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소녀가 있다. 하염없이 걷고 또 걷는다. 어디로 가는지도 얼마나 걸어야하는지도 모른 체 그저 걷는다. 경쾌한 발걸음에 맞춰 치맛자락이 나풀거린다. 새하얀 나비처럼 나풀거린다. 나풀나풀. 나풀나풀.
소녀는 해맑게 웃으며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앞에 펼쳐진 길이 돌아가는 시선에 따라 어지러히 흔들린다. 흐르는 바람, 쏟아지는 햇빛, 멀리서 들려오는 새들의 노래. 그 모든 것이 소녀의 주의를 잡아끈다. 소녀는 아무런 고민도 없는 사람처럼 그저 행복하기만 하고 풍경은 정처없이 방랑하기를 계속한다.
소녀는 무심코 멈춰선다. 무언가 주의를 잡아끌었다고 하기엔 평온한 곳이었다. 방금 전과 별 다름 없이 새가 울고, 해가 빛났다. 소녀는 우두커니 서서 하늘을 바라본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빛바랜 푸른 빛이다. 어느샌가 바람은 사라지고 빈 자리를 어디선가 흘러든 생명의 고동이 채운다.
소녀는 주저앉는다. 아무것도 없는 흙바닥. 아니, 어쩌면 방금 개미가 걸어가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장소. 그대로 드러눕는다. 하늘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새카만 머리칼이 바닥에 흩어진다. 깜빡. 깜빡. 눈을 두어번 감았다 뜬다.
갑자기 나타난 비행기 한 대가 하늘을 반으로 가른다. 장난감처럼 자그만한 그것을 손을 뻗어 잡아본다. 말아쥔 주먹 안에서 그것은 참 쉽게도 빠져나간다.
허망한 손짓은 아쉬움의 불꽃 속에서 서서히 사그라든다. 소녀는 다시 하늘을 본다. 칙칙한 색도화지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속삭임과 식어가는 몸이 시간을 알린다.
더는 견딜 수 없을 때까지 누워있던 소녀는 마침내 벌떡 일어선다. 눈 앞에 펼쳐진 것은 끝 없는 길. 소녀는 끝내 제가 갈 곳을 잃었음을 알았다. 다시 한 번 하늘을 본다. 여전히 하늘은 답이 없다. 소녀는 한참을 그렇게 서있다가 천천히 걸음을 뗀다.
다시 끝을 알 수 없는 여정이 시작된다. 걷고 또 걷다보면 언젠가는 멈추게 될까. 소녀는 이제 행복하지 않다. 가슴에 품고 있던 빛과 함께 마음 속에 흐르던 노래도 사라졌다. 작은 발은 리듬을 잃고 하늘거리던 스커트는 어느샌가 움직임이 편한 바지로 바뀌었다. 언제 그렇게 변했는지도 모르게 소녀는 변해있었다.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변화가 소녀를 또다시 바꾼다.
생기를 잃은 얼굴엔 우울한 심연이 드리웠다. 팔다리를 잡아당기는 무게가 소녀를 진중하게 했다. 소녀는 어느샌가 여인이 되어 어두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하늘은 더이상 보지 않는다. 바람도 더는 느끼지 않는다. 주저앉는 일도 없다. 무엇을 위해 걷기 시작했는지, 어디에 가려고 했는지 잊은 눈은 더이상 목적지를 찾아 흔들리지 않는다. 그저 걷는 것만이 자신의 일이라는 듯 착실하게 걷고, 내일을 준비한다.
어느샌가 주변을 둘러보면 비슷한 동료가 늘었다. 때로는 이야기를 나누고 드물게 웃거나 우는 일도 생겼다. 함께 길을 걷는 이들에게 먹을 것을 건네고 잠자리를 함께한다. 흙바닥에 드러눕는 일은 사라졌다. 엉덩이는 따스하고 밥이 맛있었다.
요즈음의 일상은 퍽이나 유쾌하다. 힘든 일도 아픈 일도 줄어들었다. 추위는 가시고 갑작스러운 사고에 놀라는 일도 줄어들었다. 여인은 이것이 자신이 바랐던 것인가 한다. 드디어 ‘삶’을 배웠노라고 웃음짓는다.
그렇게 걷는 것이 익숙해졌을 때였다. 여인, 바람에 흔들리는 잎새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돌아섰다. 잊었던 노래가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홀린 듯이 돌아본 그녀가 웃음 짓는다.
‘안녕?’
상냥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넨다. 노래가 소리 높여 손을 흔든다. 잎새는 그것이 꽤나 유쾌하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다시 친구들에게로 돌아간다. 팔랑대는 노랫가락이 한때 그녀가 둘렀던 치맛자락처럼 하늘거린다. 그녀는 웃고 울고 조잘대다가 때로 화를 냈다. 걸리적거리는 감각이 낯설었다. 그러다가 문득 깨닫는다. 지나간 시간의 어느 부분에서 그것은 자신의 몸과 같았다.
깨닫고 나니 정말로 낯선 것은 현재의 자신이다. 잎새는 잠시 혼란에 빠진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지? 어디로 가고 있었지?
그러나 그녀는 잊고 있다. 처음부터 목적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최초의 한걸음. 그것은 그저 즐거움이었다.
혼란에 빠진 여인은 다시 소녀가 되어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혼란은 지독히 낯설었다.
잠깐의 혼란이 더 큰 혼란을 부르고 소녀는 이번엔 걷는 법을 잊어버렸다. 지극히 자연스럽게 해왔던 것이 자연스럽지 않았다. 소녀는 주저앉는다. 곧 목놓아 울고 싶어졌다.
오랜만에 다시 하늘을 본다. 하늘은 여전히 창백한 푸른 빛을 띄고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하다. 그 사실에 어쩐지 마음이 놓였다. 소녀는 지나간 시간 속 어느 때처럼 벌거벗은 흙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곧 드러눕는다. 새카만 머리칼이 바닥에 흩어진다.
제일 먼저 들리는 것은 바람 소리다. 귓가를 스치는 고요한 바람이 고막을 간질이고 지나간다. 소녀는 바람을 대신해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연이어 들려오는 것은 장난기 넘치는 옛 노래의 멜로디다. 소녀는 노래와 함께 흥얼거린다. 나풀나풀 나부끼는 노랫가락에 가슴 속을 간질거렸다. 소녀는 제채기한다. 커다란 탄성이 목에서 터져나왔다.
놀란 새들이 조잘거리기를 멈췄다. 소녀는 파하핫 웃음을 터뜨렸다. 한 번 터진 웃음이 멈추지 않아서 한참이나 깔깔거린다. 갑자기 소녀는 행복해진다.
소녀는 한참을 누워있다가 벌떡 일어난다. 이번에는 걸음을 떼는 것이 두렵지 않다. 소녀는 아무런 걱정이 없는 사람처럼 해맑게 웃었다. 발걸음이 경쾌하다.
소녀가 흥얼거리자 옛 노랫가락이 함께 흥얼거렸다. 노래는 어우러져 화음이 되고 소녀는 즐거이 웃는다. 어디로 갈까? 이번엔 어디로 가볼까?
소녀는 더이상 걷는 것이 두렵지 않다. 목적지가 없어도 괜찮아. 어디로든 가볼까. 노랫말이 속삭이고 소녀는 웃었다. 좋아. 어디로든!
발길이 향하는대로 소녀는 걷는다. 새로운 길을 친구 삼아 담소를 나누고 노랫가락과 춤을 춘다. 바람이 소녀의 여정을 기록하고 풀꽃이 소녀를 환영했다.
발이 닿는 곳이 집이고 등이 닿는 곳이 침대인 삶을 살아왔다. 그것은 소녀이자 여인인 자그마한 잎새의 여행. 돌아갈 곳은 있을까? 어쩌면 필요없는지도 모른다.
소녀는 목청을 다해 야호 소리질렀다. 먼 산이 야호 답해온다. 소녀는 실컷 웃고 다음 길에 올라탄다. 이 길은 어디까지 이어져 있을까.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며 소녀는 걷고 또 걷는다.
한 소녀가 있었다. 시간이 흘러 여인이 된 그녀는 옛 연인을 찾아 길을 떠났다. 하염없이 이어지는 여행길이 언제까지 계속될지도 모르는 채로 그저 걷고 또 걸었다. 그녀는 즐거웠을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려면 어떠랴. 푸른 잎은 가지를 떠나 낙엽이 되고 낙엽은 썩어 땅이 되는 법. 길이 어디까지 이어지든 자연스러운 순리대로 그녀는 걷는다. 그것이 삶이라는 이름의 생명.
길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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