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바람이 불었다. 그때도, 이번에도. 조금 이상한 바람이.
하루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머리칼이 뺨을 간지럽혔다. 못 박힌 시선은 잎새를 향해있다. 흔들린다. 머리카락이. 그리고.
“다들 네가 좋대.”
속삭인다.
바람의 목소리였다. 하루의 눈이 흔들렸다.
폭풍이 가까운 밤이었다. 우연은 그리 넓지 않은 탁자 위에 찻상을 준비하고 있었다. 물을 끓이고, 다기를 데우고, 차를 덜고, 우린다. 따른다. 천천히 입에 가져다 댄다. 향을 맡는다. 뜨거운 김을 한숨 식히고 호로록 빨아들인다. 뜨겁다.
“하아.”
긴 숨이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슬픈 눈이 출입문을 향한다. 굳게 닫힌 문짝은 움직일 기미가 없다. 우연은 빈 찻잔을 내려놓고 다시 차를 따랐다. 오늘도 당신은 돌아오지 않는구나.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이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은 무겁고 또 외로운 일이었다. 그 무게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생각일 뿐. 익숙해질만하면 늘어나는 무게에 어깨는 쳐지기만 한다. 우연은 찻잔을 들어 향을 맡고는 그대로 내려놓는다. 유난히 기다림이 버거운 밤이었다.
끝 모를 버거움을 알기에 우연은 은아를 탓하지 않았다. 으르렁거리는 바다의 울부짖음도, 언제 시작될지 모르는 폭풍우도 이 마음에 비하면 잔잔할 터였다. 사랑이 깊으면 깊을수록, 관계가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두려움의 파도는 높고 거셌다.
오늘은 또 얼마나 늦게 들어오려나.
우연은 다시 찻잔을 입에 댔다. 따끈한 물이 입술을 넘어가 목구멍을 데웠다. 속이 서서히 따뜻해진다.
긴 밤이었다. 결국 우연은 끝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눈을 뜨자마자 거실로 나왔다. 널부러진 그가 보였다. 어제도 얼마나 마셨는지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우연은 가볍게 한숨을 쉬고 불을 올렸다. 끓여둔 국에서 보글보글 소리가 나면서 맛있는 냄새가 퍼졌다. 그가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물….”
우연이 미리 준비해둔 물잔을 건네었다. 그가 푸석한 얼굴로 물을 마셨다.
“저녁 먹고 들어올거야.”
“…왜?”
“마을 어른들하고 식사하기로 했어.”
“나는?”
“오고 싶으면 오래.”
그는 잠시 고민하는 얼굴이 되었다가 눈만 몇번 꿈뻑거리고는 식탁에 앉았다. 우연은 그가 힘없는 몸짓으로 수저를 드는 것을 보고 방으로 들어갔다.
나갈 준비를 마치고 다시 거실로 나오자 그는 밥그릇을 비우고 물을 마시고 있었다. 희미하게 돌아온 생기에 우연은 작게 웃고는 집을 나섰다.
“다녀올게요.”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잎새가 하루를 보고 웃었다. 벌써 두 번째 일이었다. 왜 이렇게 매번 심장이 떨리는 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루는 잎새의 가느스름해진 눈과 발그레한 뺨, 둥글게 말린 입술에서 눈을 떼지 못 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그리고.
“어머.”
조그만 목소리가 하루를 깨웠다. 미래가 옆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너 웃기도 하는구나?”
미래가 감탄인지 어이없어하는 건지 분간하기 힘든 어조로 말했다. 곧장 잎새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깜빡. 눈동자가 왼쪽으로 돌아갔다가. 깜빡.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응….”
평소보다 한층 더 속살거리는 대답이었다.
하루는 미래의 놀란 얼굴과 수줍은 듯 내리깐 잎새의 눈꺼풀을 번갈아 보다가 이내 웃어버렸다. 그렇구나. 이 애 잘 웃는 편이 아니구나. 그게 왠지 기뻐서 함께 수줍어졌다.
미래가 한참 잎새의 얼굴을 살피는 사이 발소리가 들렸다. 집을 향해 올라오는 소리였다. 잠시 후 삐록거리는 도어락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미래가 일어나 반기고 하루도 일어나려다 미래의 제지에 주저앉았다.
색소가 연한 머리칼을 어깨까지 길러 단정하게 묶은 여자가 신발을 벗고 들어왔다. 반팔 티셔츠와 청바지를 걸친 편안한 차림에 배낭을 매고 있었다. 손님을 보자마자 가느스름히 휘어지는 눈이 유독 크고 둥글었다.
“안녕하세요?”
낯을 전혀 가리지 않는 듯 목소리는 친근했다.
“잎새 친구분이야. 은하루양.”
미래가 말했다.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여자가 하루를 향해 웃었다.
“저는 우연이에요. 정 우연. 반가워요.”
짐만 놓고 오겠다며 우연이 방으로 들어갔다. 그 사이 미래가 빈 잔을 들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집 주인들이 바지런히 움직이는 사이 하루는 잎새를 관찰했다. 그 애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루는 웃어보였다. 곧 우연이 다가왔다.
“저 애가 친구를 데려올 줄은 몰랐어요. 같은 반…은 아닌 것 같고 어떻게 아는 사이세요?”
우연이 하루의 명찰을 보고 급하게 말을 바꾸었다. 멋쩍은 듯 웃는 낯이 친근했다. 미래가 쥬스 잔을 하나 더 들고 와 앉았다.
“아, 저는….”
대답을 하려고 보니 할 말이 궁색했다. 하루는 머뭇거렸다. 어제 만난 사인데요. 서로 아무것도 몰라요. 평소처럼 편하게 튀어나오려는 말을 꾹 참았다. 그리고 잠시 돌이킨다. 어제 만나서 오늘 여기까지 오게 된 게, 어쩌다 이렇게 된 거더라?
어제, 바람이 윙윙대던 그 때 이후의 일이다.
“나는 잎새야. 잘 부탁해.”
그렇게 말하며 웃는 잎새 앞에서 하루는 멍하니 서있었더랬다. 바람이 그렇게 부는데 선명하게 들리는 목소리도 신기했고 사람이 공중에 뜬 모습도 신기했지만, 가장 신기한 것은 왠지 이 상황이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 자신이었다. 왜일까. 하루는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살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어처구니 없을 만도 한데 왠지 그렇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하루는 잠시 고민하다가 손을 내밀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잎새가 그 손을 잡았다. 바람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떠오른 잎새의 발도 천천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찢어질 듯이 휘날리던 옷자락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윙윙거리는 소리도 줄어들었다. 두 사람은 한참을 눈을 맞춘 채 서있었다.
“어때?”
하루가 물었다.
“뭐가?”
잎새가 되물었다.
“나는 거.”
하루가 대답했다.
“좋아.”
잎새가 배시시 웃었다.
“좋겠다.”
하루가 말했다. 잎새는 웃었다. 그 말이 기분 좋다는 듯이 줄곧.
그대로 손을 잡고 두 사람은 걸었다. 잎새는 인적이 드문 길을 잘 알았다. 이끄는 대로 가니 거의 사람이 없는 길로만 가게 되었다. 그 애는 걷는 도중에 이따금 중얼거렸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저었으며, 허공을 쳐다보았지만, 하루는 거기에 대해 단 한 마디도 묻지 않았다. 그냥 그런가보다 했다. 그런 행동들이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으므로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걸어서 도착한 곳은 하루의 집앞이었다. 잎새가 손을 놓았다. 하루는 다급하게 다시 붙들었다. 어리둥절한 눈빛이 와닿았다.
“다시 볼 수 있는 거지?”
잎새가 갸웃했다.
“도와줄거야?”
무슨 말인지는 이해하지 못 했다. 하지만 끄덕였다. 그 말에 끄덕이지 않으면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응. 도와줄게.”
잎새도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2교시 끝나고 거기에서.
잎새가 속삭였다. 바람의 속삭임이었다.
“팬이에요.”
하루가 말했다. 미래와 우연의 눈이 커다래졌다. 저런 미인의 놀란 얼굴을 하루에 두 번이나 볼 수 있다니 귀한 일이라고 하루는 생각했다. 그렇게 따지면 애초에 미래를 만난 것부터가 엄청난 행운이긴 하겠지만.
“팬이요?”
우연이 물었다. 하루는 어깨를 으쓱했다.
“만난지 하루 됐고, 아무것도 모르고. 하지만 전 잎새가 마음에 들어요.”
그러니까 팬이에요, 라고 아무렇지 않은 듯 둘러댄다. 꽤나 그럴듯한 단어를 골랐다는 생각에 조금은 뿌듯한 마음도 들었다.
당당한 하루의 말에 미래와 우연은 서로를 잠시 쳐다보았다. 이게 무슨 소린지 알아? 아니, 몰라. 그런 대화가 눈빛으로 오갔다. 결국 미래와 우연의 시선이 다시 하루와 잎새를 향했다. 잎새는 지금 오가는 대화를 듣지 못하기라도 했다는 듯 태연했고, 하루도 만만찮게 당당했다.
“무슨 얘기하고 있었어요?”
우연이 물었다. 미래가 입을 때는 것과 동시에 하루가 말했다.
“우리 얘기 했어.”
“도와드리려고 왔어요.”
우연의 커다란 눈이 몇 번 깜빡이더니 이내 잔잔하게 웃음이 번졌다.
“뭐라고요, 하루양?”
“도와드리려고 왔어요.”
그 뒤를 이어 미래가 말했다.
“우리 얘기 했어.”
그래? 하며 우연이 자세를 바로했다. 여전히 웃는 낯이었지만 어딘가 깊어진 눈빛에 하루는 조금 긴장했다.
“어디까지 얘기했는데?”
미래는 고개를 저었다.
“별 얘기 안했어. 좀 보여드린 정도야.”
아. 우연이 짧게 탄성을 뱉더니 다시 상냥하게 미소지었다. 뭐라 말하기 힘든 간극이 있었지만 이 자리에 신경쓰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미래가 조금 어색하게 웃기는 했지만, 적어도 하루는 신경쓰지 않았다.
“잎새 너는?”
우연이 물었다. 잎새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우연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둘 다 나중에 얘기 좀 하자.”
그렇게 말한 우연이 웃음기가 가신 얼굴로 하루를 바라보았다. 하루는 왠지 아까보다 태연해졌다. 왜였을까. 어쩐지 그래도 될 것 같았다. 어제부터 그런 것이 너무 많았다.
“하루양은 믿으세요? 요정이나 도깨비, 유령, 그런 거요.”
우연이 물었다.
“네.”
하루가 대답했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었다.
“산타 할아버지도요?”
우연이 작게 웃었다. 하루도 웃었다.
“네.”
우연이 조금 킥킥거렸다. 하루는 더 웃지 않았다. 그 모습에 우연이 다시 웃음기를 거두었다.
“저는 안 믿어요. 산타 할아버지.”
우연이 말했다.
“왜요?”
하루의 질문이었다.
“한 번도 끈을 본 적이 없거든요.”
“끈?”
하루가 되물으며 흘긋 곁눈질을 했다. 미래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있었다. 여전히 잎새는 태연한 낯이었지만, 하루까지 태연하게 있기에는 분위기가 무서웠다.
우연은 살짝 시선을 내리깔고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더니 허공을 건드렸다. 우연의 손이 닿는 곳이 순간적으로 희게 빛나며 어떤 실 같은 것이 보이다가 사라졌다.
“이게 끈이에요. 나와 당신을 잇는 끈.”
우연이 말했다. 조금 슬픈 듯한 표정이었다.
“이상할 정도로 굵고 튼튼하네요. 그리고 밝아요. 이유 없이 당신에게 호감을 느끼게 될 정도로.”
조금 낮아진 목소리에 하루는 입을 다물었다.
“당신에게로 이어진 끈이 많아요. 모두 굵고 탄탄하네요. 단순히 깊은 인연이라기엔 이상해요. 너무 많아요.”
우연의 손이 조금 더 허공을 맴돌았다. 스치는 자리에 이따금 아까처럼 빛이 보이며 실 같은 것이 스쳐갔다. 하루의 시선이 우연의 손을 따라 흘렀다.
“하루양은 어깨가 무겁겠어요.”
그렇게 속살거리듯 우연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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