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in my world/in Ferenel Campus'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16.02.15 H.H.
  2. 2015.02.01 LOVE ROSE: 분홍 장미와 봄 4
  3. 2015.01.12 LOVE ROSE: 분홍 장미와 봄 3
  4. 2014.12.28 LOVE ROSE: 분홍 장미와 봄 2
  5. 2014.12.13 LOVE ROSE: 분홍장미와 봄 2 (역사 강의 수정 전 버전)
  6. 2014.12.06 LOVE ROSE: 분홍 장미와 봄 1

 태양 빛이 사그라드는 오후였다. 침대는 커다란 창문 건너편에 놓여있다. 너머로는 아마 빛 테라스와 초록으로 물든 이파리 위에 울긋불긋 수 놓인 꽃들이 보인다. 멀리 펼쳐진 성벽 위로 부쩍 가까워진 태양이 차츰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는 직각삼각형에서 빗변을 제외한 두 변의 비율이 삼 대 사일 경우 빗변의 값은 오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괄호 열고. 사실 자신의 업적인지 제자들의 업적인지, 아니면 선대의 지식인지 불명확하다.”

 “베이유.”

 낭랑한 목소리를 끊고 소년이 말했다. 베이유는 고개를 든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 걸까.”

 베이유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소년은 눈을 똑바로 뜨고 베이유를 바라본다. 베이유는 소년이 당황스러운 질문을 던질 때면 언제나 그렇듯 어색하게 웃는다. 소년은 베이유가 당황할 때면 언제나 그렇듯 참을성 있게 기다린다. 갑자기 방안에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소년은 계절이 바뀌면 열한 살이 된다. 곧은 등과 넓은 어깨는 열세 살은 족히 되어 보였다. 또랑또랑 커다란 눈에 우뚝한 코, 굳게 닫힌 입술은 서너 살 더 먹은 형들보다도 어른스럽다. 헐렁한 셔츠 사이로 드러난 앙상한 팔뚝만 아니라면 근사한 청년으로 자라나리라 기대가 되는 얼굴이다.

 소년은 하얀 피부에 볼이 붉었다. 좋은 것을 먹고 좋은 옷을 입으니 포동포동 살이 올라야 하건만 젖살이 남은 뺨을 빼고는 살이 없다. 덩치가 크고 또래보다 어른스럽기는 하지만 가여울 만큼 볼품이 없었다.

 분명 또래보다 커다란데도 어딘가 작아 보이는 것은 소년의 형 탓이다. 생일이 같은 소년의 형, 하시르라는 이름을 가진 동갑내기 소년은 똑같이 열 살인데도 벌써 열다섯은 먹은 양 키가 크다. 어깨는 떡 벌어지고 아버지를 닮아 매서운 눈에 검술에 재능을 보여 기사들과 함께 훈련했다. 겨울나무처럼 마른 소년과 달리 팔다리에는 힘이 있어서 엔간한 어른은 팔씨름으로도 이기지 못한다. 쾌활하면서도 점잖은 성격은 아버지를 쏙 빼닮아 차기 영주 자격이 충분하다고 하며, 어린아이답지 않은 남성적인 모습이 근사하다며 하녀들은 성마른 입방아를 찧었다.

 남들보다 큰 키에 큰 골격을 타고났어도 하시르 곁에 서면 소용이 없다. 단둘 밖에 없는 형제와 함께 서면 소년은 언제나 조그만 동생이었다. 잘 웃는 형과 비교해 어두운 아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사교적인 형과 달리 친구도 없었다.

 소년은 거기에 불평하지는 않았다. 곧 죽을 거라는 시중인들의 뒷얘기도 말없이 들어넘겼다. 상냥한 백작 부인 앞에서는 어머니와 어울려주는 착한 아들이었고, 호방한 백작 앞에서는 귀여운 막내 노릇을 했다. 형이 밖에서 돌아와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떠들면 줄곧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도 쳤다. 유모는 몸은 약해도 말썽부리지 않는 작은 도련님을 끔찍이 아꼈다.

 소년은 서재를 좋아했지만 먼지가 많아 오래 있지는 못했다. 대신 책을 빌려와 오늘처럼 글을 읽을 줄 아는 하인에게 낭독을 부탁했다. 처음에는 몇 번이나 사람이 바뀌었지만 베이유에게 낭독을 시킨 후로는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베이유는 신중하게 대답했다.

 “빵입지요.”

 소년의 반듯한 이마가 대번에 구겨졌다.

 “먹어야 살지 않겠습니까. 빵이 없어서 당장 굶어죽는 사람이 거리에 나가면 수두룩합니다.”

 소년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깊이 생각에 잠길 때면 나오는 버릇이었다. 베이유는 글씨를 짚으며 어디까지 읽었는지 찾아냈다.

 “계속해.”

 소년이 말했다. 베이유는 다시 큰 소리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자신의 업적인지 제자들의 업적인지, 아니면 선대의 지식인지 불명확하다. 괄호 닫고. 현대의 공식으로 표현하면 삼십이 더하기 사십이는 오십이이다. 피타고라스학파는….”

 “빵만 있으면 사람은 살 수 있을까?”

 소년이 말했다. 베이유는 다시 책을 내려놓았다.

 “빵만으로는 안 되죠. 집도 있고 옷도 있어야 됩니다.”

 베이유는 대답했다. 소년은 입꼬리를 당겨 입술을 한일자로 만들었다가 흠, 하고 불편한 신음소리를 내며 눈을 돌렸다.

 “왜 그러십니까?”

 베이유가 물었다.

 “아냐. 아무것도.”

 소년은 대답했다.

 유리창을 넘어온 노을이 방안을 붉게 물들였다. 소년의 빨간 눈동자는 창 너머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소년의 마른 가슴이 작게 부풀었다 내려앉았다. 베이유는 다시 책을 들었다.

 “피타고라스학파는 이 대발견을 기념해 황소 한 마리, 괄호 열고, 일백 마리라고도 함, 괄호 닫고, 를 신의 제단에 바쳤다고 한다. 그러나 기쁨은 잠깐이었다. 만일 빗변을 제외한 두 변의 비율이….”

 태양은 성벽에 반쯤 걸쳐 있었다. 소년은 둥그런 선을 눈으로 따라 그렸다. 베이유는 막힘없이 책을 읽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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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 ROSE: 분홍 장미와 봄 2

2014. 12. 28.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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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꽃잎이 불어오는 아이펠리안, 페레넬섬에 사랑이 꽃피는 계절이 시작되고 있었다.

 

바람이 분다. 햇살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검을 따라 붉은 바람이 분다. 휘돌고, 내리치고, 빠르게 달려 올랐다가 꿈꾸는 구름처럼 둥실둥실 가라앉았다. 후우웅. 포근한 공기를 가르며 명월(鳴月)이 기분 좋게 울었다. 검은 바람결을 더듬는 꽃잎처럼 살랑거리다가도 순식간에 얼굴을 바꿔 먹이를 낚아채는 맹금처럼, 수면을 달리는 물수제비처럼 재빠르게 달렸다. 끊어질 듯 이어지고, 흘러가다가 꺾어지는 화려한 궤적은 수없는 변신에도 불구하고 망설임이나 흐트러짐이 보이지 않는다. 오랜 세월 수행한 무인의 손에서 펼쳐지는 잡음 없이 청아한 검결. 엄격한 수련 속에 자신마저 잊고 검과 하나가 되어 추는 춤은 아름다웠다. 구경꾼이 없는 것이 안타까울 만큼 아름다웠다.

하나 소녀는 몰랐다. 저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꽃이 만발한 공터에서 소녀가 쥔 검과 함께 붉은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절도 있는 춤사위에 날카로운 은빛과 수줍은 붉음이 앞뒤로 오가며 슬근슬근 박자를 맞췄다. 은빛이 날아들면 붉음이 달아나고 붉음이 마중하면 은빛이 물러난다. 바람을 따라 다정하게 서로 다른 두 색이 노닐었다. 포근한 공기 위에 펼쳐진 끝없는 술래잡기. 소녀는 그 자체로 한 쌍의 연인이었다.

영원이 이어질 것만 같던 술래잡기는 승자도 없이 끝이 났다. 몰아치던 태풍은 산들바람이 되어 풀밭 위에 사뿐히 내려앉는다. 소녀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벼락처럼 박수 소리가 떨어졌다. 소녀는 놀라 돌아서며 저도 모르게 검을 치켜세웠다.

훌륭해, 멜리앙. 오늘도 정말 아름다워.”

소녀, 멜리앙은 겨우 긴장을 풀었다. 멜리앙의 뒤에 서 있던 사람은 날붙이가 자신을 향하는 것도 개의치 않고 감격한 표정으로 손바닥이 터져라 박수를 쳤다. 멜리앙은 난처하게 웃었지만 그녀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감동이야.”

거의 울먹이는 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수줍게 붉어진 소녀의 뺨처럼 수줍고 길가에 핀 장미처럼 사랑스러운 멜리앙의 분홍빛 곱슬머리와는 대조적으로 맑은 날 하늘처럼 파란 머리칼을 뺨 근처에서 짧게 자른 소녀는 새치름하니 삐친 눈에 어울리지 않게 눈물을 매달고 두 손을 모아 멜리앙의 손을 마주잡았다. 멜리앙은 익숙한 듯 미소 지었다.

고마워.”

소녀의 이름은 타우레아. 오년 지기 친구인 그녀는 쉽게 감동하는 아이였다. 몇 년째 같은 방에서 지내며 매일 훈련하는 모습을 마주하면서도 일주일에 한번은 멜리앙이 혼자 연습하는 모습을 훔쳐보고는 감격해 눈물을 보이곤 했다.

멜리앙은 못 따라가겠어. 수업 없는 날에도 연습을 지각하는 법이 없잖아.”

멜리앙은 볼멘소리로 대꾸했다.

네가 나보다 빨리 일어나잖아.”

맹랑한 친구는 그런 말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숲에서는 일찍 일어나지 않으면 아침이 없는걸.”

타우레아는 여전히 물기 어린 눈을 하고서는 시침을 뚝 떼며 웃었다. 멜리앙은 입술을 쭉 내민다. 또래보다 두어 살은 어려 보이는 작고 앳된 얼굴이 부루퉁해졌다. 타우레아는 심통이 난 멜리앙의 얼굴을 보고 까르륵 소리 높여 웃었다.

배고파.”

멜리앙이 투덜거렸다. 타우레아는 느슨한 목소리로 그래그래, 하고 대꾸했다.

네리프는 기온의 변화가 큰 곳이 드물다. 나르비크는 춥고, 텔도르 위쪽 숲은 뜨겁다. 페레넬섬이 속한 해양 왕국은 쥬나이 대륙과 테네일 대륙 사이의 바다에 위치한 작은 군도로 기온이 온화했다. 바다에서 날아오는 변덕스러운 바람이 아니면 일 년 내내 소풍을 다녀도 좋을 만한 날씨였다. 그렇다고 날씨 변화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때에 따라 불어오는 바람이 다른 만큼 미세하지만 페레넬섬에도 계절은 있었다.

그 중에서도 새로운 해가 시작되는 아이펠리안은 페레넬섬의 젊은이들에게 특별한 때였다. 이곳저곳에서 꽃이 만발하는 시기. 사방이 화사한 빛깔로 물들고 달콤한 향기가 감돌기 시작하면 심장이 고동을 더하고 어느 샌가 사랑이 꽃처럼 피어나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짝이 없는 이들은 인연을 찾아 광장으로 나오고, 연인들은 손을 잡고 구석으로 숨어드는 때. 이 시기만 되면 북관에는 손님이 늘었다.

아침 안 먹었어?

멜리앙이 물었다.

두 소녀는 멜리앙이 검을 휘두르던 수련장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주저앉아 있었다. 나무들 사이에 적당히 풀이 깔린 공터는 두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곳이다. 길과 떨어져 있어 사람이 드물고 소담한 작은 꽃나무가 많아서 철마다 다른 꽃을 볼 수 있는 장소였다. 지금도 공기가 달콤할 만큼 꽃이 피어 눈에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 붉은 꽃이 가득하다. 학원에서 관리하는 수련장과 달리 흙바닥에 비라도 오면 사용할 수 없었지만 둘은 늘 이곳에서 무기를 주고받았다. 북관에는 이곳처럼 학생들이 직접 터를 닦은 수련장이 많아서 조금만 외진 곳으로 길을 걸으면 기합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같이 먹으려고 왔지.”

타우레아는 야무지게 대답하며 멜리앙에게 물병을 건넸다. 멜리앙은 가방에서 수건을 꺼내 목덜미를 닦다가 고개를 저었다. 타우레아는 뚜껑을 열어 멜리앙 손에 쥐어 주고 제가 물을 마셨다.

조는?”

어떻게 됐게?”

타우레아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벌써 확인하고 왔어?”

멜리앙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타우레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조 발표 날에 눈뜨자마자 수련장으로 달려오는 건 멜리앙뿐일걸. 한 해를 좌우하는 중요한 발표를 앞두고 무기를 잡아도 제대로 휘두를 수 있을 리 없잖아.”

멜리앙은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궁금해?”

궁금해.”

타우레아는 까르륵 웃더니 일어나서 엉덩이를 털었다.

밥 먹으러 가자.”

수련장을 빠져나오는 길은 나무들 사이로 난 오솔길이다. 어깨를 마주 대고 걷기에는 좁고 불편한 길. 멜리앙이 앞서고 타우레아가 따라갔다. 얼굴도 보이지 않지만 익숙한 길을 편안하게 걸으며 경쾌하게 재잘거린다.

잠깐만 서 봐.”

타우레아가 멜리앙을 붙들었다.

?”

멜리앙이 발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한 발짝 가까워진 사이. 타우레아는 손을 뻗어 분홍색 솜사탕 같은 멜리앙의 머리칼에서 뭔가를 집어냈다. . 방긋 웃는 얼굴로 손을 내민다. 친구의 손에는 진홍색 꽃이 들려 있었다.

머리에 붙어 있었어.”

어쩌다 떨어졌는지 줄기도 없이 머리만 남은 꽃송이를 손바닥에 올리고 타우레아는 재미있어 했다. 다시 달아 줄까? 멜리앙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오솔길을 걷는다. 아까까지 하던 이야기와는 상관없이 화제는 금세 바뀌어 타우레아는 꽃 애기가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멜리앙의 머리 위에 앉은 꽃이 자연스러워 머리핀인 줄 알았다거나 줄기도 꽃받침도 없는 꽃이 온전한 모양을 하고 있는 게 신기하다는 둥 조잘거렸다. 멜리앙은 그런가 하며 적당히 대답한다.

신년이구나.”

타우레아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멜리앙은 과연 그렇다고 생각했다.

눈이 닿는 자리마다 꽃송이가 피어나는 계절이었다, 새해가 시작되는 달, 아이펠리안이 시작되면 페레넬섬은 섬 전체가 커다란 화원처럼 꽃으로 가득해졌다. 그중에서도 타우레아와 멜리앙이 소속된 북관은 유독 붉은 꽃이 많다.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견딜 수 있는 개체가 붉은 것뿐이라던가, 과거 능력자 해방 전쟁 당시 격렬했던 전투의 여파로 일대가 붉게 물들었다거나 낭설이 많지만 가장 인기가 많은 전설은 사랑의 계절에 어울리는 연인의 이야기다.

한창 전쟁으로 어수선하던 시절, 아직 제대로 된 제도가 없어 페레넬의 이름으로 한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지식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공부하던 시기에 한 마도사가 사랑에 빠졌다. 그가 반한 여인은 뛰어난 무인으로 정결한 모습에 휘두르는 검은 피처럼 붉었다고 한다. 마도사는 사랑을 고백했으나 그녀는 전장에서 죽고 말았다. 마도사는 사랑하는 사람이 영원히 잊히지 않기를 기원하며 그녀가 살던 곳에 그녀가 좋아하던 붉은 꽃을 가득 심었다고 한다.

당시 무인들이 모여 살던 곳은 페레넬이 안정된 후 무인들을 가르치는 파이터 클래스를 위한 교사가 되었다. 그곳이 막 신년이 되어 붉은 꽃이 흐드러지면 사랑관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학원 페레넬의 북관이다.

전설대로 아이펠리안이 시작된 지금, 북관은 온통 붉은 물결이었다. 수련장도, 북관 본 건물도, 사방에 가득한 나무들 사이며 조금 떨어져 있는 상점가와 주택가까지도 그랬다. 그 모습이 아름다워 이 시기면 외부에서 찾아오는 손님들도 경치를 보러 북관을 찾아오고 가족이나 연인들이 소풍을 나서기도 했다. 고백을 하기 위해 굳이 강의실이 없는 타 클래스의 학생이 찾아오는 경우도 드물지만 있었다.

어디에도 붉은 꽃이 가득해 안개가 낀 날 장미꽃 같은 곱슬머리를 한 멜리앙이 움직이는 꽃만 같다. 그렇게 생각한 타우레아는 손에 들고 있던 꽃을 다시 멜리앙의 머리 한쪽에 살포시 올려 주었다.

 

북관에서 중앙관으로 향하는 길은 사방 탐스러운 꽃들이 차츰 줄어들어 풍경이 시드는 것처럼 보였다. 북관 이곳저곳에 퍼져 있는 울퉁불퉁하고 좁은 오솔길과 달리 판판하게 닦인 넓은 돌길 좌우로 펼쳐진 자연은 단정하게 정리된 모양이었다. 꽃도 나무도 제멋대로 흐드러지던 북관 부지와 달리 정성스러운 손길을 받은 정원수가 규칙적으로 늘어섰다. 멀리 보이는 중앙관의 탑을 배경으로 아름답게 꾸며진 길가는 학생과 자연이 작은 생태계를 이룬 북관의 풍경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태양은 벌써 하늘 높은 곳까지 올라 땅을 데우고 나뭇잎 사이로 떨어진 햇살은 땅을 알록달록하게 물들였다. 평소라면 벌써 오가는 사람이 적지 않게 눈에 띌 시간이지만 갓 새해맞이 휴일이 시작된 오늘, 중앙관으로 향하는 도로를 이용하는 건 타우레아와 멜리앙뿐이었다. 넓은 길 위에서 한층 조그맣게 보이는 소녀들은 어쩐지 아침보다 기운이 없었다.

다시는 저기 가지 말자.”

타우레아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해쓱했다. 비위가 뒤집힌 얼굴을 한 멜리앙이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잠시 후에 멜리앙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마도사들은 매일 그런 음식을 먹는 걸까.”

타우레아가 오한이 든 것처럼 부르르 떨었다.

너무 불쌍해. 그거 쥐고기…….”

그만!”

멜리앙이 빽 소리를 질렀다. 흐느적거리며 걷던 타우레아가 깜짝 놀라 멜리앙을 쳐다보았다.

생각하고 싶지 않아.”

멜리앙이 볼멘소리로 말했다. 울먹이는 것도 같은 소리에 타우레아도 축 쳐졌다.

나도 그래.”

멜리앙과 타우레아는 다음부터는 아무리 궁금해도 마도사가 하는 식당에는 가지 말자고 다짐하며 터덜터덜 중앙관을 향해 걸었다. 도전에는 실패가 따르는 법이이지만 사춘기 여자아이가 아침 식사에 실패한다는 건 제법 잔혹한 일이다. 여자아이란 맛있는 음식에서 활력을 찾기 마련이니까.

멜리앙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갓난아기처럼 통통한 뺨이 동그랗게 부풀었다가 홀쭉해졌다.

배고파.”

막 운동을 끝내고 나와서 아침 식사를 반도 비우지 못했으니 배가 고프지 않을 수 없었다. 타우레아도 아랫배를 문지르며 걷다가 갑자기 환한 얼굴로 멜리앙을 돌아보았다.

가는 길에 메리 골드에 들르자.”

멜리앙도 얼굴이 활짝 폈다.

열었을까? 오늘부터 신년 연휴인데.”

가 보자. 닫았으면 다른데 가면 되지.”

.”

길 너머 저 멀리 보이는 중앙관으로 소녀들은 발걸음을 바쁘게 놀렸다.

새로운 별의 도시, 에린지움(Erynsium). 중앙관이라는 호칭 그대로 그곳에는 학원 페레넬의 본관이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본관이 있어서 중앙관이라고 불리는 것은 아니다. 에린지움은 학원 본관을 위해 형성된 도시였다.

안에서는 알아보기 힘들지만 항구에서 시작해 본관까지, 제법 떨어진 두 장소를 잇는 것처럼 길게 건물이 늘어서 있었다. 상주인구는 북관의 세 배에 달하고, 항구와 각 관의 학생들이 오가는 것을 합하면 유동 인구도 그에 못지않게 많았다. 부지 대부분이 흙길인 북관과는 다르게 항구에서부터 반듯하게 도로가 깔려 화단을 제외하고는 흙을 디딜 일이 없었고, 흐드러진 꽃과 나무를 대신해 희고 반들거리는 암석으로 꾸며져 있었다. 건물이며 도로며 할 것 없이 섬세한 세공이 되어 있었고, 일부는 투명한 푸른 돌을 씌워 그 위에 학원 엠블럼이며 상징이 들어간 문양을 새겨 놓았다. 거기에 마법을 걸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은은한 금빛으로 반짝였다.

소녀들이 중앙관에 도착한 것은 점심이 되어 가는 늦은 아침이었다. 조 발표는 매년 새해가 시작되는 첫날 아침에 학원 본관 앞에 게시된다. 타우레아가 미리 확인하고 아침 훈련 중인 멜리앙에게 돌아갈 수 있을 만큼 이른 시간에 걸리는 것이 일반적이며 정확히 이십오일 동안 유지되었다. 일 년 성적에 영향을 미치는 큰 발표인 만큼 연휴 동안 가족을 보러 섬을 떠나는 학생이라도 내용을 확인하고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북관을 나설 때와 달리 광장으로 통하는 큰길에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멜리앙과 타우레아는 언제 처져 있었냐는 모양 발랄하게 걷다가 사람들 사이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잠시 얘기를 하는 듯하더니 건물 사이로 빠져나간다. 비스듬하게 큰길에서 멀어지는 골목을 따라 걷다가 다시 한 번 오른쪽으로 꺾었다.

길이 넓게 펼쳐졌다. 다시 큰길로 나온 소녀들의 걸음은 날아가는 모양새였다. 곧이어 도착한 곳에는 조그만 카페가 있었다.

‘Marsh Marigold’

화려한 거리와는 달리 간소한 가게였다. 장식 없는 검은 문 위에 음각된 하얀 글씨가 간판의 전부였다. 외벽은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하얗고, 창틀은 문과 같이 검었다. 어린 소녀들이 가게 문을 열며 환호성을 지르는 것이 어색하게 보일 만큼 깔끔하기만 하다. 내부에도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한 액자 몇 점과 화분을 제외하고는 접수를 위한 바, 탁자와 의자가 전부였다. 그나마도 곡선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딱딱한 것들뿐이다.

어서 오세요.”

환한 얼굴로 들어선 멜리앙과 타우레아를 맞이한 것은 소녀들보다는 나이가 있어 보이는 아가씨였다. 붉은 기가 도는 긴 잿빛 머리카락을 높게 묶고 단정한 차림으로 바지런히 움직이다가 두 사람을 돌아보고 생긋 웃었다.

안녕하세요.”

새해에도 잘 부탁드려요.”

두 사람도 웃는 얼굴로 인사했다. 멜리앙이 자리를 잡고 메뉴를 고르는 사이 타우레아는 붙임성 좋게 바 옆에 붙어 점원 아가씨에게 말을 건넸다.

연휴 동안 가게 계속 여는 거예요?”

. 저는 내일부터 없을 테지만 다른 분이 가게를 봐주실 거예요.”

집에 가시는가 봐요.”

빠지면 안 되는 행사가 있거든요.”

사람 좋은 얼굴로 웃는 점원을 향해 타우레아가 한껏 아쉬운 기색을 드러냈다.

미기가 있는 게 제일 좋은데. 그럼 당분간은 이노씨가 나오는 거예요?”

아뇨. 마감이라서 다른 분께 부탁했어요.”

멜리앙은 새삼 타우레아를 돌아보았다. 멜리앙도 사교성이 떨어지는 건 아니었지만 타우레아에게는 감탄하곤 했다. 바로 지금 같은 순간이었다. 반 년째 매쉬 메리골드를 들르며 매번 얼굴을 보는 점원이었지만 멜리앙은 이름을 물어볼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타우레아는 알고 있는 것이다. 타우레아가 점원에게 이름을 묻는 것도 들은 기억이 없다. 대신해서 나올 사람 이름까지 알고 있는 걸 보면 어지간히 친해진 모양이다.

주문할게요.”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머뭇거리며 다가온 멜리앙을 타우레아가 앞으로 떠밀었다. 그새 주문은 마쳤는지 하고 오라며 손을 흔들고 자리로 돌아간다. 그 모습을 보고 점원이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뭘 드릴까요?”

자몽 샐러드랑 블루베리 프렌치토스트 주세요.”

주문 받았습니다.”

멜리앙은 앞에 있던 펜이 자동으로 주문을 받아 적는 걸 신기하게 내려다보았다.

작년 이맘때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자동서기 펜은 처음에는 학생들 사이에서 퍼졌다가 이제는 가게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물건이 되었다. 이런 가게에서 쓰는 것은 자동으로 가격까지 계산 해주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했다. 소문대로 주문을 다 받아 적은 펜은 한쪽에 멜리앙이 내야 하는 금액까지 적고 나서야 탁자 위로 떨어졌다. 마법이 걸린 생활 용품의 일부는 졸업생들이 자급자족해서 만든다고 들었지만 대부분은 학생들이 용돈을 벌기 위해 판매하는 것들이다. 멜리앙은 매지션 클래스 학생들이 이걸로 얼마나 벌었을지 궁금해졌다. 한창 유행할 때는 이걸 개발한 사람이 한몫 잡았다는 얘기까지도 들렸지만 멜리앙과 타우레아는 뜬소문이라고 생각했다. 페레넬섬 안에서만 팔아서는 큰 수익을 올리기는 힘들다는 이유였다.

자리에 가서 기다리셔도 돼요.”

정신을 차린 멜리앙은 저도 모르게 죄송합니다,’를 외치고 빨개진 얼굴로 돌아섰다. 타우레아가 소리 내어 웃었다.

잠시 기다리자 메뉴가 나왔다. 멜리앙의 샐러드와 토스트는 신선한 과일이 들어가 상큼한 향이 났고 타우레아가 주문한 휘핑과 시럽이 잔뜩 들어간 커피와 케이크는 언제나처럼 훌륭했다. 배를 주린 여자아이들은 한참을 말도 없이 포크만 휘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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