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카 타입 드림 커미션입니다
아케미 소이치로는 제집 거실에 앉아 비 오는 날 유리창처럼 주룩주룩 눈물을 떨어뜨리고 있는 소년을 난감하게 쳐다보았다. 이러려고 건넨 말이 아니었음은 물론이오, 그가 이토록 무방비하게 눈물을 보일 이라고는 생각지 못한 탓이었다. 소리도 없이 설피 우는 그를 마땅히 달랠 말이 없기도 하였다. 얼핏 보기엔 어른 같지만, 아직 세상과 맞서기에는 너무 어린 소년이 대체 무슨 사정으로 이 자리에 앉아 무심한 말에 울음을 터뜨리게 되었는지 아는 바가 없었다. 소이치로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옷을 적시지 않도록 손수건으로 그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뿐이었다.
소년, 미쿠니 오리코는 소이치로와 소이치로의 사랑하는 조카, 아케미 호무라의 단란한 가정에 갑자기 끼어 들어온 불청객이었다. 그는 두 사람 모두에게 달갑지 않은 존재였지만, 부모를 잃고 홀로 남은 소년을 기어이 길거리로 내쫓을 만큼 얄미운 상대도 아니었다.
느닷없이 나타난 군식구치고는 꽤나 성실한 일꾼이라는 점도 아케미 부녀―소이치로와 호무라는 비록 친 부녀관계는 아니지만, 서로를 진짜 부모와 자식처럼 언급하곤 했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 챙겨줘야 하는 것이 많은 호무라를 살뜰하게 챙기고 집안일을 돌볼 틈이 없는 소이치로를 대신해 잡일을 도맡아 하니 이전보다 생활이 훨씬 편했다. 벌이가 넉넉하지는 않지만 한 사람 더 먹여 살릴 만큼은 되고, 소이치로가 바빠 잘 챙겨주지 못하는 호무라의 생활까지 챙겨주니 소이치로로서는 입이 늘었다고 불평할 상황은 아니었다.
문제는 호무라였다. 호무라는 처음부터 오리코를 탐탁지 않아 했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오리코가 일을 잘한다고 하나 소이치로는 가사도우미를 고용한 게 아니었다. 오리코는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게 분명했지만, 호무라는 그가 보이는 족족 훼방을 놓지 못해 안달이었다. 오리코가 치우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어지르고, 오리코가 한 반찬과 소이치로가 한 음식이 함께 올라오면 노골적으로 오리코가 만든 접시를 밀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어른으로서 두 아이의 사이를 중재하는 것이 바른 행동이겠지만, 몸도 약하고 예민한 호무라에게 뭔가를 참으라고 하는 것은 잔인한 일이다.
소이치로는 호무라가 얼마나 많은 것을 참아왔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친엄마인 누이 마리보다도 소이치로가 호무라의 병세를 잘 알았다. 그걸 위해 의사가 된 것이기도 했다. 저 작은 아이가 지금의 절반도 안 되는 몸집이었을 때부터 병원의 거대한 기계와 끔찍한 치료를 어떻게 견디는지 보아왔다. 그런 호무라에게 참으라고 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소이치로는 마음속에 조용히 엑스 표시를 했다.
그런 이유로 소이치로는 지금까지 오리코를 향한 호무라의 심술을 한 번도 말려본 적이 없었다. 놀라운 것은 호무라와 나이 차도 얼마 나지 않는 오리코가 그런 상황을 그저 묵묵히 견뎌내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호무라를 나무라지도, 소이치로에게 도움을 청하지도 않고 말없이 그런 상황을 견뎌내고 있었다. 소이치로에게는 답답하고 화가 나는 광경이기도 했다.
소이치로는 부당한 현실은 자기 손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것은 죽은 누이가 일생을 지켜온 좌우명이기도 했다. 소이치로의 누이는 자신과 수많은 약자를 위해, 곧장 이룰 수는 없지만 멈추지 않고 싸울 것을 맹세한 사람이었다. 소이치로가 아직 사리분별도 하지 못하던 어린 시절부터 누이는 그를 붙잡고 몇 번이고 다짐하듯 이야기하곤 했다. 그것이 누이 자신을 향한 연설이었는지, 소이치로를 위한 연설이었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소이치로는 그런 누이의 사상에 감복해버렸고, 누이가 죽은 지금은 자신의 생각이라고 해도 좋았다. 누이는 몰랐겠지만, 누이가 세상을 바꾸는 동안 쓰러지지 않도록 최고의 매니저가 되자는 생각으로 불태운 젊은 시절이었다.
아마 누이에게도 그랬을 테지만, 소이치로가 보기에 오리코는 패기가 없었다. 부모가 저지른 죄에 발목을 잡혀 가정이 망가진 것도, 이런 낯선 곳에서 홀대받는 것도 모두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렇지 않다면 호무라가 저리도 자신을 박대하는데 화 한 번 내지 않고 버틸 리 없었다. 어리석은 일이었다. 소이치로는 어쩐지 냉소적이 되어있는 자신을 자각했다.
그랬기에 오늘 거실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오리코를 발견하고 올 것이 왔노라 생각해버린 것이다. 소이치로는 그가 드디어 화를 내리라고 짐작했다. 그래서 퇴근 후 피곤한 몸이었지만, 일부러 그의 앞에 앉아서 티비조차 틀지 않았다. 그러나 마침내 오리코가 입을 열었을 때, 그가 꺼낸 말은 전혀 예상외의 것이었다.
“소이치로씨.”
오리코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요즘 아이들 같지 않은 곧은 자세로 소파에 똑바로 앉아있는 모습이 다소 어색했다.
“사랑해본 적 있으세요?”
소이치로는 당황해 잠시 말을 잃었다.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선명하게 소중한 얼굴이 떠올라 머릿속에서 흩어버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건 왜 물어보니?”
“그냥요. 궁금해서요.”
오리코는 자조적인 미소를 머금고 눈을 살며시 내리깔았다. 앳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어른스러움이었다. 그 표정이 소이치로의 마음 한구석을 들쑤셨다. 저 어린아이가 저렇게 그늘진 미소를 짓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을까 생각하면 한없이 가여웠다. 제 운명은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라지만 이토록 가슴 아픈 모습을 보면 하늘도 조금쯤은 도와주리라.
“무슨 일이 있었니?”
소이치로가 다정하게 물었다. 오리코는 눈을 똑바로 뜨고 소이치로를 보더니 이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가끔 괜한 생각이 들 때가 있잖아요. 세상 사람들이 모두 사라져 이 넓은 지구에 홀로 남은 것처럼 가슴이 허전하고, 아무것도 아닌 일에 가슴이 찌르르 아픈 날이요. 그런 날이라서 그래요.”
차분한 어조로 마치 시라도 외듯 읊조리는 오리코의 시선이 먼 창밖으로 향해 있었다.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아득한 눈이었다. 소이치로는 문득 그 방향으로 쭉 가면 친구가 사는 집이 나온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시답잖은 생각이었다.
“오리코양.”
“네.”
소이치로는 오리코의 잔잔한 얼굴을 살폈다. 그는 정말로 여상한 날을 보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얇고 투명한 가면인지 이 아이는 알고 있을까.
“무리하지 않아도 괜찮아.”
“네?”
“억지로 힘내려고 하지 않아도 돼. 오리코양도 아직은 중학생이야. 애는 애답게 가끔은 울어도 괜찮아. 그러려고 어른들이 있는 거니까.”
초조와 불안은 온몸으로 존재를 드러내는 법이다. 오리코는 성인들도 어려워하는 수준으로 자신을 제어하는 놀라운 재주가 있었지만, 자신을 억누르는 것에도 한계는 있었다. 가장 먼저 고장 난 것은 자율신경인 눈물샘이었다.
“어라.”
오리코는 한 손을 들어 뺨을 매만졌다. 눈꼬리에서 흘러내린 물기가 턱을 타고 굴러떨어졌다. 곧은 허리와 허벅지 위에 움켜쥔 손은 미동도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눈꺼풀이 움직일 때마다 눈물 줄기는 굵어져 사방으로 새 길을 냈다.
뻐끔거리는 입술이 몇 번이고 괜찮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생기 넘치는 몸 안에서 죽은 듯이 자고 있던 격정이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오리코는 남은 한 손도 들어 눈물을 훔쳤다. 이미 터진 둑은 양손으로 막을 수 없었다.
오리코가 주체할 수 없는 강을 흘려보내기 시작하자 소이치로는 난감해졌지만, 제 앞에서 우는 아이를 모른 척하지는 않았다. 호무라와 달리 벌써 여자 티가 나는 몸에 손을 대는 것이 저어돼 겨우 티슈를 챙겨준 것이 다였지만, 서럽게 우는 오리코를 두고 달아나진 못했다.
한쪽 구석에서 호무라가 숨어 지켜보다가 소이치로와 눈이 마주치자 잽싸게 달아났다. 소이치로는 오리코와 이야기하려고 호무라에게 굿나잇 키스를 해주지 못했단 걸 깨달았다. 어쩐지 호무라는 불퉁한 표정이었다. 소이치로는 호무라가 잠든 뒤에라도 꼭 굿나잇 키스를 해줘야겠다고 다짐했다.
몇 번이나 말을 하려다가 울음 섞인 신음만을 뱉은 오리코는 더이상 얼굴을 들고 있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소리를 내지 않으려 숨을 죽이고 입을 막은 것이 그간 보아왔던 오리코다웠다. 소이치로는 어깨너머 시계를 확인했다. 바늘은 저녁 열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직 늦지는 않았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오리코와 자리를 함께했다. 오리코는 자정이 다 되어서야 눈물을 그쳤다. 길고 긴 눈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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