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카 타입 자캐 커미션입니다

1편

2편

3편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만나더라도 이전과 같은 관계는 되지 못할 것을 각오했다. 마음이 아파 끝까지 숨길 수가 없어서 뱉고만 고백이었다. 그 애가 동성 간의 연애감정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지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다. 다 거짓말이다. 자만하고 있었다. 설득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편견은 있어도 내 말만은 들어주리라고 차분히 대화할 여유가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착각이었다. 내 고백에 그 애는 안색이 변했다. 충격에서 차츰 혐오로 물들어가는 그 애의 얼굴을 보며 직감했다. 이 관계는 끝이 났구나, 하고. 내 오만이었다. 나는 도망가듯 떠나는 그 애를 붙잡을 수 없었다.

 벌써 한 달이 넘었다. 힘들었다. 취해보기도 하고, 미친 듯이 공부에 열을 올리기도 했다. 아직도 잠깐 휴식을 취할 때면 경멸 어린 눈동자가 떠올랐다. 어째서 좀 더 참지 못했을까. 자신을 원망하기도 했다.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를 만나면 뜯어말릴 텐데, 시간의 벽을 넘을 수가 없다. 아무리 후회해도 과거는 변치 않는다. 소용이 없다.

 누워있으니 이런 생각이 드는 거다. 바로 잠들 줄 알고 누웠는데 역시 오늘은 너무 여유로웠다. 공부도 운동도 하지 않았으니 피곤할 리가 없었다. 바람이라도 쐬고 들어와야지. 그래도 잠이 안 오면 차라리 공부하는 게 낫겠다.

 여름밤은 후덥지근하다. 예전엔 이 정도로 덥지는 않았는데 요새는 밖에 나간다고 시원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후줄근한 복장이지만, 밤이니까 괜찮다고 변명하며 편의점을 찾아 발을 틀었다. 한데 곧장 보이는 골목에 익숙한 그림자가 있다.

 “……유하야?”

 가로등 불 아래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 애가 천천히 고개를 든다. 그렇게 느리진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내게만 느리게 흐른 것 같다. 빨갛게 물든 눈가가 어두운 밤거리에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나는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그 애에게 달려갔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어깨를 붙들고 그 애를 돌려세웠다. 특별히 운동을 한 것도 아니라는데 딱딱하게 근육이 잡힌 탄탄한 어깨가 눈에 띄게 처져 있었다. 그 애는 당황한 얼굴로 내게서 눈을 피했다.

 “유하야. 사고라도 났어? 세하한테 무슨 일 있는 거야?”

 그 애는 갑자기 왈칵 눈물을 쏟아낸다. 걷잡을 수 없이 떨어지는 눈물을 양손으로 닦아내려고 해보지만, 손으로 막아질 리 없다. 힘들게 맞췄다는 정장을 망치지 않으려고 무던 애를 쓰는 게 보였다. 이러면 안 된다. 격렬한 거부의 눈길을, 분노를 잊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도 선명하게 봤는데, 그런데도 그냥 둘 수가 없다. 미안해.

 나는 속으로 사과하며 그 애를 끌어안았다. 품에 얼굴을 묻고 울 수 있도록. 자다가 막 나온 터라 옷을 아낄 필요는 없으니까 괜찮다. 고작 옷 때문에 마음 편히 울지도 못해서야 되겠는가. 그냥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그렇게 매정할 수는 없었다.

 그 애는 끝내 소리 내 울지 않았다. 소리를 삼킨 울음이 맞닿은 부분을 통해 떨림으로 전해졌다. 섣불리 울지 말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 애는 내 품속에서도 외로워했다. 혼자 있는 것처럼 외롭게 흐느꼈다.

 “죄송해요.”

 겨우 울음을 그친 그 애가 처음으로 뱉은 말이었다. 목소리가 잠겨있었다. 오는 길부터 울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걸까.

 “들어가자.”

 그 애는 한 박자 늦게 괜찮다고 대답한다. 가로등 밑에 못 박힌 것처럼 우두커니 서서 땅만 보고 있었다.

 “이대로 널 보내면 나는 마음이 편하겠니. 들어가자. 세수라도 해야지. 차도 없잖아. 그대로 걸어갈 거야?”

 말없이 고개를 젓는다.

 “들어가자.”

 가볍게 잡아끌자 저항 없이 따라온다. 손을 내밀지 않으면 기댈 줄도 모르는 이 애를 어떻게 해야 좋을까. 여기까지 찾아와서 연락도 하지 않은 고집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세상이 이제 겨우 성인이 된 어린애를 여기까지 몰아넣었다. 사람의 악의는 어디까지 뻗어있는 걸까.

 그 애는 처음 찾아왔을 때처럼 문가에 서 있었다. 들어가도 되냐고 허락이라도 해줘야 하는 걸까. 돌이켜보면 비단 첫 방문에만 그런 건 아니었다. 그 애는 잠시 기다렸다가 실례한다고 인사를 하고서야 방에 발을 들였다. 오늘은 그조차도 하지 못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곳에서 나눈 대화의 여파인지도 몰랐다.

 “씻고 있어. 갈아입을 옷 줄게.”

 그제야 신발을 벗고 마루에 올라서는 걸 보고 있으려니 속이 복잡하다. 나는 저 애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걸까.

 세수를 마치고 나온 그 애에게 잠옷으로 쓸만한 편한 옷을 건넸으나 받아들질 않는다.

 “저기.”

 “차도 다 끊겼어. 자고 가.”

 고민하는지 한동안 말이 없더니 이내 고맙다는 인사가 돌아왔다. 내내 고개를 숙인 상태라 눈 한 번 마주치기가 힘들다.

 “유하야.”

 “…….”

 “무슨 일인지 털어놔도 괜찮아. 네가 거절한 건 내 연심이지 우정이 아니잖아.”

 그 애는 말없이 옷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기다리니 옷을 갈아입은 그 애가 방에서 나왔다. 그러고 보면 이렇게 흐트러진 차림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늘 반듯한 모습만 보아온 터라 낯설고, 섹시하다. 쇄골까지 드러난 차림을 보게 될 걸 예상하고 준 건 아니었는데.

 헛기침으로 주의를 환기한다. 그 애가 불안하게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익숙한 눈빛이다. 연아가 자주 나를 저렇게 쳐다봤었다. 소중한 동생, 연아가.

 “얘기해줄래.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애는 망설였고 나는 기다렸다. 한 번도 자기가 힘든 이야기를 제대로 한 적이 없었기에 큰 기대는 없었다. 피한다면 보내줄 생각이었다.

 “직장에서 성희롱을 당했어요.”

 담담하게 시작된 이야기는 꽤 심각한 것이었다. 얼마 전부터 담당하는 연예인이 휴식기에 들어가 사무실 업무를 하게 되었는데, 반드시 환심을 사둬야 하는 무대 감독이 그 애를 희롱한다는 거였다. 회사에 말을 하면 사람을 바꿔줄 테지만, 복귀 무대에 신세를 져야 할 뿐더러 앞으로도 계속 마주칠 사람이라 무작정 피할 수가 없다는 거였다. 기가 막힌 건 이게 처음이 아니라는 거였다. 아무리 일이 중요해도 그런 식으로 따낸 자리는 옳지 않고 담당하는 가수라고 반가워하겠느냐는 말에 그 애는 반쯤 넘어온 것 같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우겼다. 이게 처음이 아니니까 견딜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내가 화를 내지 않은 건 기적 같은 일이었다. 나는 정말 화가 많이 났기 때문이다.

 “중학생 때 일이에요.”

 만고의 인내심을 발휘해 화를 내지도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추궁하지도 않고 있던 내 모습이 어떻게 보였는지 그 애는 자진해서 과거에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중학생 때부터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몰랐던 건 이면의 이야기였다.

 미성년자가 일할 수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다. 중학생이면 말할 것도 없었다. 일반적으로 가능한 곳은 패스트푸드점 정도인데 당시 거주지 근처에 마침 일할 수 있는 가게가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 택할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나이를 속이는 것. 신분증까지 확인한다는 걸 몰랐기 때문에 시도한 일이었다. 물론 들켰다. 나이 차가 나는 형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따로 도움을 받을 곳도 없었다. 유하는 마지막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인정에 매달렸다.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양육 가능한 피보호자가 있어서 생활 수급 대상자는 되지 못하지만, 정작 그 피보호자가 연락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힘겹게 털어놓았다. 어찌나 울었는지 그 이후로도 그때만큼 울어본 적이 없다고 그 애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주인은 걸리면 성공적으로 나이를 속였다고 하자며 그때까지 써주겠다고 했다. 그 애는 그걸 믿은 자기가 너무 순진했다고 고백한다. 세상 물정을 아는 사람이 보기엔 터무니없는 계약이었지만, 그때는 상황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사달은 거기서 시작됐다.

 처음에는 슬금슬금 엉덩이나 허벅지를 더듬는 정도였다. 당혹스럽고 불편했지만, 못 견딜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당장 쌀이 모자랐고, 가끔 건드리는 정도지 심하게 주무르는 것도 아니었다. 실수 같기도 했다. 실제로 주인은 고의가 아니라고 잡아떼었다고 한다. 그러던 게 점점 수위가 높아지더니 결국에는 직접적인 폭력으로 이어졌다. 그 애는 천천히 말했다. 한 호흡에 한 문장씩. 창고에서 재고를 정리하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닫히며 몸을 덮쳐온 그림자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현실에 짓눌려 반항할 수 없었던 그 애가 계속된 폭력에서 벗어난 건 이 년이나 지난 후의 일이었다. 그 애를 붙잡아놓기 위해서 편의점 사장은 남들보다 봉급을 높게 쳐줬다. 그래 봐야 편의점 월급이었지만, 선택할 수 있었던 다른 선택지보다는 확실히 금액이 높았다. 그래서 고등학생이 되고서도 벗어날 수 없었다. 피보호자에게 계속 연락이 되지 않아 동의서를 받을 수 없으니 일이 잘못될 것도 두려웠다. 그 애를 구한 건 동생 세하였다. 정확히 어떻게 들켰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때쯤의 일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게 많다고. 어쨌든 상황을 동생에게 들켰고, 그가 한달음에 달려가 사장의 어금니를 뽑았다. 평소 워낙 성적이 좋고 평판도 좋았으니 망정이지, 그대로 소년원에 끌려갈 수도 있었다. 세하를 아끼던 은사님이 도와줬다고 한다.

 “그때 당했던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버틸 만 합니다.”

 그게 진심이라는 게 가장 큰 문제라는 걸 이 애는 알까. 채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탓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 입을 열면 무슨 말을 하게 될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그 애는 연우가 말이 없자 이야기가 끝났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얘기 들어주셔서 고마워요. 먼저 잘게요.”

 그 애는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곧 난처한 듯 나를 보았다.

 “유하야.”

 “네.”

 “다른 사람으로 바꿔 달라고 하자.”

 “안 돼요. 이 일은 제가…….”

 “부탁할게. 그렇게 하자.”

 그 애는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안타깝게도 어떻게 위로하고 다독여줄 여유가 없었다. 나는 그를 고소하게 만들 방법을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해보았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충격이 심해 눈물을 보인 애를 더 몰아붙이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다른 계획을 세웠다. 어떻게든 잡아 가두면 그만이다. 그리고 성폭행범을 고소할 방법은 그 외에도 있었다. 성폭행은 재발률이 높은 범죄다.

 “침대에서 자. 내가 소파에서 잘 테니까.”

 “하지만…….”

 “손님이잖아. 내 말 들어.”

 그 애는 입을 앙다물었지만, 고집을 피우진 않았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침실로 들어간다. 확답은 받지 못했지만, 어차피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으려고 하면 먹히지 않으리란 걸 안다. 그 질긴 버티기를 한두 번 본 게 아니었다.

 나는 공부할 상황이 아니라는 걸 빠르게 받아들였다. 침실에 교재가 있기도 했고 머리가 복잡했다. 뭘 봐도 들어올 리 없었다. 캄캄한 천장을 올려다보며 몇 번이고 상상 속에서 얼굴도 모를 범죄자들을 찢어발겼다. 아직도 멀쩡하게 살아있겠지. 그때 그자도, 이번에 나타난 그자도. 어느 정도 마음이 가라앉자 현실적인 대책이 떠올랐다. 차근차근 계획을 세운다. 우선은 관련인 중 특별한 이유 없이 협업을 거부한 사람을 찾는다. 사유를 묻는다. 또다시 찾는다. 사유를 묻는다. 찾는다. 묻는다.

 그 외에 다른 방법을 쓰는 것도 물론 생각해본다. 계획이 원하는 대로 다 풀리면 얼마나 좋겠느냐마는 불행히도 다양한 경우의 수를 염두에 두지 않은 계획은 대다수가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고 만다. 아버지께 연락해서 기업 쪽 연줄을 이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리라. 모든 예술가는 후원이 필요한 법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천장에 눈을 굴리며 메모를 했는지 눈이 뻐근하게 시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몰랐다.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새벽 네시가 넘어있었다. 오늘은 한숨도 못 자려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니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니 저도 모르게 발길이 침실로 향했다. 이러면 안 된다고 양심이 경종을 울리는 것을 무시하고 침대 옆에 걸터앉는다. 그 애는 발소리를 들었는지 조금 뒤척였지만, 괜찮다고 속삭이자 도로 잠에 빠졌다. 잠귀가 밝다고 세하가 불평하는 걸 얼핏 들은 적이 있는데 사실이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잠든 얼굴 윤곽을 잡아냈다. 한참을 옆에 앉아 들여다보았다. 짙은 눈썹과 속눈썹, 한국인 같지 않은 반듯한 콧날, 제법 단단한 턱선과 얇은 입술. 늘 찌푸리고 다니는 탓인지 자면서도 미간을 모으고 있는 게 우스웠다. 손을 대자 깨어나려는 낌새가 보여 얼른 떼었다. 드러난 목에 시선이 간다.

 만지고 싶은 욕구를 눌러 참는다. 건드리면 깨어날 기색이 역력해서 일어나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아니나 다를까 무게가 줄며 매트리스가 출렁이자 뺨이 움찔거린다. 그 모습이 귀여워 픽 웃음이 났다. 아침에 먹일만한 게 있었던가 모르겠다. 냉장고를 비워놓지는 않았는데 요즘 식사를 부실이 했더니 뭐가 들었는지 기억이 안 났다. 상한 음식은 없는지 확인할 겸 오랜만에 먹을만한 요리를 해야겠다. 혼자 나와 살기 시작한 뒤로 누군가와 함께 먹는 아침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연아는 잘 지내고 있을까. 괜한 걱정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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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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