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 빛이 사그라드는 오후였다. 침대는 커다란 창문 건너편에 놓여있다. 너머로는 아마 빛 테라스와 초록으로 물든 이파리 위에 울긋불긋 수 놓인 꽃들이 보인다. 멀리 펼쳐진 성벽 위로 부쩍 가까워진 태양이 차츰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는 직각삼각형에서 빗변을 제외한 두 변의 비율이 삼 대 사일 경우 빗변의 값은 오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괄호 열고. 사실 자신의 업적인지 제자들의 업적인지, 아니면 선대의 지식인지 불명확하다.”

 “베이유.”

 낭랑한 목소리를 끊고 소년이 말했다. 베이유는 고개를 든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 걸까.”

 베이유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소년은 눈을 똑바로 뜨고 베이유를 바라본다. 베이유는 소년이 당황스러운 질문을 던질 때면 언제나 그렇듯 어색하게 웃는다. 소년은 베이유가 당황할 때면 언제나 그렇듯 참을성 있게 기다린다. 갑자기 방안에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소년은 계절이 바뀌면 열한 살이 된다. 곧은 등과 넓은 어깨는 열세 살은 족히 되어 보였다. 또랑또랑 커다란 눈에 우뚝한 코, 굳게 닫힌 입술은 서너 살 더 먹은 형들보다도 어른스럽다. 헐렁한 셔츠 사이로 드러난 앙상한 팔뚝만 아니라면 근사한 청년으로 자라나리라 기대가 되는 얼굴이다.

 소년은 하얀 피부에 볼이 붉었다. 좋은 것을 먹고 좋은 옷을 입으니 포동포동 살이 올라야 하건만 젖살이 남은 뺨을 빼고는 살이 없다. 덩치가 크고 또래보다 어른스럽기는 하지만 가여울 만큼 볼품이 없었다.

 분명 또래보다 커다란데도 어딘가 작아 보이는 것은 소년의 형 탓이다. 생일이 같은 소년의 형, 하시르라는 이름을 가진 동갑내기 소년은 똑같이 열 살인데도 벌써 열다섯은 먹은 양 키가 크다. 어깨는 떡 벌어지고 아버지를 닮아 매서운 눈에 검술에 재능을 보여 기사들과 함께 훈련했다. 겨울나무처럼 마른 소년과 달리 팔다리에는 힘이 있어서 엔간한 어른은 팔씨름으로도 이기지 못한다. 쾌활하면서도 점잖은 성격은 아버지를 쏙 빼닮아 차기 영주 자격이 충분하다고 하며, 어린아이답지 않은 남성적인 모습이 근사하다며 하녀들은 성마른 입방아를 찧었다.

 남들보다 큰 키에 큰 골격을 타고났어도 하시르 곁에 서면 소용이 없다. 단둘 밖에 없는 형제와 함께 서면 소년은 언제나 조그만 동생이었다. 잘 웃는 형과 비교해 어두운 아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사교적인 형과 달리 친구도 없었다.

 소년은 거기에 불평하지는 않았다. 곧 죽을 거라는 시중인들의 뒷얘기도 말없이 들어넘겼다. 상냥한 백작 부인 앞에서는 어머니와 어울려주는 착한 아들이었고, 호방한 백작 앞에서는 귀여운 막내 노릇을 했다. 형이 밖에서 돌아와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떠들면 줄곧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도 쳤다. 유모는 몸은 약해도 말썽부리지 않는 작은 도련님을 끔찍이 아꼈다.

 소년은 서재를 좋아했지만 먼지가 많아 오래 있지는 못했다. 대신 책을 빌려와 오늘처럼 글을 읽을 줄 아는 하인에게 낭독을 부탁했다. 처음에는 몇 번이나 사람이 바뀌었지만 베이유에게 낭독을 시킨 후로는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베이유는 신중하게 대답했다.

 “빵입지요.”

 소년의 반듯한 이마가 대번에 구겨졌다.

 “먹어야 살지 않겠습니까. 빵이 없어서 당장 굶어죽는 사람이 거리에 나가면 수두룩합니다.”

 소년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깊이 생각에 잠길 때면 나오는 버릇이었다. 베이유는 글씨를 짚으며 어디까지 읽었는지 찾아냈다.

 “계속해.”

 소년이 말했다. 베이유는 다시 큰 소리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자신의 업적인지 제자들의 업적인지, 아니면 선대의 지식인지 불명확하다. 괄호 닫고. 현대의 공식으로 표현하면 삼십이 더하기 사십이는 오십이이다. 피타고라스학파는….”

 “빵만 있으면 사람은 살 수 있을까?”

 소년이 말했다. 베이유는 다시 책을 내려놓았다.

 “빵만으로는 안 되죠. 집도 있고 옷도 있어야 됩니다.”

 베이유는 대답했다. 소년은 입꼬리를 당겨 입술을 한일자로 만들었다가 흠, 하고 불편한 신음소리를 내며 눈을 돌렸다.

 “왜 그러십니까?”

 베이유가 물었다.

 “아냐. 아무것도.”

 소년은 대답했다.

 유리창을 넘어온 노을이 방안을 붉게 물들였다. 소년의 빨간 눈동자는 창 너머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소년의 마른 가슴이 작게 부풀었다 내려앉았다. 베이유는 다시 책을 들었다.

 “피타고라스학파는 이 대발견을 기념해 황소 한 마리, 괄호 열고, 일백 마리라고도 함, 괄호 닫고, 를 신의 제단에 바쳤다고 한다. 그러나 기쁨은 잠깐이었다. 만일 빗변을 제외한 두 변의 비율이….”

 태양은 성벽에 반쯤 걸쳐 있었다. 소년은 둥그런 선을 눈으로 따라 그렸다. 베이유는 막힘없이 책을 읽어나갔다.

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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