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카 타입 자캐 커미션입니다
1982년의 어느 여름이었다. 에리카는 런던 근교에 위치한 작은 카페에 앉아 있었다. 놀랍게도 그곳은 마법이라고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장소였는데, 그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녀를 불러낸 것이 순혈가문 마법사라는 점이었다.
가게에는 손님이 두 팀밖에 없었다. 에리카와 그 일행을 빼면 한 테이블밖에 사람이 없었다는 소리다. 카운터 근처에 있는 맥주 통을 보아 날이 저문 뒤가 본격적인 영업일 수도 있었다.
창밖에는 오후의 태양이 뜨거운 빛을 내리쬐고 있었다. 센스있게 창가를 살짝 피해 자리를 잡은 건 에리카의 일행, 오웬 허츠였다.
그는 에리카와 처음 인연을 맺은 학생 때도 참 사려가 깊었다. 사소한 행동에도 적절한 배려가 담겨있어서 언제 만나도 편안했으며, 함께 있는 시간이 제법 즐겁기까지 했다. 타고난 외모와 특출한 친구 덕분에 잠시라도 마음 놓고 쉴 시간이 없었던 에리카에게 그건 정말 특별한 일이었다. 덕분에 두 사람의 인연은 길게 이어졌다.
연인이라고 하기엔 너무 멀고, 친구라고 하기엔 너무 가까운 애매한 관계로 이 년을 보냈다. 에리카는 그 외에도 만나는 사람이 있었지만, 오웬은 에리카뿐이었다. 친구가 없는 것도 아니고, 에리카에게 하는 걸 보면 여자를 만나지 못할 인물도 아니건만 그 옆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소문조차 들어보지 못했다.
하지만 오웬은 끝내 에리카에게 고백하지 않았다. 그 흔한 좋아한다는 말조차 거의 입에 담은 적이 없었다. 예의 바르게 식사나 차를 제안하기는 했으나 그뿐이었다. 두 사람이 만나서 한 것은 공부와 공부에 필요한 대화가 다였다. 무뚝뚝한 남자를 만나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오웬은 정도가 심했다.
오늘도 오웬의 과묵함에는 변함이 없었다. 점심나절에 들어와서 벌써 한 시간 가량 지났건만 그는 음료를 주문한 후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에리카가 용건을 물으려 하자 다른 메뉴가 필요하냐고 묻기까지 했다. 겨우 메뉴판을 요청하려는 오웬을 말리고 용건을 묻는 데 성공했지만, 오웬은 ‘음,’하는 짧은 신음성을 내고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에리카는 고민 끝에 그의 뜻을 앞서 짐작해보았다. 즐기는 자리라면 아무리 침묵이 길어도 괴롭지 않을 테지만, 의중을 짐작할 수 없는 남자와의 대면 하에 길어지는 침묵은 달가울 수가 없다.
“오웬.”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자 오웬이 에리카를 쳐다보았다. 그는 마치 학생 때로 돌아간 듯 이름을 부르는 행위에 적잖이 놀란 게 틀림없었다. 흔들리는 눈빛을 마주하고 에리카는 그림으로 그린 듯 상냥한 미소를 머금었다.
“오늘 만나자고 한 이유는 오후 다섯 시의 일인가요?”
오후 다섯 시라는 말에 오웬의 뺨이 희미하게 붉어졌다. 눈을 갑자기 두어 번 깜박이는 것이 당황스러운 심정을 여실히 비췄다. 에리카는 입을 다물고 그저 웃어 보였다. 오웬은 조금도 표정이 변하지 않았지만, 시선을 돌리지 않고 에리카를 바라보고 있었다.
부엌 쪽에서 달그락거리며 설거지하는 소리, 바람에 삐걱대는 창문틀, 건너편 테이블에서 펜촉과 종이가 맞물리며 사각거리는 소리가 시간을 타고 평화롭게 지나갔다. 오웬은 가볍게 입술을 한 번 열었다 닫더니 물을 찾았다. 진작 비워버린 잔을 들고 벌건 얼굴로 종업원을 부르려는 것을 에리카가 제 물을 넘겨주고 진정시켰다.
“당신이 이런 가게를 알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어요.”
에리카가 말했다. 오웬은 잔을 반이나 비우고서야 입을 열었다.
“조용히 만나고 싶었소.”
오웬은 물잔을 테이블에서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에리카는 잔잔하게 미소 지은 체 테이블 아래로 도망치는 손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눈치챈 오웬의 뺨이 다시 붉어졌다.
“잘 지냈소?”
에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군.”
오웬은 눈을 가만두지 못하고 창 쪽을 보았다가 눈을 세 번이나 깜빡이며 카운터를 돌아보았다.
“최근에 만나는 사람이 없다고 들었소.”
에리카는 고개를 살며시 기울였다.
“특별히 마음에 둔 분이 없을 뿐이에요.”
그 말에 오웬은 또다시 불편한 듯한 신음을 뱉었다. 에리카는 그저 미소 지을 뿐이었다.
“당신 친구, 벨리니 양은 혼사를 치렀다 들었는데―그는 또 작게 헛기침했다―당신, 그라우플뤼겔양은 아무런 계획이 없다고?”
에리카는 눈썹을 모으며 곤란한 기색을 띄웠다. 오웬은 계속해서 눈을 피하며 에리카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좋은 분을 알아보고 있어요. 누구보다 절 아껴주고 또 제가 헌신할만한 믿음직한 분을요. 마음이 맞는 이가 없는데 어찌 혼사부터 염려하겠어요.”
오웬은 침통하게 ‘그렇군,’ 하고 대답했다. 카페 문턱을 넘는 손님이 있어 날이 좋은 오후라 영 의욕이 없어 보이는 종업원이 느릿느릿 둘의 옆을 지나갔다.
“그렇다면 마음에 두고 있는 후보는 있겠지.”
“글쎄요. 제게 구애하시는 분들은 다들 훌륭하지만, 진정으로 저를 원하는 분이 계신지 모르겠네요.”
“진정으로 당신을 원해?”
“좋은 말씀은 많이들 해주시지요. 하나 사랑의 불꽃이란 덧없는 하루살이 같은 것인지라 어디까지 믿으면 좋을는지 혼란스럽네요.”
오웬은 말문이 막힌 듯했다. 그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에리카는 우아한 손길로 차게 식은 커피잔을 한쪽으로 옮겨두었다.
“사랑이 믿을 수 없어 혼인하지 않는다는 건가.”
“그럴 리가요. 그저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지 못하는 제 어리석음 탓이지요.”
에리카는 눈동자로 빛 그림자를 쫓았다. 날이 저물기 시작하는지 볕 드는 자리가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군.”
오웬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네?”
그는 실수했다는 표정을 했지만,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라우플뤼겔양이 어떻게 해야 진심을 믿을 수 있는지 모르겠소.”
에리카는 두 번,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곧 꽃처럼 화사하게 미소가 피어났다.
“저를 좋아하나요?”
에리카가 물었다. 오웬은 저 바닥으로 시선을 떨군다.
“아니.”
그는 말했다.
“사랑하오.”
에리카는 진한 웃음을 띤 체 가슴 앞에 손을 모았다.
학창시절 두 사람의 약속 시간은 항상 오후 다섯 시였다. 저녁 식사를 하기 전 약 한 시간 정도 함께 공부하는 시간이었다. 장소는 거의 같은 곳이었지만, 가끔은 정원을 거닐거나 도서관에 들렀다. 에리카가 만난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오웬은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함께하는 것이라고는 공부뿐인데 레번클로 출신 누군가처럼 지식을 자랑하지 않았고, 슬리데린의 한 남학생처럼 혈통과 재산을 뽐내지도 않았다. 그리핀도르지만 무모한 행동을 한 적이 없으며, 그들이 졸업한 뒤로도 꾸준히 재생산되고 있는 뿌리 깊은 기숙사 이미지와 달리 소란스러운 걸 좋아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후플푸프 기숙사 한구석에 틀어박힌 몇몇 부류처럼 조용히 학교생활을 마치기만 기다리는 것 같았다.
오웬은 정중히 인사를 하고, 의례적인 인사말을 주고받고 나면 더 말을 하지 않았다. 곤란한 모습을 보면 도와주겠다고 말을 걸었고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했지만, 그 외에는 각자 공부하며 시간을 보낸 게 다였다.
그런 오웬이 에리카에게 직접 감정을 직접 감정을 표현한 적이 딱 두 번 있었는데, 첫째가 처음 함께 공부하지 않겠냐고 말을 걸었을 때고 둘째가 오웬의 졸업식 날이었다.
첫눈에 반했으니 함께 공부하자는 제안을 했던 첫날 이후로 단 한 번도 에리카를 좋아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는 오웬이 졸업식을 마치고 만취한 상태로 레번클로 기숙사를 찾아왔다. 그리핀도르고 레번클로고 가리지 않고 사랑 냄새를 맡은 하이애나들이 몰려와 소란스러웠다.
에리카는 친구들에게 등을 떠밀리다시피 포도주 통 앞으로 나갔다. 주변은 축제 분위기고 오웬은 제대로 몸도 가눌 수 없을 만큼 취해서 에리카는 주방 밖으로 끌려 나온 집요정마냥 어색하게 서 있었다.
“그라우플뤼겔양.”
평소 언성을 높이는 일이 없는 오웬이 그렇게 커다란 목소리로 말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에리카는 환호성에 묻혀 들리지도 않는 대답을 했다.
“사랑합니다.”
또다시 환호성이 터지고 휘파람 소리에 귀가 따가웠다. 에리카는 오웬의 말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어차피 무슨 말을 해도 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결혼해주십시오.”
환호성은 거의 비명에 가까웠다. 남학생들이 우악스러운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고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울렸다. 오웬은 뭐라고 더 말했지만, 어찌나 시끄러운지 그 뒤로는 거의 들리질 않았다. 에리카는 그저 웃기만 했다. 할 수 있는 말도 없었다. 들린 말이라고는 승낙 어쩌고 하는 것뿐이었고 그 일 이후로 오웬은 한 번도 에리카 앞에 얼굴을 비춘 적이 없었다. 그렇게 오웬은 첫 번째 고백은 학창 시절의 해프닝으로 넘어갔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오웬이 에리카에게 고백하는 장소로 친구―마법사―들이 없는 한적한 곳을 고른 것은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물론 머글이 운영하는 가게를 찾아 머글 사회에 적합한 의상을 찾아 거리를 헤매는 모습을 생각하면 우습기는 했다.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순혈 마법사가 좋아하는 여인에게 고백하겠다고 머글 세계의 옷을 찾아다닌 것이다.
에리카는 레이스가 달린 블라우스 소매를 살짝 어루만졌다. 오웬이 약도와 함께 동봉한 옷이었다. 마법사 사회에서 자라 마법사로 자란 그가 머글 카페에 어울리는 옷을 알아내서 찾아내는 게 쉬운 일이 아님은 분명했다. 게다가 놀랍게도 제법 그럴듯하게 잘 어울리는 옷을 보낸 덕분에 에리카는 더하고 뺄 것도 없이 장신구만 골라 나온 것이다.
오웬은 심호흡을 하더니 자진해서 에리카와 눈을 마주했다. 드디어 오늘 에리카를 불러낸 이유를 말할 마음이 생긴 모양이었다.
“에리카 그라우플뤼겔양. 지금부터 그대에게 일생일대의 부탁을 할 것이오. 부디 딱 잘라 거절하지 말고 넓은 마음으로 헤아려 주길 바라오.”
오웬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무 받침을 댄 의자가 뒤로 밀리며 거북한 소리가 났다. 그는 의자를 제대로 자리에 돌려놓고는 에리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손에는 작은 벨벳 상자를 쥐고 있었다.
“나 오웬 제시 허츠는 에리카 이리스 그라우플뤼겔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지난 이 년간 우리가 함께 정을 쌓으며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시간이 있었기에 그대의 마음이 내 마음과 그리 다르지 않으리라 짐작합니다. 그라우플뤼겔양, 저와 결혼해주지 않겠소?”
오웬은 에리카의 손등에 입 맞췄다. 그가 열어 탁자에 올린 상자에는 은빛으로 빛나는 티아라와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반지가 들어있었다.
“할머니와 어머니께서 결혼식에 썼던 예물이오. 당신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 꼭 선물하고 싶었어. 받아주시오.”
에리카는 보석이 발하는 영롱한 빛과 오웬을 번갈아 보았다. 가게 안에 있던 사람들이 둘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에리카는 오웬이 그녀를 이 년 만에 처음 만났다는 사실을 잊어버리진 않았는지 궁금했다. 에리카는 제 손을 쥔 오웬의 손을 양손으로 마주 잡았다.
“일어나세요.”
에리카는 꼼짝 않는 오웬을 일으켰다. 그는 석연치 않은 얼굴을 하면서도 에리카가 하는 대로 따랐다.
“당신 졸업식 날을 기억하나요?”
오웬은 고개를 저었다.
“그때 나한테 고백한 뒤에 무슨 말을 했나요? 너무 시끄러워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어요.”
“그건….”
오웬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시오.”
“대답해주세요.”
에리카가 말했다. 오웬은 망설였다.
“대답하지 말라고 했소.”
“왜요?”
“나는 이제 겨우 학교를 졸업하는 몸이고 당신은 학생인데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소.”
“그럼 지금은 괜찮은가요?”
“불편하오?”
에리카는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벌써 이 년이나 지났어요. 그동안 나도 당신도 많이 변했을지 몰라요. 그런데도 나와 결혼하고 싶은가요?”
“당신은 여전히 아름답소.”
“당신도 여전히 서투르네요.”
두 사람은 조용히 서로를 마주 보았다. 눈동자에 비친 서로의 모습은 이년 전과 아주 달라져 있었다. 완전히 아가씨가 다 된 에리카도, 사회인의 풍모가 물씬 풍기는 오웬도 학창시절의 그 사람이 아니었다.
“받아주시겠소?”
오웬이 물었다. 에리카는 살풋 미소 짓는다.
“물론이에요.”
“에리카.”
박수가 터졌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내는 소리였다. 승낙이 날 때까지 숨죽이고 쳐다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런 점은 호그와트 시절 학생들보다 훨씬 낫다. 잘 고른 가게였다.
“우선은 조금 더 서로를 알아갈 시간을 가져도 괜찮겠죠?”
“당신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두 사람은 다시 마주 앉았다. 종업원이 서비스라며 샴페인을 가져왔다. 벌써 주점을 열 시간이 된 모양이었다.
“식사도 하고 가시겠어요?”
종업원이 물었다. 오웬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날래게 메뉴판을 가져왔다. 에리카는 마음에 찰 때까지 보석을 감상했다. 오웬에게 돌려주자 그가 의견을 물어왔다. 어둑해진 바깥 풍경과 함께 가게는 사람이 들어차기 시작해 점점 소란스러워지고 있었다. 그렇게 하루가 저물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