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리나 타입 자캐 커미션입니다.





 페리아 파그메의 밤. 지상은 요정의 춤으로 물들고, 창공에서는 달이 축복하는 아름다운 시간. 사람들은 되찾은 풍요에 흥겨워했다. 닷새를 이어진 축제에도 지치는 기색은 보이지 않고, 생기가 넘쳐흘렀다.

 무대의 막이 올랐다. 그것은 벌써 삼십여 년 전의 이야기.

 수도가 아직 눅진한 평화에 물들어 자신을 잃어가고 있던 시절. 아름다운 한 청년이 있었다. 그는 반짝이는 금발과 장밋빛 뺨을 가진 아주 사교적인 사람이었다. 누구나 그를 보면 사랑에 빠져 온갖 파티에 불려 다니지 않는 곳이 없었다.

 청년에게도 한가지 흠이 있었으니, 얼음장같이 차가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교계의 모든 여인이 그의 마음을 한 줌이라도 얻어볼까 갖은 애를 썼지만, 그는 애타는 갈구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마음을 허락한 적이 없었다.

 보석처럼 아름다운 청년이 이름은 엘리엇 샬마르크. 그에게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 하나 있었다. 이야기는 엘리엇이 갓 청년이 되던 데뷔탕트의 무도회장에서 시작된다.

 「저기 있는 저 여인을 보아라. 어쩜 저리 아름다운지.」

 허름한 차림의 인형술사가 나무막대를 흔들자 왕자 인형이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푹푹 쉬었다. 구경하는 아이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왕자 인형 옆에서는 검은 머리에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 인형이 길게 하품을 했다. 곧이어 왕자 인형은 정중하게 여자 인형에게 절을 하고 두 인형은 함께 춤을 추었다.

 「레이디는 정말 아름답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당신과 혼인하고 싶어요.」

 「오, 엘리엇. 나도 정말 그러고 싶네요.」

 과장되게 간드러진 목소리에 객석에서는 까르르 웃음을 터진다. 마침 옆에서 악단이 연주를 시작해 인형극은 한층 그럴듯해졌다. 시간은 흘러 흘러 엘리엇은 이름 모를 여인을 향한 연심에 불타올랐다. 마침내 청혼을 결심한 엘리엇. 그은 그때까지도 이름을 모르던 여인에게 이렇게 요청했다.

 「사랑하는 여인이여.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제발 내게 알려줘요.」

 왕자 인형이 무릎을 꿇고 사랑을 고백했다. 여자 인형은 무정하게 돌아섰다. 왕자 인형은 찢어지는 마음에 고개를 푹 떨궜다.

 「내게는 필요한 게 있어. 그대를 사랑할 순 없어요.」

 「그대가 원하는 거라면 내 무엇이든 마련해주겠소.」

 인형술사의 연기는 여전히 우스운 하이톤이었지만, 이제는 웃는 이가 없었다. 지나가던 행인이 인형극을 보고 발을 멈췄다.

 여자 인형이 왕자 인형을 향해 돌아섰다. 왕자 인형은 고개를 들어 여자 인형을 반겼다.

 「그게 정말인가요?」

 「물론이요.」

 「무엇이든?」

 「무엇이든!」

 두 인형이 점차 가까워지며 양손이 맞닿으려는 찰나,

 “어, 줄 끊어졌어요.”

 한 아이가 말했다. 방금까지 멀쩡하던 여자 인형의 머리 쪽 줄이 끊어져 덜렁거렸다. 인형 목이 뜯어져 솜이 보였다. 인형사는 망가진 인형을 집어넣고 새 인형을 꺼냈다. 아주 흡사하지만, 짧고 활동적인 드레스를 입은 인형이었다. 인형사가 손잡이를 붙들자 바닥에 축 늘어져 있던 왕자 인형이 벌떡 일어났다. 인형극은 다시 계속된다.

 금화를 인형사의 가방에 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들어가는 길에 눈에 띄어 끝까지 보고 갈 셈이었는데 인형이 망가지는 바람에 흥이 떨어졌다. 반짝이는 동전에 아이들과 인형사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그 눈빛을 즐기며 광장을 떠난다.

 오늘로 이 즐거운 시간도 끝이라고 생각하니 참으로 아쉬웠다. 촉박한 시간을 아껴 굳이 길거리로 나온 건 그런 이유였다. 잠시라도 좋으니 감시에서 멀어지고 싶은 마음 반, 앞으로 최소 일 년은 오지 않을 향락을 즐기고 싶은 마음이 반. 번쩍이는 수도의 거리는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성을 빠져나올 만한 가치가 있었다. 사람들 얼굴에 흐르는 생기는 그 자체로 구경거리였다. 인형 같은 표정을 한 귀족들 사이에 서 있는 건 너무 지루해서 그대로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한껏 차려입은 아름다운 아가씨들도 위안이 되지 못했다. 사람이 과자만 먹고 살 수는 없는 법이다. 생기 넘치는 거리가 어떤 보약보다도 좋았다.

 올해의 페리아 파그메는 조금 특별한 축제였다. 길거리는 언제나와 같았지만, 도성은 달랐다. 밖에서도 눈에 띄게 빛나는 홀이 있었다. 한창 일꾼들이 바쁘게 일하고 있을 때였다. 홀에 도착할 때쯤이면 이미 시작하고도 남을 터이다.

 왕의 이름으로 주최되는 가장무도회. 매해 한두 가문은 꼭 빠지던 저녁 만찬과는 다르게 모든 귀족 가문은 반드시 참석하라는 명이 있었다. 디히터가에서는 가주인 플로리안이 참석하는 것으로 진작 결정이 났다. 나는 군더더기이자 들러리, 홀을 장식하는 예쁜 꽃이었다.

 플로리안은 축제 첫날부터 성에 머물렀다. 나는 텔레포탈을 넘자마자 디히터의 위엄을 지키며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그와 조우했다. 플로리안은 집에서 지낼 때보다 혈색이 좋아 보였다. 나는 체면치레가 맞는 인간이 따로 있는 모양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플로리안은 나를 무척 반겼다. 왜 나를 찾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플로리안이 떠나고 그 어느 때보다도 평화롭고 즐거운 한때를 예상하며 몸을 풀던 나를 불러낸 건 플로리안이었다. 반드시 가장무도회에 참석하라고 가문의 문장까지 썼다. 그가 무얼 생각하는지는 짐작이 갔다. 나와 미케일라의 행복한 시간을 방해할 겸, 날 이용해 하나라도 더 지지세력을 끌어모을 셈이었다.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수였다. 그렇지. 그렇고말고. 아무리 멍청해도 대륙 정반대 편에 있는 귀족이 한 지붕 아래서 휘두르는 칼을 막아주리라 믿지는 않을 거야.

 괜히 웃음이 났다. 그까짓 권력이 뭐라고 목숨을 걸고 칼부림을 하는지. 귀찮기만 한 것을 굳이 지켜내려는 플로리안도, 아득바득 뺏으려는 미케일라도 놀라운 위인들이다. 나는 휘파람을 불며 마차에 올랐다. 금실이 수 놓인 제복을 입은 마부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무도회장은 눈이 부셨다. 성 밖에서부터 유난히 빛나던 홀은 대낮과도 차이가 없을 만큼 밝았다. 밤하늘을 걷는 양 아름다웠던 밤거리를 비웃듯 무도회장을 꼼꼼히 수놓은 광원은 고작 서민들의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 빛이 눈송이처럼 흩날리도록 천장에 걸어둔 마법, 가격을 깜박 잊은 듯 홀 곳곳을 장식한 전구들. 거기에 빛이라기보다는 분위기를 위해 세워둔 듯한 촛불이 아른아른 빛났다. 초와 마법이야 기본적인 장식이지만, 마도공학의 정수라 불리는 전구를 한 자리에서 이렇게 많이 보는 건 또 처음이었다.

 홀에 들어섰을 때 개회식은 모두 끝나있었다. 느긋하게 산책을 마치고 도착한 보람이 있어 폐하의 근사한 말솜씨를 견문할 기회는 놓치고 말았다. 오호통재(嗚呼痛哉)라. 나는 안타까운 마음을 차마 감출 수 없어 촉촉한 눈가를 훔쳤다. 앳된 아가씨 하나가 나를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쉿. 회심의 미소는 비밀이에요.

 홀 깊숙이 들어가 사람들 사이에서 목표물을 탐색했다. 비싼 돈을 들여 텔레포탈을 타고 수도까지 날아온 보람을 줄 존재, 바로 오늘의 무도회에 어울리는 향기로운 꽃이 필요했다. 휴식을 방해받은 대가는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아름답게 피어난 아가씨가 없다면 맛 좋은 가십거리도 괜찮다.

 홀을 가득 메운 참가자들은 가장무도회에 걸맞게 짙은 분장이나 화려한 가면으로 자신을 가리고 있었다. 왕이 직접 내리고 실천하는 명령을 함부로 거역하는 간 큰 인사는 몇 없었다. 그는 자신이 푸른 하늘을 먹구름으로 덮으려고 했다는 것을 알까. 가면을 든 손을 살짝 옆으로 기울이자 내 쪽을 훔쳐보던 귀부인이 손 키스를 보냈다.

 마왕이 저지른 오 년간의 악행과 전쟁으로 나라가 한 번 무너졌다. 오백 년의 긴 평화와 풍요는 신기루처럼 바스러졌다. 마왕이 마왕이라고 불리는 것은 마에서 시작된 존재여서가 아니다. 다른 세상에서 온 탓도 아니다. 그건 그가 마왕의 이름을 가지게 된 계기에 지나지 않았다. 마왕이 마왕이 된 것은 전쟁과 학살을 즐기는 잔혹한 성정 탓이었다. 실리도 예법도 무시하고 그저 육체의 즐거움만을 쫓는 무도한 치세 탓이었다. 백성들은 공포와 증오를 담아 그를 마왕이라 일컬었다. 그 이름은 피와 영혼을 싣고 오래도록 전해졌다. 오백 년의 긴 역사가 모든 걸 묻어버리기 전까지는.

 약 오 년간 이루어진 마왕의 치세는 나라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망가진 국토가 너무 넓었다. 잃어버린 사람이 너무 많았다. 기름진 대지에는 붉은 비가 내리고 눈물이 모여 강이 흘렀다. 고작 오 년. 그 오 년 동안 삶이 완전히 망가졌다. 아직도 마왕의 치세를 견딘 이들은 마왕을 향한 두려움에 떨었다. 삼십 년을 잊으려 노력했지만, 악몽이 가시지 않았다. 마왕을 겪지 못한 어린 청년들은 황폐한 땅과 메마른 인심 속에서 공포와 적의를 배웠다.

 귀족들 사이에서는 아직도 마왕의 치세동안 안온히 집을 지켜낸 지방과 그렇지 못한 지방 사이 갈등이 심했다. 삼십 년이라는 절대 짧지 않은 시간은 사랑하는 가족과 충성을 맹세한 주군을 잃은 상실감을 지워주지 못했다. 마왕이 사라지고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긴장감이 사라지자 삶을 송두리째 빼앗긴 비탄이 찾아왔다. 땅과 집과 가족을 잃은 이들의 원성이 빗발쳤다. 고통은 귀족과 평민을 가리지 않았다. 온 나라가 통곡했다.

 갓 왕위에 오른 실라나이우스는 갈 곳 잃은 분노를 마왕과 그의 치세를 가져온 반역자들에게 돌리기 위해 노력했다. 훌륭한 왕이었지만, 한 사람의 인간이었다. 왕은 어떤 노력으로도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을 통제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갖은 노력 끝에 많은 아픔이 마왕의 탓이 되었지만, 사람들은 슬픔을 견뎌내기 위해 이웃을 원망했다. 마왕에게 협력한 가문과 세력을 모두 쳐냈지만, 감정의 골은 전혀 좁아지지 않았다. 가장 힘든 순간에 도움을 거부한 이웃과 살아남기만도 벅차 모든 손을 놓아버린 이들이 서로를 원망했다. 살라나이우스의 뒤를 이어 왕관을 물려받은 녹스 E. 네레우스는 선왕이 살린 나라를 안정시키려 부단했다.

 그 결과가 여기 있었다. 나는 웃었다. 우스꽝스러운 가면이 사람들을 실에 꿰인 인형처럼 만들었다. 넓은 홀은 인형극 무대였다. 사방이 옷과 머리에 엄지손톱만 한 큐빅을 덜렁이며 만면에 행복을 그린 인형으로 가득했다. 막이 오르자 일곱 빛깔 보석이 광채를 발하고, 인형들은 일제히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이곳 어딘가에 숨어있을 엘리엇 샬마르크에게 경배를. 비록 멍청한 얼굴을 한 인형이었지만, 눈먼 용기만큼은 존경할 만 했다.

 나는 무대에 선 인형답게 저 멀리 높은 곳에 앉은 광채에게 절한다. 우스꽝스러운 광대놀음에 빠지는 건 예로부터 의자가 높은 자의 특권이지요. 아무리 광대놀음에 눈이 멀고 귀가 먹어도 당신의 발등에 입 맞춘 신하를 잊지 마시길.

 파티장을 느긋하게 돌았다. 음식을 나르는 시종의 접시에서 바질과 캐비어를 얹은 카나페를 집어 든다. 큰 행사를 맞아 화사하게 단장한 여인들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어디 보자.

 벽에 붙어 와인을 홀짝이는 저 소녀는 테샬리트 가주가 사랑하는 꼬마 아가씨다. 듣자 하니 마력은 대단치 않지만, 지력이 뛰어나 마법은 물론 갖은 학문에 능통하단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젊은 남자들이 잔뜩 몰려있다. 사랑을 갈구하는 전도유망한 기사들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들 머리 위로 삐죽 솟아 있는 얼굴은 위풍당당하면서도 아름답다. 그녀는 도블링 영지에 속한 사무엘가 출신 검사로 실력이 뛰어나고 아름다웠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팬이 많아 각지에서 팬레터가 날아든단다.

 저녁을 대충 길거리 음식으로 때운 탓인지 얼마 걷지 않았는데도 배가 고팠다. 나는 시종을 아예 불러 세웠다. 체면도 모르고 연달아 음식을 집어 먹자 경악한 표정을 했다.

 “왔구나, 디트리히.”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식사를 포기했다. 시종은 내 손이 멈추자마자 달아나듯 떠나버렸다. 나는 혀에 남은 카나페의 잔여물을 아쉽게 삼키며 돌아섰다. 천상의 미소가 나를 반겼다. 플로리안은 마치 처음으로 꽃이 피는 순간을 목격한 어린 소녀처럼 맑게 웃었다. 나만큼이나 아름다운 이 미청년은 긴 은발을 말총처럼 늘어뜨리고 짙은 푸른색 코트를 걸쳤다는 것을 제외하면 나와 거의 흡사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와 나의 분위기는 천지 차이로 달랐다.

 “개회식에 보이지 않더구나. 즐거운 일이 있었니?”

 플로리안은 상냥하고 아름답게 웃으며 물었다. 가면에 가려져 있는 형의 얼굴이 눈만 보고도 마음속에 그려졌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을 바라보는 듯한 다정한 미소는 동생을 향하기에 흠이 없었다.

 “형도 나가보는 게 어때. 올해 같은 페리아 파그메는 또 없을 거야.”

 나는 플로리안 디히터의 꿀이 떨어질 듯한 애틋한 눈빛을 건조한 미소로 받아쳤다. 훔쳐보는 영애들의 안타까운 한숨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네가 그렇게 추천할 정도라니 나도 꼭 보고 싶다. 같이 나가볼 걸 그랬어.”

 플로리안은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나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형의 혼신을 다한 역할 수행은 이미 지루함으로 말라붙고 있던 내 마음을 적셨다. 이토록 플로리안이 최선을 다하는데 이 정도도 해주지 못할쏘냐. 나는 마음을 담아 플로리안에게 대답했다. 지금은 볼거리가 많이 줄었겠지만, 형과 함께라면 당장에라도 마차를 준비하겠노라고. 사랑하는 플로리안은 곤혹스레 웃으며 내년에는 꼭 함께 축제를 구경하자는 약속을 남겼다.

 플로리안이 떠나고 나는 또 다른 접시에서 스파클링 와인을 집었다. 달콤한 향을 콧속 깊은 곳까지 빨아들이며 근처에 있는 서랍장에 몸을 기댔다. 삼삼오오 모여있는 인파 속에는 알아볼 수 있는 인물이 제법 끼어있었지만, 어디에도 즐거운 모임이 없었다. 외로운 아가씨도 없고, 흥겨운 음악도 없었다. 영광스러운 자리를 만들어주신 하늘의 가장 높은 영광이 계시면 인사라도 올려볼 것을. 보아하니 개회식에 지친 몸을 달래느라 자리를 비운 듯했다.

 입술을 적시고 이것저것 음식을 집어 먹다 보니 어느덧 배가 불렀다. 슬슬 움직여볼까 하는 찰나에 음악이 바뀌었다. 잔잔하게 귓가를 간지럽히던 리듬이 흥겨워졌다. 인파를 헤치고 돌아다니던 시종들이 자취를 감췄다. 홀 가장자리로 사람들이 밀려 나왔다. 살과 살을 맞대고 진정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중앙에서 밀려 나온 사람 중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나는 반가움에 성큼 그에게 다가갔다. 꽉 조인 허리 아래로 한껏 부풀린 스커트는 고귀한 보랏빛. 한 떨기 제비꽃처럼 아리따운 그를 이 팔에 가둬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심장에 바람이 든 듯 가슴이 설렜다. 그 이름하여 마하 로즌기프트. 이름에서부터 느껴지는 장미 향이 매혹적인 여인이었다.

 어두운 자줏빛 레이스 장갑 위로 검은 나비를 붙잡은 그는 어딘가 지친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뒤늦게 도착한 나와 달리 처음부터 자리를 지켰다면 지칠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발걸음을 늦췄다. 망상이라고 해도 좋지만, 위화감이 들었다. 마하 로즌기프트가 이 정도 파티에 지칠 사람이던가? 절로 고개가 기울여졌다.

 과거 그와의 만남을 되짚는다. 운명적인 첫 만남은 데뷔탕트였다. 날씬한 허리와 가녀린 팔은 내 마음을 사로잡을 만했다. 지금이니 단언하지만, 나는 그에게 첫눈에 반했다. 누군가는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걸 죄악이라 한다. 그러나 내 사랑에는 한 점 부끄러움이 없었다. 눈을 가진 이가 아름다움에 빠지는 것은 벌과 나비가 꽃을 찾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일이다. 갓 성인이 된 꽃다운 그는 낯선 만남에 모두가 긴장하고 있는 가운데 홀로 봄바람이 되어 나부끼는 여인이었다.

 그 후로 나는 그를 찾아 헤매었다. 혹여나 우연이 겹쳐 만나지 않을까 많은 살롱에 참가했다. 목적은 이루지 못했지만, 무척 즐거웠음은 부정하지 않으리라. 살롱을 꾸리는 부인이란 희귀한 것과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생물이고, 나는 그 두 가지 모두였으니 내가 어느 살롱에 가나 환영받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말인즉, 나는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사내의 안부인과 안면이 있다.

 놀라운 것은 전국의 살롱을 다 돌아다녔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조우한 것은 고작 두 번이었다는 점이다. 가끔은 그가 경계해 달아나는 게 아닌가 싶은 순간도 있었다. 안타깝게 만남을 놓친 어느 날에는 쓸쓸함에 술과 시와 노래로 감상적인 밤을 보내기도 했다. 나는 한참을 우울해 있었지만, 다음날 참석한 살롱에서 그가 모임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그날은 정말 즐거운 하루였다.

 그토록 애타게 기다린 만남이었다. 아주 사소한 것도 잊을 수 없었다.

 마침내 그와 조우한 것은 사이어드 부인의 소개로 초대받은 티파티에서였다. 테샬리트가의 영애가 새로 맞춘 승마복을 선보이기 위해 준비한 자리였는데, 고르고 골라 어렵게 장만한 승마복처럼 참가자도 아주 까다롭게 골랐기 때문에 영애와 친밀한 사이어드 부인의 살롱이 아니었다면 내게 기회가 돌아오진 않았을 터였다. 그랬으면 나는 한동안 실의에 빠졌을 테지.

 어쨌든 벼르고 별러 조우한 마하는 내 기억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나는 충격에 얼어붙었다. 나는 나 말고 아름다움이 성장하는 이를 본 적이 없었다. 마하는 내 미화된 기억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나는 이미 반해 있었지만, 그 순간 내 심장에는 붉은 꽃이 폈다.

 그날의 티파티가 어땠는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수많은 살롱에 참가하며 어떤 손님과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하는 게 특기인 내게는 지금도 생소한 일이다. 기억나는 건 마하가 플로리안과 비슷한 미소를 짓는다는 사실과 그의 굽이치는 검은 머리가 무척 예쁘다는 것뿐이었다. 수많은 아가씨의 허리를 끌어안고 가슴에 얼굴을 묻어본 지금도 나는 마하의 머리카락을 만져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얼굴을 보자마자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온 과거의 기억과 대조된 마하는 한층 기이했다. 지친 마하라. 세 번 만나 두 번 인사한 사이였다. 내가 그를 모르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나는 내 눈을 믿었다. 마하는 여유롭고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왕이 직접 소집한 파티에서 피곤한 모습을 보일 사람이 아니었다. 비록 꿀처럼 달콤한 미소 속에 무엇이 숨어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결코 웃음을 잃을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드디어 진저리 나는 권태가 떠나가고 있음을 느꼈다. 심장이 두근두근 소리를 냈다. 이로써 명확해졌다. 마하 로즌기프트, 그는 내 인생을 바꿀 키였다. 못생긴 인형들 속에서 살아 숨쉬는 단 하나의 보석. 나는 거침없이 그에게 다가갔다.

 이건 그저 호기심이고 못된 장난이었다. 단순히 컨디션이 나쁜 날일 수도 있다. 아주 못생긴 남자를 봤을 수도 있겠지. 마하가 평소와 조금 다르다고 이상한 일이라고 단정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평소와 다른 모습에 끌리는 순간이란 진정한 사랑의 서막 같은 것. 나는 이것이 운명임을 확신하며 안색이 나쁜 마하의 뒤에 그림자처럼 붙었다.

 마하는 막 샬마르크가의 도련님을 떠나보내는 중이었다. 춤 상대를 요청했다가 퇴짜맞은 청년의 어깨가 축 처져있었다.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마하에게 오늘의 첫 파트너를 부탁하기로 마음먹었다.

 “좋은 밤 되고 계시는지요, 레이디 마하.”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손을 내밀었다. 마하는 놀라지도 않고 태연하게 돌아섰다. 형식적인 미소는 역시 어딘가 평소와 다르다. 그가 내 손등에 입 맞추고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마하는 평소처럼 상냥하게, 그러나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미소를 머금고 채 내게 답했다.

 “절 기억하고 계셨군요.”

 “어디 아프십니까? 안색이 안 좋네요. 예쁜 얼굴에 그늘 지면 안 되지요.”

 “눈썰미가 좋으시군요. 아침부터 줄곧 정장을 하고 있었더니 피로하네요.”

 특별히 귀엽다고 칭찬이 자자한 미소에도 마하는 흔들리는 기색이 없었다.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그림처럼 미소 짓는 그가 원망스러워 괜스레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살롱의 부인들만큼 호락호락하지는 않으리라 예상했지만, 날 이렇게 박대할 수가 있을까. 살며시 내리뜬 하얀 눈꺼풀이 나를 향했다. 마하는 막대 손잡이가 달린 가면을 얼굴로 바짝 들이대며 생긋 웃었다. 벌침처럼 따끔한 미소였다. 거절이 분명한 표정이었지만, 쉽게 물러갈 생각은 없었다.

 “저와 한 곡 추시겠습니까?”

 마하에게 팔꿈치를 내밀었다. 마하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한층 진해졌다.

 “보시다시피 손이 없어서 힘들겠네요. 디히터경께서도 경을 원하는 분과 함께하시는 쪽이 즐거울 테고요.”

 “아리따운 분과 함께라면 어느 때고 즐겁지 않겠습니까. 저는 레이디와 함께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떨리는데요.”

 가면 사이로 그에게 윙크했다. 간지러운 대화를 즐기기 위함이라면 못 이기는 척 팔에 손을 때가 지났음에도 마하는 움직임이 없었다. 자세를 바르게 하고 마하를 마주 보았다. 고요한 미소가 차가운 거절을 말하고 있었지만, 나는 아직 포기할 마음이 없었다.

 “레이디.”

 다정하게 부르자 마하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나는 성큼 그에게 다가섰다. 한껏 부풀린 스커트가 내 다리를 휘감았다. 반사적으로 뒤로 빠지려는 마하의 어깨를 한 손으로 붙들었다. 가엽게도 가녀린 어깨가 긴장해 있었다.

 “협조하지 않으면 정체를 까발리겠어.”

 협박은 아니다. 생감자인지 익은 감자인지 확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마하에게서 떨어지며 주변을 살폈다. 이목을 끈 것 같지는 않았다. 마하는 예쁜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있었다. 아직은 확신할 수 없다.

 “함께 춤추실까요?”

 그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나는 승리를 자축했다.

 손에 들고 있던 가면을 미리 준비한 끈으로 머리에 고정하고 손잡이는 허리춤에 따로 고정했다. 마하는 단장할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기껏 단장한 머리를 망가뜨리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마하를 기다리며 무대를 감상했다. 막 시작된 댄스 타임은 가볍고 빠른 템포로 다 함께 추는 곡이었다. 일반적으로 오늘처럼 주최가 또렷한 파티라면 주최자나 그날의 주인공을 선두로 세우지만, 오늘은 참가자들의 화합을 위한 파티다. 어느새 돌아왔는지 의장을 일부 덜어낸 듯한 차림의 왕이 상석에 앉아 홀을 굽어보고 있었다. 무대를 장식한 것은 젊은 청년들이었다.

 시작은 미리 언질을 받았음이 분명한 한 무리의 아가씨들이었다. 마하에게 말을 걸기 전에 그들이 대형을 이루어 춤을 시작하는 것을 보았다. 파트너가 필요한 대목에 들어서면서 신사들이 뛰어들었다. 그들 역시 아직 파릇한 나이의 젊은이들인 것을 보아 미리 손을 맞춘 게 틀림없었다. 나는 일사불란한 청년들 속에서 플로리안의 얼굴을 발견하고 웃었다. 마하가 그런 나를 곁눈질했다.

 음악에 맞춰 파트너가 바뀌는 시간이 되자 홀로 지켜보던 이들도 하나둘 대형에 끼어들었다. 점점 커지는 원을 보며 갈등하는 사이 마하가 돌아왔다. 신호하기도 전에 그가 먼저 앞으로 나섰다. 나는 재빨리 마하를 따라잡으며 대형에 끼어들었다. 막 파트너 교체가 끝난 참이었다.

 허리를 감싸 안자 자연스럽게 어깨 위로 마하의 팔이 감겼다. 손가락 끝에 느껴지는 코르셋의 단단함과 아찔하리만치 가는 허리가 생생했다. 상상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둘레였다.

 음악에 맞춰 스텝을 밟았다. 마하는 숙련된 솜씨로 리듬을 맞춘다. 대형이 고정되어 사람들은 각자의 파트너에게 집중했다. 나는 내 품에 안긴 이의 희고 창백한 피부와 날카로운 턱선, 그리고 무엇보다 붉은 기가 도는 자줏빛 눈에 정신을 빼앗겼다. 웃고 있는 입가와는 정반대로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였다. 은은하게 독한 꽃향기가 났다.

 나도 모르게 새기 시작한 마하의 깜빡임이 열두 번에 이르렀을 때 마하가 말했다.

 “영식에게 사람을 놀리는 취미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제게 장난을 거실 줄은 몰랐네요.”

 레이스처럼 만들어진 검은 가면 너머로 열세 번째와 열네 번째 깜빡임이 보였다. 경쾌한 박자에 맞춰 춤을 추며 말하는 건 보기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난 만남이 보통 즐거운 것이었어야지요. 틀림없이 응해주실 줄 알았어요.”

 애교 있게 웃어보았지만, 마하는 전혀 반응이 없었다. 미소에도 말에도 반응이 없는 그를 상냥하게 지켜보았다. 흐르는 음악에 맞춰 경쾌하게 앞으로 두 번, 뒤로 세 번, 오른쪽으로 두 번을 뛰고 허리를 감싼 팔을 풀었다. 손을 놓고 뒤로 빠져 안무를 하고 돌아오니 이번엔 마하가 손짓으로 안무하며 내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따로 맞추지 않고도 정연한 군무였다.

  “디히터가의 둘째 아들이 상상 이상의 망나니라는 건 유명한 이야기지요. 부인들 사이에서 굉장히 유명하시더군요.”

 다시 마하의 허리를 붙들고 다리를 앞과 뒤로 흔들었다. 마하는 숙련된 댄서여서 이 안무가 있을 때면 으레 생기는 사고가 없었다. 누군가 파트너의 다리를 걷어찼는지 작게 앓는 소리가 들렸다. 호기심이 들었지만, 그보다는 마하의 딱딱한 표정이 걸렸다.

 “반항아로 지낸 세월이 길어 이름을 잊은 건 아니신지요.”

 눈동자가 맑게 빛나고 입술연지를 듬뿍 바른 아가씨들에게 비하면 창백한 얇은 입술이 빙그레 웃었다. 나는 얼굴 근육을 활용해 한껏 아쉬운 표정을 만들어냈다.

 “서운합니다. 그렇게 어리석어 보였습니까? 제가 조금 자유분방하나 아름다운 로즌기프트의 영애를 앞에 두고 본분마저 잊는 사람은 아닙니다. 오히려 레이디의 눈부신 미모를 영접하니 긴장해서 숨이 다 가쁜걸요.”

 나는 과장스레 심호흡하는 시늉을 했다. 마하는 수수께끼 같은 미소를 머금었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아름다운 분께,”

 한 손을 맞대고 한 걸음 멀어졌다가 빠르게 교차하며 자리를 바꿨다. 마하는 거리가 멀어지자 입을 다물었다. 안무에 맞춰 거리를 좁히면서 평소 춤추면서 보는 걸이보다 가깝게 얼굴을 마주했다.

 “어떻게 그런 실례를 저지르겠습니까.”

 나는 자연스레 자신만만하게 미소 지었다가 마하의 냉랭한 표정에 얼굴을 굳혔다. 안무에 맞춰 바싹 다가붙은 댄서들은 뒤로 한 번 걸음 물러나 파트너와 동시에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았다.

 “당신에 대한 소문은 알고 하는 말인가요?”

 “제 귀는 당신만을 향해 있답니다.”

 다시 허리에 팔을 감자마자 튀어나온 질문에 빠르게 답했다. 마하는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고운 미간에 그늘이 졌다.

 “제 마음을 맞춰보시겠어요?”

 마하는 도발하듯 턱 끝을 치켜들고 눈을 반쯤 내리떴다. 가면의 눈구멍 사이로 긴 속눈썹이 조명을 받아 녹색으로 빛났다. 가면에 날카로운 콧날이 가려진 게 아쉽다. 대형을 맞춰 마하와 함께 빙글빙글 돌았다.

 “디히터씨와 대화하니 즐겁다?”

 “아하?”

 마하는 비뚜름히 미소 지은 입가에 더불어 한쪽 눈썹까지 치켜들었다.

 “디히터씨는 잘생겼다?”

 마하가 코웃음 쳤다. 놀랍게도 마하는 그 소리마저 예뻤다.

 “이것도 아니라면 뭘까요, 이렇게 멋진 사람과 함께 있는데 딴생각을 할 리도 없고.”

 악단의 연주는 주 멜로디를 마치고 다시 후렴구에 들어섰다. 처음 우리가 끼어들었을 때처럼 대형이 다시 원형으로 바뀌었다. 춤을 추던 사람들이 빈자리를 찾아 들어가며 홀이 어수선해졌다, 나는 마하를 이끌고 안쪽의 작은 원에 섰다.

 “힌트 없어요? 다들 나만 보면 뭐라도 더 주고 싶어 하는데 뭔가 알려주고 싶지 않아요?”

 왼쪽 눈을 찡긋거리며 애교를 부려봤지만, 그는 가소롭다는 표정이었다. 정말로 이 사람에게는 미인계가 먹히지 않는 모양이다. 아쉬워라.

 음악이 흐르고 대형이 완성되자 느긋하게 흐르는 선율에 맞춰 사람들은 파트너의 손을 놓고 원의 안팎으로 벌어져 인사를 했다. 이제 남자가 제자리에서 왼쪽으로 한 번, 오른쪽으로 한 번 뒤쪽으로 돌아보듯 스텝을 밟고 왼쪽으로 한 바퀴를 빙글 돌면 그동안 여자가 옆으로 이동해 파트너가 바뀌는 안무였다. 나는 마하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고 놓지 않았다.

 “직접 졸라주지 않으셔도 제 허리는 이미 코르셋이 단단히 조이고 있어요.”

 마하는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속삭였다.

 “아직 답을 듣지 못했어요. 말씀드렸잖아요. 저는 당신만 보고, 당신의 말만 듣고 있답니다.”

 마하의 손에서 힘이 빠지기를 기다려 놓아주었다. 내가 아무 일 없는 듯 안무를 따르자 마하도 안무에 맞춰 추되,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 무도회에 익숙한 귀족들은 돌발상황에도 자연스레 자리를 찾아갔다.

 빠른 템포의 음악과 함께 파트너가 한차례 바뀌자 다시 음악이 느려졌다. 사람들은 새로운 파트너와 인사하고 손을 맞잡았다. 물론 내가 잡은 것은 마하의 손이었다.

 “답을 맞힐 자신이 있으니 큰소리를 쳤겠지요?”

 나는 실없이 웃었다. 자신 같은 건 없었다.

 “마하 로즌기프트가 어서 돌아왔으면 좋겠다?”

 마하가 정색했다.

 “농담이 과하군요.”

 “농담에 이끌려온 분이 하실 말씀은 아니지요.”

 “당신의 놀음에 흔들렸다고 생각하나요.”

 “그럴 리가요.”

 원형 대형을 유지하며 안무가 이어졌다. 나는 마하의 가느다란 허리에 깃털만큼이나 가볍게 손을 얹고 있었다.

 “현명한 로즌기프트가의 장녀분이 저 같은 망나니 귀족에게 어디 눈길이나 주시겠습니까. 제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확인하려 하셨겠지요.”

 마하는 싸늘하게 나를 쳐다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이번엔 내가 정색할 차례였다.

 “디히터 가는 최근 가주 경쟁이 치열하다더군요.”

 “말 돌리시깁니까?”

 무도회장에서 웃는 얼굴은 무기다. 나는 내 무기를 쉽게 내팽개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알기로는 마하도 그랬고 그게 내가 그에게 느꼈던 동질감이었지만, 대화할수록 느껴졌다. 이 사람은 마하가 아니었다. 마하는 이제 자신이 마하라고 주장하는 것에도 질린 듯했다. 그럼 나는 그를 무어라 불러야 할까.

 “장남이 가주 자리를 물려받기는 하였으나 장녀가 납득하지 못해 소란이 끊이지 않는다는 소문이 로즌기프트의 땅에까지 들려옵니다. 실제로는 들리는 것보다 더하지 않겠어요? 영식께서는 어떻게 건강히 지내고 계시는지요?”

 나는 매일 거울 앞에서 한 번쯤은 지어보는 그대로 아름답게 미소 지었다. 살롱에서 만난 부인과 영애들이 항상 보아왔던 바로 그 미소였다. 내가 웃으면 대체로 여인들은 혼이 나간 듯 넋 나간 표정을 했다.

 “겪어보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형제간 다툼이라는 게 그렇지요. 제 누이가 보통내기가 아니어서요.”

 마하, 아니, 이름 모를 그는 지금껏 그래왔듯이 내 미소에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미소는 가시 돋친 장미보다도 아름답다.

 “세력 싸움에 낀 차남 디트리히는 숨도 못 쉬고 그저 목숨을 부지하기 바쁘다던가.”

 그는 농담처럼 가볍게 읊조렸다.

 “하나뿐인 목숨인데 귀히 여겨야지요.”

 시작을 열었던 경쾌한 음악이 끝나고 짧은 정적이 찾아왔다. 곧 상대적으로 템포가 느린 잔잔한 음악이 시작된다.

 “제 누이가 그러더군요. 그 가문에서 가장 능구렁이는 차남 디트리히 디히터일 거라고.”

 마하의 얼굴을 한 그는 평소보다 약간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나는 그제야 마하의 동생을 떠올렸다. 이름이 네만이라고 했던가. 네만 로즌기프트. 그래, 마하에게는 동생이 있었다. 무척이나 사이가 좋은 꼭 닮은 자매라는 소문이 흘러 흘러 들어왔다. 그 존재가 의심될 정도로 목격한 이 하나 없는 동생이었다. 나는 내면의 놀라움이 겉으로 새어 나올까 활짝 웃었다.

 “드디어 제 매력을 알아주셨군요. 제가 보통 뛰어난 게 아니지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습니다.”

 대형은 서서히 흐트러졌다. 춤을 추던 사람들은 파트너를 끌어안고 춤을 출 자리를 찾기도 하고, 인사를 하고 헤어지기도 했다. 대형이 흐트러지자 사람이 빠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빈자리가 생기자 느긋하게 파트너와 춤을 즐기고 싶었던 이들이 새로 중앙으로 들어왔다.

 “당신의 누이도 당신을 똑 닮아 아름다운 분이시죠.”

 그가 코로 웃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네만으로 추정되는 내 파트너는 매혹적으로 미소하며 능숙하게 스탭을 밟았다. 그는 정말 춤을 잘 췄다.

 “개와 닭이 지붕을 사이에 두고 다투는데 고양이가 담장을 넘나들며 개도 닭도 이길 수 없도록 이간질을 하고 있다더군요. 덕분에 개는 제대로 대장 노릇을 하지 못한다고요.”

 나는 하하 소리 내 웃었다.

 “과찬이십니다.”

 그는 내 팔 안에서 투명한 보석 같은 눈을 빛내며 우아하게 웃었다. 본디도 키가 크고 자세가 곧은 여인이었다. 나는 나보다 반 뼘이 높은 그와 눈높이를 맞추고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그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제가 누구라고요?”

 “마하 로즌기프트, 로즌기프트가의 뛰어나고 아름다운 후계자이십니다.”

 나는 기쁘게 선언했다. 네만은 눈부시게 웃고 내 팔을 놓고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홀 바깥을 향해 걸어갔다. 우리가 춤을 추던 자리에는 다른 연인이 흘러든다. 나는 다급히 그를 따라갔다.

 “그래서 이름은 안 알려주실 겁니까?”

 “이미 알고 계시잖아요?”

 네만이 쏘아붙였다. 홀을 빠져나가려는지 문을 향해 곧장 걸어가는 그의 뒤를 따르며 커튼이 쳐진 발코니의 위치를 확인했다.

 “당신 입으로 말해주지는 않으실 겁니까?”

 “생각해보죠.”

 나는 잠시 고민하고 그대로 네만의 손목을 낚아챘다. 휘둥그레진 눈에 기뻐할 새도 없이 네만을 끌고 발코니로 다가가 커튼을 붙들었다. 이대로 놓치면 결코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다. 당신 입으로 말했지요. 디트리히 디히터는 디히터 가문에서 가장 능구렁이라고. 자, 내가 당신을 놓칠까요? 맞춰보세요.

 “어떠십니까, 레이디. 제게 당신의 소중한 것을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움켜쥔 네만의 팔을 느슨히 잡고 커튼을 반쯤 들어 올렸다. 예쁜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나를 바라보던 네만은 곧 손목을 비틀어 빼내고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 했다. 어느새 새침하게 돌아온 표정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했다. 네만이 발코니로 다가서기에 손을 더 높이 들어 사람 하나가 드나 들만한 공간을 만들었다. 네만은 발코니 앞에 서서 나를 돌아보았다.

 “앞으로는 품위 있게 행동하세요.”

 그날 네만의 구두 소리를 아마 평생 잊을 수 없으리라. 나는 그렇게 확신했다.

 페리아 파그메의 밤은 아침까지 이어졌다. 가면무도회는 아침까지 이어졌다. 나는 그날 살아생전 다시는 볼 수 없을 밤하늘을 보았다. 가장 크고 빛나는 별이 떨어진 밤하늘은 다시는 세상을 그토록 아름답게 비추지 못했다.

 왕자 인형은 끈이 떨어진 여자 인형을 무대 뒤에 몰래 숨겼다. 망가져 쓸모를 잃은 여자 인형은 다시는 무대에 설 수 없었지만, 연모하던 왕자 인형과 하나가 되었다. 무대에서는 이야기가, 무대 뒤에서는 현실이 우스꽝스럽게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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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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