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런던의 기후와 영국 문화에 밝지 않습니다. 원작 설정과도 동떨어진 부분이 있습니다.
런던에는 오늘도 비가 내렸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런던 시민의 친구 같은 것인지라 세실은 결코 좋다고는 할 수 없는 날씨가 제법 달가웠다. 굳이 따지자면 좋아하는 것은 맑은 날이다. 밖에 나가서 자유롭게 몸을 움직일 수도 있고, 따뜻한 볕을 쐴 수 있는 것도 좋다. 하지만 비에서는, 그것도 이토록 답답한 비에서는 런던의 냄새가 난다. 비록 그것이 달가운 것은 기분이 좋을 때 한정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날씨야 어쨌건 세실은 기분이 좋았다.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가는 벽난로의 불꽃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음악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이런 날에는 세상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고 해도 거짓이 아닐 것이다.
팬케이크 접시를 한 손에 끼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커피잔을 들고 벽난로 앞 안락의자에 자리를 잡자 오웬이 혀를 찼다. 그 소리를 한 귀로 흘려버리며 포크를 집어 들었다.
형제는 달칵거리는 소리와 벽난로의 나지막한 흐느낌을 공유했다. 코끝을 물들이는 커피 향. 타오르는 불꽃이 습기를 잡아 뺨에 닿는 공기는 그다지 눅눅하지 않았다.
“여자에게 데이트를 청해본 적이 있느냐.”
오웬은 마치 자기가 질문을 받은 것처럼 물었다. 한껏 당황해있었다는 소리다. 짙고 곧은 아미를 찌푸리며 곤혹스러워하는 모습이 마치 해선 안 될 일이라도 하는 것 같아 세실은 웃어버렸다.
“그럼 물론이지. 이 나이까지 데이트 한 번 해본 적 없는 사람은 드물걸.”
오웬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인연이 그렇게 가볍게 다루어도 되는 것이 아니다.”
“교제하자는 게 아니잖아. 데이트 정도는 누구나 해. 식사 한 끼, 차 한 잔. 어려울 것 없잖아.”
“하지만…….”
“왜, 데이트하고 싶은 상대라도 있어?”
여상하게 질문을 던졌다. 명백히 오웬을 위한 행동이었다. 자신이 이런 화제로 대화를 한다는 것 자체를 낯설어하고 있는 청년에게 베푸는 사소한 친절이었다.
“그런 게 아니다!”
그마저도 과했는지 오웬이 버럭 소리를 쳤다. 세실은 픽 웃고 벽난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세실이 침묵하자 오웬은 입술을 깨물었다. 언성을 높인 것을 후회하고 있는 것이다.
못마땅한 것이라도 있는 듯 잔뜩 찌푸려진 얼굴이 오웬의 당황을 설명했고, 꽉 쥐어진 주먹이 긴장을 호소했다. 세실은 그저 웃고 만다. 그의 형제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순진했고, 지나치게 우직한 나머지 세상의 모든 부드러움을 적으로 삼아버린 듯했다.
세실은 그저 오웬이 진정하기를 기다렸다. 오웬은 불편한 듯 거친 숨을 몇 번 들이키고 입술을 두어 번 떼었다가 붙이고는 마침내 나직이 말했다. 미안하다. 세실은 무심히 흘려넘겼다. 스큅이라는 이유로 본가에 들어가지도 못하는 자신보다 부모님 밑에서 편안하게 살고 있는 오웬이 더 힘들게 사는 것은 성격 탓이다. 사서 고생하는 것도 죄라고 세실은 마음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누구야?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는 이유.”
오웬은 점잖게 헛기침을 하려다가 사레가 들려 콜록거렸다. 세실은 웃으며 물을 떠다 주었다. 오웬은 겨우 두어 모금을 마시고서야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의 이름은 에리카 그라우플뤼겔이라고 한다.”
호그와트 마법학교에는 남학생들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는 마돈나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카리나 벨리니. 아름다울 뿐 아니라 공명정대하여 그야말로 헬가 후플푸프의 환생이 아니냐는 소문마저 도는 소녀였다. 물론 소문은 어디까지나 소문이어서 벨라 혼혈인 카리나가 후플푸프의 환생이라고 진지하게 믿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소문에 감히 반박할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그녀는 아름다웠고, 또 뛰어난 실력과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은 벨리니양의 스케줄이 비어있을까?”
“다음 주까지 약속이 꽉 차 있다고 하던데.”
학기 중이라면 남학생들끼리 이런 이야기를 속닥이는 것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밀려드는 데이트 신청에, 여학우들과 친목을 도모하고 여러 소모임에서 활동하고 있는 카리나는 비는 시간이 없을 정도로 유명인사였다.
그런 카리나에게는 누구보다 절친한 친구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에리카 그라우플뤼겔양이다. 윤기 흐르는 긴 생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리고 조곤조곤 사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그녀가 바로 오웬의 사랑하는 그대 되시겠다.
미모로는 카리나와 비교해 모자란 것이 없을 정도로 섬세하고 아름다운 에리카였으나 그녀는 친구와 달리 조용하고 소극적인 성격이었다. 에리카는 여자 친구들끼리의 모임에는 자주 참석했으나 남학생들 사이에는 잘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그나마도 잠시 얼굴을 보이는가 싶으면 데이트 신청을 하는 남학생들에게 둘러싸이기 마련이었다.
개중에는 꿩 대신 닭이라고 카리나를 대신해 에리카에게 대시하는 남학생도, 어떻게든 카리나와 가까워지기 위해 에리카에게 접근하는 남학생도 있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남학생들은 종종 카리나와 에리카를 놓고 누가 더 아름다운지 목소리를 높여 토론하곤 했다. 어디까지나 두 사람의 추종자에 한하는 일이기는 했다.
당연하게도 세실의 형제 오웬은, 성실하다 못해 꽉 막혀 인생의 재미를 느끼고는 있는지 의문스러운 오웬은 그런 무리에 끼어본 적이 없다. 그저 먼 발치에서 몇 번 바라보고, 친구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을 뿐이다.
실제로 데이트 신청을 받는 횟수는 카리나양보다 에리카양이 훨씬 많다거나 그만큼 승낙이 쉽게 난다는 이야기 같은 것들.
“잠깐만.”
세실은 오웬의 이야기를 끊었다. 오웬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세실은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는 오웬의 표정을 보고 고개를 기울였다.
“이미 좋아하는 거야?”
오웬은 눈을 깜빡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불길이 안정되어 조용해진 벽난로의 장작이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렇군.”
세실은 고개를 주억거리곤 마저 이야기하라며 손짓했다.
그랬다. 오웬 허츠는 이미 옛날에, 기억도 나지 않는 과거의 언젠가부터 연심을 품고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오웬 본인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입학식에서 모자를 쓴 에리카를 처음 보았을 때였던가? 아니면 처음으로 기숙사 대표가 되어 퀴디치 시합을 뛰다가 하늘에서 관객 사이에 섞여 있는 에리카를 발견했을 때? 어쨌든, 시작 같은 건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오웬은 에리카를 연모했으나 한 번도 데이트를 신청하거나 추종자 무리에 끼지 않았다. 그저 에리카는 눈부시게 아름다우니 지금 소란스러운 인원 말고도 자신 같이 마음을 숨기고 있는 이가 많으리라 짐작했을 뿐이다.
그런 오웬이 이제 와서 갑자기 데이트 신청을 생각하게 된 것은 아주 사소한 계기였다. 아니, 사랑에 빠진 이에게 사소하다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세실이 아는 대로 오웬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야만 움직이는 신중한 청년이었고, 그에게는 에리카의 고운 두 손에 꽃다발을 안겨야만 하는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
“결투를 했다.”
“뭐?”
오웬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세실은 황당했다. 머글 사회에서 결투가 사라진 게 몇 년 전이던가. 마법사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일찌감치 그들과 떨어져 살아온 세실은 그런 말이 형제의 입에서 아무렇지 않게 나온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입으로 에리카양의 명예를 더럽히는 학우가 있기에 혼내주었지.”
차마 당황한 표정을 채 감추지 못한 세실을 향해 오웬이 한쪽 눈썹을 들어 보였다. 세실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웃었다. 차마 하고픈 말을 뱉을 수가 없었다.
“걱정 말아라. 이겼으니까.”
오웬은 당시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침 식사 시간이었다. 긴 탁자를 두고 전교생이 거대한 홀에 모여앉는 호그와트의 식사시간은 마치 성 전체가 함께 식사하는 중세를 떠올리게 한다. 물론 식탁에 앉은 학생들은 그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호화로운 음식과 세련된 식사예절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여앉은 이들의 대화가 근처로 흘러 들어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오웬은 언제나처럼 이른 시간에 식사를 마치고 남들보다 약간 이르게 일어나려는 참이었다. 오웬의 주변에는 친구들과 다른 학년 학생들이 뒤섞여 있었다. 남학생과 여학생 자리를 구별하지 않고 섞여 앉을 수 있었지만, 대개는 친구들끼리 뭉쳐 앉으므로 여학생 자리는 멀었다.
테이블은 진수성찬이 넉넉하게 놓일 정도로 넓었지만, 건너편과 대화를 나누기에 불편한 넓이는 아니었다. 옆 테이블, 혹은 건너편에 앉은 친구와 대화하며 시끄러운 학생은 언제나 있었다. 그날은 마침 같은 그리핀도르 학생이었다.
오웬보다 한 학년 어린 남학생이었다. 오웬은 이름을 말하지 않았지만 알고 있는 듯했다. 그 남학생은 오웬에게 바로 목소리가 들릴만한 자리에 있지는 않았지만, 친구들과 무슨 이야기를 하는 도중이었는지 그만 기세가 올라 큰 소리로 말하고 말았다.
“그라우플뤼겔하고 친해지면 벨리니가 데이트를 받아준단 말이야?”
세실은 진지하게 그 말이 결투할 정도의 말이었는지 고민했다. 기분 좋은 말이 아님은 분명하다. 하지만 결투는 대개 목숨을 거는 일이며, 목숨을 잃지 않더라도 크게 다칠 가능성이 높았다. 어떻게 들어도 에리카보다는 카리나를 모독하는 말이 아닌가. 에리카를 향한 연심으로 나설 일이 맞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세실은 제 형제가 애정은커녕 원수라 할지라도 부당한 명예훼손에는 분개할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행히 시간이 이른 탓인지 카리나와 에리카는 보이지 않았다. 오웬은 그 자리에서 결투를 신청했고, 결투가 행해진 것은 그다음 날 오전이었다. 오웬은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말했다.
“내가 이겼다.”
세실은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그 일은 오웬에게 기폭제가 되었다. 에리카와 그녀의 친구에게 이런 종류의 소문이 도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에 분노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그녀들의 친지와 가족들이어야 했다. 그래서 잠자코 있었으나 이렇게 당당하게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도 네가 못 보았을 뿐 비슷한 일은 있었을 거야.”
“알고 있다. 하지만 보지 못했으면 모를까 보고 묵과할 수는 없는 법이야.”
“그거랑 데이트가 무슨 상관인데?”
“친구가 되면 내가 그라우플뤼겔양의 이름을 대신해 싸울 수 있어.”
오웬은 대답했다. 세실은 픽 웃었다. 친구로 지내는 게 가능하기만 하다면 훌륭한 생각이다.
“친구가 되려는데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잖아.”
“하지만 상대는 숙녀야.”
세실은 말을 목구멍 너머로 꿀꺽 삼켰다. 세상 어느 남자가 여인과 친구가 되기 위해 선물과 꽃다발을 준비한단 말인가. 놀랍게도 이 선물이라는 것은 세실에게 찾아오기도 전에 오웬이 마련했다.
많은 이야기를 해봐야 한 단어도 들어가지 않을 테니 말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세실은 그저 시간이 해결해주리라 믿었다.
크리스마스 연휴가 막 시작한 다음 날이었다. 느긋하게 기숙사를 떠나려는 에리카에게 꽃과 편지가 날아들었다. 집요정의 힘을 빌렸는지 어느샌가 침대 곁에 내려앉은 편지봉투를 발견한 에리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것을 집어 들었다. 편지 아래에는 벨벳으로 장식된 고풍스러운 보석함이 놓여있었다. 뚜껑을 열자 조명을 받은 투명한 보석이 은빛으로 반짝거렸다.
‘하늘과 땅이 당신의 빛깔로 물들었습니다. 그대와 함께 이 풍경을 보고 싶습니다. 언제라도 좋으니 원하시는 시간을 정해 상자 아래 놓아주세요. 당신의 마음은 집요정이 전해주기로 했습니다. 원치 않으신다면 무시하셔도 좋습니다.
당신을 사모하는 O.H.‘
'the other world > commissi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리아 루첼라이: 마지막 전투 (0) | 2019.11.26 |
---|---|
프렘님 커미션 (3) (1) | 2018.05.28 |
텟님 커미션 (8) (0) | 2017.09.27 |
피피님 커미션 (0) | 2017.09.02 |
프렘님 커미션 (2) (0) | 2017.07.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