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int Valentine’s day

2013. 2. 16. 09:03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처음 그 아이를 만난 것은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광아의 도움 요청에 놀라 급히 달려간 병원에서였다. 창백하고 몸집이 자그마한 아이가 침대에 누워있었다. 아이, 라는 말은 조금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애는 누가 보아도 우리 또래였으니까. 깨끗한 면 옷에 감싸인 그 애는 깊이 잠이 들어 평온한 얼굴이었다. 그래서 처음에 나는 이 곳에 와야 했던 이유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벌어진 옷깃 너머로 얼핏 붕대를 발견한 후에야 간신히 그 애가 다쳤다는 것을 알았다. 안쓰러울만큼 바싹 마른 팔뚝으로 링거가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건 그 뒤였다.

 "미안해, 갑자기 불러서."
 "집에서 놀고 있었는 걸. 괜찮아."

 병원비 결제를 마치고 돌아온 광아는 나를 부르게 된 사정을 설명해주었다. 사정이래봐야 길을 걷다가 쓰러져 있는 그 아이를 발견했다는 것 뿐이었지만 내게는 신기하게 느껴졌다. 도심한복판에서 쓰러진 사람을 찾다니 꼭 널리 알려진 이야기인 것만 같다. 그런 우연에 아이가 옛 중국을 떠올리게 하는 복장을 하고 있었다거나 온통 피투성이였다는 옵션이 덧붙는다면 그 것이 바로 옛날 이야기가 아니고 무엇일까. 생각이 얼굴로 드러났는지 말을 이어가는 광아의 표정에서 난처한 기색이 엿보였다. 미안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호기심이 앞섰다.

 "그럼 병원 뒷골목에서 발견한거야?"
 "응, 바로 응급실로 달려왔어. 덕분에 간신히 살아난 거라고 의사선생님이 그러시더라."
 "상처가 많이 깊었나 보네."

 침대 쪽을 돌아본 것은 무의식 중의 일이었다. 말갛게 바라보는 눈과 마주쳐 급히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눈?

 "상처도 컸지만 출혈이 심해서 쇼크사 할 뻔 했던 모양이야. 왜 그래?"
 "일어난 것 같아."
 "뭐?"

 광아의 목소리는 놀라움보다는 잘못들었다고 생각해서 나오는 반문에 가까웠다. 나는 다시 대답해주는 대신 작게 웃어보이고 침대로 돌아섰다.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는 직접 보는 것이 언제나 이해가 빠르다. 하지만 그 때 상황을 새로 인식하게 된 것은 광아가 아니었다.

 "잘못봤나?"
 "수술 끝난지 고작 30분 지났어. 그렇게 피를 흘리고 벌써 일어날 리가."
 "그렇지만, 분명히 눈을 뜨고 있는 걸 봤는데."
 "잘못 본 걸거야."
 "그럴리가……. 아, 얘기 끊어서 미안. 수고했어. 살아서 다행이다."

 광아는 늘 그렇듯이 그린 듯한 얼굴로 웃었다. 그 날의 대화는 그것이 끝이었다.

Posted by fad
,

 걷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언제부터 걷고 있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안난다. 소년은 낯선 거리를 두리번거리다가 끝내는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가느다란 두 어깨가 감당하지 못한 옷자락이 팔뚝으로 흘러내렸다. 소년은 무의식 중에 옷을 추스르다가 문득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예쁘게 탄 갈색 피부를 가진 작은 손. 여자아이마냥 예쁜 손을 이리저리 뒤집어 보았다. 고민하다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원래 이랬던가?"

 알고 있던 것 보다 좀 작은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했지만 확인할 길은 없었다. 곰곰히 생각을 되짚어 보아도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왜 여기 있는거지? 처음부터 맨발로 걷고 있었나? 이렇게 옷이 컸던가? 여기는 어디지? 아니, 그 전에…

대체 난 누구지?

 놀라운 질문을 떠올린 소년은 잠시 생각을 멈추었다. 당연히 떠올라야 할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잠시 조용한 거리는 소년에 맞추어 시간이 멈춘 듯 했다. 출근 시간이 되어가고 있었지만 새벽의 주택가는 아직도 조용하기만 하다. 소년은 다시 발을 떼었다. 걸음과 함께 생각도 흘러간다. 어쩌지, 기억이 안 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뭘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다. 그나마 날씨가 따뜻한 때인 것이 다행이지만 이대로 거리에서 노숙을 하는 건 좀―,

 ―쾅.
 "갹!"

 꽤나 장엄한 소리가 조용한 골목을 울렸다. 생각에 잠겨 걷다가 갑자기 열린 대문에 정통으로 해골을 얻어맞은 소년은 머리를 감싸쥐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거의 동시에 부딪친 종아리도 통증을 호소해온다. 울상이 된 소년의 머리 위에 옅게 그림자가 드리웠다.

 "어, 미안. 괜찮아?"
 "으으…."

 소년은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휘저었다. 아래로 보이는 깨끗한 구두를 보니 출근하는 길일텐데 소년에게 길게 쓸 시간은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걱정을 받고 있을 소년이 아니기는 했지만 본인의 머리에서는 계산되지는 않는 것이다. 상대방은 잠시 머뭇거리는 듯 하다가 소년이 전혀 도움을 받을 생각이 없어보이자 발을 돌려 사라졌다. 소년은 가만히 발소리에 귀를 귀울이다가 상대가 완전히 코너를 돌자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그렇게 얼굴도 보지 않고 상대를 보낸 것이 잘한 것인지 잠시 의문이 들었지만 낙천적인 소년은 이내 아무렴 어때, 라며 생각을 떨쳐버렸다.

 자, 그럼 이제 어떻게 한다.

 낮은 지붕들과 저 멀리보이는 산등성이 너머로 해가 빠끔이 고개를 내미는 것이 보였다. 찌는 듯한 더위가 시작되겠지. 머리를 묶을 수 있다면 좋을텐데 끈이 없네―. 소년은 길디 긴 머리카락을 손에 말아쥐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Posted by fad
,

야야야, 뭐하는 짓이야, 비켜.

으르릉, 해보았지만 지나치게 서로에게 익숙한 파트너는 그런 지아의 반항을 완전히 무시하곤 빠르게 옷을 걷어 올렸다. 방심한 사이에 어느 샌가 긴 머리카락을 잡아매고 있던 끈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공들여 관리해온 머리카락이 사락사락 사방으로 흩어졌다. 자연스럽게 머리카락을 손에 감고 키스를 해오는 바람에 거부할 틈도 없이 입술이 맞닿았다. 고개를 흔들며 밀어내어도 막무가내로 몸을 붙여왔다.

이자식이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애인 있다며, 잣샤!!!!

비명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수법이 뻔하다. 입을 여는 순간 혀가 밀고 들어올 것이 당연했다. 힘으로 밀쳐내야 하건만 오랜만에 다른 사람의 손길을 접한 몸은 흐믈흐믈해져선 힘을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안되는데, 안되는데. 알고는 있었지만 생각은 이미 뒷수습을 어떻게 하나, 까지 가있다. 적당히 욕구를 풀어줬어야 하는 건데, 하고 후회해보아도 이미 늦었다. 집요하게 지아의 예민한 부분을 공략하는 손길에 반쯤 눈이 풀릴 지경이었다. 그대로 끝까지 가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래도 안 돼, 라고 마지막으로 이성의 끈을 당겨 손을 들었다. 더듬더듬 올라간 손끝에 털 뭉치같이 보들보들한 감촉이 닿자 망설임 없이 잡아당겼다.

“윽.”
“정신이 드냐, 인마.”

헉헉, 작게 숨을 몰아쉬는 지아의 얼굴을 화아는 마치 처음 본다는 듯이 말가니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이 녀석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지아는 숨도 고를 겸 한숨을 포옥 내쉬고는 발로 화아를 걷어내고 일어났다. 화장실에 가야한다. 이대로는 내가 덮치고 말거야. 혼자 고개를 휘휘 저으며 한걸음 옮기는데 다시 허리를 잡혔다. 퀭한 눈으로 생각에 잠긴 듯 앞만을 응시하던 화아가 매달리듯 붙어있었다. 부쩍 말라서 안쓰러운 형상의 화아가 그러고 있으니 전처럼 밟아주고 외면할 수가 없는 지아였다.

“야, 놔봐.”
“화장실 좀 가자.”
“야.”
“어이.”

대답한마디 없다. 이걸 어쩌나. 머리를 토닥토닥 쓸어주며 떨어져라, 라고 속으로 주문을 외워도 그대로다. 이걸 어쩌나. 오늘의 화아는 뭔가 평소와 달랐다. 물론 이렇게 병든 닭 몰골을 하고 있는 것부터가 평소와는 많이 달랐지만 그것과는 관계없이 뭔가 지아가 함부로 할 수 없게 만드는 부분이 있었다. 대체 뭐지.
머릿속으로는 이것저것 고민을 해보면서 일단 화아를 달고 침대에 가서 앉았다. 질질 끌려오는 폼이 영락없이 떼쓰는 어린애. 방에 들어오자마자 덤벼들어서 떨어지지 않는 꼴을 보아하니 이 녀석도 욕구불만인가 싶다. 곤란한데.

“야.”
“기분 좋게 해줄 테니까 좀 놔봐.”

어떻게? 라고 묻는 얼굴로 곁눈질 한다. 아아―, 그래서 이상했구먼. 언제나 질린다 싶을 정도로 똑바로 눈을 마주쳐오던 화아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지아의 눈을 보지 않았다. 얼핏 스치지 조차 않았다. 아니, 그전에 얼굴이나 똑바로 봤던가? 지아는 잠시 눈을 크게 뜨고 화아를 바라보다가 이내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어떤 심정의 변화가 있으면 이런 본능적인 행동이 바뀔까. 화아는 지아의 표정이 변하자 땅만 쳐다보고 있었다. 일단은 이 녀석 기분을 풀어주는 게 먼저겠지. 후, 하는 숨과 함께 생각을 날려버리고 팔을 잡아당겼다.

“일어나, 이 녀석아.”
“왜.”

고집 피우는 중에는 단 한마디도 대꾸하지 않는 화아지만 어째서인지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지아의 얼굴은 바라보지 않는다. 지아는 조금 생각을 바꿔보았다. 혹시 나한테 뭔가 잘못한 게 있나? 안타깝게도 이번역시 대답을 스스로 내릴 수 있었다. 자꾸 다른 곳을 쳐다보긴 해도 아예 고개를 돌리고 외면할 화아는 아니다. 지아는 정말 이대로 화아를 붙들고 대체 무슨 일이냐고 심문하듯 다그쳐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은 그저 가슴 한구석에 묻어둔 체 조용히 화아의 바지버클을 끌러낼 뿐이었다. 화아는 그 손길을 전혀 거부하지 않고 그저 지켜보았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문득 느껴질 정도로 강렬한 시선이 이번만큼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이 오히려 지아에게는 강렬하게 인식되었지만 그것은 화아로서는 불가능한 게 아닌가 싶었을 던 맑고 평범한 시선이었다.

“시우야.”
“?!”

나직한 목소리에 지아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놀라 고개를 드니 처음 보는 표정의 화아가 있었다. 요즘의 화아는 새로움의 연속인지라 딱히 더 놀랄 일도 없다고 생각했건만 실수였다. 서글서글한 표정의 화아라니. 저건 대체 누구야. 본명을 부른 것에 한번 놀라고 화아의 표정에 놀라고 나니 지아로서는 더 이상 뭘 해야 할 지 모를 심정이었다. 그렇게 눈을 마주친 체 잠시간의 정적이 지났다.

―덜컹.

갑작스런 소리와 싸늘한 찬바람이 두 사람을 덮쳤다.

“힉?!”

저도 모르게 파다닥 화아에게서 떨어진 지아와

“카르노멘.”

묘하게 침착한 화아. 평소와 닮은 듯 전혀 다른 풍경에 낯선 얼굴이 들어섰다. 아니, 지아에게 이 사람을 낯설다고 할 수 있을까. 분명히 자주 본 사람은 아니지만 강렬한 기억의 한 귀퉁이에 남아있는 얼굴이다. 지아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갔다. 그리고 지아가 파래지는 만큼 더더욱 강렬해지는 시선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 은빛 머리카락이 세찬 바람에 정신없이 팔락거렸다. 언제나 의미모를 미소를 띠고 있는 예쁘장한 얼굴이 오늘만큼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그뿐이랴. 살기 띈 시선을 받은 지아는 ‘죽었다,’는 느낌이었다. 속으로는 온갖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밖으로는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물러서고 싶은데 손가락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으아, 큰일 났다.’

물론 위기 상황에도 생각만큼은 천연덕스러운 것이 지아의 특징이긴 하다. 하지만 몸은 바짝 긴장해서 얼어있는데 머릿속이 태연한 괴리감 가득한 상황은 전혀 달가운 것이 아니었다. 상황정리에만은 도움도 되었지만.

‘제발 긴장 좀 하자, 나님. 그나저나 이걸 어쩐다. 아니, 그 전에 이 인간은 대체 왜 남의 방 창문을 넘어와서 분노해 있는 거야. 어, 잠깐. 진짜 그러네. 대체 왜지?’

아무리 태연하게 생각을 이어간 다해도 현실은 변하지 않는 법이다. 여전히 살벌하다 못해 눈빛으로 바퀴벌레도 잡을 듯 한 카르노멘이 다가오고 있었고, 몸은 안 움직였고, 화아는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러고보니 아까……,

“힉?!”

저도 모르게 파다닥 화아에게서 떨어진 지아와

“카르노멘.”

묘하게 침착한 화아.

설마, 설마하니 사귄다는 게……?’

지아의 곁눈질을 못 본건지 화아의 시선은 카르노멘 붙박이였다. 카르노멘이 어떤 모습으로 어디로 향하고 있느냐는 신경 쓰이지 않는 걸까. 정말 신경 안 쓰이니, 화아?! 분위기는?! 걸음도 점점 빨라지는데?! 잠시 울고 싶은 기분이 된 지아였다. 걸어오며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를 들자 무슨 장치가 되어있는 건지 무언가 쏘아져 나왔다. 동체시력도 운동신경도 좋은 지아지만 바짝 얼어 있다가 바로 움직이는 것은 무리. 반사적으로 피하려고 움직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약간 빗나간 탓인지 엄청나게 아팠다.

“으갹!”

정확히 무슨 용도의 무엇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덕분에 얼굴근육 빼곤 움직일 수 없어진 지아는 눈물만 찔끔, 짜냈다. 어쩐지 놀란 표정의 화아가 눈에 들어왔다. 쟨 또 왜 저래. 뭐 별일은 없는 모양이니 다행, 이라고 생각하려고 했지만 여전히 눈빛이 무서웠다. 힐끔, 눈치를 보고 있자니 다시 지팡이의 끝이 같은 곳을 향해왔다. 설마, 또?! 질린 지아의 표정에 보답하듯 뭔가가 날아왔다.

‘보이는 데 못 피하니 미칠 노릇이군.’

괜히 헛생각을 하며 현실도피 해보았다. 당연히 아팠다. 맞은 데만 아픈 게 아니라 맞는 순간 온몸을 관통하는 통증에 저도 모르게 끄아악, 비명을 지르며 침대 위를 구르게 되었는데도 지아의 딴생각은 그치지 않았다. 그래, 심지어 이런 장면을 생중계로 포착해내고 놀라워 할 정도로. 그것이 비록 고통을 외면하기 위한 필사적인 딴생각일지라도 그렇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화아가 눈물을 흘린다. 즉, 울고 있었다.

크게 뜨인 두 눈, 작게 벌어진 입, 놀란 기색이 역력한 화아의 얼굴에 두 줄기 눈물방울이 흐르고 있었다. 카르노멘은 지아에게 집중한 나머지 보지 못한 듯 했다. 좀 보라고 하고 싶었는데 입에서 나오는 것은 괴성뿐이어서 화가 나는 지아였다. 몇 번이나 눈이 마주쳤다. 울지 마, 라고 구박해줄 수 없어서 답답했다.

“그만.”

작은 목소리에 반듯이 정장을 차려입은 신사가 뒤돌아섰다. 딱딱하게 굳은 그의 얼굴에도 놀라움이 담긴다. 지아도 몇 번 본 기억이 없는 화아의 눈물이라니, 놀라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도, 두 사람이 ‘연인戀人’이라면 절대로 놀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기왕이면 난 좀 보내주고 놀라면 더 좋겠지만.’

본인도 이상한지 뺨을 감싸는 화아의 눈에 자꾸만 자꾸만 물기가 차올랐다. 차다 못해 자꾸만 바깥으로 넘치는 눈물을 닦아내지도 그렇다고 막지도 못하는 손은 그저 이마나 뺨을 더듬으며 자리를 잡지 못했다. 뭔가 말을 할 듯 입을 벌렸다가 다물고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숙이는 꼴이 어지간히도 당황한 모양이었다.

“흐…….”
“화아.”

작게 들려오는 신음소리는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저도 모르게 눌러 삼킨 것일 테다. 카르노멘의 입에서 나직이 화아의 이름이 읊어졌다. 뭐라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카르노멘은 화아의 앞에 앉았다. 잔뜩 움츠린 화아의 어깨에 한손을 얹고 얼굴로 손을 뻗었다. 카르노멘의 조심스러운 손길이 화아의 뺨에 닿자 놀란 듯 확 얼굴이 물러났다. 하지만 곧바로 어깨를 붙든 손이 힘을 주어 화아의 몸을 끌어당겼다. 별로 힘을 주고 있지 않았던 화아는 카르노멘의 강한 손에 끌려가버렸다. 물기어린 뺨에 엷은 냉기를 머금은 정장칼라가 닿았다. 빠져나가려 몸부림치는 화아를 카르노멘의 양손이 꼭 붙들었다. 꼭 껴안긴 형상이 되어버린 화아는 이를 악물고 있었다. 자꾸만 눈물이 아니라 울음이 터지려고 했다. 카르노멘을 마주 안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벗어나지도 못한 체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화아는 덜덜 떨리는 손을 부여잡았다. 손을 잡자 팔이 떨려오고 떨림은 온몸으로 번져서 어느 샌가 화아는 펑펑 울음을 토하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 싫은지는 한마디 언급도 없이, 싫었노라고, 정말 싫었노라고 계속해서 되뇌고 또 되뇌며 짜내듯 터뜨리듯 카르노멘의 가슴에 울분섞인 눈물을 토해내었다. 카르노멘은 한마디 대꾸도 없이 그저 화아의 등을 쓸고 또 쓸어주었다. 그렇게 저녁은 밤이 되고 있었다.




 

Posted by fad
,
  불안하다. 좀처럼 표정이 굳지 않는 지아의 얼굴이 심각했다. 눈앞에는 작게 미간을 찌푸린 모습으로 화아가 널부러져 있었다. 화려하기 짝이 없는 붉은 머리칼은 아직 그 빛을 잃지 않았지만 결은 푸석했다. 안그래도 하얀 얼굴은 어느샌가 창백하게 색이 빠져 병색이 완연했다. 눈밑이 검게 물들고 입술은 마른데다 전과는 다르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을만큼 말라버렸다. 어째서 이렇게 된 걸까. 화아가 원체 고민하는 일이 없어 신경쓰지 않았던 것이 함정이었다. 세상에 무심해 어느 것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화아였기에 표현이 적다해서 세심하게 돌봐주지 않아도 되었었다. 어디서부터 틀어진 걸까. 조금만 신경을 썼더라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라고 지아는 자신을 탓해보았다. 이렇게 티날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땀에 젖어 달라붙은 머리칼을 떼어주고 싶었지만 그것마저도 힘겹게 든 수면에 방해가 될까 시도할 수 없었다. 지아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입술을 깨물고 지켜보는 것 뿐이었다.

  정확히 언제부터 인지는 몰랐다. 평소와 똑같이 먹고 똑같이 나가서 똑같이 들어왔기에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화아가 먹은 것을 단 하나도 소화시키지 못하고 전부 토하고 있다던지, 매일같이 침대에 누워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다던지. 그것도 아니면 평소 같았으면 쉬지않고 공을 튀기고 있을 시간에 태양 아래 죽은 듯이 늘어져있다는 것까지도. 심지어 부르러 가지 않아도 꼬박꼬박 제시간에 들어온다는 사실까지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연아마저도 뭔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무엇이 문제인지는 깨닫지 못했다. 누구보다도 아끼는 한가족이라 여기는 친구들이었는데. 화아의 상태를 알아차리고 다른 칠인의 정령아들은 각자 충격에 빠져 의기소침해져 있었다.

  창을 통해 드는 바람에 지아는 정신을 차렸다. 안그래도 약해진 몸이라 감기 들기 쉬울 터인데 창문을 열어놓고 잠들다니. 지아는 작게 고개를 젓고 발소리를 죽여 창가에 섰다.

  "……ㅡ노멘…?"
  "미안. 깨웠네."

  전혀 소리가 나지 않았는데도 어떻게 알았는지 화아가 목소리를 냈다. 지아가 창문을 닫는 사이 화아는 부시시 몸을 일으켰다. 지아는 위태로워보이는 화아를 붙들었다.

  "좀 더 자둬."
  "됐어."

  지아는 자신을 밀어내고 창을 여는 화아를 보며 결국 들었던 손을 내리는 수 밖에 없었다. 결코 따뜻한 날씨가 아닌데 화아는 절대 창문을 닫으려 하지 않았다.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 화아를 향해 화도 내보고 얼러도 보았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무엇이든 정령아들의 한마디면 투덜거리긴 해도 어기지 않는 화아였지만 이번만은 고집을 피웠다. 곁에 누군가 붙어있는 것조차 거부했다. 창문을 열고는 지아를 방밖으로 끌어낸다. 단호한 손길을 지아는 떨쳐내지 못했다. 닫힌 문에 기대어 지아는 참았던 한숨을 내뱉었다.

  "내가 다 기운 빠지는 느낌이야……."





  화아는 침대에 걸터앉아 허공을 쳐다보았다. 정확히는 창 밖이지만 촛점이 맞지 않는 화아의 눈은 하늘을 그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렇게 기다리면 올 것이다. 그는. 분명히. 알고 있는데 어째서 이렇게 목을 매고 기다리게 되는 것일까. 반드시 그는 올 것인데. 기다리지 않으면 오지 않을 것 같아서 안달하게 되었다. 어째서지, 어째서 이렇게 불안한 것일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왜. 온몸에서 힘을 빼자 상체가 풀썩 침대 위로 쓰러졌다.

  친구들은 이래저래 걱정하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사실 화아는 어째서인지 먹은 것을 소화시킬 수 없다는 점을 빼고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가끔 견딜 수 없이 불안하고 화가 났지만 그것은 그 나름대로 견딜만 했다. 갑자기 눈물이 나는 때도 헛구역질이 올라올 때도 화아는 그냥 몸에 뭔가 문제가 있겠거니 했다. 아무 생각 없이 허공을 보고 있는 중에 일어나는 일이니 그렇게밖에 해석할 수 없었다. 병원을 가보긴 해야겠지만 조금 미뤄도 큰 문제가 생길 병은 아니겠거니 생각했다.

  카르노멘의 얼굴을 보면 반가웠다. 그저 무뚝뚝하게 맞을 뿐이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분명하게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시간. 언젠가부터 그 이후에는 허전함이 찾아왔지만 그런 것쯤은 무시할 수 있을 정도의 행복이었다. 커다란 대가가 뒤따랐지만 그럼에도 놓을 수가 없었다. 마주친 두 눈이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어도 다른 곳에 넘겨줄 수는 없었다. 은빛 속눈썹에 그늘진 은보라빛 눈이 싱긋 미소짓고 있었다.

  "카르노멘."
  "안색이 많이 안좋아. 병원, 아니면 양호실에라도 가봐야 하는 것 아니야?"
  "조만간 갈거야."

  웃으며 머리를 쓸어넘기는 카르노멘의 손에 살짝 머리를 부볐다가 몸을 일으켰다. 상체를 일으키자마자 입술을 부딪쳐 들어간다. 짧은 입맞춤으로 밀착된 몸을 더더욱 붙이며 속삭였다.

  "하자."
  "안 돼. 곧 가봐야해."
  "잠깐만이라도."

  말하는 중에도 손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카르노멘의 교복 상의 자켓은 이미 반쯤 벗겨져 있었다. 카르노멘의 손이 화아의 손목을 붙들었다. 화아의 얼굴이 대번에 찌푸려졌다.

  "왜."
  "안된다니까."

  사탕뺏긴 꼬마처럼 꽁해진 얼굴을 쓰다듬으며 카르노멘이 웃었다. 어린아이를 어르는 투로 속삭이며 화아를 떼어놓는다.

  "주무실 땐 창문을 닫아 둬. 감기들라."
  "올거잖아."
  "잠궈도 들어올 수 있어."
  "그래도 싫어."
  "어린애구나."
  "그러니까 하자."
  "안 돼."
  "……."

  더이상 말하진 않았지만 화아는 여전히 불만 가득한 표정이었다. 카르노멘은 그의 어깨를 도닥도닥 두드려주곤 몸을 일으켰다.

  "잠깐 짬이 생겨서 왔을 뿐이니까. 이제 가야해."

  '가까이서 상태를 확인해 보고 싶기도 했고 말이지. 병원에 가라고 한다고 들을 것 같지는 않고 따로 의사를 부르는 편이 나을 것 같군.'

  카르노멘은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화아에게 고갯짓으로 인사를 하고 그대로 사라졌다. 또 방에 혼자 남은 화아는 퀭한 눈으로 카르노멘이 서있던 자리를 바라보다가 다시 침대 위로 쓰러졌다. 붉은 머리카락이 하얀 시트 위로 흐트러졌다.





  처음 그와 '만난' 것은 봄날이었다. 변덕스러운 날씨 중에서 유난히 포근하고 따뜻하던 그 날, 화아는 봄의 한복판에서 '겨울'을 보았다. 한 겨울의 메마른 눈이 그곳에 흩날리고 있었다. 말도 안되는 환상같은 풍경에 화아는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다. 계속해서 쫓아다니던 시선도 신경쓰였지만 그 때의 행동은 단순히 본능이었다. 있을 수 없는 것이지만 아름다워서 놓칠 수 없다는 본능적인 움직임. 엷게 깔린 가루눈, 별 없는 밤의 하현달.

  온기어린 물방울이 뺨을 타고 떨어져 머리카락 속으로 스며들었다. 하얀 천장이 눈이 시려 옆으로 돌아 누웠다. 있지도 않은 손톱이 손바닥에 배길만큼 주먹을 꽉 쥐었지만 물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흐릿해지는 시야가 분해서 화아는 눈을 있는대로 부릅떴다.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화아의 눈물을 닦아줄 하얀 손도 그의 곁에는 남아있지 않았다.

  "윽."

  아무리 자존심을 세워봐도 흐르는 눈물은 멎지를 않아서 화아는 결국 웅크리고 말았다. 터질 듯한 마음에게서 등을 돌리고 숨죽인 울음을 삼키다가 체해 밭은 기침을 토하며 침묵 속에 침잠해간다.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Posted by fad
,

Posted by fad
,

 하현은 옷을 벗었다. 목욕하러 들어가야 하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한데 어딘가 불편했다.

 '대체 뭐지.'

 잠시 고민해보았다. 고개를 갸웃하는데 뭔가 시야에 들어왔다. 하현보다 머리 하나는 큰 껑충한 키의 청년. 두 사람의 기장 차이 탓에 하늘하늘한 검은 머리가 덮고 있는 목덜미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눈이 마주치자 미미하게 웃어보였다. 굉장히 기분좋아보이는 표정에 하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런 변화를 알아차린 휘아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오히려 더 짙어졌다. 하현은 코를 통해 흥, 하고 숨을 내뱉고는 남은 하의를 벗기 시작했다. 곧 멈추고 말았지만.

 '옷 안벗어?'

 동작을 멈춘 하현이 휘아를 바라보았다. 말은 커녕 작은 제스쳐도 없었지만 하현 못지 않게 말이 없는 이 친구는 전혀 어색함 없이 그 뜻을 알아들었다. 눈을 한번 감아보이더니 손과 목을 휘감은 악세사리들을 먼저 풀어낸다.

 '하나도 안 벗고 있었잖아.'

 하현은 조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휘아를 한번 노려보고는 수건만 한장 들고 온천으로 향했다. 휘아가 옷을 벗으려면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하현도 휘아도 신경쓰지 않았다. 두사람은 25살이나 먹은 남자 대학생. 여고생이 아니니 말이다.

 '좋구나, 온천이란 건.'

 딱히 휴일도 아니고 이른시간인지라 아무도 없는 온천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현은 온천에 앉아 혼자라는 것의 여유로움을 마음껏 즐겼다. 온몸이 노골노골 풀어지는 느낌에 졸음이 밀려왔다. 그래서 살짝 졸음에 취한 체 목만 내놓은 체 탕에 가라앉아 있는데 소리가 들렸다. 맨발이니 딱히 발소리랄 것은 아니었지만 이쪽으로 걸어오는 작은 기척. 탈의실에도 사람은 없었으므로 이것은 틀림없이 휘아의 것이었다. 소리는 문에서 출발해 하현의 바로 뒤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잠시 침묵했다.

 "왁."
 "……."

 전혀 발소리를 죽일 생각도 없이 다가와서는 하현의 귓가에 바짝 입을 대고 왁, 이라고 말했다. 놀랄리가 없었다. 하현의 뚱한 시선을 받은 휘아는 하현의 머리카락을 한번 헤집고는 탕 안으로 들어왔다. 수면이 출렁거렸다. 하현은 가만히 휘아가 자리를 잡고 앉아 수면이 잔잔해지길 기다렸다. 휘아는 그런 하현을 흘낏 보더니 물 속에서 손을 휘저었다. 물결이 잠잠해지려다 다시 술렁인다. 수면만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는 하현의 표정이 재미있어서 한번 더 시도해보았다. 조용해지던 물결이 그 세기를 더하자 작게 눈썹이 꿈틀거렸다. 보통 사람은 잡아낼 수 없는 작은 변화지만 휘아와 하현은 자연스럽게 그런 것만으로도 의사소통을 해냈다. 그것이 가능한 사이였고 그것이 가능한 사람들이었다. 장난이 계속 되자 전혀 휘아를 신경쓰지 않고 있었던 하현이 마침내 휘아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뚱한 표정이다. 휘아는 작게 소리내어 웃고는 손을 멈췄다. 눈을 가늘게 뜨고 한번 휘아를 바라본 하현은 다시 시선을 물로 돌렸다. 휘아는 바로 고개를 돌려버리는 하현의 행동에 입을 비죽 내밀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마침내 수면이 잠잠해졌다. 하현은 미리 물 밖으로 꺼내 두었던 손을 들었다. 내리치려는 생각이다. 고작 그거 하나를 위해 계속 기다렸다니 유치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정확히 하현의 손바닥이 수면에 닿으려는 찰나,

 "……?"

 하현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휘아의 감은 눈이 바로 눈 앞에 있었다. 제대로 초점을 맞추기 힘들 정도의 거리.

 '뭐지, 이거.'

 그렇게 생각하고는 고개를 갸웃, 옆으로 기울였다. 그러자 휘아의 손이 하현의 목 뒤로 넘어왔다. 하현의 머리를 받힌 손, 그리고 맞닿은 입술이 어쩐지 뜨겁다.

 '키스, 지?'

 하현은 고민했다. 여기서 어떻게 해야하나. 몇일 전, 이름이 기억 안나는 어떤 여학생이 단호하게 두 사람에게 말했다.

 '이렇게까지 매일 붙어다니다니! 너희 둘은 커플이야! 틀림없이 사귀고 있는 거라고!'

 그 때 하현과 휘아는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넘어갔다. 딱히 부정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그냥 그렇게 보인다면 그런 거겠지, 라고 생각했다. 그걸로 두 사람의 관계가 뭔가 바뀔 일은 없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모두 수업이 없는 휴일, 하현과 휘아는 온천에 왔다.

 '사귀는 사이에 키스 정도는 당연히 하는 건가.'

 하현은 눈을 감았다. 먼저 입을 열기를 청해본다. 아니, 청하려고 했다. 작게 입을 벌리자 바로 시작되는 것은 뜨거운 입맞춤. 조용하고도 격렬한 애정의 확인이 온천의 남탕이라는 공개된 장소에서 시행되었다. 다행히 두 사람이 떨어질 때까지 그 공간에 발을 들인 이는 아무도 없었다.

Posted by fad
,

  겨울같은 녀석이다. 이것이 첫 인상이었는지 같은 건 기억나지 않지만 기억력이 좋지 못한 편인 내가 이렇게 일관적으로 느끼고 있다는 건 역시 저녀석 문제겠지. 뒤통수를 간지럽히는 시선을 느끼며 지내는 것도 벌써 반년째. 이제는 없으면 허전할 정도가 되었다.









 

 

 

   어느 겨울에
     I wrote to congraturations on Hwa-a&Karnomen's 200th day. I love you Dears.


  먼 곳에서 봐도 반짝반짝 빛나는 붉은 머리카락을 쫓기 시작한 지 어언 199일째. 어찌보면 기념할 만한 날이지만 카르노멘은 오늘도 그저 조용히 그를 바라보는 것을 택했다. 화아는 여자애들이 손가락 꼽으며 센 기념일 따위에 신경쓰는 사람도 아니었고 뭣보다 두 사람은 그 긴 시간동안 제대로 대화 한 번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걸 기념 삼기에는 굉장히 애매한 관계였다. 이런 상황에서 그에게 내일이면 두 사람이 만난 지, 아니 정식으로 교제하기로 한 지 200일째라는 말을 하는 것은 무리였다. 이해도 못할 것이다. 대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되물어오는 것을 듣느니 차라리 생각하지 않는 게 나았다. 사실, 그런 걸 말하는 성격도 못되긴 했다.

"카르노멘, 손님이 오셨습니다."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가 카르노멘의 귓가를 맴돌았다. 메세지 마법이 그의 감사실 책상에 있는 작은 거울과 그의 귀에 걸린 귀걸이 하나에 연동되어 걸려있어 카르노멘이 있는 장소, 그의 의사와 관계없이 상대방의 말을 전달해준다. 그 전언에 답을 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카르노멘의 의지였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대답을 하는 쪽이 감사실의 다른 학생들을 위해 좋았다. 그들은 감사장이 직접 나서서 처리해야하는 일부의 업무를 제외하고는 모든 업무를 스스로 해낼 수 있는 유능한 인재들이다. 카르노멘에게 연락이 온다는 것은 그들로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문제가 닥쳤을 때 뿐. 답하지 않아서야 카르노멘도 좋을 게 없었다. 가끔 일방적으로 모든 연락을 끊고 사라질 때가 있기는 했지만.

  "금방 가겠습니다. 잠시만 붙잡아주세요. 매번 고맙습니다, 레엔."
  "그렇게 전달해드리겠습니다. 이만"

  그의 인사와는 별개의 답변이 돌아오고 통신이 끊겼다. 조곤조곤한 어조와는 다르게 결코 레엔은 감정이 담긴 말에 답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신이 내린 저주같은 능력때문에 인간적인 교류를 완전히 끊고 지냈다. 방금 카르노멘이 건낸 것 같은 사소한 감사인사조차 듣지 못한 척 흘려넘겼다. 감사실의 모두는 레엔의 쌀쌀맞음에 적응해있었다. 물론 페레넬에서 조금만 지내다보면 웬만큼 이상한 사람들에는 다 적응할 수 있게 되기도 했다.

  "그럼 가볼까요."

  그렇게 말하며 모자를 고쳐 쓴 카르노멘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아름다웠다. 딱, 하고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와 동시에 남은 것은 햇빛에 하얗게 반짝이는 엷은 은빛 빛무리 뿐. 아무도 알아차린 사람은 없었다. 그가 앉아있던 장소는 사람들 눈에 꽤나 잘 띄는 벤치. 페레넬의 이상한 사람들 중에서도 카르노멘이 유별난 축에 든다는 것이 그렇게 놀라운 사실은 아니리라. 하지만 카르노멘마저도 그가 사라진 자리를 한참 농구공을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학생들 중 한 사람이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사라졌다. 처음엔 쉽게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가 있는지 혹은 자리를 떠났는지 확인하는 것이 쉬워졌다. 화아가 예민해진 것인지, 그가 허술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저 서로에게 익숙해졌기 때문이라고 짐작해볼 뿐이다. 소년은 어쩐지 시들해져버린 농구에서 손을 놓고 코트를 빠져나왔다. 게임을 하던 멤버들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몸이 안좋아서, 라는 한마디로 가볍게 물리쳐버렸다. 언제나 소리없이 나타나서 조용히 바라만 보다가 또 소리없이 사라져버리곤 했는데 오늘따라 그것이 왜이리 신경쓰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역시 신경쓰여."

  학생 감사실에 찾아가는 것은 조금 거북했다. 이 여자때문이다. 온몸을 가리는 까만 드레스에 베일까지 쓴 보는 것만으로 뭔가 불편해보이는 여자다. 이름이 뭐랬더라. 기억나지 않았다.

  "감사장은 현재 중요한 손님과 대면하고 계십니다. 나중에 다시 찾아와주시겠습니까."

  감사실의 입구를 맡은 그녀는 화아의 말재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지만 사람같지 않은 억양없는 말투에 접근하기 힘든 분위기를 풍겼다. 그래서 화아는 언제나 최대한 빨리 그녀의 앞을 벗어나고 싶어했고, 그것은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화아는 대답도 제대로 하지 않고 도망쳐나왔다. 중요한 손님이라니 얘기가 길어지겠지? 벌써 저녁시간이 가까워 오니 오늘은 패스하고 내일 만나는 게 좋겠다.

  "오랜만에 제대로 일하는 군, 저녀석."

  오늘의 모임 장소는 식당가 입구였던가. 오랜만에 먹는 바깥밥이다. 언제나 손수한 집밥을 먹는 입장에서 사치라고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가끔은 일부러 불량식품을 사 먹는 기분으로 밖에서 밥을 사먹고 싶어진다. 물론 오늘 저녁이 외식이 된 건 단순히 식사담당이 게으름을 피운 탓이겠지만. 간만의 외식이 반갑기도 하지만 외식이라고 생각하면 반드시 가야한다는 의무감이 사라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화아는 멀리 돌아가는 길에 발을 들였다. 귀찮아, 라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유치원 시절부터 몸에 익혀둔 버릇은 알아서 그를 약속 장소로 이동시켰다. 절대로 도망쳤을 때 뒤따라오는 잔소리가 무서워서 가는 것이 아니다. 어릴적부터 철저하게 훈련된 습관일 뿐이다.

  "쳇."

  스스로에게까지 변명해야하는 처지가 제법 한심스럽다. 화아는 괜히 머리를 한번 긁었다. 간지러운 것 같네. 슬쩍 돌아간 고개 탓에 시야도 함께 이동했다. 저건 뭐지. 학생노점상인가. 페레넬은 조건이 되는 사람들 중에서도 재주많은 이들만을 학생으로 받아들여 굉장한 스파르타식의 교육을 시키지만 그 외의 생활에는 거의 무제한적인 자유가 주어졌다. 아주 기본적인 몇가지 규칙만 지키면 학교를 떠나는 순간까지 무슨 짓을 해도 용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페레넬의 학생으로서 모든 생활비를 제공받으며 어떻게든 재산을 불리는, 아니, 정확히는 불리려고 노력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그 악착같은 노력의 결과로 학교에 입학할 때는 땡전한푼 없는 빈털털이였는데 졸업할 때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거부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고로, 이렇게 학교 내에서 노점상을 벌여 용돈벌이를 하는 경우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물론 페레넬의 캠퍼스는 커다란 섬 하나를 전부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크기이기 때문에 안에는 식당가도 상점가도 따로 있지만.

  "이거, 귀걸이?"
  "50Dion입니다. 선물하시려고요?"
  "음……."
  "아하핫, 천천히 고르세요."

  그가 집어든 것은 은빛 사슬이 여러가닥 얽혀 있는 귀걸이였다. 다른 장식이 없어 단정하면서도 심심하지 않은 상당히 세련된 디자인이었다. 정작 관심을 보이고 있는 화아가 그런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이 안타까울만큼 잘만들어진 귀걸이였다. 그리고 그런 것에는 관심도 없는 화아의 시선은 끝에 매달린 영롱한 푸른빛의 보석에 못박혀있었다.

  "얼마라고요?"
  "50dion입니다, 손님."
  "잠깐만요."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지며 화아의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은 단 하나. 귀걸이에 달린 푸른 보석이 카르노멘의 반짝이는 은발에 굉장히 잘어울릴 것이라는 생각뿐이었다.

  "선물하실 건가요? 그러면 이쪽 상자가……."

============================
1 중요한 손님=얘기가 길다
2 카르노멘이 다른 감사들한테 떠넘기고 일을 안하는 줄 알고 있음.

Posted by fa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