여지 없는 명령조였다. 렌게는 머뭇머뭇 야스하를 쳐다보았다. 야스하는 다 이해한다는 듯 따뜻한 시선으로 렌게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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