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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11.19 와타에이: 친구

눈부시게 맑은 날이었다. 커다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밝아서 에이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옆에서 재잘거리던 와타루가 그런 에이치를 보고는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왜 그러시나요? 불편한 곳이 있습니까? 이 광대의 재주에 무슨 문제라도?”
“그런 거 아니야.”
에이치는 피식 웃었다. 와타루가 얼굴을 바짝 들이댄 덕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배려해준 걸까. 조금 마음이 따뜻해진다.
텐쇼인 에이치가 갑작스런 발작으로 입원한지도 벌써 사흘째였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병실을 오갔다.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토리와 유즈루, 반 친구들에 홍차부 후배들까지. 작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인선의 방문객들이 오갔고, 우연히 마주친 이들은 서로 얼굴을 찌푸리거나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귀여운 일학년 후배들이 방문한 날에는 발작이 있어서 지쳐있는 상태였는데, 맑고 명랑한 목소리를 들으니 어찌나 기뻤는지 모른다.
“에이치,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까?”
와타루가 말했다. 언제 움직인 건지 에이치에게 햇빛이 드는 자리에 커튼이 쳐져 있었다. 와타루는 에이치의 허벅지에 팔꿈치를 얹고 호기심 많은 소녀마냥 턱을 괴고 있었다. 의뭉스러운 미소를 띈 그에게서는 거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 이것도 무슨 기술이겠지 생각하니 신비롭기 짝이 없었다.
“와타루, 널 생각하고 있었어.”
거짓이 아니었다. 병문안을 온 사람은 많았다. 그러나 첫날부터 꾸준히 에이치의 곁을 지켜준 것은 와타루였다. 그는 면회 금지 명령을 받고 홀로 쓸쓸히 잠든 에이치의 병실에 몰래 숨어들었다. 새벽녘에 눈을 떠서 어찌나 놀랐는지 다시 발작이라도 일어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의사가 알면 기겁하겠지만, 에이치는 솔직히 와타루의 행동이 기뻤다. 모험을 하는 기분이라 두근거리기도 했다.
“호오, 절 말인가요? 어떤 생각인가요?”
와타루는 동화에 나오는 고양이처럼 고개를 다소 무서울 정도의 각도로 꺾었다. 그 모습을 에이치는 그저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와타루의 기예는 끝이 없어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랍기보다는 그저 신비로웠다.
“네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
“황제폐하를 기쁘게 하는 일이야말로 광대의 사명이랍니다. 아프고 힘들때면 외쳐주세요. 히비티 와타루!”
침대 위를 데구르르 굴러 원심력으로 몸을 세우고, 한 발을 곧추세운 채 세 바퀴를 돌아 한 팔을 높이 치켜든 채 아슬아슬한 자세로 선다. 에이치는 와타루의 묘기를 웃으며 감상했다.
“이제 황제가 아니라니까.”
담담하게 덧붙인 말에 와타루가 호들갑을 떤다.
“황제라는 호칭을 싫어하시나요? 이 와타루, 에이치가 황제의 역할을 제법 즐기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한층 흥이 났지요. 역할을 즐기는 배우와 함께하는 무대만큼 즐거운 것은 또 없으니까요.”
옆에 케이토가 있었다면 틀림없이 얼굴을 구겼을 테다. 와타루는 말을 잇는 사이 아무 이유 없이 허공으로 뛰어오르고 빙글빙글 돌며 포즈를 잡았다. 사이사이 놓여있는 기물을 스치지조차 않는 재주가 용했다.
“글쎄.”
에이치는 웃으며 살짝 시선을 내렸다.
“솔직히 말하면 싫지는 않았다고 생각해.”
“추측형이군요?”
“응. 그도 그럴 것이, 나는 황제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니었으니까.”
조용히 답하는 에이치는 평소와 같았다. 망가져버린 과거의 계획을 이야기하는 에이치의 표정은 반 아이들의 소란을 구경하며 웃음짓는 그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와타루는 알고 있지? 내가 뭘 꿈 꾸었던 건지.”
“독심술은 할 줄 모릅니다.”
에이치는 킥킥 웃곤 와타루를 쳐다보았다. 겨울철 하늘처럼 여리고 차가운 시선이 와타루의 흐린 보랏빛 눈을 꿰뚫었다.
“감사하고 있어. 너희들의 협조에. 너희가 순순히 협조해주지 않았다면, 나는 틀림없이 마지막까지 버티지 못했겠지.”
“딱히 협조한 것도 아닙니다만.”
에이치는 다시 웃었다. 그런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미움 받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에이치가 와타루의 목소리를 듣고 가졌던 작은 희망일 뿐이었다.
'쉿. 안 돼요. 그런 걸 말하면. 그랬다간 저는 당신을 경멸해버리고 말겁니다.'
아득한 추억 속 와타루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그래, 그때도 지금하고 비슷했다. 쓰러져서 보건실에 누워있는 에이치를 남몰래 찾아온 와타루는 어김없이 홀로 쇼를 벌였다. 와타루에게 무대가 아닌 곳은 없었기에. 무대라는 이름이 아닌 무대를 그는 훌륭하게 소화했다.
'저는 그저 악역인 걸로 충분한 건가요?'
그가 물었었다. 완전히 소진된 체력에 시한폭탄까지 안고 있던 에이치는 겨우 눈만 뜬 상태였다. 어쩌다 자신이 여기에 누워있는지, 지금 상황은 어떤지 정리해보는 중이었다.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에이치는 다시 쓰러질 것처럼 놀랐고, 와타루는 즐거운 듯 짐짓 못마땅한 척을 했다. 그게 그가 자신에게 부여한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배우를 모른척하시면 곤란합니다. 당신이 준비한 무대가 아닌가요. 스스로 주역이 되기 위해 자신만의 무대를 준비하는 적극성이 훌륭합니다. 솔직히 저는 반했다고요. 그런 당신이 절 홀대하면 서운해서 울다가 죽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서운함을 연기하는 그의 목소리는 진지하면서도 장난스러웠다. 어딘가 이것이 단순한 연극이 아님을 시사하는 듯한 우스꽝스러움이 있었다.
'자자, 이제 역할에 충실해지세요. 어설픈 표정은 감추고 가면을 씁시다. 당신에게는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요?'
황망한 표정을 애써 감추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에이치는 언제나처럼 우아하고 아름답게, 침착하고 냉정하게 질문한다.
'이런 곳까지 무슨 용건일까, 히비키 군. 내일 라이브에 대해 질문이라도 있어?'
'물론입니다. 아아, 몇 번이나 대본을 훑어도 제 역할을 잘 모르겠어서요. 천재라는 소리까지 들어보았지만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이를 어찌해야하나 고심하다가 연출가이자 주연 배우인 당신에게 질문을 하러 왔답니다.
이 히비키 와타루, 어떤 역할이라도 연기해보일 자신은 있습니다만, 나이프에 찔려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악당답게 쓰러져야할지 당신의 품에 안겨 눈물 섞인 키스를 해야할지 모르겠어서요. 혹시라도 잘못된 연기를 했다간 모처럼 큰 무대가 망가져버립니다♪'
'과장이 심하네. 『fine』는 리더가 따로 없지만 나는 특별한 역할이 없는 덤인걸. 나보다는 다른 멤버들에게 묻는 게 어떨까.'
와타루가 오만하게 웃었다. 섬찟할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이 고소를 머금자 창밖에서 들어오는 햇살마저도 날카롭게 벼려졌다. 에이치는 따가운 햇살에 눈살을 찌푸렸다.
'바보취급하지 마시지요. 이런 각본이지만 주연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부족한 배우는 아니랍니다. 당신이 적으로 삼은 상대는 만만하지 않아요, 텐쇼인 에이치 군.'
에이치는 그 순간을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어째서인지는 분간할 수 없었다. 와타루가 소름끼치도록 아름다워서? 아니면 그가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부른 순간이기 때문에? 어느 쪽이건 와타루는 넋을 잃은 에이치를 향해 연민을 보냈다.
'피곤해보이네요. 하긴 병상이니까요. 쓰러졌다지요?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떠들썩한 걸 좋아해서요.'
그 순간부터의 기억은 흐릿했다. 에이치는, 자신은 뭐라고 대답했더라?
'…힘내주세요. 무대를 연출한 당신에게는 누구보다도 먼저 내일을 그릴 기회가 주어질 거라고요. 놓치면 아깝잖아요?'
“에이치, 에이치.”
누군가 어깨를 흔들었다. 보건실 창문을 뒤로 하고 선 2학년 와타루의 그림자에 병실 창문을 등진 3학년 와타루의 그림자가 겹쳤다. 에이치는 지금 자신이 2학년인지 3학년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와타루는 드물게 진지한 얼굴이었다. 에이치는 조금 당황했다. 정말 위험할 때가 아니고서야 와타루는 그런 표정을 하지 않았다. 어째서? 방금 자신은….
아.
에이치는 웃었다. 자신은 아직 입원 중이었다. 와타루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괜찮아. 조금 피곤한 것뿐이야.”
“에이치.”
“와타루는 은근히 걱정이 많다니까.”
왠지 웃음이 나왔다. 지나간 추억이 떠오르자 왠지 그렇게 되었다. 와타루의 눈빛이 일순 흐려졌다.





와타루는 눈을 가늘게 떴다. 눈꺼풀 사이로 다소 흐리게 비치는 에이치의 색이 옅었다. 창백하기 짝이 없는 낯이 가슴에 박히는 듯하다.
히비키 와타루는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가진 바 재주가 탁월해 무엇이든 해낼 수 있었다. 얻고자 하면 얻을 수 없는 것이 없었고, 이루고자 하면 이룰 수 없는 것이 없었다. 주변에는 늘 사람이 따랐다. 대부분 와타루의 요란한 성질을 오래 버티지 못하고 떠나갔지만 그것이 그리 슬프지는 않았다. 와타루에게도 그런 이들은 필요가 없었던 탓이다. 그래서 와타루는 만나는 모든 이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전부 보였다. 그건 시험이었다. 이걸 전부 보고서도 내 곁에 있겠느냐는 메세지였다.
와타루의 메세지는 강렬해서 못 알아듣는 사람이 드물었다. 언제부터인가 와타루의 곁에는 사람이 없었다. 멀리서 동경의 눈빛을 보내는 팬은 수없이 많았으나 스쳐가는 인연일 뿐이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바란 바였다.
와타루에게 처음으로 벗이 생긴 것은 작년의 일이다. 그것은 의도치 않은 사고 같은 것이었다. 사고를 일으킨 것은 바로 눈 앞의 이 소년이다.
텐쇼인 에이치.
꿈이 크고 희망을 품지 않는 소년. 천진난만한 얼굴로 누구보다 잔인한 계획을 꾸미는 야심가. 그는 누구보다 원대한 미래를 그렸고,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꿈의 계단을 올랐다. 비록 그 끝에서 그가 무엇을 얻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와타루.'
에이치가 웃었다.
'와타루.'
에이치는 울었고,
'와타루….'
에이치는 절망했다.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악에 받친 사투도 감동의 순간도 보았다. 에이치가 와타루를 적으로 세운 그 순간부터, 와타루는 줄곧 에이치와 함께였다.
그렇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텐쇼인 에이치의 마음 속에는 커다란 벽이 있었다.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바꾸고자 하는 여린 소년의 마음 속에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다. 와타루는 그것을 알기에 에이치와 함께하기로 결심했다. 그건 정말이지 쉬운 결정이었다.

역시 작년의 일이다. 신입생이 들어오고 새학기가 시작되기 조금 전, 오기인 토벌이 끝나고 모든 것이 소강 상태였던 그 시기에, 와타루는 에이치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대단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심심했다. 친구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학교는 학생회가 제도를 개편한다고 바쁜 것 외에는 조용했다. 학생회는 아직 가라앉지 않는 분란과 다툼을 사정을 묻지 않고 잡아들였다. 학생회장이 된 에이치는 와타루와의 경연 이후 모습을 보이지 않았지만, 부학생회장인 케이토는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학교에 나와 학생회를 움직였다. 분위기는 날이 갈수록 삼엄하고 고요해졌다.
와타루는 연극부실에 들어앉아 그 모든 변화를 흘려보냈다. 알 바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와타루의 길은 연극이었고 업계에서 러브콜을 받고 있는 입장에서 교내 제도에 연연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신경쓰이는 것은 있었다.
'그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요.'
처음엔 그저 사소한 의문이었다. 와타루가 만나본 텐쇼인 에이치는 흥을 탈 줄 아는 사람이었다. 와타루의 요청에 화를 내지 않고 박자를 맞춰준 것만 봐도 그랬다. 비록 실패하기는 했지만 에이치의 계획에는 낭만이 가득했다. 그랬기에 와타루는 그가 기획한 무대에 서기로 마음 먹었던 것이다. 좀 더 멋지고 재밌는 미래를 보고 싶었다. 지금처럼 삭막하고 숨 막히는 학교가 아니라 즐길거리가 많고 흥겹게 뛰어놀 수 있는 미래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고보니 『fine』멤버 두 사람이 전학을 갔다고 했던가요.'
어쩌면 그래서일지도 몰랐다. 마지막 경연에서 보았던 에이치의 유닛은 무너지기 직전의 성이었다. 그때 그 분위기가 반영되어버린걸까. 그런 거라면 실망인데. 파랑새 군의 협조를 얻을 수 있도록 도왔어야 했는지도 몰랐다. 친구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 조금 심술을 부린 것뿐이었는데 이런 결과가 될줄 알았다면 끼어들지는 않았을지도?
'뭐, 재미있긴 했으니까요.'
와타루는 홀로 남은 연극부실 소파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늘상 귀찮게 굴던 호쿠토가 없어서 한가했다. 쫓아내려고 해도 쫓아지지 않는 소년을 와타루는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었다. 연기는 못하지만, 어쩌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지 모른다. 와타루도 호쿠토도 연극과가 아니고 이곳은 그저 동아리일 뿐이니까.
'예상치 못한 사고만큼 즐거운 것도 없으니까요.'
와타루는 뺀질뺀질하게 말하고는 히죽 웃었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에이치가 왜 학교를 이런 식으로 방치해두는지 궁금하다면 물어보면 된다. 와타루는 폴짝 뛰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이치는 입원 중에도 이따금 남몰래 학교에 나타난다. 부잣집 도련님의 취미생활인지 갑갑한 병원 생활의 작은 활력소인지는 모르지만 그랬다. 그리고 남몰래 연습실을 빌리는 것이다. 와타루는 에이치가 주로 사용하는 연습실이 어딘지 알았다.
발걸음도 가볍게 와타루는 그곳으로 향했다. 에이치가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가보고 없으면 내일 또 가면 될 일이었다. 지금 와타루는 심심했고, 그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 가는 길에 다른 재밌는 일이라도 발견하면 더 좋다.
기웃.
학생회실을 슬쩍 훔쳐보고,
기웃,
에이치의 교실도 한 번 훔쳐보았다. 에이치는 없었다. 와타루는 실망하지 않았다. 어차피 두군데 모두 들르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린아이처럼 폴짝거리며 뛰어가는 와타루를 지나가는 학생들이 괴이한 것을 보는 듯이 보았다. 와타루는 그저 설렐 뿐이었다. 에이치가 있을까. 있다면 어떤 상태일까. 이번엔 어떤 이야기를 나눌까. 어떤 역할을 주면 즐거워할까. 오기인 친구들도 잘 맞춰주지 않는 와타루의 장난을 받아준 에이치였다. 설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연습실에는 사용중 팻말이 걸려 있었다. 심장이 쿵쾅쿵쾅 소리를 냈다. 와타루는 소리없이 문을 열었다. 살짝 안을 들여다보고 만약 에이치가 있으면 깜짝 놀래켜줄 생각이었다. 다른 사람이면? 우선 보고 생각하자.
문 틈으로 먼저 머리카락이 들어가고 그 다음으로 하얀 손가락이 모습을 드러냈다. 『fine』의 곡이 들려왔다. 와타루는 안을 들여다보기 전에 먼저 음악을 즐겼다. 아, 에이치의 목소리다. 키득키득 웃고는 마침내 고개를 들이밀었다.
어라?
연습복을 입은 에이치가 연습실 한가운데 서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우두커니. 넋을 잃은 듯한 표정이 거울에 비쳤다. 와타루는 조용히 연습실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와타루가 거기 서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이치는 반응이 없었다. 그는 멍하니 서서 거울을 보다가 쓸쓸하게 웃었다. 노래를 하려는 듯 입을 벌렸다가 다물고, 다시 입을 벌렸다 다물기를 몇 번. 곧 그는 포기한 듯이 고개를 돌린다.
'반갑습니다, 텐쇼인 군.'
와타루는 양 손을 흔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한층 에이치의 초췌한 얼굴이 잘 보였다. 푸른 눈이 시꺼멓게 죽어있었다. 시체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낯빛이 그가 왜 학생회에 얼굴을 비추지 않았는지 설명해주었다.
'히비키 군…?'
에이치가 중얼거렸다. 질문이라기보단 혼잣말이었다. 뒤늦게 그의 눈이 커다래졌다. 와타루는 개의치 않고 성큼성큼 에이치에게 다가갔다.
'이야. 아프다고 들었는데도 연습하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하기사 『fine』는 이제 학교를 대표하는 유닛이니까요.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요.'
'『fine』는 이제 없어.'
에이치가 속삭이듯 말했다. 와타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해산이야. 오기인은 쓰러졌고, 새로운 규칙이 들어서기 시작했는걸. 학생회는 케이토가 맡아주었으니 케이토의 유닛인 홍월이 학교를 이끌어줄거야.'
'그게 무슨 말인가요. 당신은요? 쓰러질 정도로 힘내지 않았습니까. 무대의 주역은 하스미 군이 아니라 당신이었을텐데요. 주인공이 되고 싶었던 게 아니었습니까?'
'놀리지 마. 전부 실패한 걸 봤잖아.'
에이치는 쓰게 웃고 와타루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한쪽에 놓인 물통을 들어 목을 적시더니 와타루에게 내밀었다.
'마실래?'
'괜찮습니다. 그보다 실패라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나는 실패했어. 히비키 군. 감히 너희들 같이 위대한 천재들을 깎아내리려 했던 벌이겠지. 나는 이제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에이치는 그제서야 다시 와타루를 보았다. 맑은 겨울날의 하늘 같던 눈동자에 물기가 어렸다. 와타루는 순간 말을 잊는다.
'미안해. 너희들에게 악몽을 선사한 건 나야. 마음껏 원망하도록 해.'
생각지도 못한 사과였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와타루로서는 거의 겪어본 적이 없는 감정이었다. 정말, 정말 이상한 일이지만,
'그게 답니까?'
와타루는 화가 났다.
'그게 다야. 미안해. 지금은 너희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하지만 사람들 눈에 띄지만 않는다면 무엇이든 줄게. 돈이 제일 좋겠지? 계좌를 불러주겠어? 마음에 찰지는 모르겠지만 원하는 만큼 보상을 할테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와타루는 제가 뭘 하는 건지 몰랐다. 저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다. 에이치의 멱살을 잡고 벽으로 밀어붙였다. 환자에게,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사람에게 할 행동이 아니었다. 에이치가 신음하는데도 마음이 가라앉기는 커녕 열이 올랐다.
'내가, 우리가 고작 그까짓 보상을 받으려고 당신에게 승복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진심으로? 당신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까?'
'히비키….'
'입 다무세요. 그 입으로 제 이름을 부르지 말란 말입니다.'
와타루가 윽박질렀다. 에이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와타루는 한동안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에이치를 벽에 누르고 서있었다. 너무 화가 나니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할 말이 너무 많은데, 무슨 말을 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평정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와타루는 힘겹게, 정말로 힘겹게 에이치를 놓아주었다.
에이치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와타루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이건 연극이 아니었다. 와타루는 피에로가 아니었고, 에이치는 배우도 연출자도 아니었다. 그곳은 무대가 아니라 현실의 한복판이었다. 와타루는 고등학교에 입학해 처음으로 역할이 아닌 자신으로 섰다.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왔습니다.'
'뭔데?'
와타루의 질문에 에이치가 고개를 들었다. 저번 대화가 떠올랐는지 조금은 여유가 돌아온 듯한 모습이었다.
'어째서 학생회가 수행하는 일에 참여하지 않습니까?'
'그건….'
에이치는 복잡한 낯으로 눈을 감았다.
'미안해. 그것말고는 할 말이 없어.'
'사과하지 마세요. 당신은 사과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에이치는 힘겹게 심호흡을 했다. 다시 눈을 떠 와타루를 바라보는 눈에는 조금쯤 냉정이 돌아와있었다.
'몸이 아파서 참여할 수가 없었어. 나는 아직 입원 상태야. 가끔 외출하는 정도는 문제가 없지만 본격적으로 활동하기엔 무리가 있어. 사실은 외출도 허락을 받을 수 없어서 몰래 나왔으니까.'
'죽으려고 작정한 겁니까?'
'그럴 리 없잖아. 몸이 녹스는 느낌에 좀이 쑤셨을 뿐이야.'
'당신….'
아프다는 변명에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텐쇼인 에이치가 병약하다는 사실은 초반부터 소문이 나있었다. 그저 화가 났다.
'이렇게 쓰러져 있을 거면 대체 왜 사건을 일으킨 겁니까.'
물을 생각은 없었다. 아픈 사람에게 왜 아프냐고 묻는 것만큼 의미가 없는 질문이었다. 그래서 에이치가 아픈 표정을 지었을 때는 함께 마음이 아팠다.
'판단 미스야. 내게 조금 더 체력이 있을 줄 알았거든.'
애써 웃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대사가 틀렸습니다.'
와타루가 말했다.
'체력 같은 건 진작에 계산하고 있었을 겁니다. 처음부터 그것을 고려하지 않았을 리가 없어요. 전교생이 당신이 병약하다는 걸 아는데, 그 정도로 패널티가 큰 문제를 당신이 고려하지 않았을 리가요.'
'그래?'
'당신이 계산하지 못한 건, 당신의 체력이 아니라 우리, 오기인의 능력이겠지요. 틀립니까?'
와타루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광기 어린 삐에로는 어린아이를 겁주는 게 제 일이라는 듯 섬뜩하다.
'슈가 그렇게 쓰러진 건 우리에게도 예상 밖의 일이었습니다.'
'뭐?'
'슈는 오만하고 자존심이 강하지요. 그렇기에 우리는 줄곧 경고했습니다. 그에게. 당신을 주의히라고. 고집부리지 말고 대책을 세우라고요.
그가 귀 기울여 듣지 않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굳이 막을 필요는 느끼지 못 했지요. 당신도 알다시피 우리는 처음부터 그리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이어지지 않았을 인연이 오기인이라는 이름 하에 잠시 맺어졌을 뿐이니까요.
우리 다섯을 하나로 묶고자 노력한 것은 슈였습니다. 우리는 그의 노력에 의해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소중하기 여겼지만, 동시에 알지 못했습니다. 어찌 알겠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하는 친구가 아니었는걸요.
슈가 그렇게 무너졌을 때 우리는 당황했습니다. 저도, 레이도, 카나타도 마찬가지입니다. 슈는 오만한만큼 강인해보였기에 우리는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괜찮으리라 여겼습니다. 우리가 걱정한 것은 오히려 나츠메 군이었지요. 그는 어리고, 아직 불쾌한 꼴을 당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몰랐던 겁니다. 슈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요.
내 친구들과 있었던 다른 라이브 대결을 기억할 겁니다. 슈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당신에게 패배한 것에 아파하지 않았습니다. 못마땅해 했을지는 몰라도요. 저와 제 친구들이 아파한 것은 당신에게 패배하고 오명을 뒤집어쓴 탓이 아닙니다.'
그간 쌓인 것들을 쏟아내듯이 한참을 떠들었다. 와타루의 눈에도 울분의 증거가 남아있었다. 에이치가 그것을 홀린듯이 바라보았다. 와타루는 그 시선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넘겼다.
'우리가 슬퍼한 이유는 친구를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었다. 그들은 오만했기에 그토록 어리석었다. 겨우겨우 얻은 친구 하나를 지키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었다. 다른 형들이라도 살려보겠다며 애쓰는 막냇동생의 손발을 묶어또 한 번 상처입힐만큼 어리석었다. 그것이 그들에게 상처라는 것을 알면서도 행할 수 밖에 없을만큼 어리석었다.
와타루도, 레이도, 카나타도 그랬다. 그들은 제각각의 방식으로 뛰어났으나 제각각의 방식으로 어리석었다.
레이는 자신의 손길을 필요로 한다는 말이 명분임을 알면서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라도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러느라 제 주변 사람을 챙기지 못했다. 심할 때는 자신의 몸조차 챙기지 못할 때가 많았다.
카나타는 사람의 마음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무엇이든 이루어낼 힘이 있어도 무엇을 해야하는지 모르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카나타는 모두를 사랑했지만,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와타루는.
와타루는 이를 악물었다. 자신의 죄가 이리도 깊었다.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갚을 수 없을 뿐이다. 그것을 에이치가 모르는 게 화가 났다. 말도 안 되는 분노임을 알면서도 화가 났다.
'저는 슈를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누가 어떻게 되더라도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여겼지요. 그저 지금 이 순간 웃고 있으면 충분하다고 여겼습니다. 마음 속 깊은 곳에 무엇이 있어도 상관이 없었어요. 슈는 제 앞에서 웃고 있었고, 저는 그걸로 만족했습니다. 어리석었어요. 슈가 어떤 사람인지, 어째서 그토록 열광적으로 활동하는지 좀 더 관심을 가지고 보았어야 했습니다.'
에이치는 무심코 손을 뻗는다. 와타루의 보랏빛 눈동자에서 물웅덩이가 차올라 넘치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뺨에 손을 대었다가 불에 댄 듯 놀라 떨어진다.
'당신은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습니다.'
와타루는 중얼거렸다. 와타루는 그게 에이치에게 하는 말인지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몰랐다.

“슬슬 검진 시간이야.”
에이치가 말했다. 그 말에 와타루도 시계를 쳐다보았다. 곧 의사가 들이닥치면 면허가 금지된 시간에 외부인이 드나들었다는 것을 들키게 된다. 그건 와타루에게도 에이치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었다. 경비가 삼엄해져서 들어올 수 없어지면 곤란했다.
“제가 어서 가기를 바라는 겁니까?”
와타루가 휴대폰을 만지며 말했다. 전혀 불만이 없는 듯 그저 장난스러운 목소리였다. 에이치가 피식 웃었다.
“내일도 올거지?”
“물론이죠. 주인의 곁에 있는 것이 광대의 의무랍니다.”
“넉살은.”
와타루는 흘긋 눈을 들어 에이치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에이치가 왜 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와타루는 그저 웃으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몰래 오는 상황에 열기구를 병원 근처에 대어놓을 수는 없어서 조금 먼 곳에 둔 상태였다. 때맞춰 불러오려면 연락을 해야했다. 슬쩍 창밖을 보니 멀리서 익숙한 실루엣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에이치, 아기씨(姫君)가 들떠있던데 무슨 이야기를 했던 겁니까?”
“별 거 아니야.”
“숨겨야하는 건가요?”
“『fine』일정을 조금 알려줬어. 그랬더니 금세 들떠서는 꺄꺄 소리를 지르지 뭐야.”
에이치가 즐거운 듯 웃었다. 와타루의 미소가 얼핏 굳었다.
“순회 공연 이야기였나보네요. 어쩐지 제게는 비밀이라고 큰소리를 치더라니요.”
“그랬어?”
에이치가 키득거렸다. 와타루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창틀에 가볍게 기대었다. 기구가 가까이 날아오고 있었다.
“에이치.”
“응.”
“무리하면 안 됩니다.”
“걱정 마. 그래서 이렇게 얌전히 누워있는 거잖아.”
“쓰러졌던 사람이 그렇게 말씀하셔도 말이죠.”
와타루는 어깨를 으쓱였다. 에이치는 듣지 못한 것처럼 웃고만 있다.
“내일 봐.”
창밖을 본 에이치가 먼저 인사를 했다.
“안녕히.”
와타루는 언제나 그렇듯 우아하게 인사를 했다.
가벼운 몸이 훌쩍 창밖을 날았다. 뚝 떨어지는가 싶더니 창밖을 지나던 열기구가 출렁거렸다. 에이치는 후다닥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달려갔다. 기구에 연결된 밧줄을 잡은 와타루가 묘기하는 듯한 포즈로 에이치에게 인사를 건냈다. 에이치의 얼굴에 활짝 웃음꽃이 피었다.
“내일 꼭 와야해!”
바람에 색이 옅은 머리칼이 살랑살랑 흔들린다. 와타루의 사랑을 담은 인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바람이 서늘하고 햇살이 따뜻한 날이었다. 에이치는 입이 아플만큼 웃었다. 행복한 웃음이었다.

 

 

 


아! 몰라 수정 안해! 🌱

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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