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손이 천천히 베일을 걷는 동안 넓은 홀에는 소리 없이 정적이 내려앉았다. 베일 아래로 아이의 고운 얼굴과 눈처럼 깨끗한 은발이 모습을 드러냈다. 온통 새하얀 옷에 머리까지 새하얀 창백한 피부 빛의 어린아이는 하얗게 빛을 발하는 듯 했다. 베일 아래 눌려있었음에도 정전기조차 일지 않는 긴 생머리, 어린아이답지 않은 초연한 표정은 아이가 사람이기 보다는 신의 사자라는 느낌을 주었다. 작게 뒤척이는 소리마저도 크게 들리는 침묵 속에서 아이가 천천히 눈을 떴다. 반짝이는 흰 속눈썹이 느리게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슈베린은 호기심으로 눈을 크게 뜨고 어린 사제를 바라보았다. 모든 어린아이들이 다 그렇듯이 성별을 구분할 수 없었지만 슈베린은 아이가 남자라고 확신했다. 루니안의 돌연변이, 남성 사제에 관한 것은 아무것도 알려진 것이 없었지만 천진난만한 황자는 의심도 없이 순수하게 그렇게 믿고 있었다. 이윽고 사제가 눈을 뜨고 반듯한 시선으로 슈베린을 바라보았다.
“……?!”
짙은 붉은 눈이 혈향血香을 안고 슈베린을 조여 왔다. 슈베린은 몸을 뒤로 뺐지만 황금빛 옥좌에 앉은 그에게는 도망갈 자리가 없었다. 소리만으로 공포심을 자극하는 거대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것이 무어라 말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슈베린은 와들와들 떨며 고개를 저었다. 몸의 떨림도 움직임도 점차 커져갔다.
순간 슈베린을 옭아매던 붉은 눈이 사라졌다.
“왜 그래?”
샤린이 작은 부채로 입을 가린 체 슈베린을 흘겨보고 있었다. 슈베린의 반응이 어지간히 수상한 것이 아니었던지 평소 슈베린을 두둔하는 일이 없는 샤린의 눈에는 걱정이 묻어있었다. 황제는 그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그녀의 장갑 낀 손이 슈베린의 손을 붙들고 있었다. 격하게 뛰던 황자의 심장이 차츰 평온해졌다.
“왜 그러냐니까.”
샤린이 대답을 재촉했다. 슈베린은 픽, 콧방귀를 뀌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샤린의 얼굴이 과격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외면하고 슈베린은 어린 사제를 살펴보았다. 그의 눈은 이제 루비처럼 맑게 빛나고 있을 뿐이었다. 미처 진정되지 못한 심장이 사제의 성스럽기까지 한 분위기를 의심하게 만들고 있었다. 슈베린은 누이의 손을 가볍게 감싸 괜찮음을 알리고 작게 떨리는 손끝을 말아 쥐었다.
재상의 목소리가 홀로 홀 안에 울렸다.
“이름을 고하시오.”
“하야르 유테입니다.”
아이의 목소리는 여전히 작았지만 단호하고 깨끗했다.
작은 소년은 많은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침착하게 다시 예를 갖추어 인사했다.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꺾어 몸을 낮추는 절이었다. 찰랑거리는 천에 가려져 정확한 동작은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반듯하게 황실예법에 따른 황제에게 바치는 인사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폐하. 그리고 형제분들.”
소년의 미성에 홀 전체가 술렁였다. 대신들의 속닥임이 황제의 귀에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조용히,’라는 재상의 경고에도 소란은 굼뜨게 가라앉았다. 아실리아의 얼굴에는 변함이 없었다. 여황의 아름다운 얼굴은 사제가 갖추어서는 안 될 예의를 갖춘 것에도 나이어린 소년이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내뱉은 것도 다 예상했다는 듯 태연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으니 설명해 주지 않겠소, 사제여.”
언제나처럼 느릿하게 이어지는 말에는 진중한 위엄이 실려 있었다. 그 무게는 그녀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융단 위의 사람에게 모든 시선이 집중되게 되어있는 알현실 전체의 구조, 그리고 황제의 옥좌의 높이로 인해 위에서부터 내리누르는 형태로 사람을 압박하게 되어있었다. 짓눌릴 법도 하건만 소년은 조금도 위축됨이 없었다.
“그것을 말씀 드리기 위해 이곳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소년의 시선이 살짝 이동했다가 다시 황제에게 돌아왔다. 시선만 살짝 이동하는 미세한 변화였기에 대신들과 뒤에 서있던 다른 루니안의 사제들은 눈치 채지 못했지만 슈베린은 알았다. 아니, 알 수밖에 없었다. 소년의 시선은 슈베린을 지나갔다. 다시 누이에게 돌아간 소년의 시선을 따라 저도 모르게 옆을 보고 만 슈베린은 또다시 샤린과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좌우에서 무엇을 하고 있건 황제와 사제의 대화는 이어졌다.
“그렇다면 말해보라.”
“이곳에서는 아니 됩니다, 폐하.”
“그럼?”
“제가 며칠 머물러도 되겠는지요.”
“황궁은 넓어서 비는 방이 많지.”
소년이 엷게 미소 지으며 황제의 앞에 허리를 숙였다. 두 사람은 몇 마디를 더 나누었다. 남는 것은 소년 혼자라는 것과 파티를 간소하게 축소시킨다는 이야기가 오갔다. 간단히 이야기가 끝나고 황제의 퇴실 허가 명령에 사제들이 소리없이 조용하게 홀을 나갔다. 첫 세 걸음은 뒷걸음, 그리고 나머지는 그냥 돌아가는 것이 일반적인 예의지만 지키는 것은 하야르 유테라 이름을 밝힌 소년 하나였다.
관리들에게도 함께 내려진 퇴실 명령이었지만 움직이는 이는 없었다. 사제들의 모습이 닫힌 문 너머로 사라지자 제각각 목소리를 높인다. 누이와 리넨이 두서없는 말들을 받아들이고 잘라내고 정리했다. 슈베린은 잠시 그 모양을 바라보다가 양해를 구하고 홀을 빠져나왔다.
성인 남자가 셋은 편히 뒹굴면서 잘 수 있을 듯 보이는 커다란 침대에 걸터앉은 하야르는 얕은 한숨을 내뱉었다. 주어진 손님방은 호화롭기 짝이 없어서 안 그래도 또래에 비해 작은 아이는 한층 움츠러들어 있었다. 어지간한 서민 집보다 넓은 방 크기도 양 팔을 다 벌려도 두 아름은 남을 듯 한 거대한 샹들리에도 하야르에겐 무섭기만 했다. 제 몸보다 배는 큰 창가에는 몇 발짝 떨어져 구경할 엄두초자 내지 못했다. 창이 큰 만큼 한가득 넘어온 햇빛이 구석구석에 놓인 반짝이는 것들에 부딪혀 눈을 어지럽혔다. 은은한 빛이 감도는 신전에서만 살아온 하야르는 눈 둘 곳을 찾지 못하고 한 번 방안을 훑어보고는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의 긴 머리카락이 어깨 아래로 흘러내리며 방에 놓인 장신구인 양 희게 빛났다.
“예쁘네.”
“?!"
하야르는 화들짝 놀라 눈을 홉뜬 체 굳어버렸다. 소년이 모르는 새 열린 문가에는 흐드러진 금발을 매만지는 슈베린이 서있었다.
“그래봐야 나만은 못하지만.”
보란 듯이 얼굴 가득 비웃음을 띄운 체였다. 슈베린은 빠르게 말한 기세 그대로 거침없이 방을 가로질러 창가 티 테이블 앞 작은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그대로 하야르를 향해 차가운 시선이 꽂혔다. 슈베린은 정확히 뭐라고 표현하기는 어려웠지만 굉장히 기분이 나빠 보였다. 강렬한 감정이 얼굴에서도 몸짓에서도 강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적의에 하야르는 당황했다. 슈베린은 톡하니 쏘아붙였다.
“너 정말 남자야?”
“그럼 아닌 것 같습니까?”
고운 소년의 아미가 흉하게 일그러졌다. 슈베린은 그런 하야르를 보고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배부른 고양이마냥 나른한, 이겼다는 듯 여유로운 미소였다. 하야르는 그런 슈베린에게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용건은 그것뿐입니까?”
“기분 나빠?”
“예.”
하야르의 단호한 대답에 슈베린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 투덜거렸다.
“기분 나쁜 건 난데 왜 네가 화를 내는 건지 모르겠어.”
소년의 붉은 눈이 슈베린을 향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무것도.”
그렇게 말하지만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고 슈베린이 얼굴로 말하고 있었다. 하야르는 다시금 인상을 찌푸리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푹신한 양탄자가 발소리를 삼켰다. 슈베린이 소리도 없이 나타난 이유를 깨닫게 된 하야르는 안 그래도 불편하기만 하던 호화스런 궁이 더더욱 불쾌하게 느껴졌다.
“왜?”
테이블에 팔꿈치를 얹고 턱을 괴고 있던 슈베린이 자신의 바로 앞에 선 하야르를 바라보았다. 의자에 앉아서야 간신히 눈높이가 맞았다. 정면으로 바라보고 선 슈베린에게서 여유가 사라졌다. 하야르는 그 모습이 고소하다고 생각했지만 어째서 슈베린이 자신의 행동 사소한 하나하나에 흠칫거리며 반응하는 건지 의문이었다. 자신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까, 하고 지레짐작해 보았지만 아무리 봐도 그렇게는 보이지 않는다. 잠시 고민하던 하야르는 슈베린이 자신의 말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빨리 나가주셨으면 하는데요.”
“손님이 앉자마자 쫓아내는 건 루니안 교단의 예의인가?”
처음 이 방에 나타났을 때부터 그랬지만 슈베린의 말에는 시퍼런 날이 서있었다. 이유를 알 수 없었고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도 알 수 없어 당황했지만 마구 휘두르는 칼에 두어 번 스치자 하야르의 얼굴에도 짜증이 새겨졌다.
“그럼 초대받지도 않은 곳에 쳐들어가서 화풀이 하는 건 하르미안 황가의 예의입니까?”
슈베린의 눈이 크게 뜨였다가 가늘어졌다. 그의 얼굴에서 희미하게 떠올랐다가 짙어지는 미소는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짐작하기 어렵게 만들 뿐이었다. 얼결에 짜증을 내고 주춤거리며 눈치를 보는 하야르를 슈베린은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왕권과 신권은 서로 침해하지 않는 것이 관습이지만 세상은 힘의 논리. 대륙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데다 원하는 대로 정세를 바꿀 수 있는 하르미안의 황실에 밉보인다면 신자도 적고 폐쇄적이라 세가 약한 루니안의 교단은 존속 자체가 위험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날 때부터 사제로 태어난 총명한 소년은 그런 사실이 현실에 어떻게 적용 되는 지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예의가 어떻다고?”
~ 2010/03/14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 좋아.”
황태자는 얼굴 가득 사랑스럽게 웃었다. 하야르는 외면했다. 그리고 갑자기 머리카락이 잡아당겨졌다.
“……이, 이건 무…!!”
“어린애는 좋구나.”
슈베린은 하야르의 턱을 잡고 얼굴을 좌우로 돌려보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소년은 발버둥 쳤지만 10살짜리가 어른에게 당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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