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침묵이 흘렀다. 우연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심각하게 노려보다가 고개를 들어 하루를 보았다.
“당신이이 여기 온 것도 우연은 아닐 거예요. 어쩌면….”
눈을 감는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듯 침묵한 우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루양이 원한다면 모든 걸 이야기해줄게요. 우리들의 이상한 힘에 대해서도, 그리고 어쩌면 당신에게 닥칠지 모르는 운명에 대해서도.”
바람이 불었다. 이번에는 하루의 마음 속에서 부는 바람이었다. 왠지 파도 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다.

우연의 집은 동네에서 거리가 좀 떨어진 외딴 곳이었다. 정확히는 우연의 스승이자 현시점 보호자인 현철의 집이다. 우연은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부터 현철의 집에 드나들었다. 초등학교에 다닐 동안에만 해도 학교가 파한 후 저녁을 먹기 전까지 시간을 보내거나 주말을 함께 보내는 게 전부였으나 중학교에 올라가고 나서부터는 함께 살게 되었다. 반 정도는 우연의 사정 때문이었고, 나머지 반 정도는 현철을 걱정한 어른들의 안배였다.
현철을 처음 본 게 언제적 일이었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우연은 아마 제가 태어나자마자 그가 찾아왔을 거라고 생각했다. 현철 성격에 결코 스스로 원해서는 아니겠지만 그것이 현철의 의무였으니까.
우연이 혼자서 나다닐 수 있게 되자마자 현철의 집에 매일 찾아간 것처럼, 우연이 혼자서 돌아다닐 수 없는 미취학 아동 시절에는 매일 현철이 우연의 집에 찾아오곤 했었다. 빠지는 날은 거의 없었다. 우연에게 현철의 얼굴은 부모만큼이나 익숙했다. 그는 매일 찾아와 우연이 꼬아놓은 끈들을 풀고, 때로는 끊어놓은 끈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어린아이 눈에 반짝이는 끈들은 좋은 장난감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걸 만지는 게 위험한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부모님이 이혼한 뒤였다. 어린 우연이 아무것도 모르고 얽어놓은 끈들은 당연하게도 우연에게서 가장 가까운 이들의 것이었다. 잦은 싸움, 닳고 닳아서 가늘어진 끈과 숨 죽이고 결과를 기다려야만 했던 순간들.
부모님의 이혼이 결정되고 나서 우연은 현철 앞에서 펑펑 울었다. 내 탓이냐고 물었다. 현철은 깊게 한숨을 쉬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겨우 대답했다. 아니다. 그 대답으로 충분했다. 모든 게 우연의 잘못이었다. 우연은 그날부터 부모님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한동안은 부모님을 만나지도 않았다. 현철의 집에서 울며 잠드는 날이 많아졌다.
어른들은 우연을 보며 혀를 찼다. 부모님에게 동정의 눈길을 보냈다. 인연의 아이가 태어난 가정은 불행해진다. 부모님이 이혼한지 한참이 지나서, 더는 밤마다 눈물이 나지 않게 된 어느날 들은 말이었다. 현철과 마을 어른의 대화였다. 그 후로 우연은 눈물을 잃어버렸다. 모든 게 자신의 탓이었다. 타고나길 그렇게 났다. 가식적인 눈물은 그만 흘리자. 그렇게 생각했다.
대신 우연은 친구들 사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되도록 인연의 끈은 건드리지 않았지만 정말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손을 대었다. 위아래를 모르고 까부는 또래의 장난꾸러기들에게는 말과 행동만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우연이 통제력을 손에 넣은 것만으로도 교실은 평화를 찾았다. 이따금 소란이 일기는 했지만 전처럼 요절복통은 아니었다. 조그만 교실 안에서 뜬금없이 불이 난다거나 폭풍이 휘몰아치는 일은 사라졌으니 그것만으로도 큰 성과였다. 선생님은 우연을 안쓰러워하면서도 고맙게 여겼다. 우연의 가슴 한 구석에 피어난 죄책감을 제외하고는 모든 게 좋았다.
현철이 여느 때처럼 우연의 앞에 술상을 차려놓고 안주도 없이 속을 버리던 어느 저녁이었다. 빨간 노을이 창틀을 넘었다. 우연은 현철의 얼굴이 붉어진 것이 술기운 탓인지 노을 탓인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삼촌.”
우연이 불렀다.
“어.”
현철이 대답했다. 우연은 잠시 뜸을 들이다 물었다.
“삼촌도 가족이 없어요?”
“어.”
현철은 우연을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고, 우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삼촌도 그랬어요?”
“어.”
카. 현철은 독한 소주를 단번에 목구멍으로 넘겼다.
“그렇구나.”
우연이 중얼거렸다. 그 뒤로 우연은 결코 현철에게 술을 줄이라는 잔소리를 입에 담지 않았다.

하루는 결연한 얼굴을 한 우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잘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처음 보는 잎새를 덥석 따라나선 것도, 낯선 이들의 낯선 행동에 이렇게 귀를 기울이며 앉아있는 것도. 그런데도 하루는 이 모든 게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가 않았다. 그저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루하루 지루하기만 하던 나날들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하루는,
“말해주세요.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할게요.”
망설이지 않았다.

어쩌면 그날부터다. 우연이 삶에서 현실감을 느끼지 못 하게 된 것은.
처음에는 약간의 전능감을 느끼기도 했다. 끈. 그거 하나로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건 굉장한 일이니까. 그러나 이것을 통해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시도한 모든 일들이 실패로 돌아갔다. 혹은 전혀 예상치 못한 부차적인 결과를 들고 왔다. 그 중 하나가 이것이었다.
“죽어!”
눈을 시뻘겋게 뜬 은아가 이를 갈며 외쳤다. 창문에는 서리가 끼고, 당장이라도 덤벼들 듯 허우적거리는 은아를 붙든 이들의 손 끝이 파랗게 멀어붙었다.
건너편에 선, 그러니까 은아가 덤벼들려고 하는 상대인 서담 쪽에서는 반대로 뜨거운 열기가 솟고 있었다. 은아의 냉기보다는 덜 격렬하지만 충분히 뜨거움이 느껴지는 온도로 공기가 들끓었다. 덕분에 교실 안에는 바람이 휘돌기 시작했다. 미래가 황급히 창문을 닫았다. 휘몰아치려던 바람이 조금 얌전해졌다. 우연은 얼굴을 감싸쥐고 주저앉고 싶은 마음을 겨우 가라앉혔다.
이러려던 게 아니었다. 그냥, 그냥 조금. 은아와 잎새의 거리를 줄여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끈은 튼튼하고 굵었지만 은아가 너무 끌려다니는 경향이 있어서 잎새 쪽의 끈을 조금 잡아당겼을 뿐이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우연은 몰랐다. 그러니 그저 우연의 일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연에겐 보인다. 은아와 서담 사이의 뒤엉킨 실들 사이에는 원래 저 끈이 섞여있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얽힌 건지 모르겠을 정도로 단단히 꼬여버린 두 끈 사이에 하나의 새로운 끈이 걸려 있었다. 잎새와 은아 사이를 연결하는 끈이었다. 이 일은 틀림없이 커질 것이다. 그런 예감, 아니, 경험에 의한 확신이 들었다.

우연은 하루의 대답이 무척 기뻤지만, 동시에 당혹스러웠다. 대체 하루라는 이 아이가 무슨 생각인지도 알 수 없었고, 그 이전에 외부인에게 자신들의 사정을 어떻게 설명해야할지도 몰랐다. 믿어서는 안 된다는 상식적인 판단과 이 끈은 믿어도 된다는 경험적인 판단이 부딪혔다. 머릿속이 쉽게 정리가 되지 않았다.
“하루양의 믿음은 옳아요.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있어요. 그것들은 의지를 가지고 있고, 지성도 있지요. 네, 살아있어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하지만 그 무엇보다 당연한 모양으로요.”
말을 하면서도 생각한다. 이게 무슨 소리람.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요정이니 도깨비니 하는 것들은 정확한 설명이 되지 못 한다. 굳이 따지자면 정령이겠지만….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그러니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으면 언제든 질문해주세요.”
네. 씩씩한 대답이 뒤따랐다. 우연은 한숨처럼 웃어버렸다.
“바람에도 목소리가 있고 물에도 뜻이 있지요. 우리 마을에는 그걸 들을 수 있는 사람이 한 세대에 하나씩은 꼭 있어왔어요. 대충 이십년에 한 번씩이었죠.”
그 정도는 아니라도 어느정도 대부분은 자연과 친해요. 말이 이상하지만….
우연이 망설이는 톤으로 말을 이었다.
“지금 하루양이 느끼고 있을 기이한 끌림을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줄곧 느끼고 있다고 하면 조금은 이해가 갈까요.”
마치 하루의 마음 속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우연은 그렇게 말했다. 하루는 눈만 끔뻑였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방어적이에요. 아무래도 외부인들과는 소통하기 힘들거든요. 외부인은 이해할 수 없고, 우리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있어요.”
지금도 그래요, 라고 우연이 입술을 깨물었다.
“하루양.”
“네.”
“우리 마을을 구해주세요.”
우연의 목소리가 떨렸다.

정령. 만물의 근원을 이룬다는 신령스러운 기운 또는 산천초목이나 무생물에 깃들어있는 혼령을 이른다. 나영도(島)와 줄곧 함께 해온 것은 그런 것이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정확히 몰랐다. 마을에 남은 기록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은 조선시대 것이었지만, 그때가 시작은 아니었다. 분명한 건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과 이십여년에 한 번씩 유독 그들의 사랑을 받는 아이가 태어난다는 것이다. 마을에서는 그 아이들을 ‘정령의 아이’라고 불렀다.
사람도 몇 없는 마을이다. 마을에 태어나는 아이들은 언제고 한 손에 꼽혔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도시로 나갔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따금 돌아오는 경우가 있기는 했다. 바로 정령의 아이를 낳은 부모였다.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섬을 벗어나면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다. 때로 그들과 유난히 친밀해서 뭔가 부탁을 하고 특수한 현상을 일으킬 수 있는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섬 바로 근처까지는 몰라도 멀리 나가면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마을에서 나고 자란 사람에게서는 간혹 정령의 아이가 태어나곤 했다. 그런 아이들은 섬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아이의 주변에서 자꾸만 이상한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이미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 부모는 아이를 감당하지 못 했다. 대부분은 위탁이라는 이름으로 마을에 아이를 맡겼고, 극히 일부는 돌아왔고, 나머지는 아이를 버렸다.
아이들은 어리면 어릴수록 사람의 목소리보다 그들의 목소리를 가깝게 들었다. 사람의 말이 그들의 목소리에 묻혀서 들리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나 불의 아이인 서담과 물의 아이인 은아가 심했다. 그 애들이 타인의 말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게 된 것은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쯤의 일이었다.
아마 바람의 아이인 잎새도 그랬을 테지만 우연은 잘 몰랐다. 그 애는 정말로 다른 사람과 교류라는 걸 하지 않았으니까. 잎새는 오로지 은아와만 이야기하고 은아와만 눈으르 맞추는, 지독히 폐쇄적인 아이였다.

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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