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슬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그날은 드물게도 아르시니가 컨디션이 좋았고, 땅에서는 풀 내음이 났으며 바람이 거의 불지 않고 선선했다. 마샤는 그날 아르시니와 걸었던 스콜로프 저택의 정원을 기억했다. 짧은 봄이 시작되어 장미가 화사하게 피어있었다. 정원에 심은 것치고는 특이하게도 송이가 작은 품종이었다. 장미는 산책로의 주인이 아니라 다른 꽃과 어우러져 주변을 화사하게 밝히고 있었다. 정원사의 솜씨가 돋보이는 배치였다. 소박한 장미를 고른 것도 정원사의 요청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르시니는 우산을 들어주겠다는 마샤의 청원을 끝끝내 거절하고 제가 우산을 들었다. 아직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았던 시기였다. 그래서 마샤는 어린 동생의 어리광을 기꺼이 받아주었다. 공국을 이끄는 위대한 네 마법사 가문 중 하나의 주인이 이런 잡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충고도 하지 않았다. 몇 번이고 말을 해보았지만, 우산을 드는 정도야 숙녀를 에스코트하는 예우라고 태연하게 대꾸할 뿐이다. 그런 동생이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도 이제는 어색한 나이였다.
남매는 정원을 한 바퀴 돌고 유리로 벽을 세운 정자에 마주 앉았다. 사용인이 미리 준비해둔 찻주전자에서 김이 올라왔다. 날이 따뜻해졌다지만, 비가 오고 기온이 높지 않은 날이었다. 마샤는 아르시니를 보았다. 소년은 앳된 얼굴에 어른스러운 미소를 띤 채 비 내리는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감기 걸리겠다. 숄을 두르렴.”
“과보호야, 마샤.”
아르시니는 낮게 웃었다. 마샤는 눈살을 찌푸렸다.
빗줄기는 아주 가늘었다. 유리 벽 한쪽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도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처럼 가늘었다. 비는 고이지 못하고 땅을 가볍게 적셨다. 꽃과 이파리가 촉촉한 공기를 한껏 빨아들여 싱그러웠다.
“마샤는 내가 언제까지 살았으면 좋겠어?”
아르시니가 물었다.
“안 죽었으면 좋겠다.”
마샤는 대답했다. 아르시니가 키득거렸다.
“그건 내가 할 말이야. 마샤야말로 항상 위험한 곳을 돌아다니잖아. 죽으면 안 돼. 내 장례식에 와줄 가족은 이제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고.”
“그런 말을 함부로 하면 백작님이 슬퍼하신다.”
“마샤만 비밀로 해주면 돼.”
아르시니는 태연하게 말하며 찻잔을 들었다. 미지근해진 물을 버리고 차를 따랐다. 꽃과 풀에서 나는 싱그러운 냄새와 비, 비에 젖은 흙냄새를 뚫고 새콤달콤한 향기가 뜨거운 물에서 퍼져 나왔다. 마샤도 잔을 비우고 차를 따랐다. 아르시니는 눈을 감고 향을 맡고 있었다.
마샤는 동생의 낯선 모습에 두어 번 눈을 깜빡였다. 스콜로프 저택에 들어간 이후로 하루하루 귀족적인 품위를 갖추어 가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침착한 성정은 타고난 것이며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은 마법사의 특성인지라 별로 달라졌다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저 만날 때마다 무럭무럭 자라는 것이 놀라웠다. 점점 고상해지는 몸짓이며 말씨도 그저 좋은 교육을 받았구나 생각했다.
“장례식 하니까 말인데.”
마샤가 생각에 잠긴 사이 아르시니는 운을 떼었다. 입속을 감도는 차향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는지 부드러운 미소가 감도는 채였다.
“내가 죽으면 마샤가 첫 번째로 꽃을 주면 좋겠어.”
“그건 직계 가족이나 가능한 거지.”
“마샤가 내 가족이잖아.”
아르시니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소년의 노란 눈동자가 좁은 틈새로 반짝였다. 마샤는 할 말이 없어 허탈하게 웃었다.
“유언장을 쓸 거야. 사실 지금도 쓰고 있어. 이건 마샤가 가면 적을 거야.”
“백작 부인이 서운해하실 거다.”
아르시니는 마샤의 말을 한 귀로 흘려버렸다. 못 들은 척 찻잔을 들어 올리는 손가락이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마샤의 책망하는 눈을 마주하고 아르시니는 조용히 미소지었다.
“춥다.”
그렇게 말하고는 시선을 내린다. 영악한 소년은 누나의 잔소리를 틀어막는 방법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마샤는 문득 오렌지가 먹고 싶어졌다. 그래서 아르시니가 찻잔을 내려놓는 순간 옆에 있는 숄을 집어 던졌다. 기겁한 아르시니가 얼굴을 뒤덮은 숄을 허둥지둥 끌어 내렸다. 곱게 단장한 머리가 다 흐트러졌다. 아르시니가 골난 소리를 냈다. 마샤는 그런 아르시니를 비웃어주었다. 아무리 나이를 먹고 덩치가 커졌어도 고작해야 말을 타고 정원을 도는 게 다인 도련님이 사관학교를 졸업한 직업 군인을 이길 수는 없었다.
*
「마샤 알렉산드라 스미노르바양에게,
갑작스러운 편지를 받고 적잖이 놀라셨으리라 예상합니다. 봄을 맞이하여 새 단장을 하던 중, 미처 손길이 닿지 않았던 곳에서 귀인의 물건을 발견하였습니다. 구리로 테를 두른 카드 상자입니다. 어머니께서는 귀인을 그리워하여 상자를 스콜로프 저택에서 보관하길 바라셨지만, 상자의 연식과 상태를 보아 스미노르바양과의 추억의 물건으로 사료됩니다. 반환을 원하신다면 답변을 부탁드립니다. 스콜로프 저택은 언제나 귀하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새로운 계절에 어울리는 새로운 행복을 기원하며, 나탈리야 스콜로프 드림.」
근 일 년 만에 찾은 스콜로프 저택은 여전히 중후한 맛이 있는 멋진 건물이었다. 정원은 완전히 갈아버렸는지 아르시니가 허둥지둥 달려 나오던 길은 모양만 겨우 남았을 뿐 완전히 풍경이 달라져 있었다. 정원사가 바뀌었던지, 단단히 마음을 먹고 정원을 새로 꾸민 모양이었다.
마샤는 정문을 지키는 문지기의 정중한 인사를 받아가며 스콜로프 저택에 발을 들였다. 수도 안에 있는 저택이지만, 스콜로프의 이름이 무색하지 않은 크기와 웅장함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평민 출신 신입 장교가 발을 들이밀기엔 너무 멋진 곳이었지만, 마샤는 긴장하지 않았다. 마샤에게 있어서는 두 번째 집 같은 곳이었다. 적어도 죽는 순간에 스콜로프의 이름을 댈 수 있을 정도로는 사랑하는 곳이었다.
건물에 도착하자 하인이 문을 열고 마샤를 맞아들였다. 모자와 겉옷을 벗어 건네자 공손히 고개를 숙인다. 안에서 나온 하녀가 마샤를 안내했다.
봄맞이 새 단장을 했다는 이야기는 진짜였다. 마샤는 작년과는 딴판으로 달라진 실내를 둘러보며 감탄했다. 묵직하고 우아한 색조로 꾸며져 있던 복도는 선명한 파란색을 기조로 시원하게 바뀌어 있었다. 벽에는 못 보던 그림이 많아져 있었다.
훈훈한 날씨 탓인지 응접실은 활짝 열려있었다. 잠시 기다리자 연한 바닐라 색 드레스 자락을 끌고 스콜로바의 여주인, 엘리자베타 스콜로바가 나타났다. 사르륵 비단 천 자락이 양탄자를 스쳤다.
“매정한 아이야. 한 번쯤 들러야겠다는 생각이 그리도 들지 않았니.”
곱게 주름진 얼굴로 눈웃음치며 엘리자베타가 말했다. 마샤는 마주 웃었다.
“그래서 편지를 보냈잖아요.”
“내가 보고 싶어 할 거라곤 생각도 안 했지? 아르시니 그 애도 그렇고, 너희 남매는 너무 매정해.”
엘리자베타는 소파에 궁둥이를 붙이며 투덜거렸다. 비단 스커트가 마샤의 초라한 구두 끝을 스쳤다.
“잘 지냈니?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 요즘은 나탈리야도 쌀쌀맞고 집안이 쓸쓸하게 느껴지지 뭐니. 그래서 봄을 맞아 산뜻하게 꾸며보았단다.”
엘리자베타가 호호, 웃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마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화사한 실내는 마샤가 알던 스콜로프 저택의 장엄한 분위기와는 많이 달라졌지만, 오래전부터 엘리자베타가 바라던 모습이었다. 이곳에 들를 때마다 엘리자베타가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읊던 계획을 알고 있는 마샤로서는 드디어 꿈이 이루어졌다는 느낌이었다.
“아주머니, 치사해요.”
곧이어 티 트레이를 끌고 나타난 것은 베네라였다. 아르시니에게는 사촌 누나가 되는 베네라 스콜로프는 엘리자베타를 대신해 마샤에게 차를 대접했다. 본래라면 주인인 엘리자베타가 준비할 일이나 마샤는 이미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이인 데다 일개 군인 신분인지라 적당히 양보한 것이다.
엘리자베타와 베네라는 기품 있고 상냥한 귀부인이었다. 변방을 돌다 보니 도시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마샤가 대화에서 겉돌지 않도록 챙겨주면서도 이야기가 끊겨 어색해지지 않도록 능숙하게 대화를 이끌어나갔다. 마샤는 아르시니가 있을 때와 다름없이 편안한 기분으로 스콜로프 저택에서의 티타임을 즐겼다. 두 사람은 옷과 실내장식, 음악과 연극에 관해 이야기하고, 때로 두려워하며 요마와 오염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멀쩡한 생물도 오염을 뒤집어쓰면 요마로 변한다면서요?”
“네. 그래서 부상자나 사망자가 생기면 긴급히 호송 조치합니다.”
“무서워라. 그럼 우리가 아는 사람이 요마가 될 수도 있겠네요.”
“그렇지요.”
베네라는 레이스 장갑을 낀 손을 모아쥐며 진저리쳤다. 마샤는 웃으며 덧붙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수도에까지 그런 일이 생길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 저희가 싸우는 거니까요.”
“하지만, 마샤. 네가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밤에 잠이 오지 않을 지경이야.”
“맞아요. 마샤, 그런 위험한 일은 그만두고 수도로 올라오는 게 어때요?”
엘리자베타와 베네라의 시선을 받고 마샤는 그저 웃었다. 죽음을 옆에 끼고 있다는 자각은 있다. 매 순간, 그것을 자각하지 않고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마샤는 그들의 걱정 어린 시선에서 사랑만을 고맙게 받아들였다.
“살기 위해 몸을 사리고 있어요. 마샤 스미노르바, 쉽게 죽지 않습니다.”
마샤는 두 사람을 안심시키기 위해 자신 있게 미소지어 보였다. 엘리자베타도 베네라도 그것으로는 진정이 되지 않는지 착잡한 얼굴이었지만, 더는 말이 없었다. 짧은 침묵이 지나고,
“어머, 나도 참. 잠시만 기다리렴.”
엘리자베타가 짐짓 발랄하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베네라가 웃으며 빈 티팟을 정리하고 하녀를 불러 자리를 정돈하게 했다.
“이렇게 이야기한 것도 오랜만인데 좋은 소식은 없나요?”
베네라는 참으로 다정한 여인이었다. 마샤는 그런 다정함이 부담스러웠다.
“군인이 연애할 시간이 어딨어요.”
“앞날이 창창한 젊은 청년들과 함께 보내고 있잖아요. 마샤도 나이가 들었지만, 아직은 피가 끓을 나이 아니던가요.”
그렇게 묻는 베네라는 마샤보다 어리다. 나이가 한참이나 떨어진 아르시니와 비슷한 나이였다. 하지만 베네라는 혼기가 차자마자 집안에 걸맞은 남편을 찾아 결혼한 귀부인이었다. 마샤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르시니도 살아있었다면, 살 가능성이 있었다면 결혼했을까.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유부남과 꼬맹이 사이에서 혼사를 생각할 수가 없더라고요. 저도 이제 나이가 있으니 젊은 혈기로 밤을 보내는 일도 줄어들었어요.”
베네라가 안타깝다는 듯 한마디를 덧붙이려 할 때 엘리자베타가 돌아왔다. 뒤따라오는 하녀가 편지에 언급된 상자를 들고 있었다.
“즐거운 나머지 그만 중요한 걸 잊었지 뭐니. 마샤는 이걸 위해서 온 건데 말이야.”
엘리자베타는 하녀에게서 상자를 받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하녀가 뒤돌아 나가고 연이어 다른 하녀가 들어오며 간단한 다과상을 차렸다.
구리로 테를 두른 작은 고동색 상자였다. 손때가 타 반질거리는 상자는 카드텍 하나가 들어가면 딱 맞을 크기다. 액세서리를 담기에는 투박하고, 값싼 소재로 되어있었다.
엘리자베타는 구리로 된 모서리를 손끝으로 어루만지다가 이내 마샤 쪽으로 상자를 밀어주었다. 마샤는 이 상자를 알고 있다. 남매의 생모, 알렉산드라가 어린 시절 마샤에게 선물해준 카드 상자였다. 항상 자기를 대신해 어린 아르시니를 돌보는 마샤에게 고맙고 미안하다며 사준 것이었다.
“받으렴. 이 집에 남은 마지막 물건이야.”
엘리자베타의 목소리가 먹먹했다. 상자에서 눈을 들어 바라보자 아름다운 눈동자에 눈물이 어린 것이 보였다. 고운 귀부인의 마음에 이 물건이 얼마나 큰 것인지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샤는 천천히 손을 들어 상자를 집었다.
송구하게도 마샤는 엘리자베타에게 상자를 선뜻 선물할 수가 없다. 이것은 아르시니의 유품이자 어머니 알렉산드라의 유품이었다. 마샤는 문득 가족이 모두 떠나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떠올렸다.
“고맙습니다.”
엘리자베타는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구나. 네게도 소중한 물건일 텐데, 내가 욕심을 내고 말았어.”
“그만큼 아르시니를 아껴주셨으니까요.”
마샤도 따라 고개를 저었다. 엘리자베타는 결국 손수건을 들어 눈가를 훔쳤다.
“아르시니도 너도 내게는 자식이란다. 그 사실만큼은 잊지 말아줬으면 좋겠구나.”
마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티타임은 머지않아 끝났다. 엘리자베타가 슬픔에 젖어 더는 대화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베네라는 엘리자베타를 달래느라 마중을 나오지 못하고, 마샤는 혼자서 응접실을 나왔다.
안내 없이 걸으며 복도를 다시 한번 찬찬히 둘러보았다. 청량한 색으로 꾸며진 실내는 엘리자베타답게 소박하면서도 화사한 장식을 둘러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귀엽다고 자랑하는 아르시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안녕하세요, 스미노르바양.”
생각에 잠긴 마샤의 뒷덜미를 당기듯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문을 바로 앞에 둔 참이었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엄숙한 드레스를 갖춰 입은 소녀가 마샤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탈리야였다. 아르시니보다도 어린 앳된 소녀는 전신을 무겁게 내리누르는 듯한 드레스를 입고 딱딱한 표정으로 마샤를 바라보았다. 전신에 철갑을 두른 듯, 차갑고 절도있는 모습이었다.
“안녕하세요.”
마샤는 가볍게 묵례했다. 나탈리야는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이쪽으로 드시지요. 아버지께서 뵙기를 원하십니다.”
마샤는 나탈리야의 뒤를 따랐다.
나탈리야는 마샤를 정원 쪽으로 이끌었다. 전부터 저택의 다른 방에 비해 상대적으로 화려했던 탓인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마샤는 괜히 아르시니와 걸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는 비가 오고 있었다.
“들어가시지요.”
나탈리야는 온실 앞에서 멈춰섰다. 마샤는 나탈리야의 안내에 따라 온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유리문 너머로 나탈리야가 자리를 떠나는 것이 보였다.
풀과 나무 사이로 멀리 보이는 테이블과 그 앞에 앉은 남자가 보였다. 그는 마샤가 기억하던 것보다 많이 늙어있었다. 아주 피곤해 보였고, 쇠약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로만.”
마샤가 바로 옆에 다가갈 때까지도 로만은 못 박힌 듯 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꽃은 붉게 핀 장미였다. 탐스럽고 송이가 컸다. 비싼 장미다. 마샤는 아르시니는 그런 장미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로만 옆에 섰다.
“앉으렴.”
로만이 말했다. 마샤는 준비된 자리에 앉았다. 치마를 추스르는 사이 로만은 마샤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아르시니의 유품이 나왔다고 하더구나.”
“네. 그걸 받으러 왔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로만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테이블에는 차도 커피도 없었다. 와인병과 로만의 잔이 놓여있을 뿐이었다. 로만이 말을 않자 마샤도 말을 할 수 없었다. 사람이 입을 다물자 다른 소리들이 자리를 찾듯 주변을 메웠다. 온실을 유지하는 기계장치가 돌아가는 소리, 온실 밖에서 하인들이 대화하는 소리, 나뭇가지에 오른 새소리까지. 로만은 한참을 아무 말이 없었지만, 마샤는 기다렸다. 대기하는 것은 익숙했다.
“벌써 석 달이나 지났구나.”
로만이 말했다.
“그렇게 되었군요.”
마샤는 맞장구쳤다. 로만은 그제야 마샤를 돌아보았다. 깊게 팬 주름이 석 달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마샤는 이렇다 저렇다 말을 붙이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너와의 인연도 제법 오래되었지.”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게 어디 네가 할 말이더냐. 다 늙은이들의 업보인 것을.”
로만은 마샤에게 와인을 권하려다가 말고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네. 나탈리야에게 전권을 위임한 뒤로 예전 같지가 않아.”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와인을 따르기 위해 몸을 일으키는 로만 대신 마샤가 일어났다. 로만은 손을 휘저었다.
“나탈리야가 아르시니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건 알고 있나?”
로만은 와인으로 목을 축이고 다시 장미를 한 번 보았다가 마샤를 쳐다보았다. 마샤는 고개를 저었다.
“내게도 형이 있었지. 마법사였고, 평민 출신이었네. 아르시니와도 비슷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어. 항상 밝고,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이었지. 어쩌면 마법사란 모두 그런 종족인지도 몰라.”
마샤는 당황했다. 로만이 꺼낸 것은 오랜 마법사 집안의 치부라고도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나탈리야가 마법사가 아니기에 로만이 아르시니를 들였듯, 로만의 부모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린 로만은 그것이 참을 수가 없었다.
위대한 가문의 적자 태어나 가주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평범한 상인으로 태어나 길러진 마샤로서는 그게 어떤 기분인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마샤는 언제나 가족과 함께 살아남는 것만을 생각했고, 이제는 가족조차 없기에 자신의 생존 말고는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로만은 달랐으리라. 나탈리야도 다를 것이다. 마샤는 나탈리야가 자신을 적대하는 이유를 몰랐으나 로만의 이야기에 그 답이 있었다.
자신의 것이었어야 마땅한 권리이자 영광인 가주의 자리는 어디서 태어나 어떻게 자랐는지도 모를 아이에게 돌아간다. 가주에 적합한 교육도 받지 않았고, 그만한 품위도 없는 아이다. 후계자로 교육받은 로만이나 나탈리야 같은 적자는 그들과 함께 교육받으며 그 아이들의 어설픔과 야만스러움을 지겹도록 보고 듣고 익혔다. 경멸하지 않는 것만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 아이들이 가주의 자리를 물려받는 것은 채 성인이 되기도 전의 일이다. 마법사의 수명이 짧기 때문에, 그들은 하는 일도 없이 가주라고 불리며 대대로 가문을 이어온 적손의 섬김을 받는다. 그것은 귀족으로, 남을 다스리는 자로 살아온 마법사 가문의 혈통이라면 누구나 져야 하는 굴욕이었다.
로만은 증오의 대상이었던 가주가 하루하루 쇠약해지다가 결국은 죽고 말았던 날을 기억했다. 어린 마음은 크게 상처 입었지만, 그것을 인정하지 못했다. 유난히 가주에게 다정했던 부모님이 미웠고,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이 미웠다. 그래서 로만은 자신이 부모의 입장이 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준비하지 못했다.
결국, 아르시니를 입양하기로 결정이 났을 때부터 로만은 줄곧 스미노르바 남매를 피해왔다. 가끔 마샤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는 했지만, 후견인으로서 만남을 가진 것뿐이었다. 아르시니에게는 한층 더 냉랭했고, 나탈리야에게도 다정하게 대하지 못했다. 전쟁과는 먼 곳에서 살아왔지만, 죽음은 로만의 삶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명랑하기 짝이 없는 마법사라는 생물의 짧은 삶이 흉터가 되었다. 로만은 아르시니를 제대로 마주하지도, 그렇다고 아껴주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 어린 소년의 죽음은 로만은 늙게하고 말았다. 마샤는 그 부산물이었다. 그래서 로만은 마샤에게 허물이 없었다.
마샤는 아르시니가 로만이 무섭다고 했던 것을 떠올렸다. 마샤에게는 한없이 자상해 마치 아버지가 있다면 이런 사람이 아닐까 싶은 사람이었기에, 아르시니의 그 말이 스콜로프 저택에 적응하는 중에 생긴 고충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마샤는 새삼 늙어버린 로만의 얼굴을 살폈다. 후회로 찌들어버린 얼굴이었다.
“멀리하면 괜찮을 줄 알았지. 죽어도 신경 쓰이지 않을 줄 알았어. 그거 아는가? 나는 아르시니를 한 번도 내 자식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네. 그런데도 이렇게 마음이 아파.”
로만은 끝내 눈물을 보였다. 마샤는 아버지 같은 로만의 등을 감싸 안았다.
*
스콜로프 저택에서 내준 마차를 타고 마샤는 좁은 방으로 돌아왔다. 아직 해가 질 시간이 아닌데 날이 어둑해져 있었다.
마샤는 오랜만에 입은 낡은 드레스를 벗어 걸어놓고, 편안한 차림으로 갈아입었다. 비로소 자신의 자리에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스콜로프 가문의 사람들이 마샤의 가족과 같다는 것은 거짓이 아니지만, 마샤는 스콜로프 저택의 일원이 아니었다.
카드 상자를 옆에 던져두고 솜도 없이 삐걱거리는 침대에 몸을 뉘었다. 눈을 감자 하루 동안 두 번이나 보고 만 눈물이 떠올랐다.
‘마샤는 내가 언제까지 살았으면 좋겠어?’
마샤는 대답했다.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 말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아르시니가 죽은 뒤로 마샤는 한 번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마침 비가 내리는 날이었기에 하늘이 대신 울어주는구나 싶었을 뿐이다. 무덤에 들어간 아르시니의 비석을 보고서도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이렇게 짧은 삶이었구나 싶었을 뿐이다.
허전했다. 이제 마샤에게는 어머니도, 동생도 없었다. 없어도 살아가는 것에는 문제가 없다. 본래도 있는 듯 없는 듯한 삶이었다. 편지를 보낼 곳이 하나 줄어들었을 뿐이다. 비록 아르시니가 가장 자주 편지를 주고받는 대상이었다고는 하지만, 편지 보낼 곳이 하나 줄어들었다고 먹고 사는 것에는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특별히 아르시니와의 편지가 즐거웠던 것도 아니다. 그저 일기를 쓰듯이 일상을 보고해왔을 뿐. 아르시니도 크게 다르진 않았을 터였다.
마샤는 마음으로 편지를 썼다.
하늘에 있는 아르시니, 내가 울지 않는다고 해서 서운해하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나보다 많은 사람이 널 위해 울어주고 있지 않니. 너는 정말 괜찮은 삶을 살았다. 사랑받지 않았느냐. 나도 널 사랑한단다. 보고 싶다. 아르시니.
마샤는 눈을 번쩍 떴다. 눈가가 촉촉해져 있었다. 아르시니가 없어도 마샤는 괜찮았다. 그런데 눈물이 났다.
아르시니, 나는 네게 정말 좋은 누나였니? 결국, 첫 번째로 꽃을 주지 못했어.
뺨을 타고 눈물방울이 굴러떨어졌다. 창밖에서는 아르시니와 정원을 걸었던 그 날처럼 가느다란 보슬비가 흩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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