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엘은 달아났다. 섬에서, 현실에서, 사랑하는 이들에게서, 따뜻한 보금자리에서. 슬픈 건 아니었다. 두려운 것도 아니었다. 그저 견딜 수 없었을 뿐이다. 달아나자. 달아나서, 그래서, 어디로?

갈 곳은 하나 뿐이었다. 거대한 어둠 속. 차고 두려운 그곳. 맞아주는 이라곤 아무도 없는 얼음산. 거기에는 한 송이 꽃이 피어있다. 흐린 햇살을 받아 반짝이며 빛나는 아름다운 꽃. 섬세하게 깎인 얼음 조각. 괴물의 심장에서 피어난, 혼이 없는 생명체.

“오실 때는 미리 연락을 주기로 하지 않았던가요?”
“……미안.”

미엘의 짧은 머리칼이 한 서린 바람을 맞아 뒤로 흩날린다. 길게 늘어진 귀와 등에 달린 자그마한 날개는 섬에서의 그와 이곳의 그가 완전히 다른 존재임을 알려준다. 맨발에 민소매 원피스 한 장인 차림. 그것은 잃어버린 소녀의 차림과 무척 닮았다. 눈빛은 완전히 흐려져 평소의 총기를 잃었고, 무력하게 옹그린 팔다리와 굽은 등이 그의 존재감을 희석시킨다. 작아진다. 흐려진다. 사라진다. 그것만이 희망일지도 모른다고. 미엘은 무기력하게 생각했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인가요? 남의 집에 쳐들어올 때는 조금이나마 설명을 해줘도 좋을텐데요.”

얼음으로 이루어진 심장은 동정심 같은 것을 모른다. 투명하게 반짝이는 꽃은 조금은 귀찮다는 투로 상냥하게 말했다.

“알아요? 당신이 올 때마다 공기가 차가워져요.”

저야 좋지만, 하고 얼음으로 이루어진 꽃은 무덤덤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싫은 거겠지?”

미엘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아무래도 그렇겠죠?”

꽃이 말했다.

“너무해.”

한층 몸을 동그랗게 말며 미엘이 웅얼거린다. 얼음 꽃은 흘려넘긴다.

“나는 왜 항상 실패할까.”

미엘이 물었다.

“그런 사람이니까요.”

꽃이 대답했다.

“……역시 그런가.”

미엘은 조용히 눈을 감는다. 깊은 한숨이 길게 밀려나왔다.



에트리아스는 울었다. 밤이면 밤마다 울었다. 낮에는 울 수 없어서였다. 하녀들은 아침마다 에트리아스를 닥터에게 데려갔고 닥터는 당연하다는 듯이 소녀에게 수발을 시켰다. 에트리아스는 왜 자신이 명령을 따르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의 지시를 수행했다. 왜? 왜 이러고 있을까? 그가 무어라고 나는 반항조차 하지 못 하는가? 밤새껏 고민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고, 눈물도 멈추지 않았다.

닥터는 친절했다. 눈이 부으면 하녀를 부려 찜질을 시켜주었다. 졸고 있으면 잠시 눈을 붙이라고 자리를 내주었다. 그러나 결코 자신의 곁에서 떼어놓지는 않았다. 에트리아스도 어째서인지 닥터 곁에서만은 눈물이 나지 않아서 체력이 한계에 이를 때면 차라리 닥터 곁에 있는 게 편하기도 했다.

에트리아스가 하는 일은 별 게 아니었다. 하녀를 대신해 물을 따르고 때로는 간식거리를 닥터의 손에 쥐어주거나 대신 책을 찾아오는 일 정도였다. 그나마도 밤새 잠에 들지 못하니 대부분의 시간은 수면으로 흘러갔다.

신기했다. 섬에 있는 에트리아스는 생물이라고 할 수조차 없는 존재였다. 잠도 자지 않었고, 꿈도 꾸지 않았으며, 울거나 웃어본 적도 없었다. 섬에서 에트리아스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작은 불평과 찡그리기, 견디기 정도였다. 그 이상으로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할 일도 없었다. 마치 무기질로 만들어진 인형처럼 뜬 눈으로 시간을 흘려보내는 삶이었다. 이따금 결계에 걸린 방랑자가 있으면 선택지를 주고 길안내를 하는 게 다였다. 먹을 필요도 마실 필요도 없었으니 그저 존재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에트리아스는 때가 되면 잠이 오고, 서있으면 가리가 아프고, 먹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인간이었다. 인간처럼 생겼지만 일평생 생을 살아본 적 없는 소녀가 처음으로 숨 쉬는 인간이 되었으니 그 고통이 오죽하랴. 에트리아스는 이유 모를 눈물의 원인이 그것이라 짐작했다.

비몽사몽한 채로 저녁이 다 되어서야 눈을 뜬다. 흐린 시야 너머 황금빛 눈동자가 보인다.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시선에 놀라 흠칫 얼어붙는다.

“왜?”

파드득 몸을 떠는 소녀를 보고 닥터가 기분 좋게 웃었다. 얼어붙은 소녀의 입술에 입을 맞춘다. 맞닿은 입술의 감촉이 소름끼쳐서 에트리아스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쳤다. 닥터가 허리를 펴고 일어난다. 에트리아스는 겨우 몸을 일으키곤 두려움을 가득 담아 닥터를 바라본다.

닥터는 우아한 자세로 화려한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거만하게 등을 기댄다. 무릎 위로 얹은 다리에서 발로 내려오는 선이 매혹적이다. 팔걸이에 팔꿈치를 얹고 비스듬히 고개를 꼰 상태로 그가 느른하게 웃었다.

“오늘이야.”
“뭐가?”

후후, 하고 수상쩍게 웃는다.

“이리온.”

닥터가 말했다. 에트리아스는 내키지 않는 몸짓으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간다. 뒤로 길게 늘어진 레이스 자락이 바닥에 끌렸다.

다가서자마자 거칠게 손목을 붙들린다. 반항의 여지도 주지 않고 콱 잡아당겨진다. 다시금 긴장해 얼어붙은 소녀의 뺨에 대고 닥터가 속삭였다.

“가자.”

그 순간, 시공간이 뒤틀렸다.


에트리아스를 중심으로 공간이 접힌다. 일그러지는 공간의 기류를 타고 닥터가 뛰어든다. 강하게 손목을 붙든 손은 그대로다. 놓치기라도 할 새라 붙든 손을 따라 미끄러지는 닥터의 얼굴에 환희가 가득하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그곳은 푸르렀던 섬. 언제까지도 따스하고 행복할 것 같았던 꿈 속의 장소. 그 아름답던 모습은

없다.

에트리아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코로 스미는 악취가 당혹스럽다. 사방에서 풀과 나무가 썩어가고 있었다. 마을이 있던 곳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결계가 없으니 휑하니 열려버린 섬 밖의 풍경은 까마득한 절벽.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는 공기에 빈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다.

“어째서……?”

바로 옆에서 맑은 웃음소리가 터지듯이 쏟아졌다. 에트리아스는 얼이 빠진 낯으로 그를 바라본다. 닥터는 여지껏 보지 못한 행복한 얼굴로 언덕 아래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르겠어?”

닥터가 묻는다. 에트리아스는 이해하지 못 한다.

“네가 없기 때문이야.”

둥글게 휘어져 가늘게 보이는 황금빛 눈동자가 에트리아스를 향했다.

“이제 낙원은 없어.”

하하하. 유쾌한 웃음이 공허를 때렸다. 에트리아스는 다시 눈을 돌려 섬의 풍경을 돌아본다. 이곳은, 폐허다. 아무것도 없는, 더는 꿈조차도 아닌…. 거기까지 생각하다 눈을 감았다. 어지러웠다.

“에트리아스!”

오랜만에 불린 이름이었다. 놀라 돌아보자 익숙한 낯의 소년이 놀란 표정으로 서있었다. 들고있던 바구니를 내려놓고 달려온다.

“어떻게 된 거예요? 어디 갔었어요?”

나는, 대답하려는 순간 닥터가 말을 가로챈다.

“안 돼.”

등 뒤에서 올라온 손이 어깨를 감싸고 뺨을 붙든다. 반쯤 억지로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리게 한다. 에트리아스의 불안한 표정에 소년이 얼떨떨함에 불안을 한 숟갈 얹은 얼굴이 되어 멈춰섰다.

“허락을 받아야지.”

나의 카나리아. 달콤하게 속삭인다. 에트리아스는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깜빡인다. 닥터가 키득거렸다.

“내 허락을 받지 않고는 누구하고도 대화할 수 없어. 알겠어?”

에트리아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러려고 했다. 그러나 천천히 고개는 끄덕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조화인지 몰랐다. 닥터는 소리를 낮춰 웃으며 에트리아스의 뺨에 입을 맞춘다.

“인사하고 싶어?”

다시금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 가서 이야기하도록 해.”

드디어 닥터의 손이 떨어졌다. 강하게 붙들려있던 손목도 해방된다. 공기를 맞은 손목이 시원했다.

“괜찮아요?”

걱정스레 묻는 소년, 시안의 물음에 에트리아스는 잠시 고민한다.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에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시안의 눈길은 닥터에게서 떨어지지 못 한다. 닥터는 흘긋거리는 시선 따위 거슬리지도 않는다는 듯 만족스런 눈으로 섬을 둘러볼 뿐이다.

“일단 들어와요. 안에서 이야기해요.”

갑자기 정신을 차린 듯 소년이 서둘러 이야기했다. 에트리아스는 무의식 중에 닥터를 돌아보았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끔찍하게 변한 섬의 풍경에서 유일하게 변한 것 없는 하얀 저택은 굳게 닫혀있었다. 울타리도 없이 날만 좋으면 항상 개방되어 있던 곳이었다. 그 사실에 다시 한 번 에트리아스는 위화감을 느낀다. 시안은 익숙한 몸짓으로 유리문을 열어 두 사람을 안으로 안내했다. 상쾌한 공기가 코로 스민다. 그제서야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있었다. 낯익은 이들이. 그저 붙들린 방랑자가 아닌, 미엘의 가족이라 불릴 수 있을 이들이. 시안의 동생은 여전히 탁자 위에 널부러져 잠들어 있었고, 곱슬거리는 금발을 길게 늘어뜨린 소녀가 놀라움과 걱정을 담은 얼굴로 손님들을 바라본다. 소파 한쪽 구석에 웅크린 작은 소녀가 눈을 반짝이고, 몽롱한 얼굴을 한 별의 혼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래. 아는 얼굴들이다.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돌아왔으며 또 누군가 새로 들어오기도 했지만 어쨌든 오랜 시간을 함께 한 동료였다. 그들이 모두 에트리아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이제 왔어요.”

누군가는 울음을 터뜨렸고,

“그녀는 없어.”

누군가는 지친 듯 고개를 숙였다.

“늦어버린 걸까요.”

그렇게 중얼거린 것은 의외로 시안이었다. 늘 밝고 다정한 낯을 하고 있던 소년의 얼굴이 어두웠다. 에트리아스는 아니라고 하고 싶었으나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저 풍경을 보고 누가 그리 쉽게 말을 할 수 있을까.

“근데 누구세요?”

리히트, 그러니까 금발의 소녀가 훌쩍거리며 닥터를 눈짓했다. 닥터는 나긋한 걸음으로 다가와 에트리아스의 귀에 속삭인다.

“소개해야지?”

아. 소리없는 신음이 흐르고,

“그는 닥터야.”

에트리아스가 말했다.

“공상이라고도 하고 때로는 어리석음이라고도 불려. 어쨌든….”

에트리아스의 눈이 커진다.

“새로운 섬의 지배자야.”

그런 말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흘러나온 것이다. 마치 꼭두각시처럼. 닥터의 말을 대신하고 있다. 무엇이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몰랐다. 모든 것이 닥터의 뜻대로였다. 꼭 미엘이 있을 때와 같았다. 그때와 다른 것이라면 미엘의 원은 그저 에트리아스의 고통 뿐이었으나 닥터의 요구는 다르다는 것뿐이다. 갑자기 소름이 끼쳤다.

그것은 곧 나이기 때문이야

그 말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닥터는, 미엘이었다. 미엘은 곧 닥터다. 그렇다면? 어째서?

에트리아스는 휙 뒤를 돌아보았다. 닥터가 웃었다.

“왜 나를 데려갔어요?”
“아직도 몰라?”

그가 의뭉스레 되물었다. 에트리아스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섬을.”
“맞아.”
“무너뜨린다….”

닥터는 빙긋이 웃었다.

“거슬리거든.”

쿵.
심장이 내려앉았다.

Posted by fa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