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소란스러웠던 것 같은데 이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어떻게 된 거지. 뻔뻔한 생각이 들었다. 알고 있었다. 모두 불타버렸다. 불타지 않은 자는 뜯어먹혔다. 무덤에서 기어올라온 마물이 산자의 살을 물어뜯는다. 역병이 돌 것이다. 탁기가 사방에 가득했다. 공기가 푸르게 물들어있었다.
언제나 복잡하던 머릿속이 청소라도 된 것처럼 맑았다. 하늘이 붉었다. 피비린내와 살이 타는 냄새가 뒤섞였다. 평소였으면 구역질을 하고도 남았을 역한 냄새를 아무렇지 않게 맡으며 씻고 싶다고 생각했다. 결국 벌어지고 말았다.
알고 있었다. 결국은 일어날 일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당연한 일이라는 사실을 아는 건 자신 뿐이었다. 그래서 단휼은 홀로 남았다. 상관은 없었다. 딱히 가족의 품이 그립다거나 하지는 않을 터였다.
멍하니 앉아있는 것도 지겨워져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옷차림을 점검한다.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깨끗한 차림이었다. 검푸른 불꽃은 넓은 저택을 모조리 불태웠지만 단휼의 옷자락은 건드리지 못했다. 불꽃을 뚫고 단휼을 건드릴 수 있는 자도 없었다. 광활한 대지가 단휼의 통제 하에 있었다. 단휼은 손에 닿는 모든 것을 불태우기를 택했다.
졸렸다. 옷이 말끔한 것을 확인하자 어서 이 지저분한 장소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지독한 냄새로부터 멀어지고 싶었다. 기분 나쁜 살점이나 시체로부터도.
저택은 너무 넓어서 걸어도 걸어도 밖이 보이지 않는다. 단휼은 저택을 채 벗어나기도 전에 지쳐버렸다. 쪼그려앉아 훌쩍인다. 짜증나. 경공을 써서 날아가면 되겠지만 그것마저 귀찮았다. 단휼은 말 한 마리 남겨두지 않은 몇 시간 전의 자신을 원망했다.
조금 울고 나니 개운해졌다. 내력을 모아 발끝에 집중하고 가볍게 발을 구르자 순식간에 지면이 멀어졌다. 빙글 돌아 바람을 탔다. 하늘을 날아 저택의 담장을 넘는다.
평소라면 마을까지 그대로 날아갔겠지만, 오늘은 어쩐지 눈에 띄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마을이 보이는 곳에서 땅으로 내려앉는다. 덥수룩하게 기른 금발이 팔락거리며 노을처럼 반짝였다.
다시 한 번 옷매무새를 점검하고 소년은 큰 길로 나선다. 제 눈이 평소보다 선명한 붉은 빛으로 타오르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새빨간 눈동자가 주변을 훑자 수풀에 숨어있던 들짐승이 놀라 달아났다.
인적 없는 길거리를 서성이며 사람을 기다렸다. 졸음이 어깨를 무겁게 눌렀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마침내 인기척이 들렸다. 단휼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시커먼 그림자가 머리 위로 드리웠다. 그 어떤 목석이라도 넘어오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던 미소를 머금고 그에게 뛰어들었다.
“얘, 나랑 자자.”
졸렸다. 얼굴도 모르는 나그네는 단휼의 작은 몸을 가뿐하게 안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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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단휼烾㣋㤜. 그 아이를 처음 만난 것은 ‘그것’과 헤어진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말간 얼굴에 생글거리는 미소를 띄운 예쁘장한 소년이 나를 보자마자 뛰어들듯이 품에 안겨들었다.
“얘. 나랑 자자.”
가느다란 팔을 허리에 감아온다. 지나치게 익숙한 감촉에 놀라서 굳어있는 내 배에 얼굴을 부비며 소년은 졸음 가득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얼른. 나 졸려.”
칭얼대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조그만 몸을 안아든 것은 원하던 바가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품에 안겨드는 가느다란 팔다리를 달가우면서도 낯설게 받아들이며 나는 속으로 멍청한 자신에게 혀를 차고 있었다.
결국 머물지도 확실치 않았던 마을에서 이른 저녁부터 방을 잡고 소년을 침대에 눕히고 나서야 나는 대체 이 일을 어쩌면 좋을지 고민에 빠졌다. 단휼은 잠시 꾸물거리며 잠드는 듯 하더니 곧 깨어나 인상을 찌푸렸다.
“추워. 이리와.”
슬슬 정신이 돌아온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그를 쳐다보았지만 그 애는 내 표정 따위는 관심도 없는 듯했다. 반복되는 제촉에 못 이긴 내가 그의 곁에 접근하자 소년은 당연하다는 듯이 내 목을 끌어안고 이불 속으로 끌어당겼다.
“이봐.”
처음으로 손길을 거부하려는 순간 단휼이 입을 맞춰왔다. 꽃에서 추출한 달큰한 향내와 피와 연기의 냄새가 났다. 몇 시간 안에 살을 태운 연기에 휩싸인 몸이 아니면 날 수 없는 냄새였다. 본능적으로 긴장감이 들었다. 단휼은 얼어붙은 나를 침대에 눕히고 졸음에 취한 눈으로 내 상체 위에 걸터앉았다. 가느다란 다리가 가슴을 조여온다.
바싹 마른 가녀린 몸이었다. 거친 일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희고 고운 손으로 내 얼굴을 붙든 체 키스에 열중하는 소년의 예쁘장한 얼굴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촛점을 맞추기 힘들 정도의 지근거리에서 금빛 속눈썹이 흔들린다. 무심코 허벅지에 손을 대자 바른 것도 없이 빨간 입술에서 낮은 한숨이 흘렀다. 움찔거리는 허리를 가만히 쓸어내렸다. 허벅지도 허리도 한손에 움켜쥘 수 있을 것 같이 가늘다. 나는 그때까지도 소년에게서 나는 향이 무엇인지 사정을 추측하느라 사고가 마비된 상태였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단휼의 작은 몸이 내 허리 위에서 달뜬 신음을 뱉고 있었다. 나는 본능인지 습관인지 분간하기 힘든 행위를 소극적으로 계속하며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몽롱한 표정이었다. 아침 식사를 해치우듯 권태로운 성교였다. 단휼은 혼자서 열락을 즐기곤 내 사정따윈 신경도 쓰지 않고 내 몸 위로 쓰러졌다. 맨 가슴에 닿는 여린 살과 꽃향기와 탄내가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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