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 말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쉽게 말할 일도 아니었고 아무에게나 말할 일도 아니었다. 지금 여기서 뭔가를 언급하는 게 맞는 일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 라면요?”
저 당돌한 눈빛을 향해 모든 것을 털어놓는다면. 그러면 조금은 달라질까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그냥 털어놓고 싶은 건지도 몰랐다. 미래의 눈망울이 잠시 흔들렸다.
“별 거 아니에요.”
미래가 웃었다.
“다들 알고 있잖아요. 요즘 환경 파괴가 심각하다는 거. 그냥 그런 이야기예요. 누구도 어떻게 할 수 없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그런 일들이요.”
그렇게 가볍게 입을 열었다. 이것도 맞는 말이다. 결국 모든 일의 시발점은 그것이었으니까. 그래서 미래는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더 말해도 되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자신과 싸우면서.
“날씨도 갈수록 이상하고, 전세계적으로 이상한 뉴스가 많잖아요. 어디서는 지구가 50년도 채 버티지 못할 거라고 하고요.”
웃는다. 웃지 않으면 울 것만 같아서.
“그냥 그런 일들 중 하나예요. 넓게 보면 모두의 미래가 달린 일이지만,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그렇다고 그냥 두기엔 당장 삶이 위태로운 사람들이 있는….”
입을 다문다. 짧게, 하지만 깊게 침묵이 깔린다. 하루가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미래를 바라보고 잎새는 고요히 발끝만 바라보는 시간이 흘렀다. 미래가 어깨를 으쓱했다.
“별 거 아니죠?”
웃는 입가가 썼다.
“남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누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일도 아니고요. 저 꼬맹이가 아주 맹랑한 짓을 한 거죠.”
그렇게 말하며 미래는 생각한다. 정말 그런 거라면 아무 일 없다고 시치미를 뗄 수도 있을텐데 지금 나는 무슨 말을 하는 건가. 그리고 당황했다.
마주한 하루의 얼굴이 기묘했다. 뜬금없이 사람을 불러놓고 엉뚱한 소리를 하는 사람을 상대로 보일만한 표정이 아니었다. 하루는 아주 단단하고 당돌한 눈빛으로 미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하루가 물었다. 미래는 조금 긴장했다.
“듣고 싶어요?”
“네.”
단호한 눈빛. 거기에 이끌리듯 입이 열렸다. 고민과 동시에 말이 나갔다.
‘난생 처음 보는 사람한테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우리는 특별해요.”
하루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미래가 이어 말했다.
“풀잎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어요?”
미래는 손을 말아쥐었다. 외부인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본 건 처음이었다.
섬은 아주 작았다. 사람이 사는 마을이 있는 게 용할 정도로 작았다. 다행히 육지와는 아주 가까워서 다리가 이어져 있었으므로 사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외진 곳이고, 특별히 풍광이 뛰어난 것도 아니어서 사람이 찾을만한 매력은 없는 곳이었다.
아이들은 그곳에서 자랐다. 초등학교는 학년을 나눠서 교실을 줄 수 없을 정도로 작다. 전교생은 여덟 명이 전부였다. 일 학년 한 명, 삼 학년 세 명, 사 학년 두 명, 오학년 한 명, 육 학년 한 명. 남자아이 넷, 여자아이 넷.
“야.”
자신을 부르는 소리라는 걸 알았지만 굳이 돌아보지 않았다. 모른 척 제 일에 매진한다. 멀쩡한 이름을 두고 ‘야,’ 따위로 칭하는 무례한 부름에 응하고 싶지 않았다.
“야, 망할 지지배.”
등 뒤에서 바닥을 발로 차는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도 한층 거칠어졌다. 그가 성을 내고 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미래는 대답하지 않았다. 저 깡패가 저러는 게 하루이틀 일이던가. 그저 굳은 얼굴로 손 안의 여린 잎을 어루만지며 마음을 달랜다. 곧 닥칠 성가신 일을 대비하며.
들으라는 듯 뱉어지는 욕설을 한 귀로 흘린다. 화끈한 열기가 일순 등 뒤를 덮친다. 미래는 벌떡 일어섰다.
“뭐하는 짓이야.”
한껏 뾰족해진 음성이 날카롭게 공기를 갈랐다. 교실에 있는 두어개의 화분을 등 뒤로 감추듯 선다. 교실 안에 있던 몇 안 되는 아이들이 모조리 두 사람을 주목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미래는 등을 곧게 세운다.
“뭐.”
삐딱하게 선 남자아이가 거만하게 턱을 쳐들고 있었다. 상 서담. 성질이 급하고 입이 험해 여자아이들과 매번 갈등을 빚는 아이였다. 미래는 도끼눈을 뜨고 발디딤을 단단히 했다.
“화분 옆에서 불 내지 말랬지.”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오는 화를 꾸역꾸역 누르며 미래가 말했다. 서담이 코웃음을 쳤다.
“거기 낸 적 없는데?”
방금 그건 뭐냐고 화를 버럭 내려는 순간이었다.
순식간에 서늘한 한기가 교실을 감쌌다.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서담의 표정이 단숨에 굳었다. 뒤에 어슷하게 서있던 서담의 단짝도, 종종 벌어지는 다툼에 지쳐 금세 딴짓으로 돌아가버린 다른 아이들도 등골이 쭈뼛 설 만큼 차가운 공기였다.
“상 서담.”
조용해진 교실에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긴 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린 여자아이였다.
“교실에서 불 피우지 말라고 선생님이 아침에도 말했을텐데.”
가만 듣기만 해도 찬 기운이 느껴질 정도로 싸늘한 목소리로 그 애가 말했다. 매서운 눈빛이 정확히 서담에게 꽂혀있다.
“그래서?”
서담의 답과 동시에 교실에 맴돌던 한기가 가라앉았다. 여자아이, 은아와 서담 사이에서 공기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미래는 슬쩍 뒤를 돌아본다. 교실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아이들만 남겨두기는 했지만, 역시 이런 환경에서 얘들을 키워도 되는 건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괜찮아.’
연달아 들려오는 목소리에 안심하면서도 미안함이 앞서 미래는 괜히 울상이 되었다.
미래가 속상하거나 말거나 서담과 은아 사이의 기류는 점차 격해진다. 익숙한 풍경이었지만 미래와 서담의 대립과 달리 관계가 없다고 쉽게 무시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니다. 아이들은 잠시 서로의 눈치를 본다. 누군가 슬쩍 일어선다. 의자가 빠지는 소리, 교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아까부터 계속 뜨겁잖아.”
“차가운데.”
비뚤게 쳐다보는 시선이 뜨겁다. 서담의 시큰둥한 대꾸에 은아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작작해라.”
“싫어.”
서담의 대답은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이어진다. 그에 반해 은아가 말을 고르는 시간은 점점 길어졌다. 짜증을 한껏 억누르고 있는지 일그러진 얼굴이 맹수마냥 사납다. 그리고 곧 들리는 박수 소리.
“얘들아. 그만해.”
그렇게 말하며 웃는 것은 우연이다. 부드러운 인상에 순해보이는 여자아이다.
“우선 서담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자. 그러고 나서 싸워도 늦지 않을거야.”
우연이 자연스럽게 은아와 서담 사이에 끼어들었다. 격하게 흐르던 공기가 가라앉기 시작한다.
“서담아.”
우연이 상냥하게 말했다.
“미래는 왜 부른 거야?”
서담은 조금 어색한 낯으로 미래를 한 번 쳐다본다. 미래는 순간 긴장했다가 시선이 멀어지고 나서야 마음을 놓는다.
“물어볼 게 있어서.”
“그래? 뭔데?”
서담이 머뭇거렸다. 서담은 기이할 정도로 우연에게 약한 편이었다. 미래는 늘 무뢰배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아이가 어떻게 우연 앞에서는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 되는지 모를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뭇가지….”
서담이 웅얼거린다. 우연은 서두르지 않고 기다린다. 서담의 뒤에 서있던 남자아이가 앞으로 성큼 나선다.
“큰 가지를 부러뜨렸거든. 붙여달라고 할거야.”
씩 웃는 얼굴이 큰 장난을 꾸미는 듯 의뭉스럽다. 우연이 놀라 되묻는다.
“어떤 나무? 설마 운동장에 있는 거?”
우연은 말 없이 어깨를 으쓱하는 남자아이, 지아와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입을 꾹 다문 서담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본다.
“세상에.”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리는 목소리. 우연이 황망한 표정으로 두 말썽꾸러기들을 쳐다보았다.
“미쳤어?”
이번에도 뾰족하게 튀어나온 목소리는 미래의 것이다. 기가 막힌 소식에 눈이 휘둥그레진 채였다.
“어떻게 그걸 분질러? 걔가 몇 년생인 줄은 아는 거야? 그 굵은 걸 부러뜨렸다고?”
속사포처럼 말을 뱉어낸다. 두다다 쏟아진 말들은 두서가 없었다. 학교 운동장에 있는 늙은 삼나무는 미래의 오랜 친구였고, 맘씨가 고운 녀석이라 저 말썽꾸러기들의 수많은 장난에도 화 한 번 낸 적이 없었다. 그런 친구의 팔이 부러졌다는 소식에 미래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우연이 달려왔다. 눈물을 글썽이는 친구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한 모습이었다.
“미래야.”
“나는, 어떻게 저 녀석들은, 미안한 기색도 없이….”
한 번 눈물이 나니 멈춰지지가 않았다. 미래는 결국 소리내어 울음을 터뜨렸다.
소란은 결국 선생님이 오고 나서야 멈추었다. 다행히 부러진 나무는 어른들이 먼저 알아서 이미 조치에 들어간 후였고, 미래는 한참이나 삼나무를 붙들고 눈물을 짜냈다. 별 이유도 없이 은아가 와서 사과를 하고, 서담과 지아는 한 마디도 없는 채로 하루가 끝이 났다.
그런 날이 하루, 이틀, 그리고 사흘, 나흘이 계속되는 나날이었다. 제일 나이가 많은 도윤이 중학교에 가고, 다른 아이들도 하나씩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상황은 조금씩 달라졌다. 어쨌든 섬마을 밖으로 나가서부터는 아무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으니까.
섬에서는 미래가 꽃과 풀, 나무와 이야기를 나누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 서담이나 은아가 흥분하면 온도가 급변하는 정도는 일상이었다. 그러나 중학교에서는 그러면 안 됐다. 아무것도 모르는 친구들이 너무 많았다.
미래는 자기가 예쁘다는 사실을 중학교에 올라와서 알았다. 남자아이들은 미래가 조금 이상한 행동을 해도 트집잡지 않았다. 오히려 비슷한 행동을 하며 호감을 사고 싶어했다. 문제는 여자아이들이었다.
미래는 중학교에 올라와서 새로 만난 수많은 친구들 사이에서 어떤 친구들의 말은 듣고 어떤 친구들의 말은 무시해야한다는 사실에 오랫동안 적응하지 못했다. 이건 같은 마을에서 올라온 친구들이 모두 마찬가지여서 그들은 매일같이 싸우던 초등학생 때와 달리 이따금 만나면 서로 하소연을 하는 사이가 되었다. 여전히 상 서담과는 친해질 수 없었지만, 다른 친구들을 많이 사귀고 다른 교실에서 지내면서 어느정도 용서할 수는 있게 되었다.
미래는 여자아이들의 까다로움에 맞춰가는 게 힘들었다. 그 애들은 미래와는 다른 기준으로 사람을 보았고, 거기 맞지 않으면 흉을 보거나 따돌리거나 거리를 두었다. 어느 쪽이든 미래로서는 고립되기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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