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카타입 드림 커미션입니다 (아케미 호무라)
의사라고 하면 보통은 놀고먹으며 많이 버는 직업이라고 생각하지만―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그렇게 많은 이들이 의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겠는가―그건 어느 직업에나 마찬가지로 극히 일부의 이야기다. 조금이라도 편히 일하는 건 개인 병원을 가진 일명 “사장님”의 이야기고 그나마도 담당 과에 따라 개인 병원을 차릴 수 있는지 없는지가 달라지며, 수입 역시 과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대부분의 의사는 꿈결처럼 흘러가야 할 젊은 시절을 희멀건 건물에 틀어박혀 환자―악취와 흉한 꼴은 당연한 옵션이다―와 씨름하며 보내고, 나이를 먹어 경력을 쌓는다 해도 편안하고 넉넉한 노후가 보장되지는 않는다.
‘대신 그만큼 보람은 있는 일이야.’
사토 케이코는 생각했다. 그 역시 혈기 넘치는 젊은 시절을 병원과 환자들에게 모두 쏟아내고 있는 젊은이였다. 곧 서른이 다가오는 나이는 일반적으로 독립된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 발전하는 시기지만 병원의 시간은 더디게만 간다. 특히나 사람 수만큼이나 위계도 많은 종합병원에서 일하는 사토에게는 더욱 그랬다.
수련의 시절부터 줄곧 같은 병원에서 근무한 탓인지 사토는 요새 권태감을 느꼈다. 무력감이라고 해도 좋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사토의 팔다리를 붙들고 늘어졌다. 학생 때, 혹은 수련의 시절에 진로를 바꿔 자유로운 인생을 사는 친구들을 보면 무기력함은 더 강해졌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한들 무언가 돌아오기는 할까. 그런 생각이 하루에도 열 번씩 마음을 스쳤다.
이토록 날씨가 좋은 탓인지도 몰랐다. 바람에는 꽃내음이 섞여 있었다. 병원에는 다양한 환자가 있으므로 정원에도 가능하면 꽃을 두지 않지만, 어디서 실려 왔는지 모를 향기가 감미로웠다. 온종일 병원에 갇혀있으니 데이트는 물론이고 간단히 차려입고 놀러 나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휴일이면 밀린 집안일이며 휴식을 취하느라 늘어져서 몸을 꾸밀 여력도 없었다. 간혹 동료 의사들이나 간호사 중에 어마어마한 병원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풀메이크업에 예쁜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을 보면 대단함에 입이 떡 벌어졌다. 그 사람들이라고 사토보다 특별히 여유가 있지는 않을 테니 그저 그만큼 절박한 것일 테다.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평소라면 의사에게만큼은 관심이 없다고 큰소리를 치던 사토가 동료 의사에게 눈길을 빼앗긴 이유는. 청춘의 에너지를 모두 병원에 쏟느라 인생의 즐거움이 모자란 나머지 절박해진 탓이다. 사토는 그렇게 생각하며 뇌리에 아른거리는 ‘그’의 형상을 지웠다.
그는 한 달쯤 전에 전근을 온 흉부외과의였다. 요즘은 심장 쪽에 집중해서 그쪽 일을 더 많이 맡는다고 했던가. 제법 실력이 좋아 심장외과에서 탐낸다는 소문을 들었다. 흉부외과와 소아청소년과의 거리는 병동 위치만큼이나 멀어 사토가 그와 친해질 만한 계기는 전혀 없었다. 어느 날 그가 부탁해오지만 않았다면 아마도 병원을 그만두는 그 날까지 없었을지도 모른다.
‘사토 케이코 씨죠?’
조심스럽게 여직원 휴게실 문을 열고 들어온 그가 처음으로 꺼낸 말이었다. 방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그를 바라보자 멋쩍은 듯 수줍게 웃었다.
‘잠깐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그러죠, 뭐.’
친한 동료들이 웃으며 쳐다보는 이유를 뻔히 알고 있기에, 사토는 어깨를 으쓱이며 방을 나섰다. 그는 얼마나 마음이 급했는지 복도에 나서자마자 사토를 붙잡고 본론을 꺼냈다.
‘사토 씨. 다음 주에 있는 예약 환자 말인데요.’
이야기는 이런 거였다. 그가 직접 예약을 넣은 환자가 조만간 진료를 받으러 올 예정인데, 심장에 지병이 있는 청소년 환자로 아주 어릴 때부터 같은 병을 앓았다고 했다. 최근까지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신학기에 맞춰 겨우 퇴원한 모양으로 본인은 괜찮다고 하지만, 몸이 약해 걱정이 된단다. 그러니 소아청소년과 의사인 사토가 아이를 설득해달라는 거였다. 고집이 센 편이라 자신의 말만으로는 듣지 않을지도 모른다면서.
‘그걸 왜 제가요?’
사토는 황당해하며 물었다. 다른 소아청소년과 의사들도 마찬가지 같았지만, 사토 역시 그와는 안면조차 없는 사이였다.
‘아, 그게.’
그는 당황한 듯했다. 한참을 얼버무리다가 어렵게 아이가 어려워하지 않을 것 같은 인상이라서란다. 기가 막혔지만, 애절한 표정이 안타까워 결국 허락하고 말았다. 아이들을 상대하는 건 좋아하니까 아주 싫은 제안도 아니었다.
그때부터 그는 뻔질나게 소아청소년과를 드나들며 사토를 괴롭혔다. 그놈의 호무라―아이의 이름이었다―라는 이름이 그가 없을 때도 귓가에 맴돌 정도였다. 대체 무슨 사이기에 이토록 정성인 건지 궁금해 물어보았더니 빙긋이 웃기만 했다. 듣자 하니 미혼이라던데 사고라도 쳤나?
어쨌든 사토는 그의 소중한 ‘아케미 호무라양’에 대해 단시간에 어마어마한 지식을 갖추게 되었고―어찌나 자랑을 하는지 영 신뢰가 가지는 않았지만―인제 와서는 어서 호무라양이 병원에 찾아오기만 바라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더는 그에게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어째서인지 자꾸만 그의 얼굴이 머릿속을 아른거리는 것이었다.
“바보 같아.”
사토는 얕게 한숨을 쉬었다. 밤 산책이 길었는지 어느새 병원 입구가 코앞이었다.
“어라?”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중학생 여자아이의 실루엣이 자꾸만 눈앞을 맴도는 누군가와 겹쳐 보였다.
“설마.”
사토는 바삐 로비로 향했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거기 앉아있는 소녀는 사토가 계속해서 떠올리고 마는 그, 아케미 소이치로와 똑 닮아있었다. 생머리를 길게 길렀다는 소이치로의 묘사와도 일치했다.
과연 자랑할만한 미모기는 했다. 소이치로도 전혀 꾸미지 않는 것치고는 무척 미남인데, 이 여자아이는 중학생 특유의 앳됨과 피로 없는 젊음까지 겹쳐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사토는 새삼 중학생의 깨끗한 피부에 감탄하며 인사했다.
“안녕?”
호무라는 무심한―약간 멍해 보이는―표정으로 사토를 돌아보더니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병원에 오래 다녔다더니 모르는 의사가 인사를 해도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누구 기다리니?”
“……가족이요.”
호무라는 고민하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대답했다. 가족이라. 설마 정말 딸인가? 사토는 생각했다. 하기야 딸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정성스러운 것도 이상하기는 했다. 세상일은 모르는 거라지만, 나이차가 몇인데 동생일 리는 없었다. 사토는 수수한 미남 외과의의 과거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내가 아는 분인 것 같은데, 퇴근까진 아직 좀 걸릴 거야. 먼저 돌아가지 않고 기다리니?”
“기다리기로 했어요. 게다가 어두우면 위험하니까요.”
호무라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나이 차이가 한참 나는 사토와 대화하면서도 어색한 느낌이 없었다. 어른과 대화하는 것이 어색한 아이는 종종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불안해한다. 중학생쯤 되면 귀찮아하는 경우도 많았다. 어릴 때부터 병원에 다니며 늘 어른들과 마주쳐야 했을 호무라를 생각하니 안쓰러워졌다.
“그렇구나. 그럼 어쩔 수 없지. 내가 친구 해줄게.”
그렇게 말하며 사토는 비어있는 호무라의 옆자리에 궁둥이를 붙였다.
“얘, 네가 기다리는 게 아케미 소이치로씨 맞지? 흉부외과의.”
“네, 맞아요.”
“어쩜 이렇게 똑 닮았니. 똑같이 생겨서 못 알아보기가 어렵겠다.”
“그런가요.”
호무라는 마치 처음 만났을 때의 소이치로처럼 수줍게 웃었다. 그 미소에서 또 소이치로의 얼굴이 겹쳤다. 사토는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애 딸린 남자에게 연애감정이라니. 친구가 이런 이야길 했으면 꿈도 꾸지 말라고 엄포를 놓을 텐데 감정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좋겠다. 누구는 이렇게 귀여운 딸도 있고. 나도 직장까지 와서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는데.”
“남자친구 없으세요?”
“의사는 말이지. 연애도 못 해. 병원에서 나가야 연애를 하건 말건 할 거 아니니. 있던 애인도 떨어져 나가게 생겼는데 무슨 수로 애인을 만들겠어. 넌 의사는 꿈도 꾸지 말렴.”
호무라는 배시시 웃었다. 웃겨서 웃는 건지, 어른이 우스갯소리를 하니까 웃어주는 건지 모르지만 어쨌든 예쁘긴 예뻤다. 그리고 그 미소를 닮은 소이치로의 미소도.
“호무라.”
그래, 바로 저 표정이다. 로비로 나온 소이치로가 호무라와 완전히 똑같은 얼굴로 웃고 있었다. 호무라가 사토를 넘어 의자를 빠져나갔다. 달음박질치듯 다가가 손을 잡은 소이치로와 호무라는 스쳐 간 세월의 흐름만이 다른 얼굴로 활짝 웃고 있었다. 행복한 가족이로군. 사토는 웃었다. 일평생 자기는 부모님과 연출해본 적이 없는 광경이다. 물론 사토는 부모님과 사이가 좋았고 두 분을 사랑하지만, 십 년 떨어져 살다가 만난 것 같은 얼굴로 서로를 맞은 적은 없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소이치로와 호무라는 서로 손을 꼭 잡았다가 끝내는 진한 포옹을 끝내고서야 떨어졌다. 정확히는 소이치로 쪽이 바로 섰다고 하는 게 맞다. 호무라는 여전히 소이치로의 한쪽 팔에 매달려있었으니까.
“오늘이었어요?”
“미안해요. 연락을 해야 하는데, 수술이 세 건이나 있어서 잊어버렸지 뭐예요.”
“괜찮아요. 그렇게 자랑하던 호무라도 봤고.”
사토가 쳐다보자 호무라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대롱대롱 매달린 모양으로 인사만 챙기는 게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들어가서 쉬어요. 힘들겠다.”
“당직인가 봐요. 수고하세요.”
“안녕히 계세요.”
사토는 손을 흔들어 두 사람을 배웅했다. 사람이 드문 로비에는 또다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아, 정말 싫다.”
사토가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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