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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4.02.14 [ 정령의 아이 ] 8화 - 정령의 아이: 두 번째 이야기

섬에 사는 주민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대한민국 땅에 있는 대부분의 시골이 그렇듯이 정령의 아이만 아니었다면 이곳도 젊은 피라고는 볼 수 없는 노인들의 땅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섬에 남은 노인들은 정령의 아이를 귀여워하면서 동시에 미워했다.
굉장한 이유는 없었다. 섬에 남아있다는 것은 그들에 대한 사랑을 잊지 못 했다는 의미였을 뿐이다. 사랑하는 이에게 더 많이 사랑받는 이를 부러워하다 못해 질투에 빠지고 마는 건 흔한 일이었다.
섬에 남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다. 나이도 성별도 상관없었다. 선망하고 부러워하며 동시에 미워했다. 정령의 아이는 정령의 아이대로 문제였다. 가족보다 그들을, 사람보다 자연을 더 가깝게 여기다보니 인간 사회에 어울리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섬 사람들은 정령의 아이를 한 데 모아 기르기로 했다.
그렇게 아이들은, 그러니까 미래와 우연, 잎새와 은아, 서담과 다른 남자아이 셋은 거의 공동체처럼 자라게 되었다. 가족보다도 더 가족 같은 사이였다.

은아는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입을 다물었다. 표정이 오묘했다. 기분이 나쁜 듯도 했지만 아까까지의 거친 모습과는 달랐다. 하루가 어리둥절한 기색을 보이니 옆에서 미래가 웃었다.
“신경쓰지 마세요. 제가 마저 이야기할게요.”
미래는 상냥하게 웃으며 제 잔에 차를 따랐다. 아까부터 끓인 물을 붓고 잎이 우러나는 과정을 지켜보는 얼굴이 제법 밝았다.

아이들의 가족, 그러니까 혈육 중에서 섬에 사는 이는 많지 않았다. 여덟 명의 아이들 중에 가족과 함께 사는 아이는 하나 뿐이었다. 보통은 주말이나 달에 한 번씩 찾아왔지만, 거의 들르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아이들은 마을 어른들과 아이들보다 두어 세대 앞서 태어난 정령의 아이, 그러니까 이미 성인이 된 정령의 아이에게 돌봄 받았다. 나이를 먹을수록 그들과의 사이도 멀어지기 마련이라 비록 부릴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지만, 아이들을 이해해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어른들이었다.
섬의 모든 것은 아이들을 위해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이의 존재 자체가 재해와 같았기에 사람들은 전력을 다해 아이들의 안정을 꾀했다. 작은 변덕만 부려도 풍파가 이니 어찌 재해라 하지 않을까.
정령의 아이 주변에는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아이들은 어리고, 그들은 아이들의 모든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물의 아이가 울면 비가 내리고, 바람의 아이가 화를 내면 강풍이 몰아쳤다. 인연의 아이가 장난삼아 묶은 매듭에 천년의 원수가 합방을 하고, 초목의 아이가 기뻐하면 꽃이 피었다.
그토록 특별한 삶이었다. 어딘가 고장나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곁에서 아무리 붙들고 말해보아도 바로 귓가에서 속삭이는 그들의 목소리를 이길 수는 없었다. 화를 내도 소용 없었다.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한 아이들이 불안을 느낄 이유가 없었다. 품어보려 해도 무리였다. 그들보다 아이들을 사랑으로 감쌀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사소한 변화에도 일일히 반응해주고 귀 기울여주는 대상이 있는 상황에서 어린이는 무적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가족과 헤어져도 크게 상처받지 않았다. 의젓하게, 어쩌면 시큰둥하게 배웅할 뿐이다. 아이들의 진짜 부모는 그들이었으니까.
물론 아이들이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처를 안 받는 것은 아니다. 가족과 사이가 좋다고 해서 친구와 싸우지 않는 것은 아니듯, 아이들은 지난하기만 한 인간관계에 힘겨워했다. 그들과의 편안한 소통이 있기에 더욱 힘들었다.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전달되는 것들이 사람에게는 무슨 수를 써도 전달되지 않았다.

찻잔에서 뜨거운 김이 아른아른 올랐다. 미래는 차가 식는 것을 기다리며 찻잔을 손으로 건드려보고 있었다. 얇은 도자기 잔에서 전달되는 열기가 다소 침착해지기를 기다리며 입을 뗀다.
“처음엔 저도 많이 힘들었어요. 특히 처음 중학교에 갔을 때는 심했죠.”
중학생 때 처음으로 섬 밖에 나가게 되거든요. 미래가 말했다.
“가족들이 데리고 나가는 게 아니고서는 그래요. 그것도 보통은 말리죠. 사고가 나면 수습할 수가 없으니까. 보셨다시피 저희들은 서울까지 와서도 제법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서요.”
미래가 때마침 방에서 나오는 잎새를 흘긋 쳐다보았다.
“나영도가 어디 있는데요?”
하루도 잎새를 보았다. 딱히 차림이 바뀐 것도 아니고 빈 손으로 들어갔다 빈 손으로 나왔다. 뭘 하고 나온 걸까?
“한참 남쪽.”
은아가 대답했다.
“나중에 검색해보세요.”
차가운 어조였다. 미래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아졌던 기분이 단번에 나빠졌다. 잎새가 빈 자리의 의자를 빼 앉았다.
“그래서 마을 이야기는 뭔가요?”
하루가 물었다.
“그건….”
“내가 얘기할게.”
은아가 미래의 말을 막았다.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에요.”
은아의 말이었다.

그래.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섬 사람들이 할 수 없었을 뿐이다. 순수한 호감으로 도와줄 이를 찾지 못해서 그저 방치해두었을 뿐인, 그런 일. 당장 위험하진 않으니까 괜찮다면서 미뤄온 일이었다.
언젠가부터였다. 그들, 그러니까 정령들이 바다를 건너지 못하게 되었다. 마을은 점차 그들이 뿜어내는 힘에 어지러워졌다. 모든 자연물에 생기가 돌았고, 그만큼 모든 게 거칠어졌다. 그리고 그만큼 바다가 메말랐다.
마을 사람들은 원인을 찾아 헤맸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터지는 사소한 해프닝들은 참아 넘길 수 있었지만 바다가 마르는 건 큰 문제였다. 섬마을에서 바다에 의존하지 않고 사는 건 불가능했다. 몇몇은 섬 생활을 포기하고 육지로 올라갔다. 결국 정말로 섬을 떠날 수 없을만큼 늙은 노인들과 정령의 아이 일부를 제외하고는 주민이 없을 정도로 사람이 줄었다.
끝내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시도해볼 수 있는 방법은 있었다.
세상에는 정령이 살기 힘든 땅이 있다. 정령마다 좋아하는 장소는 다르지만 모든 정령이 꺼리는 곳이 이따금 있었다. 아주 특별한 장소도 아니었다. 얼핏 보기엔 평범한 땅이었다. 그러나 낮에는 해가 들지 않고 밤에는 희미하게 밝으며 바람도 불지 않고 땅은 부서질 듯 건조한, 그런 곳이 있다. 인간의 관심도 거의 끌지 않기 때문에 아주 관찰력이 좋지 않으면 이상하다는 사실조차 알아채기 힘든 그런 장소였다.

“그 땅에 들어가주세요.”
은아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작아졌다.
“그게 저희의 부탁입니다.”
살며시 내리깐 눈. 무언가를 참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루는 고개를 갸웃했다.
“들어가서 뭘 해야하는데요?”
“돌을 가져와주세요.”
 미래가 말했다.
“돌이요?”
하루가 물었다. 미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하겠지만 평범한 돌은 아니에요. 그건….”
미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정령을 쫓아내는 돌이에요.”
아하. 하루가 작게 감탄사를 냈다.
“맞아요. 그 땅, 저희가 사막이라고 부르는 그런 땅은 바로 그 돌 때문에 만들어져요. 그리고 저희는 거기 들어갈 수 없죠.”
왜요, 라고 물으려던 하루가 말을 삼킨다. 왠지 알 것도 같았다. 이 사람들이 사실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면, 평범한 땅을 평범하게 대할 수 없다면. 그렇다면….
“어려워요. 그들이 질색팔색을 하고 말리기도 하거니와 저희에게는 거부감이 너무 심해요.”
마을 사람들은 다들 그렇죠, 라고 미래가 덧붙였다.
“그래서 부탁하는 거예요. 그들을 보지도 듣지도 못해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일 거예요. 외부인에겐 그렇게 힘든 일은 아니거든요. 그저 인지하기 힘들 뿐이에요.”
미래가 매달리듯, 사정하듯 말했다. 하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어려운 일은 아니네요.”
그리고는 말했다.
“그럼 당장 출발하죠.”
네? 이번에는 은아도 당황한 표정이었다. 순진한 사람들 같으니. 하루는 웃는다.
이런 사정 설명 없이 게임처럼 내기를 건다거나 그냥 부탁해도 돌덩이 하나 정도는 가져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걸 이렇게 사정사정하며 설명하고 있는 게 괜히 우스웠다.
“가자니까요. 어서 출발해요. 바로 끝내버리죠.”
은아와 미래, 잎새가 모두 당황해서 하루를 보고 있는 사이 하루는 문 앞에 섰다. 그 순간 삐삐거리는 소리가 문에서 울렸다. 곧 문이 열렸다.
“여기서 뭐해요?”
우연이었다. 집에 있던 정령의 아이들은 잠시 서로를 마주보았다. 은아가 앞장을 섰다. 우연은 짐을 두고 그대로 일행에 합류했다.

적극적으로 앞서 나오기는 했지만, 어디로 가야할지를 몰랐다. 하루는 건물을 빠져나와 잠시 멍청하니 서있었다. 뒤따라 나온 이들이 이쪽이라며 가리키는 방향으로 따라가자 동그란 차가 하나 있었다. 연한 푸른색을 띄는 차는 다소 좁아보였지만, 다섯이 탈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운전석에 은아가 탔다.
“타세요.”
미래가 등을 떠밀었다. 하루는 잠시 고민했다.
“여기 다같이 타는 거예요?”
미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저는 안 가요. 다녀오세요.”
하루가 잠시 말을 잃은 사이 세 사람이 착석했다. 조수석에서 고개를 빠꼼 내민 잎새가 속삭이듯 말했다.
“하루, 타.”
하루는 미래를 한 번 쳐다보고 잎새를 한 번 쳐다보았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하루가 타자 차가 출발했다. 우연이 미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차가 출발하자마자 우연이 물었다.
“이야기는 다 들은 건가요?”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뜬 얼굴이 어쩐지 기대에 차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하면서 하루가 대답했다.
“아마도요? 저는 모르죠.”
“저희 부탁을 수락하신 건가요?”
“네.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요.”
하루가 편하게 대답했다. 우연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럼 지금 어디 가는 지도 알겠네요?”
“돌 찾으러 가는 거 아니에요?”
맞아요! 잔뜩 격양된 목소리로 우연이 말했다. 뺨이 발그레하게 붉어진 것이 어지간히 신난 게 아닌 것 같았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결정한 거예요? 저희 이야기 정말로 다 믿는 거죠?”
어…. 하루가 눈을 깜빡였다.
글쎄. 믿나? 그렇게 물으니 어려웠다. 믿는다 안 믿는다의 문제가 아니었다. 하루는 그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인지 아닌지를 생각했을 뿐이다. 별로 어렵지 않았고, 할 수 있는 일이었고, 여기 어울리면 재밌을 것 같았다. 그게 다였다.
“아마도…요.”
눈을 끔뻑이며 대답하자 우연이 손을 모아쥐며 활짝 웃었다. 그렇게 좋은 일인가 싶었다. 하지만 뭐, 좋아하면 좋지.
“하루양이라면 승낙해줄 줄 알았어요. 고마워요.”
“아뇨. 별 것도 아닌데요….”
이렇게까지 기뻐하니 뭔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신종 사이비 종교에 걸린 게 아닐까? 처음 잎새를 따라갈 때 들었던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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