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를 제공받고 따뜻한 물에 몸을 씻을 수 있게 되자 그제야 살았다, 라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이 폐만 끼치는 비루한 생명이 그다지 오래살기를 바라지는 않았으나 살아있다는 당연한 본능인지 분에 넘치게 편안한 삶을 살아온 탓인지 저도 모르게 편한 것을 찾게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쉬이 이곳을 떠날 수는 없을 것 같아서 이것저것 베풀어준 미류씨와 풍룡 꼬마들에게는 미안하게 되었다. 당분간 계속 민폐를 끼치게 될 것 같은데 아무것도 드릴 것이 없어서 거듭 사과하자 이 속 좋은 사람들은 큰소리로 경쾌하게 웃어버렸다. 그저 웃음소리만 들었을 뿐인데도 같이 웃게 되고 마는 밝은 사람들이었다.
  기운찬 아이들에게 이끌려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복장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는데 집안을 이곳저곳 헤집고 다니게 되었다. 죄송한 마음에 슬쩍 미류씨 눈치를 보자 오히려 그는 젠이라는 아이에게 혼나고 있었다. 웃음이 나왔다.

  "옷에 이상한 거 묻히면 안돼."

  간신히 아이들에게서 벗어나 옷차림을 정돈하는데 제인이라는 발치에밖에 안오는 작은 아이가 옆에 와있었다.

  "아, 이건…, 더러운 게 아니예요. 옷에 바르는 것도 아니고요."
  "그럼?"

  고개를 기웃거리는 아이의 머리를 쓸어주자 아이가 헤헤, 소리내어 웃었다.

  "뭔가 냄새가 난다!"
  "박하향이예요. 시원하지요?"
  "응! 어떻게 나는 거야?!"
  "향수예요. 박하민트의 향을 담은거지요."
  "헤에―."

  자그마한 병을 보이자 섬세하게 세공되어 빛을 산란시키는 유리가 시선을 끌었던지 아이는 향수병에서 떼지 못했다. 아이에게 넘기니 작게 환호성을 질렀다. 가서 다른 아이들에게 보여주어도 되냐고 묻기에 고개를 끄덕였더니 작은 발을 놀려 포르르 방을 빠져나갔다.
  가방 깊숙히 손을 넣어 뒤지자 차가운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옷들을 헤치고 끌어낸 병에는 투명한 술이 반쯤 차 찰랑였다. 살짝 웃음이 피는 것을 참지 못하고 웃었다. 살짝 문밖의 사정을 살피고 아무도 없는 새 조심스레 집을 빠져나왔다. 어쩐지 아이들이 많은 집에서 술을 꺼내는 것 자체가 범죄 같아 당당해질 수 없었다. 아마 금새 들어올 테니까 굳이 말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

  잠깐 둘러본 것 뿐이었지만 이 작은 마을은 어딜가나 나무가 우거져 경치가 좋았다. 파릇한 풀위에 앉아 느긋하게 마시는 술은―, 안타깝게도 여전히 썼다. 코를 시큰하게 울리는 알콜 특유의 향에 인상이 자동으로 찌푸려졌다. 그래도 기분은 괜찮았다. 작게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가락을 흥얼거렸다.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했다. 지나가던 정령들이 기웃거리길래 인사하자 자연스럽게 같이 인사해왔다. 이 곳 정령들은 사람을 겁내지 않는구나. 친근하게 옆에 앉아서 말을 걸어오는 정령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두가 제 갈길을 찾아간다. 하나가 떠나면 하나가 말을 걸어와 제법 오래 대화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결국 다들 자신의 일로 돌아갔다. 조금 어둑어둑해진 듯해 미류씨나 젠이라거나 걱정하지 않을까 싶긴 했지만 나같은 걸 누가 일일히 기억하고 있겠어. 한모금 밖에 마시지 못한 술병을 다시 들었다. 크리스탈 잔에 또로록 떨어지는 방울이 그 어떤 예술작품보다 아름다웠다. 어차피 이 한잔 비우고 나면 제정신이 아니겠지만서도, 아무렴 어떠랴.
  쭈욱 들이켰다. 머리가 어질어질한 감각이 기분 좋았다. 벌러덩 드러누웠다가 한잔 더 마셔야지 싶어서 옆으로 돌아누웠다. 에, 술병을 어디다 뒀더라? 더듬더듬 더듬어 찾았다. 술병이 잡히자 안도감에 헤헤 웃어버렸다. 하지만 눈물이 나는 건 어째서? 훌쩍훌쩍 혼자 울다가 어느 샌가 까빡 그곳에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미류씨께 잠깐 나왔노라고 말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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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r 루나.

  안녕, 루나. 결코 네게 보낼 수 없는 편지가 이로써 몇통째인지 모르겠구나. 용기라고는 네 예쁘게 다듬은 새끼 발톱만큼도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이런 것 뿐이지. 이만큼 쓸 수 있는 것도 네가 볼 수 없기 때문이니까. 못본지 꽤 시간이 지났지만 넌 아직도 매력적 일거야. 눈앞에 아른아른 네 모습이 보이는 것 같구나.

  사실은 여행을 잠시 멈추게 되었어. 다시 시작하게 될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여비도 슬슬 떨어져 가니까…. 잡일이라도 하고 싶지만 너도 잘 알다시피 나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결국 아무것도 안하느니만 못하게 될테니까. 사실 그래서 돌아갈 여유도 안되고 어딘가 머문다는 것도 불가능해서 이래저래 걱정이었는데 이 곳 사람들은 다들 마음씨가 좋아서 애보는 것만 좀 도와준다면 얼마든지 머물다 가도 좋다고 말해주었어. 산속에 고립된 마을인 탓일까, 다들 눈이 선하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어. 이 마을 이름이 「코세르테르」래. 동화 속에 등장하던 전설의 도시. 처음에는 그냥 그 도시의 이름을 따서 세워진 마을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놀랍게도. 어떻게 아냐고? 지금 내 옆에서 불만스러운 얼굴로 툴툴거리고 있는 꼬마아이가 용이래. 내 앞에서 날아다니는 걸 보았어. 신기하지 않나? 아까 다른 아이가 스승이라는 사람을 소개해 주었는데 용술사라더라. 일순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걸까 생각했단다. 너라면 그냥 웃어버릴 지도 모르겠지만….

  너도 친구들도 이곳에 올 수 있다면 참 좋을텐데. 우리가 함께 모여 공부하던 그 때처럼―. 하지만 무리겠지. 다들 뿔뿔이 흩어져 버렸고, 무엇보다도 이 곳에는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모양이니까. 이렇게 평화로운 곳에서 다시 같이 지낼 수 있다면, 하고 자꾸만 아쉬움이 생긴다.  인간의 힘으로는 넘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험한 산세너머 자리잡은 전설의 장소에 모두를 초대하고 싶은데 말이지. 솔직히 그런 사실이 전혀 믿어지지 않는 평범한 시골 마을의 풍경이긴 하지만 말이야.

  마을에 관해서 바깥에 알려지면 곤란하다고 몇번이나 주의를 들었어. 소중한 아이들과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 다들 애쓰고 있다는 게 피부로 느껴져. 나도 모르게 우리들의 고향이, 아니, 네게는 고향이 아니겠지만. 어쨌든 생각나 버리더라. 어쩌다 내가 이 곳에 들어올 수 있었는지. 이것도 필시 무언가의 인연이겠지.

  그러니까 뭔가 특별한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었어. 처음에는 그냥 엄청 높은 산이 옆에 있구나, 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는데….




  나무가 많은 곳 특유의 생동감이 넘치는 산이었다. 아니 생동감이 넘치는 정도를 넘어 험하기가 과할 정도였다. 가브리엘은 멀리서 보던 까마득한 높이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일시적으로 일부에 침묵이 생긴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나 커다란 산이니 말이다. 가브리엘은 잠시 위쪽 오르막을 바라보다가 이내 눈앞의 상대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안녕?"

  베시시, 가브리엘은 어린아이마냥 헤설프게 웃었다. 바보같아 보였으려나, 걱정했지만 바람의 정령인 듯한 꼬마는 그저 동그란 눈을 크게 뜨고 빤히 그를 올려다 볼 뿐이었다. 손바닥만한 꼬마가 공중에 둥실둥실 뜬 체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은 사랑스럽기 그지없었지만―, 가브리엘은 '당신은 뭐야?'라고 묻는 듯한 시선에 결국 버티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아하하, 어색하게 소리내어 웃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몇일씩 관리하지 못해 부스스한 머리칼이 손가락 사이에 감겼다. 이거야 원, 애들이 보면 난리가 나겠는데. 머릿결이 조금만 상해도 호들갑스럽던 그녀들을 떠올리니 절대 그리워 할일은 없을 줄 알았던 집이 그리워졌다. 추억에 잠기는 것이 무서워 가브리엘은 고개를 저어 생각을 털어냈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을 타고 아이의 투명한 날개가 부드럽게 흔들렸다. 가브리엘은 조심스레 손을 뻗다가 멈칫, 이내 거두었다. 닿기는 커녕 제대로 알아차리기에도 먼 거리에서 손을 물린 터라 바람의 정인 작은 아이는 그제야 깨닫고는 두 눈을 깜빡이며 가브리엘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이내 포르르 날개를 흔들며 날아가버렸다. 가브리엘은 쓰게 웃으며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 다시 발길을 떼었다. 일단 마을이 나와야 주린 배를 채울텐데, 하는 현실적인 생각만을 머리에 가득 담은 체.

  굶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현기증이 일었다. 가브리엘은 나무에 기대 서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뭇가지 너머로 보이는 파란 하늘은 엷은 흰 구름이 군데군데 깔린 것 외에는 도화지마냥 깨끗했다. 가을처럼 짙푸른색은 아니지만 저 엷은 쪽빛마저도 눈이 부셔서 가브리엘은 힘겹게 눈을 감았다. 어쩐지 몸이 무거웠다.

  '여기서 자면 안되는데…….'

  그리고 눈을 뜬 곳에서는,

  "스―승―님―! 손님이 일어났어요―!"
  "젠, 스승님이 또 요리해!"
  "말려야지~!"

  고양이마냥 길쭉한 세로 동공의 실버블루빛 두 눈을 바라보며 가브리엘은 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이가 뾰로통하니 쏘아붙였다.

  "이봐요, 괜찮아요?"
  "아, 네…, 아마."
  "식사는 할 수 있겠어요?"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는 알았다는 듯 일어나 종종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바깥은 여전히 소란스럽기만 했다. 아무도 이곳이 어딘지, 어쩌다 그가 이곳에 있게 되었는지 설명해주지 않은 체 가브리엘은 덩그러니 방안에 혼자 남겨졌다. 어리벙벙했지만 늘 그렇듯 그러려니 하고 그는 침대 곁의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 뒤로도 식사니 뭐니 소란은 계속 되었고, 덕분에 가브리엘이 정신을 차리고 가방 안에 고이 보관해둘 편지를 쓸 수 있게 된 건 깨어나고 약 하루가 지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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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Pick a character, pairing, or fandom you like.
좋아하는 캐릭터, 커플링, 팬덤을 한 가지 고른다.
2. Turn on your music player and put it on random/shuffle.
랜덤으로 음악을 재생한다.
3. Write a drabble/ficlet related to each song that plays. You only have the time frame of the song to finish the drabble; you start when the song starts, and stop when it's over. No lingering afterwards!
음악이 재생되는 동안 그에 맞춰 글을 쓴다. 한 곡이 플레이되는 동안 하나씩. 음악이 시작할 때 쓰기 시작하고, 끝날 때 끝낸다. 다시 듣기 없기!
4. Do ten of these, then post them.
그렇게 열 편 써서 포스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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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러랫은 욕실에 서, 벽면을 가득 채운 거울을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뿌연 김이 서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직도 몸을 적시고 있는 뜨거운 물의 방향을 돌려 거울에 흩뿌렸다.  물방울이 매끄러운 면을 타고 흐르며 하얀 벽 안에 주변 풍경이 담기었다. 하얀 곱슬머리를 엉덩이까지 늘어뜨린 계집애 같은 남자아이가 서있었다. 아니, 남자아이라기보다는 바짝 마른 어린아이. 눈썹을 일그러뜨린 곤란한 얼굴로 애러랫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노란 두 눈과 마주보는 것이 싫어 조용히 눈을 피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짜증이 올라왔다. 거울 안에 서있는 바싹 마른 소년의 몸은 오랜 흉터자국, 고작 3시간 전에 만든 새파란 멍 자국에 멀쩡한 피부가 이상해보일 정도로 엉망이었다.

  “저는, 언제나 한심하기 그지없네요.”

  늘 그렇듯 목소리는 희미하게 목 안에서 맴돌 뿐이었다. 애러랫은 시퍼렇게 된 팔뚝의 멍을 손톱으로 꾹 눌렀다. 시린 아픔에 눈썹이 꿈틀, 일그러졌다. 아이는 선명하게 남은 손톱자국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살짝 입술이 벌어져 파란 것을 머금었다. 연인에게 하듯 강하게 빨아들였다. 베어 나온 체액에 반들반들해진 멍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애러랫의 입이 미묘하게 움직였다가 이내 살짝 벌어진 체 멈추었다. 할짝, 붉은 혀가 입술을 핥았다. 가볍게 내리깐 두 눈이 다시 거울을 향했다. 거울에는 다시 김이 끼어 모습을 뿌옇게 밖에 비추지 못하고 있었다. 애러랫은 조용히 팔을 씻고 욕실을 빠져나왔다.




  하얀 목욕가운을 두른 체 방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민폐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침대에 앉았을 때였다. 똑똑똑. 문을 통통 두드리는 소리였다. 룸메이트들이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모두 자리를 비운 상태에서 들려온 노크소리였다. 애러랫은 종종걸음으로 달려 문을 열었다. 습관적으로 내뱉은 신원확인의 말은 그저 습관적인 것. 당연히 아이는 룸메이트 중 한사람, 혹은 몇 사람일거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앞에 선 것은 전혀 의외의 인물이었다.
  키가 한참이나 컸기 때문에 얼굴을 확인하는 것만도 고개를 뒤로 꺾어 올려보아야 했다. 약간 딱딱한 표정을 한 거친 갈색 머리칼에 짙은 색의 피부를 가진 청년이었다. 가끔 다른 사람들 속에 섞여 보았던 사람이었다. 직접 대화해본 기억도 드문 사람. 이름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바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 아…….”

  애러랫은 상대가 느린 말버릇의 탓이라고 생각해주길 간절히 빌었다. 손톱을 세워 손등을 꼬집었다. 얇은 피부가 금새 빨갛게 달아올랐다. 생각이 나지 않으니 몸이 안달하여 입만 뻐끔뻐끔 벌어졌다 닫히기를 반복했다.

  “테, 테나, 씨…께서, 이, 이 밤, 중에 무슨 일, 이신, 가요?”

  흘깃 바라보니 이름이 틀린 것 같지는 않았다. 힘이 과하게 들어가 손톱이 엇나가며 손등의 피부가 찢어졌다. 혹시나 테나씨가 눈치 챌까 손을 몸 쪽으로 끌어당겨 손톱으로 상처를 헤집었다. 손이 작게 떨렸지만, 늘 있는 일이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아, 앞에, 세워, 두, 다니, 죄, 죄송, 합, 니다.”
  “아니, 그냥 좀……, 방문…….”

  그냥 방문. 다른 룸메이트들을 찾아온 것인지 애러랫을 찾아온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방에 찾아온 것은 분명한 듯 했다.

  “드, 들어, 오세요―.”

  애러랫은 문을 열고 문 옆에 서서 그가 들어오길 기다렸다. 테나가 완전히 들어오기를 기다려 문을 닫자 그제야 공기가 매우 어색하다는 것이 느껴졌다. 제대로 대화해 본 적도 없는 사람과 좁은 공간에 단 둘. 심장이 쿵, 쿵, 무겁게 뛰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애러랫은 정신없이 자리를 벗어날 방법을 찾기 위해 정신없이 생각을 거듭했다.

  “차―, 차, 내올게요!!!”
  “넌.”
  “에?!”
  “참 방어의식이라든지 그런 게 없구나. 이 방에는 너와 나 둘뿐인데 말이야.”
  “네…….”

  둘뿐. 둘이 있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 의미심장해 보이는 말에 애러랫은 잠시 행동을 멈추었다. 둘, 둘이라서, 방어의식이 발동할 만한 것.

  “에, 에, 넷?!”

  테나가 픽, 웃었다. 애러랫은 급히 그렇지 않다고, 테나씨가 혹여 라도 나쁜 짓을 할리 없지 않느냐고 그렇게 이야기하려고 했으나 할 수 없었다. 테나가 어쩐지 기분 좋은 얼굴로 웃고 있었다. 애러랫의 둥근 두 눈이 깜빡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직접 마주쳤다.

  “……해줄게. 그러니깐, 나랑 형제하자.”
  “…….”
  “어리바리하니 있지 않아도 돼. 음, 나도 좀, 창피하긴 하다. 아, 혹시 싫다거나?”
  “흐엣, 그, 그런, 그런 것 아니예요!! 저, 저는 그, 그저 황송할, 뿐, 인, 걸요…….”

  테나가 조금 멋쩍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부드럽게 웃는 얼굴은 어딘가 편안해 보였다. 애러랫은 한손으로 피가 터진 손등을 덮어 쥐고 테나의 눈치를 살폈다. 말을 해도 되는 것인지 고민스러웠다.

  “에, 저….”
  “음?”
  “그러……, 니까…….”

  신 것도 없는데 고인 침이 꼴깍, 목을 타고 넘어갔다. 어쩐지 저 만족스러워 보이는 테나에게 말해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잠깐, 말하지 않는 건 괜찮, 겠죠? 금방 알게 될 테니까요…….’

  테나의 손이 애러랫의 어깨를 도닥였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아, 아뇨. 딱히…그, 그냥, 죄, 죄송…하다, 구, 요….”
  “뭐가 죄송하다는 거야. 괜찮아. 내가 지켜줄게.”
  “에, 에,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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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러랫은 고개를 푹 숙인 체 바쁜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심장이 격하게 뛰고 있었다. 이대로 평생 뛰기로 정해진 횟수를 다 뛰고 멎어버릴 것 같이 빨랐다. 실종된 학생회장이 남긴 편지, 학교를 점령한 슬라임들, 학교에서 제작해둔 슬라임 제거제. 그것을 가지고 뭘 해야 한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냥 그 규모의 거대함만으로도 너무 무서워서 몸이 와들와들 떨려왔다. 어디든지 구석에 숨을 수 있는 장소를 찾아 머릿속을 정리하고 싶었다. 사람이 많았다.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이봐, 괜찮나?”

“헉……!”


갑자기 팔을 잡아오는 손에 애러랫은 급히 숨을 들이켰다. 눈을 크게 뜨니 해솔원의 교복이 보였다. 고개를 드니 인상을 찌푸린 붉은 눈과 마주쳤다. 애러랫은 앞뒤 가리지 않고 상대방에게 매달려버릴 뻔했다 정신을 차렸다. 붉은 눈에 키가 큰 그 사람은 애러랫이 익히 잘 아는 두 사람 중 누구도 아니었다. 동생인 다크군보다도 키가 컸고, 성연양만큼이나 꼬리가 치켜 올라간 눈을 사납게 찌푸리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밤하늘에 녹아드는 새카만 머리칼을 지닌 두 사람과는 정반대로 달빛에 반짝이는 새하얀 머리카락을 가졌다. 그의 머리 뒤로 뜬 노란 달을 보고 애러랫은 한순간 넋을 놓고 그를 바라보고 말았다. 그는 달과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달 옆에 세워두기 위해 만들어낸 조각상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달빛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애러랫은 그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을 보고서야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정말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만큼 아름다웠다. 어울렸다.


“정신 차려. 넋 놓고 있지 말고.”

“아…, 죄, 죄송합니다!”

“…….”


찌푸린 두 눈이 자신을 향하기 전에 작은 소년은 몸을 웅크렸다. 붉은 눈의 낯선 이는 말이 없었다. 굳게 다물려있던 핏기 없는 입술이 빠끔하니 벌어졌다. 잔뜩 움츠러든 애러랫의 어깨에 차가운 손이 닿았다. 아이는 놀라 눈을 질끈 감았지만 그 손은 애러랫의 어깨를 붙들어 바르게 세울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눈물에 반짝이는 금빛 눈을 바라보던 그는 가볍게 한숨을 내어 쉬고 잔뜩 인상을 쓴 얼굴로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자리를 옮기자. 그리고 부탁이니 진정해.”




하야르 유테, 지금은 해솔원의 입학신청생. 그렇게 자신을 소개했다. 내내 미간에 주름이 진 체였지만 의외로 그는 느릿하게, 종종 멈춰가며 이어지는 애러랫의 태도에 화를 내지 않았다. 신경이 예민한 것은 분명해보였지만 그것이 결코 눈앞의 상대 탓이 아니라는 것을 애러랫은 조금씩 깨달아갔다. 공격적인 말투였지만 애러랫이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모습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안절부절 못하고 금방이라도 뭐라 잔뜩 쏘아붙일 줄 알았지만 오히려 애러랫보다 진득하게 그의 말을 기다려주었다. 애러랫은 하고 싶었던 말을 모두 할 수 있었다. 그것은 굉장히 놀라운 일이었다.


“그렇게 된 거였나.”

“에, 모, 모르, 셨나요?”

“전혀.”

“그, 방금, 다들, 모인 곳에서, 말씀, 하…셨는, 데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나중에 여쭤보려고 했었다.”

“그렇군요…….”


유테는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애러랫의 이야기를 듣는 중에도 내내 생각에 잠긴 눈으로 호수를 바라보았다. 더듬더듬, 느리게 말이 시작되면 눈을 마주쳤다가 어느 순간 올려다보면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말을 듣지 않는 걸까, 라고 당황하면 더 미간을 찌푸린 표정으로 차근히 그 전 이야기를 언급한 후 뒷이야기를 물었다. 화내는 줄 알았으나 곤란함의 표현이었다. 유테에게는 심각한 현 상황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중요한 고민이 있는 모양이라고 애러랫은 생각했다. 애러랫도 호수를 바라보았다. 똑같은 곳을 바라보면 조금은 알 수 있을지도 몰랐다. 대체 무엇 때문에 유테씨가 슬픈 얼굴로 호수를 바라보는 걸지, 조금은 알 수 있게 될지도 몰랐다.


“아? 무, 무슨, 일이세요?!”

“뭐긴, 가야지.”


애러랫은 갑자기 벌떡 일어선 유테를 따라 섰다. 문득 유테가 크다고 생각했다. 아니, 분명히 크기는 했었다.


“에, 에, 예?”

“슬라임 제거제를 가져와야 한다면서. 가자.”

“아와, 지, 지금, 요!? 지금, 하, 한밤중 이예요!”

“하?”


붉은 두 눈과 마주한 순간 애러랫은 가슴을 움켜쥐며 고개를 숙였다. 눈빛이 찔러왔다, 그런 기분이었다. 미쳤냐, 라고 되묻는 듯한 시선에, 목소리에 가슴이 욱신, 아파왔다. 문득 눈가를 비비니 물기가 베어 나왔다.


“아, 아니. ……."


작게 발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란 애러랫이 물러나는 것을 유테가 붙들고 있었다.


“준비하러 가자는 거다. 울지 마.”


그의 찌푸린 눈은 곤란한 듯 애러랫을 마주 보지 않았다.




유테는 옆에 선 애러랫을 한번 돌아보고 보이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이 사람을 데리고 슬라임 천국인 해솔원에 들어가서 상자를 구해 와야 했다. 막막한 심정이었다. 만약을 대비해 마법반 선생님께 들러 실드 아이템을 여러 개 구해왔지만 실제로 시험해 본 적이 없으니 어느 정도까지 버티는 지 알 수 없었다. 시간이 촉박해 실험해볼 수도 없었다. 출발하기에 자꾸만 거리낌이 드는 것은 이 안절부절 못하는 사람을 멀리서 봐도 노란색으로 가득한 저 곳에 끌고 가도 되는 지에 대해 회의감이 드는 탓이리라. 유테는 조심스럽게 애러랫의 어깨를 잡아 눌렀다. 뭘 해도 바로 옆에서 천둥이라도 친 듯 화들짝 놀라는 건 처음이나 지금이나 그대로였다.


“일단 들어가면 행동을 같이할 테니까, 위험하니 가능한 내 옆에 꼭 붙어있어.”

“네, 네……."


가늘디가는 몸이 벌써부터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한번 들어갔다더니 그것이 그리도 어려웠을까. 하긴, 무기가 통하지 않는 적만큼 두려운 것도 없었을 것이었다. 더구나 그는 비전투원이었다. 가능하다면 이 떨림을 먼저 진정시키고 출발하고 싶었으나 유테는 자신이 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바람을 일으켰다. 둥실, 몸이 떠올랐다. 본디 순수한 인간이 닿을 수 없는 자리에 마법이라는 힘을 빌려 설 수 있다는 것은 언제나 미묘한 쾌감. 유테의 입에 희미하게 미소가 떠있었다.

계획은 이랬다. 마법반의 D.시드미안 선생님께 지급받은 실드 스크롤을 이용해 두 사람의 신체 주변에 보호막을 치고 마법을 통해 비상해 제 2행정실과 연구반 교실로 직접 돌입하는 것. 공격조가 없는 마법반과 치료반의 두 사람이 미션을 수행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것만이라면 다른 방법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한사람이 뛸 수 없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것이 유일하다고 보였다. 실드는 마나를 주입하자마자 시동되는 것으로 유지시간은 풀로 마나를 주입했을 때 약 10여분. 반지름 2미터의 반구형으로 강도는 직접 슬라임과 대치했던 D.시드미안 선생의 말로는 슬라임의 통상 공격에는 깨지지 않는 정도였다. 스크롤은 당연하지만 전부 일회성이며 개수는 총 열한 개. 유테가 일곱 개, 애러랫이 네 개를 챙겼다. 혹시라도 두 사람이 떨어질 경우 애러랫이 전투도 도주도 불가능 하다는 점을 생각해 유테는 애러랫에게 가능한 많은 수의 스크롤을 쥐어주려 했으나 소심하기만 하던 애러랫은 강경한 태도로 그 이상 받는 것을 거부했다.

까마득한 상공을 날아가니 슬라임들의 정황은 보지 않아도 되었지만 대신 애러랫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유테는 핏기가 사라진 애러랫의 어깨를 바짝 끌어당겨 감싸 쥐고 아래를 살폈다. 비행 시의 이동속도는 걷는 것과는 계산이 안 되는 수준이기에 두 사람은 눈 깜짝할 사이에 본관 위에 떠있었다.


“여, 여기가 본관, 이예요.”

“제 2행정실이 3층이라고?”

“네.”

“어느 쪽인지 아나?”

“……아뇨, 죄송합니다. 그것까진 모르겠네요….”

“흠.”


마력이 요동치며 실드의 투명한 막이 두 사람을 감쌌다. 비행 고도가 낮아지고 있었다. 혹시라도 벽에 달라붙어 있는 슬라임이 있을까, 유테는 신중을 기했다. 창가에 접근하면서 가까이 노란 것이 보이지 않는지 유심히 살폈다. 갑자기 창문에서 슬라임이 튀어나올까, 바닥에서 발견하고 올라오지는 않을까. 3층도 낮은 것 같아 고도를 조금 높게 유지했다. 신경이 끊어질 것 같이 머리가 아파왔다. 잘 알지도 못하는 장소에서 마법을 지속적으로 사용하며 버티는 전투는 힘겨웠다.


“여기가 행정실 맞나?”

“어, 아, 저, 저도, 잘…….”

“쯧.”

“죄송합니다!”

“안이나 살펴.”

“네, 넷.”


아래쪽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다른 팀들이 오는 것일까. 슬라임들이 조금씩 움직이더니 뭉치는 것이 보였다. 유테의 심장박동이 가빠졌다.


“안쪽은 괜찮나?”

“예, 에, 아마도…, 으악!!”

“큭?!”


창문이 갑자기 안에서부터 깨어지며 슬라임이 튀어나왔다. 단단한 것이 실드에 맞고 튕겨 나가며 3층높이의 건물에서 노란 덩어리가 떨어져 내렸다.


“젠장, 그냥 간다!”

“으으아와?!?!?”


한계시간이 다다른 실드가 윙,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그 순간 빠른 속도로 유테와 애러랫의 몸이 창을 넘었다. 아직 바닥에 닿지 않은 발 아래로 노란 것이 넓게 퍼져있었다.


“이거, 스, 슬라임이예요!!!”

“내리는 건 안 되겠군. 꽉 잡아라.”

“흐이, 흐이에―!”


쾅, 폭음과 함께 멀리 있던 문과 책장이 터져나갔다. 바닥에 깔려있던 슬라임이 일어섰다. 새로운 실드를 치는 것과 슬라임이 그들을 덮친 것은 거의 동시였다.


“으악―!!!!”

“시끄러!”


실드가 슬라임을 밀어내고, 쏘아지는 화살마냥 두 사람의 몸이 문 밖으로 튕겨 나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애러랫은 유테의 팔에 매달려 지금 있는 장소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퍼펑, 다시 한 번 굉음과 함께 몸이 쏘아졌다. 온몸을 잡아당기는 듯 한 감각이 애러랫을 괴롭혔다. 뭔가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간신히 이동이 끝난 후에야 비로소 애러랫은 유테의 팔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균형이 제대로 잡히지 않아 몸이 흔들렸다. 소년은 서류장을 짚고 서서 어지러움이 가라앉기까지 기다렸다. 그제야 간신히 주변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둥근 벽면이 온통 서류로 뒤덮인 방이었다. 구석에 아래로 통하는 계단이 보였고 평소라면 직원들이 사용하고 있었을 책상들이 몇 개 보였다. 유테는 그 중 한 책상 위에 놓인 상자를 들추고 있었다.


“그게 슬라임 제거제인가요?”

“응, 쓰여 있다. 친절하게 상표도 붙어있군.”


유테의 손에 들린 병에는 노란 로고가 넓게 붙어있었다. 애러랫은 작게 웃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유테의 시선이 똑바로 애러랫을 향했다. 애러랫은 주춤 뒤로 물러났다.


“왜, 왜, 그렇게 보시죠?”

“…이 상황에 웃음이 나와?”

“아, 그, 치만, 목표하던 것도 찾았고, 마, 마음이 놓여서…!”

“저걸 눈앞에 두고 마음이 놓이다니, 대담하군.”

“에?”


잔뜩 찌푸린 유테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자료실로 보이는 작은 방이 보였다. 방안의 물건은 온통 무너져 내려 길을 막고 있었다. 열린 공간이 지극히 좁아 슬라임은 스믈스믈 느릿하게 빠져나오고 있었다. 애러랫의 얼굴에서 다시 하얗게 색이 빠졌다.


“저, 저거, 피, 피해야, 하지, 않, 나요?!”

“응, 피해야지. 미안하지만.”

“에에?!”

“들어라. 지금부터 연구반에 갈 때까지 만이라도 놓치지 마.”

“으와악!!”


애러랫에게 대뜸 슬라임 제거제 박스를 안겨준 유테는 애러랫을 옆으로 안아들었다. 여자아이 같은 폼으로 안긴 애러랫이 비명을 지르는 것도 무시하고 윙, 다시 실드가 생겨났다. 가볍게 유테의 발이 바닥에서 떠올랐다. 잠시 공중에 둥실 떠있던 몸이 빠르게 계단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아래도 슬라임이 그득했다. 어째서 제 2행정실이 비어있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귀를 울리는 폭발음이 서너 번 울리고 아까 같이 총알 같은 속도로 두사람의 몸이 쏘아져 나갔다. 유리창은 실드에 닿기도 전에 산산조각이 났다.


“큭, 저놈이.”


공중으로 높게 날아오르자 후두둑 슬라임이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전면의 시야를 가리는 곳에 얇게 슬라임이 붙어 있었다. 곧 슬라임의 일부가 송곳처럼 날카롭게 변했다.


“저, 저렇게 가까우면 위험해요!”

“알고 있어.”


비행속도가 한층 빨라졌다. 뒤를 향하는 바람에 눈이 따가웠다. 슬라임의 송곳이 실드를 뚫기 위해 뒤로 한껏 젖혀졌다.


“왁!!!!!!!”


슬라임이 허공에 노란 점을 찍었다. 유테는 으득, 이를 갈았다.


“아까운 실드 스크롤을 버렸잖아.”


어느 샌가 뒤로 향하고 있던 비행 방향을 돌려 유테는 동관을 향했다. 동관에도 슬라임이 득시글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온통 노랗게 물든 바닥을 보기가 겁나 애러랫은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또 펑, 소리와 함께 연구실의 창문이 깨졌다. 슬라임들이 꿈틀거렸지만 아직 높은 곳에 자리한 두 사람은 발견하지 못했다. 유테가 말했다.


“귀 조심해.”

“네?”


무서운 바람 소리가 귀를 울려 애러랫의 입에서는 비명은커녕 신음도 나오지 않았다. 실드에 한 꺼풀 덮였지만 무서운 속도였다. 두 사람은 다시 한 번, 창문을 통해 연구반에 들어섰다.


“여, 여기, 도, 슬라임 천국, 이네요.”

“슬라임이 없는 곳이 없군.”

“그, 그래도 바닥은 멀쩡, 하네요.”

“상자가 저 모양인 게 문제군.”


도구가 들어있으리라 짐작되는 상자가 노란 것에 덮여 있었다. 문제라고 말하면서도 유테는 태연하게 상자 앞에 섰다. 실드는 사라져 있었다. 유테는 손을 애러랫 쪽으로 들이밀었다.


“열어봐.”

“에, 이것, 제거제?”

“그래.”

“쓰, 쓰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다’쓰면 안 된다는 거였어. 네가 전하고 모르나.”

“그, 그런….”

“어쨌든 열어.”

“네―엣!……."


제거제의 뚜껑이 열리자 안에서 내부 물질이 떠올랐다. 액체덩어리가 공중에 떠있는 것은 신비한 모습이었다. 갑자기 뿌연 안개가 끼고, 약이 슬라임 위로 분사되었다. 유테는 슬라임이 사라진 상자를 한 팔로 들었다.


“악! 유테씨, 저쪽!!!”


갑자기 구석에 있던 작은 슬라임이 공격해왔다. 급조한 실드는 한 번의 기습을 막는 것이 고작이었다. 유테는 다시 실드 스크롤을 발동시켰다. 조금 늦었다.


“큿.”


퍼퍼펑! 슬라임이 공중분해 되었다. 애러랫의 눈이 동그래졌다. 두 사람의 주위에는 투명한 방패가 떴다. 펑,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연구반을 빠져나왔다. 하늘로 몸이 솟구쳐 올라갔다. 지상이 까마득할 지경이 되어서야 유테는 달아나기를 멈추었다. 애러랫은 눈을 꼭 감고뜨지 않았다. 유테는 나쁘지 않은 속도로 호수를 향해 하강했다.


그렇게, 두 사람의 미션이 끝이 났다. 달이 예쁜 밤, 어제 만났던 그 시각에, 둘은 나란히 침낭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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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을 보고 있었다. 긴 머리는 피에 젖어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가 밟은 것은 시체, 몸을 당기는 것은 핏덩어리. 평소라면 주름 하나 없이 단정했을 천자락은 넝마가 된지 오래였다. 짙은 검은색이 온통 피투성이가 된 신체를 가려주었다. 몇 사람이 다가왔다. 그들은 너덜너덜해진 앳된 청년을 멀리 두고 멈춰섰다. 파리하게 질린 얼굴에 흐르던 붉은 피가 검게 굳어가고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시원스럽게 미소짓는 얼굴로 한 남자가 말했다. 시체를 밟고 선 그의 유쾌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눅눅한 공기를 흔들었다. 피묻은 칼을 든 사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담담히 대꾸했다. 하얗게 된 얇은 입술에는 말라서 얇은 피부가 터진 탓인지 남의 것이 묻은 것인지 모를 피가 말라 붙어있었다.

 "왜 왔지?"

 소리는 작았지만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그 말을 받았다. 난장판에 선 그들의 차림은 깔끔하기 그지 없었다.

 "부탁하는 것이 한두번도 아니고 감사하고 싶어서 말입니다. 오늘이 마지막이기도 하고 말이죠."
 "……마지막?"

 청년은 그제야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억지로 짜낸 탓에 목소리가 갈라졌다. 근육이 없는 듯한 무표정으로 그는 절뚝이며 돌아섰다. 남자는 흥얼거리는 투로 연극하듯 과장되게 팔을 벌렸다.

 "마침내 살인하는 신부라는 타이틀을 떼어낼 수 있게 되었다 이겁니다. 기쁘지 않으신가요?"
 "……."
 "이런, 이런. 재미없는 사람. 당신이 직접 제시한 계약기간이니 당연한가요."
 "그랬던가."
 "잊어버린 거군요. 그럴 것 같았습니다만."

 남자의 뒤에 서있던 몸종이 청년에게 편지를 전했다. 손에 든 핏물로 종이에 붉은 자욱이 문질러졌다. 받자마자 떨어지는 손을 보며 남자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기간만료, 라는 계약서입니다. 보지 않는 겁니까?"
 "나중에."

 싸늘한 대답에도 남자는 웃을 뿐이었다.

 "이렇게 보는 것은 이걸로 끝이군요. 이후 조만간 찾아뵙겠습니다."
 "마음대로."

 청년은 사라지는 그들을 그저 바라보았다. 혼자 남아서도 움직일 줄 몰랐다. 무너지지도 움직이지도 않은 체 그렇게 서있었다.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어갈 때였다. 부러진 다리를 끌고 발에 채이는 시체를 피해 느리게 옮기는 걸음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했다. 시선은 먼 곳을 향하고 있었지만 보이는 것은 없었다. 피로가 극에 달한 나머지 눈이 제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벌써 쓰러져버렸을 일정에도 그는 움직일 수 있었다. 단 한 곳만을 바라보는 것으로 생겨나는 힘. 뿌연 시야도 그에 반해 극도로 민김해진 청력도 제대로 길을 찾아 걷는 것에만 집중해야 했다. 신경이 마비되어 팔다리가 제대로 움직이는 지도 알 수 없었다. 통각만이 살아 손가락 끝, 발가락 끝까지 기절할 것 같이 아프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본능적으로 몸상태를 점검했다. 왼쪽 아래서 세번째 갈비뼈와 오른쪽 허벅지 뼈에 금이 갔고 왼쪽 어깨가 빠지고 팔이 부러졌다. 단검에 찔린 배는 싸움이 끝나자마자 지혈을 했지만 돌아가면 바로 치료해야 했다. 베인 자리는 수도 없어 일일히 감각할 수도 없었다. 오른손 약지가 삐었는지 뜨거웠다. 필사적으로 지킨 얼굴만 입술이 터진 것을 제외하고는 생체기 하나 없었다. 조금 신경쓰이는 것은 아까 억지로 말하느라 갈라졌는지 비릿한 피맛이 올라오는 목이었다. 다른 곳에는 비교할 수 없는 작은 통증이 그 어느 것보다도 신경쓰였다.

 바라는 것은 단 하나. 환한 미소, 금빛 고수머리의 소녀가 언제나처럼 머릿속을 가득 매웠다. 괜찮아, 나는 괜찮아. 아프지 않아. 행복하다면 됐어. 괜찮아. 아무렇지 않아. 나는 아직 괜찮아. 그 무슨 일이 있어도 괜찮아.

 "…찮아. 아무렇지 않아. 괜찮아. 괜찮아."

 둔켈의 입에서 새는 숨이 어느샌가 속삭임이 되어있었다. 그렇게 소년은 자신에게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괴로운 미래를 보며 울부짖는 리히트의 등을 그러안고 늘 했듯이 괜찮다고 괜찮다고 계속해서 말해주었다.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아무렇지 않다고 말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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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곤했다. 푹 잠들었던 것이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아니, 푹 자지 못해도 좋으니 꿈을 꾸지 않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눈만 감으면 하나의 꿈을 꾸었다. 아주 오래도록 꾸어온 꿈이었다. 기억도 나지 않을만큼 어린시절부터 꾸었던 꿈.  언제나 이렇게 잦은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일년넘게 꾸지 않기도 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것이기에 이리도 괴롭히는 걸까 생각했다. 그는 나와 함께 자랐고 그에게 큰일이 생길 때는 꿈을 꾸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리고 그럴 때면 내 인생에도 커다란 바람이 불었다. 그와 같은 방향으로. 그의 뒤를 쫓듯이.

 거울 속의 남자는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싶을 정도로 검은 빛에 휩싸여 있었다. 단정히 묶은 새카맣고 긴 머리칼, 검은 신부복은 전신을 덮어 드러난 곳이 없었다. 온통 검기만 하여 답답할 정도였다. 안그래도 창백한 피부가 그 검은 빛에 대비되어 파리하게 보였다. 대낮이지만 조명이 필요할 어두운 방안에서 얼굴과 손만이 하얗게 도드라졌다. 텅 빈 무표정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빠져나온 팔이 허리를 끌어당겼다. 기대라는 의도가 분명한 당김을 무시했더니 그 쪽에서 몸을 붙여왔다. 거울에는 그의 얼굴이 비추고 있었다. 텅 빈 무표정에 눈을 맞추었다. 부드러운 바리톤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웃었다. 조금 간지러운 느낌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시나?"
 "아무것도."

 남자의 뜨거운 숨에 귓가가 뜨거워지고 있었다. 음험한 목적을 가진 손이 목끝까지 올라오는 신부복 위를 더듬고 있었다. 끔찍했다. 이 몸뚱아리는 결코 남자의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받은 것이 아닐터인 것을. 거기까지 생각하고 다시 거울을 보았다. 포주에게 부탁해 굳이 들여놓은 전면거울은 반짝이며 방안의 풍경을 비추었다. 그 안에 보이는 것은 남자의 손에 몸을 맡긴 신의 지팡이. 여인의 몸이라도 허락받지 못한 일을 남자인 자신이 행하고 있었다. 아아, 신의 노여워 하시는 음성이 머리 속을 웅웅 울리는 듯 하였다.

 "사제님께서는 나르시스트였군."
 "전혀. 아니야."
 "이런."

 그가 또 웃었다.

 "싸늘하군. 좀 더 기분좋은 말 해줄 생각 없어?"
 "당신은 그런 말을 즐기는 타입이 아니지 않았던가."
 "잘 아는군. 네 맞춤 서비스에는 늘 감사하고 있어."

 문득 큭큭거리고 웃는 잘생긴 얼굴이 너무도 익숙하다는 것에 소름이 돋았다. 내가 이 일을 시작한 지 몇 년째더라? 갑자기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팔을 강하게 잡혀 근육이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이 올라왔다. 섹스 후에 남는 것은 쾌락이 아니라 고통이었다. 정신적인 수치심과 절망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인 신체의 비명소리. 그것에 빠져 타락할 수 없는 것이 잘된 일인지 잘못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옷을 벗겨주는 것을 좋아하는 손님의 취향에 맞춰 그의 옷을 벗기며 손끝에 감각이 없다는 것을 실감했다. 감각이 없어도 벗기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눈앞이 흐려도 넘어지지 않고 걸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바래왔던 것이기에 불만은 없었다. 그 어떤 고통도 견딜 수 있었다. 이 한번 악물지 않았다. 오히려 정신력으로 움직일 수 있는 수준이라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였다. 이런 몸뚱아리따위 이런 정신따위 더더욱 망가져버려라. 그녀가 건강하고 행복하기 위해서 치르는 값이 고작 이런 것이라면 얼마든지 줄 수 있었다. 신께서 두 사람에게 이런 운명을 내린 것은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임에 틀림없었다. 자신을 모두 그녀에게 바치라고 만든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세상에게 축복받는 사랑스러운 사람이었으니까 그 불공평한 분배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희생을 필요로 했겠지. 그것도 자의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더더욱 부족함이 없으리라.


 감은 눈 너머로 아득하게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햇살이 눈부신 초록빛 벌판. 맑은 웃음소리가 서늘한 공기를 타고 퍼졌다. 반짝거리는 금발이 흔들리고 하얀 사제복이 흔들렸다. 돌아선 그녀의 얼굴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눈이 시릴만큼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그 얼굴만을 꿈처럼 그리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목소리만이 귓가를 울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볼 수도 들을 수도 느낄 수도 없었다.

 ―그렇게, 잠에서 깨어났다. 손가락만 까닥해도 전신을 울리는 고통에 일어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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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가 오고 있었다. 마냥 창밖을 바라보았다. 촉촉한 공기가 기분 좋았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넋놓고 있는 것을 보다 못했는지 누군가 다가왔다. 발소리는 들었지만 굳이 돌아볼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비오는 창밖 풍경 쪽이 훨씬 더 신경쓰였다. 자연스럽게 허리를 감아오는 팔에 그제서야 그가 누군지를 알았다. 이렇게 접근하는 사람은 오로지 한사람 뿐이었다.

 "변태씨, 손 풀지?"
 "에이, 튕기긴."

 그가 웃고 있다는 것은 보지 않아도 알았다. 굳이 볼 필요도 없이 언제나 그랬으니까. 저렇게 웃음기 섞인 목소리라면 정말로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목이 넓은 셔츠 사이로 입을 맞추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 전 같으면 바로 옷깃 사이로 손이 파고들어왔을 텐데 그는 그냥 조용히 사야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고 움직임이 없었다. 요새는 이렇게 적극적으로 붙는 일도 드물어서 사실은 그의 체온에 조금 안도감을 느낀다고 하면 뭐라고 대답할까. 이상한 욕심이었다. 싫지만 싫지 않았다.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반발하는 사람이 많으니 슬슬 없애야하는 습관인데 쉽지가 않았다.
 먹구름에 하늘이 까맸다. 창문에 한가득 빗방울들이 선을 그었다. 만져보고 싶어 창문에 손을 대었다. 당연히 물방울은 만질 수 없었다. 서늘한 냉기만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유리 아래로 떨어져내리는 저 빗방울을 받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창문을 열면 빗방울이 들이닥칠테지. 이것 역시 모순이었다. 이렇게나 가까운데 빗줄기에 온 몸을 내놓지 않으면 창에 흐르는 빗물을 만질 수 없었다. 하지만 밖에 나가면 이내 손끝의 물기는 감각할 수 없을 만큼 흠뻑 젖게 될 것이었다. 손 끝에 흐르는 물방울만 느낄 수 없다는 그 작은 사실이 사야에게는 거대한 벽으로 다가왔다. 이걸 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어깨가 서늘해졌다. 그곳을 통해 이어져 있던 체온이 떨어져 나갔다. 그저 따뜻하던 것이 없어진 것 뿐이었지만 커다란 한기로 느껴졌다. 공허한 마음이 싸늘해졌다.

 "또 손가락."

 어느샌가 또 아득아득 씹고 있는 손가락을 흑류의 입에서 빼내었다. 딩―, 작게 소리가 울렸다. 얇은 벽을 통해 심장 깊은 곳까지 바람이 들었다. 추운 것이 아니었다. 허전했다. 그새 또 입에 넣은 다른 손도 뺏어 양 손에 그의 두 손목을 하나씩 쥐었다. 갈증이 채워지지 않는다. 무엇이 필요한 것일까?

 "부탁이니까, 하지 말라니까."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세상이 서늘하게 물기를 머금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흑류의 눈을 마주보았다. 불만스러운 표정인 그의 이마를 꽁 들이받았다. 가슴은 여전히 메말라 있었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았다. 그저 텅 비어있었다. 이따금 휑하니 바람이 불었다. 눈 앞의 이 사람도 그런 가슴을 가지고 있을까? 그래서 그토록 애정을 갈구하는 것인가? 알 수 없었다. 그저 머릿속을 두드리는 것은 그가 사야에게서 위안을 얻는 것은 길지 않을 거라는 생각 뿐이었다. 아마도 그것은 사야 역시 마찬가지. 연인인 양 행동하는 긴 원나잇. 그런 느낌이었다. 그저 서로의 체온에서 잠시간의 평안을 얻을 수 있다면 좋으리라.
 입 속으로 뭔가 꿍얼거리는 그를 두고 고개만 돌려 다시 창 쪽을 바라보았다. 슬슬 빗줄기가 약해지고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더 쏟아붓게 하고 싶었다. 장마철에 나다니는 것은 싫지만 시원스러운 빗줄기는 좋았다. 비야 내려라. 주룩주룩 내려라. 세상이 온통 물에 잠겨버릴 만큼 주룩주룩 내려라. 저 비가 사야 자신의 마음도 축여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리고 이 사람의 마음도. 문득 다시 시선을 돌려 흑류를 바라보았다. 그는 생각에 잠긴 사야를 보지 않고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안쓰러운 마음에 그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하도 자주 당하니 그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 얌전했다.
 그의 이야기를 끌어낸 것은 의도적이었다. 사야는 마음을 기댈 곳을 찾고 있었다. 흑류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애정을 줄 사람이 누구라도 좋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야가 마음을 기대고자 하는 사람 역시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때마침 있었던 것이 흑류였을 뿐이었다. 마음이 외로운 사람은 조금만 애정을 보이면 속을 알 수 있었다. 그 사실을 이용했을 뿐이었다. 지금 그는 사야가 자신의 마음을 다 내줄 연인이라도 되는 듯 행동했지만 사야가 보기에 이건 아주 일시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장단을 맞추는 것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사야는 혼자 서있을 자신이 없었다. 그저 조금이라도 그의 마음이 머무는 시간이 길기를 바랐다. 하지만 연인은 아니었다. 결코 진짜 연인은 될 수 없었다. 둘 다 나눠줄 줄이라고는 모르는 사람들이니까.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 비를 모두 마시면 마음이 채워질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마음에 비가 내리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메마른 가슴에서 싹이 틀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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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촬영 사이에 찾아온 점심시간이었다. 사야는 식사를 하러 옹기종기 모여 나가는 사람들의 흐름을 거슬러 사무실로 돌아왔다. 실내 촬영이어서 기뻤다. 조금이라도 익숙한 공간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다는 건 반가운 일이었다. 누군가 먹자고 제안하지 않으면 식사 욕구를 느끼지 못하는 사야에게는 식사시간은 그저 휴식시간일 뿐. 자리에 앉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결국 엎드려 눈을 감았다. 잠은 잘 수 없지만 눈을 감고 있는 것만으로도 날카로워진 신경을 가라앉히는 데는 도움이 되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멀리서 들려오는 기계음과 가끔 복도를 지나는 발소리 외에는 들리지 않던 공간에 낯선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사야는 언제부터 시작한 것인지 지극히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그 흥얼거림을 뒤늦게서야 알아차렸다. 낮게 울리는 허밍이 기분 좋았다. 귓가를 간질이는 부드러운 소리가 자장가 같아서 어쩐지 진짜 잠이 들어버릴 것 같았다. 결국 사야는 어거지로 눈을 떴다. 점심 시간은 그다지 짧지 않지만 깊이 잠들었다가 깨어나면 오히려 피로만 더해줄 길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눈을 뜨고도 여전히 잠자는 것 같은 상태로 사야는 멍하니 앉아있었다. 계속해서 노래가 들려왔다. 발소리와 무언가 쓸리는 소리가 함께 들린다는 걸 깨달은 것은 잠시 후였다. 누구지. 그제야 궁금해졌다. 어차피 방송국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회사마냥 정규적인 스케쥴에 맞추어 움직이는 것은 아니지만 다들 일하느라 자리를 비운 복도에서 노래를 흥얼거리는 사람. 복도에서 할 게 뭐가 있다고? 사야는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라도 소란스러우면 그대로 가버릴 지 누가 알까.

 "음, 음, 음~."

 창가에서 쏟아지는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하게 빛나는 사람이 거기 있었다. 아직 잠에 취한 체인 멍한 머리로는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사야는 그저 움직이는 그림같은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을까. 뒤돌아 있던 그가 고개를 돌리더니 웃는 얼굴로 인사해왔다.

 "안녕하세요, 사야씨. 식사는 하셨나요?"

 반짝반짝―, 눈이 부셨다. 손을 들어 그에게 화답하다가 문득 그가 사야씨는 빛나시네요, 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는 걸 떠올렸다. 말도 안 돼. 당신이 훨씬 빛나고 있잖아. 사야는 생각했다. 활짝 웃는 것이 조금 어색한 듯 무뚝뚝한 인상이었지만 그가 보여주는 순수한 호의와 열심을 다한 성의는 어색한 표정을 흠으로 느껴지게 하지 못했다. 오히려 조금 표현에 서투른 착하고 다정한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듯 했다. 저렇게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바른 눈빛을 마주하는 것은 힘들었다. 사야는 고개를 끄덕이는 척 시선을 피했다. 다시 사람좋은 미소가 따라왔다.

 "다들 바쁘신 모양이네요. 스텝 사무실이 텅 비어있고."

 그는 하하, 하고 소리내어 웃었다.

 "아무도 없는 시간에 잠깐 쓸어둘까 해서 올라왔어요."

 깨끗한 환경에서 쉬는 것이 효율이 더 좋겠죠, 라고 덧붙이며 웃는 눈을 마주볼 수 없어서 사야는 대신 그의 코를 바라보았다. 정말 자신의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고작 청소일 뿐인데. 남들은 천대하는 직업인데.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그는 언제나 웃는 얼굴이었다. 그를 처음 보았을 때는 딱딱한 얼굴을 젊은 청소부라는 인상에 재미로 다가가는 사람이 아니라면 대부분 피하는 듯 했지만 이제는 그가 청소를 하고 있으면 인사를 하고 지나가는 사람이 더 많았다. 게다가 더 신기한 것은 그가 이렇게 많은 방송국 사람들의 이름을 일일히 외우고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평소 다들 출입증을 차고 다니기는 하지만 처음 대화하는 사람이 아니면 그는 딱히 출입증을 보는 것 같지 않았다. 심심할 때 사람을 관찰하는 버릇이 있는 사야는 그가 청소를 하다가 인사하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수를 세어보다가 이내 인사하지 않는 사람의 수를 세는 것으로 바꾸었던 적이 있었다. 물론 인사한 사람의 수든 인사하지 않은 사람의 수든 지금은 잊어버린 지 오래였지만 그만큼 그가 아는 사람이 많다는 건 확실했다. 더구나 그는 인사할 때 꼭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곤 했다. 아까처럼.
 잠시 그는 사야에게 요즘 복도에 버려진 담배꽁초가 늘어서 치우는 데 힘이 든다던지 그래도 빛나는 분들이 즐겁게 일할 수 있다면 자기는 얼마든지 힘을 낼 수 있다는 이야기 등을 했다. 그 외에도 희야의 안부라던가―어느샌가 그는 희야의 이름마저 기억하고 있었다―날씨 얘기를 덧붙이기도 했다. 하지만 길지 않은 사야의 대답 탓인지 그는 금새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며 물러났다.

 "그럼 저는 이만 마저 쓸러 가볼게요. 빨리 하고 저도 밥먹어야 해서."

 그렇게 돌아서는 그의 등을 보고 있자니 미안한 일을 한 것 같았다. 조금 더 친절하게 대응할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사야는 그런 건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임을 잘 알았다. 사야에게 가능한 건 이정도 였다.

 "밥 맛있게 먹어."

 그가 돌아보았다. 웃고 있었다. 착각인지 모르지만 기뻐보이는 얼굴로 그가 손을 흔들었다.

 "네, 사야씨도 일 열심히 하세요!"

 그 말에는 대답이 떠오르지 않아서 그냥 손만 흔들어 주었다. 그런데도 그는 즐거워보였다. 그는 빠르게 복도를 쓸며 멀어져갔다. 복도와 사무실에는 하나 둘 사람이 늘어나고 있었다. 슬슬 점심시간도 끝나가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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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사야, 22세. SBL 방송국에 영상일로 지원했다. 가족사항은 쌍둥이 여동생 뿐. 방송국에 취직했는데 어째서인지 일거리가 없다는 것만 빼면 현 생활에 아무런 불만도 없는 소시민. 그래, 문제는 그 것이었다. 다행히 자신만 그런 것은 아닌 듯 하지만 어쩜 이렇게 일이 없을까. 이래도 방송이 나간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 날도 결국 할 일 없이 휴게실 소파에 늘어붙어 지루함에 몸을 맡기고 있을 때였다. 재밌어보이는 것이 눈앞을 지나갔다. 닌자 차림을 하고 표창을 날리는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만큼 눈에 띄는 것은 아니지만 사야가 보기엔 충분히 특이한 사람이 자판기 앞에 서있었다. 그는 자판기를 사용하는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듯이 기기를 발로 걷어차고 있었다.

 "씨발, 왜 안나와, 이거. 썅, 돈 먹었네."

 뭐라고 더 꽁알거리는 것 같기는 했지만 온통 욕투성이. 사야는 귀로 들어오는 소리는 한 귀로 흘리며 그를 살폈다. 신기할 정도로 동그란 뒤통수. 옷에는 날개가 달렸다. 저거 저렇게 세워서 고정시키려면 옷에 공 좀 들였겠는데. 그 것만으로도 충분히 독특했는데 거기에 더해 신경질적으로 휘두르는 손목에는 수갑으로 보이는 쇠뭉치가 대롱거렸다. 몇가지 독특한 차림만으로 충분히 흥미가 동해 사야는 그를 제대로 관찰하기로 했다. 상대방이 시선을 느끼는 지 따위는 사야가 알 바가 아니었다.
 여전히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은 절반이 욕이었다. 별 의미없이 습관적인 것인 듯 했지만 언어청정구역에서 살아온 사야로서는 귓가에 맴돌뿐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것도 가끔은 재미있다. 자주 듣기에는 별로 바람직하지 않겠지만서도. 평균보다 조금 작은 키. 몇번이나 자판기를 더 걷어차고서야 한쪽 눈썹을 잔뜩 찡그린 체 돌아선 그의 얼굴은 매끄러웠다. 하얀 안대가 한쪽 눈을 덮고 있어 제대로 살필 수는 없었지만 꽤나 귀여운 얼굴일 거라고 생각했다. 헤에―, 다시 시선이 갔다. 파랗고 노란 상의. 무려 보색의 조합. 거기에 얼굴을 감싼 바가지머리가 잘어울렸다. 이걸 그냥 독특하다고 해도 될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런 색다른 아이템들이 한 곳에 모여서 어색하지 않다면 그대로 패션이라고 이름 붙여도 되지 않을까.

 "뭘 봐."
 "……."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성큼 앞에 선 그가 사야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먼저 보인 것은 출입증.

 "김 재하."
 "뭐?!"

 협박이라도 하듯 찡그린 얼굴이 오히려 재미있기만 했다. 탁. 사야는 손을 뻗어 주름진 미간을 누르려 했지만 먼저 잡혀버렸다. 강한 악력에 의해 손이 꺾였다. 아프다. 작게 인상을 찌푸렸지만 그는 신경쓰지 않는 듯 했다.

 "이놈 새끼가 왜 꼬라보고 지랄이야. 눈 안 깔어?"
 "기왕이면 손은 놓고…."
 "새꺄, 어딜 주둥이를 나불대. 씨발. 눈 깔라고."
 "……."

 대체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조용히 하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사야는 가만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가 그냥 조용히 시선을 내렸다. 하지만 그게 또 불만인 모양이었다.

 "썅, 너 나 놀리냐?"

 팽개치듯 손이 풀려났다. 다른 손으로 저린 손을 쥐어 주물렀다. 아, 피곤해. 어쩐지 머리가 아파왔다. 소란스러운 사람은 질색. 심심한 것보다는 나았지만 시비가 걸리는 것은 싫었다. 요즘 급 늘어버린 한숨이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눌러 참았다. 그럼 또 무슨 소리가 튀어나올지 몰랐다.

 "아이, 씹, 자판기는 돈을 먹고 옆에 있던 새끼는 꼬라보고 오늘 일진 죽여주는데."

 그 뒤로는 듣지 않았다. 듣는 것만으로도 피곤해졌다. 사야가 아무 말이 없자 마치 패기라도 할 것같은 기세였던 그는 혼자서 욕을 씨부렁 거리다 물러났다. 그래도 반항기 청소년들이 모인 학교가 아니라 직장인 탓일까. 한 대도 얻어맞지는 않았다. 유난히 저런 타입의 사람들과 상성이 맞지 않는 사야는 툭하면 시비가 붙었었다.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느니 걸리적거린다느니 핑계는 많았다. 대부분 얻어맞아야 끝이 나곤 했었는데.
 아무 일 없어서 다행이었다. 희야에게 멍을 감추기 위해 애 쓰지 않아도 된다니 그것만도 감사했다. 사야는 그가 빠져나간 휴게실 문을 바라보았다. 다시 지루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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