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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3.11.19 [ 정령의 아이 ] 2회 - 녹음의 아이
  2. 2023.11.14 [ 정령의 아이 ] 1회 - 바람의 아이

“……루, 은하루.”
탕. 짧은 타격음과 함께 현실이 돌아왔다. 하루는 벌떡 일어났다.
“네, 은하루입니다!”
와락 웃음이 터졌다. 선생님이 난감하다는 듯 웃더니 헛기침을 했다. 조용, 조용! 웃음소리는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이 녀석아. 대체 무슨 생각을 하기에 정신을 팔고 있어.”
핀잔을 주고는 다시 한 번 픽 웃음을 흘리고 돌아선다. 하루만 어리둥절했다. 네에. 흘리는 소리로 답하고는 교과서를 내려다본다. 슬쩍 옆자리 친구 것을 훔쳐보니 전혀 다른 페이지였다. 아, 큰일났네. 하루는 수험생이었다.
하룻밤이 지났건만 귀신에 홀린 듯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다. 우습게도 잠은 잘 잤다. 산행 아닌 산행을 해서 그런지 하루를 곱씹을 새도 없이 눕자마자 잠에 들었다. 그래놓고 이 모양이었다. 수업은 안 듣고 뭐 하는 거야. 하루 안의 모범생이 외쳤다. 그 옆에서 본능이 코웃음을 쳤다. 가만 있어. 지금 그게 중요하냐.
그건 그랬다. 수험이 중요한가. 당연히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 일어나는 일을 앞에 두고서도 수험이 중요하냐 하면 고민스럽다. 일생에 이런 일이 또 있을까 싶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수험이 중요하냐? 하루는 자신에게 물었다. 다시 한 번 모범생이 대답했다. 중요해! 음. 그렇다. 그치만 공부에 집중이 되질 않았다.
어쩌지.
하루는 잠시 고민했다. 물론 이것도 수업시간 중의 일이다.
“은하루, 자냐?”
선생님이 물었다.
“안 잡니다.”
하루가 대답했다. 선생님은 또 웃었다.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발표를 하고 수업 시간이 끝나자마자 하루는 교실을 뛰쳐나왔다. 얼마나 급했는지 선생님이 복도를 밟은 것보다 하루가 복도를 밟은 게 더 빠를 정도였다. 친구들이 하루를 불러세웠지만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뛰지 말라는 선생님의 경고도 흘려들었다.
허겁지겁 달려 도착한 곳은 어제 잎새를 보았던 벤치였다. 급하게 멈추느라 실내화가 닳는 게 아닌가 싶은 소리와 함께 발이 미끄러졌다. 그 앞에 자그만 소녀가 서있었다.
잎새는 하루가 도착하기도 전부터 하루를 쳐다보고 있었다. 말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이 순했다.
“안녕.”
거의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잎새가 속삭였다. 하루의 입이 귀에 걸렸다.
“안녕.”
우렁찬 목소리에 멀리 선 아이들의 시선이 쏠렸다. 잎새가 흠칫 놀랐다.
두 사람은 시선을 피해 조금 걷기로 했다. 잎새는 또 말이 없었다. 하루가 안절부절 조바심을 내다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어디 살아? 나는 삼성동이라서 그때 봤던 곳하고는 거리가 좀 있어. 너는 그 근처에 사는 거야? 학원은 안 다녀?”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고 나서야 자신이 긴장했음을 깨닫는다. 하루는 가볍게 숨을 몰아쉬었다.
답은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잎새는 또다시 말끄러미 하루를 바라보았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간질간질했다. 하루는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는 사이 앞이 막혔다. 학교를 반쯤 가로질러 모퉁이에 도달한 것이었다. 두 사람은 발길을 꺾어 다른 길로 들어섰다.
“맞아. 거기쯤.”
잎새는 그렇게 말하곤 시선을 거두었다. 동그란 뺨을 바라보며 하루는 잎새의 속눈썹이 참 풍성다는 생각을 했다. 잎새의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하루의 귀를 맴돌았다. 맞아. 거기쯤. 맞아. 거기쯤. 맞아. 거기쯤.
“일 학년이지?”
하루가 물었다. 하루의 시선이 잎새의 명찰을 훑었다. 잎새가 고개를 끄덕였다.
“몇 반이야?”
이번에도 잎새는 하루를 가만히 바라본다. 이제는 시선도 익숙해져 간다. 하루는 웃는 낯으로 잎새를 마주보았다. 잎새는 또다시 가만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3반.”
순순한 대답이었다. 하루는 자기 명찰을 잎새에게 보여주었다.
“나는 1반. 곤란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와. 뭐든 도와줄게.”
하루가 말했다. 잎새는 또 하루를 바라본다. 걸음이 멈춰서 조금 뒤쳐진다. 하루는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도와줄거야?”
잎새가 물었다. 하루는 웃었다.
“물론이지.”
잎새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방과 후.”
소곤거린다.
“괜찮아?”
그렇게 묻는 눈빛이 왠지 거절해서는 안 될 것만 같아서 하루는 긴장하고 만다. 그래서 말했다.
“물론이지.”
물론 전혀 괜찮지 않았다. 수험생은 바쁘고 학원도 있다. 하지만 하루는 그렇게 대답했다.

방과 후. 종례가 시작하기도 전부터 가방을 싸서 끝나자마자 달려나왔다. 계단을 세 칸씩 건너 뛰며 건물을 내려왔다. 교문 앞에 선 잎새가 소심하게 손을 흔들었다. 하루는 벙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옆에서 맞을 뻔한 학생이 기겁하고 하루를 피해갔다.
길 안내는 잎새가 했다. 그 애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갈림길에서 하루가 길을 잘못 들었을 때도 번개 같이 다가와서는 이쪽이라고 가방을 살며시 잡아당길 뿐이었다. 겉보기와 달리 힘이 센지 살살 당기는 것 같은데도 느껴지는 힘이 셌다.
하루는 걷는 와중에 집에서 써먹을 변명 거리를 고민했다. 학원에는 몸살 기운이 있어서 하루 빠지겠다고 해두었지만 집에서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이었다. 뜬금없이 학교와 학원에서는 먹히는 변명이 집에서는 먹히지 않는 게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잎새는 어디로 가는지도 알려주지 않고 계속 걸었다. 버스 정류장을 하나 지날 때부터 뭔가 이상했는데 두 개를 넘어가니 다리의 노곤함과 함께 의심이 고개를 들었다. 하루는 아주 잠깐 고민했다.
“우리 어디 가는 거야?”
“임연동.”
대답은 즉각 돌아왔다. 하루의 눈이 동그래졌다. 하루는 빠르게 걸어 잎새에게 다가섰다. 어찌나 걸음이 빠른지 나란히 걷기가 벅찼다.
“버스 안 타?”
그제야 잎새가 멈추어섰다. 하루를 올려다보고는 두어번 눈을 깜빡였다.
“버스?”
처음 듣는 말이라는 듯 당혹스러운 목소리였다. 하루도 당황했다.
“버스 타고도 이십 분은 걸리는데 걸어가려고?”
잎새가 또다시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응.”
자신 없는 목소리였다. 하루는 급하게 휴대폰을 꺼냈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버스 정류장을 찾아야했다. 학교 앞에서 버스를 탔어도 여닐곱 정거장은 가야하는 곳이었다. 대학가가 가까워서 놀러가기 좋은 동네라 대충 위치를 알았다.
잎새는 하루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겁을 먹은 듯 불안한 눈빛이었다. 곧 잎새가 속삭였다.
“미안.”
“응?”
하루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제서야 잎새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울상이 되어 있었다. 하루는 깜짝 놀라서 휴대폰을 내렸다.
“그게. 나는 보통 버스 타고 다니니까. 엄청 멀잖아. 설마 걸어갈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해서. 아니, 걸어갈 수는 있는데.”
말이 엉망진창으로 나왔다. 잎새는 한층 침울해졌다. 하루는 너무 당황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학교가 끝난 직후라도 학생들이 많은 곳은 아니었다.
그 때, 귓가에 희미하게 무언가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스쳐갔다.
하루는 다시 잎새를 바라보았다. 그 애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뭐라고 했어?”
되묻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잎새가 소곤소곤 말했다.
“교통카드가….”
뒷말은 다시 들어가버린다. 하루는 저도 모르게 아, 하고 소리를 냈다.
“괜찮아. 내가 찍어줄게.”
다행이다. 저도 모르게 안도의 웃음이 새어나왔다. 친구의 교통비를 두어 번 대신 내주는 정도는 빈번했다. 여전히 잎새는 울상이었지만 괜찮았다. 하루는 다정한 낯으로 잎새를 향해 웃었다.
“항상 걸어다니는 거야?”
잎새는 고개를 끄덕인다.
“굉장하네.”
하루가 진심 어린 감탄을 터뜨리자 울먹이기 직전이던 잎새의 얼굴이 조금 폈다.
“뭐가?”
여전히 속삭이는 투지만 아까보다는 조금 커진 소리로 잎새가 물었다.
“걸어서 임연동까지 간다면서. 한 시간은 걸릴텐데 걸어다닌다니 굉장해.”
“그냥….”
잎새는 무언가 말할 듯 입을 오물거리다가 다물어버렸다. 그리곤 가볍게 하루의 손목을 잡아 끌어당겼다.
“이쪽이야.”
하루는 군말 없이 끌려갔다.
잎새가 안내한 곳은 근처의 버스 정류장이었다. 하루는 다시 지도를 찾았다. 다행히 이곳에서 임연동으로 가는 버스가 있었다. 죽 이어진 큰 길인데 없는 것도 이상하기는 했다.
당연하게도 버스에는 같은 학교 학생들이 잔뜩 있었다. 아는 얼굴이 있어서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학원 빼먹고 어디 가냐는 질문은 대충 흘려넘겼다.
임연동에 이르러, 잎새는 놀만한 거리에 이르기 직전 주거 단지에서 하루에게 손짓을 했다. 하루는 잎새의 뒤를 따라 내렸다. 친구가 왜 벌써 내리냐고 물었지만 손만 흔들어주었다.

길은 적당히 한산했다. 그냥 주거 단지라고 하기엔 사람이 많았지만 다니기에 불편할 정도는 아니었다. 대학가 근처기도 하고 조금만 더 가면 가게들이 몰려있어서 그런 듯 했다.
잎새는 빌라 단지로 들어가 골목을 헤매기 시작했다. 하루는 주변을 살피며 길을 외워보려고 했다. 다행히 잎새는 깊이 들어가지는 않아 멈춰 섰다. 혼자 가라고 해도 대충 돌아나갈 수는 있을 것 같았다. 휴대폰이 있으니 집이야 어떻게든 찾아갈 테지만 길을 외워두고 싶었다. 혹시 또 올지도 모르니까.
잎새는 빌라 건물 계단을 올라 이 층의 어느 집 앞에서 벨을 눌렀다. 잠시 기다리자 인기척과 함께 문이 열렸다.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을 휘둥그레 뜬 예쁜 젊은 여자였다.
“무슨 일이야?”
“도와준대.”
대뜸 던져진 질문에 하루가 눈을 굴리는 사이 잎새가 대답했다. 여자는 두어번 눈을 깜빡이더니 하루를 향해 인사하며 문을 활짝 열었다.
“일단 들어오세요.”
“안녕하세요.”
잎새가 먼저 들어갔다. 하루는 조심스레 고개를 숙였다. 여자가 생글생글 웃으며 마주 인사했다. 감탄이 나올 정도로 예쁜 얼굴에 하루는 얼른 시선을 피했다. 안 그러면 계속 쳐다보고 있을 것 같았다.
좁은 집 안은 정갈했고, 무엇보다 싱그러웠다. 사방에 크고 작은 화분이 가득해서 사람이 사는 집이라기보다는 작은 식물원 같았다. 하루의 시선을 눈치 챈 여자가 부끄러운 듯 말했다.
“너무 많죠. 조금씩 데려오다보니 자꾸 늘어서 그만 이렇게 됐어요.”
식물에 대해 아는 바가 없는 하루는 그저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뭘 도우면 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뭘 돕겠다고 말한 건지 스스로도 모를 노릇이었다.
“이쪽에 앉으세요.”
여자가 거실로 보이는 공간으로 하루를 안내했다. 잎새는 벌써 가방을 벗고 소파에 앉아있었다. 두세 사람 앉을 수 있을 듯 보이는 아담한 소파였는데 근처의 빈 공간은 화분으로 가득했다.
“잠시만요.”
그러고 여자가 자리를 비웠다. 하루는 집안을 다시 한 번 찬찬히 둘러보았다.
티비는 없고 모여앉을 수 있게 꾸며진 거실이었다. 부엌과 거실이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 좁은 집에 침실이 하나 딸려 있었다. 살림살이가 혼자 사는 집 같지는 않았다.
하루가 잠시 집 구경을 하는 사이 주인이 마실 것을 들고 돌아왔다. 세 사람은 나란히 거실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둘러앉았다.
“감사합니다.”
하루가 테이블에 놓인 쥬스를 보고 말했다. 여자가 너무 예뻐서 차마 마주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저렇게 얼굴이 작은 사람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하루는 곁눈으로 잎새를 바라보았다. 소개라도 시켜줄까 하는 기대였으나 잎새는 눈만 깜빡였다.
여자가 말을 받았다.
“잎새 친구세요?”
“어….”
말문이 막힌 하루가 잎새를 쳐다보았다. 친구인가? 헷갈렸다. 동갑이 아닌 건 둘째치고 겨우 어제 만나서 이름만 나눴는데 친구라고 해도 되나.
시선을 받은 잎새가 고개를 갸웃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전 미래예요. 민미래.”
여자가 말했다. 하루는 퍼뜩 여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전 은하루예요.”
예쁜 이름이네요, 하고 미래가 웃었다. 그 얼굴이 사람이 아닌 것 같을 정도로 예뻐서 하루는 흠칫 놀랐다. 꼴깍 침이 넘어갔다.
감사하다고 또 인사를 했다. 미래가 웃는 낯으로 자기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인형은 아니구나, 하는 이상한 감상이 들었다. 어쨌든 미래씨는 화장실은 안 갈 것 같았다.
“하루양. 여기는 어떻게 오게 됐어요?”
미래가 물었다. 하루는 열심히 시선을 피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도와달라고 해서요.”
“뭘 도와주기로 했는데요?”
“…글쎼요.”
“뭔지도 모르고 왔어요?”
미래가 또 웃었다. 왠지 별 거 아닌 대화에 얼굴이 홧홧 달아올랐다.
“돌아가세요.”
미래가 말했다. 담담한 어조에 여상하게 ‘네,’라고 대답할 뻔한 하루가 네? 하고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저 조그만 얼굴에 저렇게 눈이 큰 게 말이 되나?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저 애는,”
미래는 잠시 잎새를 바라보았다.
“아직 세상 물정을 잘 몰라요. 사람들하고 어울리는 데도 서툴죠. 그래서 하루양을 불러온 거예요. 제가 잘 타이를테니 돌아가세요. 아니면 좀 놀다 가셔도 괜찮고요.”
하루를 향한 눈빛이 다정했다. 하루는 왜인지, 오늘따라 정말 이상하게도 그게 참 서럽다고 생각했다.
“왜요?”
하루가 물었다. 정말로 궁금했던 건 아니었다. 그냥 말이 튀어나왔다.
“당신이 도울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미래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 몸짓에는 어딘가 단호한 기색이 있어서, 하루는 그게 정말로 제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직감했다.
“그럼 미래씨는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인가요?”
나쁜 의도로 물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마음이 아팠다. 미래가 말 없이 고개를 저었다. 잎새를 보았다. 슬픈 눈이 잠시 하루를 보다가 아래로 향했다. 아니, 그냥 쳐다본 걸지도 모르지만.
하루는 다시 미래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지 알기라도 하고 싶어요.”
미래는 말이 없었다. 그러고는 곧 작게 웃었다.
“윤 잎새. 너 나중에 보자.”
유순한 말씨였지만 뼈가 있었다. 잎새는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괜히 하루가 뜨끔했다.
“별 일 아니에요. 그냥….”
미래는 잎새를 바라보며 말했다.
“모두의 미래에 관한 일이에요.”

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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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이한 만남은 더위에서 시작되었다. 갈수록 종잡을 수 없어지는 이상기후들 속에서 배신하지 않는 명제가 있다면 여름은 뜨겁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전보다 더 뜨겁고 더 길어진 여름 어느날. 하루는 보았다.
눈을 의심한 것은 맨 눈으로 나다니기가 고통스러울 정도로 따가운 햇빛 아래였던 탓도 있었다. 그것은 찰나에 지나지 않는 짧은 순간 보였다가 사라졌다. 눈부심과 혼란 속에서 눈을 질끈 감았다 뜨는 짧고도 긴 시간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몰랐다. 하루는 당황 속에서 두어번 눈을 감았다 떴다.
눈 앞에 선 것은 키가 그리 크지 않은 하루의 시야에 정수리가 훤히 보이는 조그마한 여자아이였다. 여자아이라고 확신한 것은 유난히 작은 덩치와 같은 학교 교복, 그리고 덥수룩하게 보이는 단발머리 탓이었다. 대낮 중 유난히 해가 잘 드는 위치라 여름이면 사람이 거의 찾지 않는 교내 벤치 쪽이었다. 고등학교가 다 그렇듯 시야를 가릴 것도 없으나 건물 배치 탓에 사람이 오가는 길목에서는 약간 외지게 느껴지는 장소였다. 달리 말하자면, 하루도 의도한 건 아니었다.
“어…….”
안녕하세요, 를 입에 담기도 전에 여자아이가 튀어나가듯 자리를 박찼다. 그렇게 서두르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엄청난 속도였다. 체육대회 반대표 정도는 쉽게 할 것 같다. 하루는 눈을 꿈뻑였다. 잠깐 사이 일어난 일에 어안이 벙벙해진 상태였다.
그 애가 사라지고 하루가 무얼 하러 어디로 가다가 그 자리에 섰는지 완전히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쯤 종이 쳤다. 하루는 멍하니 생각했다. 방금 그게 뭐였지.

선생님의 꽁무니를 쫓듯 교실에 다다라 아슬아슬하게 자리에 안착한 하루는 핀잔을 주는 선생님의 말씀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아까 본 광경을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이한 장면이었다. 대체 내가 뭘 본 거지?
그 좁은 자리에 휘몰아치던 바람. 흩날리는 머리칼. 이리저리 흔들리는 옷자락과 바람에 실려 휘도는 이파리, 모래, 자갈들. 그 중심에 서서 바닥에서 한 뼘은 떠올라 있었던, 조그만 여자아이.
꿈 같은 풍경이었다. 벌써 이 년 넘게 다니고 있는 학교에서 낯설다고 느껴지는 풍경을 목격한 게 얼마만인지 몰랐다. 진행 중인 수업이 흘러나갔다. 낯익은 정경에 특별히 눈길을 준 적이 없기는 하지만 오늘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날도 없었다. 언제 수업이 끝났는지 어떻게 친구들과 헤어져 교실을 나왔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루의 눈은 아직도 점심 시간에 보았던 벤치와 휘몰아치는 바람을 보고 있었다.
어느샌가 하루는 우두커니 서있었다. 정확히 아까 그 자리였다. 지나가다보면 곁눈으로 벤치가 흘깃 보이는 구석자리. 정확히 같은 각도로 같은 장소를 바라보았다. 조용했다.
넋을 놓고 선 하루를 지나가던 친구들이 한대씩 툭툭 쳤다. 하루는 건성으로 대꾸했다. 말을 걸어보려는 친구가 두엇 있었으나 하루의 무심한 대응에 금세 멀어졌다. 하루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있었다.
썰물처럼 학교를 빠져나가는 학생들의 물결이 사그라들고 나서야 하루는 움직였다. 천천히 느린 걸음으로 벤치로 다가선 것이다. 정오가 지나고 햇빛이 사그라들자 겨우 사람이 머물만해진 벤치는 아직 열이 오른 채였다. 햇살이 완전히 물러간 것도 아니었다. 하루는 삐질삐질 흘러나온 땀을 한 손으로 훔쳤다.
말을 거는 사람도 지나치는 사람도 사라지자 그제야 제정신이 돌아오는 듯했다. 하루는 생각했다. 잘못 봤겠지. 물론 그럴 리는 없었다.
하루는 마지막으로 여자아이가 서있던 곳, 그러니까 떠있는 소녀의 발이 닿았을 법한 곳에 섰다. 그 아이와 제 키차이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 줄은 모르나 내려다보인 것을 생각하면 그 아이의 눈길이 닿았던 곳이 지금 하루가 보는 곳과 크게 다르진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하루는 나무 앞에 섰다. 바람에 휘감긴 소녀가 바라보던 나무였다.
그건 그냥 나무였다. 특별한 것도 없었고, 눈에 띄는 것도 없었다. 하루는 눈 앞의 나무 줄기를 유심히 뜯어봤으나 그 애가 무얼 보고 있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굵은 가지가 갈라져 있었다. 먼지가 쌓였다. 나무껍질은 울퉁불퉁 거칠게 생겼다. 가끔 까진 자리가 있다. 이파리는 조금 위쪽에 있는 잔가지에 있어서 여기엔 정말 볼 게 없었다. 힘이 쪽 빠졌다.
하루는 콧방귀를 한 번 뀌었다. 흥.
훽 돌아섰다. 그대로 학교를 빠져나갔다.

수험생의 하루는 온종일 실내에서 흘러간다. 책상 앞에 오래 앉아있을수록 대학을 잘 간다는 믿음은 수험생의 일상을 일종의 종교 수행처럼 만든다. 진리를 쫓는 구도자 같은 자세로 줄줄이 앉은 아이들을 잔뜩 실은 채로 수업은 둥실둥실 흘러갔다.
하루는 그날 끝내 공부에 집중하지 못 했다. 그러면서도 수험생의 자격에 대한 의문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머릿속은 점심 시간의 일로 가득하다. 잘못 본 걸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하지 않았다. 그런 착각을 하기엔 그 순간이 너무나 선명했다.
그 애는 대체 누구였을까. 교내에서 같은 교복을 입고 있었으니 같은 학교인 건 분명하고,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같은 학년일 가능성은 적었다. 유난히 조그만 것을 보면 일학년일까. 확신할 수는 없지만 워낙 자그마하니 그럴 것만 같았다. 순간적으로 보였던 얼굴은 선명하지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색소가 엷은 인상이었다는 것만은 기억이 났다. 크게 눈에 띌 정도는 아니지만, 뭔가 느낌이 그랬다.
건널목 앞에 서서 뺨을 간질이는 바람만으로도 그 애 생각이 났다. 바람이 엄청나게 불기는 했지만, 그 애가 떠올랐던 게 정말 바람 탓이었을까? 바람이 사람을 그렇게 안정적으로 띄우는 게 가능한 일일까? 가벼운 몸에 날개를 넓게 펼칠 새들마저도 기류를 타야만 날 수 있는데 바람이 그런 식으로 사람을 공중에 띄울 수는 없지 않을까.
그럼 역시 잘못 본 걸까? 그럴 리는 없었다. 하루가 하루 스물 네시간 안에 가장 정신이 또렷했던 게 그 순간이었다. 잘못 본 거라면 그게 더 이상했다.
하루종일 그 애 생각을 한 탓인가. 옆에 선 사람이 그 애처럼 보였다. 교복은 아니었지만 조그만 몸집이나 부스스한 머리모양이 꼭 닮았다. 그 애면 좋겠다고 하루는 무심히 생각했다.
신호가 초록으로 바뀌고 그 애를 닮은 사람이 앞서 걸었다. 날씬한 등을 지켜보던 하루는 갑자기 어떤 예감에 사로잡혔다. 그대로 발뒤꿈치를 강하게 찼다.
“잠깐만요.”
분명 점심에 본 광경은 평범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벌어지고 있는 일도 평범한 일은 아니다. 인간 은하루는 결코 처음 보는 사람의 팔을 덥썩 잡을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일은 벌어졌고 붙들린 사람이 고개를 돌린 순간, 하루는 어떤 벼락 같은 감각이 온몸을 관통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아마도 환희라고 불릴 감정이었다.
“찾았다!”
하루는 외쳤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온통 이쪽으로 쏠린 건 어쩔 수 없었다. 횡단보도 한 중간에서 멈추어버린 탓에 뒤늦게 신호를 따라 달려야 했음은 물론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엔 중요하지 않았다. 하루의 만면에 웃음꽃이 피었다. 잔뜩 들뜬 목소리로 하루가 말했다.
“너를 찾고 있었어.”
바람이 불었다. 그 애의 단발머리에서 삐져나온 잔머리들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다행히 그 애는 하루의 손을 뿌리치고 달아나지는 않았다. 그저 조그맣게 말했을 뿐이다.
“놔줘.”
거의 동시에 빠앙하고 경적 소리가 울렸기에 하루는 손을 놓기보다는 붙들고 달렸다. 그래도 강한 힘은 아니었다. 빼내려면 얼마든지 빼낼 수 있었지만 그 애는 얌전히 하루를 뒤따라왔다.
길 건너에 이르러 자연스럽게 손이 풀렸다. 대신 하루는 그 애를 마주볼 수 있었다. 그 애는 말이 없었지만 대신 눈을 똑바로 뜨고 하루를 바라보고 있었다. 긴장감이 들 정도로 오롯한 시선이었다.
하루는 말했다.
“난 하루야. 은하루. 점심에 봤지?”
그 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는 벙긋 웃었다. 그 애가 자길 기억하는 게 하염없이 기분 좋았다.
자기 소개도 했겠다, 그 애의 이름도 물으려 했다. 그런데 그때 그 애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어리둥절해 눈만 껌뻑이자 그 애가 여전히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이쪽.”
그리고는 앞서 걷는 것이다. 집에 가야한다는 생각과 어서 따라가야한다는 생각이 동시에 떠올랐다. 하루는 재빨리 걸었다. 그 애의 작은 등을 쫓아서였다.
길을 가며 하루는 몇 번이나 말을 걸었다. 대답은 하나도 듣지 못 했다. 그 애는 하루가 말을 걸 때마다 하루를 바라보았지만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루는 조금 기분이 이상해졌다. 끝까지 따라갔다가 장기라도 팔리는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걸음을 늦출 생각은 들지 않았다.
타박타박 걸어서 도착한 곳은 사람이 별로 없는 한적한 골목이었다. 사람 대신 바람이 소란스러운 곳. 그 곳에 선 아이가 마침내 걸음을 멈추고 하루를 돌아보았다.
“바람, 좋아해?”
그 애가 물었다. 하루는 대답하지 않았다. 생각해본 적 없는 질문이었다. 뭐라고 말해야할지 몰라 대답할 수 없었다.
“얘들은 네가 좋대.”
그 애가 웃었다. 배시시 작게 시작되어 만면 가득 피어나는 웃음이었다. 눈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활짝 웃는 낯으로 그 애가 말했다.
“나도 네가 마음에 들어.”
하루. 은하루. 그 애가 속삭였다. 시끄러운 바람 속에서도 선명하게 들리는 게 이상했다.
“나는 잎새야. 잘 부탁해.”
잎새가 작게 소리내어 웃었다. 그리고는 하루를 향해 날아왔다. 마치 바람에 떠밀리는 듯한 움직임으로.
“잘 부탁해.”
윙윙 바람이 불었다. 귓가가 소란스러웠다.

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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