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카 타입 자캐 커미션입니다
예상은 했지만, 조금도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행동에 웃음이 나왔다. 기껏 이인분 아침 식사를 준비했는데 손도 대지 않고 가버리다니 매정한 녀석.
「시간이 늦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유하가 남기고 간 쪽지였다. 아침 식사를 준비해놓고 잠시 눈을 붙인다는 게 깊이 잠들어버렸다. 아직 여덟시도 되지 않았는데 어디가 늦었다는 거야. 한 시간도 잠들어있지 않았는데 사라진 걸 보면 눈을 뜨자마자 부리나케 챙겨서 나간 듯했다. 불륜 현장도 아니고 이렇게 달아나는 게 더 수상해 보인다고는 생각도 못 했겠지.
‘요령이 없다니까.’
쪽지를 내려놓고 기지개를 켰다. 오늘도 피할 수 없는 하루가 시작되었다. 가족도 사랑하는 사람도 만날 수 없지만, 사랑은 그리움으로 한층 깊이를 더해가겠지.
정확히 사흘이 지난 후 점심, 유하에게서 전화가 왔다. 평소보다 조금 늦다. 바빴던지, 연락하기가 어려웠던 거겠지. 전화 한 통에 만감이 교차했다.
「안녕하세요. 저 유하예요.」
수화기를 들자마자 의미 없는 자기소개가 날아왔다. 평소보다 목소리가 가라앉은 게 아무래도 바빴던 모양이다.
「오늘 저녁에 시간 되세요?」
스케줄을 확인한다. 아슬아슬하게 저녁이 비었다. 선배가 저녁에 못 나온다고 했을 때는 야속하게만 느껴졌는데 이제 보니 천만다행이었다. 입가가 간지럽다.
“마침 딱 저녁이 비네. 밥 사려고?”
「네. 언제쯤 찾아뵈면 될까요?」
유하는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그런 목소리마저 귀엽게 느껴지는 건 동생 연아에게 익숙해진 탓일지도 몰랐다. 그런 점은 참 많이 닮았다. 아마도 그게 원인이었다. 유하를 처음 만났을 때 느껴지던 묘한 친근감의 정체. 따져보면 생긴 것부터 재능, 취미, 가치관까지 하나도 닮은 게 없는데도 어쩐지 낯설지가 않았다.
“어디서 볼래?”
「제가 찾아갈게요.」
“운전할 거야?”
「네.」
친동생이 연상되는 연하를 상대로 욕정 하는 건 금기된 사랑을 꿈꾸고 있었다는 증거일까. 이유야 어찌 되었든 동생이 아닌 다른 사람을 원하게 되었으니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일까. 거절당해 받은 상처를 이런 식으로 외면하고 싶은 걸지도 몰라.
의미 없는 상념이 유하의 목소리와 함께 수신이 끊어진 휴대폰 근처를 맴돌았다. 이러지 않으려고 공부에 매달렸는데 사랑은 쉽게도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놓는다. 연우는 떨떠름하니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한 곳에 전화해보고, 세 사람에게 이메일을 돌리면 일단 오늘 할 수 있는 건 끝난다.
멍한 상태로 다이얼을 돌렸다. 신호음이 흘러가는 동안 또 다른 상념, 후회가 밀려든다.
지난겨울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삼십여 년간의 후회를 한꺼번에 해결하기라도 하려는 듯 사건이 몰아쳤다. 여린 동생들 앞에서는 내색하지 못할 무거운 죄책감이 어깨를 눌렀다. 그리고 그럴 때면 그 연약한 소년에게 기대고자 하는 자신이 괘씸해서 그게 또 견딜 수가 없다.
온전히 자책의 물결에 휩쓸리기 전에 신호가 끊어졌다. 다이얼 화면으로 돌아온 휴대폰을 들고 이번에는 문서 어플을 켜서 이메일 초안을 작성한다. 세 사람이 아니라 네 사람에게 보내게 되었지만, 결과적으로 하는 일은 비슷했다. 조그만 액정을 붙들고 문서를 작성하는 게 답답하긴 해도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점심에서 저녁이 되기까지 여섯시간 남짓. 하루가 너무 길었다. 시곗바늘이 어찌나 느리게 움직이는지 직접 돌려놓고 싶을 정도였다.
이메일 네 통을 보내는 일은 순식간에 끝났다. 말을 고르고 고르느라 문서를 작성하는 데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그나마도 며칠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던 내용이라 문장만 다듬으면 됐다. 한 시간 남짓 걸려 본문을 작성하고, 고스란히 옮겨 전송 버튼을 누르자 더는 할 게 없었다. 유하가 아무리 일찍 퇴근해도 앞으로 다섯시간 안에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결국, 공부를 해야 했다. 유하와 약속을 잡아둔 상태로 공부하는 건 고문에 가까운 일이었다. 글자가 하나도 뇌리에 들어오지 않아서 몇 리터씩 물을 마시고, 그만큼 화장실에 드나들었다. 방금 읽은 문장이 기억나지 않아 다시 읽기를 반복하다 보니 책이 넘어가질 않았다. 챕터와 과목을 바꿔보고 바람도 쐐봤지만, 결국 유하에게 연락이 올 때까지 계획한 진도를 마치지 못했다.
유하는 약속대로 차를 끌고 나타났다. 평범한 청바지에 반소매 차림이었다. 편한 차림인데도 주름 없이 빳빳하게 당겨진 티와 몸에 잘 맞는 바지가 깔끔한 인상을 준다. 낮이 길어져 저녁임에도 쨍쨍한 태양 아래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서 있는 모습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유하는 전속 운전기사마냥 문을 열어주었다. 심지어 앉으라고 열어준 좌석은 운전석 뒷자리. 이런 것도 직업병이라면 직업병일 것이다. 괜찮다고 옆에 앉겠다고 하자 뒤늦게 깨달았는지 서둘러 차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어차피 같이 타야 한다는 건 까맣게 잊은 모양이다.
차를 타자마자 서둘러 출발한다. 창밖으로 익숙한 건물들이 멀어졌다. 말을 걸어도 되겠지만 고요한 게 마음에 들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같은 공간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 갈망이 채워진다. 보고 싶었다. 네가 보고 싶었다. 꾹꾹 눌러 담았던 그리움이 새봄을 맞은 눈처럼 녹는다. 조바심이라는 발자국에 검게 물들었던 마음이 조금씩 본래 색을 되찾아간다. 사랑은 상대방의 마음도 현재 상황도 개의치 않고 제멋대로였다.
차가 멈춘 곳은 젊은 사람들이 많이 오가기로 유명한 번화가였다. 능숙하게 주차장을 찾아 핸들을 꺾는다. 유료 주차장이라는 간판이 높게 솟아있었다.
“조금 걸어야 해요.”
유하가 말했다.
금요일 오후지만 시간이 일러서인지 자리가 넉넉했다. 유하가 예상보다 일찍 도착한 덕에 저녁식사를 하기에는 어정쩡한 시간에 도착한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유하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주차장을 빠져나와 내게 물었다.
“바로 식사하긴 그러니 카페라도 들어갈까요?”
오랜만에 느긋하게 마시는 샴페인이 끌리는 날이었지만, 기꺼이 유하를 따라간다. 저녁 식사도 할 수 없는 시간에 여는 바가 없을뿐더러 유하가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
친구들과 만날 때 자주 오는 거리였지만, 이곳도 많이 변했다. 고시 준비한다며 틀어박혀 있는 동안 공사하는 것조차 본 적 없는 대형 빌딩이 잔뜩 들어섰다. 특히 지하철역 위에 들어선 대형 영화관은 뜻밖의 장소였다. 묘한 기분이 들어 간판을 쳐다보고 있으니 유하가 흘끔 쳐다보았다.
“영화 보실래요?”
그동안 놓친 영화가 몇 편이더라. 영화를 특별히 즐기는 건 아니지만, 친구들과 대화하기에 이만큼 무난한 소재가 없는지라 기대작은 반드시 톡방에 올라왔다. 개중에는 간절히 보고 싶었던 것도 있는지라 가끔 기분을 바꾸고 싶은 날에는 핑계 삼아 보러 간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아니야. 어디 들어가서 앉자.”
이 분위기에서 유하랑 영화를 보러 갔다간 내용이 귀에나 들어올지 모르겠다. 유하도 예의상 물어봤을 뿐인지 별말 없이 영화관이 있는 건물을 지나쳤다.
골목으로 파고든다. 계획되지 않은 도시가 대개 그렇듯이 이 거리도 작은 건물들 사이로 집과 가게가 엉켜 있다. 사람들은 거미줄처럼 엉킨 골목길 사이를 재주 좋게 누비며 놀이를 즐겼다. 미로 같은 길거리를 헤매며 새로운 풍경을 찾아내는 걸 즐기는 이들도 있을 정도다.
유하는 앞서 걸으며 길을 안내했다. 거세게 흐르는 강물 같던 인파가 잔잔한 시냇물로 변한다. 멈춰선 유하가 두 블록 떨어진 건물 간판을 가리키며 예약해준 식당이라고 했다. 한식 코스 요리 ○○반상. 유하다운 메뉴 선정이었다.
바로 옆에 있는 조그만 카페로 들어갔다. 유하는 메뉴판 앞에서 생각에 잠겨있었다. 뒤에서 보니 새삼 자세가 곧다. 상의 실루엣으로 언뜻언뜻 비치는 척추가 곧게 직선을 그리고 있었다.
“여긴 내가 살게.”
“아뇨. 제가 부탁드린 거니까 제가 낼게요.”
“밥 사는 사람이 차까지 내는 거 아니야.”
유하는 더 말이 없었다. 먼저 앉으라는 뜻으로 유하의 어깨를 두드렸다. 유하는 못내 불퉁하게 우유 아이스크림을 주문하고 물러났다. 식전에 달콤한 간식을 먹는 게 의외였다. 그러고 보니 밖에서 뭘 먹은 적이 없었다. 유하에게는 갑작스러운 이야기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인제야 들었다.
주문을 마치고 테이블에 앉은 유하에게 말을 걸었다.
“유하야.”
“저기.”
동시에 말을 꺼내고 동시에 입을 닫는다. 잠시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재빨리 순서를 양보했다. 유하는 머뭇머뭇했다.
“고맙습니다. 제대로 인사를 못 드렸죠.”
“침대 비워준 정도로 인사는.”
“그런가요.”
유하는 옅게 웃었다.
“일은 어때?”
“똑같죠. 오늘은 성야 일정이 있어서 데려다주느라 빨리 끝났어요.”
“사무실엔 안 나갔고?”
“쇼 프로 녹화가 있어서 이번 주엔 더 안 갈 것 같아요. 쫓아다니다 보면 퇴근이니까요.”
“다행이네.”
안심했다. 당분간 성추행범과는 만나지 않는다는 소리다. 손을 빨리 쓰면 추가 피해는 막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한 사람을 점 찍으면 집요하게 손을 대는 자였다. 유하가 일을 그만두거나 남에게 넘기지 않는 이상 아예 만나지 않는 게 가장 좋다.
“할 말 있는 거 아니었어요?”
유하가 물었다.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유하가 알아봐야 좋을 게 없었다. 도움받는 걸 끔찍이 싫어하는 유하였다. 홀로 긴 시간을 버텨온 사람은 다들 그렇게 되는 걸까. 소중한 얼굴이 연달아 떠올랐다.
음식이 나와서 각자 자기가 시킨 걸 끌어당겼다. 유하는 아이스크림, 나는 아메리카노였다. 평범하게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을 뿐인데 그게 귀여워서 한참을 쳐다보았다. 유하가 뭐 묻었냐고 물어볼 때까지.
“아니야. 네가 식전에 아이스크림 먹을 줄은 몰라서 신기했어.”
“아.”
유하는 망설이다가 들고 있던 스푼을 내려놓았다.
“먹어. 방해하려던 게 아니야.”
“요즘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셔서 줄이려고 하는 중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반쯤 남은 아이스크림 위에 수저를 놓고 손을 테이블 아래로 내렸다. 정말로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난처하게 됐다. 괜히 나도 미안해서 커피에서 손을 뗐다.
잠깐 침묵이 돌았다. 각자 핸드폰을 꺼내서 시간을 확인한다. 새로운 메일이나 전화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무것도 없었다. 유하는 뭔가 타이핑을 하고 있었다. 세하에게 보내는 저녁 잔소리일 거라고 지레짐작해본다. 저 형제가 어떤 관계를 쌓고 있는지는 대략 정보가 있다.
각자 동생과 가족들, 뉴스에 대해서 대화하다 보니 삼십여 분은 금방이었다. 슬슬 저녁을 먹어도 무리가 없을 거라고 판단한 우리는 카페에서 일어나 식당으로 이동했다. 음식을 남기지 못하는 유하는 부끄러워하면서도 결국 아이스크림을 끝까지 먹었다. 내 커피는 반 이상 남았다.
아직 저녁도 아닌데 대기자가 있었다. 다행히 한 팀. 카페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없었던 줄이라 바로 올 걸 그랬나 하는 이야기를 했다. 유하도 놀란 얼굴이었다.
“주말에는 온 적이 없어서 몰랐네요. 평일 오전에는 한 번도 대기줄을 본 적이 없어요.”
시간에 맞춰 예약석은 비어있었다. 입구로 들어가니 대기하던 사람이 부럽다는 듯 쳐다본다. 테이블에 자리를 잡는 사이 대기 줄은 두 팀이나 불어났다. 바로 들어온 건 좋지만, 느긋하게 먹기는 힘들겠다.
주문은 유하에게 맡겼다. 내 입맛도 가게도 잘 알고 있는 유하니까 알아서 잘 골라주겠지. 내가 고른 건 와인뿐이었다. 아까부터 줄곧 와인 향기가 코끝을 맴돌아서 모른 척 넘어갈 수가 없었다.
“자주 오는 곳이야?”
“몇 번 왔어요. 성야가 이 근처를 좋아해서요.”
유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음식점에서는 거의 들어본 적이 없는 한국 노래가 나왔다. 인디 음악 같은 걸까. 제목은 알 수 없었지만, 식사하면서 분위기를 즐기기에 좋은 선곡이었다.
“여러모로 감사드려요.”
유하가 말했다.
“세하 일도, 저한테 신경 써주신 것도 전부 다요.”
“아까 얘기 끝난 거 아니었어?”
나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대꾸했다. 유하는 소리 없이 고개를 젓는다.
“그동안에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신세 진 게 워낙 많아서 따로 인사를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특히 세하의 무례를 용서해주신 것 정말 감사합니다.”
유하는 식탁 위로 고개까지 숙여 인사했다. 너무 정중해서 당황스럽다.
“유하야.”
“형으로서 동생의 행동을 잘 단속했어야 했는데 고생하시게 해서 죄송해요. 요즘도 제멋대로라서 면목이 없습니다.”
“유하야 잠깐만.”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식탁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유하를 일으켰다. 때맞춰 나온 첫 번째 코스가 세팅되는 사이에 생각을 정리했다. 몰아붙이면 안 된다. 그렇게 되뇌었다.
“요전에는 내가 성급했지. 부담스러웠으면 미안해.”
음식만 쳐다보고 있던 유하가 날 바라본다.
“나는 우리가 충분히 유대를 쌓았다고 생각했어. 널 불편하게 하려던 게 아니야. 나도 너희보다는 나이가 많지만, 평범한 사람이라서 실수를 했나 봐.”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에서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아 무서웠다. 그때는 바로 굳어지는 게 보여서 상처받았는데 이번엔 조용해서 무섭다니. 자신의 옹졸함에 수치심마저 들었다.
“못 들은 거로 해줄래. 지금까지처럼 지내자. 친구로, 친한 형 동생으로. 응?”
유하의 곧은 시선이 나를 원망하는 듯했다. 그럴 거면 대체 왜 말을 해서 괴롭혔냐고. 그렇게 외치는 것 같았다.
'the other world > commissi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텟님 커미션 (7) (0) | 2017.06.22 |
---|---|
텟님 커미션 (6) (0) | 2017.06.06 |
레토님 커미션 (1) (0) | 2017.05.16 |
텟님 커미션 (5) (0) | 2017.05.13 |
피피님 커미션 (3) (0) | 2017.04.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