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렀다. 드넓은 평야는 푸르게 물들어 올가을은 풍족하리라고 기대함 직했다. 멀리 보이는 인가에서는 밥 짓는 연기가 오르고, 아이들과 집짐승이 함께 뛰놀았다.
루비나트는 한적하고 여유로운 풍경을 바라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확실히 안정기에 접어들기는 든 한 모양이었다. 전쟁이 막 끝났을 당시라면 어디에서 밥 짓는 연기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감개무량했다.
전쟁이 끝나고 벌써 십 년. 대륙은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이제 어느 곳에서도 전란의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병사들은 옷을 갈아입고 창과 칼 대신 농기구를 들었다. 모든 백성이 풍족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언제 죽을까 불안에 떨 필요는 없었다. 아이들은 내일을 꿈꾸고 어른들은 그 웃음에 소중히 간직해온 희망을 실었다.
페더와 엘리자베스가 온 힘을 다해 빚어낸 나라는 긴 세월이 조금도 아깝지 않을 만큼 충분히 아름다웠다. 긴 전쟁으로 생긴 커다란 상흔은 아직도 대지 곳곳에 남아있지만, 그것은 이미 지난 상처였다. 아물어 남은 흉터는 훈장이 되는 법이었다. 사람들은 전쟁이 떠오르는 무언가를 보면 뿌듯해 하며 말했다.
‘우리가 이렇게 평화롭게 사는 것도 모두 정복왕 페더님의 공적이지요.’
이렇게 백성들이 행복해하는데도 엘리자베스는 무엇이 불만인지 아직도 부족하다며 온종일 정무를 보느라 지친 몸으로 밤새 공부를 했다. 덩달아 페더와 메리엔델도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바빠졌다. 정해진 직무가 없는 루비나트만 일없는 한량처럼 길거리를 떠돌았다.
“레드드래곤이여.”
페더가 루비나트를 불렀다. 특유의 자갈밭을 긁는 듯한 거친 목소리였지만 무척 조용한 부름이었다. 루비나트는 히익, 하고 비명 아닌 비명을 질렀다.
“뭐야, 갑자기. 닭살 돋게.”
페더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풍채만큼이나 긴 숨으로 한참이나 웃었다. 루비나트는 머쓱하게 그 모습을 지켜만 보았다. 평소대로라면 뒤통수라도 한 대 후려갈겼을 테지만 뭐라 할 수가 없었다.
“야, 야. 적당히 웃어라.”
결국, 민망해진 루비나트가 한마디 했다.
“미안하게 됐군.”
웃음을 멈춘 페더는 다시 웃으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상대해주는 녀석이 없어 동굴에 틀어박히려던 루비나트를 불러낸 것은 페더였다. 뜬금없이 용건도 말하지 않고 시간과 장소만을 전달하는 건방진 통보. 불러낸 사람이 페더가 아니었으면, 진심으로 벗이라 부를 수 있는 루비나트의 몇 안 되는 동료 중 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진작 그쉘 손에서 가루가 되었을 편지였다. 루비나트는 투덜거리면서도 두말없이 달려 나왔다. 심심해서기는 했지만 심심해서만은 아니었다.
“묻고 싶은 것이 있어 불렀다.”
페더는 다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전쟁터에서는 용의 포효와도 비견할만한 목소리가 남몰래 연인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로미오처럼 부드럽게 가라앉았다.
“레드드래곤 루비나트여.”
그 호칭마저 간지러워 루비나트는 몸서리를 쳤다.
“그대가 보기에 이 나라는 어떠한가.”
“무슨 의미야?”
“한때 그대는 거대한 제국의 주인이었지.”
내리쬐는 햇살 아래 페더는 여느 농부와 다름없는 차림이었다. 루비나트는 그제야 그날이 무슨 행사가 있는 날이었다고 깨달았다. 며칠 전부터 중요한 행사가 있다며 궁내부원들이 바삐 뛰어다녔다. 메리엔델도 엘리자베스도 모두 바빠 말을 붙일 사람조차 없었다. 그래서 동굴로 들어간 것이었는데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루비나트는 픽 웃었다.
루비나트는 드래곤이다. 케이어스가 무너지고 제일 먼저 깨어나 억겁의 세월을 살아왔다. 잊을 수 없는 것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인간사는 루비나트에게 의미가 없었다. 그랬다. 페더와 그 동료들이 아니었다면 보옥으로 돌아가 잠들거나 혹은 보옥까지 파괴되는 날이 오더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도 인간 하나에 이토록 집착하는 타락한 케이어스라는 존재에 닭살이 돋을 지경이니까 틀림없다.
아이오나는 말했다.
‘너 내 분신인데 굉장히 인간 같구나.’
루비나트는 그 말이 뿌듯했다. 언제든 그 건방진 에인션트에게 ‘이거 보아라. 너는 못하는 걸 내가 했노라,’ 그렇게 말할 수 있는 확실한 증표를 얻은 것이었다. 인간 같다는 말을 칭찬으로 여기는 자신이 우스우면서도 그렇게 기쁠 수 없었다. 소중한 이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루비나트는 진심으로 그것에 있어서는 여신에게 감사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잠들어버린 여신 따위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존재를 준 것은 어쨌든 여신의 소관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아직도 굶주리는 사람들이 있다며 열심이다. 나는 검밖에 들어본 적이 없는 몸이지만 그들의 웃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라면 농기구를 드는 것도 나쁘지 않아. 전사의 긍지가 무너진다느니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놈들이 있지만, 전쟁이 끝나면 전사는 농부로 돌아가는 법.”
그랬다. 봄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본격적으로 씨앗을 파종하고 한해 농사에 들어가야 하는 때, 왕인 페더가 직접 그 손으로 쟁기질을 하고 씨를 뿌려 모든 백성에게 씨 뿌릴 때를 알리는 행사가 있었다. 뼛속까지 전사인 페더는 처음 이 행사를 시작했을 때 무척 당황했다. 쟁기를 잡는 법조차 몰라 가르침을 받았다. 기껏 그럴듯한 모양을 만들자 이번에는 넘치는 힘이 문제라 쟁기를 아예 전용으로 새로 만들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메리엔델과 함께 그것을 지켜보며 웃었다.
깜빡.
의식이 끊긴 것처럼 잠깐 생각이 끊겼다. 루비나트는 고개를 흔들며 페더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뭐야? 잘했다고 칭찬이라도 해달라고?”
“하하하!”
페더는 파안대소하더니 드디어 루비나트를 마주 보았다. 루비나트는 눈을 크게 떴다. 생소한 얼굴이었다. 이토록 즐거워하는 페더를 본 적이 있었던가? 이게 엘리자베스가 보는 페더인가?
“그래, 그런 의미일지도 모르겠군. 아니, 그런 것이다. 레드드래곤 루비나트여.”
페더는 너른 들판을 향해 손을 뻗었다.
“월향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을 번영으로 이끌었던 그대라면 자격이 있다. 이 나라는 아직 어리다. 전쟁이 남긴 상처가 겨우 아물었을 뿐이다. 그러나 루비나트여, 그대라면 알겠지. 이 나라의 가능성을 말이다.”
루비나트는 못 박힌 듯 페더만을 쳐다보았다. 타오르는 태양 아래 그들의 군주가 빛나고 있었다. 여신이 창조한 이 거대한 대륙을 차지한 영웅이 뜨거운 열정과 확신에 찬 손짓을 그의 백성들에게 보내고 있었다.
“나는 굶주림과 추위에 쓰러지지 않는 나라, 어느 날 갑자기 칼 맞아 쓰러질 걱정이 없는 나라는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행복은 안전에서만 기인하지는 않지. 불행은 막을 수 있지만, 행복을 불러오는 법은 모른다.”
짧은 생을 사는 생물은 이토록 아름다운 것이었나. 루비나트는 그런 생각을 했다. 처음으로 메리엔델이 어째서 페더에게 반했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전까지는, 그래, 페더는 믿음직한 동료지만 그것뿐이었다. 메리엔델이 페더에게 빠진 것을 억지로 이해했지만 인정하지 못했다. 조금은, 아주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그러니 묻겠다. 과거 월향국의 주인이었던 레드드래곤 루비나트여. 그대가 보기에 이 나라는 행복해질 자격이 있는가?”
태양과 같은 시선이 루비나트에게로 향했다. 루비나트는 전율했다.
“그대가 보기에 모자라다면 거리낌 없이 말하라. 나는 그대의 가르침을 청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정복왕 페더가. 수천 년을 산 루비나트, 그대가 보기에는 이 몸이 아무것도 아닐지 모르나 알다시피 나는 이 대륙을 다스리는 주인이다. 내가 숙임은 곧 대륙이 그대 앞에 굽히는 것임을 잊지 마라.”
피식, 웃음이 났다.
“건방진 녀석.”
자꾸만 입술 새로 웃음이 샜다. 큭큭대던 실소가 번져 만면에 꽉 찬 미소가 되고 미소가 터져 홍소가 되었다.
“하하, 하하하!”
루비나트는 아예 배를 부여잡고 웃었다.
“이런 건방진 녀석을 봤나.”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어찌나 웃었는지 뱃가죽이 당겼다. 겨우 진정했지만, 여전히 숨을 내쉴 때마다 웃음이 함께 샜다.
“가르쳐달라면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 건방진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예전 같았으면 본체로 변해서 한방에 콱.”
루비나트는 한 발로 짓밟는 시늉을 했다. 페더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새삼 또 웃음이 났다.
“멍청아. 지금 그걸 물어보는 건 비겁하잖아. 내가 뭐라고 대답해야겠냐. 대답을 하나로 정해놓고 물어보면 어떡하라고.”
“그런 적 없다.”
“닥쳐봐. 나는 말이야, 전부 봤다고. 너랑 엘리자베스랑 메리엔델이 오늘이 오기까지 얼마나 노력했는지 그토록 괴로워하면서 어떻게 이 자리까지 도달했는지 전부 봤단 말이야.”
루비나트는 다시 한 번 하하, 소리 높여 웃었다.
“그런 내가 이제 와서 안 될 거니까 포기하라고 말하기라도 할 줄 알았어? 그러라고 너흴 용서해줬겠냐? 진짜 멍청한 자식 같으니라고.”
페더는 말없이 웃으며 루비나트를 지켜보았다. 아니, 너무 기분이 좋아서 페더도 웃고 있다고 착각한 걸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좋았다.
루비나트는 다시 한 번 큰 소리로 웃었다.
“네가 내 앞에 무릎 꿇은 그 날, 나는 너한테 내 꿈을 맡겼다.”
얼핏 차갑게도 보일 얼굴로 루비나트는 진지하게 말했다.
“엉터리 꿈이었지. 꽉 막힌 멍청한 에인션트가 도발한 탓에 갑자기 시작한 거였으니까 말이야. 근데 말이야. 그게 후회가 안 된다.”
루비나트는 또 실소했다.
“다 네놈 때문이야. 아냐? 세상에서 제일 무식한 놈아. 그러니까 대륙을 통일하고 모두 행복한 세상을 만들겠다느니 엉뚱한 소릴 하겠지. 심지어 성공할 줄이야. 정말 상상도 못 했다.”
“나는 말이지, 네가 뭐라고 말했건 그거 하나도 안 믿었어. 정말로 어디 두고 보자는 심정이었다고. 그냥 네가 하는 게 워낙 지극정성이니까 믿어보자고 생각했어. 그런데 말이야, 너랑 엘리자베스랑 메리엔델하고 있는 걸 보니까…….”
루비나트는 피식피식 웃었다.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페더는 대꾸도 없이 루비나트의 일장연설을 듣고 있었다.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웃다가 하늘을 쳐다보며 눈가를 문지르는 루비나트를 지켜보기만 했다. 루비나트는 태양을 향해 주먹질했다.
“……믿고 싶어지더라. 믿게 되더라. 네가, 너랑 엘리자베스가 정말로 불가능한 걸 이뤄줄 거라고. 그렇게 믿게 되더란 말이야. 네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한 건지 알겠냐?”
마침내 루비나트의 시선은 지상으로 돌아왔다. 어째선지 푸른 들판이 일렁였다.
“너는 타락한 내 심장을 흔들었다. 바보야, 할 수 있어. 엘리자베스가 있잖아. 네가 못하는 건 엘리자베스가 해줄 거고 메리엔델이 해줄 거고 나도 도울 거야. 근데 그걸 물어봐? 건방진 녀석 같으니.”
루비나트는 또 하늘을 향해 주먹질했다. 페더는 소리 없이 웃었다.
“루비나트.”
“왜 불러.”
“몸조심하도록.”
“뭐?”
루비나트는 페더를 돌아보았다. 갑자기 세상이 일그러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페더도 페더의 새 나라도 없었다. 루비나트는 뭐야를 연발했다. 시야가 어둠으로 물들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야, 일어나봐…요!”
누군가 거칠게 루비나트를 흔들었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린데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대답하기도 성가셔 손을 털어버리고 눈을 떴다.
“빨리 일어나라고…요! 수상한 놈들이 밖에서 떠들고 있단 말이야. 여기서는 힘도 못 쓴다며!”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귀를 비집고 들어오자 머리가 다 울렸다. 루비나트는 미간을 짚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끔찍한 두통이었다. 황금주를 마시는 게 아니었다고 후회했지만 후회 따위 매일하는 것이다. 내일도 루비나트는 분명 후회할 거라고 생각하며 황금주를 마실 것이다.
“정신 차려! 네가 그러고 있으면 난 어쩌라고…요. 나는 여기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단 말이야. 죽지 않겠다고 약속했어. 절대 안 죽으면 안 된다고! 네가 그러고 있다가 죽으면 책임질 거야!?”
“닥쳐. 머리 울린다.”
나직하게 뱉은 소리에 숙취를 증폭시키던 소리가 잠잠해졌다. 뭐라고 더 중얼거린 것 같기는 했으나 들리지 않았다. 그나저나 저게 방금 뭐라고 했지?
“수상한 놈들이 있다고?”
“그래. 네가 차일드 트리얀인지 뭔지가 여기 대장이라며. 아까 웬 군복 입은 기분 나쁜 것들이 트리얀님 어쩌고 하면서 지나갔다고. 그냥 지나가는 건 줄 알았는데 몇 번씩 지나가더니 아까는 입구를 들여다봤어…요!”
“와. 그렇게 존대를 해주시니 황송해서 죽어버릴 것 같네.”
에인션트 꼬맹이가 뭐라고 꽁알거렸지만, 이번에도 흘려 넘겼다. 루비나트는 어지러운 머리를 억지로 굴렸다. 생각이 자꾸만 끊겼다. 한번 끊기면 방금 생각했던 게 뭔지도 잊어버렸다.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했다. 루비나트는 이제 이게 황금주의 부작용인지 독기에 침식당한 탓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어쨌든 확실한 건 하나였다.
“그놈들이 마지막으로 왔다 간 게 언제지?”
“뭐? 어, 그게…, 그러니까…….”
“도움이 안 되는군.”
탄식처럼 뱉은 말에 에인션트가 머리채를 풀어헤치고 달려들었다.
“야, 여기엔 해도 없잖아! 요. 이씨. 분명히는 모르지만 오래 지나진 않았어. 불안해 죽겠는데 네가 하도 안 일어나서 코라도 막아볼까 고민하고 있는데 나타났다고. 숨소리 샐까 봐 꼼짝도 않다가 그놈들 가자마자 다시 깨웠다고. 그리고 좀 있다가 깼으니까 얼마 안 됐어.”
루비나트는 대충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대답 고마워.”
“야!”
“도망가지.”
에인션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생긴 것도 꼬맹이 같아서 눈이 참 크기도 하다.
“뭐? 둘이서? 그럼 그 녀석은? 두고 가자고? 안 돼. 나랑 죽지 않기로 약속했단 말이야. 혼자 두면 무슨 일이 생겨도 지켜줄 수 없잖아.”
루비나트는 아랑곳 않고 짐을 정리했다. 위험은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일이었으니 늘 준비는 되어있었다. 들키면 안 되는 물건을 처분하고 남은 이를 위해 적들이 모를 메시지를 남기고 꼭 필요한 짐을 챙기는 데는 오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무시하지 마…요!”
여전히 에인션트는 시끄러웠다. 루비나트는 대충 준비를 끝내고서야 그를 돌아보았다.
“이봐, 꼬맹이 에인션트.”
“……왜요.”
“무슨 대단한 일이 있어서 그런 거창한 약속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잡히면 위험한 건 그 녀석이 아니라 우리야. 그 녀석은 한갓 인간일 뿐이니 베스티넬이라도 강림하지 않는 한 알아보는 녀석은 없겠지. 하지만 너나 나는 달라. 차일드라도 마주치면 알테이아의 보옥 정도는 단숨에 들통 날 거야. 설마 자기 보옥 크기에 자신이 있어서 그렇게 당당한 거야? 확실히 그 정도 힘이면 트리얀이 손가락만 휘둘러도 날아갈 수는 있겠어.”
루비나트는 픽 웃고 돌아섰다.
“쓸데없는 데 에너지 소모하게 하지 말고 따라와. 죽고 싶지 않으면.”
“……너 진짜 성격 더러워.”
“네, 네.”
문을 열자마자 보인 것이 군복이 아니었더라면 사정이 나았을까. 시간을 지체하지 말고 떠났으면 괜찮았을까. 꼬맹이 에인션트가 떠들지 못하게 진작 입을 막았어야 했을까.
루비나트는 어지러운 머리를 잡고 몇 번이고 자신에게 물었다. 조금이라도 나아질 방법이 있었을까. 알 수 없었다. 말도 안 되는 환상이 머릿속을 떠돌았다. 환상은 날이 갈수록 선명해져 이제는 현실보다 더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페더, 너는 정말로 우리를 배신했나. 네게 걸었던 모두의 기대와 희망을 내던지고 말았나. 왜 그랬어. 어째서 그런 선택을 했어.
이미 죽어버린 친우에게 말을 걸어도 소용이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살아있어도 물어보지 못할 말이었다. 루비나트는 웃었다.
“언제까지 내가 제정신일 수 있을까.”
시야가 아득해졌다. 옆에서 꼬맹이 에인션트가 비명을 지른 것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