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in my world'에 해당되는 글 113건

  1. 2009.01.08 리히트, 아키라. 만남.
  2. 2008.11.17 어느 겨울에 ( congratulations on 火兒 and Karnomen's 200th day )
  3. 2008.11.02 기묘한 손님
『미래는 정해져있어. 그래서 그대와 나는 운명이지.』

 그 것이 '그'와의 첫만남. 내가 나의, 리히트라는 이름을 잊어버리고 그 이름을 불러줄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게 된다고 하더라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그는 자신만만하게 그렇게 말했다. 몇번을 더 죽는다 한들 잊을 수 없을 그 말. 나는 감격스러운 첫 만남에서, 감동적이기까지 한 그의 말을 듣고 울음을 터뜨려 버렸었더랬다.





 그것은 정말 갑작스러운 만남이었다. 태어난 곳과는 전혀 다른 세계의 처음 보는 낯선 길을 걷다가 30년 전에 연락이 끊어진 친우를 만난다 해도 이토록 놀랍지는 않았으리라. 나는 둔켈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하며 앞을 제대로 보지 않고 걷다가 그와 부딪칠뻔 하고는 급히 고개를 숙였었다. 그와 만난 첫날의 기억은,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헤어지기까지의 시간의 앞뒤는 뿌옇게 흐려져 있다. 그의 말대로 그와 내가 운명이기 때문일까? 운명의 사람을 만났다는 진실에 내 기억회로가 충격을 받아 멀쩡하던 앞뒤의 기억을 뒤흔들어놓은 걸지도 모른다고,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다.

 "어맛,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제가 그만 딴데를 보다가……!!"
 "괜찮아?"
 "에, 아, 예. 저…는 괜찮아요…."

 그는 균형을 잃은 날 붙들고 친절하게 빙긋 웃었었다. 그의 얼굴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웃는 입매만큼은 지금도 그릴 듯이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아름다웠다. 나도 모르게 말을 잇지 못할정도로 그렇게 아름다웠다. 나는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던 것 같다. 그때의 내 시간감각은 완전히 엉망이어서 그게 어느정도였는지는 알수가 없다. 그가 더 행복하게 웃는다고 생각했다. 뭔가 말해야한다고 생각했다. 멈춰버린 머리 속에서 꺼낸 문장은 어찌보면 흔하고 어찌보면 낯뜨거운 그런 말. 그리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내 귀로 들려온 단 두 문장은 내가 가질 이후의 길디긴 시간 속에 깊숙히 새겨져 영원히 빛이 바래지 않을 찬란한 보석이 되었다.

 "전에, 만난 적이 있나요, 우리?"

 그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미래는 정해져있어. 그래서 그대와 나는 운명이지."
 "……에?"

 종이 울렸다.

 뎅, 뎅, 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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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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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같은 녀석이다. 이것이 첫 인상이었는지 같은 건 기억나지 않지만 기억력이 좋지 못한 편인 내가 이렇게 일관적으로 느끼고 있다는 건 역시 저녀석 문제겠지. 뒤통수를 간지럽히는 시선을 느끼며 지내는 것도 벌써 반년째. 이제는 없으면 허전할 정도가 되었다.









 

 

 

   어느 겨울에
     I wrote to congraturations on Hwa-a&Karnomen's 200th day. I love you Dears.


  먼 곳에서 봐도 반짝반짝 빛나는 붉은 머리카락을 쫓기 시작한 지 어언 199일째. 어찌보면 기념할 만한 날이지만 카르노멘은 오늘도 그저 조용히 그를 바라보는 것을 택했다. 화아는 여자애들이 손가락 꼽으며 센 기념일 따위에 신경쓰는 사람도 아니었고 뭣보다 두 사람은 그 긴 시간동안 제대로 대화 한 번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걸 기념 삼기에는 굉장히 애매한 관계였다. 이런 상황에서 그에게 내일이면 두 사람이 만난 지, 아니 정식으로 교제하기로 한 지 200일째라는 말을 하는 것은 무리였다. 이해도 못할 것이다. 대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되물어오는 것을 듣느니 차라리 생각하지 않는 게 나았다. 사실, 그런 걸 말하는 성격도 못되긴 했다.

"카르노멘, 손님이 오셨습니다."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가 카르노멘의 귓가를 맴돌았다. 메세지 마법이 그의 감사실 책상에 있는 작은 거울과 그의 귀에 걸린 귀걸이 하나에 연동되어 걸려있어 카르노멘이 있는 장소, 그의 의사와 관계없이 상대방의 말을 전달해준다. 그 전언에 답을 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카르노멘의 의지였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대답을 하는 쪽이 감사실의 다른 학생들을 위해 좋았다. 그들은 감사장이 직접 나서서 처리해야하는 일부의 업무를 제외하고는 모든 업무를 스스로 해낼 수 있는 유능한 인재들이다. 카르노멘에게 연락이 온다는 것은 그들로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문제가 닥쳤을 때 뿐. 답하지 않아서야 카르노멘도 좋을 게 없었다. 가끔 일방적으로 모든 연락을 끊고 사라질 때가 있기는 했지만.

  "금방 가겠습니다. 잠시만 붙잡아주세요. 매번 고맙습니다, 레엔."
  "그렇게 전달해드리겠습니다. 이만"

  그의 인사와는 별개의 답변이 돌아오고 통신이 끊겼다. 조곤조곤한 어조와는 다르게 결코 레엔은 감정이 담긴 말에 답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신이 내린 저주같은 능력때문에 인간적인 교류를 완전히 끊고 지냈다. 방금 카르노멘이 건낸 것 같은 사소한 감사인사조차 듣지 못한 척 흘려넘겼다. 감사실의 모두는 레엔의 쌀쌀맞음에 적응해있었다. 물론 페레넬에서 조금만 지내다보면 웬만큼 이상한 사람들에는 다 적응할 수 있게 되기도 했다.

  "그럼 가볼까요."

  그렇게 말하며 모자를 고쳐 쓴 카르노멘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아름다웠다. 딱, 하고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와 동시에 남은 것은 햇빛에 하얗게 반짝이는 엷은 은빛 빛무리 뿐. 아무도 알아차린 사람은 없었다. 그가 앉아있던 장소는 사람들 눈에 꽤나 잘 띄는 벤치. 페레넬의 이상한 사람들 중에서도 카르노멘이 유별난 축에 든다는 것이 그렇게 놀라운 사실은 아니리라. 하지만 카르노멘마저도 그가 사라진 자리를 한참 농구공을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학생들 중 한 사람이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사라졌다. 처음엔 쉽게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가 있는지 혹은 자리를 떠났는지 확인하는 것이 쉬워졌다. 화아가 예민해진 것인지, 그가 허술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저 서로에게 익숙해졌기 때문이라고 짐작해볼 뿐이다. 소년은 어쩐지 시들해져버린 농구에서 손을 놓고 코트를 빠져나왔다. 게임을 하던 멤버들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몸이 안좋아서, 라는 한마디로 가볍게 물리쳐버렸다. 언제나 소리없이 나타나서 조용히 바라만 보다가 또 소리없이 사라져버리곤 했는데 오늘따라 그것이 왜이리 신경쓰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역시 신경쓰여."

  학생 감사실에 찾아가는 것은 조금 거북했다. 이 여자때문이다. 온몸을 가리는 까만 드레스에 베일까지 쓴 보는 것만으로 뭔가 불편해보이는 여자다. 이름이 뭐랬더라. 기억나지 않았다.

  "감사장은 현재 중요한 손님과 대면하고 계십니다. 나중에 다시 찾아와주시겠습니까."

  감사실의 입구를 맡은 그녀는 화아의 말재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지만 사람같지 않은 억양없는 말투에 접근하기 힘든 분위기를 풍겼다. 그래서 화아는 언제나 최대한 빨리 그녀의 앞을 벗어나고 싶어했고, 그것은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화아는 대답도 제대로 하지 않고 도망쳐나왔다. 중요한 손님이라니 얘기가 길어지겠지? 벌써 저녁시간이 가까워 오니 오늘은 패스하고 내일 만나는 게 좋겠다.

  "오랜만에 제대로 일하는 군, 저녀석."

  오늘의 모임 장소는 식당가 입구였던가. 오랜만에 먹는 바깥밥이다. 언제나 손수한 집밥을 먹는 입장에서 사치라고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가끔은 일부러 불량식품을 사 먹는 기분으로 밖에서 밥을 사먹고 싶어진다. 물론 오늘 저녁이 외식이 된 건 단순히 식사담당이 게으름을 피운 탓이겠지만. 간만의 외식이 반갑기도 하지만 외식이라고 생각하면 반드시 가야한다는 의무감이 사라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화아는 멀리 돌아가는 길에 발을 들였다. 귀찮아, 라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유치원 시절부터 몸에 익혀둔 버릇은 알아서 그를 약속 장소로 이동시켰다. 절대로 도망쳤을 때 뒤따라오는 잔소리가 무서워서 가는 것이 아니다. 어릴적부터 철저하게 훈련된 습관일 뿐이다.

  "쳇."

  스스로에게까지 변명해야하는 처지가 제법 한심스럽다. 화아는 괜히 머리를 한번 긁었다. 간지러운 것 같네. 슬쩍 돌아간 고개 탓에 시야도 함께 이동했다. 저건 뭐지. 학생노점상인가. 페레넬은 조건이 되는 사람들 중에서도 재주많은 이들만을 학생으로 받아들여 굉장한 스파르타식의 교육을 시키지만 그 외의 생활에는 거의 무제한적인 자유가 주어졌다. 아주 기본적인 몇가지 규칙만 지키면 학교를 떠나는 순간까지 무슨 짓을 해도 용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페레넬의 학생으로서 모든 생활비를 제공받으며 어떻게든 재산을 불리는, 아니, 정확히는 불리려고 노력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그 악착같은 노력의 결과로 학교에 입학할 때는 땡전한푼 없는 빈털털이였는데 졸업할 때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거부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고로, 이렇게 학교 내에서 노점상을 벌여 용돈벌이를 하는 경우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물론 페레넬의 캠퍼스는 커다란 섬 하나를 전부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크기이기 때문에 안에는 식당가도 상점가도 따로 있지만.

  "이거, 귀걸이?"
  "50Dion입니다. 선물하시려고요?"
  "음……."
  "아하핫, 천천히 고르세요."

  그가 집어든 것은 은빛 사슬이 여러가닥 얽혀 있는 귀걸이였다. 다른 장식이 없어 단정하면서도 심심하지 않은 상당히 세련된 디자인이었다. 정작 관심을 보이고 있는 화아가 그런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이 안타까울만큼 잘만들어진 귀걸이였다. 그리고 그런 것에는 관심도 없는 화아의 시선은 끝에 매달린 영롱한 푸른빛의 보석에 못박혀있었다.

  "얼마라고요?"
  "50dion입니다, 손님."
  "잠깐만요."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지며 화아의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은 단 하나. 귀걸이에 달린 푸른 보석이 카르노멘의 반짝이는 은발에 굉장히 잘어울릴 것이라는 생각뿐이었다.

  "선물하실 건가요? 그러면 이쪽 상자가……."

============================
1 중요한 손님=얘기가 길다
2 카르노멘이 다른 감사들한테 떠넘기고 일을 안하는 줄 알고 있음.

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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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의 일이었다. 그 것은, 평화로운 일상을 깨는 일종의 ‘폭탄투하’?

따뜻한 코코아를 받았다. 겨울, 이라서일까. 그냥 손님접대일까. 눈만 이리저리 굴려 분주하게 일하는 중인 엘리엇씨를 관찰했다. 코코아에서 올라오는 따뜻한 김이 코끝을 데운다. 아, 슬슬 뜨거워, 손가락.
잠시 코코아를 따라 뜨겁게 달궈진 머그잔을 무릎에 내려놓고 손을 식혔다. 우유는 막이 생길 정도로 뜨거운 게 좋아. 하지만 뜨거워. 마시다가 혀를 데일 때도 많았다. 코코아도 뜨거운게 좋아. 평소 손이 차가워서 늘 옷 밖으로 손을 꺼내지 않는 나로서는 뜨거운 쪽이 들고 있기에도 좋다. 하지만 변온동물인걸까. 금방 뜨거워져서 이렇게 손가락을 호호 불게 된다. 너무 오래 잡고 있었는지, 손가락 끝이 조금 아프다…….

푸른빛 도는 은빛 머리카락이 의자등받이를 넘어 바닥에 닿는다. 코코아가 든 머그잔을 무릎에 내려놓은 소년은 손가락을 불기에만 바빠 그런 것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 했다. 조금 맹해보이는 눈빛의 소년은 손을 식힌다 코코아를 마신다 바쁘게 손을 움직이면서도 눈만은 줄곧 한 곳에 못박고 있었다. 하얀 가운에 눈매가 날카로운 하얀 피부의 청년. 대체 뭐가 그렇게 재밌어서 바라보는지 신기할 정도로 소년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다. 마치 그를 바라보는 것이 평생의 숙명인듯 집요하게. 계속해서 그만 바라보며 호르륵 코코아를 마시고는 뜨거운 듯 혀를 내밀어 헥헥 거린다. 그리곤 놀라서 맺힌 눈물에 반짝거리는 눈으로 계속해서 청년을 바라보았다.

"루야야 여기있니?"

노크도 없이 덜컹 열린 문 너머로 한 여성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방 안에 있던 세 사람의 시선이 모두 그 쪽으로 쏠린다. 청년과 소년, 그리고 청년의 손님. 그는 의사이므로 정확히는 환자라 해야 맞겠다. 청년은 숨을 훅 내쉬더니 대답했다.

"여기 있으니까 ‘제발’ 데려가."

잠시 셀린을 바라보더니 그새 다시 엘리에게 시선을 복귀시킨 루사나는 전혀 나갈 생각이 없는 듯 했다. 아니 그의 말을 듣기는 한 걸까. 소년은 아무 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듯 했다. 오로지 엘리, 단 한 사람만 제외하고는. 셀린은 전혀 무반응인 루사나를 보며 고개를 휘휘 젓더니 성큼성큼 진료실 안으로 들어와 루사나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코코아─……,’ 하고 중얼거리는 소년의 목소리는 들은 척 만척 흘려넘기며 그를 잡아 끌었다. 셀린의 손길에 의해 의도치 않게 걷게 된 루사나는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그녀를 뒤따랐다. 진료실 문이 닫히기까지 엘리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소년의 모습에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진료실 문이 닫히자 꼬리내린 강아지 같은 모습이 되어 시무룩하니 그녀를 뒤따르는 소년의 모습에 셀린은 조금 곤란한 얼굴이 되었다.

"엘리가 그렇게 좋아?"

신기해서 물은 셀린의 질문에 소년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너무도 순진한 눈동자를 앞에 둔 탓에 뭔가 더 따져물을 기운도 나지 않았다. 그저 ‘엘리, 너 잘못걸렸구나,’ 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그의 행복을 빌어줄 뿐. 셀린이 그렇게 생각에 빠져있는데 무언가 그녀의 소매를 잡아당긴다. 내려다보니 소년의 손이 옷자락을 붙들고 있었다.

"어디 가는 거예요?"
"간식 먹으러."
"간식?"
"딱 시간이 간식 시간이잖아. 눈사람 모양 브리오슈, 먹어본 적 있어?"
"으응─."
"네가 있을 땐 만든 적이 없었던가. 달아, 맛있어. 단 거 좋아하지?"

살짝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소년의 모습에 셀린은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애가 이리 솔직한지 한번씩 웃음이 터진다. 보통 단 걸 좋아한다거나 하는 것, 이 또래 남자애들은 숨기지 않나? 어리둥절한 눈으로 올려다보는 루사나의 머리를 쓱쓱 쓸어주고는 셀린은 앞서 식당으로 재게 걸었다. 코코아를 마시며 천천히 따라오던 루사나의 ‘같이 가요,’라는 소리는 한귀로 흘려넘겼다. 아직도 꽤 많이 남은 코코아를 엎을까봐 빨리 걷지 못하는 소년을 복도의 코너에서 기다리며 셀린은 피식 웃었다. 난로가 없는 복도의 공기는 꽤나 차갑기 때문에 벌써 거의 식었을 텐데 못 마시고 조심조심 들고오는 모습이 재밌다.
루사나의 걸음에 맞춰 느릿하게 도착한 식당에는 낯선 사람이 있었다. 화사한 금발에 여유로운 미소가 눈에 띄는 남자다. 가늘어보이는 손목에 걸린 얇은 팔찌가 찰랑하고, 소리를 내었다. 찻잔을 들어올려 입에 대고 내려놓기까지의 일체의 과정에는 몸에 벤 품위가 엿보인다. 쓸데없는 동작은 전혀 없었다. 걸치고 있는 옷의 재질은 꽤나 고급이다. 정장은 아니지만 격식에 어긋난 것도 아니었다. 괜찮군. 눈이 마주친 아주 잠깐동안 낯선 이를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훑어본 후 점수를 매겨본 셀린은 식당에 들어서며 눈빛으로 사랑하는 동생, 세실에게 질문을 던진다. ‘누구야.’

"루사나군을 찾던데? 누님도 모르는 사람이야?"
"루야한테?"
"응. 루사나군은? 데리러 갔던 거 아니었어?"
"아까까지 잘 쫓아왔으니까 이제 들어올……, 루야?"

안그래도 하얀 얼굴이 파랗게 질려버렸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에 식당 안에 있던 사람들은 어리둥절하게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소년은 누군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바닥에 조심스레 머그컵을 내려두고 그대로 뒤로 한발짝 내딛었다. 그리고, 그의 모습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뭐지?"
"글쎄."
"아, 루오빠 갔어? 브리오슈 내가 구운건데……."

과자를 예쁘게 담은 접시를 들고 종종걸음으로 나오던 린이 울상을 지었다. 세실이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할 수 없지. 다음에 오면 또 굽자."
"응!"

부녀는 마주보며 생글거리고 셀린은 고개를 저었다. 둘 다 못말려, 정도로 해석하면 될까. 린은 자기 머리보다 커다란 접시를 식탁에 올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루오빠 그냥 가버렸지만, 같이 과자 먹고 가요."

방긋 웃는 아이의 얼굴에 웃음으로 대응한 그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일어났다. 아이의 앞에 내민 하얀 종이에는 그린 듯이 예쁜 글씨로 이렇게 적혀있었다.

「감사합니다만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이는 아쉬운 눈길로 쪽지를 받아들었다. 뭔가 싶어서 쪽지를 들여다본 셀린이 세실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질문 없이 바로 대답이 나온다. 아니, 정확히는 이번에도 쪽지. 셀린이 세실에게 전해받은 쪽지를 읽는 동안 세실은 손님을 붙잡았다.

"기왕 구운건데 같이 드시죠. 어차피 같이 먹으려고 했던 루사나군도 가버렸으니까요."
"응응, 같이 먹어요!"
"린이도 이렇게 바라고 있으니까요."

청년의 친절한 말에 손님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앉았다. 세실은 차를 내오러 잠시 부엌으로 들어가고 셀린은 손님의 옆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셀린은 쪽지를 옆에 내려두고 그에게 말을 걸었다.

"이 쪽지대로라면 말을 하지 못하시는 거군요."

그는 웃으며 고개를 가볍게 숙여보였다. 불편하군, 이거. 그나저나… 딱히 할말이 없네. 셀린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쿠키를 하나 집었다. 일단 먹고보자.

"오빠는 루오빠의 친구─인거죠? 이름이 뭐예요?"

그러고보니 이름도 몰랐구나. 아이의 질문에 그제야 알아차렸다. 그는 미리 준비해서 늘 가지고 다니는 듯 품 속에서 꺼낸 종이 한장을 아이에게 건냈다.

「루아인Ruain」

"에…, 그럼 아인오빠라고 불러도 될까요?"

끄덕끄덕. 아아, 화기애애하군.

"뭐야, 그 녀석은 어디갔어?"
"엘리 삼촌!"

갑작스런 목소리에 돌아보니 그새 진료가 끝난 건지 식당 문 앞에 피곤한 얼굴의 엘리엇이 서있었다. 때마침 찻잔을 든 세실이 나오며 그를 반겼다.

"환자분은 돌아가신거야? 먼저 앉아있어. 한잔 더 따라올게."
"고마워."
"삼촌, 오늘 브리오슈 린이가 구웠어요!"
"어쩐지. 오늘따라 냄새가 더 좋더라. 잘했어."
"에헤헤."

쪼르르 달려나가 그의 옆에 매달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엘리가 식탁에 앉고 세실은 찻잔을 각자의 앞에 내려둔 후 다시 부엌으로 들어갔다. 아이가 아빠를 외치며 따라들어가는 것을 잠시 바라보던 엘리가 식탁 위에 뭔가를 올려놓았다.

"뭐야, 왠 나뭇잎?"
"몰라. 당신한테 전해달라는군요."

그 것은 방금 가지에서 딴 듯 파릇한 나뭇잎 한 장. 엘리는 그것을 아인을 향해 내밀었다.

"어쩐지 전혀 안 놀라더라. 누가?"
"그것도 몰라. 이 쪽으로 오는데 누가 창문을 두드려서 봤더니 주던데. 린이보다 작은 남자애. 키만 봐서는 10살이 안됐으려나."
"헤에."

오늘은 묘한 손님이 많네, 셀린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 묘한 손님 중 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아니, 보려고 했다. 이미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남아있는 것은 이번에도 하얀 종이쪽지와 구슬을 꿰어 만든 어린아이 손목에나 들어갈 듯한 팔찌 하나.

"어라, 손님은 가신거야?"
"그런 모양인데."
"에?"
"또 가버렸다…."
"자, 린이 네 거. 맛있는 과자에 대한 보답이라는데?"
"왓, 예쁘다~!"
"근데 이거 루비 아냐? 이건 사파이어…, 전부 진짜 보석같은데?"
"에이, 설마."
"내가 이런 거 한두번 보겠어? 확실해. 일단 전문가한테 한번 보여야겠지만 이거 전부 진짜 보석이야. 대체 뭐지, 그 녀석?"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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