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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2.16 오리아나 커미션(15.10.11)

목말라.


무심코 물을 찾아 고개를 들었다. 케일의 등에서 그림자가 늘어져 오리아나를 가렸다. 키는 훌쩍 크지만 넓지는 않은 소년의 어깨가 며칠사이 듬직하게 변해있었다.


처음 겪는 일이 너무 많아서 집을 떠나온 지 한 달은 된 것 같았다. 언젠가는 내 일이 될지도 몰라서 차마 외면할 수 없었던 일들이 차례차례 현실이 되는 것은 신기한 느낌이었다. 본 적도 없는 좋은 음식을 대접받으며 어린 동생의 뺨보다 부드러운 옷을 입고 알록달록 기상천외한 사람들 사이를 내달렸다. 마치 동화 속 공주님이나 용감한 기사가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오리아나는 어쩌면 캐피톨이 맞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헝거 게임에 참가하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며, 그 우승자는 판엠의 영웅일지도 모른다고. 적어도 그 환상적이고 놀라운 도시에서는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오리아나는 그런 생각이 자신의 느긋한 환상이라는 것을 알았다. 오리아나를 쳐다보는 눈동자가 말하고 있었다. 어떤 것은 울고, 어떤 것은 웃고, 또 어떤 것은 화를 냈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말은 모두 하나였다.


‘너는 곧 죽을 거야.’


오리아나는 눈동자 하나하나에 대답해주었다.


‘그래도 좋아. 이걸로 가족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다면 그걸로 좋아.’


무시무시한 날붙이를 휘두르는 사람도 굶주린 사냥개처럼 눈을 빛내는 사람도 있었다. 공동훈련에서는 정말로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가르쳤다. 배울 생각은 없었지만 케일을 따라다니며 주워들은 살인 기술은 요리를 위해 고기를 손질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리아나와 똑같이 웃고, 울고, 이야기할 수 있는 대상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그랬다.


요리에 대해 생각하자 엄마가 떠올랐다. 오리아나가 엄마를 도와 부엌에 서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다. 병으로 쓰러지신 뒤로는 더욱 그랬다. 엄마는 발전소를 쉬는 대신 집안일은 자신에게 맡겨달라고 했지만 오리아나는 차마 엄마가 창백한 안색으로 불 앞에 서있는 모습을 지켜볼 수 없었다.


엄마를 생각하자 연달아 아빠와 동생들 얼굴이 떠올랐다. 오리아나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케일.”


오리아나가 부르자 앞서가던 소년의 등이 움찔거렸다.


“우리 엄마랑 아빠 얼굴 기억해요? 동생들도.”


평화롭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케일은 어깨를 으쓱했다. 걸음은 그대로. 조금도 느려지거나 빨라지지 않았다. 잠시라도 멈추었다가는 등 뒤에서 칼이 날아올 것이다.


“당연히 기억하지.”


내키지 않는 듯 퉁명스럽게 케일이 대답했다. 오리아나는 산들바람처럼 상쾌하게 웃었다. 케일이 불편해하는 기색이 등으로 전해졌다. 웃음은 금세 기가 죽었다. 배가 고프니 웃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넌 우리 부모님 얼굴 기억하냐. 형이나 동생 놈들도?”


웃음이 누그러지자 케일이 물었다. 방금 전과는 확연하게 톤이 달랐다. 잠긴 것처럼 낮아진 목소리였다. 먹먹하게 공기가 젖어들었다.


“물론이죠.”


오리아나는 활짝 웃었다. 케일이 우울해하게 두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곧 죽을 거라면 마지막까지 행복하길 바랐다. 어딘가에서 그들을 바라볼 카메라를 향해서도 웃어보였다. 틀림없이 지켜보고 있을 가족에게 전하고 싶었다.


‘나는 괜찮아요.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오리아나를 보면 엄마는 울어버릴 테지만 아빠도 있고 동생들도 있으니 괜찮다. 오리아나는 엄마를 위해 웃었다. 엄마도 똑같이 웃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케일이 그런 오리아나를 보고 투덜거렸다. 오리아나는 케일을 향해 다시 한 번 웃었다. 만약 케일이 살아남는다면 오리아나를 웃는 얼굴로 기억해주었으면 했다. 케일이라면 가족에게도 전해줄 수 있을 것이었다. 오리아나는 사랑하는 엄마, 아빠와 동생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있어서 기뻤다고, 위대한 헝거 게임의 우승자로 돌아가 오리아나를 잃고 슬퍼하는 오리아나의 소중한 사람들을 따뜻하게 위로해줄 것이다. 그런 믿음이 있었다.


오리아나는 케일에게 맡기기로 했다. 미래를, 그리고 소중한 사람들을 향한 마음을. 오리아나가 겪어온 케일이라면 자기 자신보다 소중하게 지켜줄 게 틀림없다.


“나 참.”


케일이 툴툴거렸다.


“하여간 실없는 소리는 잘도 해요.”


오리아나는 멋쩍게 눈을 돌리는 소년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기도했다. 케일이 살아남기를.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기를.


안온한 시간은 길지 않았다. 이곳은 영예로운 헝거 게임장. 침묵과 평화는 사신을 소환하는 제물이었다.


폭발이 일었다. 지척이었다. 반사적으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케일은 식은땀을 흘리며 오리아나를 잡아끌었다. 깡마르고 단단한 손 안쪽이 축축하게 젖었다.


“야, 등신아. 봤지? 그만 처웃고 가자.”


케일의 목소리는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어디에 붙었는지 무시무시하게 불길이 올랐다. 화염은 두 사람이 있는 자리까지 날아들었다. 곧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대포 소리였다. 헝거 게임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별똥별 대신 대포가 하늘을 달린다. 오리아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케일이 이끄는 대로 달린다. 어디를 얼마나 달렸는지 몰랐다. 숲 속에서 눈을 감고 달리니 발을 헛디디기 일쑤였다.


“씨발! 미친. 미친놈. 미친 건 알았는데. 미쳤잖아.”


미친, 미친하는 케일의 혼잣말이 노래 같다. 시야는 붉고 어두웠다. 감은 눈꺼풀 너머로 불타는 코뉴코피아가 떠올랐다. 균형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걸음, 어눌한 발음. 무어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곧 그는 붉은 화염 속에 시커먼 잿덩이가 되어버린다. 약에 의존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소년에게는 죽음이 구원이었을까. 눈물 한 방울이 기어코 눈꺼풀을 비집고 흘러내렸다.


“등신아, 울긴 왜 울어.”


언제 그만큼 달렸는지 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알 수 있는 것은 달려서 뜨거워진 체온과 차고 축축한 케일의 손, 헐떡이는 것이 숨소리인지 훌쩍임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얼굴을 감싼 손에 물기라곤 없었다. 먹은 것도 마신 것도 없는 몸에 눈물은 메마른지 오래였다.


“케일.”


거친 손을 다정하게 붙들었다. 집에서는 일하느라, 이곳에 와서는 흙을 해치느라 쉬어본 적이 없는 손이었다.


“징그럽게 왜 이래?”


케일이 기겁했다.


준비팀이 정성들여 씻긴 보람도 없이 삼일동안 야생에서 뒹군 오리아나의 얼굴은 시커멓고 지저분했다. 환한 미소 위로 눈물길이 트였다. 씰룩이는 뺨을 따라 꿈틀꿈틀 춤을 춘다. 오리아나는 꿈지럭거리는 케일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차가운 손가락에 온기가 돈다.


흙먼지에도 색이 바래지 않은 푸른 눈이 살풋 휘어졌다. 오리아나는 공장에서 술래잡기 하던 때를 떠올렸다. 케일은 체력이 좋고 달리기도 빨라서 오리아나가 술래일 때 케일을 잡아본 적은 거의 없었다.


“바보바보 케일 리거!”


심하게 싸운 다음날이었다. 점심 식사 후 아이들끼리 가지는 놀이 시간, 오리아나는 누구보다 먼저 케일을 발견했다. 머뭇거리는 사이 술래잡기가 시작되었다. 케일 생각만하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술래가 되어있었다. 아이들이 일제히 오리아나에게서 멀어졌다. 그 순간 케일이 눈앞에 있었던 건 우연이었을까. 있는 힘껏 손을 뻗으니 케일이 잡혔다.


케일은 그때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불퉁하게 부은 볼에 찌푸린 눈썹, 어딘가 안심한 듯한 눈빛.


“뭐야,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오리아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해피 헝거 게임, 케일. 확률의 신이 언제나 케일 편이길 바라요.”


“……야, 등신아. 너 지금…….”


“나 물마시고 싶어요.”


오리아나는 나무에 기대섰다. 빛이 드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카메라가 있다면 저쪽이리라. 마지막까지 웃는 얼굴로 잡아주세요. 속으로 빌었다. 케일이 신경질적으로 ‘뭐야?’하고 물었다.


“뛰다가 발목을 삐끗했어요. 잠깐 쉬면 괜찮을 것 같은데 목이 너무 말라요.”


땅으로 떨어지는 고개를 억지로 들어 케일과 눈을 맞췄다. 케일은 뭐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잘 숨어있을게요. 네?”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다리가 떨리는 정도는 틀림없이 케일에게도 보일 것이다. 케일의 얼굴은 투명한 호수처럼 소년의 머릿속을 훤히 비춰주었다. 오리아나는 쓰게 웃었다.


“조금만 기다려.”


대답을 듣자 더는 마주보고 있을 힘이 없었다. 오리아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땅을 쳐다보았다. 다리가 볼썽사납게 후들거렸다.


“등신아, 잘 숨어 있어. 훤히 보이는데 서있지 말고 앉아서!”


오리아나는 속으로 대답했다. 서 있을 기운도 없어요.


케일이 멀어지는 소리가 났다.


오리아나는 눈을 감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일을 할 때 친구들과 함께 부르던 노래였다. 지루하고 힘든 일을 함께 이겨낼 수 있게 도와주는 노래였다. 나뭇가지에 쓸린 팔꿈치와 등이 따가웠다. 쓰러지지 않고 주저앉는 것만도 힘에 겨웠다. 아까는 나지 않았던 눈물이 이번에는 나올 것 같기도 했다.


사박사박 풀을 밟는 소리가 났다. 나뭇가지 하나 부러지지 않는다. 오리아나는 그게 그녀가 잘 훈련받은 덕인지 몸무게가 가벼운 덕인지 궁금했다.


“기다렸니?”


간신히 오리아나가 볼 수 있는 자리에 그녀가 있었다. 또렷한 시선이 지친 오리아나를 후벼 판다. 힘겹게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 삼일을 숲속에 있었던 건 그녀도 마찬가지일 텐데 오리아나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말끔한 모습이다.


“안녕하세요, 이브.”


인형처럼 무표정하던 얼굴이 피어나는 꽃처럼 화사해졌다. 오리아나는 마주 웃으며 그녀를 맞았다. 이브, 첫 번째 여인. 죄의 희생자인 그녀는 오리아나의 사신이었다.



강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런데도 어째서 이렇게 불안한지. 케일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서있던 오리아나가 눈에 밟혔다. 대포 소리가 울릴 때마다 서럽게 울던 소녀는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물기 하나 없는 얼굴에 흙먼지로 그려진 우는 표정은 잘못 만들어진 피에로처럼 기괴했다. 웃는 얼굴이 절규하는 것처럼 보였다.


두 걸음에 한 번씩 뒤를 돌아보면서 걸음을 재촉했다. 폭발 속에서 오리아나가 그랬던 것만큼 발을 헛디뎠다. 이대로는 자신마저 움직일 수 없게 될지 몰랐다. 케일은 돌아보기를 그만두었다.


강에 도착했는데 물을 뜰 그릇이 없었다. 그릇을 만들려고 했더니 재료가 보이지 않았다. 겨우 나뭇잎을 모아오니 빨리 걸을 수가 없었다.


“더럽게 차갑네.”


나뭇잎 그릇은 작아서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물이 넘쳤다. 오리아나에게 돌아가는 길이 멀고 멀었다. 씨발, 씨발. 욕을 해도 흘러넘친다. 조금 더 빨리. 조금 더 빨리. 마음만큼 발은 빠르질 않다. 하늘에는 어느 샌가 노을이 졌다. 강물도 붉게 물든다. 찰랑찰랑 흘러넘친다.


‘안녕, 케일. 꼭 살아남아야 해요.’


태양은 사뿐사뿐 떨어진다. 먼 별에 사는 조그만 생명들이 살고 죽고 울부짖는 것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발걸음이 가벼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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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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