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요. 들어본 적 없습니다.”
하루는 차분하게 말했다. 눈은 여전히 초롱초롱하고 시선은 올곧게 미래에게 박힌 채였다. 미래는 점점 강해지는 두근거림에 침을 꼴깍 삼켰다.
“미안해요. 내가 너무 두서없었죠.”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척 긴 숨을 뱉는다. 옅은 미소를 띄고 일어나 옆에 있는 작은 화분을 집어들었다. 작은 화분에 어울리는 조그만 식물이 심겨져 있었다. 어떤 종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미래에게 그것은 국적이 어디인지 묻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아이는 미래에게 자신의 이름을 속삭여주었고, 미래에겐 그 이름으로 충분했다.
미래는 손끝으로 부드럽게 잎을 쓰다듬었다. 손길이 기분 좋았는지 활짝 웃는 얼굴에 마주 웃는다.
“이 아이, 하루씨가 나쁜 사람 같지 않대요.”
미래는 조용히 말한다. 시선은 화분에 고정한 채였다.
“다들 의견이 비슷해요. 아니라는 친구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하루씨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에요.”
미래의 눈길이 방을 둘러싼 화분들로 향했다.
“이 목소리들이 하루씨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겠죠?”
하루는 당황한 듯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요. 미친 사람 같겠죠. 아니면 사기꾼이거나.”
미래가 작게 웃었다.
“알아요. 하지만 제가 보여줄 수 있는 건….”
잠시 고민한다.
“괜찮다고 하니까 보여줄게요. 원래는 안 되는 건데, 이 친구들이 하루씨에게 거는 기대가 남다른가봐요.”
난처한 듯한 미소를 걸고, 미래는 아까 꺼내온 작은 화분에 손을 뻗는다.
“미안해요.”
조그맣게 속삭이고,
“어?”
하루가 얼빠진 소리를 냈다.
이파리를 살며시 감싼 손 안쪽에서 피어나는 꽃송이가 고스란히 들여다보였던 것이다. 미래가 한껏 미안한 표정으로 화분을 감싸쥐었다.
“꽃을 피우는 건 굉장히 큰 힘이 드는 일이에요. 특히나 이렇게 빠르게 하면 더욱 그렇죠. 이 아이는 최선을 다 했어요. 그래서 이 이상 눈에 보이는 걸 보여드릴 수는 없네요.”
미래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화분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원래 자리에 돌려놓았다. 가볍게 한숨을 쉬고 하루를 바라본다. 그러고는 작게 놀랐다.
“괜찮아요?”
“네?”
아. 탄성을 뱉는다.
“네, 괜찮아요. 그냥. 놀라서요.”
깜빡. 깜빡. 두어번 눈을 깜빡이고 하루는 어색하게 하하 웃었다. 미래가 그걸 보고 따라서 희미하게 웃었다.
“저는 저 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요. 그리고….”
미래는 작은 화분을 바라보았다.
“방금 같은 일도 할 수 있죠. 어지간해선 하면 안 되는 일이지만요.”
잎새도 마찬가지예요. 미래가 말했다. 하루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잎새를 바라보았다.
“아무 이야기도 못 들으셨나요?”
미래는 잎새를 한 번 흘긴다. 그러나 곧 어쩔 수 없다는 듯 가벼운 한숨을 내쉬곤 하루를 바라보았다.
“저 애는 우리 마을의 바람이랍니다.”
미래가 웃었다. 부드럽게 산들바람이 불어 미래의 머리칼을 흔들었다.
섬 밖에서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은 금지된 일이기도 했지만 힘든 일이기도 했다. 섬을 벗어나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미래는 섬 안이었다면 커다란 가지도 붙일 수 있었지만, 밖으로 나오니 기껏해야 가느다란 가지를 치료하거나 꽃을 두어 송이 피워내는 게 전부였다. 기분에 따라 날씨를 뒤흔들던 서담과 은아는 기껏해야 불을 붙이거나 물줄기를 조종하는 정도의 일밖에 할 수 없었다.
그나마도 섬과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제한이 커져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가니 아픈 아이들을 치료하는 것도 쉽지 않게 되었다. 미래의 힘이 미치는 영역이 줄어드니 치료 받아야하는 친구들이 가진 본연의 생명력을 가져다 쓰게 되었다. 상처를 고쳐주었더니 오히려 큰 병에 걸리거나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생겼다. 그때부터 미래는 식물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의 방법으로 아픈 아이들을 도울 수 없다면 다른 방법으로 돕는 수밖에 없었다. 그 전까지 친구들이 세간에서 어떻게 불리는지조차 모르던 미래는 세상이 그들을 부르는 이름을 알았고, 자신과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그들을 돕고 분류하는지 배우게 되었다.
그러면서 외로움도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친구들의 말에 입을 열지 않고도 대꾸하는 법을 깨달았다. 속을 터놓을 친구는 동향 친구와 풀과 나무로 충분했다.
미래가 안정되어 가는 사이 급속도로 피폐해져가는 친구가 있었다. 은아였다.
“은아야.”
우연이 조심스럽게 다가섰지만 은아의 눈에는 여전히 핏발이 서있다. 시뻘건 눈이 시큰둥하니 선 서담을 향했다.
“죽여버릴거야.”
코웃음치는 소리. 선하게 들리는 소리에 미래의 눈초리마저 매서워진다. 우연이 답지 않게 엄중한 낯으로 서담을 꾸짖었다.
“입 다물어.”
다른 사람 말은 무시해도 우연의 말은 쉽게 무시하지 못하는 서담이 조용해졌다. 얼굴로는 불평을 토했지만 적어도 토를 달지는 않는다. 우연이 다시 은아를 마주했다.
“일단 진정해, 은아야.”
“저거 죽이고 나서.”
“은아야.”
우연은 입술을 꾹 다물고 한 손으로 미래에게 손짓한다. 그 손에 담긴 의미가 명확했다. 저거 데리고 나가. 미래는 서담을 비롯해 사태를 방관 중인 남자아이들을 방에서 몰아냈다. 다행히 은아는 그대로 폭발하지는 않았다.
미래가 다른 아이들을 내보내고 돌아올 때까지 은아와 우연이 대화를 나눈 것 같지는 않았다. 미래는 조용히 우연의 곁으로 돌아와 앉았다.
“은아야. 이번엔 너도 심했어.”
우연이 조용히 말했다.
“이번 건 누가 봐도 네가 싸움을 걸었어. 알지?”
“…….”
“너 요즘 힘든 거 알아. 하지만 오늘은…….”
“됐어.”
은아는 그대로 우연을 지나쳐 방을 빠져나갔다. 말릴 틈이 없었다. 우연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연아.”
아찔한 듯 감은 눈이 힘겨웠다. 미래는 우연의 손을 가볍게 붙들었다. 우연이 눈을 뜨고 쓰게 웃었다.
“이제 쟤들을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어.”
“그러게.”
미래는 혼잣말처럼 답했다. 아무 의미없는 맞장구 밖에 칠 수 없는 자신이 바보 같았다. 고개를 살짝 숙이자 뒤에서 위로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작은 방에서 그들이 모일 때마다 항상 지켜보고 있었던 큰 화분이다. 미래는 속으로 감사인사를 하며 몸을 일으켰다.
“일단 우리도 나가자.”
너도 힘들잖아. 그 말을 마음 속으로 삼키며 미래는 우연의 팔을 이끌었다. 우연이 얌전히 끌려왔다.
두 사람은 미래가 가꾸는 정원에 섰다. 손바닥 만한 조그만 정원이었다. 미래는 나온 김에 쪼그려 앉아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우연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서있다.
“며칠 째 잎새가 집에 안 들어왔대.”
“그래?”
갑자기 입에 침이 말랐다. 미래는 손을 움츠렸다. 벌써 이게 몇 번째 들은 소린지 몰랐다.
같은 초등학교를 다닌 아이들 중 가장 나이가 어린 잎새는 바람의 목소리를 듣는 아이였다. 본래도 정신이 불안정한 것을 어릴 때부터 은아가 키우다시피 하며 돌봐왔는데, 은아와 다른 아이들이 내지에 있는 중학교로 진학한 후로 상태가 심해진 모양이었다. 어찌나 붙임성이 없는지 몇 년을 같은 교실에서 보내면서도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아 미래는 그 애가 어떤 아인지도 잘 몰랐다. 조그만 몸집과 은아의 자랑 아닌 자랑들이 미래가 그 애에 대해 아는 전부였다. 앞머리를 길게 기르고 고개를 숙이고 다녀서 얼굴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미래는 그 애와 은아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몰랐다.
신기할 정도로 마을 소식을 꿰고 있는 우연을 통해 몇 마디 들은 바로는 최근 잎새는 학교에 나가지 않고 집에도 들어가지 않는 일이 잦아진 모양이었다. 은아가 잎새를 찾아야한다며 학교를 빠지려는 것을 마을 어른들이 반강제로 등교시킨 적도 몇 번 있었다고 했다. 어디서 뭘 하는 건진 모르지만 일주일이 지나기 전에는 꼭 돌아오기는 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언제 사라질지, 어디서 뭘 하는지, 언제 돌아오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 작은 섬에서.
여기서 보았다, 저기서 보았다, 하는 입소문은 들려왔지만 대중이 없었다. 은아는 집에만 돌아오면 잎새를 찾아 온 섬을 헤맸다. 바다가 출렁일 정도로 샅샅이 뒤졌지만 그 애는 마치 증발한 듯 보이지 않아서, 처음 몇 번은 잎새가 완전히 섬을 떠난 게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돌았을 정도였다. 어른들 말씀으로는 바람의 아이에게는 때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은아는 거의 미쳐가고 있었다. 조만간 폭풍이 불지도 몰랐다. 집에 돌아올 때마다 바다가 화를 내는 게 느껴졌다. 미래로서는 두려울 따름이다.
“며칠째?”
“음.”
우연이 고민하는 소리가 들렸다.
“일주일.”
그랬구나. 역대 최장기간이다. 은아가 제정신이 아닌 것도 이해는 갔다. 은아에게 잎새는 아는 동생 정도로 설명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렇다고 친자매 같은 사이인 것도 아니다. 미래는 형제가 있었지만 친형제에게 그렇게 할 수 있냐고 물으면 기겁하고 말 것이다. 은아는 미래로선 상상도 할 수 없을만큼 잎새를 아꼈다. 어딜 가든 무얼 하든 잎새부터 생각했으니까.
식사를 앞두면 잎새가 좋아할 음식이 무엇인지부터 확인했고, 추우면 추운대로 더우면 더운대로 잎새의 옷차림을 확인했다. 은아는 공부를 꽤 잘하고 열심히 하는 편이었는데 그것도 잎새에게 가르쳐주기 위해서라고 공공연하게 말하곤 했다.
아무리 화나는 일이 있어도 잎새가 옆에 있으면 화내지 않았고,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잎새 앞에서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기쁜 일이 있으면 잎새에게 재잘거렸고, 좋은 것을 보면 잎새에게 보여주었다. 그 정도로 사랑하는 아이였다. 혹시라도 그 애가 사라질까 두려운 건 당연했다.
아이들이 어려서 다함께 학교에 다니기 전부터 종종 들은 말이었다. 바람의 아이는 언젠가 떠난다. 쉽게 떠나는 만큼 쉽게 돌아온다. 하지만 결코 머무르지 않는다.
모두 은아를 위한 말이었다. 그 애에게 너무 정을 주지 말라는 소리였다. 어려서 부모를 잃은 잎새가 은아네 집에 들어와 함께 살게 되었을 때부터 은아는 그 애에게 첫눈에 반해있었으니까. 하지만 은아는 이미 잎새를 깊이 사랑했다. 더는 혼자가 될 수 없을 정도로.
“돌아올까?”
미래가 중얼거렸다.
“글쎄.”
우연의 혼잣말 같은 대답이었다. 미래는 만약을 담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혹여라도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날까봐서였다. 두려웠다. 잎새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은아가 미쳐버리는 것이.
“그만 싸워야할텐데.”
그래서 말했다. 아주 작은 바람이었다. 그저 모든 것이 평온하기를 바라는, 아주 작은 바람. 우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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