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레인트(n)'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5.12.08 DN(nGRnG) 낙서 3
  2. 2015.12.08 DN(nGRnG) 낙서 2
  3. 2015.12.04 DN(nGRnG) 낙서 1
  4. 2015.09.06 If I was there

DN(nGRnG) 낙서 3

the other world 2015. 12. 8. 16:05

DN(nGRnG) 낙서 2에서 이어집니다.


5.

"사랑하는 건 어떤 느낌이야?"

 제레인트가 물었다. 루비나트는 먼 곳에 시선을 준 채 반응이 없었다.

 "이봐."

 습격을 피해 도주를 시작한 것도 벌써 일주일이 넘었다. 제레인트는 처음으로 온전하게 자신이 혼자라고 느꼈다. 줄곧 바라던 혼자라는 감각이 낯설기만 했다. 제레인트는 불안했고, 살짝 정신이 나간 것 같은 루비나트가 신경 쓰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제레인트는 안중에도 없었던 루비나트였지만 그래도 괜찮았던 건 그 녀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음 착한 모험가. 아르젠타에 이어 제레인트와 함께 있 어준 솔직한 녀석.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마도 유일한 알테이아의 영웅.

 "루비나트."

 반응이 없는 것도 지쳤다. 제레인트는 생각했다. 그 녀석이 곁에 있었다면 말해주지 않았을까.

 '제레인트 잘못이 아니에요.'

 한낱 인간이 이렇게 그리울 만큼 약해지고 말았다. 아니, 그건 거짓말이다. 제레인트는 처음부터 그 녀석이 좋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마음 착하고, 아르젠타를 좋아하고, 남을 졸졸 따라다니면서 참견하는 모험가가 좋았다. 제레인트는 조금쯤은 옛날의 자신을 이해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인간이 이렇게 마음이 든든해지는 존재라면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아도 데리고 다닐만할지도 모른다.

 보고 싶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6.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가 천천히 내뱉는다. 허파가 꽉 막힌 듯 숨쉬기가 힘들었다. 미스트랜드에 도착한 후 수십년을 멈추지도 않고 계속되던 증상이었다. 다른 일에 잠시 집중하면 괜찮아졌다가 여유가 생기면 다시 돌아왔다. 다행히도 해야 할 일은 아주 많았다.

 살아남아야 했다. 오염된 보옥에서 태어났지만 루비나트는 알테이아의 생명이었다. 긴 세월 살아남을 각오를 다졌다. 모노리스의 문은 닫혔다. 그러나 한 번 열린 문은 다시 열릴지도 모른다. 그런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지만 혹시라도 벌어진다면 루비나트는 돌아가야 했다. 의지할 사람 하나 없이 혼란 속에 남겨진 페더를 위해 돌아가야 했다. 연고도 없는 곳에서 숨을 거둔 탓에 안식을 얻지 못하고 한 줌 모래로 흩어진 메리엔델을 위해 돌아가야 했다.

 루비나트는 돌아가기 위해 공부했다. 미스트랜드에 대해, 그리고 베스티넬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아야 했다. 갓 태어난 갓난아이처럼 듣고 손을 뻗었다. 잡히는 것은 수도 없이 많았다. 정보를 모으고, 익히고, 가리는 것에는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알테이아에 갇힌 채 모노리스에 대해 꿈만 꾸던 나날과 마찬가지로 시간은 충분했다.

 루비나트는 느리게 걸었다. 시간은 빠르게 루비나트를 스쳐 갔다. 루비나트는 동면하는 개구리처럼 웅크리고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지난 세월이 얼마였는지는 모른다. 어느 날 갑자기 문이 열렸다. 루비나트는 깨어났지만, 곧장 알테이아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베스티넬의 새로운 군대만큼 알테이아가 준비되어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알테이아가 없어지면 돌아갈 곳도 없었다. 루비나트는 하루에 한 번 먼지를 털 때를 제외하면 신경조차 쓰지 않게 된 유골함을 한 번 쳐다보았다.

 문을 만들었다. 베스티넬의 군대가 아우성거리는 소리는 유쾌했다. 어렴풋이 이제 일어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이 들어?"

 새로운 지성과 기적, 온기가 루비나트를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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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N(nGRnG) 낙서 2

the other world 2015. 12. 8.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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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있잖아."

 벗은 상체가 빼빼 말라서 굽힌 등으로 갈비뼈가 보인다.

 "…루비나트."

 이 꼬맹이, 이름으로 불렀던가.


 호수는 수풀에 묻혀 있었다. 인가와는 한참 떨어져 그야말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무법지대다. 약해졌다고는 하지만 루비나트는 드래곤이고 제레인트 역시 미스트랜드의 독기에 얌전히 죽어줄 생각은 없었다. 괜찮겠지 생각하면서도 손에 힘이 풀리지 않았다. 제레인트는 안절부절 발을 굴렀다. 그런 줄도 모르고 루비나트는 태평하기만 했다.

 며칠을 씻지 못하고 달렸는지 옷이고 몸이고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호수를 발견하자마자 기뻐 뛰어든 것은 제레인트였다. 루비나트는 어슬렁어슬렁 뒤따라오더니 옷을 입은 채로 물에 잠겼다. 그 상태로 수면에 떠다닌 게 벌써 한 시간이다.

 "안 갈 거야?"

 대답이 없다.

 "야, 케이어스. 안 가냐니까…요!"

 삼십 분 전에는 이렇게 부르면 대답을 했고  십분 전까지만 해도 손을 휘저었는데 이제는 반응이 없다. 제레인트는 덜컥 겁이 났다. 물에 빠져 죽은 시체는 위로 뜬다던데.

 "자냐?"

 겁먹은 목소리가 된 것이 불만스럽지만, 지금은 그보다 루비나트가 걱정이었다. 물속에 드래곤에게 치명적인 독을 가진 물고기라도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제레인트는 나뭇가지에 널어놓은 옷을 만져보았다. 아직 축축하긴 하지만 제법 말랐다. 그러고 보니 빨래하는 걸 보던 루비나트가 말려준다고 했던 것 같다.

 "옷 말려준다며. 뭐하는 거야."

 말꼬리가 못내 흐려졌다. 루비나트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제레인트는 손끝을 깨물다가 이내 눈을 질끈 감았다.

 "빨리 안 나오면 용서 안 할 거야?"

 어린애가 떼를 부리는 것 같아서 부끄러웠다. 그 녀석이라면, 알테이아에서 만난 바보같이 착한 모험가라면 이 말에 움직여주었을 것이다. 루비나트가 신경쓸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말해버린 것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역시나 루비나트는 반응이 없다.

 이쯤 되니 정말로 심장이 두방망이질하기 시작했다. 두 번, 세 번 서있는 자세를 바꿨다가 조그맣게 이름을 불러보았다. 이번엔 들리지도 않았을 테지만 대답이 없는 게 불길했다.

 "루비나트!"

 풍덩. 호숫물이 넘쳐 땅을 적셨다. 물결이 일파만파 퍼져나간다. 제레인트는 적을 향해 날아갈 때처럼 빠르게 헤엄쳤다. 수면 위에 동동 뜬 빨간 머리카락의 주인을 낚아챈다.

 "야, 루비나트!"

 마구 흔드니 물이 얼굴 위로 튀었다. 시체처럼 창백한 눈꺼풀 위로 물방울이 맺혔다.

 "일어나. 바보야. 언제까지 잘 거야. 계속 여기 있으면 안 된다며!"

 마음이 급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손이 움직였다. 주먹을 꽉 쥐고 휘두르려는 찰나,

 "그 손 치워라."

 루비나트가 눈을 떴다.

 "시체도 팰 놈이네! 알았으니까 놔. 그 주먹도 치우고."

 한숨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뭔가 말하는 것 같았지만 웅얼거려서 내용은 전혀 알 수 없었다. 제레인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벌써 이렇게 됐나. 나가자, 꼬맹이… 울어?"

 훌쩍훌쩍. 눈물이 나는 게 바보 같고 서러웠다. 약한 모습 보이면 안 된댔는데. 아르젠타가 강해지라고 했는데. 타락한 케이어스 따위 죽어버려도 상관없는데.

 "안 울어. 누가 너 같은 거 때문에…."

 훌쩍. 눈가에서 떨어지는 건 호숫물이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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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N(nGRnG) 낙서 1

the other world 2015. 12. 4. 13:23

1.

 "하여간 멍청한 꼬맹이 에인션트 같으니. 원래 이런 건 말이야. 분위기가 중요한 거야."

 홍염의 드래곤은 히죽히죽 웃었다. 매끈한 얼굴, 붉은 눈동자에 빠져들었다. 아찔해 눈을 감았다. 낯선 감촉과 함께 알싸한 황금주 향이 혀끝으로 전해졌다. 


 훗날 제레인트는 회상했다. 그 날 그 장소에 루비나트가 말했던 분위기따윈 없었다. 감시의 눈을 피해 숨어든 지저분한 은신처에는 안심하고 등을 기댈 장소조차 없었고 냄새가 지독했다. 먹을 거라고는 루비나트가 챙겨온 황금주뿐이었으며, 잔뜩 취한ー진짜 취한 건 아니었을 것이다ー루비나트는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지금 돌이키면 최악이라고 평가해도 별다르지 않은 밤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진하던 그 날의 제레인트는 그것이 그렇게 좋았더랬다. 

 아. 루비나트. 

 얕은 탄식이 혀밑으로 샌다.


2.

 "너 진짜 드래곤 맞아?" 

 제레인트는 루비나트를 노려보았다. 푸른 옷에 붉은 머리카락이 인상적이다. 어디선가 본 것 같다고 줄곧 생각했는데 책에서 본 홍사등롱(紅紗燈籠)과 똑같다. 괜히 웃음이 나려는 걸 억지로 입가를 굳혔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모르겠네." 

 언제나처럼 시큰둥한 대답에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솟아올랐다. 제레인트는 도전적으로 뱉었다. 

 "사랑을 하는 드래곤 같은 건 들어본 적도 없어. 너 진짜 드래곤 맞아?" 

 번쩍. 마른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졌다. 제레인트는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바깥 날씨를 살피러 돌아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붉은 눈이 빛나고 있었다. 루비나트의 두 눈이 어둠 속에서 제레인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미스트랜드로 넘어와서 루비나트가 제레인트와 눈을 맞춘 건 처음이었다. 

 "꼬맹이가 좋게좋게 넘어가니까 못하는 말이 없네." 

 기억났다. 제레인트는 등을 꼿꼿이 폈다. 그때도 이런 눈빛이었다. 알테이아에서 케이어스의 사념체가 정체 모를 술법으로 제레인트의 힘을 봉인했을 때도이랬다. 저절로 주먹이 쥐어졌다. 무릎을 굽혀 무게중심을 낮춘다.

 "…왜요." 

 제레인트가 듣기에도 제 목소리는 불퉁했다. 

 "한 번만 더 그딴 소릴 함부로 지껄이면 가만 안 둘 줄 알아." 

 루비나트는 어딘가 김이 샌 것 같았다.


3.

 취해서 쓰러진 꼴이 우습다. 루비나트는 피식 웃었다. 흙바닥에 널브러져 금발이 지저분해진 것도 모르고 제레인트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두개골 깊숙한 곳까지 찌르르 울리는 냄새는 얼큰하게 들이킨 황금주의 발자취였다. 약해진 자신보다도 제레인트가 먼저 취해버렸다. 믿기지 않을 만큼 인간 꼬맹이 같다. 루비나트는 빈 술병으로 제레인트의 뺨을 눌렀다. 

 "이봐, 꼬맹이." 

 미동도 없다. 루비나트는 습관적으로 술병을 기울였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한 방울도 고이지 않았다. 

 루비나트는 제레인트를 바라보며 좁은 공간에서 보다 편하게 자리 잡기 위해 다리를 뒤틀었다. 제레인트가 대자로 뻗어 있어서 어떻게도 되지 않는다. 루비나트는 발로 밀어 제레인트를 유선형으로 꺾어놓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 녀석 드래곤이 맞긴 한가? 둘이서 지내면서 몇 번이고 그런 생각을 했다. 알테이아에서도 미스트랜드에서도 한결같이 짜증스러운 꼬맹이기는 하지만, 뭔가 다르다. 아이오나도 울보에 꼬맹이에 겁쟁이였지만 제레인트와는 달랐다. 아이오나는 완성된 드래곤이었다. 케이어스의 기억을 가지고, 지켜야 할 사명을 가지고, 변치 않는 드래곤이었다. 

 "한 번 죽었던 녀석이랬지." 

 인간을 동경했다는 것 같았다. 

 "그래도 그렇지, 이게 가능한가?" 

 루비나트는 빙빙 도는 머리를 잡고 생각을 정리해보려다가 이윽고 눈을 감았다. 모르겠다. 축축하고 차가운 벽에 직접 닿자 머리가 찌르르 울렸다. 아오! 신경질 내며 몸을 앞으로 당겼다. 또 제레인트와 부딪힌다. 루비나트는 낮게 신음했다. 진짜 모르겠다. 

 "네가 자초한 거다." 

 깨면 시끄럽겠군. 루비나트는 제레인트의 뺨을 쭉 잡아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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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I was there

the other world 2015. 9. 6. 10:06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렀다. 드넓은 평야는 푸르게 물들어 올가을은 풍족하리라고 기대함 직했다. 멀리 보이는 인가에서는 밥 짓는 연기가 오르고, 아이들과 집짐승이 함께 뛰놀았다.

루비나트는 한적하고 여유로운 풍경을 바라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확실히 안정기에 접어들기는 든 한 모양이었다. 전쟁이 막 끝났을 당시라면 어디에서 밥 짓는 연기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감개무량했다.

전쟁이 끝나고 벌써 십 년. 대륙은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이제 어느 곳에서도 전란의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병사들은 옷을 갈아입고 창과 칼 대신 농기구를 들었다. 모든 백성이 풍족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언제 죽을까 불안에 떨 필요는 없었다. 아이들은 내일을 꿈꾸고 어른들은 그 웃음에 소중히 간직해온 희망을 실었다.

페더와 엘리자베스가 온 힘을 다해 빚어낸 나라는 긴 세월이 조금도 아깝지 않을 만큼 충분히 아름다웠다. 긴 전쟁으로 생긴 커다란 상흔은 아직도 대지 곳곳에 남아있지만, 그것은 이미 지난 상처였다. 아물어 남은 흉터는 훈장이 되는 법이었다. 사람들은 전쟁이 떠오르는 무언가를 보면 뿌듯해 하며 말했다.

우리가 이렇게 평화롭게 사는 것도 모두 정복왕 페더님의 공적이지요.’

이렇게 백성들이 행복해하는데도 엘리자베스는 무엇이 불만인지 아직도 부족하다며 온종일 정무를 보느라 지친 몸으로 밤새 공부를 했다. 덩달아 페더와 메리엔델도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바빠졌다. 정해진 직무가 없는 루비나트만 일없는 한량처럼 길거리를 떠돌았다.

레드드래곤이여.”

페더가 루비나트를 불렀다. 특유의 자갈밭을 긁는 듯한 거친 목소리였지만 무척 조용한 부름이었다. 루비나트는 히익, 하고 비명 아닌 비명을 질렀다.

뭐야, 갑자기. 닭살 돋게.”

페더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풍채만큼이나 긴 숨으로 한참이나 웃었다. 루비나트는 머쓱하게 그 모습을 지켜만 보았다. 평소대로라면 뒤통수라도 한 대 후려갈겼을 테지만 뭐라 할 수가 없었다.

, . 적당히 웃어라.”

결국, 민망해진 루비나트가 한마디 했다.

미안하게 됐군.”

웃음을 멈춘 페더는 다시 웃으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상대해주는 녀석이 없어 동굴에 틀어박히려던 루비나트를 불러낸 것은 페더였다. 뜬금없이 용건도 말하지 않고 시간과 장소만을 전달하는 건방진 통보. 불러낸 사람이 페더가 아니었으면, 진심으로 벗이라 부를 수 있는 루비나트의 몇 안 되는 동료 중 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진작 그쉘 손에서 가루가 되었을 편지였다. 루비나트는 투덜거리면서도 두말없이 달려 나왔다. 심심해서기는 했지만 심심해서만은 아니었다.

묻고 싶은 것이 있어 불렀다.”

페더는 다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전쟁터에서는 용의 포효와도 비견할만한 목소리가 남몰래 연인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로미오처럼 부드럽게 가라앉았다.

레드드래곤 루비나트여.”

그 호칭마저 간지러워 루비나트는 몸서리를 쳤다.

그대가 보기에 이 나라는 어떠한가.”

무슨 의미야?”

한때 그대는 거대한 제국의 주인이었지.”

내리쬐는 햇살 아래 페더는 여느 농부와 다름없는 차림이었다. 루비나트는 그제야 그날이 무슨 행사가 있는 날이었다고 깨달았다. 며칠 전부터 중요한 행사가 있다며 궁내부원들이 바삐 뛰어다녔다. 메리엔델도 엘리자베스도 모두 바빠 말을 붙일 사람조차 없었다. 그래서 동굴로 들어간 것이었는데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루비나트는 픽 웃었다.

루비나트는 드래곤이다. 케이어스가 무너지고 제일 먼저 깨어나 억겁의 세월을 살아왔다. 잊을 수 없는 것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인간사는 루비나트에게 의미가 없었다. 그랬다. 페더와 그 동료들이 아니었다면 보옥으로 돌아가 잠들거나 혹은 보옥까지 파괴되는 날이 오더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도 인간 하나에 이토록 집착하는 타락한 케이어스라는 존재에 닭살이 돋을 지경이니까 틀림없다.

아이오나는 말했다.

너 내 분신인데 굉장히 인간 같구나.’

루비나트는 그 말이 뿌듯했다. 언제든 그 건방진 에인션트에게 이거 보아라. 너는 못하는 걸 내가 했노라,’ 그렇게 말할 수 있는 확실한 증표를 얻은 것이었다. 인간 같다는 말을 칭찬으로 여기는 자신이 우스우면서도 그렇게 기쁠 수 없었다. 소중한 이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루비나트는 진심으로 그것에 있어서는 여신에게 감사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잠들어버린 여신 따위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존재를 준 것은 어쨌든 여신의 소관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아직도 굶주리는 사람들이 있다며 열심이다. 나는 검밖에 들어본 적이 없는 몸이지만 그들의 웃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라면 농기구를 드는 것도 나쁘지 않아. 전사의 긍지가 무너진다느니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놈들이 있지만, 전쟁이 끝나면 전사는 농부로 돌아가는 법.”

그랬다. 봄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본격적으로 씨앗을 파종하고 한해 농사에 들어가야 하는 때, 왕인 페더가 직접 그 손으로 쟁기질을 하고 씨를 뿌려 모든 백성에게 씨 뿌릴 때를 알리는 행사가 있었다. 뼛속까지 전사인 페더는 처음 이 행사를 시작했을 때 무척 당황했다. 쟁기를 잡는 법조차 몰라 가르침을 받았다. 기껏 그럴듯한 모양을 만들자 이번에는 넘치는 힘이 문제라 쟁기를 아예 전용으로 새로 만들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메리엔델과 함께 그것을 지켜보며 웃었다.

깜빡.

의식이 끊긴 것처럼 잠깐 생각이 끊겼다. 루비나트는 고개를 흔들며 페더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뭐야? 잘했다고 칭찬이라도 해달라고?”

하하하!”

페더는 파안대소하더니 드디어 루비나트를 마주 보았다. 루비나트는 눈을 크게 떴다. 생소한 얼굴이었다. 이토록 즐거워하는 페더를 본 적이 있었던가? 이게 엘리자베스가 보는 페더인가?

그래, 그런 의미일지도 모르겠군. 아니, 그런 것이다. 레드드래곤 루비나트여.”

페더는 너른 들판을 향해 손을 뻗었다.

월향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을 번영으로 이끌었던 그대라면 자격이 있다. 이 나라는 아직 어리다. 전쟁이 남긴 상처가 겨우 아물었을 뿐이다. 그러나 루비나트여, 그대라면 알겠지. 이 나라의 가능성을 말이다.”

루비나트는 못 박힌 듯 페더만을 쳐다보았다. 타오르는 태양 아래 그들의 군주가 빛나고 있었다. 여신이 창조한 이 거대한 대륙을 차지한 영웅이 뜨거운 열정과 확신에 찬 손짓을 그의 백성들에게 보내고 있었다.

나는 굶주림과 추위에 쓰러지지 않는 나라, 어느 날 갑자기 칼 맞아 쓰러질 걱정이 없는 나라는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행복은 안전에서만 기인하지는 않지. 불행은 막을 수 있지만, 행복을 불러오는 법은 모른다.”

짧은 생을 사는 생물은 이토록 아름다운 것이었나. 루비나트는 그런 생각을 했다. 처음으로 메리엔델이 어째서 페더에게 반했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전까지는, 그래, 페더는 믿음직한 동료지만 그것뿐이었다. 메리엔델이 페더에게 빠진 것을 억지로 이해했지만 인정하지 못했다. 조금은, 아주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그러니 묻겠다. 과거 월향국의 주인이었던 레드드래곤 루비나트여. 그대가 보기에 이 나라는 행복해질 자격이 있는가?”

태양과 같은 시선이 루비나트에게로 향했다. 루비나트는 전율했다.

그대가 보기에 모자라다면 거리낌 없이 말하라. 나는 그대의 가르침을 청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정복왕 페더가. 수천 년을 산 루비나트, 그대가 보기에는 이 몸이 아무것도 아닐지 모르나 알다시피 나는 이 대륙을 다스리는 주인이다. 내가 숙임은 곧 대륙이 그대 앞에 굽히는 것임을 잊지 마라.”

피식, 웃음이 났다.

건방진 녀석.”

자꾸만 입술 새로 웃음이 샜다. 큭큭대던 실소가 번져 만면에 꽉 찬 미소가 되고 미소가 터져 홍소가 되었다.

하하, 하하하!”

루비나트는 아예 배를 부여잡고 웃었다.

이런 건방진 녀석을 봤나.”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어찌나 웃었는지 뱃가죽이 당겼다. 겨우 진정했지만, 여전히 숨을 내쉴 때마다 웃음이 함께 샜다.

가르쳐달라면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 건방진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예전 같았으면 본체로 변해서 한방에 콱.”

루비나트는 한 발로 짓밟는 시늉을 했다. 페더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새삼 또 웃음이 났다.

멍청아. 지금 그걸 물어보는 건 비겁하잖아. 내가 뭐라고 대답해야겠냐. 대답을 하나로 정해놓고 물어보면 어떡하라고.”

그런 적 없다.”

닥쳐봐. 나는 말이야, 전부 봤다고. 너랑 엘리자베스랑 메리엔델이 오늘이 오기까지 얼마나 노력했는지 그토록 괴로워하면서 어떻게 이 자리까지 도달했는지 전부 봤단 말이야.”

루비나트는 다시 한 번 하하, 소리 높여 웃었다.

그런 내가 이제 와서 안 될 거니까 포기하라고 말하기라도 할 줄 알았어? 그러라고 너흴 용서해줬겠냐? 진짜 멍청한 자식 같으니라고.”

페더는 말없이 웃으며 루비나트를 지켜보았다. 아니, 너무 기분이 좋아서 페더도 웃고 있다고 착각한 걸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좋았다.

루비나트는 다시 한 번 큰 소리로 웃었다.

네가 내 앞에 무릎 꿇은 그 날, 나는 너한테 내 꿈을 맡겼다.”

얼핏 차갑게도 보일 얼굴로 루비나트는 진지하게 말했다.

엉터리 꿈이었지. 꽉 막힌 멍청한 에인션트가 도발한 탓에 갑자기 시작한 거였으니까 말이야. 근데 말이야. 그게 후회가 안 된다.”

루비나트는 또 실소했다.

다 네놈 때문이야. 아냐? 세상에서 제일 무식한 놈아. 그러니까 대륙을 통일하고 모두 행복한 세상을 만들겠다느니 엉뚱한 소릴 하겠지. 심지어 성공할 줄이야. 정말 상상도 못 했다.”

나는 말이지, 네가 뭐라고 말했건 그거 하나도 안 믿었어. 정말로 어디 두고 보자는 심정이었다고. 그냥 네가 하는 게 워낙 지극정성이니까 믿어보자고 생각했어. 그런데 말이야, 너랑 엘리자베스랑 메리엔델하고 있는 걸 보니까…….”

루비나트는 피식피식 웃었다.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페더는 대꾸도 없이 루비나트의 일장연설을 듣고 있었다.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웃다가 하늘을 쳐다보며 눈가를 문지르는 루비나트를 지켜보기만 했다. 루비나트는 태양을 향해 주먹질했다.

……믿고 싶어지더라. 믿게 되더라. 네가, 너랑 엘리자베스가 정말로 불가능한 걸 이뤄줄 거라고. 그렇게 믿게 되더란 말이야. 네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한 건지 알겠냐?”

마침내 루비나트의 시선은 지상으로 돌아왔다. 어째선지 푸른 들판이 일렁였다.

너는 타락한 내 심장을 흔들었다. 바보야, 할 수 있어. 엘리자베스가 있잖아. 네가 못하는 건 엘리자베스가 해줄 거고 메리엔델이 해줄 거고 나도 도울 거야. 근데 그걸 물어봐? 건방진 녀석 같으니.”

루비나트는 또 하늘을 향해 주먹질했다. 페더는 소리 없이 웃었다.

루비나트.”

왜 불러.”

몸조심하도록.”

?”

루비나트는 페더를 돌아보았다. 갑자기 세상이 일그러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페더도 페더의 새 나라도 없었다. 루비나트는 뭐야를 연발했다. 시야가 어둠으로 물들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 일어나봐!”

누군가 거칠게 루비나트를 흔들었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린데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대답하기도 성가셔 손을 털어버리고 눈을 떴다.

빨리 일어나라고! 수상한 놈들이 밖에서 떠들고 있단 말이야. 여기서는 힘도 못 쓴다며!”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귀를 비집고 들어오자 머리가 다 울렸다. 루비나트는 미간을 짚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끔찍한 두통이었다. 황금주를 마시는 게 아니었다고 후회했지만 후회 따위 매일하는 것이다. 내일도 루비나트는 분명 후회할 거라고 생각하며 황금주를 마실 것이다.

정신 차려! 네가 그러고 있으면 난 어쩌라고. 나는 여기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단 말이야. 죽지 않겠다고 약속했어. 절대 안 죽으면 안 된다고! 네가 그러고 있다가 죽으면 책임질 거야!?”

닥쳐. 머리 울린다.”

나직하게 뱉은 소리에 숙취를 증폭시키던 소리가 잠잠해졌다. 뭐라고 더 중얼거린 것 같기는 했으나 들리지 않았다. 그나저나 저게 방금 뭐라고 했지?

수상한 놈들이 있다고?”

그래. 네가 차일드 트리얀인지 뭔지가 여기 대장이라며. 아까 웬 군복 입은 기분 나쁜 것들이 트리얀님 어쩌고 하면서 지나갔다고. 그냥 지나가는 건 줄 알았는데 몇 번씩 지나가더니 아까는 입구를 들여다봤어!”

. 그렇게 존대를 해주시니 황송해서 죽어버릴 것 같네.”

에인션트 꼬맹이가 뭐라고 꽁알거렸지만, 이번에도 흘려 넘겼다. 루비나트는 어지러운 머리를 억지로 굴렸다. 생각이 자꾸만 끊겼다. 한번 끊기면 방금 생각했던 게 뭔지도 잊어버렸다.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했다. 루비나트는 이제 이게 황금주의 부작용인지 독기에 침식당한 탓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어쨌든 확실한 건 하나였다.

그놈들이 마지막으로 왔다 간 게 언제지?”

? , 그게, 그러니까…….”

도움이 안 되는군.”

탄식처럼 뱉은 말에 에인션트가 머리채를 풀어헤치고 달려들었다.

, 여기엔 해도 없잖아! . 이씨. 분명히는 모르지만 오래 지나진 않았어. 불안해 죽겠는데 네가 하도 안 일어나서 코라도 막아볼까 고민하고 있는데 나타났다고. 숨소리 샐까 봐 꼼짝도 않다가 그놈들 가자마자 다시 깨웠다고. 그리고 좀 있다가 깼으니까 얼마 안 됐어.”

루비나트는 대충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대답 고마워.”

!”

도망가지.”

에인션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생긴 것도 꼬맹이 같아서 눈이 참 크기도 하다.

? 둘이서? 그럼 그 녀석은? 두고 가자고? 안 돼. 나랑 죽지 않기로 약속했단 말이야. 혼자 두면 무슨 일이 생겨도 지켜줄 수 없잖아.”

루비나트는 아랑곳 않고 짐을 정리했다. 위험은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일이었으니 늘 준비는 되어있었다. 들키면 안 되는 물건을 처분하고 남은 이를 위해 적들이 모를 메시지를 남기고 꼭 필요한 짐을 챙기는 데는 오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무시하지 마!”

여전히 에인션트는 시끄러웠다. 루비나트는 대충 준비를 끝내고서야 그를 돌아보았다.

이봐, 꼬맹이 에인션트.”

……왜요.”

무슨 대단한 일이 있어서 그런 거창한 약속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잡히면 위험한 건 그 녀석이 아니라 우리야. 그 녀석은 한갓 인간일 뿐이니 베스티넬이라도 강림하지 않는 한 알아보는 녀석은 없겠지. 하지만 너나 나는 달라. 차일드라도 마주치면 알테이아의 보옥 정도는 단숨에 들통 날 거야. 설마 자기 보옥 크기에 자신이 있어서 그렇게 당당한 거야? 확실히 그 정도 힘이면 트리얀이 손가락만 휘둘러도 날아갈 수는 있겠어.”

루비나트는 픽 웃고 돌아섰다.

쓸데없는 데 에너지 소모하게 하지 말고 따라와. 죽고 싶지 않으면.”

……너 진짜 성격 더러워.”

, .”

문을 열자마자 보인 것이 군복이 아니었더라면 사정이 나았을까. 시간을 지체하지 말고 떠났으면 괜찮았을까. 꼬맹이 에인션트가 떠들지 못하게 진작 입을 막았어야 했을까.

루비나트는 어지러운 머리를 잡고 몇 번이고 자신에게 물었다. 조금이라도 나아질 방법이 있었을까. 알 수 없었다. 말도 안 되는 환상이 머릿속을 떠돌았다. 환상은 날이 갈수록 선명해져 이제는 현실보다 더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페더, 너는 정말로 우리를 배신했나. 네게 걸었던 모두의 기대와 희망을 내던지고 말았나. 왜 그랬어. 어째서 그런 선택을 했어.

이미 죽어버린 친우에게 말을 걸어도 소용이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살아있어도 물어보지 못할 말이었다. 루비나트는 웃었다.

언제까지 내가 제정신일 수 있을까.”

시야가 아득해졌다. 옆에서 꼬맹이 에인션트가 비명을 지른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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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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