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이상하다면 캐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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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되었을까.
송태원은 침잠한 눈을 무의미하게 들었다. 아롱거리는 빛무리가 시선을 현혹하려 들었다. 그것을 어렵지 않게 무시하며 똑바로 눈앞의 남자를 바라본다. 연한 갈색 눈이 장난스레 휘어졌다.
“언제까지 그렇게 딱딱하게 있을거야. 좀 쉬라니까.”
“지금이 편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남자가 코웃음을 쳤다.
그의 시선은 한 손에 든 와인잔을 향해 있다. 은은하게 밝혀둔 조명 탓에 검게도 붉게도 보이는 와인을 가는 눈으로 바라보며 기분 좋게 웃는다. 어지간히도 기분이 좋은가보다. 하기사 그렇겠지. 그야 늘 그랬으니까.
송태원은 그저 위험분자를 지켜보아야한다는 의무감으로 그를 주시했다. 눈빛은 무심하다. 흔들리지 않는 것은 기술이다. 폭풍우 속 흔들리는 갑판 위에서 똑바로 서는 것과 같다. 세상은 어지러히 출렁여 멀미가 나는 정도라면 훌륭한 선원이 될 수 있었다.
다행히. 다행히도.
송태원은 타고난 선원이었다. 그는 갑판에서 떨어져나가는 승객을 붙들어 아래층으로 내려보낼 수 있었다.
저도 모르게 손을 말아쥐었나보다. 눈치채는 것과 동시에 금빛 사슬이 목을 노리고 있었다. 시선조차 주지 않는다.
“흥을 돋구는 것도 좋겠지.”
그렇게 말하며 남자가, 성현제는 와인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취하지도 않을 술을 마시며 멋을 부리는 낭비를 즐기는 자였다.
“잠시 딴생각을 했을 뿐입니다.”
“그래?”
재미없다는 듯 그가 실망한 낯을 했다. 한없이 가볍다. 경거망동한다. 그것이 싫었다. 싫지 않았다.
송태원은 눈을 짧게 감았다 떴다. 사슬이 존재감을 감추었다. 무척이나 무료하고 나른한 표정을 한 남자가 고급스러운 호텔에 반쯤 벗은 차림으로 앉아있을 뿐이었다. 이런 장소에 서있는 것도 이제는 익숙했다.
“꼭 조각상이랑 같이 있는 것 같군 그래.”
성현제가 한탄하듯 말했다.
“제가 돌아가겠습니다.”
“그건 안 되지.”
느물거리는 말꼬리가 길게 늘어졌다. 반쯤 떨어졌던 엉덩이가 도로 붙었다. 그가 저리 반응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송태원은 그렇게 했다.
“보고만 있어도 갑갑한 정장은 정말 어떻게 안 되나?”
“제가 나가면 보지 않아도 되실 겁니다.”
“내가 사준다니까.”
“법에 저촉됩니다.”
“까짓거 금액 맞춰주지.”
이번엔 참지 못 했다. 저도 모르게 기분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성현제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조금 길게 눈을 감았다 뜬다. 다시 평온을 찾는다.
“맞출 수 있어. 못할 것 같나? 최소한 색이라도 바꿔보지. 당장 장례식에서 상주를 설 법한 옷만 입지 말자고.”
“더이상 상주 설 일은 없으니 상관없습니다.”
“매일 서고 있는 게 아니고?”
몹쓸 농담이다.
송태원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말 없는 비난에 성현제가 어깨를 으쓱한다.
“사람의 목숨을 가볍게 말하지 마십시오.”
“그걸 자네가 책임질 필요는 없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설득할 필요도 없고 설득할 이유도 없었다. 설득한다고 들어줄 상대도 아니었다.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그 때는 아직, 그래도 조금은, 적어도 지금보다는 그가 연약하고 파괴적이지 않던 시절이었다. 속이 답답해졌다.
그리고 멍청한, 아니, 철없는, 아니, 상냥한 남자는 그런 송태원의 기색을 세심하게 알아차린다. 가만히 닿아있는 시선이 마치 쓰다듬는 듯하다. 송태원은 닿지 않은 온기를 외면하듯 눈길을 돌렸다. 시야에서 남자가 사라지기 전에 그가 일어나 다가온다. 반쯤 외면한 고개를 부드러운 손길로 감싸 돌린다. 손은 그리 따듯하지 않지만,
…….
“송태원.”
“왜 그러십니까.”
아주 조금의 틈새도 들켜선 안 된다. 하지만 틈새가 있다면 어디든 들어오고 마는 것이다. 어두운 새벽의 달빛. 어스름하지만 섬세한. 철저하게도 가냘픈.
갈색 눈동자가 반쯤 가려진다. 그 눈이 살풋 휘었다.
“스읍, 하. 스읍, 하.”
“……뭐하시는 겁니까.”
“어허, 따라해야지. 스읍, 하아. 스읍 하아.”
“떨어지십시오.”
하하. 꾸며낸 기색을 숨기지 않는 웃음소리와 함께 그가 견딜 수 없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며 활짝 웃었다. 뺨을 감싼 손에 약간 힘이 들어간다.
태원아.
귀엽기도 하지. 그런 속삭임이 귓가를 스친다. 못 들은 걸로 쳤다.
“놓지 않으시면 가만히 있지는 않겠습니다.”
“그래?”
그럼 뭘하게? 성현제가 히죽거렸다. 나랑 싸울건가? 도심 한복판에서? 빌딩 24층인데?
안 될 것도 없지. 속으로 생각하며 그저 뒤로 한발짝 물러섰다. 정확하게 동시에 성현제가 한발짝 다가온다. 송태원의 미간이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적당히 하십시오.”
“싫은데?”
그가 이죽거렸다. 불쾌한 건지 즐기는 건지 분간하기 힘들다. 둘 다겠거니 하며 조금 빠르게 이번엔 세발짝 물러선다. 역시나 같은 속도로 성현제가 따라붙는다. 뺨에 늘어붙은 손바닥도 그대로였다. 슬슬 맞닿은 피부에서 온기가 전해져온다.
“저도 화낼 줄 압니다.”
“그래서?”
이번에야말로 가소롭다는 듯 성현제가 비웃었다. 송태원은 답하지 않는다. 그래서? 답할 말은 없었다. 직접 채운 자신의 족쇄. 사랑하는, 나의 무게추.
그저 조금 더 가라앉을 뿐이다.
말이 없어진 송태원을 보고 성현제가 보란 듯이 한숨을 쉬었다. 드디어 손이 떨어진다. 미지근한 온기가 뺨에 남았다. 치가 떨리는, 따스한, 손.
규칙적으로 숨을 쉰다. 성현제가 다시 지루해 죽겠다는 표정이 되어 휙 돌아선다. 그대로 두어발짝 걷는가 싶더니 번개같이 덮쳐온다. 옷깃이 잡아당겨지고, 몸뚱아리가 맞부딪히고, 뜨거운 체온이 전해진다. 굵은 손마디가 남자의 목을 쥐었다. 박동하는 생명이었다. 명줄을 붙잡힌 남자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놔.”
“…….”
숨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아주 찰나였다. 지독하게 길었다. 천천히 손을 내려놓았다. 손바닥이 화끈거린다. 그가 으르렁거리더니 갑자기 얼굴이 가까워졌다. 무심코 피하는 것을 그가 따라왔다.

하아.

뜨거운 숨이.
얼굴을.
어디를?
깜빡.

세상이 가볍게 멈추었다.

*
입을 맞댄 채로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몰랐다. 체감상으로는 영원이 흐른 것만 같았다. 송태원은 그대로 입술을 벌리려다, 그러니까 말을 하려다, 입 속으로 파고든 것에, 그러니까, 뜨거운 열기에, 아.
사고가 얼어붙었다.
그것은 유린의 경험이었다. 갑작스러운 재해에 당황한 사이 해집어놓는다. 그것은 축축하고, 뜨거웠고, 그리고,
싫다.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이곳이 어딘지, 상대가 누군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것도 기억해내지 못한 채로 그를 밀어냈다. 전력이었다.
남자의 손이 미련처럼 송태원을 붙들고 있다가 떨어지고, 몸이 하늘을 날고, 창문이 엄청난 소리를 내며 비산했다. 황금빛 사선이 차르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뻗었다. 콰드득거리는 소리. 남자의 몸이 다시 튕기듯 돌아왔다. 생각이란 걸 할 겨를도 없이 몸을 피했다. 무너진다. 비명소리. 그제서야 제가 저지른 것을 깨닫고 만다.
파하하하.
그가 웃고 있었다. 기뻐 죽겠다는 듯이. 환희에 찬 얼굴이 빛난다. 송태원의 얼굴이 시커멓게 물들었다. 거침없는 공격을 피하는 것은 평범한 사람의 것과는 완전히 달라진, 괴물의 반사신경.
붕괴는 이제 시작이었다.
송태원의 무딘 뇌가 고민을 거듭하는 사이에도 주먹이 쏟아졌다. 주먹과 사슬만이 오가는 것으로 보아 남자도 진심은 아니었으나….
늦었다.
송태원은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그 자리에 엎드렸다. 남자의 주먹도 사슬도 피하지 않았다. 더는 호텔이라고 부를 수 없는 돌더미 위에 납작 엎드렸다. 쇄도하던 강맹함이 그에게 닿기 직전에 멈추었다. 미풍 같은 것이 그의 곰 같은 거죽에 닿았다. 송태원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 했다.
“죄송합니다.”
“……이런 결말이군.”
그 목소리는 마치 실망한 것처럼 들렸다. 그런 거였을까? 송태원은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사람들을 구해주십시오.”
“나는 성자가 아니야.”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
“영웅도 아니고.”
“괴물이 되지 말아주십시오.”
“사람보다는 괴물에 가깝지 않나?”
“부탁입니다.”
“…….”
달각거리며 돌이 굴러 떨어진다. 남자의 발에 채인 것일 터였다. 그가 다가와 송태원의 머리맡에 섰다. 그걸 느낄 수 있었다.
바로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나.”
툭. 머리 위로 손이 얹어졌다. 힘없는, 어쩌면 다정한 손이었다.
“일어나주지 않겠나?”
슬픈 것도 같다. 비참하도록 외로운 괴물의 음성. 그것이 너무 쓸쓸해서 송태원은 그에게 조금 미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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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그 쿠키 말이지.”
문득 집중이 깨질 때가 있다. 그때가 그런 때였다. 갑자기 귀에 들려온 마들렌맛 쿠키의 목소리에 에스프레소맛 쿠키의 얼굴이 구겨졌다.
“사인 좀 해줬다고 어찌나 매달리던지. 지저분한 손으로 옷을 붙들고 늘어지는 바람에 크게 고생했었어.”
가벼운 한숨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왜 하필 이 길을 택했을까.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짜증을 눈썹에 담아 꾹꾹 눌렀다. 기분 나쁘게도 뺀질거리는 얼굴이 눈 앞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 작은 왕국에 발이 묶인 뒤로 저 망할 쿠키를 너무 자주 본 탓이 틀림없었다. 공화국과 달리 이곳은 인구가 너무 적었다.
물론 마을도 좁았다. 이렇게 지나가다 마주치면 피해갈 길이 별로 없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의 빠른 걸음을 따라 마들렌맛 쿠키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렇게 기분 나쁘진 않았어.”
바로 앞에 있는 골목에서 유쾌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목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지금이라도 발을 돌려 다른 길을 거칠까 고민스러웠다. 하지만 이 길을 포기하면 내 슈가코팅 도넛은? 에스프레소맛 쿠키의 입이 빼족해졌다. 마들렌맛 쿠키가 기분 좋게 껄껄 웃는 소리가 점차 잦아지고 있었다. 누군가 마들렌맛 쿠키에게 물었다. 아니, 그렇게 집요하게 구는데 괜찮았다고?
정확히 그 순간이었다. 건물 사이로 달콤한 설탕크림과 푸른 망토가 나타났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혹여 눈이라도 마주칠라 고개를 틀었다.
“그야 물론이지.”
마들렌맛 쿠키가 말했다.
“가난하고 지저분한 쿠키가 나같이 고귀하고 아름다운 쿠키를 동경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않나.”
무심코 시선이 돌아간 것은 결단코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그 순간 자신의 얼굴이 어땠는지 확신할 수 있었다. 가소로운 것을 보는 듯한, 어리석은 멍청이를 향한 경멸. 실제로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어이가 없어서 무심코 발걸음을 멈추고 만 터였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지금까지 충분히 참아왔다고 생각했다. 공화국에서는 그가 워낙에 영향력이 크니 무시할래도 무시할 수가 없었고, 이 작은 왕국에서도 실은 내색을 했을지언정 협력을 완전히 거부한 적은 없었다. 효율의 문제이기도 했지만, 이 왕국 쿠키들에게 마들렌맛 쿠키와 함께하는 것의 무용함을 설명할 시간과 기력이 아까운 탓이 컸다. 함께 행동할 일 자체가 많지 않아 일일히 따지고 들 필요도 크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은 어쩔 수 없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마들렌맛 쿠키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았다. 웃음기가 사라지고 순식간에 불쾌한 기색이 어렸다.
“할 말이라도 있나?”
툭 던지듯 내뱉는 어조는 평소 마들렌맛 쿠키의 말버릇이 아니다. 심기가 불편한 것을 드러내듯 짜증섞인 음색에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고개를 휙 돌려 시선을 피했다가 비뚠 미소를 머금고 다시 그와 눈을 마주했다.
“그럴 리가요.”
가볍게 던지듯 말하고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사뿐사뿐한 걸음으로 다시 발을 옮겼다. 때로는 백 마디의 말보다 별 것 아닌 행동 하나가 강렬한 법이다. 마들렌맛 쿠키의 얼굴이 팍 구겨졌다.
“겁이라도 먹었나? 비겁하군.”
예전 같았으면 지나쳤을 말이 왜 가슴에 꽂혔는지 몰랐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그 자리에 멈췄고, 건물에 가려 더는 보이지 않는 마들렌맛 쿠키를 노려보았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슈가코팅 도넛을 샀다. 집을 떠나 여행을 하는 동안 식이 조절을 못해서 두꺼워진 몸이 신경쓰이던 터라 최근 식단을 조절하고 있는 중이었지만 이번엔 참을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니 이것도 전부 머리에 잼도 안 들었을 게 분명한 멍청이 쿠키 때문이다. 스트레스성 군살이잖아, 이게 다!
커피를 입에 머금자 진한 향기가 입에서 코로, 코에서 온 몸으로 퍼졌다. 향기가 밀어낸 공기가 긴 한숨이 되어 입술 새로 빠져나갔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엉덩이를 등받이에 깊게 들이밀고 길게 몸을 폈다. 이 맛에 살지. 잠시 기분 좋은 온기를 즐기다가 다시 한 모금을 입에 머금었다. 이번에는 커피향이 입에서 흩어지기 전에 도넛을 입에 문다. 음, 좋아. 좀 더 두꺼워지면 집을 떠나기 전에 맞춰온 새 아이싱 정장이 갈라질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은 잠시 잊기로 했다. 행복은 현재에 집중할 때 생기는 거니까.
아침에 있었던 불쾌한 만남 같은 것은 이 슈가코팅 도넛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렇게 커다란 행복을 만들어낼 수 있는 간식이 있는데 골 빈 무식쟁이들이 어떻게 사는지가 무에 중요하겠는가.
하. 떠올리니 다시 화가 나기는 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가슴 속에서 부풀어오르는 옛 기억들을 내려놓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실패했다.
‘야, 찌질이. 가서 내 가방 좀 가져와라.’
무의식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손에 들고 있던 슈가코팅 도넛이 찌그러졌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그것을 입에 넣고 전투적으로 씹었다. 무식한 놈들하고는 역시 상종을 말아야한다.
분노에 차서 도넛을 씹다보니 어느새 그릇이 비어있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멈칫했다. 이렇게 맛도 모르고 먹으려던 게 아니었는데…. 이것도 전부 망할 쿠키 때문이었다. 헤유. 어쩌겠나. 한숨을 꾹꾹 누르며 그릇을 치우고 새 커피를 끓였다. 순식간에 휴식 시간이 끝나버렸으니 일을 해야지. 아직 보고서도 안 썼고, 왕국 건설 계획에 내놓을 의견서도 작성이 덜 끝났다. 여기에 커피 마법 개선식까지 짜고 있으니 할일이 산더미였다.
“나 왔어~.”
막 에스프레소맛 쿠키가 원고를 펼치던 중, 노크조차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어휴, 커피향 진한 거 봐. 또 에스프레소 마셨구나? 에스프레소도 좋지만 말이지, 가끔은 라떼 어때? 그렇게 커피만 마시다가는 잼이 삭아버릴 거야~.”
듣는 쿠키는 안중에 없다는 듯 혼자서도 말이 많은 쿠키였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고개도 들지 않고 답했다.
“나가십쇼.”
“어머, 오자마자 축객령이야?”
침입자가 까르르 웃었다. 맑은 웃음소리가 에스프레소맛 쿠키의 사무실을 훑고 지나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고집스레 시선을 서류에 고정했다.
“누구씨 때문에 매번 일이 쌓여서 말이죠~. 당신 같이 한가한 쿠키랑 다르게 저는 할 일이 많거든요.”
“얘도 참.”
불청객 라떼맛 쿠키가 재밌다는 듯 깔깔거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어딜 가든 재수없다는 말을 듣는 에스프레소맛 쿠키였지만, 라떼맛 쿠키에게는 도무지 먹히지가 않았다. 오히려 아는 사람이 변함없는 게 반갑다는 듯 더욱 접근해와서 곤란했다. 그가 왕국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맛있는 커피와 고요한 아침을 보낼 수 있었는데 이제 그렇게 조용한 아침은 손에 꼽게 드물어졌다.
“오늘 들었는데 네가 마들렌맛 쿠키랑 같이 왕국에 들어왔다면서?”
라떼맛 쿠키가 의자를 끌어와 에스프레소맛 쿠키의 건너편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잘 구워진 갈색 팔이 책상 위에 괴어지자 아무리 에스프레소맛 쿠키라도 더는 시선을 피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마음으로 욕설을 몇 마디 뱉은 후 고개를 들었다.
“뭡니까.”
“심지어 너랑 마들렌맛 쿠키가 같이 극장을 세우는 일에 협조했다면서?”
“네. 뭐…. 맞게 들으셨군요.”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대놓고 기분 나쁘다는 얼굴을 했다. 물론 라떼맛 쿠키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걸 신경쓰는 쿠키였다면 에스프레소맛 쿠키 옆에 다가올 리도 없었다.
“어머나~.”
아. 예감이 불길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 그동안 많이 부드러워졌구나. 나는 네가 여지껏 잼 한 스푼도 넣을 수 없을만큼 속좁고 깐깐한 줄로만 알았지.”
이 쿠키가 지금 욕을 하는 건가?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생각했다. 짜증나게도 그런 기색은 없었다. 라떼맛 쿠키는 진심으로 감격한 표정이었다. 급기야 손까지 잡혔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털어내듯 라떼맛 쿠키의 손을 떨쳐냈다. 두 쿠키의 손이 맞닿아 미세한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한쪽에 놓아둔 우유를 헝겊에 묻혀 책상을 닦아냈다.
“할 일을 했을 뿐이죠. 그보다 용건은 뭐죠. 바쁩니다.”
“매정하기는.”
라떼맛 쿠키가 입술을 삐죽였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당장 말하고 꺼지지 않으면 쫓아내겠다는 의사를 눈빛으로 쏘아냈다. 결국 라떼맛 쿠키는 입술을 3자로 만들고 말았다.
“이번에 내 제자가 여기로 왔잖아. 알지? 슈크림맛 쿠키라고.”
“본 것 같군요.”
“걔가 정말 유망주인데 커피 마법에도 관심이 많더라고. 우리가 처음에는 같이 연구를 했지만, 내가 라떼 마법으로 빠진 뒤로는 서로 거의 교류를 하지 않았잖아? 그래서 슈크림맛 쿠키의 질문에 대답해줄 수 없는 부분이 있어. 너랑 만나고 싶어하는데 시간 좀 내줘.”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못마땅하게 라떼맛 쿠키를 바라보다가 달력을 꺼냈다. 빽빽하게 적힌 일정표에서 빈 자리를 찾는다.
“이번달은 빈 시간이 없고, 다음달 말….”
“아, 좀~! 너도 쉬어야할 거 아니야. 이게 다 뭐니?”
라떼맛 쿠키가 냅다 달력을 빼앗아갔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픽 웃으며 팔짱을 낀다. 라떼맛 쿠키는 하나하나 일정을 확인하며 경악으로 얼굴을 물들여갔다.
“세상에. 이게 쿠키 사는 꼴이니?”
그러더니,
“당장 나가자!”
라며 에스프레소맛 쿠키를 잡아 끌었다.
“싫습니다. 싫거든요?!”
자칫 끌려나갈 뻔한 에스프레소맛 쿠키였다. 정말이지 방심할 수가 없다니까!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몰랐다. 차라리 라떼맛 쿠키와 나가는 게 나았을 거란 사실을. 미래를 볼 수 있는 눈이 있었으면 망설임 없이 그때 함께 나갔을텐데. 내가 왜 그랬을까!
머리를 부여잡은 에스프레소맛 쿠키를 보고 마들렌맛 쿠키가 말했다.
“뭐하나?”
“알 거 없습니다. 사라져주시죠.”
“하하, 거 농담도 재밌게 하는군!”
마들렌맛 쿠키는 아침에 있었던 일은 안중에도 없는 듯 유쾌해 보였다. 역시 기억을 유지시킬 최소한의 장치가 없는 게 분명했다.
“대체 여긴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사실 에스프레소맛 쿠키라고 마들렌맛 쿠키를 그냥 들여보내준 건 아니다. 막아보려고 했다. 힘으로는 도무지 저 무식한 놈을 이길 수 없었을 뿐이었다. 저놈은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닫히는 문을 당당하게 손에 들고 있던 방패로 밀어내버리고 들어왔다. 왕국이고 뭐고 버리고 떠날까? 소울잼을 찾아서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거야.
“집 구경하러 왔지.”
마들렌맛 쿠키가 씩 웃었다. 불쾌하다.
“제 집은 구경거리가 아닙니다. 나가십쇼.”
“동료끼리 서운하게 하는군 그래!”
그렇게 웃으며 마들렌맛 쿠키가 에스프레소맛 쿠키의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기력이 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이 감각, 낯설지 않다. 학창시절에 지겹도록 겪어본 쿠키상이었다.
“누가 동룝니까. 꺼지쇼.”
“동료지, 그럼. 함께 소울잼을 찾아 돌아가기로 하지 않았나. 안그래도 내 그동안 얼마나 서운했는지 아는가? 길 떠나자마자 ‘이제부터는 따로 행동하기로 하죠.’ 하고 가버리지 않았어. 내가 언제 자네를 서운하게 한 적이라도 있냐 말이야. 우리 임무가 시작되기 전엔 거의 얼굴도 마주한 적 없는 사이였지 않나!”
에스프레소맛 쿠키의 얼굴에 아련한 미소가 번졌다. 말이 안 통하는 쿠키가 한둘은 아니지만 저 놈은 명물이었다. 그날 자기가 떤 진상을 하나도 기억을 못 한단 거지. 할 말이 없으니 그저 웃지요.
“그나저나 참 썰렁하게 해놓고 사는군. 이런 삭막한 집에서 어떻게 잠을 자나?”
“잘만 잡니다.”
“거울 없나? 하긴 이런 배경에서는 내 미모도 멋져보이기 힘들겠어. 이렇게 우중충할 줄이야.”
“당신 얼굴보단 제 집이 훨씬 근사하군요.”
“이건 대체 뭔가? 커피 마법에 쓰는 거라고? 허, 정말 일만 하고 사나보군. 이렇게 살다간 순식간에 상해버릴 걸세.”
“여지껏 그렇게 살아왔지만 아직 안 상하고 멀쩡하군요.”
마들렌맛 쿠키는 파괴신이었다. 지나는 곳마다 그 거대한 방패와 망토로 쓸고다녔다. 그가 가는 자리마다 잘 세워놓은 물건이 떨어져서 나뒹굴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그 뒤를 쫓아 집안을 정리해야했다. 있는대로 집어던져서 쫓아내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이곳은 에스프레소의 집이었다. 살림살이를 던져서 손해보는 건 자기 자신 뿐이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손에 집어든 자명종을 힘주어 쥐며 말했다.
“이제 다 봤으니 나가십쇼.”
“응? 여긴 또 뭔가.”
눈 앞이 아찔했다. 아니, 기분 탓이 아닌가? 에스프레소맛 쿠키의 몸이 기울어졌다.
“에스프레소맛 쿠키!”
마들렌맛 쿠키가 후다닥 달려오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눈앞이 흐려졌다.

다시 깨어났을 때 눈 앞에 보인 것은 마들렌맛 쿠키(끔찍했다)와 용감한 쿠키, 그리고 연금술사맛 쿠키였다.
“에스프레소맛 쿠키가 깨어났어!”
“몸은 좀 어때?”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눈을 두어번 깜빡였다.
“저걸 쫓아내주시면 좋겠군요.”
연금술사맛 쿠키는 에스프레소맛 쿠키의 손짓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끄덕였다.
“그렇대. 나가줘, 마들렌맛 쿠키.”
“왜 나한테만 그러나!”
“환자잖아. 안정이 필요하니까 나가있어.”
연금술사맛 쿠키가 말했다. 동그란 안경이 그렇게 믿음직스러울 수 없다.
“자자, 나가자. 나가자~.”
용감한 쿠키의 명랑한 목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마들렌맛 쿠키가 몇 마디 투덜거렸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나갔으니까.
“또 며칠째 잠을 안 잔거지?”
연금술사맛 쿠키가 물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태연하게 눈만 꿈뻑였다.
“연구도 좋지만 적당히 해. 뒤치다꺼리는 질색이라고.”
연금술사맛 쿠키는 에스프레소맛 쿠키의 어깨를 가볍게 톡톡 두드리고 일어샀다.
아, 그리고.
“마들렌맛 쿠키가 에스프레소맛 쿠키와의 일화를 연극으로 만들었대. 궁금하면 저녁에 나와봐.”
새침한 목소리만 남기고 문이 닫혔다.

언질해두건대 절대로 마들렌맛 쿠키가 구상했다는 연극이 궁금해서 나온 게 아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괜히 옷깃을 바짝 세워 얼굴을 가렸다. 저 멍청이가 내 이야기를 썼다니 대체 무슨 짓을 해놨는지 궁금해서 보러가는 거야. 내 명예가 걸린 일이잖아?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생각했다. 완벽한 이유군.
극장에 다다랐을 때는 이미 연극이 한창이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혹여나 다른 쿠키의 눈에 뜨일까봐 극장 주변을 빙 돌아 뒤쪽으로 다가갔다. 왕국 쿠키의 과반수가 이 자리에 모인 것 같은 인파였다. 마들렌맛 쿠키의 하얀 머리칼이 예상대로 무대 바로 앞에 붙어있었으므로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마음 편히 뒤쪽 빈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쿠키를 빼닮은 인형들이 조그만 무대에서 꼼지락거렸다.
「도와줘, 에스프레소맛 쿠키!」
마들렌맛 쿠키로 보이는 인형이 외쳤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당황했다. 다른 쿠키도 아니고 마들렌맛 쿠키가 내게 저런 말을 한 적이 있던가? 설령 한 적이 있다고 해도 그가 저런 대사를 극장에 올릴 위인이던가?
언제나 푸른 망토를 펄럭이며 걸어다니는 마들렌맛 쿠키는 사실 기사라고 해주기에도 부끄러운 인사였다. 고국에서 그를 볼 때마다 밑에 있는 기사들이 얼마나 불쌍했는지 모른다. 에스프레소맛 쿠키가 제 멋부림 말고는 아무것도 관심이 없는 멍텅구리를 상사로 모셔야하는 입장이었다면 차라리 기사를 그만두고 말았을터였다. 다행히 경험상 대부분의 기사들은 마들렌맛 쿠키와 별 차이 없는 단순무식 멍청이였으니 양쪽 모두 그다지 괴롭지는 않을 것이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로서는 언젠가 함께 싸워야할 전력이라고 생각하면 불안해서 밤잠이 오지 않을 지경이었지만.
에스프레소맛 쿠키를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 짙은 갈색 빛깔 인형이 수풀에 뛰어들었다. 무대가 바뀌고, 홀로 선 마들렌맛 쿠키(인형)가 수십마리의 케이크 들개와 맞서고 있는 모습이 나타났다. (물론 수십마리의 케이크 들개는 한두마리를 제외하곤 배경 그림으로 대체됐다.) 에스프레소맛 쿠키(인형)는 지체없이 마법을 시전했다.
「물러나라. 사악한 마물아!」
음.
에스프레소맛 쿠키의 입가에 빙긋 미소가 걸렸다. 못 보겠다.
되돌아나가려는 에스프레소맛 쿠키의 어깨를 누군가 붙들었다.
“어디가나? 끝까지 봐야지.”
잡힌 순간 깨달았다. 돌아보지 말아야지.
결심은 아무 소용 없었다. 이 무례한 쿠키는 남의 몸에 함부로 손대면 안 된다는 예의를 모르 듯이, 남을 함부로 잡아당기면 안 된다는 상식도 없었다.
“우리의 모험담이잖나. 같이 봐야지. 모두가 만들어준 연극인데.”
“대체 무슨 헛소리를 했기에 저딴 연극이 나왔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를 끌어들이지 말아주시죠.”
완곡하게 돌려 말한 ‘내 얘긴 빼라’였다. 물론 마들렌맛 쿠키는 알아듣지 못 했다. 이 똥멍청이는 에스프레소맛 쿠키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도 몰랐다.
“그냥 우리가 함께 온 길에서 있었던 모험을 말해줬을 뿐이야. 그들이 우리 업적이 영웅에 필적한다 하여 연극으로 상영해준다 했지. 자랑스럽지 않나?”
“여기까지 오는 길에 모험이라고 할만한 일은 없었습니다만.”
“그게 무슨 소린가! 방금 자네도 봤지 않나. 우리가 함께 오십마리의 케이크 들개를 해치운 다음에…….”
더는 듣고 싶지가 않았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탁 소리가 나도록 마들렌맛 쿠키의 손을 쳐냈다.
“돌아가 보겠습니다.”
펄럭. 에스프레소맛 쿠키의 망토가 가볍게 흩날렸다. 마들렌맛 쿠키의 황당한 시선이 등 뒤에 꽂혔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신경쓰지 않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
어째 썰푼 거하고 내용이 소소하게 달라졌는데, 큰 흐름은 같이 갈 겁니다. 혹시나 하고 추가해두자면 에스프레소 왕따 당하거나 삥 뜯긴 거 아니고요. 설령 그랬어도 열배로 갚아줬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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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필요에 의한 일이었다. 공화국의 모든 쿠키가 저를 보고 수군거리는 것도, 점잖기로 유명한 총독에게 뜨거운 커피를 맞은 것도 모두.

사건은 시작된 것은 그곳, 바로 신생 바닐라 왕국에서였다.
그들이 전설 속의 보물을 찾아 떠난 길에 만난 그곳은 과거 바닐라 왕국의 발자취를 뒤쫓는 이들이 세운 작은 나라였다. 목적지가 같아 잠시 협력을 구하려던 것이 꽤나 긴 시간을 체류하게 되는 바람에 그들은 그 새로운 왕국의 시작에 상당한 족적을 남기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나라의 핵심 인사들은 갓 오븐에서 탈출해 쿠키대륙의 실정을 전혀 모르는 어리숙한 인사들로 구성되어있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공화국 의회에서 활약하던 젊은 지식인 에스프레소맛 쿠키와 빛의 신을 따르는 공화국의 검 마들렌맛 쿠키의 재주는 지극히 귀한 것이었다.
떠돌이들이 모여 피운 작은 모닥불이 하나의 나라가 되기까지의 역사를 이곳에서 읊는 것은 지나치게 비효율적인 행위이니 생략하도록 하자. 여기서 알아야할 것은 하나 뿐이다. 집정관을 몇 번이고 배출한 것은 물론 현재 총독 자리 마저 거머쥐고 있는 위대한 ____ 가문의 __대 독자 마들렌맛 쿠키가 뛰어난 마법사로 학계에서 인정받고는 있다고 하나 외지에서 들어와 아직도 의회에서 입지를 확보하지 못한 평민 출신 의원 에스프레소맛 쿠키에게 홀딱 반해버리고 말았다는 것. 신생 바닐라 왕국이 땅을 다지고 건물을 세우며 그들만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동안, 에스프레소맛 쿠키와 마들렌맛 쿠키 사이에서도 역사가 흐르고 장대한 드라마가 펼쳐졌음은 물론이다. 그 결과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끝내 자신이 마들렌맛 쿠키의 애정공세에 넘어가버리고 말았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가진 거라곤 실력과 자존심(그리고 외모)뿐인 서민 쿠키로서는 뼈아픈 패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런 도둑고양이 같으니. 외지인 주제에 어딜 순진한 마들렌맛 쿠키를 꼬여내느냐! 의회에서의 열정적인 활동을 보아 그래도 공화국에 해를 끼칠 자는 아니라고 생각했건만!”
같은 소리를, 바로 그 공화국의 총독께서 부스러기를 튀겨가며 열렬하게 외치고 있기 때문이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말끝마다 외지인, 외지인. 우습지도 않다. 그가 시민 자격을 가지고 이 나라에 정착한 게 벌써 __ 년째인데 아직도 외지인 소리를 듣는 게 지겨웠다. 당신 자식을 해친다고 공화국에 해가 되는 건 아니지 않느냐고 빈정거리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으며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커피가 방울방울 맺혀 흘러내리는 코팅을 털어내었다. 동그란 손이 커피에 젖어 짙게 물들었다.
“진정하시지요.”
“진정하라고? 이 놈이 그래도!”
“소리만 지르지 말고 잠시 제 이야기를….”
“에스프레소맛 쿠키 괜찮나!”
하아아.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눈을 감고 긴 한숨을 토해내었다. 끝내 참지 못하고 쳐들어온 마들렌맛 쿠키가 그의 주위를 맴돌며 누군가 딸기를 훔쳐간 케이크 개처럼 안달을 했다.
“왜 평소보다 더 까맣지? 젖기라도 한 건가? 커피를 흘렸나? 하지만 한 모금도 안 마신 것 같은…, 아버지!”
이걸 수습을 해야하나, 말아야하나.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웃었다. 정말. 귀찮다.

정말로 케이크 들개라도 된 양 짖기를 멈추지 않는 마들렌맛 쿠키와 그의 아버지 ____맛 쿠키를 겨우 뜯어말린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조용히 선언했다.
“들어오는 길에 이미 혼인신고는 마쳤습니다. 허락을 받든 받지 않든 저와 마들렌맛 쿠키는 법적 부부란 의미지요.”
“뭐, 뭐라고?”
____맛 쿠키가 휘청거렸다. 평소라면 잽싸게 달려가 부축했을 마들렌맛 쿠키는 잔뜩 삐친 표정으로 외면할 뿐이었다. 다행히 마들렌맛 쿠키 못지 않게 강건한 면이 있는 ____맛 쿠키는 금세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 도둑고양이…!”
“에스프레소맛 쿠키를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
“이…, 이 천둥벌거숭이야!”
버럭 소리를 지른 ____맛 쿠키가 어지러운 듯 이마를 짚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그런 ____맛 쿠키를 보고 빙긋 웃었다. 제가 수도 없이 느낀 답답함을 남이 겪는 걸 보고 있으니 그리 속시원할 수가 없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가 쿠키가 아닌 파이였다면, 진작에 속이 터져 파이의 몰골이 아니었으리라.
“진정하신 것 같으니 이야기를 해도 되겠군요.”
그러니까 그만 좀 싸우라는 말이야. 에스프레소는 메세지를 담아 보기 좋게 웃어보였다. 학회나 의회에서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제 말을 막아서는 쿠키를 향해 내보이곤 하는 미소였다.
“공화국으로 돌아오기 전에 마들렌맛 쿠키가 제게 약속한 것이 있습니다. 한데 그 약조를 들어줄 수 있는 것은 마들렌맛 쿠키가 아니라 총독님, 당신이더군요. 그래서 이리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비록 커피를 맞기는 했지만요.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앙심 같은 건 없다는 듯 활짝 웃었다. 물론 진심으로 그렇게 보이길 바라는 건 아니었다.
“네 녀석 대체 무슨 약속을….”
“별 거 아닙니다. 들어보세요.”
잽싸게 끼어든 마들렌맛 쿠키가 에스프레소맛 쿠키의 말을 가로챘다. 또다, 또. 무례하기 짝이 없는 태도에 진절머리가 났지만 이 쿠키에게 품위를 언급하며 화내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는 걸 진작에 깨달은 바였다. 게다가 어쩌면,
‘저런 면이 사랑스러운지도 모르고.’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왠지 텁텁한 입을 커피로 씻었다. 내가 어쩌다 이러고 있는건지. 한숨이 절로 났다. 총독이 뒤집어씌운 커피가 제 커피잔에 들어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건 이미 커피가 몸속으로 꼼꼼하게 스며든 뒤의 일이었다.
“……니까 결국 에스프레소맛 쿠키에게 후원하면 마법사들을 공화국으로 더 끌어올 수 있을 겁니다. 그건 절대 손해가 아니에요.”
“마법 학회에는 충분히 투자하고 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커피 마법의 1인자입니다. 저는 커피 마법의 위력을 눈으로 확인했어요. 그에게 하는 투자는 곧 이 나라를 위한 투자가 될 겁니다.”
“마법사만으로 군대를 구성할 수는 없어.”
“커피 마법사를 군대에 투입할 수 있다면, 군부대의 규모를 줄일 수 있습니다. 장기적으로 이득을 보는 투자예요.”
“당장 예산을 어디서….”
“ー자, 자. 두 분이 의견을 충분히 나눈 것 같은데 이만 제 이야기도 들어보는 게 어떠신지요.”
동시에 그를 돌아보는 두 쌍의 푸른 눈동자가 꼭 닮아있었다. 가족이라고 해서 쿠키끼리 닮는 것은 아닌데도.
“우선.”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작게 헛기침했다.
“예산을 어디서 끌어올지는 제가 이미 생각해두었습니다.”
총독 ____맛 쿠키가 눈을 부라렸다. 어디 말해보라는 듯 팔짱을 낀다.
“마법학회에 배정된 예산 중에 놀고 있는 예산이 있습니다. 매년 남은 예산을 소비하기 위해 아카데미 정원을 갈아엎으면서도 정작 필요한 학과에는 충분한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비효율의 극치를 달리고 있죠. 제가 원하는 건, 그 남아도는 예산입니다.”
그걸 위해서 아까운 연구 시간과 개인 수련을 포기해야했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높으신 분들에게 그걸 하소연해서 어디에 쓸까. 하물며 마들렌맛 쿠키는 그 긴 이야기를 듣고도 깔끔하게 잊어버린 얼굴인데 말이다.
“대학에 예산 분배를 새로 요청했지만 관습이라는 말로 얼버무리더군요. 그들에게 예산을 요청하는 입장인 제 말로는 설득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총독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겸사겸사 마들렌맛 쿠키의 생활비에서도 연구비를 받아갈 거라는 이야기 역시 하지 않았다. 마들렌맛 쿠키의 개인 사정이니 굳이 그 아버지가 알아야할 필요는 없겠지.
총독은 예산을 추가로 분배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마음이 흔들리는 듯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의회에서 늙다리 의원들을 상대할 때 종종 그리했듯이 속에서 치밀어오르는 비웃음을 부드러운 미소로 대체하곤 대화를 이어나갔다.

수도 안에 마들렌맛 쿠키와 에스프레소맛 쿠키의 혼인이 알려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들의 신고를 받아준 구청 직원의 입에서 시작된 소문은 바로 다음날 지역 신문에 실릴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번져있었다. 두 쿠키의 유명세라면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라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신문을 넘겼다.
“아무렇지 않은가보군.”
건너편에 앉아있던 마들렌맛 쿠키가 말했다. 그의 시선은 신문 1면에 대문짝만하게 난 그들의 결혼 기사에 꽂혀있었다.
“예상한 일입니다. 호들갑 떠는 쪽이 이상하죠.”
“그렇긴 하지만….”
착잡한 표정으로 신문을 응시하던 마들렌맛 쿠키는 제 앞에 놓인 향기로운 꽃차를 한모금 들이켰다. 그리곤 답지 않게 긴 한숨을 내쉰다.
“결국 이렇게 되었어.”
“네. 계획대로군요.”
“식은 이번달 안에 올리도록 준비할거야.”
“그리하시죠.”
마들렌맛 쿠키는 착잡한, 정말이지 그 답지 않은 표정이었다!, 얼굴로 에스프레소맛 쿠키를 바라보다가 다시 말했다.
“너는…, 아무렇지 않은 건가?”
그제서야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신문에서 눈을 떼었다. 붉은 빛을 띈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자 마들렌맛 쿠키는 우물쭈물 눈을 돌렸다.
“뭐가 말입니까?”
“우리가 부부가 되었다는 사실 말이야.”
“동요해야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어차피 계획대로인데 뭐가 그리 문제입니까? 에스프레소맛 쿠키가 눈으로 물었다. 아니…. 마들렌맛 쿠키는 무엇이 그리 불만인지 우물거리다가 입을 다문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다시 신문을 치켜들었다.
“한가하게 그러고 앉아있을거면 나가서 훈련이라도 하시죠.”
그 말에 마들렌맛 쿠키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신문 너머로 보이는 그의 납작한 얼굴이 묘하게 쓸쓸해보인다고 생각했다. 성가셔라.
“마들렌맛 쿠키.”
“응?”
“식은 아직이지만 우리는 부부입니다.”
“그렇지?”
“부부끼리 아침 식사 후 가볍게 산책을 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겠지요. 식을 올리지 않았으니 신성한 화덕에 반죽을 올리는 건 무리겠지만요.”
“……뭐?”
“아침 식사하고 함께 산책을 하도록 하죠. 저도 돌아오자마자 연구실에 틀어박힐 수는 없으니까요.”
할 일도 많고.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그렇게 말하곤 커피로 입가심을 했다. 말을 많이 해서 입이 말랐다.
“다시 말해봐.”
마들렌맛 쿠키가 무서운 얼굴을 하곤 벌떡 일어났다.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지금, 반죽이라고—.”
아.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피식 웃었다. 비웃음인지 그냥 미소인지 애매한 웃음이 입술을 덮었다.
“지금은 부부라고 해도 다들 실감이 나지 않을 겁니다. 아직은 신성한 화덕에 반죽을 올리기 적절한 시기가 아니죠.”
“그 얘긴, 설마, …설마.”
“예, 말씀하시지요.”
“나와 반죽을 만들어주겠다는 건가?”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코웃음쳤다. 그 재수없는 표정에도 마들렌맛 쿠키는 흔들리지 않았다. 하도 많이 봐서 감흥이 떨어진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지금 하는 이야기가 그에게 워낙 중요한 것이어서 그랬다.
“예, 뭐. 당신 집안에 후계자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혼자 만드셔도 상관 없고요. 에스프레소맛 쿠키가 중얼거렸다. 마들렌맛 쿠키가 달려와 덥썩 에스프레소맛 쿠키를 끌어안았다. 악. 작게 비명이 울렸다.
“부스러집니다. 부스러기 떨어지는 거 안 보입니까!”
“미안하네. 미안해! 하하, 하하핫!”
“내려놓으십시오!”
결국 산책을 나갈 수 있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그나마도 에스프레소맛 쿠키의 접근금지령으로 인해 나란히 걸을 수는 없었지만, 마들렌맛 쿠키는 기분이 좋아보였고, 그런 그들의 모습은 소문을 한층 무성하게 만들었다.

식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어차피 사용인들과 마들렌맛 쿠키가 알아서 처리할 일이었기에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마음껏 자기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의회와 아카데미에 복귀 신고를 하고, 연구실을 청소했으며, 그 사이의 보고서를 작성했다. 마들렌맛 쿠키가 제대로 된 보고서를 작성할 리는 없었으니 자신이라도 멀쩡한 보고서를 제출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성실하게 작업했다.
식은 예상보다 빠르게 잡혔다. 이 주 뒤였다. 덕분에 이 주 안에 공화국 총독 자식의 결혼 연회를 준비해야하는 일꾼들만 바빠졌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예복을 맞출 때를 빼고는 식장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마들렌맛 쿠키는 아주 신이 난 것 같았고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결혼식이 마들렌맛 쿠키의 기운을 빼놓는 것이 반가웠다. 결혼식 준비가 시작되면서 만날 때마다 귀찮게 들러붙는 일이 줄어들었던 것이다.
총독과 직접 담판한 보람이 있는지 아카데미에서 그에게 배정하는 예산이 제법 넉넉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앞으로의 연구 계획을 세우며 희희낙낙했다. 총장은 넉넉해진 예산의 대가로 그에게 수업을 더 배치하려고 했으나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터무니없는 수업 계획서로 응대했다. 예산 나올 구석도 생겼는데 아카데미따위 확 그만둬버릴까보다. 그렇게 생각했지만ー, 그의 의회에서의 입지가 아카데미와 학회에 기반하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그래선 안 된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입을 삐죽였다.
그래도 마들렌맛 쿠키와 총독이라는 뒷배가 크기는 했다. 의회에서 그를 보는 시선이 많이 부드러워졌다는 게 느껴졌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쓸모없다고 마들렌맛 쿠키를 비난하지는 않기로 했다. 어쨌든 도움은 되고 있었으니까.
문제는 결혼식이었다. 마들렌맛 쿠키가 화려하고 성대한 연회를 준비했으리라는 것은 예상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에게도 기꺼운 일이었기에 특별히 참견하지 않았다. 마들렌맛 쿠키는 천둥벌거숭이 소리를 들을 정도로 철없는 도련님이었지만, 그의 집안은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이었으니 체면을 구길 걱정은 하지 않았다. 성가신 것은 미래를 위해서라면 견딜 수 있었다. 지긋지긋한 외부인 소리와 떨어질 수 있다면, 더는 학회에서 줄을 잘 타려고 억지 미소를 짓지 않아도 된다면 이까짓 것 못 참을까. 다만 진짜 문제는…,
“에스프레소맛 쿠키, 시간 괜찮은가? 내가 우리의 새 반죽을 구상해봤는데!”
그래. 이 녀석이었다. 정말 도움이 안 되는 쿠키다. 빛의 신이시여. 이 녀석 안 거둬가시고 무엇 하십니까. 아니, 거둬가면 곤란하긴 하지만서도.
“그런 건 식을 올린 이후에 의논하면 안 되겠습니까?”
“하지만, 하지만 이런 것은 정성과 시간이 필요한 일이지 않나!”
“맞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정신없을 때가 아니라 둘 다 차분하게 머리를 맞댈 수 있을 때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그래도는 뭐가 그래돕니까.”
부스러기가 튈 정도로 이를 갈자 그제서야 입을 다무는 마들렌맛 쿠키였다. 기가 죽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겨주고 돌아선다.
“그럼 결혼식을 올린 후에는 상의해주겠지?”
“물론입니다. 그때까진 참으십시오.”
그거면 될 줄 알았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성대한 결혼식이었다. 연회에는 수도의 유력인사가 대부분 참가했고, 거리에까지 음식을 돌렸다. 꽃과 음식을 든 작은 쿠키들이 그들에게 축하를 건냈다. 식을 올리고 춤을 추고 축사를 주고받다보니 하루가 훌쩍 갔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기진맥진해 침대에 늘어졌다. 마시멜로 매트리스가 허공에 던져진 몸을 부드럽게 받쳐주었다.
“지쳤습니다.”
“하하, 나도 그래.”
마들렌맛 쿠키가 말했다. 그는 정말 기분이 좋아보였다. 지쳤다고 말하는 마들렌맛 쿠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기력도 좋다고 생각하며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그에게 등을 돌렸다.
“저는 좀 자겠습니다. 나중에 뵙죠.”
“잠깐!”
“뭡니까.”
마들렌맛 쿠키의 하얀 손이 에스프레소맛 쿠키를 붙들었다. 인상을 찌푸린 에스프레소맛 쿠키에게 마들렌맛 쿠키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직 자면 안 되네!”
“네, 네. 말씀하시지요.”
결국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다시 몸을 바로 눕혀 눈을 감았다. 적당히 대답해주다 자면 되겠지.
“우리 반죽 말일세!”
“네?”
“반죽에 대해 의논해야하네. 오늘 하자고 하지 않았나.”
“제가요? 언제요?”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소리람.
“결혼식 이후에 말하자고 했잖은가.”
그가 당당하게 웃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의 미간이 마구 구겨졌다.
“내일 하시죠.”
다시 돌아누웠다. 다시 막혔다.
“내가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려왔는지 아나. 할 이야기가 잔뜩 있어.”
“전 없습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 너를 닮은 쿠키였으면 좋겠어. 커피를 꼭 넣어야한다고 생각해.”
“내일 합시다.”
“하지만 완전히 자네만 닮아서는 아버지가 노발대발 하실 게 틀림없어. 그러니 어느정도는….”
“아, 내일 하자고요!”
“들어보게!”
“싫습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
“마들렌맛 쿠키!”
밤은 길었다. 결국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그날 한시도 눈을 붙이지 못했다. 연구를 위해 세워둔 수면계획은 완전히 엉망이 됐다.
“아아아악! 당장 떨어지란 말입니다!”
“하지만 들어봐. 이게 제일 중요하단 말이야!”
사용인들은 예감했다. 지금까지의 평화는 그저 폭풍 전의 고요였음을. 갓 탄생한 신혼부부는 정말이지, 사이가 심히 좋았다.

——————
모든 설정은 100% 날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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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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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시 드림

the other world 2020. 2. 5. 12:16

날이 개었다. 수많은 일이 있었음에도 하늘은 맑고 창창하기만 했다. 그것이 너무 이상해서 미캉은 말없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돌아갈 거야?”
아라시가 물었다. 언제나 건강하고 활달하던 소년의 목소리는 어딘가 풀이 죽어있었다. 미캉은 그것이 아라시의 본심이라는 걸 알았다.
중앙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소년이 얼마나 안절부절 못했는지 미캉은 알고 있었다. 기쁜 일에 순수하게 기뻐하지 못하고 자신이 떠나가버릴까 노심초사하는 것을 알았다. 아라시는 매사에 솔직하고 직설적인 아이였지만 어쩐지 애정표현에만큼은 서투른 면이 있었다.
“남아있길 바라?”
미캉이 물었다. 아라시가 움찔 하더니 콧방귀를 뀌었다.
“상관없어. 가고 싶으면 가던가.”
미캉은 희미하게 웃었다.
“연화가 있잖아. 넌 혼자가 아니야.”
“딱히 외롭다거나 가지 않길 바란다거나 하는 건 아니거든!”
아라시는 씩씩거리더니 투덜거렸다.
“네가 있든 없든 우리는 잘 살 수 있어. 집도 있고 돈도 충분하고. 우리는 아무것도 모자라지 않단 말이야. 동방거리 사람들과도 친해졌으니 같이 놀 사람도 있어.”
어째서일까. 아라시는 말을 하면 할수록 시무룩해졌다. 고개는 땅으로 떨어지고 입꼬리가 쳐졌다. 늘 기세등등한 소년의 낯이 밤하늘처럼 어둡게 물들었다. 며칠 보지 않았지만, 미캉은 그것이 얼마나 큰 슬픔의 표현인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입을 열고 말았다. 입에 담지 않으려고 줄곧 고생했던 말이었다.
“동방거리로 이사하는 건 어때.”
“싫어!”
과연. 즉답이 돌아왔다. 미캉은 왠지 그것이 기꺼워 또다시 작게 웃고 말았다. 아라시와 함께 있으면 반쯤 죽었다고 생각한 감정이 일부 돌아온다. 아라시는 정말이지 에너지가 넘치고 활달한 소년이었다. 그가 가진 에너지는 옆에 있는 사람마저 산자의 생기로 마음을 가득 채울 수 있을만큼 크고 강렬했다.
'네가 산 사람이 아니라는 게 이상한 일이지.'
미캉은 생각했다.
“동방거리 사람들은 좋아.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줬고, 누나도 받아들여줬으니까. 나도 그들을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좋고, 좀 더 자주 만나고 싶어. 그러기에 항구 도시가 먼 것도 사실이야. 하지만….”
아라시는 잠시 우물거린다.
“나랑 누나는 이 집이 마음에 들었단 말이야. 이곳은 무척 정답고 아름다워. 동방거리를 다 둘러봐도 이곳 같은 집은 없었어.”
속상한 듯 말하는 아라시의 눈빛에는 옅게 물기가 어려있었다. 그가 동방거리에서 집을 찾은 것은 미캉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함께 돌아다니기도 했으니 모를 리 없었다. 아라시는 정말로 동방거리에 살고 싶어했고, 동방거리 식구들도 그랬다. 하지만 지금 사는 그 집만큼 아라시의 마음을 흔든 곳은 없었다. 미캉은 그것을 보고 집이 때로는 고향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라시.”
미캉이 말했다.
“내겐 의무가 있어.”
“알아.”
아라시가 침통하게 대답했다. 그는 이제 반쯤 울고 있었다.
“알고 있어. 누나도 그렇게 말하면서 시집을 갔는걸.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의무를 가지고 있어. 누리는 것만큼 책임을 다해야한다고, 사부님도 말씀하셨어.하지만 나는 잘 모르겠어.”
미캉은 고민했다. 일렁이는 소년의 눈가를 손으로 훔쳐주고 싶었다. 눈물은 흘러넘쳐 거의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자신이 이런 감정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낯설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지휘사는 세상을 구하고, 황실의 여인은 시집을 가는 게 의무일까? 그럼 나는? 내가 가진 의무는 뭐지? 난 이제 살아있지도 않아. 신기사가 되었으니 세상을 구해야할까? 누나나 미캉, 네가 위험해진다고 해도? 그런 게 의무인 거야?”
고민하는 사이, 아라시의 붉은 눈동자에서 붉은 것이 뚝 떨어졌다. 곧 색을 잃은 그것은 바닥에 부딪혀 부서진다.
“그게 옳은 일이겠지. 알고 있어. 하지만 나는 정말 모르겠어. 의무가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지켜야하는 것이라면, 사람은 대체 무얼 위해 사는 거야?”
“아라시.”
언제 열렸는지 문이 열려 있었다. 그 자리에 서있던 전통복 차림의 고운 여인의 손이 떨렸다. 찻잔이 놓인 쟁반이 달그락거렸다. 연화는 서둘러 방안의 탁자에 쟁반을 올렸다.
“아라시.”
죽은 자는 눈물이 많아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연화의 눈에도 어느샌가 눈물방울이 데롱데롱 매달려있었다. 미캉은 조용히 그 풍경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누나. 누나. 울먹이는 소년의 목소리가 발목을 잡아 끌었다. 그 목소리에 떠밀리듯 방을 나왔다. 문을 닫고도 한참이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미캉은 얼어붙은 듯 문 앞에 서서 남매의 울음에 귀를 기울였다.

그날 이후, 아라시는 종종 중앙청을 찾았다. 때로는 맛있는 음식을, 때로는 예쁜 옷과 장신구와 함께였다. 가끔은 연화가 동행하기도 하고 동방거리 사람들을 동원할 때도 있었다. 목적지는 언제나 같았다. 중앙청 회의실 지하였다. 이름 없는 공헌자는 그곳에서 아라시를 맞아 때로는 이야기를 나누고 때로는 다투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긴 시간을 함께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은 제법 사이가 좋았고, 함께 있는 것을 기꺼워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아라시는 그의 친구가 밖으로 나오기를 바랐지만,
글쎄. 때로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도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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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담장이 보인다. 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언제나 그랬다. 바깥 풍경은 언제나 삼엄한 철창 너머에 있었다.
출입이 불가능했던 건 아니다. 마리아 루첼라이는 원할 때면 언제든 외출을 하고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가 더 자주 나가기를 원했다. 신전과 공방에 갇힌 듯이 살고 있는 딸이 안쓰러운 탓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창가에 우두커니 앉아 바깥 풍경을 보는 일을 더 좋아했다. …좋아했다.
마리아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있었다. 고요히 앉아있는 모습은 마치 잘 만들어진 인형 같다. 공방에서는 누구보다 바쁘게 일하는 그지만, 집에서는 마치 영혼이 빠진 듯 그렇게 앉아있을 때가 많았다. 바깥 일에 지친 탓이다. 어머니는 그런 딸을 볼 때마다 깊은 시름에 신음하곤 했다. 마리아는 종종 그 고통스러운 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나곤 했다.
“마리아.”
루첼라이 부인이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마리아는 천천히 일어나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괴로워하는 어머니의 뺨에 입을 맞추고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미의 무릎에 뺨을 대자 루첼라이 부인의 따뜻한 손이 마리아의 머리 위에 얹혔다. 마리아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정적 속에서 시간이 흐른다. 루첼라이 모녀는 그렇게 말 없이 함께 시간을 보냈다.

마리아 루첼라이는 루첼라이 가문의 양녀다. 루첼라이 부인은 제 배 아파 낳지 않은 소녀를 무척이나 아꼈다. 마리아는 그런 어머니를 극진히 따랐다. 교회일도 공방일도 어머니 말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무척이나 순종적인 딸이었고 마음씀씀이가 섬세했다. 루첼라이 부인의 마음이 상할 일은 하지 않았고, 기뻐할만한 일은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했다. 불행한 사고로 두 손을 잃지만 않았어도 누구보다 자랑스러운 딸이었으리라.
루첼라이 부인은 종종 마리아의 잃어버린 두 손을 붙들고 오열하곤 했다. 그런 부인을 마리아는 냉랭한 표정으로 바라보곤 했는데 그것은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모자라서가 아니었다. 함께 아파하는 것으로 어미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는 섬세한 배려였다. 마리아는 손이 없어도 바느질을 하고 기도를 할 수 있었다. 저에게 아무것도 아닌 일들을 어미가 아파하는 것을 두고 보기 마음 아파 그토록 차갑게 구는 딸이었다. 루첼라이 부인은 때로 그런 마리아의 눈초리에 속상해하곤 했지만 근본적으로 어쩔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마리아는 병약했다. 곧잘 앓았지만 아픈 내색을 하지 않았다. 공들여 분을 칠해 핏기 없는 뺨을 숨겼고 아프고 힘들어도 허리를 굽히지 않았다. 남 몰래 앓는 소녀의 진정한 모습을 아는 것은 고작해야 어미인 루첼라이 부인이 다였다. 부인은 자존심 강한 딸의 의사를 존중해 바깥으로 마리아가 아프다는 소문이 돌지 못하도록 하인들을 단속했다. 정기적으로 몸상태를 살피러 오는 의사는 신심 깊은 루첼라이 부인이 교회에서 구한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마리아는 어머니의 꼼꼼한 배려 속에서 외부 사람들을 거의 만나지 않고 살았다. 루첼라이 부인의 바람대로 정원에 나가 바람을 쐬기는 했다. 외출은 자유로웠으나 나가고 싶지 않았다. 신심 깊은 세르미어의 신자들이 사는 마을에서 피라도 토했다가는 눈도 깜빡하기 전에 소문이 퍼질 터였다. 손이 없는 양녀를 거둔 어머니는 마리아가 몸도 연약하다는 사실에 가여운 시선을 받을 터였다. 자존심 강한 어머니가 그런 소리를 들었을 때 어떻게 반응할지는 자명했다.
처음에는 자상하게 물을 것이다. 어쩌다 밖에서 피를 토했니. 많이 힘들었니. 왜 내게 말해주지 않았니. 마리아는 순종적으로 대답할테지만 그 어떤 대답도 어머니를 만족시킬 수 없을 것이다. 어머니에게 뭇 부인들 사이에서 도는 소문은 너무도 중요해서 조금이라도 나쁜 이야기가 돌면 크게 마음이 상했다. 그럴 때는 어떤 위로도 소용이 없었다. 마리아는 침묵을 지키다가 어머니가 조금 진정되면 연신 사죄를 하곤 했다. 그렇게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 말고는 어떤 행동도 소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외출을 좋아하지 않았다. 밖에 나가는 것보다 저택에 앉아 평온하게 바깥을 바라보는 것이 훨씬 좋았다.

몇 년 전의 일이다. 마리아 루첼라이는 여신 세르미어의 지팡이이자 재봉사였으므로 때로는 신의 사도다운 일을 해야할 때가 있었다. 시계탑 공방에 앉아 아름다운 옷을 자아내는 것으로는 해낼 수 없는 일이다. 때로는 죽음과 마주해야하는 험한 일을 하기 위해 어머니의 곁을 떠난 적이 있었다. 어머니와 떨어져 지낸 것이 실로 얼마만의 일이었는지 마리아는 알지 못했다. 분명한 것은 어머니가 그립지 않았다는 사실 뿐이었다.
험난한 모험이었다. 환자를 치료하다가 피를 쏟기도 하고, 위기 끝에 목숨을 잃을 뻔한 일도 있었다. 죽음이 제 코 앞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마리아는 이를 악물었다. 살아남겠다. 살아남을 것이다. 그렇게 다짐했다.
왜 그렇게 살고 싶었는지는 몰랐다. 그저 살고 싶었다. 죽음보다 못한 삶일지라도 살아 숨쉬고 싶었다. 아픔이 오히려 살아있다는 감각을 생생하게 일깨워주었다. 어머니 곁에서는 느끼지 못한 삶이었고, 일상 속에서 잊고 있던 생이었다. 살고 싶었다.
거친 바람 탓이었을까. 죽음이 너무 가까워 위기의식이 느껴졌기 때문일까. 아니, 그저 비린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한 가지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렸다. 아주 강렬하고 지극히 단편적이고 의미 없는 기억이었다. 그는 새카만 파도 위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바람인지 물인지 분간하기 힘든 거센 폭풍우, 뇌까지 흔들리는 듯한 파도,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와 입 안을 가득 매운 소금기가 기억이 났다. 그저 그 뿐이었다. 무엇을 하는 도중이었는지, 어째서 배에 올랐었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 기억이 아직까지도 떠올랐다. 근 오년이 다 되어가는 일이었다. 마리아는 당장 배 위에 서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만큼 생생한 기억을 곱씹으며 눈을 깜빡였다. 정갈하고 아름다운 세르미어의 화원에는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오늘 마리아는 어머니와 함께 교회에 왔다. 주일 예배를 막 마친 참이었다. 사제인 마리아보다도 교회 일에 적극적인 루첼라이 부인이 자리를 비웠고, 마리아는 먼저 집으로 돌아갈지 어머니를 기다릴지 고민하고 있었다. 정원을 산책하기로 한 것은 순전히 바람이 쐬고 싶어서였다. 그러니 마리아가 그 아이를 만난 것은 전적으로 우연의 일치였다.
단아한 세르미어의 정원에는 사람이 제법 많았다. 주일이고 루첼라이 모녀가 다니는 이 곳은 세르미어 교단의 총본산으로 근방에서 가장 큰 교회니 당연한 일이었다. 마리아는 인파를 피해 구석진 곳으로 들어갔다. 사람을 피하다보니 정원을 가로질러 건물 뒤쪽 으슥한 곳에 발길이 닿았다. 일꾼들이나 오가는 이런 곳은 인적이 드물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때로 기묘한 상황에 놓이게 되기도 한다. 바로 지금처럼.
“사제님!”
저를 보자마자 울먹이며 달려온 여자아이를 마리아는 황당하게 바라보았다. 짧은 단발머리를 찰랑이며 다가온 소녀는 마리아보다 머리 반개는 작았고 앳된 뺨에는 붉은 생기가 감돌았다. 소녀는 동그란 눈 가득 두려움을 일렁이고 있었는데, 마리아는 그런 모습이 불쾌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마리아는 소녀의 애타는 손길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손은 떨리고 있었지만, 옷 위로 전해지는 체온은 따뜻했다. 그 느낌만큼은 나쁘지 않았다. 어머니의 손은 늘 건조하고 차가웠고, 같이 일하는 동료나 환자와 손을 맞잡을 일도 없었다. 마리아에게는 위로를 건낼 손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 정말 토벌대에 끼게 되는 건가요?”
“…….”
“그렇군요. 정말로 용 토벌전에 참가하게 되는 거군요.”
소녀는 체념한 듯 중얼거렸다. 마리아는 말 없이 소녀를 바라보았다. 예비 사제에게 주어진 복장을 단정히 갖춘 모습을 보니 떠오르는 게 있었다.
'아직 어린아이한테 너무 심한데요.'
'메디치 가문의 일입니다. 저희도 손 쓸 방도가 없군요.'
'자질이 풍부한 아가씨를 이렇게 보내다니….'
루첼라이 부인이 저택을 찾은 사제와 나눈 대화였다. 마리아는 어머니에게 절대 거역하지 않는 딸이었기에 부인은 마리아 앞에서 숨기는 것이 없었다.
린네 그라임스라고 했던가. 마리아는 루첼라이 부인이 언급한 이름을 잊는 법이 없었다. 그것이 어머니의 입에서 다시 나올 이름이건 그렇지 않건 그랬다. 그 이름이 어머니의 입에 올랐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기억할 가치는 충분했다.
저승길에 등을 떠밀린 소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어깨를 떨었다. 안쓰러울 정도로 떨리는 어깨를 마리아는 말 없이 지켜만 보았다. 자신을 누구로 착각했는지 몰라도 이 아이도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운명이란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을.
린네는 그저 서있을 뿐인 마리아의 앞에서 제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여전히 마리아의 팔목을 붙든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커다란 초록색 눈동자가 물기를 머금어 보석처럼 빛난다.
“많이 고민했어요. 부모님은 사제 같은 거 그만두라고 하셨거든요.”
린네는 코를 훌쩍였다.
“사실 그렇잖아요. 목숨만큼 중요한 건 없는 거잖아요. 저도 알아요. 제 실력에 가서 도움이 될지도 알 수 없다는 거요.”
마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딱히 할 말도 없었고, 괜히 입을 열었다가 분위기를 망치는 것이 꺼려졌다. 만날 사람이 누구였건 이 아이가 사지로 떠나야한다는 사실은 변할 리 없으니 잠시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정도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치만요.”
린네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저 도망치고 싶지 않아요.”
마리아도 눈을 깜빡였다. 앳된 소녀의 얼굴이 점멸했다.
“여기서 도망치는 건 제가 지금까지 배우고 익힌 것들을 모두 부정하는 것만 같아서 그러고 싶지 않아요.”
“세르미어께서는 늘 말씀하셔요. 배움을 두려워하지 말라. 앎은 곧 선이니. 두려움은 무지에서 오느니라. 저는 앞으로 제게 올 미래를 알지 못해요. 그러니 배워야해요. 앞길에 무엇이 있든, 배우지 않으면 나아갈 수 없어요.”
“사악한 용을 물리치고 무지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사제의 일이겠지만, 제게는 아직 그 자격이 없어요. 저는 아마 이 일을 해내지 못할 거예요.”
“죽을 생각은 없어요. 그저 제 힘이 모자랄 뿐이죠.”
“하지만 사제님.”
마리아는 문득 린네의 눈동자가 봄날에 돋아나는 새 이파리와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직은 여리고 연약하지만, 질기게 성장할 어린 잎사귀.
“저는 악의 위협에 굴복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렇게 하고 싶어요. 변명하듯 덧붙인 마지막 말은 혼잣말처럼 작았다. 마리아는 그런 린네를 담담하게 바라보았다. 소녀는 헤헤 웃더니 뒤늦게 부끄러워했다.
“아이참. 제가 너무 감상적이었죠. 이야기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저는 이만 해야할 일이 남아있어서 가볼게요.”
린네는 새삼스럽게 두 손으로 마리아의 팔목을 꼭 붙들고 몇 번이나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마리아는 뛰어가는 린네의 치맛자락을 시야 한 구석에 담으며 제 팔목을 내려다보았다. 화끈거리는 열기가 사라지질 않았다. 귓가에서 바람이 웅웅거렸다.

마리아는 곧 그 일을 잊어버렸다. 시계탑의 일상은 매일 정신없이 바빴고, 마리아는 몸이 좋지 않아서 사소한 일에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루첼라이 부인은 린네의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기 때문에 더더욱 기억할 필요가 없었다.
마리아가 기억의 바다 속에서 린네의 이름을 재발견한 것은 순전히 시계탑의 특수성 때문이었다. 토벌대에서 발생한 부상자가 시계탑에 실려왔다는 소리다.
“사제님.”
토벌대에서 떨어져나와 시계탑에 눌러앉은 환자는 흰 머리가 제법 근사한 중년의 남자였다. 그는 어디서 들었는지 마리아가 이전 토벌대에서 환자를 돌보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꾸만 말을 거는 그를 매번 쫓아내기도 귀찮아서 대충 이야기를 받아주었더니 이제는 마리아를 찾아오는 지경이 되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그게…….”
무어라 떠드는 것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수선에 매진하는 마리아의 귀가 익숙한 이름을 잡아냈다.
“방금 뭐라고 하셨나요?”
“이번 토벌대는 확실히 지원 상태가 좋지 않았어요. 어찌나 밥이 맛이 없던지….”
“그거 말고요.”
“네?”
그는 마리아가 반응을 보이자 눈에 띄게 기뻐했지만, 마리아가 무엇에 관심을 보인 건지 몰랐다. 한참을 끙끙거린 끝에 겨우 두 사람은 이야기를 맞춰갈 수 있었다.
“아아, 린네라는 아이 말이군요. 참 귀여운 애였죠. 너무 어려서 걱정했는데 제법 솜씨가 좋더군요.”
“그런가요.”
“어린 여자애가 그런 험지를 돌아다니니 다들 안쓰러워 많이 챙겨줬지요. 불행한 사고만 없으면 살아 돌아올 겁니다.”
그는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마리아는 왠지 그 말에 가슴이 일렁이는 묘한 경험을 했다. 환자는 한참이나 수다를 떨었지만 마리아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토벌대가 돌아왔다. 마리아는 자신과 아무 관계도 없는 토벌대의 귀환을 보기 위해 처음으로 혼자 외출을 했다. 본관 앞 정원은 토벌대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가 한창이었다.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고, 한쪽에선 시계탑과 협력하는 사제들이 환자를 돌볼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마리아는 자연스럽게 시계탑 공방의 사제들과 섞였다. 토벌대는 늦은 저녁에 도착했다. 멀리서부터 소란이 번졌다. 마리아는 이유 모를 초조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환자들이 다른 토벌대원들보다 빠르게 이송되어 왔다. 시계탑의 천막은 분주해졌다. 마리아는 차분하게 환자를 보면서 정문을 흘끔거렸다. 마리아만의 일은 아니었다. 토벌대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는 아마도 모두가 그럴 것이다.
대부분의 응급조치가 끝나갈 무렵, 토벌대 본대가 정원에 들어섰다. 사방에서 우는 소리와 비명 소리, 가족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마리아는 상대적으로 상처가 가벼운 환자를 보면서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엄마, 아빠!”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마리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어째서인지 잊지 못한 목소리와 얼굴이 거기 있었다. 울먹이는 소녀가 짐을 내팽개치고 달려갔다. 곱게 차려입은 중년 부부가 마찬가지로 울먹이며 소녀에게 달려들었다. 마리아는 세 가족이 서로를 부둥켜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진찰을 받던 환자가 마리아를 부를 때까지 계속 그랬다.
세 가족은 곧 마리아의 앞을 떠나갔다. 토벌대를 위한 식사가 준비되었다는 외침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마리아는 그들이 곁을 떠나는 것을 어쩐지 아쉽게 느끼며 환자를 보았다. 린네는 다친 곳이 없는 듯했다. 진찰을 받아보자는 부모의 요청에도 돌아오는 길에 검사를 받았다며 사양했다. 마리아는 왜 가슴이 술렁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만찬이 시작되자 시계탑의 천막은 금방 한가해졌다. 본대까지 걸어올 수 있는 환자 중에 중환자는 없었고, 그나마도 처치를 끝내놓으니 다들 천막을 떠났다. 마리아는 빈 천막에 앉아있었다. 만찬이 끝나고 천막을 걷으면 시계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마리아.”
낯익은, 아니, 친숙한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그는 갈등했다. 아까부터 술렁이던 가슴이 폭풍우를 만난 듯 날뛰고 있었다.
“얘, 마리아.”
루첼라이 부인은 그가 제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여겼는지 다시 한 번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 목소리가 아주 멀었다.
바람이 불고 있었다. 파도가 높게 일고, 바람인지 파도인지 분간하기 힘든 폭풍우가 몰아쳤다. 배가 뒤집히지 않게 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어서 손에 들고 있는 것이 검인지 총인지도 몰랐다. 바다는 목숨을 탐내 날뛰었고, 그는 살아남기에 바빴다.
“마리아. 대답을 해야지!”
마침내 루첼라이 부인이 소리를 쳤다. 늘 우아하고 차분한 부인 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는 그제서야 자신을 부른 것이 루첼라이 부인임을 알아챘다.
아, 그랬다. 루첼라이 부인이었다. 그 날 자신을 건져낸 것은.
그는 천천히 돌아섰다. 비로소 얼굴을 마주한 루첼라이 부인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정신을 빼놓고 있구나. 불렸으면 대답을 하렴.”
그는 침묵했다. 루첼라이 부인의 고운 이마에 주름이 졌다.
“저는 마리아가 아니에요.”
그가 말했다. 루첼라이 부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부인은 당황한 듯 어색하게 웃었다.
“무슨 소리니, 얘야.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보구나.”
그는 처음으로 부인 앞에서 인상을 찌푸렸다. 루첼라이 부인, 아니, 자케트 루첼라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무래도 네가 많이 아픈가보구나.”
자케트가 말했다. 노부인의 눈빛은 장군과도 같았다. 데일 듯이 뜨겁게 타오르는 눈길을 정면으로 마주보았다.
“아니요. 루첼라이 부인. 저는 아프지 않아요.”
“마리아!”
“당신의 마리아는 죽었습니다, 부인.”
그는 가볍게 눈을 감았다 떴다. 금빛으로 빛나는 눈동자가 석양을 받아 붉게 빛났다.
“나는 이리누슈카(Иринушка). 바다와 겨루고 바다를 다루는 어부입니다.”
바람이 불었다. 파도는 거칠었다. 양손에는 장총과 검의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거대한 괴물이 배 밑에서 맴돌았다. 두려웠다. 그리고 즐거웠다. 바다와의 목숨을 건 사투가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리누슈카의 삶이었고, 모든 것이었다. 소녀는 여인이 되었다.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리누슈카는 파도 앞에 섰다. 바다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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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fad
,

눈부시게 맑은 날이었다. 커다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밝아서 에이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옆에서 재잘거리던 와타루가 그런 에이치를 보고는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왜 그러시나요? 불편한 곳이 있습니까? 이 광대의 재주에 무슨 문제라도?”
“그런 거 아니야.”
에이치는 피식 웃었다. 와타루가 얼굴을 바짝 들이댄 덕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배려해준 걸까. 조금 마음이 따뜻해진다.
텐쇼인 에이치가 갑작스런 발작으로 입원한지도 벌써 사흘째였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병실을 오갔다.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토리와 유즈루, 반 친구들에 홍차부 후배들까지. 작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인선의 방문객들이 오갔고, 우연히 마주친 이들은 서로 얼굴을 찌푸리거나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귀여운 일학년 후배들이 방문한 날에는 발작이 있어서 지쳐있는 상태였는데, 맑고 명랑한 목소리를 들으니 어찌나 기뻤는지 모른다.
“에이치,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까?”
와타루가 말했다. 언제 움직인 건지 에이치에게 햇빛이 드는 자리에 커튼이 쳐져 있었다. 와타루는 에이치의 허벅지에 팔꿈치를 얹고 호기심 많은 소녀마냥 턱을 괴고 있었다. 의뭉스러운 미소를 띈 그에게서는 거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 이것도 무슨 기술이겠지 생각하니 신비롭기 짝이 없었다.
“와타루, 널 생각하고 있었어.”
거짓이 아니었다. 병문안을 온 사람은 많았다. 그러나 첫날부터 꾸준히 에이치의 곁을 지켜준 것은 와타루였다. 그는 면회 금지 명령을 받고 홀로 쓸쓸히 잠든 에이치의 병실에 몰래 숨어들었다. 새벽녘에 눈을 떠서 어찌나 놀랐는지 다시 발작이라도 일어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의사가 알면 기겁하겠지만, 에이치는 솔직히 와타루의 행동이 기뻤다. 모험을 하는 기분이라 두근거리기도 했다.
“호오, 절 말인가요? 어떤 생각인가요?”
와타루는 동화에 나오는 고양이처럼 고개를 다소 무서울 정도의 각도로 꺾었다. 그 모습을 에이치는 그저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와타루의 기예는 끝이 없어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랍기보다는 그저 신비로웠다.
“네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
“황제폐하를 기쁘게 하는 일이야말로 광대의 사명이랍니다. 아프고 힘들때면 외쳐주세요. 히비티 와타루!”
침대 위를 데구르르 굴러 원심력으로 몸을 세우고, 한 발을 곧추세운 채 세 바퀴를 돌아 한 팔을 높이 치켜든 채 아슬아슬한 자세로 선다. 에이치는 와타루의 묘기를 웃으며 감상했다.
“이제 황제가 아니라니까.”
담담하게 덧붙인 말에 와타루가 호들갑을 떤다.
“황제라는 호칭을 싫어하시나요? 이 와타루, 에이치가 황제의 역할을 제법 즐기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한층 흥이 났지요. 역할을 즐기는 배우와 함께하는 무대만큼 즐거운 것은 또 없으니까요.”
옆에 케이토가 있었다면 틀림없이 얼굴을 구겼을 테다. 와타루는 말을 잇는 사이 아무 이유 없이 허공으로 뛰어오르고 빙글빙글 돌며 포즈를 잡았다. 사이사이 놓여있는 기물을 스치지조차 않는 재주가 용했다.
“글쎄.”
에이치는 웃으며 살짝 시선을 내렸다.
“솔직히 말하면 싫지는 않았다고 생각해.”
“추측형이군요?”
“응. 그도 그럴 것이, 나는 황제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니었으니까.”
조용히 답하는 에이치는 평소와 같았다. 망가져버린 과거의 계획을 이야기하는 에이치의 표정은 반 아이들의 소란을 구경하며 웃음짓는 그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와타루는 알고 있지? 내가 뭘 꿈 꾸었던 건지.”
“독심술은 할 줄 모릅니다.”
에이치는 킥킥 웃곤 와타루를 쳐다보았다. 겨울철 하늘처럼 여리고 차가운 시선이 와타루의 흐린 보랏빛 눈을 꿰뚫었다.
“감사하고 있어. 너희들의 협조에. 너희가 순순히 협조해주지 않았다면, 나는 틀림없이 마지막까지 버티지 못했겠지.”
“딱히 협조한 것도 아닙니다만.”
에이치는 다시 웃었다. 그런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미움 받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에이치가 와타루의 목소리를 듣고 가졌던 작은 희망일 뿐이었다.
'쉿. 안 돼요. 그런 걸 말하면. 그랬다간 저는 당신을 경멸해버리고 말겁니다.'
아득한 추억 속 와타루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그래, 그때도 지금하고 비슷했다. 쓰러져서 보건실에 누워있는 에이치를 남몰래 찾아온 와타루는 어김없이 홀로 쇼를 벌였다. 와타루에게 무대가 아닌 곳은 없었기에. 무대라는 이름이 아닌 무대를 그는 훌륭하게 소화했다.
'저는 그저 악역인 걸로 충분한 건가요?'
그가 물었었다. 완전히 소진된 체력에 시한폭탄까지 안고 있던 에이치는 겨우 눈만 뜬 상태였다. 어쩌다 자신이 여기에 누워있는지, 지금 상황은 어떤지 정리해보는 중이었다.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에이치는 다시 쓰러질 것처럼 놀랐고, 와타루는 즐거운 듯 짐짓 못마땅한 척을 했다. 그게 그가 자신에게 부여한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배우를 모른척하시면 곤란합니다. 당신이 준비한 무대가 아닌가요. 스스로 주역이 되기 위해 자신만의 무대를 준비하는 적극성이 훌륭합니다. 솔직히 저는 반했다고요. 그런 당신이 절 홀대하면 서운해서 울다가 죽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서운함을 연기하는 그의 목소리는 진지하면서도 장난스러웠다. 어딘가 이것이 단순한 연극이 아님을 시사하는 듯한 우스꽝스러움이 있었다.
'자자, 이제 역할에 충실해지세요. 어설픈 표정은 감추고 가면을 씁시다. 당신에게는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요?'
황망한 표정을 애써 감추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에이치는 언제나처럼 우아하고 아름답게, 침착하고 냉정하게 질문한다.
'이런 곳까지 무슨 용건일까, 히비키 군. 내일 라이브에 대해 질문이라도 있어?'
'물론입니다. 아아, 몇 번이나 대본을 훑어도 제 역할을 잘 모르겠어서요. 천재라는 소리까지 들어보았지만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이를 어찌해야하나 고심하다가 연출가이자 주연 배우인 당신에게 질문을 하러 왔답니다.
이 히비키 와타루, 어떤 역할이라도 연기해보일 자신은 있습니다만, 나이프에 찔려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악당답게 쓰러져야할지 당신의 품에 안겨 눈물 섞인 키스를 해야할지 모르겠어서요. 혹시라도 잘못된 연기를 했다간 모처럼 큰 무대가 망가져버립니다♪'
'과장이 심하네. 『fine』는 리더가 따로 없지만 나는 특별한 역할이 없는 덤인걸. 나보다는 다른 멤버들에게 묻는 게 어떨까.'
와타루가 오만하게 웃었다. 섬찟할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이 고소를 머금자 창밖에서 들어오는 햇살마저도 날카롭게 벼려졌다. 에이치는 따가운 햇살에 눈살을 찌푸렸다.
'바보취급하지 마시지요. 이런 각본이지만 주연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부족한 배우는 아니랍니다. 당신이 적으로 삼은 상대는 만만하지 않아요, 텐쇼인 에이치 군.'
에이치는 그 순간을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어째서인지는 분간할 수 없었다. 와타루가 소름끼치도록 아름다워서? 아니면 그가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부른 순간이기 때문에? 어느 쪽이건 와타루는 넋을 잃은 에이치를 향해 연민을 보냈다.
'피곤해보이네요. 하긴 병상이니까요. 쓰러졌다지요?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떠들썩한 걸 좋아해서요.'
그 순간부터의 기억은 흐릿했다. 에이치는, 자신은 뭐라고 대답했더라?
'…힘내주세요. 무대를 연출한 당신에게는 누구보다도 먼저 내일을 그릴 기회가 주어질 거라고요. 놓치면 아깝잖아요?'
“에이치, 에이치.”
누군가 어깨를 흔들었다. 보건실 창문을 뒤로 하고 선 2학년 와타루의 그림자에 병실 창문을 등진 3학년 와타루의 그림자가 겹쳤다. 에이치는 지금 자신이 2학년인지 3학년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와타루는 드물게 진지한 얼굴이었다. 에이치는 조금 당황했다. 정말 위험할 때가 아니고서야 와타루는 그런 표정을 하지 않았다. 어째서? 방금 자신은….
아.
에이치는 웃었다. 자신은 아직 입원 중이었다. 와타루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괜찮아. 조금 피곤한 것뿐이야.”
“에이치.”
“와타루는 은근히 걱정이 많다니까.”
왠지 웃음이 나왔다. 지나간 추억이 떠오르자 왠지 그렇게 되었다. 와타루의 눈빛이 일순 흐려졌다.





와타루는 눈을 가늘게 떴다. 눈꺼풀 사이로 다소 흐리게 비치는 에이치의 색이 옅었다. 창백하기 짝이 없는 낯이 가슴에 박히는 듯하다.
히비키 와타루는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가진 바 재주가 탁월해 무엇이든 해낼 수 있었다. 얻고자 하면 얻을 수 없는 것이 없었고, 이루고자 하면 이룰 수 없는 것이 없었다. 주변에는 늘 사람이 따랐다. 대부분 와타루의 요란한 성질을 오래 버티지 못하고 떠나갔지만 그것이 그리 슬프지는 않았다. 와타루에게도 그런 이들은 필요가 없었던 탓이다. 그래서 와타루는 만나는 모든 이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전부 보였다. 그건 시험이었다. 이걸 전부 보고서도 내 곁에 있겠느냐는 메세지였다.
와타루의 메세지는 강렬해서 못 알아듣는 사람이 드물었다. 언제부터인가 와타루의 곁에는 사람이 없었다. 멀리서 동경의 눈빛을 보내는 팬은 수없이 많았으나 스쳐가는 인연일 뿐이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바란 바였다.
와타루에게 처음으로 벗이 생긴 것은 작년의 일이다. 그것은 의도치 않은 사고 같은 것이었다. 사고를 일으킨 것은 바로 눈 앞의 이 소년이다.
텐쇼인 에이치.
꿈이 크고 희망을 품지 않는 소년. 천진난만한 얼굴로 누구보다 잔인한 계획을 꾸미는 야심가. 그는 누구보다 원대한 미래를 그렸고,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꿈의 계단을 올랐다. 비록 그 끝에서 그가 무엇을 얻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와타루.'
에이치가 웃었다.
'와타루.'
에이치는 울었고,
'와타루….'
에이치는 절망했다.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악에 받친 사투도 감동의 순간도 보았다. 에이치가 와타루를 적으로 세운 그 순간부터, 와타루는 줄곧 에이치와 함께였다.
그렇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텐쇼인 에이치의 마음 속에는 커다란 벽이 있었다.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바꾸고자 하는 여린 소년의 마음 속에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다. 와타루는 그것을 알기에 에이치와 함께하기로 결심했다. 그건 정말이지 쉬운 결정이었다.

역시 작년의 일이다. 신입생이 들어오고 새학기가 시작되기 조금 전, 오기인 토벌이 끝나고 모든 것이 소강 상태였던 그 시기에, 와타루는 에이치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대단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심심했다. 친구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학교는 학생회가 제도를 개편한다고 바쁜 것 외에는 조용했다. 학생회는 아직 가라앉지 않는 분란과 다툼을 사정을 묻지 않고 잡아들였다. 학생회장이 된 에이치는 와타루와의 경연 이후 모습을 보이지 않았지만, 부학생회장인 케이토는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학교에 나와 학생회를 움직였다. 분위기는 날이 갈수록 삼엄하고 고요해졌다.
와타루는 연극부실에 들어앉아 그 모든 변화를 흘려보냈다. 알 바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와타루의 길은 연극이었고 업계에서 러브콜을 받고 있는 입장에서 교내 제도에 연연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신경쓰이는 것은 있었다.
'그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요.'
처음엔 그저 사소한 의문이었다. 와타루가 만나본 텐쇼인 에이치는 흥을 탈 줄 아는 사람이었다. 와타루의 요청에 화를 내지 않고 박자를 맞춰준 것만 봐도 그랬다. 비록 실패하기는 했지만 에이치의 계획에는 낭만이 가득했다. 그랬기에 와타루는 그가 기획한 무대에 서기로 마음 먹었던 것이다. 좀 더 멋지고 재밌는 미래를 보고 싶었다. 지금처럼 삭막하고 숨 막히는 학교가 아니라 즐길거리가 많고 흥겹게 뛰어놀 수 있는 미래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고보니 『fine』멤버 두 사람이 전학을 갔다고 했던가요.'
어쩌면 그래서일지도 몰랐다. 마지막 경연에서 보았던 에이치의 유닛은 무너지기 직전의 성이었다. 그때 그 분위기가 반영되어버린걸까. 그런 거라면 실망인데. 파랑새 군의 협조를 얻을 수 있도록 도왔어야 했는지도 몰랐다. 친구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 조금 심술을 부린 것뿐이었는데 이런 결과가 될줄 알았다면 끼어들지는 않았을지도?
'뭐, 재미있긴 했으니까요.'
와타루는 홀로 남은 연극부실 소파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늘상 귀찮게 굴던 호쿠토가 없어서 한가했다. 쫓아내려고 해도 쫓아지지 않는 소년을 와타루는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었다. 연기는 못하지만, 어쩌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지 모른다. 와타루도 호쿠토도 연극과가 아니고 이곳은 그저 동아리일 뿐이니까.
'예상치 못한 사고만큼 즐거운 것도 없으니까요.'
와타루는 뺀질뺀질하게 말하고는 히죽 웃었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에이치가 왜 학교를 이런 식으로 방치해두는지 궁금하다면 물어보면 된다. 와타루는 폴짝 뛰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이치는 입원 중에도 이따금 남몰래 학교에 나타난다. 부잣집 도련님의 취미생활인지 갑갑한 병원 생활의 작은 활력소인지는 모르지만 그랬다. 그리고 남몰래 연습실을 빌리는 것이다. 와타루는 에이치가 주로 사용하는 연습실이 어딘지 알았다.
발걸음도 가볍게 와타루는 그곳으로 향했다. 에이치가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가보고 없으면 내일 또 가면 될 일이었다. 지금 와타루는 심심했고, 그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 가는 길에 다른 재밌는 일이라도 발견하면 더 좋다.
기웃.
학생회실을 슬쩍 훔쳐보고,
기웃,
에이치의 교실도 한 번 훔쳐보았다. 에이치는 없었다. 와타루는 실망하지 않았다. 어차피 두군데 모두 들르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린아이처럼 폴짝거리며 뛰어가는 와타루를 지나가는 학생들이 괴이한 것을 보는 듯이 보았다. 와타루는 그저 설렐 뿐이었다. 에이치가 있을까. 있다면 어떤 상태일까. 이번엔 어떤 이야기를 나눌까. 어떤 역할을 주면 즐거워할까. 오기인 친구들도 잘 맞춰주지 않는 와타루의 장난을 받아준 에이치였다. 설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연습실에는 사용중 팻말이 걸려 있었다. 심장이 쿵쾅쿵쾅 소리를 냈다. 와타루는 소리없이 문을 열었다. 살짝 안을 들여다보고 만약 에이치가 있으면 깜짝 놀래켜줄 생각이었다. 다른 사람이면? 우선 보고 생각하자.
문 틈으로 먼저 머리카락이 들어가고 그 다음으로 하얀 손가락이 모습을 드러냈다. 『fine』의 곡이 들려왔다. 와타루는 안을 들여다보기 전에 먼저 음악을 즐겼다. 아, 에이치의 목소리다. 키득키득 웃고는 마침내 고개를 들이밀었다.
어라?
연습복을 입은 에이치가 연습실 한가운데 서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우두커니. 넋을 잃은 듯한 표정이 거울에 비쳤다. 와타루는 조용히 연습실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와타루가 거기 서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이치는 반응이 없었다. 그는 멍하니 서서 거울을 보다가 쓸쓸하게 웃었다. 노래를 하려는 듯 입을 벌렸다가 다물고, 다시 입을 벌렸다 다물기를 몇 번. 곧 그는 포기한 듯이 고개를 돌린다.
'반갑습니다, 텐쇼인 군.'
와타루는 양 손을 흔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한층 에이치의 초췌한 얼굴이 잘 보였다. 푸른 눈이 시꺼멓게 죽어있었다. 시체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낯빛이 그가 왜 학생회에 얼굴을 비추지 않았는지 설명해주었다.
'히비키 군…?'
에이치가 중얼거렸다. 질문이라기보단 혼잣말이었다. 뒤늦게 그의 눈이 커다래졌다. 와타루는 개의치 않고 성큼성큼 에이치에게 다가갔다.
'이야. 아프다고 들었는데도 연습하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하기사 『fine』는 이제 학교를 대표하는 유닛이니까요.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요.'
'『fine』는 이제 없어.'
에이치가 속삭이듯 말했다. 와타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해산이야. 오기인은 쓰러졌고, 새로운 규칙이 들어서기 시작했는걸. 학생회는 케이토가 맡아주었으니 케이토의 유닛인 홍월이 학교를 이끌어줄거야.'
'그게 무슨 말인가요. 당신은요? 쓰러질 정도로 힘내지 않았습니까. 무대의 주역은 하스미 군이 아니라 당신이었을텐데요. 주인공이 되고 싶었던 게 아니었습니까?'
'놀리지 마. 전부 실패한 걸 봤잖아.'
에이치는 쓰게 웃고 와타루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한쪽에 놓인 물통을 들어 목을 적시더니 와타루에게 내밀었다.
'마실래?'
'괜찮습니다. 그보다 실패라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나는 실패했어. 히비키 군. 감히 너희들 같이 위대한 천재들을 깎아내리려 했던 벌이겠지. 나는 이제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에이치는 그제서야 다시 와타루를 보았다. 맑은 겨울날의 하늘 같던 눈동자에 물기가 어렸다. 와타루는 순간 말을 잊는다.
'미안해. 너희들에게 악몽을 선사한 건 나야. 마음껏 원망하도록 해.'
생각지도 못한 사과였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와타루로서는 거의 겪어본 적이 없는 감정이었다. 정말, 정말 이상한 일이지만,
'그게 답니까?'
와타루는 화가 났다.
'그게 다야. 미안해. 지금은 너희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하지만 사람들 눈에 띄지만 않는다면 무엇이든 줄게. 돈이 제일 좋겠지? 계좌를 불러주겠어? 마음에 찰지는 모르겠지만 원하는 만큼 보상을 할테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와타루는 제가 뭘 하는 건지 몰랐다. 저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다. 에이치의 멱살을 잡고 벽으로 밀어붙였다. 환자에게,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사람에게 할 행동이 아니었다. 에이치가 신음하는데도 마음이 가라앉기는 커녕 열이 올랐다.
'내가, 우리가 고작 그까짓 보상을 받으려고 당신에게 승복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진심으로? 당신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까?'
'히비키….'
'입 다무세요. 그 입으로 제 이름을 부르지 말란 말입니다.'
와타루가 윽박질렀다. 에이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와타루는 한동안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에이치를 벽에 누르고 서있었다. 너무 화가 나니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할 말이 너무 많은데, 무슨 말을 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평정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와타루는 힘겹게, 정말로 힘겹게 에이치를 놓아주었다.
에이치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와타루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이건 연극이 아니었다. 와타루는 피에로가 아니었고, 에이치는 배우도 연출자도 아니었다. 그곳은 무대가 아니라 현실의 한복판이었다. 와타루는 고등학교에 입학해 처음으로 역할이 아닌 자신으로 섰다.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왔습니다.'
'뭔데?'
와타루의 질문에 에이치가 고개를 들었다. 저번 대화가 떠올랐는지 조금은 여유가 돌아온 듯한 모습이었다.
'어째서 학생회가 수행하는 일에 참여하지 않습니까?'
'그건….'
에이치는 복잡한 낯으로 눈을 감았다.
'미안해. 그것말고는 할 말이 없어.'
'사과하지 마세요. 당신은 사과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에이치는 힘겹게 심호흡을 했다. 다시 눈을 떠 와타루를 바라보는 눈에는 조금쯤 냉정이 돌아와있었다.
'몸이 아파서 참여할 수가 없었어. 나는 아직 입원 상태야. 가끔 외출하는 정도는 문제가 없지만 본격적으로 활동하기엔 무리가 있어. 사실은 외출도 허락을 받을 수 없어서 몰래 나왔으니까.'
'죽으려고 작정한 겁니까?'
'그럴 리 없잖아. 몸이 녹스는 느낌에 좀이 쑤셨을 뿐이야.'
'당신….'
아프다는 변명에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텐쇼인 에이치가 병약하다는 사실은 초반부터 소문이 나있었다. 그저 화가 났다.
'이렇게 쓰러져 있을 거면 대체 왜 사건을 일으킨 겁니까.'
물을 생각은 없었다. 아픈 사람에게 왜 아프냐고 묻는 것만큼 의미가 없는 질문이었다. 그래서 에이치가 아픈 표정을 지었을 때는 함께 마음이 아팠다.
'판단 미스야. 내게 조금 더 체력이 있을 줄 알았거든.'
애써 웃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대사가 틀렸습니다.'
와타루가 말했다.
'체력 같은 건 진작에 계산하고 있었을 겁니다. 처음부터 그것을 고려하지 않았을 리가 없어요. 전교생이 당신이 병약하다는 걸 아는데, 그 정도로 패널티가 큰 문제를 당신이 고려하지 않았을 리가요.'
'그래?'
'당신이 계산하지 못한 건, 당신의 체력이 아니라 우리, 오기인의 능력이겠지요. 틀립니까?'
와타루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광기 어린 삐에로는 어린아이를 겁주는 게 제 일이라는 듯 섬뜩하다.
'슈가 그렇게 쓰러진 건 우리에게도 예상 밖의 일이었습니다.'
'뭐?'
'슈는 오만하고 자존심이 강하지요. 그렇기에 우리는 줄곧 경고했습니다. 그에게. 당신을 주의히라고. 고집부리지 말고 대책을 세우라고요.
그가 귀 기울여 듣지 않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굳이 막을 필요는 느끼지 못 했지요. 당신도 알다시피 우리는 처음부터 그리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이어지지 않았을 인연이 오기인이라는 이름 하에 잠시 맺어졌을 뿐이니까요.
우리 다섯을 하나로 묶고자 노력한 것은 슈였습니다. 우리는 그의 노력에 의해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소중하기 여겼지만, 동시에 알지 못했습니다. 어찌 알겠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하는 친구가 아니었는걸요.
슈가 그렇게 무너졌을 때 우리는 당황했습니다. 저도, 레이도, 카나타도 마찬가지입니다. 슈는 오만한만큼 강인해보였기에 우리는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괜찮으리라 여겼습니다. 우리가 걱정한 것은 오히려 나츠메 군이었지요. 그는 어리고, 아직 불쾌한 꼴을 당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몰랐던 겁니다. 슈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요.
내 친구들과 있었던 다른 라이브 대결을 기억할 겁니다. 슈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당신에게 패배한 것에 아파하지 않았습니다. 못마땅해 했을지는 몰라도요. 저와 제 친구들이 아파한 것은 당신에게 패배하고 오명을 뒤집어쓴 탓이 아닙니다.'
그간 쌓인 것들을 쏟아내듯이 한참을 떠들었다. 와타루의 눈에도 울분의 증거가 남아있었다. 에이치가 그것을 홀린듯이 바라보았다. 와타루는 그 시선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넘겼다.
'우리가 슬퍼한 이유는 친구를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었다. 그들은 오만했기에 그토록 어리석었다. 겨우겨우 얻은 친구 하나를 지키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었다. 다른 형들이라도 살려보겠다며 애쓰는 막냇동생의 손발을 묶어또 한 번 상처입힐만큼 어리석었다. 그것이 그들에게 상처라는 것을 알면서도 행할 수 밖에 없을만큼 어리석었다.
와타루도, 레이도, 카나타도 그랬다. 그들은 제각각의 방식으로 뛰어났으나 제각각의 방식으로 어리석었다.
레이는 자신의 손길을 필요로 한다는 말이 명분임을 알면서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라도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러느라 제 주변 사람을 챙기지 못했다. 심할 때는 자신의 몸조차 챙기지 못할 때가 많았다.
카나타는 사람의 마음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무엇이든 이루어낼 힘이 있어도 무엇을 해야하는지 모르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카나타는 모두를 사랑했지만,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와타루는.
와타루는 이를 악물었다. 자신의 죄가 이리도 깊었다.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갚을 수 없을 뿐이다. 그것을 에이치가 모르는 게 화가 났다. 말도 안 되는 분노임을 알면서도 화가 났다.
'저는 슈를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누가 어떻게 되더라도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여겼지요. 그저 지금 이 순간 웃고 있으면 충분하다고 여겼습니다. 마음 속 깊은 곳에 무엇이 있어도 상관이 없었어요. 슈는 제 앞에서 웃고 있었고, 저는 그걸로 만족했습니다. 어리석었어요. 슈가 어떤 사람인지, 어째서 그토록 열광적으로 활동하는지 좀 더 관심을 가지고 보았어야 했습니다.'
에이치는 무심코 손을 뻗는다. 와타루의 보랏빛 눈동자에서 물웅덩이가 차올라 넘치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뺨에 손을 대었다가 불에 댄 듯 놀라 떨어진다.
'당신은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습니다.'
와타루는 중얼거렸다. 와타루는 그게 에이치에게 하는 말인지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몰랐다.

“슬슬 검진 시간이야.”
에이치가 말했다. 그 말에 와타루도 시계를 쳐다보았다. 곧 의사가 들이닥치면 면허가 금지된 시간에 외부인이 드나들었다는 것을 들키게 된다. 그건 와타루에게도 에이치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었다. 경비가 삼엄해져서 들어올 수 없어지면 곤란했다.
“제가 어서 가기를 바라는 겁니까?”
와타루가 휴대폰을 만지며 말했다. 전혀 불만이 없는 듯 그저 장난스러운 목소리였다. 에이치가 피식 웃었다.
“내일도 올거지?”
“물론이죠. 주인의 곁에 있는 것이 광대의 의무랍니다.”
“넉살은.”
와타루는 흘긋 눈을 들어 에이치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에이치가 왜 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와타루는 그저 웃으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몰래 오는 상황에 열기구를 병원 근처에 대어놓을 수는 없어서 조금 먼 곳에 둔 상태였다. 때맞춰 불러오려면 연락을 해야했다. 슬쩍 창밖을 보니 멀리서 익숙한 실루엣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에이치, 아기씨(姫君)가 들떠있던데 무슨 이야기를 했던 겁니까?”
“별 거 아니야.”
“숨겨야하는 건가요?”
“『fine』일정을 조금 알려줬어. 그랬더니 금세 들떠서는 꺄꺄 소리를 지르지 뭐야.”
에이치가 즐거운 듯 웃었다. 와타루의 미소가 얼핏 굳었다.
“순회 공연 이야기였나보네요. 어쩐지 제게는 비밀이라고 큰소리를 치더라니요.”
“그랬어?”
에이치가 키득거렸다. 와타루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창틀에 가볍게 기대었다. 기구가 가까이 날아오고 있었다.
“에이치.”
“응.”
“무리하면 안 됩니다.”
“걱정 마. 그래서 이렇게 얌전히 누워있는 거잖아.”
“쓰러졌던 사람이 그렇게 말씀하셔도 말이죠.”
와타루는 어깨를 으쓱였다. 에이치는 듣지 못한 것처럼 웃고만 있다.
“내일 봐.”
창밖을 본 에이치가 먼저 인사를 했다.
“안녕히.”
와타루는 언제나 그렇듯 우아하게 인사를 했다.
가벼운 몸이 훌쩍 창밖을 날았다. 뚝 떨어지는가 싶더니 창밖을 지나던 열기구가 출렁거렸다. 에이치는 후다닥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달려갔다. 기구에 연결된 밧줄을 잡은 와타루가 묘기하는 듯한 포즈로 에이치에게 인사를 건냈다. 에이치의 얼굴에 활짝 웃음꽃이 피었다.
“내일 꼭 와야해!”
바람에 색이 옅은 머리칼이 살랑살랑 흔들린다. 와타루의 사랑을 담은 인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바람이 서늘하고 햇살이 따뜻한 날이었다. 에이치는 입이 아플만큼 웃었다. 행복한 웃음이었다.

 

 

 


아! 몰라 수정 안해! 🌱

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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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급시 폭주하는 신기사를 감금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회의실 지하 공간은 지독히 답답한 공간이었다. 공기는 텁텁하고, 실내에는 기분을 환기시킬만한 물건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지암은 솔직히 이런 곳에서 태연히 잠이나 자고 있는 미캉이 놀라웠다. 역시 가둬둔 거 아니야? 의심이 뇌리를 스친다.

그들, 그러니까 세츠와 지암이 이곳을 알게 된 건 우연한 기회였다. 지암이 누르라는 어린 신기사가 툭하면 회의실로 향하는 것을 의아하게 여긴 것이 시작이었다. 누르는 제법 어린아이가 많은 중앙청에서도 눈에 띄는 신기사였다. 히로와 함께 중앙청 초창기 멤버라는 누르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회의에 끼거나 중앙청 주요 인사들과 어울리는 일이 많았다. 호기심이 많아서 위험한 곳에도 곧잘 자원했고 붙임성도 좋았다.

그런 누르가 특별히 사람이 없는 시간을 골라 회의실에 출입하는 모습은 눈길을 끌었다. 앙투아네트나 안화에게 물어도 수상하게 웃을 뿐이다. 결국 지암은 누르를 직접 붙들고 물어야했다.

「회의실 지하에는 최초의 지휘사가 있다.」

그게 누르에게서 얻은 정보였다. 최초의 지휘사.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자세한 사정을 묻고 싶었지만, 누르는 히로의 부름을 듣곤 쪼르르 달려가버렸다.

지암은 고민 끝에 자신이 알아낸 것을 세츠에게 털어놓았다. 늘 그렇듯 세상에 심각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웃던 세츠의 얼굴에선 웃음기가 사라졌다.

“회의실 지하라고?”

“응. 무슨 문제라도 있어?”

“거긴 폭주하는 신기사나 지휘사를 억류하기 위한 장소야. 안화가 만약을 대비해 만들었어. 중앙청에서 오래 있었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아는 장소지만 한 번도 사용된 적은 없을텐데.”

“뭐?”

두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일어난 것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이 없을 정도로 동시였다.

 

 

그들이 이 자리에 이르기까지 있었던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 이야기는 지금 중요하지 않다. 그닥 재미도 없을 것이다. 세츠와 지암은 그저 남몰래 지하실의 문이 열려있다는 것과 그곳에 앳된 얼굴의 여자아이가 잠들어있는 것을 확인했을 뿐이니까. 그 사이 중앙청 지키미들과 작은 갈등이 있었지만 누가 그런 것을 궁금해하겠는가.

어쨌든 지암은 지금 회의실 지하에 있었고 최초의 지휘사라던 소녀는 그의 눈 앞에서 본격적으로 다시 꿈나라로 떠나려는 듯했다. 잠깐, 꿈나라?

“이봐. 일어나요.”

지암은 미캉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적당히 성희롱이 되지 않을만한 부위를 콕콕 찔러보았지만 인상조차 찌푸리지 않는다.

“저기요.”

정말로 미동조차 없다. 지암은 고개를 푹 숙였다가 일어나 작은 침대에 엉덩이를 걸쳤다. 작고 답답한 방에는 최소한의 생활을 위한 물건 외에는 놓여있는 게 없었다. 한쪽 구석에는 어린아이라도 몸을 들이밀 수 없을듯한 작은 환풍구가 보였고 테이블과 의자가 보였다. 그게 다였다.

“자려고 나 부른 거예요?”

왜일까. 그게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치겠네, 정말. 결국 지암은 소녀를 깨우기를 포기했다. 그대로 다시 지하실을 빠져나가려는 순간,

“가지 마.”

간신히 놓치지 않을, 작은 목소리가 발목을 잡아챘다. 지암이 돌아서자 미캉이 이불에 폭 파묻힌 채, 배게에 얼굴을 문지르고 있었다.

“저번에도 찾아왔었지. 왜?”

소녀가 속삭였다. 지암은 간신히 그 말을 알아들었다.

“당신이야말로 왜 이런 데 있는 거예요?”

머릿속을 맴도는 질문은 많았다. 하지만 다른 질문은 아직 일렀다. 지암은 어렵싸리 말을 뱉고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일련의 사건을 생각해보면 미캉이 이 장소에 갇혀있다고 생각하기는 힘들었다. 문은 열려있었고 그는 존중받았다. 그러나 단순히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일 수 없는 것은 아마도 이 방 안의 풍경이 클 것이었다.

삭막하기 짝이 없는 풍경은 사람이 살아가기 위한 공간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미캉은 언제나 졸려보였고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그랬기 때문에 세츠는 그토록 간절했던 것이다. 오랜 친구에게 불 같이 화를 내고, 소중한 지휘사를 데리고 위험할지도 모르는 곳에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지암은 세츠의 심정에 동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상냥함과 자기파괴적인 배려는 지암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미캉은 지암과 눈을 맞췄다. 느리게 깜빡이는 눈꺼풀 사이로 보이는 검은 눈동자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양 생기가 없었다.

“너는 새 지휘사지?”

미캉이 말했다. 지암은 잠시 망설였다.

“맞아. 최근에 새로 들어왔어. 어쩌다 들어왔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이름이 뭐야?”

“지암. 너는 미캉이지?”

“나는 이곳에 강제로 들어온 게 아니야.”

미캉은 지암의 말투가 바뀐 것도, 그의 질문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런 태도가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지암은 조금 어이가 없기는 했지만 화가 나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뒤늦게라도 화를 냈을지 모르지만 지암은 아니었다.

“그럼 왜 이런 데서 사는 거야?”

지암은 눈동자를 굴렸다. 다시 봐도 삭막한 방안이 빠르게 스쳐갔다. 미캉은 대답이 없었다.

“졸려.”

돌아눕는 소녀의 어깨를 붙들었다.

“자지 말아줘….”

애원하듯 한탄하자 검은 눈동자가 지암을 똑바로 향했다. 표정없는 얼굴에 흐릿한 의문이 지나간다.

“너는 네 삶을 살면 돼.”

미캉은 그렇게 말했다. 제 일에 끼어드는 지암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커다란 눈동자 가득 의아함을 담은 채였다. 지암은 머리를 긁적이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건 세츠가 전문인데 하필 자리에 없었다. 부탁 받았으니 대신 힘내봐야지. 에휴.

“널 여기 두고 갈 수는 없어.”

“왜?”

“네가 행복해보이지 않으니까.”

“나는 행복해.”

“이런 방에서 홀로 잠만 자는 게 네 행복이야?”

“응.”

지암은 입을 꾹 다물었다. 막힘없이 대답이 돌아오니 할 말이 없었다. 고민 끝에 지암은 선택했다.

“?!”

“얌전히 좀 있어봐.”

튼튼한 두 팔로 작은 몸집의 소녀를 번쩍 안아들고 지암은 지하실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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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컥. 장전하는 소리가 좁은 회의실 안에 울렸다. 모두가 바짝 긴장한 채였다. 언제 총성이 울릴지 몰랐다. 싸움이 시작되면 그 누가 안전할 수 있을까. 저쪽은 신기사가 셋이고, 이쪽엔 신기사는 하나 뿐이지만 지휘사가 있다. 양쪽 모두 노련한 싸움꾼들 뿐이었다.

“저어, 실례합니다.”

갑자기 갈라선 두 진영 사이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지암을 비롯한 모두의 눈이 커다래지는 것과 동시에 천장에서 조그만 인영들이 날아들었다.

“…….”

대바늘처럼 보이는 은빛 검을 든 인형 하나가 세츠를 향해 제 검을 찔러넣었다. 세츠가 히익,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물러선다.

“조금만 뒤로 물러서줄래? 숙녀 여러분.”

단정하게 수트를 차려입은 소년 인형이 앙투아네트와 에뮤사에게 절을 했다.

“험악한 무기는 좋지 않아요. 대화로 해결해야죠.”

생글생글 웃는 금발의 소녀 인형이 장난스레 말했다.

“죄송해요. 갑자기 놀라셨죠.”

지암의 앞에 서있는 것은 방금 전 처음으로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 유약한 인상의 소년 인형이었다.

네 체의 인형은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곧장 다툼을 멈추었다. 그 자리의 누구도 진심으로 싸우고 싶지는 않았던 탓이다. 세츠는 눈에 띄게 안도한 기색이었다. 지암도 솔직히 살았다는 느낌이었다. 아무리 자신의 보조가 있어도 세츠에게 중앙청의 베테랑 신기사 삼인방과 진검승부를 하라는 건 과도한 주문이었다. 그게 세츠가 바라는 바라고 해도 말이다.

지암은 곧, 굳게 닫혀있던 회의실 문이 열린 것을 알아차렸다. 그 안에는 인형보다 더 인형같은 소녀가 잠들어 있었다. 새카만 머리칼에 창백한 피부, 머리에는 새빨간 리본을 맨 소녀는 어린 시절 동화책에 나오는 백설공주 같았다. 소녀는 졸린 듯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소란의 한가운데를 쳐다보았다. 지암은 그와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녀의 눈동자는 공허해서 확신이 들지 않았다.

“시끄러워.”

그는 웅얼거렸다. 정말로, 그저 웅얼거렸을 뿐이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들려왔다. 지암은 문득 제 앞에 선 인형이 난처하게 웃는 것을 보았다. 아, 그렇구나.

소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 문 앞에 섰다. 지암은 그녀가 짜증을 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에 동작은 느릿한데도, 어쩐지 느껴졌다. 그렇게 느낀 것은 지암만은 아닌 듯했다. 세츠 역시 멋쩍은 얼굴이었다.

“왜 여기서 소란을 피우고 있어.”

그가 조용히 말했다. 질문보다는 책망에 가까운 어조였다. 세츠가 당황하는 것이 보였다. 그럴만도 했다. 중앙청 주요 인사와 마찰까지 빚어가며 이곳에 내려온 것은 세츠의 고집 때문이었으니까.

“오랜만이에요, 미캉.”

앙투아네트는 언제나처럼 은은하게 웃었다. 소녀, 미캉은 앙투아네트의 인사를 들은 채도 하지 않고 똑바로 지암을 쳐다보았다. 지암은 흠칫했다.

“너, 들어와.”

지암이 당황해 자신을 가리켰다.

“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미캉은 답도 기다리지 않고 돌아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웅크리는 모양새가 금방이라도 다시 잠들 것 같았다.

“부탁해, 대장.”

세츠가 이를 드러내고 씩 웃었다. 지암은 어이가 없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앙투아네트와 에뮤사가 웃는 낯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안화는 시간이 아깝다는 듯 시계를 보고 있다. 그러니까 지금 나보고 수습하라는 거지?

원망하듯 세츠를 쳐다보자 그가 지암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내가 믿는 거 알지?”

“어.”

정말이지, 제멋대로인 녀석이다. 지암은 난감스레 지하 회의실 안쪽을 쳐다보았다. 진심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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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슬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그날은 드물게도 아르시니가 컨디션이 좋았고, 땅에서는 풀 내음이 났으며 바람이 거의 불지 않고 선선했다. 마샤는 그날 아르시니와 걸었던 스콜로프 저택의 정원을 기억했다. 짧은 봄이 시작되어 장미가 화사하게 피어있었다. 정원에 심은 것치고는 특이하게도 송이가 작은 품종이었다. 장미는 산책로의 주인이 아니라 다른 꽃과 어우러져 주변을 화사하게 밝히고 있었다. 정원사의 솜씨가 돋보이는 배치였다. 소박한 장미를 고른 것도 정원사의 요청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르시니는 우산을 들어주겠다는 마샤의 청원을 끝끝내 거절하고 제가 우산을 들었다. 아직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았던 시기였다. 그래서 마샤는 어린 동생의 어리광을 기꺼이 받아주었다. 공국을 이끄는 위대한 네 마법사 가문 중 하나의 주인이 이런 잡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충고도 하지 않았다. 몇 번이고 말을 해보았지만, 우산을 드는 정도야 숙녀를 에스코트하는 예우라고 태연하게 대꾸할 뿐이다. 그런 동생이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도 이제는 어색한 나이였다.

 남매는 정원을 한 바퀴 돌고 유리로 벽을 세운 정자에 마주 앉았다. 사용인이 미리 준비해둔 찻주전자에서 김이 올라왔다. 날이 따뜻해졌다지만, 비가 오고 기온이 높지 않은 날이었다. 마샤는 아르시니를 보았다. 소년은 앳된 얼굴에 어른스러운 미소를 띤 채 비 내리는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감기 걸리겠다. 숄을 두르렴.”

 “과보호야, 마샤.”

 아르시니는 낮게 웃었다. 마샤는 눈살을 찌푸렸다.

 빗줄기는 아주 가늘었다. 유리 벽 한쪽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도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처럼 가늘었다. 비는 고이지 못하고 땅을 가볍게 적셨다. 꽃과 이파리가 촉촉한 공기를 한껏 빨아들여 싱그러웠다.

 “마샤는 내가 언제까지 살았으면 좋겠어?”

 아르시니가 물었다.

 “안 죽었으면 좋겠다.”

 마샤는 대답했다. 아르시니가 키득거렸다.

 “그건 내가 할 말이야. 마샤야말로 항상 위험한 곳을 돌아다니잖아. 죽으면 안 돼. 내 장례식에 와줄 가족은 이제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고.”

 “그런 말을 함부로 하면 백작님이 슬퍼하신다.”

 “마샤만 비밀로 해주면 돼.”

 아르시니는 태연하게 말하며 찻잔을 들었다. 미지근해진 물을 버리고 차를 따랐다. 꽃과 풀에서 나는 싱그러운 냄새와 비, 비에 젖은 흙냄새를 뚫고 새콤달콤한 향기가 뜨거운 물에서 퍼져 나왔다. 마샤도 잔을 비우고 차를 따랐다. 아르시니는 눈을 감고 향을 맡고 있었다.

마샤는 동생의 낯선 모습에 두어 번 눈을 깜빡였다. 스콜로프 저택에 들어간 이후로 하루하루 귀족적인 품위를 갖추어 가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침착한 성정은 타고난 것이며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은 마법사의 특성인지라 별로 달라졌다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저 만날 때마다 무럭무럭 자라는 것이 놀라웠다. 점점 고상해지는 몸짓이며 말씨도 그저 좋은 교육을 받았구나 생각했다.

 “장례식 하니까 말인데.”

 마샤가 생각에 잠긴 사이 아르시니는 운을 떼었다. 입속을 감도는 차향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는지 부드러운 미소가 감도는 채였다.

 “내가 죽으면 마샤가 첫 번째로 꽃을 주면 좋겠어.”

 “그건 직계 가족이나 가능한 거지.”

 “마샤가 내 가족이잖아.”

 아르시니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소년의 노란 눈동자가 좁은 틈새로 반짝였다. 마샤는 할 말이 없어 허탈하게 웃었다.

 “유언장을 쓸 거야. 사실 지금도 쓰고 있어. 이건 마샤가 가면 적을 거야.”

 “백작 부인이 서운해하실 거다.”

 아르시니는 마샤의 말을 한 귀로 흘려버렸다. 못 들은 척 찻잔을 들어 올리는 손가락이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마샤의 책망하는 눈을 마주하고 아르시니는 조용히 미소지었다.

 “춥다.”

 그렇게 말하고는 시선을 내린다. 영악한 소년은 누나의 잔소리를 틀어막는 방법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마샤는 문득 오렌지가 먹고 싶어졌다. 그래서 아르시니가 찻잔을 내려놓는 순간 옆에 있는 숄을 집어 던졌다. 기겁한 아르시니가 얼굴을 뒤덮은 숄을 허둥지둥 끌어 내렸다. 곱게 단장한 머리가 다 흐트러졌다. 아르시니가 골난 소리를 냈다. 마샤는 그런 아르시니를 비웃어주었다. 아무리 나이를 먹고 덩치가 커졌어도 고작해야 말을 타고 정원을 도는 게 다인 도련님이 사관학교를 졸업한 직업 군인을 이길 수는 없었다.

 

 *

 「마샤 알렉산드라 스미노르바양에게,

갑작스러운 편지를 받고 적잖이 놀라셨으리라 예상합니다. 봄을 맞이하여 새 단장을 하던 중, 미처 손길이 닿지 않았던 곳에서 귀인의 물건을 발견하였습니다. 구리로 테를 두른 카드 상자입니다. 어머니께서는 귀인을 그리워하여 상자를 스콜로프 저택에서 보관하길 바라셨지만, 상자의 연식과 상태를 보아 스미노르바양과의 추억의 물건으로 사료됩니다. 반환을 원하신다면 답변을 부탁드립니다. 스콜로프 저택은 언제나 귀하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새로운 계절에 어울리는 새로운 행복을 기원하며, 나탈리야 스콜로프 드림.」

 근 일 년 만에 찾은 스콜로프 저택은 여전히 중후한 맛이 있는 멋진 건물이었다. 정원은 완전히 갈아버렸는지 아르시니가 허둥지둥 달려 나오던 길은 모양만 겨우 남았을 뿐 완전히 풍경이 달라져 있었다. 정원사가 바뀌었던지, 단단히 마음을 먹고 정원을 새로 꾸민 모양이었다.

 마샤는 정문을 지키는 문지기의 정중한 인사를 받아가며 스콜로프 저택에 발을 들였다. 수도 안에 있는 저택이지만, 스콜로프의 이름이 무색하지 않은 크기와 웅장함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평민 출신 신입 장교가 발을 들이밀기엔 너무 멋진 곳이었지만, 마샤는 긴장하지 않았다. 마샤에게 있어서는 두 번째 집 같은 곳이었다. 적어도 죽는 순간에 스콜로프의 이름을 댈 수 있을 정도로는 사랑하는 곳이었다.

 건물에 도착하자 하인이 문을 열고 마샤를 맞아들였다. 모자와 겉옷을 벗어 건네자 공손히 고개를 숙인다. 안에서 나온 하녀가 마샤를 안내했다.

 봄맞이 새 단장을 했다는 이야기는 진짜였다. 마샤는 작년과는 딴판으로 달라진 실내를 둘러보며 감탄했다. 묵직하고 우아한 색조로 꾸며져 있던 복도는 선명한 파란색을 기조로 시원하게 바뀌어 있었다. 벽에는 못 보던 그림이 많아져 있었다.

 훈훈한 날씨 탓인지 응접실은 활짝 열려있었다. 잠시 기다리자 연한 바닐라 색 드레스 자락을 끌고 스콜로바의 여주인, 엘리자베타 스콜로바가 나타났다. 사르륵 비단 천 자락이 양탄자를 스쳤다.

 “매정한 아이야. 한 번쯤 들러야겠다는 생각이 그리도 들지 않았니.”

 곱게 주름진 얼굴로 눈웃음치며 엘리자베타가 말했다. 마샤는 마주 웃었다.

 “그래서 편지를 보냈잖아요.”

 “내가 보고 싶어 할 거라곤 생각도 안 했지? 아르시니 그 애도 그렇고, 너희 남매는 너무 매정해.”

 엘리자베타는 소파에 궁둥이를 붙이며 투덜거렸다. 비단 스커트가 마샤의 초라한 구두 끝을 스쳤다.

 “잘 지냈니?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 요즘은 나탈리야도 쌀쌀맞고 집안이 쓸쓸하게 느껴지지 뭐니. 그래서 봄을 맞아 산뜻하게 꾸며보았단다.”

 엘리자베타가 호호, 웃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마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화사한 실내는 마샤가 알던 스콜로프 저택의 장엄한 분위기와는 많이 달라졌지만, 오래전부터 엘리자베타가 바라던 모습이었다. 이곳에 들를 때마다 엘리자베타가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읊던 계획을 알고 있는 마샤로서는 드디어 꿈이 이루어졌다는 느낌이었다.

 “아주머니, 치사해요.”

 곧이어 티 트레이를 끌고 나타난 것은 베네라였다. 아르시니에게는 사촌 누나가 되는 베네라 스콜로프는 엘리자베타를 대신해 마샤에게 차를 대접했다. 본래라면 주인인 엘리자베타가 준비할 일이나 마샤는 이미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이인 데다 일개 군인 신분인지라 적당히 양보한 것이다.

 엘리자베타와 베네라는 기품 있고 상냥한 귀부인이었다. 변방을 돌다 보니 도시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마샤가 대화에서 겉돌지 않도록 챙겨주면서도 이야기가 끊겨 어색해지지 않도록 능숙하게 대화를 이끌어나갔다. 마샤는 아르시니가 있을 때와 다름없이 편안한 기분으로 스콜로프 저택에서의 티타임을 즐겼다. 두 사람은 옷과 실내장식, 음악과 연극에 관해 이야기하고, 때로 두려워하며 요마와 오염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멀쩡한 생물도 오염을 뒤집어쓰면 요마로 변한다면서요?”

 “네. 그래서 부상자나 사망자가 생기면 긴급히 호송 조치합니다.”

 “무서워라. 그럼 우리가 아는 사람이 요마가 될 수도 있겠네요.”

 “그렇지요.”

 베네라는 레이스 장갑을 낀 손을 모아쥐며 진저리쳤다. 마샤는 웃으며 덧붙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수도에까지 그런 일이 생길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 저희가 싸우는 거니까요.”

 “하지만, 마샤. 네가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밤에 잠이 오지 않을 지경이야.”

 “맞아요. 마샤, 그런 위험한 일은 그만두고 수도로 올라오는 게 어때요?”

 엘리자베타와 베네라의 시선을 받고 마샤는 그저 웃었다. 죽음을 옆에 끼고 있다는 자각은 있다. 매 순간, 그것을 자각하지 않고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마샤는 그들의 걱정 어린 시선에서 사랑만을 고맙게 받아들였다.

 “살기 위해 몸을 사리고 있어요. 마샤 스미노르바, 쉽게 죽지 않습니다.”

 마샤는 두 사람을 안심시키기 위해 자신 있게 미소지어 보였다. 엘리자베타도 베네라도 그것으로는 진정이 되지 않는지 착잡한 얼굴이었지만, 더는 말이 없었다. 짧은 침묵이 지나고,

 “어머, 나도 참. 잠시만 기다리렴.”

 엘리자베타가 짐짓 발랄하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베네라가 웃으며 빈 티팟을 정리하고 하녀를 불러 자리를 정돈하게 했다.

 “이렇게 이야기한 것도 오랜만인데 좋은 소식은 없나요?”

 베네라는 참으로 다정한 여인이었다. 마샤는 그런 다정함이 부담스러웠다.

 “군인이 연애할 시간이 어딨어요.”

 “앞날이 창창한 젊은 청년들과 함께 보내고 있잖아요. 마샤도 나이가 들었지만, 아직은 피가 끓을 나이 아니던가요.”

 그렇게 묻는 베네라는 마샤보다 어리다. 나이가 한참이나 떨어진 아르시니와 비슷한 나이였다. 하지만 베네라는 혼기가 차자마자 집안에 걸맞은 남편을 찾아 결혼한 귀부인이었다. 마샤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르시니도 살아있었다면, 살 가능성이 있었다면 결혼했을까.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유부남과 꼬맹이 사이에서 혼사를 생각할 수가 없더라고요. 저도 이제 나이가 있으니 젊은 혈기로 밤을 보내는 일도 줄어들었어요.”

 베네라가 안타깝다는 듯 한마디를 덧붙이려 할 때 엘리자베타가 돌아왔다. 뒤따라오는 하녀가 편지에 언급된 상자를 들고 있었다.

 “즐거운 나머지 그만 중요한 걸 잊었지 뭐니. 마샤는 이걸 위해서 온 건데 말이야.”

 엘리자베타는 하녀에게서 상자를 받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하녀가 뒤돌아 나가고 연이어 다른 하녀가 들어오며 간단한 다과상을 차렸다.

 구리로 테를 두른 작은 고동색 상자였다. 손때가 타 반질거리는 상자는 카드텍 하나가 들어가면 딱 맞을 크기다. 액세서리를 담기에는 투박하고, 값싼 소재로 되어있었다.

 엘리자베타는 구리로 된 모서리를 손끝으로 어루만지다가 이내 마샤 쪽으로 상자를 밀어주었다. 마샤는 이 상자를 알고 있다. 남매의 생모, 알렉산드라가 어린 시절 마샤에게 선물해준 카드 상자였다. 항상 자기를 대신해 어린 아르시니를 돌보는 마샤에게 고맙고 미안하다며 사준 것이었다.

 “받으렴. 이 집에 남은 마지막 물건이야.”

 엘리자베타의 목소리가 먹먹했다. 상자에서 눈을 들어 바라보자 아름다운 눈동자에 눈물이 어린 것이 보였다. 고운 귀부인의 마음에 이 물건이 얼마나 큰 것인지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샤는 천천히 손을 들어 상자를 집었다.

 송구하게도 마샤는 엘리자베타에게 상자를 선뜻 선물할 수가 없다. 이것은 아르시니의 유품이자 어머니 알렉산드라의 유품이었다. 마샤는 문득 가족이 모두 떠나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떠올렸다.

 “고맙습니다.”

 엘리자베타는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구나. 네게도 소중한 물건일 텐데, 내가 욕심을 내고 말았어.”

 “그만큼 아르시니를 아껴주셨으니까요.”

 마샤도 따라 고개를 저었다. 엘리자베타는 결국 손수건을 들어 눈가를 훔쳤다.

 “아르시니도 너도 내게는 자식이란다. 그 사실만큼은 잊지 말아줬으면 좋겠구나.”

 마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티타임은 머지않아 끝났다. 엘리자베타가 슬픔에 젖어 더는 대화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베네라는 엘리자베타를 달래느라 마중을 나오지 못하고, 마샤는 혼자서 응접실을 나왔다.

 안내 없이 걸으며 복도를 다시 한번 찬찬히 둘러보았다. 청량한 색으로 꾸며진 실내는 엘리자베타답게 소박하면서도 화사한 장식을 둘러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귀엽다고 자랑하는 아르시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안녕하세요, 스미노르바양.”

 생각에 잠긴 마샤의 뒷덜미를 당기듯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문을 바로 앞에 둔 참이었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엄숙한 드레스를 갖춰 입은 소녀가 마샤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탈리야였다. 아르시니보다도 어린 앳된 소녀는 전신을 무겁게 내리누르는 듯한 드레스를 입고 딱딱한 표정으로 마샤를 바라보았다. 전신에 철갑을 두른 듯, 차갑고 절도있는 모습이었다.

 “안녕하세요.”

 마샤는 가볍게 묵례했다. 나탈리야는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이쪽으로 드시지요. 아버지께서 뵙기를 원하십니다.”

 마샤는 나탈리야의 뒤를 따랐다.

 나탈리야는 마샤를 정원 쪽으로 이끌었다. 전부터 저택의 다른 방에 비해 상대적으로 화려했던 탓인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마샤는 괜히 아르시니와 걸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는 비가 오고 있었다.

 “들어가시지요.”

 나탈리야는 온실 앞에서 멈춰섰다. 마샤는 나탈리야의 안내에 따라 온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유리문 너머로 나탈리야가 자리를 떠나는 것이 보였다.

 풀과 나무 사이로 멀리 보이는 테이블과 그 앞에 앉은 남자가 보였다. 그는 마샤가 기억하던 것보다 많이 늙어있었다. 아주 피곤해 보였고, 쇠약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로만.”

 마샤가 바로 옆에 다가갈 때까지도 로만은 못 박힌 듯 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꽃은 붉게 핀 장미였다. 탐스럽고 송이가 컸다. 비싼 장미다. 마샤는 아르시니는 그런 장미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로만 옆에 섰다.

 “앉으렴.”

 로만이 말했다. 마샤는 준비된 자리에 앉았다. 치마를 추스르는 사이 로만은 마샤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아르시니의 유품이 나왔다고 하더구나.”

 “네. 그걸 받으러 왔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로만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테이블에는 차도 커피도 없었다. 와인병과 로만의 잔이 놓여있을 뿐이었다. 로만이 말을 않자 마샤도 말을 할 수 없었다. 사람이 입을 다물자 다른 소리들이 자리를 찾듯 주변을 메웠다. 온실을 유지하는 기계장치가 돌아가는 소리, 온실 밖에서 하인들이 대화하는 소리, 나뭇가지에 오른 새소리까지. 로만은 한참을 아무 말이 없었지만, 마샤는 기다렸다. 대기하는 것은 익숙했다.

 “벌써 석 달이나 지났구나.”

 로만이 말했다.

 “그렇게 되었군요.”

 마샤는 맞장구쳤다. 로만은 그제야 마샤를 돌아보았다. 깊게 팬 주름이 석 달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마샤는 이렇다 저렇다 말을 붙이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너와의 인연도 제법 오래되었지.”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게 어디 네가 할 말이더냐. 다 늙은이들의 업보인 것을.”

 로만은 마샤에게 와인을 권하려다가 말고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네. 나탈리야에게 전권을 위임한 뒤로 예전 같지가 않아.”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와인을 따르기 위해 몸을 일으키는 로만 대신 마샤가 일어났다. 로만은 손을 휘저었다.

 “나탈리야가 아르시니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건 알고 있나?”

 로만은 와인으로 목을 축이고 다시 장미를 한 번 보았다가 마샤를 쳐다보았다. 마샤는 고개를 저었다.

 “내게도 형이 있었지. 마법사였고, 평민 출신이었네. 아르시니와도 비슷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어. 항상 밝고,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이었지. 어쩌면 마법사란 모두 그런 종족인지도 몰라.”

 마샤는 당황했다. 로만이 꺼낸 것은 오랜 마법사 집안의 치부라고도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나탈리야가 마법사가 아니기에 로만이 아르시니를 들였듯, 로만의 부모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린 로만은 그것이 참을 수가 없었다.

 위대한 가문의 적자 태어나 가주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평범한 상인으로 태어나 길러진 마샤로서는 그게 어떤 기분인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마샤는 언제나 가족과 함께 살아남는 것만을 생각했고, 이제는 가족조차 없기에 자신의 생존 말고는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로만은 달랐으리라. 나탈리야도 다를 것이다. 마샤는 나탈리야가 자신을 적대하는 이유를 몰랐으나 로만의 이야기에 그 답이 있었다.

 자신의 것이었어야 마땅한 권리이자 영광인 가주의 자리는 어디서 태어나 어떻게 자랐는지도 모를 아이에게 돌아간다. 가주에 적합한 교육도 받지 않았고, 그만한 품위도 없는 아이다. 후계자로 교육받은 로만이나 나탈리야 같은 적자는 그들과 함께 교육받으며 그 아이들의 어설픔과 야만스러움을 지겹도록 보고 듣고 익혔다. 경멸하지 않는 것만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 아이들이 가주의 자리를 물려받는 것은 채 성인이 되기도 전의 일이다. 마법사의 수명이 짧기 때문에, 그들은 하는 일도 없이 가주라고 불리며 대대로 가문을 이어온 적손의 섬김을 받는다. 그것은 귀족으로, 남을 다스리는 자로 살아온 마법사 가문의 혈통이라면 누구나 져야 하는 굴욕이었다.

 로만은 증오의 대상이었던 가주가 하루하루 쇠약해지다가 결국은 죽고 말았던 날을 기억했다. 어린 마음은 크게 상처 입었지만, 그것을 인정하지 못했다. 유난히 가주에게 다정했던 부모님이 미웠고,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이 미웠다. 그래서 로만은 자신이 부모의 입장이 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준비하지 못했다.

 결국, 아르시니를 입양하기로 결정이 났을 때부터 로만은 줄곧 스미노르바 남매를 피해왔다. 가끔 마샤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는 했지만, 후견인으로서 만남을 가진 것뿐이었다. 아르시니에게는 한층 더 냉랭했고, 나탈리야에게도 다정하게 대하지 못했다. 전쟁과는 먼 곳에서 살아왔지만, 죽음은 로만의 삶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명랑하기 짝이 없는 마법사라는 생물의 짧은 삶이 흉터가 되었다. 로만은 아르시니를 제대로 마주하지도, 그렇다고 아껴주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 어린 소년의 죽음은 로만은 늙게하고 말았다. 마샤는 그 부산물이었다. 그래서 로만은 마샤에게 허물이 없었다.

 마샤는 아르시니가 로만이 무섭다고 했던 것을 떠올렸다. 마샤에게는 한없이 자상해 마치 아버지가 있다면 이런 사람이 아닐까 싶은 사람이었기에, 아르시니의 그 말이 스콜로프 저택에 적응하는 중에 생긴 고충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마샤는 새삼 늙어버린 로만의 얼굴을 살폈다. 후회로 찌들어버린 얼굴이었다.

 “멀리하면 괜찮을 줄 알았지. 죽어도 신경 쓰이지 않을 줄 알았어. 그거 아는가? 나는 아르시니를 한 번도 내 자식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네. 그런데도 이렇게 마음이 아파.”

 로만은 끝내 눈물을 보였다. 마샤는 아버지 같은 로만의 등을 감싸 안았다.


 *

 스콜로프 저택에서 내준 마차를 타고 마샤는 좁은 방으로 돌아왔다. 아직 해가 질 시간이 아닌데 날이 어둑해져 있었다.

 마샤는 오랜만에 입은 낡은 드레스를 벗어 걸어놓고, 편안한 차림으로 갈아입었다. 비로소 자신의 자리에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스콜로프 가문의 사람들이 마샤의 가족과 같다는 것은 거짓이 아니지만, 마샤는 스콜로프 저택의 일원이 아니었다.

 카드 상자를 옆에 던져두고 솜도 없이 삐걱거리는 침대에 몸을 뉘었다. 눈을 감자 하루 동안 두 번이나 보고 만 눈물이 떠올랐다.

 ‘마샤는 내가 언제까지 살았으면 좋겠어?’

 마샤는 대답했다.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 말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아르시니가 죽은 뒤로 마샤는 한 번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마침 비가 내리는 날이었기에 하늘이 대신 울어주는구나 싶었을 뿐이다. 무덤에 들어간 아르시니의 비석을 보고서도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이렇게 짧은 삶이었구나 싶었을 뿐이다.

 허전했다. 이제 마샤에게는 어머니도, 동생도 없었다. 없어도 살아가는 것에는 문제가 없다. 본래도 있는 듯 없는 듯한 삶이었다. 편지를 보낼 곳이 하나 줄어들었을 뿐이다. 비록 아르시니가 가장 자주 편지를 주고받는 대상이었다고는 하지만, 편지 보낼 곳이 하나 줄어들었다고 먹고 사는 것에는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특별히 아르시니와의 편지가 즐거웠던 것도 아니다. 그저 일기를 쓰듯이 일상을 보고해왔을 뿐. 아르시니도 크게 다르진 않았을 터였다.

 마샤는 마음으로 편지를 썼다.

 하늘에 있는 아르시니, 내가 울지 않는다고 해서 서운해하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나보다 많은 사람이 널 위해 울어주고 있지 않니. 너는 정말 괜찮은 삶을 살았다. 사랑받지 않았느냐. 나도 널 사랑한단다. 보고 싶다. 아르시니.

 마샤는 눈을 번쩍 떴다. 눈가가 촉촉해져 있었다. 아르시니가 없어도 마샤는 괜찮았다. 그런데 눈물이 났다.

 아르시니, 나는 네게 정말 좋은 누나였니? 결국, 첫 번째로 꽃을 주지 못했어.

 뺨을 타고 눈물방울이 굴러떨어졌다. 창밖에서는 아르시니와 정원을 걸었던 그 날처럼 가느다란 보슬비가 흩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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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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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을 뛰어넘을거야.”

 단이 말했다. 길가메시는 한쪽 눈썹을 치켜든다. 그런 길가메시를 곁눈으로도 쳐다보지 않았다. 담담한 선언이었다. 길가메시는 잘못 들었겠거니 생각하고 흘려넘겼다. 그러자 단은 길가메시를 쳐다보았다.

 “당신을 뛰어넘을 거야.”

 다시 한 번 내뱉은 말은 조용하지만 단호했다. 의지가 느껴지는 말에 길가메시는 찌푸린 체 소녀를 돌아본다. 현재 길가메시를 담당하고 있는 마스터, 단은 작은 몸집의 소녀였다.

 당돌하다 못해 건방지기까지 한 말에 길가메시는 그저 웃고 만다. 처음 만났을 때는 패기라곤 없어서 이딴 게 자길 소환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작던 여자아이는 짧은 시간 동안 많이 자라있었다. 생기 넘치는 눈빛과 곧게 편 등, 눈이 마주쳐도 피하지 않는 곧은 시선까지. 마치 사람이 달라진 듯한 변화였다.

 “그렇다면 짐은 네놈을 죽여야겠군.”

 길가메시는 놀라울 정도로 담담하게 뱉어진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좀 더 고압적으로, 좀 더 분노를 담아 했어야 하는 말이었다. 연약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화가 났다.

 “그러지 않을 거잖아.”

 단은 웃었다. 으레 그러듯 연약하고 부서질 것 같은 미소였다. 어리석은 잡종 같으니. 저런 표정으로 누굴 뛰어넘겠다고?

 성장이야 하고 있었다. 타고난 재능만이라면 길가메시가 기나긴 세월을 겪으며 만나본 수많은 마술사 중에서도 상위권에 드는 소녀는 처음 만났을 당시 평범한 수준의 마술 밖에 쓰지 못했다. 오죽하면 재능이 마력에만 미치고 그 외의 부분에는 미치지 못하는 게 아닌가 의심했을 정도다. 그러던 것이 눈빛이 살아나는 것에 더불어 마술이 발전하더니 함께 지낸 시간이 길지 않음에도 이제는 어지간한 마술사에게선 손도 대지 않고 항복을 받아낼 수준이 되었다.

그러나 고작해야 마술 능력이 조금 향상된 것이다. 한 나라의 왕이자 장군이고 무인이었던 길가메시와 비견할 바가 아니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것은 길가메시가 아니라 단, 미천한 인간 본인이리라.

 단은 저가 길가메시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함을 잘 알고 있었다. 눈치를 보는 것은 몸에 벤 습관일지 몰라도 길가메시를 향한 선망의 눈빛은 감출 수 없었기에 길가메시는 언제나 이 작은 소녀의 꿈과 심경을 단번에 꿰뚫을 수 있었다. 단은 길가메시 앞에서 늘 말을 조심했고(비록 대화술은 엉망진창이었어도), 무엇이든 따라하며(어설픈 흉내일 뿐이었지만), 어떻게든 길가메시에게 어울리는 마스터가 되고자 했다. 그런 점이 귀여워 살려두지 않았던가.

 “왜 널 살려둬야하지?”

 “모르겠어. 하지만 당신이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아.”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단은 또 수줍게 길가메시의 눈치를 살폈다. 길가메시는 언제나처럼 고개를 치든 채 정수리가 제 코끝에 오는 여자아이를 내려다보았다. 평온한 말과는 다르게 불안한 듯 꼼지락거리는 손끝이 하찮기 짝이 없다.

길가메시는 갈색 머리칼 위에 손을 얹었다. 단이 흠칫 놀라며 어깨를 움츠렸다.

 “건방진 말을 하고 싶으면 적어도 떨지는 않게 연습해오도록.”

 조그만 머리통이 움직여 팔과 몸이 이루는 각도가 살짝 작아졌다. 노력할게. 단이 중얼거렸다. 길가메시는 콧방귀를 뀌곤 휙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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