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카 타입 자캐



 끈적거리는 습기에 일본에 서있다는 실감이 났다. 섬나라는 끈적거린다. 바다의 습기를 머금은 끈적하고 소금기 어린 공기가 모국의 공기였다.

 미스즈는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가방끈을 추스르고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민가에서 이어지는 길에 하얀 건물이 우뚝 서있다. ○○○ 종합 병원. 편의점과 산책로가 이어지는 뒷문으로 진입하자 오래된 병원의 낡고 깨끗한 내부가 미스즈를 반겼다.

 두개 시를 합쳐 가장 큰 종합 병원이니만큼 외래환자도 적지 않다. 미스즈는 복잡한 대기석을 포기하고 주변을 살폈다. 전화를 할까 고민하는 사이 기다리는 사람이 나타났다.

 진한 검은 머리에 말갛고 순한 인상의 젊은 남자였다. 아직 마흔도 채 되지 않은 듯 깨끗한 얼굴과 선한 눈매는 미스즈가 그리워하던 사람과는 많이 달랐지만 웃는 옆얼굴, 하얀 목덜미가 닮았다. 미스즈는 가볍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케미 소이치로씨인가요?”

 “안녕하세요. 시이나 미스즈씨죠? 처음 뵙겠습니다.”

 아케미 소이치로는 다정스럽게도 웃으며 미스즈의 손을 잡았다. 생각보다 손이 컸다.

 * 

 두 사람은 소이치로의 집으로 향했다. 병원에서 무척 가까운 작은 집이었다. 몇 년 전까지만해도 조카와 함께 그럴듯한 집에서 살았지만 독립을 원하기에 집을 넘겨주고 자기가 나왔다고 했다. 미스즈는 무심코 그리운 사람을 떠올리고 만다. 희생정신도 상냥함도 그 사람을 닮았다.

 남자 혼자 사는 집치고는 깨끗하고 아기자기한 집안을 둘러보는 사이 소이치로가 다과와 앨범을 들고 왔다. 그 위에 쌓인 건 아마도 비디오. 요즘 저게가 있을까? 미스즈는 신기해하며 그가 들고 온 것들을 살펴보았다.

 소이치로가 들고 온 앨범에는 미스즈가 몇 년을 그리워했는지 모를, 그리운 그 사람의 얼굴이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빛은 다소 바랬지만 분명히 그 사람이었다. 아케미 마리. 어린 미스즈를 돕고자 했던 몇 안 되는 소중한 추억의 그 사람. 사진 속 마리는 웃음기 없는 딱딱한 표정이었지만 미스즈는 마리의 미소를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누나는 항상 어려운 사람에게 관심이 많았어요. 하지만 직접 인연이 있는 사람이 찾아온 건 처음이네요. 누나의 지인들은 대부분 누나의 동료였거든요.”

 소이치로는 김이 오르는 커피잔을 들고 그리운 눈으로 앨범을 훑었다. 그는 무척 적극적이어서 미스즈는 마리에 대해 궁금해하지 못한 부분까지도 들을 수가 있었다.

 “당시의 누나는 무척 마음이 약해져 있었어요. 절대 그렇게 포기할 사람이 아닌데 그렇게 가버렸죠.”

 소이치로는 눈물을 훔쳤다. 마리가 세상을 뜬지도 벌써 이십년이 지났다. 아직도 눈물이 나오는 것일까. 미스즈는 무덤덤하게 소이치로를 바라보았다. 남이 흘려주는 눈물이 고마웠다. 미스즈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매마른 미스즈의 가슴은 눈물 대신 통증을 호소했다. 심장 언저리, 정확히는 그보다 조금 아래쪽 배인지 허리인지 모를 곳이 찌르는 듯이 아팠다. 내색하지 않고 소이치로가 미스즈의 요청대로 진하게 내려준 커피를 한모금 머금었다.

 “혼자 사는 형제분이 이런 걸 다 가지고 계시는군요.”

 아, 그게요.

 그렇게 운을 뗀 소이치로는 기다렸다는 듯 기쁜 얼굴을 하고 옛날 이야기를 떠들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독립적이고 부모님에게 반항적이었던 큰 누나의 이야기였다. 어린아이의 눈으로 바라본 마리가 얼마나 멋있었는지 느껴졌다. 미스즈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아홉살 여름이었다. 그날도 부친은 주민등록에도 올라있지 않은 미스즈의 생모와 뒹굴기 위해 어린 미스즈를 길바닥으로 쫓아냈다. 막내는 장에 들어가 소리도 없이 잠들었으므로 쫓겨난 건 미스즈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막내까지 데리고 길거리에 앉아있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간을 보내기 위해 해도 뜨지 않은 놀이터 그네에 앉아 시간을 보내던 중이었다. 머리를 허리까지 기른 예쁜 여자 어른이 놀이터를 지나다 미스즈를 발견했다. 우연이 그들을 비껴갔는지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만난 마리는 부친의 폭력과 굶주림에 시달리는 미스즈를 집으로 데려가 먹이고 씻겼다. 긴 만남은 아니었다.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건 기뻤지만 아버지의 눈을 피해 혼자서 빠져나오는 게 힘들어 몇 번 보지 못했다.

 미스즈가 만난 마리는 특이하긴 했지만, 마냥 상냥하고 다정하고 예쁜 사람이었다. 소이치로가 이야기하는 어린 시절의 마리, 대학 시절의 마리는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하지만 그런 소이치로의 이야기 속에서도 미스즈가 아는 마리가 살아있었다. 소이치로의 얼굴에서 부분부분 마리의 그림자가 스치는 것처럼 그렇게 마리가 보였다.

 남의 이야기에 호응하는 기술이 모자란지라 제대로 대꾸도 해주지 못했는데 소이치로는 한참을 이야기했다. 그 이상 하라고 해도 할 수 없는 미스즈는 그런 소이치로의 넉살이 고마웠다. 그리운 사람의 흔적이 보일 때마다 고개를 주억이고 몇마디 던졌을 뿐인데 소이치로는 무척 기뻐보였다. 미스즈도 기뻤다. 마리의 추억은 온전히 미스즈의 것이어서 아무와도 공유할 수 없었던 세월이 무려 이십년이었다.

 서로 다른 소파에 앉아있던 두 사람은 비디오를 보기 위해 같은 소파에 모여앉았다. 소이치로가 말하길, 앨범의 사진과 비디오는 진작에 디지털 데이터로 업로드를 마쳐둔 상태라고 했다. 비디오도 사진도 자꾸 만지면 닳고 망가지니까 잘 꺼내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것을 마리를 아는 사람이 찾아와 오랜만에 꺼낸 것이라고. 다는 아니지만 많은 사진에 마리의 손길이 한번씩은 닿았다고 했다. 그저 마리의 모습을 보고 기뻐했던 앨범이었는데 감회가 새로웠다.

 비디오는 마리의 유언과 임종을 담은 것이었다. 창백한 안색을 하고도 여전히 아름다운 젊은 여인이 병실 침대를 배경으로 반듯하게 앉아있었다. 환자복이 아닌 평범한 실내복이었다. 소이치로는 마리가 그렇게 찍기를 희망했다고 설명해주었다. 막판에는 거의 삶의 의지를 놓은 듯했지만, 마지막 자신의 모습을 환자복으로 마무리하기는 싫다며 투덜거렸다고 소이치로는 말했다. 임종 비디오를 보며 소이치로가 서럽게 울어서 한참을 달래야했다.

 “처음 뵙는 분께 이런 모습 보여서 면목이 없네요. 누나 이야길한 건 정말 오랜만이에요. 요즘은 누나 생각을 해도 눈물이 나지 않았는데 옛날 이야기를 해서인가봐요.”

 소이치로는 촉촉한 눈으로 수줍게 웃었다. 마리를 닮은 얼굴이 예뻐서 미스즈는 무심코 키스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냥 생각만 했다.

 미스즈가 일본에 온 뒤로 갑자기 잡은 약속이라 소이치로는 쉬는 날이 아니었다. 약속한 시간이 훌쩍 지나 미스즈가 떠나려 하자 소이치로가 붙들었다. 실무를 보는 종합 병동 의사는 불규칙하게 병원에 매여있으니 호출이 없을 땐 이야기하고 자리를 좀 더 비워도 이해해준다고 했다. 소이치로는 근 오십에 가까운 나이니 그렇게 말단도 아니었다.

 “식사라도 하지 않으시겠어요? 직장 동료 외의 다른 사람과 함께 식사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에요. 시이나씨와는 조금 더 이야기하고 싶어요.”

 누나에 대해 궁금한 게 있으면 뭐든지 알려주겠노라고 소이치로는 마치 그걸 대단한 보화나 되는 것처럼 이야기했다. 미스즈는 고민했다. 더 궁금할 것도 없었지만, 소이치로의 간절한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이러니 저러니해도 그는 마리와 무척 닮았다. 게다가 드물게 예쁜 사람이었다.

 미스즈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어디로 갈까요?”

 소이치로는 표정을 감출 생각이 없는지 너무나도 행복한 얼굴을 했다. 그날 저녁은 무려 소이치로가 직접 차렸다. 갑작스러운 손님이라 제대로 차리지 못했다고 겸손을 떠는 것치고는 무척 솜씨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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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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