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그 쿠키 말이지.”
문득 집중이 깨질 때가 있다. 그때가 그런 때였다. 갑자기 귀에 들려온 마들렌맛 쿠키의 목소리에 에스프레소맛 쿠키의 얼굴이 구겨졌다.
“사인 좀 해줬다고 어찌나 매달리던지. 지저분한 손으로 옷을 붙들고 늘어지는 바람에 크게 고생했었어.”
가벼운 한숨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왜 하필 이 길을 택했을까.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짜증을 눈썹에 담아 꾹꾹 눌렀다. 기분 나쁘게도 뺀질거리는 얼굴이 눈 앞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 작은 왕국에 발이 묶인 뒤로 저 망할 쿠키를 너무 자주 본 탓이 틀림없었다. 공화국과 달리 이곳은 인구가 너무 적었다.
물론 마을도 좁았다. 이렇게 지나가다 마주치면 피해갈 길이 별로 없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의 빠른 걸음을 따라 마들렌맛 쿠키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렇게 기분 나쁘진 않았어.”
바로 앞에 있는 골목에서 유쾌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목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지금이라도 발을 돌려 다른 길을 거칠까 고민스러웠다. 하지만 이 길을 포기하면 내 슈가코팅 도넛은? 에스프레소맛 쿠키의 입이 빼족해졌다. 마들렌맛 쿠키가 기분 좋게 껄껄 웃는 소리가 점차 잦아지고 있었다. 누군가 마들렌맛 쿠키에게 물었다. 아니, 그렇게 집요하게 구는데 괜찮았다고?
정확히 그 순간이었다. 건물 사이로 달콤한 설탕크림과 푸른 망토가 나타났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혹여 눈이라도 마주칠라 고개를 틀었다.
“그야 물론이지.”
마들렌맛 쿠키가 말했다.
“가난하고 지저분한 쿠키가 나같이 고귀하고 아름다운 쿠키를 동경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않나.”
무심코 시선이 돌아간 것은 결단코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그 순간 자신의 얼굴이 어땠는지 확신할 수 있었다. 가소로운 것을 보는 듯한, 어리석은 멍청이를 향한 경멸. 실제로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어이가 없어서 무심코 발걸음을 멈추고 만 터였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지금까지 충분히 참아왔다고 생각했다. 공화국에서는 그가 워낙에 영향력이 크니 무시할래도 무시할 수가 없었고, 이 작은 왕국에서도 실은 내색을 했을지언정 협력을 완전히 거부한 적은 없었다. 효율의 문제이기도 했지만, 이 왕국 쿠키들에게 마들렌맛 쿠키와 함께하는 것의 무용함을 설명할 시간과 기력이 아까운 탓이 컸다. 함께 행동할 일 자체가 많지 않아 일일히 따지고 들 필요도 크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은 어쩔 수 없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마들렌맛 쿠키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았다. 웃음기가 사라지고 순식간에 불쾌한 기색이 어렸다.
“할 말이라도 있나?”
툭 던지듯 내뱉는 어조는 평소 마들렌맛 쿠키의 말버릇이 아니다. 심기가 불편한 것을 드러내듯 짜증섞인 음색에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고개를 휙 돌려 시선을 피했다가 비뚠 미소를 머금고 다시 그와 눈을 마주했다.
“그럴 리가요.”
가볍게 던지듯 말하고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사뿐사뿐한 걸음으로 다시 발을 옮겼다. 때로는 백 마디의 말보다 별 것 아닌 행동 하나가 강렬한 법이다. 마들렌맛 쿠키의 얼굴이 팍 구겨졌다.
“겁이라도 먹었나? 비겁하군.”
예전 같았으면 지나쳤을 말이 왜 가슴에 꽂혔는지 몰랐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그 자리에 멈췄고, 건물에 가려 더는 보이지 않는 마들렌맛 쿠키를 노려보았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슈가코팅 도넛을 샀다. 집을 떠나 여행을 하는 동안 식이 조절을 못해서 두꺼워진 몸이 신경쓰이던 터라 최근 식단을 조절하고 있는 중이었지만 이번엔 참을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니 이것도 전부 머리에 잼도 안 들었을 게 분명한 멍청이 쿠키 때문이다. 스트레스성 군살이잖아, 이게 다!
커피를 입에 머금자 진한 향기가 입에서 코로, 코에서 온 몸으로 퍼졌다. 향기가 밀어낸 공기가 긴 한숨이 되어 입술 새로 빠져나갔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엉덩이를 등받이에 깊게 들이밀고 길게 몸을 폈다. 이 맛에 살지. 잠시 기분 좋은 온기를 즐기다가 다시 한 모금을 입에 머금었다. 이번에는 커피향이 입에서 흩어지기 전에 도넛을 입에 문다. 음, 좋아. 좀 더 두꺼워지면 집을 떠나기 전에 맞춰온 새 아이싱 정장이 갈라질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은 잠시 잊기로 했다. 행복은 현재에 집중할 때 생기는 거니까.
아침에 있었던 불쾌한 만남 같은 것은 이 슈가코팅 도넛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렇게 커다란 행복을 만들어낼 수 있는 간식이 있는데 골 빈 무식쟁이들이 어떻게 사는지가 무에 중요하겠는가.
하. 떠올리니 다시 화가 나기는 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가슴 속에서 부풀어오르는 옛 기억들을 내려놓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실패했다.
‘야, 찌질이. 가서 내 가방 좀 가져와라.’
무의식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손에 들고 있던 슈가코팅 도넛이 찌그러졌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그것을 입에 넣고 전투적으로 씹었다. 무식한 놈들하고는 역시 상종을 말아야한다.
분노에 차서 도넛을 씹다보니 어느새 그릇이 비어있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멈칫했다. 이렇게 맛도 모르고 먹으려던 게 아니었는데…. 이것도 전부 망할 쿠키 때문이었다. 헤유. 어쩌겠나. 한숨을 꾹꾹 누르며 그릇을 치우고 새 커피를 끓였다. 순식간에 휴식 시간이 끝나버렸으니 일을 해야지. 아직 보고서도 안 썼고, 왕국 건설 계획에 내놓을 의견서도 작성이 덜 끝났다. 여기에 커피 마법 개선식까지 짜고 있으니 할일이 산더미였다.
“나 왔어~.”
막 에스프레소맛 쿠키가 원고를 펼치던 중, 노크조차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어휴, 커피향 진한 거 봐. 또 에스프레소 마셨구나? 에스프레소도 좋지만 말이지, 가끔은 라떼 어때? 그렇게 커피만 마시다가는 잼이 삭아버릴 거야~.”
듣는 쿠키는 안중에 없다는 듯 혼자서도 말이 많은 쿠키였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고개도 들지 않고 답했다.
“나가십쇼.”
“어머, 오자마자 축객령이야?”
침입자가 까르르 웃었다. 맑은 웃음소리가 에스프레소맛 쿠키의 사무실을 훑고 지나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고집스레 시선을 서류에 고정했다.
“누구씨 때문에 매번 일이 쌓여서 말이죠~. 당신 같이 한가한 쿠키랑 다르게 저는 할 일이 많거든요.”
“얘도 참.”
불청객 라떼맛 쿠키가 재밌다는 듯 깔깔거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어딜 가든 재수없다는 말을 듣는 에스프레소맛 쿠키였지만, 라떼맛 쿠키에게는 도무지 먹히지가 않았다. 오히려 아는 사람이 변함없는 게 반갑다는 듯 더욱 접근해와서 곤란했다. 그가 왕국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맛있는 커피와 고요한 아침을 보낼 수 있었는데 이제 그렇게 조용한 아침은 손에 꼽게 드물어졌다.
“오늘 들었는데 네가 마들렌맛 쿠키랑 같이 왕국에 들어왔다면서?”
라떼맛 쿠키가 의자를 끌어와 에스프레소맛 쿠키의 건너편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잘 구워진 갈색 팔이 책상 위에 괴어지자 아무리 에스프레소맛 쿠키라도 더는 시선을 피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마음으로 욕설을 몇 마디 뱉은 후 고개를 들었다.
“뭡니까.”
“심지어 너랑 마들렌맛 쿠키가 같이 극장을 세우는 일에 협조했다면서?”
“네. 뭐…. 맞게 들으셨군요.”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대놓고 기분 나쁘다는 얼굴을 했다. 물론 라떼맛 쿠키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걸 신경쓰는 쿠키였다면 에스프레소맛 쿠키 옆에 다가올 리도 없었다.
“어머나~.”
아. 예감이 불길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 그동안 많이 부드러워졌구나. 나는 네가 여지껏 잼 한 스푼도 넣을 수 없을만큼 속좁고 깐깐한 줄로만 알았지.”
이 쿠키가 지금 욕을 하는 건가?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생각했다. 짜증나게도 그런 기색은 없었다. 라떼맛 쿠키는 진심으로 감격한 표정이었다. 급기야 손까지 잡혔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털어내듯 라떼맛 쿠키의 손을 떨쳐냈다. 두 쿠키의 손이 맞닿아 미세한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한쪽에 놓아둔 우유를 헝겊에 묻혀 책상을 닦아냈다.
“할 일을 했을 뿐이죠. 그보다 용건은 뭐죠. 바쁩니다.”
“매정하기는.”
라떼맛 쿠키가 입술을 삐죽였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당장 말하고 꺼지지 않으면 쫓아내겠다는 의사를 눈빛으로 쏘아냈다. 결국 라떼맛 쿠키는 입술을 3자로 만들고 말았다.
“이번에 내 제자가 여기로 왔잖아. 알지? 슈크림맛 쿠키라고.”
“본 것 같군요.”
“걔가 정말 유망주인데 커피 마법에도 관심이 많더라고. 우리가 처음에는 같이 연구를 했지만, 내가 라떼 마법으로 빠진 뒤로는 서로 거의 교류를 하지 않았잖아? 그래서 슈크림맛 쿠키의 질문에 대답해줄 수 없는 부분이 있어. 너랑 만나고 싶어하는데 시간 좀 내줘.”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못마땅하게 라떼맛 쿠키를 바라보다가 달력을 꺼냈다. 빽빽하게 적힌 일정표에서 빈 자리를 찾는다.
“이번달은 빈 시간이 없고, 다음달 말….”
“아, 좀~! 너도 쉬어야할 거 아니야. 이게 다 뭐니?”
라떼맛 쿠키가 냅다 달력을 빼앗아갔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픽 웃으며 팔짱을 낀다. 라떼맛 쿠키는 하나하나 일정을 확인하며 경악으로 얼굴을 물들여갔다.
“세상에. 이게 쿠키 사는 꼴이니?”
그러더니,
“당장 나가자!”
라며 에스프레소맛 쿠키를 잡아 끌었다.
“싫습니다. 싫거든요?!”
자칫 끌려나갈 뻔한 에스프레소맛 쿠키였다. 정말이지 방심할 수가 없다니까!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몰랐다. 차라리 라떼맛 쿠키와 나가는 게 나았을 거란 사실을. 미래를 볼 수 있는 눈이 있었으면 망설임 없이 그때 함께 나갔을텐데. 내가 왜 그랬을까!
머리를 부여잡은 에스프레소맛 쿠키를 보고 마들렌맛 쿠키가 말했다.
“뭐하나?”
“알 거 없습니다. 사라져주시죠.”
“하하, 거 농담도 재밌게 하는군!”
마들렌맛 쿠키는 아침에 있었던 일은 안중에도 없는 듯 유쾌해 보였다. 역시 기억을 유지시킬 최소한의 장치가 없는 게 분명했다.
“대체 여긴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사실 에스프레소맛 쿠키라고 마들렌맛 쿠키를 그냥 들여보내준 건 아니다. 막아보려고 했다. 힘으로는 도무지 저 무식한 놈을 이길 수 없었을 뿐이었다. 저놈은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닫히는 문을 당당하게 손에 들고 있던 방패로 밀어내버리고 들어왔다. 왕국이고 뭐고 버리고 떠날까? 소울잼을 찾아서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거야.
“집 구경하러 왔지.”
마들렌맛 쿠키가 씩 웃었다. 불쾌하다.
“제 집은 구경거리가 아닙니다. 나가십쇼.”
“동료끼리 서운하게 하는군 그래!”
그렇게 웃으며 마들렌맛 쿠키가 에스프레소맛 쿠키의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기력이 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이 감각, 낯설지 않다. 학창시절에 지겹도록 겪어본 쿠키상이었다.
“누가 동룝니까. 꺼지쇼.”
“동료지, 그럼. 함께 소울잼을 찾아 돌아가기로 하지 않았나. 안그래도 내 그동안 얼마나 서운했는지 아는가? 길 떠나자마자 ‘이제부터는 따로 행동하기로 하죠.’ 하고 가버리지 않았어. 내가 언제 자네를 서운하게 한 적이라도 있냐 말이야. 우리 임무가 시작되기 전엔 거의 얼굴도 마주한 적 없는 사이였지 않나!”
에스프레소맛 쿠키의 얼굴에 아련한 미소가 번졌다. 말이 안 통하는 쿠키가 한둘은 아니지만 저 놈은 명물이었다. 그날 자기가 떤 진상을 하나도 기억을 못 한단 거지. 할 말이 없으니 그저 웃지요.
“그나저나 참 썰렁하게 해놓고 사는군. 이런 삭막한 집에서 어떻게 잠을 자나?”
“잘만 잡니다.”
“거울 없나? 하긴 이런 배경에서는 내 미모도 멋져보이기 힘들겠어. 이렇게 우중충할 줄이야.”
“당신 얼굴보단 제 집이 훨씬 근사하군요.”
“이건 대체 뭔가? 커피 마법에 쓰는 거라고? 허, 정말 일만 하고 사나보군. 이렇게 살다간 순식간에 상해버릴 걸세.”
“여지껏 그렇게 살아왔지만 아직 안 상하고 멀쩡하군요.”
마들렌맛 쿠키는 파괴신이었다. 지나는 곳마다 그 거대한 방패와 망토로 쓸고다녔다. 그가 가는 자리마다 잘 세워놓은 물건이 떨어져서 나뒹굴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그 뒤를 쫓아 집안을 정리해야했다. 있는대로 집어던져서 쫓아내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이곳은 에스프레소의 집이었다. 살림살이를 던져서 손해보는 건 자기 자신 뿐이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손에 집어든 자명종을 힘주어 쥐며 말했다.
“이제 다 봤으니 나가십쇼.”
“응? 여긴 또 뭔가.”
눈 앞이 아찔했다. 아니, 기분 탓이 아닌가? 에스프레소맛 쿠키의 몸이 기울어졌다.
“에스프레소맛 쿠키!”
마들렌맛 쿠키가 후다닥 달려오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눈앞이 흐려졌다.

다시 깨어났을 때 눈 앞에 보인 것은 마들렌맛 쿠키(끔찍했다)와 용감한 쿠키, 그리고 연금술사맛 쿠키였다.
“에스프레소맛 쿠키가 깨어났어!”
“몸은 좀 어때?”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눈을 두어번 깜빡였다.
“저걸 쫓아내주시면 좋겠군요.”
연금술사맛 쿠키는 에스프레소맛 쿠키의 손짓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끄덕였다.
“그렇대. 나가줘, 마들렌맛 쿠키.”
“왜 나한테만 그러나!”
“환자잖아. 안정이 필요하니까 나가있어.”
연금술사맛 쿠키가 말했다. 동그란 안경이 그렇게 믿음직스러울 수 없다.
“자자, 나가자. 나가자~.”
용감한 쿠키의 명랑한 목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마들렌맛 쿠키가 몇 마디 투덜거렸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나갔으니까.
“또 며칠째 잠을 안 잔거지?”
연금술사맛 쿠키가 물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태연하게 눈만 꿈뻑였다.
“연구도 좋지만 적당히 해. 뒤치다꺼리는 질색이라고.”
연금술사맛 쿠키는 에스프레소맛 쿠키의 어깨를 가볍게 톡톡 두드리고 일어샀다.
아, 그리고.
“마들렌맛 쿠키가 에스프레소맛 쿠키와의 일화를 연극으로 만들었대. 궁금하면 저녁에 나와봐.”
새침한 목소리만 남기고 문이 닫혔다.

언질해두건대 절대로 마들렌맛 쿠키가 구상했다는 연극이 궁금해서 나온 게 아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괜히 옷깃을 바짝 세워 얼굴을 가렸다. 저 멍청이가 내 이야기를 썼다니 대체 무슨 짓을 해놨는지 궁금해서 보러가는 거야. 내 명예가 걸린 일이잖아?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생각했다. 완벽한 이유군.
극장에 다다랐을 때는 이미 연극이 한창이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혹여나 다른 쿠키의 눈에 뜨일까봐 극장 주변을 빙 돌아 뒤쪽으로 다가갔다. 왕국 쿠키의 과반수가 이 자리에 모인 것 같은 인파였다. 마들렌맛 쿠키의 하얀 머리칼이 예상대로 무대 바로 앞에 붙어있었으므로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마음 편히 뒤쪽 빈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쿠키를 빼닮은 인형들이 조그만 무대에서 꼼지락거렸다.
「도와줘, 에스프레소맛 쿠키!」
마들렌맛 쿠키로 보이는 인형이 외쳤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당황했다. 다른 쿠키도 아니고 마들렌맛 쿠키가 내게 저런 말을 한 적이 있던가? 설령 한 적이 있다고 해도 그가 저런 대사를 극장에 올릴 위인이던가?
언제나 푸른 망토를 펄럭이며 걸어다니는 마들렌맛 쿠키는 사실 기사라고 해주기에도 부끄러운 인사였다. 고국에서 그를 볼 때마다 밑에 있는 기사들이 얼마나 불쌍했는지 모른다. 에스프레소맛 쿠키가 제 멋부림 말고는 아무것도 관심이 없는 멍텅구리를 상사로 모셔야하는 입장이었다면 차라리 기사를 그만두고 말았을터였다. 다행히 경험상 대부분의 기사들은 마들렌맛 쿠키와 별 차이 없는 단순무식 멍청이였으니 양쪽 모두 그다지 괴롭지는 않을 것이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로서는 언젠가 함께 싸워야할 전력이라고 생각하면 불안해서 밤잠이 오지 않을 지경이었지만.
에스프레소맛 쿠키를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 짙은 갈색 빛깔 인형이 수풀에 뛰어들었다. 무대가 바뀌고, 홀로 선 마들렌맛 쿠키(인형)가 수십마리의 케이크 들개와 맞서고 있는 모습이 나타났다. (물론 수십마리의 케이크 들개는 한두마리를 제외하곤 배경 그림으로 대체됐다.) 에스프레소맛 쿠키(인형)는 지체없이 마법을 시전했다.
「물러나라. 사악한 마물아!」
음.
에스프레소맛 쿠키의 입가에 빙긋 미소가 걸렸다. 못 보겠다.
되돌아나가려는 에스프레소맛 쿠키의 어깨를 누군가 붙들었다.
“어디가나? 끝까지 봐야지.”
잡힌 순간 깨달았다. 돌아보지 말아야지.
결심은 아무 소용 없었다. 이 무례한 쿠키는 남의 몸에 함부로 손대면 안 된다는 예의를 모르 듯이, 남을 함부로 잡아당기면 안 된다는 상식도 없었다.
“우리의 모험담이잖나. 같이 봐야지. 모두가 만들어준 연극인데.”
“대체 무슨 헛소리를 했기에 저딴 연극이 나왔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를 끌어들이지 말아주시죠.”
완곡하게 돌려 말한 ‘내 얘긴 빼라’였다. 물론 마들렌맛 쿠키는 알아듣지 못 했다. 이 똥멍청이는 에스프레소맛 쿠키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도 몰랐다.
“그냥 우리가 함께 온 길에서 있었던 모험을 말해줬을 뿐이야. 그들이 우리 업적이 영웅에 필적한다 하여 연극으로 상영해준다 했지. 자랑스럽지 않나?”
“여기까지 오는 길에 모험이라고 할만한 일은 없었습니다만.”
“그게 무슨 소린가! 방금 자네도 봤지 않나. 우리가 함께 오십마리의 케이크 들개를 해치운 다음에…….”
더는 듣고 싶지가 않았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탁 소리가 나도록 마들렌맛 쿠키의 손을 쳐냈다.
“돌아가 보겠습니다.”
펄럭. 에스프레소맛 쿠키의 망토가 가볍게 흩날렸다. 마들렌맛 쿠키의 황당한 시선이 등 뒤에 꽂혔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신경쓰지 않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
어째 썰푼 거하고 내용이 소소하게 달라졌는데, 큰 흐름은 같이 갈 겁니다. 혹시나 하고 추가해두자면 에스프레소 왕따 당하거나 삥 뜯긴 거 아니고요. 설령 그랬어도 열배로 갚아줬을 겁니다.

Posted by fad
,

그러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필요에 의한 일이었다. 공화국의 모든 쿠키가 저를 보고 수군거리는 것도, 점잖기로 유명한 총독에게 뜨거운 커피를 맞은 것도 모두.

사건은 시작된 것은 그곳, 바로 신생 바닐라 왕국에서였다.
그들이 전설 속의 보물을 찾아 떠난 길에 만난 그곳은 과거 바닐라 왕국의 발자취를 뒤쫓는 이들이 세운 작은 나라였다. 목적지가 같아 잠시 협력을 구하려던 것이 꽤나 긴 시간을 체류하게 되는 바람에 그들은 그 새로운 왕국의 시작에 상당한 족적을 남기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나라의 핵심 인사들은 갓 오븐에서 탈출해 쿠키대륙의 실정을 전혀 모르는 어리숙한 인사들로 구성되어있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공화국 의회에서 활약하던 젊은 지식인 에스프레소맛 쿠키와 빛의 신을 따르는 공화국의 검 마들렌맛 쿠키의 재주는 지극히 귀한 것이었다.
떠돌이들이 모여 피운 작은 모닥불이 하나의 나라가 되기까지의 역사를 이곳에서 읊는 것은 지나치게 비효율적인 행위이니 생략하도록 하자. 여기서 알아야할 것은 하나 뿐이다. 집정관을 몇 번이고 배출한 것은 물론 현재 총독 자리 마저 거머쥐고 있는 위대한 ____ 가문의 __대 독자 마들렌맛 쿠키가 뛰어난 마법사로 학계에서 인정받고는 있다고 하나 외지에서 들어와 아직도 의회에서 입지를 확보하지 못한 평민 출신 의원 에스프레소맛 쿠키에게 홀딱 반해버리고 말았다는 것. 신생 바닐라 왕국이 땅을 다지고 건물을 세우며 그들만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동안, 에스프레소맛 쿠키와 마들렌맛 쿠키 사이에서도 역사가 흐르고 장대한 드라마가 펼쳐졌음은 물론이다. 그 결과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끝내 자신이 마들렌맛 쿠키의 애정공세에 넘어가버리고 말았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가진 거라곤 실력과 자존심(그리고 외모)뿐인 서민 쿠키로서는 뼈아픈 패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런 도둑고양이 같으니. 외지인 주제에 어딜 순진한 마들렌맛 쿠키를 꼬여내느냐! 의회에서의 열정적인 활동을 보아 그래도 공화국에 해를 끼칠 자는 아니라고 생각했건만!”
같은 소리를, 바로 그 공화국의 총독께서 부스러기를 튀겨가며 열렬하게 외치고 있기 때문이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말끝마다 외지인, 외지인. 우습지도 않다. 그가 시민 자격을 가지고 이 나라에 정착한 게 벌써 __ 년째인데 아직도 외지인 소리를 듣는 게 지겨웠다. 당신 자식을 해친다고 공화국에 해가 되는 건 아니지 않느냐고 빈정거리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으며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커피가 방울방울 맺혀 흘러내리는 코팅을 털어내었다. 동그란 손이 커피에 젖어 짙게 물들었다.
“진정하시지요.”
“진정하라고? 이 놈이 그래도!”
“소리만 지르지 말고 잠시 제 이야기를….”
“에스프레소맛 쿠키 괜찮나!”
하아아.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눈을 감고 긴 한숨을 토해내었다. 끝내 참지 못하고 쳐들어온 마들렌맛 쿠키가 그의 주위를 맴돌며 누군가 딸기를 훔쳐간 케이크 개처럼 안달을 했다.
“왜 평소보다 더 까맣지? 젖기라도 한 건가? 커피를 흘렸나? 하지만 한 모금도 안 마신 것 같은…, 아버지!”
이걸 수습을 해야하나, 말아야하나.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웃었다. 정말. 귀찮다.

정말로 케이크 들개라도 된 양 짖기를 멈추지 않는 마들렌맛 쿠키와 그의 아버지 ____맛 쿠키를 겨우 뜯어말린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조용히 선언했다.
“들어오는 길에 이미 혼인신고는 마쳤습니다. 허락을 받든 받지 않든 저와 마들렌맛 쿠키는 법적 부부란 의미지요.”
“뭐, 뭐라고?”
____맛 쿠키가 휘청거렸다. 평소라면 잽싸게 달려가 부축했을 마들렌맛 쿠키는 잔뜩 삐친 표정으로 외면할 뿐이었다. 다행히 마들렌맛 쿠키 못지 않게 강건한 면이 있는 ____맛 쿠키는 금세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 도둑고양이…!”
“에스프레소맛 쿠키를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
“이…, 이 천둥벌거숭이야!”
버럭 소리를 지른 ____맛 쿠키가 어지러운 듯 이마를 짚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그런 ____맛 쿠키를 보고 빙긋 웃었다. 제가 수도 없이 느낀 답답함을 남이 겪는 걸 보고 있으니 그리 속시원할 수가 없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가 쿠키가 아닌 파이였다면, 진작에 속이 터져 파이의 몰골이 아니었으리라.
“진정하신 것 같으니 이야기를 해도 되겠군요.”
그러니까 그만 좀 싸우라는 말이야. 에스프레소는 메세지를 담아 보기 좋게 웃어보였다. 학회나 의회에서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제 말을 막아서는 쿠키를 향해 내보이곤 하는 미소였다.
“공화국으로 돌아오기 전에 마들렌맛 쿠키가 제게 약속한 것이 있습니다. 한데 그 약조를 들어줄 수 있는 것은 마들렌맛 쿠키가 아니라 총독님, 당신이더군요. 그래서 이리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비록 커피를 맞기는 했지만요.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앙심 같은 건 없다는 듯 활짝 웃었다. 물론 진심으로 그렇게 보이길 바라는 건 아니었다.
“네 녀석 대체 무슨 약속을….”
“별 거 아닙니다. 들어보세요.”
잽싸게 끼어든 마들렌맛 쿠키가 에스프레소맛 쿠키의 말을 가로챘다. 또다, 또. 무례하기 짝이 없는 태도에 진절머리가 났지만 이 쿠키에게 품위를 언급하며 화내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는 걸 진작에 깨달은 바였다. 게다가 어쩌면,
‘저런 면이 사랑스러운지도 모르고.’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왠지 텁텁한 입을 커피로 씻었다. 내가 어쩌다 이러고 있는건지. 한숨이 절로 났다. 총독이 뒤집어씌운 커피가 제 커피잔에 들어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건 이미 커피가 몸속으로 꼼꼼하게 스며든 뒤의 일이었다.
“……니까 결국 에스프레소맛 쿠키에게 후원하면 마법사들을 공화국으로 더 끌어올 수 있을 겁니다. 그건 절대 손해가 아니에요.”
“마법 학회에는 충분히 투자하고 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커피 마법의 1인자입니다. 저는 커피 마법의 위력을 눈으로 확인했어요. 그에게 하는 투자는 곧 이 나라를 위한 투자가 될 겁니다.”
“마법사만으로 군대를 구성할 수는 없어.”
“커피 마법사를 군대에 투입할 수 있다면, 군부대의 규모를 줄일 수 있습니다. 장기적으로 이득을 보는 투자예요.”
“당장 예산을 어디서….”
“ー자, 자. 두 분이 의견을 충분히 나눈 것 같은데 이만 제 이야기도 들어보는 게 어떠신지요.”
동시에 그를 돌아보는 두 쌍의 푸른 눈동자가 꼭 닮아있었다. 가족이라고 해서 쿠키끼리 닮는 것은 아닌데도.
“우선.”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작게 헛기침했다.
“예산을 어디서 끌어올지는 제가 이미 생각해두었습니다.”
총독 ____맛 쿠키가 눈을 부라렸다. 어디 말해보라는 듯 팔짱을 낀다.
“마법학회에 배정된 예산 중에 놀고 있는 예산이 있습니다. 매년 남은 예산을 소비하기 위해 아카데미 정원을 갈아엎으면서도 정작 필요한 학과에는 충분한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비효율의 극치를 달리고 있죠. 제가 원하는 건, 그 남아도는 예산입니다.”
그걸 위해서 아까운 연구 시간과 개인 수련을 포기해야했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높으신 분들에게 그걸 하소연해서 어디에 쓸까. 하물며 마들렌맛 쿠키는 그 긴 이야기를 듣고도 깔끔하게 잊어버린 얼굴인데 말이다.
“대학에 예산 분배를 새로 요청했지만 관습이라는 말로 얼버무리더군요. 그들에게 예산을 요청하는 입장인 제 말로는 설득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총독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겸사겸사 마들렌맛 쿠키의 생활비에서도 연구비를 받아갈 거라는 이야기 역시 하지 않았다. 마들렌맛 쿠키의 개인 사정이니 굳이 그 아버지가 알아야할 필요는 없겠지.
총독은 예산을 추가로 분배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마음이 흔들리는 듯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의회에서 늙다리 의원들을 상대할 때 종종 그리했듯이 속에서 치밀어오르는 비웃음을 부드러운 미소로 대체하곤 대화를 이어나갔다.

수도 안에 마들렌맛 쿠키와 에스프레소맛 쿠키의 혼인이 알려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들의 신고를 받아준 구청 직원의 입에서 시작된 소문은 바로 다음날 지역 신문에 실릴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번져있었다. 두 쿠키의 유명세라면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라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신문을 넘겼다.
“아무렇지 않은가보군.”
건너편에 앉아있던 마들렌맛 쿠키가 말했다. 그의 시선은 신문 1면에 대문짝만하게 난 그들의 결혼 기사에 꽂혀있었다.
“예상한 일입니다. 호들갑 떠는 쪽이 이상하죠.”
“그렇긴 하지만….”
착잡한 표정으로 신문을 응시하던 마들렌맛 쿠키는 제 앞에 놓인 향기로운 꽃차를 한모금 들이켰다. 그리곤 답지 않게 긴 한숨을 내쉰다.
“결국 이렇게 되었어.”
“네. 계획대로군요.”
“식은 이번달 안에 올리도록 준비할거야.”
“그리하시죠.”
마들렌맛 쿠키는 착잡한, 정말이지 그 답지 않은 표정이었다!, 얼굴로 에스프레소맛 쿠키를 바라보다가 다시 말했다.
“너는…, 아무렇지 않은 건가?”
그제서야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신문에서 눈을 떼었다. 붉은 빛을 띈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자 마들렌맛 쿠키는 우물쭈물 눈을 돌렸다.
“뭐가 말입니까?”
“우리가 부부가 되었다는 사실 말이야.”
“동요해야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어차피 계획대로인데 뭐가 그리 문제입니까? 에스프레소맛 쿠키가 눈으로 물었다. 아니…. 마들렌맛 쿠키는 무엇이 그리 불만인지 우물거리다가 입을 다문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다시 신문을 치켜들었다.
“한가하게 그러고 앉아있을거면 나가서 훈련이라도 하시죠.”
그 말에 마들렌맛 쿠키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신문 너머로 보이는 그의 납작한 얼굴이 묘하게 쓸쓸해보인다고 생각했다. 성가셔라.
“마들렌맛 쿠키.”
“응?”
“식은 아직이지만 우리는 부부입니다.”
“그렇지?”
“부부끼리 아침 식사 후 가볍게 산책을 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겠지요. 식을 올리지 않았으니 신성한 화덕에 반죽을 올리는 건 무리겠지만요.”
“……뭐?”
“아침 식사하고 함께 산책을 하도록 하죠. 저도 돌아오자마자 연구실에 틀어박힐 수는 없으니까요.”
할 일도 많고.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그렇게 말하곤 커피로 입가심을 했다. 말을 많이 해서 입이 말랐다.
“다시 말해봐.”
마들렌맛 쿠키가 무서운 얼굴을 하곤 벌떡 일어났다.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지금, 반죽이라고—.”
아.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피식 웃었다. 비웃음인지 그냥 미소인지 애매한 웃음이 입술을 덮었다.
“지금은 부부라고 해도 다들 실감이 나지 않을 겁니다. 아직은 신성한 화덕에 반죽을 올리기 적절한 시기가 아니죠.”
“그 얘긴, 설마, …설마.”
“예, 말씀하시지요.”
“나와 반죽을 만들어주겠다는 건가?”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코웃음쳤다. 그 재수없는 표정에도 마들렌맛 쿠키는 흔들리지 않았다. 하도 많이 봐서 감흥이 떨어진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지금 하는 이야기가 그에게 워낙 중요한 것이어서 그랬다.
“예, 뭐. 당신 집안에 후계자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혼자 만드셔도 상관 없고요. 에스프레소맛 쿠키가 중얼거렸다. 마들렌맛 쿠키가 달려와 덥썩 에스프레소맛 쿠키를 끌어안았다. 악. 작게 비명이 울렸다.
“부스러집니다. 부스러기 떨어지는 거 안 보입니까!”
“미안하네. 미안해! 하하, 하하핫!”
“내려놓으십시오!”
결국 산책을 나갈 수 있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그나마도 에스프레소맛 쿠키의 접근금지령으로 인해 나란히 걸을 수는 없었지만, 마들렌맛 쿠키는 기분이 좋아보였고, 그런 그들의 모습은 소문을 한층 무성하게 만들었다.

식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어차피 사용인들과 마들렌맛 쿠키가 알아서 처리할 일이었기에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마음껏 자기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의회와 아카데미에 복귀 신고를 하고, 연구실을 청소했으며, 그 사이의 보고서를 작성했다. 마들렌맛 쿠키가 제대로 된 보고서를 작성할 리는 없었으니 자신이라도 멀쩡한 보고서를 제출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성실하게 작업했다.
식은 예상보다 빠르게 잡혔다. 이 주 뒤였다. 덕분에 이 주 안에 공화국 총독 자식의 결혼 연회를 준비해야하는 일꾼들만 바빠졌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예복을 맞출 때를 빼고는 식장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마들렌맛 쿠키는 아주 신이 난 것 같았고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결혼식이 마들렌맛 쿠키의 기운을 빼놓는 것이 반가웠다. 결혼식 준비가 시작되면서 만날 때마다 귀찮게 들러붙는 일이 줄어들었던 것이다.
총독과 직접 담판한 보람이 있는지 아카데미에서 그에게 배정하는 예산이 제법 넉넉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앞으로의 연구 계획을 세우며 희희낙낙했다. 총장은 넉넉해진 예산의 대가로 그에게 수업을 더 배치하려고 했으나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터무니없는 수업 계획서로 응대했다. 예산 나올 구석도 생겼는데 아카데미따위 확 그만둬버릴까보다. 그렇게 생각했지만ー, 그의 의회에서의 입지가 아카데미와 학회에 기반하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그래선 안 된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입을 삐죽였다.
그래도 마들렌맛 쿠키와 총독이라는 뒷배가 크기는 했다. 의회에서 그를 보는 시선이 많이 부드러워졌다는 게 느껴졌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쓸모없다고 마들렌맛 쿠키를 비난하지는 않기로 했다. 어쨌든 도움은 되고 있었으니까.
문제는 결혼식이었다. 마들렌맛 쿠키가 화려하고 성대한 연회를 준비했으리라는 것은 예상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에게도 기꺼운 일이었기에 특별히 참견하지 않았다. 마들렌맛 쿠키는 천둥벌거숭이 소리를 들을 정도로 철없는 도련님이었지만, 그의 집안은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이었으니 체면을 구길 걱정은 하지 않았다. 성가신 것은 미래를 위해서라면 견딜 수 있었다. 지긋지긋한 외부인 소리와 떨어질 수 있다면, 더는 학회에서 줄을 잘 타려고 억지 미소를 짓지 않아도 된다면 이까짓 것 못 참을까. 다만 진짜 문제는…,
“에스프레소맛 쿠키, 시간 괜찮은가? 내가 우리의 새 반죽을 구상해봤는데!”
그래. 이 녀석이었다. 정말 도움이 안 되는 쿠키다. 빛의 신이시여. 이 녀석 안 거둬가시고 무엇 하십니까. 아니, 거둬가면 곤란하긴 하지만서도.
“그런 건 식을 올린 이후에 의논하면 안 되겠습니까?”
“하지만, 하지만 이런 것은 정성과 시간이 필요한 일이지 않나!”
“맞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정신없을 때가 아니라 둘 다 차분하게 머리를 맞댈 수 있을 때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그래도는 뭐가 그래돕니까.”
부스러기가 튈 정도로 이를 갈자 그제서야 입을 다무는 마들렌맛 쿠키였다. 기가 죽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겨주고 돌아선다.
“그럼 결혼식을 올린 후에는 상의해주겠지?”
“물론입니다. 그때까진 참으십시오.”
그거면 될 줄 알았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성대한 결혼식이었다. 연회에는 수도의 유력인사가 대부분 참가했고, 거리에까지 음식을 돌렸다. 꽃과 음식을 든 작은 쿠키들이 그들에게 축하를 건냈다. 식을 올리고 춤을 추고 축사를 주고받다보니 하루가 훌쩍 갔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기진맥진해 침대에 늘어졌다. 마시멜로 매트리스가 허공에 던져진 몸을 부드럽게 받쳐주었다.
“지쳤습니다.”
“하하, 나도 그래.”
마들렌맛 쿠키가 말했다. 그는 정말 기분이 좋아보였다. 지쳤다고 말하는 마들렌맛 쿠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기력도 좋다고 생각하며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그에게 등을 돌렸다.
“저는 좀 자겠습니다. 나중에 뵙죠.”
“잠깐!”
“뭡니까.”
마들렌맛 쿠키의 하얀 손이 에스프레소맛 쿠키를 붙들었다. 인상을 찌푸린 에스프레소맛 쿠키에게 마들렌맛 쿠키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직 자면 안 되네!”
“네, 네. 말씀하시지요.”
결국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다시 몸을 바로 눕혀 눈을 감았다. 적당히 대답해주다 자면 되겠지.
“우리 반죽 말일세!”
“네?”
“반죽에 대해 의논해야하네. 오늘 하자고 하지 않았나.”
“제가요? 언제요?”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소리람.
“결혼식 이후에 말하자고 했잖은가.”
그가 당당하게 웃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의 미간이 마구 구겨졌다.
“내일 하시죠.”
다시 돌아누웠다. 다시 막혔다.
“내가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려왔는지 아나. 할 이야기가 잔뜩 있어.”
“전 없습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 너를 닮은 쿠키였으면 좋겠어. 커피를 꼭 넣어야한다고 생각해.”
“내일 합시다.”
“하지만 완전히 자네만 닮아서는 아버지가 노발대발 하실 게 틀림없어. 그러니 어느정도는….”
“아, 내일 하자고요!”
“들어보게!”
“싫습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
“마들렌맛 쿠키!”
밤은 길었다. 결국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그날 한시도 눈을 붙이지 못했다. 연구를 위해 세워둔 수면계획은 완전히 엉망이 됐다.
“아아아악! 당장 떨어지란 말입니다!”
“하지만 들어봐. 이게 제일 중요하단 말이야!”
사용인들은 예감했다. 지금까지의 평화는 그저 폭풍 전의 고요였음을. 갓 탄생한 신혼부부는 정말이지, 사이가 심히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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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설정은 100% 날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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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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