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야야, 뭐하는 짓이야, 비켜.

으르릉, 해보았지만 지나치게 서로에게 익숙한 파트너는 그런 지아의 반항을 완전히 무시하곤 빠르게 옷을 걷어 올렸다. 방심한 사이에 어느 샌가 긴 머리카락을 잡아매고 있던 끈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공들여 관리해온 머리카락이 사락사락 사방으로 흩어졌다. 자연스럽게 머리카락을 손에 감고 키스를 해오는 바람에 거부할 틈도 없이 입술이 맞닿았다. 고개를 흔들며 밀어내어도 막무가내로 몸을 붙여왔다.

이자식이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애인 있다며, 잣샤!!!!

비명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수법이 뻔하다. 입을 여는 순간 혀가 밀고 들어올 것이 당연했다. 힘으로 밀쳐내야 하건만 오랜만에 다른 사람의 손길을 접한 몸은 흐믈흐믈해져선 힘을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안되는데, 안되는데. 알고는 있었지만 생각은 이미 뒷수습을 어떻게 하나, 까지 가있다. 적당히 욕구를 풀어줬어야 하는 건데, 하고 후회해보아도 이미 늦었다. 집요하게 지아의 예민한 부분을 공략하는 손길에 반쯤 눈이 풀릴 지경이었다. 그대로 끝까지 가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래도 안 돼, 라고 마지막으로 이성의 끈을 당겨 손을 들었다. 더듬더듬 올라간 손끝에 털 뭉치같이 보들보들한 감촉이 닿자 망설임 없이 잡아당겼다.

“윽.”
“정신이 드냐, 인마.”

헉헉, 작게 숨을 몰아쉬는 지아의 얼굴을 화아는 마치 처음 본다는 듯이 말가니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이 녀석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지아는 숨도 고를 겸 한숨을 포옥 내쉬고는 발로 화아를 걷어내고 일어났다. 화장실에 가야한다. 이대로는 내가 덮치고 말거야. 혼자 고개를 휘휘 저으며 한걸음 옮기는데 다시 허리를 잡혔다. 퀭한 눈으로 생각에 잠긴 듯 앞만을 응시하던 화아가 매달리듯 붙어있었다. 부쩍 말라서 안쓰러운 형상의 화아가 그러고 있으니 전처럼 밟아주고 외면할 수가 없는 지아였다.

“야, 놔봐.”
“화장실 좀 가자.”
“야.”
“어이.”

대답한마디 없다. 이걸 어쩌나. 머리를 토닥토닥 쓸어주며 떨어져라, 라고 속으로 주문을 외워도 그대로다. 이걸 어쩌나. 오늘의 화아는 뭔가 평소와 달랐다. 물론 이렇게 병든 닭 몰골을 하고 있는 것부터가 평소와는 많이 달랐지만 그것과는 관계없이 뭔가 지아가 함부로 할 수 없게 만드는 부분이 있었다. 대체 뭐지.
머릿속으로는 이것저것 고민을 해보면서 일단 화아를 달고 침대에 가서 앉았다. 질질 끌려오는 폼이 영락없이 떼쓰는 어린애. 방에 들어오자마자 덤벼들어서 떨어지지 않는 꼴을 보아하니 이 녀석도 욕구불만인가 싶다. 곤란한데.

“야.”
“기분 좋게 해줄 테니까 좀 놔봐.”

어떻게? 라고 묻는 얼굴로 곁눈질 한다. 아아―, 그래서 이상했구먼. 언제나 질린다 싶을 정도로 똑바로 눈을 마주쳐오던 화아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지아의 눈을 보지 않았다. 얼핏 스치지 조차 않았다. 아니, 그전에 얼굴이나 똑바로 봤던가? 지아는 잠시 눈을 크게 뜨고 화아를 바라보다가 이내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어떤 심정의 변화가 있으면 이런 본능적인 행동이 바뀔까. 화아는 지아의 표정이 변하자 땅만 쳐다보고 있었다. 일단은 이 녀석 기분을 풀어주는 게 먼저겠지. 후, 하는 숨과 함께 생각을 날려버리고 팔을 잡아당겼다.

“일어나, 이 녀석아.”
“왜.”

고집 피우는 중에는 단 한마디도 대꾸하지 않는 화아지만 어째서인지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지아의 얼굴은 바라보지 않는다. 지아는 조금 생각을 바꿔보았다. 혹시 나한테 뭔가 잘못한 게 있나? 안타깝게도 이번역시 대답을 스스로 내릴 수 있었다. 자꾸 다른 곳을 쳐다보긴 해도 아예 고개를 돌리고 외면할 화아는 아니다. 지아는 정말 이대로 화아를 붙들고 대체 무슨 일이냐고 심문하듯 다그쳐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은 그저 가슴 한구석에 묻어둔 체 조용히 화아의 바지버클을 끌러낼 뿐이었다. 화아는 그 손길을 전혀 거부하지 않고 그저 지켜보았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문득 느껴질 정도로 강렬한 시선이 이번만큼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이 오히려 지아에게는 강렬하게 인식되었지만 그것은 화아로서는 불가능한 게 아닌가 싶었을 던 맑고 평범한 시선이었다.

“시우야.”
“?!”

나직한 목소리에 지아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놀라 고개를 드니 처음 보는 표정의 화아가 있었다. 요즘의 화아는 새로움의 연속인지라 딱히 더 놀랄 일도 없다고 생각했건만 실수였다. 서글서글한 표정의 화아라니. 저건 대체 누구야. 본명을 부른 것에 한번 놀라고 화아의 표정에 놀라고 나니 지아로서는 더 이상 뭘 해야 할 지 모를 심정이었다. 그렇게 눈을 마주친 체 잠시간의 정적이 지났다.

―덜컹.

갑작스런 소리와 싸늘한 찬바람이 두 사람을 덮쳤다.

“힉?!”

저도 모르게 파다닥 화아에게서 떨어진 지아와

“카르노멘.”

묘하게 침착한 화아. 평소와 닮은 듯 전혀 다른 풍경에 낯선 얼굴이 들어섰다. 아니, 지아에게 이 사람을 낯설다고 할 수 있을까. 분명히 자주 본 사람은 아니지만 강렬한 기억의 한 귀퉁이에 남아있는 얼굴이다. 지아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갔다. 그리고 지아가 파래지는 만큼 더더욱 강렬해지는 시선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 은빛 머리카락이 세찬 바람에 정신없이 팔락거렸다. 언제나 의미모를 미소를 띠고 있는 예쁘장한 얼굴이 오늘만큼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그뿐이랴. 살기 띈 시선을 받은 지아는 ‘죽었다,’는 느낌이었다. 속으로는 온갖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밖으로는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물러서고 싶은데 손가락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으아, 큰일 났다.’

물론 위기 상황에도 생각만큼은 천연덕스러운 것이 지아의 특징이긴 하다. 하지만 몸은 바짝 긴장해서 얼어있는데 머릿속이 태연한 괴리감 가득한 상황은 전혀 달가운 것이 아니었다. 상황정리에만은 도움도 되었지만.

‘제발 긴장 좀 하자, 나님. 그나저나 이걸 어쩐다. 아니, 그 전에 이 인간은 대체 왜 남의 방 창문을 넘어와서 분노해 있는 거야. 어, 잠깐. 진짜 그러네. 대체 왜지?’

아무리 태연하게 생각을 이어간 다해도 현실은 변하지 않는 법이다. 여전히 살벌하다 못해 눈빛으로 바퀴벌레도 잡을 듯 한 카르노멘이 다가오고 있었고, 몸은 안 움직였고, 화아는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러고보니 아까……,

“힉?!”

저도 모르게 파다닥 화아에게서 떨어진 지아와

“카르노멘.”

묘하게 침착한 화아.

설마, 설마하니 사귄다는 게……?’

지아의 곁눈질을 못 본건지 화아의 시선은 카르노멘 붙박이였다. 카르노멘이 어떤 모습으로 어디로 향하고 있느냐는 신경 쓰이지 않는 걸까. 정말 신경 안 쓰이니, 화아?! 분위기는?! 걸음도 점점 빨라지는데?! 잠시 울고 싶은 기분이 된 지아였다. 걸어오며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를 들자 무슨 장치가 되어있는 건지 무언가 쏘아져 나왔다. 동체시력도 운동신경도 좋은 지아지만 바짝 얼어 있다가 바로 움직이는 것은 무리. 반사적으로 피하려고 움직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약간 빗나간 탓인지 엄청나게 아팠다.

“으갹!”

정확히 무슨 용도의 무엇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덕분에 얼굴근육 빼곤 움직일 수 없어진 지아는 눈물만 찔끔, 짜냈다. 어쩐지 놀란 표정의 화아가 눈에 들어왔다. 쟨 또 왜 저래. 뭐 별일은 없는 모양이니 다행, 이라고 생각하려고 했지만 여전히 눈빛이 무서웠다. 힐끔, 눈치를 보고 있자니 다시 지팡이의 끝이 같은 곳을 향해왔다. 설마, 또?! 질린 지아의 표정에 보답하듯 뭔가가 날아왔다.

‘보이는 데 못 피하니 미칠 노릇이군.’

괜히 헛생각을 하며 현실도피 해보았다. 당연히 아팠다. 맞은 데만 아픈 게 아니라 맞는 순간 온몸을 관통하는 통증에 저도 모르게 끄아악, 비명을 지르며 침대 위를 구르게 되었는데도 지아의 딴생각은 그치지 않았다. 그래, 심지어 이런 장면을 생중계로 포착해내고 놀라워 할 정도로. 그것이 비록 고통을 외면하기 위한 필사적인 딴생각일지라도 그렇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화아가 눈물을 흘린다. 즉, 울고 있었다.

크게 뜨인 두 눈, 작게 벌어진 입, 놀란 기색이 역력한 화아의 얼굴에 두 줄기 눈물방울이 흐르고 있었다. 카르노멘은 지아에게 집중한 나머지 보지 못한 듯 했다. 좀 보라고 하고 싶었는데 입에서 나오는 것은 괴성뿐이어서 화가 나는 지아였다. 몇 번이나 눈이 마주쳤다. 울지 마, 라고 구박해줄 수 없어서 답답했다.

“그만.”

작은 목소리에 반듯이 정장을 차려입은 신사가 뒤돌아섰다. 딱딱하게 굳은 그의 얼굴에도 놀라움이 담긴다. 지아도 몇 번 본 기억이 없는 화아의 눈물이라니, 놀라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도, 두 사람이 ‘연인戀人’이라면 절대로 놀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기왕이면 난 좀 보내주고 놀라면 더 좋겠지만.’

본인도 이상한지 뺨을 감싸는 화아의 눈에 자꾸만 자꾸만 물기가 차올랐다. 차다 못해 자꾸만 바깥으로 넘치는 눈물을 닦아내지도 그렇다고 막지도 못하는 손은 그저 이마나 뺨을 더듬으며 자리를 잡지 못했다. 뭔가 말을 할 듯 입을 벌렸다가 다물고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숙이는 꼴이 어지간히도 당황한 모양이었다.

“흐…….”
“화아.”

작게 들려오는 신음소리는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저도 모르게 눌러 삼킨 것일 테다. 카르노멘의 입에서 나직이 화아의 이름이 읊어졌다. 뭐라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카르노멘은 화아의 앞에 앉았다. 잔뜩 움츠린 화아의 어깨에 한손을 얹고 얼굴로 손을 뻗었다. 카르노멘의 조심스러운 손길이 화아의 뺨에 닿자 놀란 듯 확 얼굴이 물러났다. 하지만 곧바로 어깨를 붙든 손이 힘을 주어 화아의 몸을 끌어당겼다. 별로 힘을 주고 있지 않았던 화아는 카르노멘의 강한 손에 끌려가버렸다. 물기어린 뺨에 엷은 냉기를 머금은 정장칼라가 닿았다. 빠져나가려 몸부림치는 화아를 카르노멘의 양손이 꼭 붙들었다. 꼭 껴안긴 형상이 되어버린 화아는 이를 악물고 있었다. 자꾸만 눈물이 아니라 울음이 터지려고 했다. 카르노멘을 마주 안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벗어나지도 못한 체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화아는 덜덜 떨리는 손을 부여잡았다. 손을 잡자 팔이 떨려오고 떨림은 온몸으로 번져서 어느 샌가 화아는 펑펑 울음을 토하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 싫은지는 한마디 언급도 없이, 싫었노라고, 정말 싫었노라고 계속해서 되뇌고 또 되뇌며 짜내듯 터뜨리듯 카르노멘의 가슴에 울분섞인 눈물을 토해내었다. 카르노멘은 한마디 대꾸도 없이 그저 화아의 등을 쓸고 또 쓸어주었다. 그렇게 저녁은 밤이 되고 있었다.




 

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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