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기이한 만남은 더위에서 시작되었다. 갈수록 종잡을 수 없어지는 이상기후들 속에서 배신하지 않는 명제가 있다면 여름은 뜨겁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전보다 더 뜨겁고 더 길어진 여름 어느날. 하루는 보았다.
눈을 의심한 것은 맨 눈으로 나다니기가 고통스러울 정도로 따가운 햇빛 아래였던 탓도 있었다. 그것은 찰나에 지나지 않는 짧은 순간 보였다가 사라졌다. 눈부심과 혼란 속에서 눈을 질끈 감았다 뜨는 짧고도 긴 시간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몰랐다. 하루는 당황 속에서 두어번 눈을 감았다 떴다.
눈 앞에 선 것은 키가 그리 크지 않은 하루의 시야에 정수리가 훤히 보이는 조그마한 여자아이였다. 여자아이라고 확신한 것은 유난히 작은 덩치와 같은 학교 교복, 그리고 덥수룩하게 보이는 단발머리 탓이었다. 대낮 중 유난히 해가 잘 드는 위치라 여름이면 사람이 거의 찾지 않는 교내 벤치 쪽이었다. 고등학교가 다 그렇듯 시야를 가릴 것도 없으나 건물 배치 탓에 사람이 오가는 길목에서는 약간 외지게 느껴지는 장소였다. 달리 말하자면, 하루도 의도한 건 아니었다.
“어…….”
안녕하세요, 를 입에 담기도 전에 여자아이가 튀어나가듯 자리를 박찼다. 그렇게 서두르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엄청난 속도였다. 체육대회 반대표 정도는 쉽게 할 것 같다. 하루는 눈을 꿈뻑였다. 잠깐 사이 일어난 일에 어안이 벙벙해진 상태였다.
그 애가 사라지고 하루가 무얼 하러 어디로 가다가 그 자리에 섰는지 완전히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쯤 종이 쳤다. 하루는 멍하니 생각했다. 방금 그게 뭐였지.

선생님의 꽁무니를 쫓듯 교실에 다다라 아슬아슬하게 자리에 안착한 하루는 핀잔을 주는 선생님의 말씀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아까 본 광경을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이한 장면이었다. 대체 내가 뭘 본 거지?
그 좁은 자리에 휘몰아치던 바람. 흩날리는 머리칼. 이리저리 흔들리는 옷자락과 바람에 실려 휘도는 이파리, 모래, 자갈들. 그 중심에 서서 바닥에서 한 뼘은 떠올라 있었던, 조그만 여자아이.
꿈 같은 풍경이었다. 벌써 이 년 넘게 다니고 있는 학교에서 낯설다고 느껴지는 풍경을 목격한 게 얼마만인지 몰랐다. 진행 중인 수업이 흘러나갔다. 낯익은 정경에 특별히 눈길을 준 적이 없기는 하지만 오늘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날도 없었다. 언제 수업이 끝났는지 어떻게 친구들과 헤어져 교실을 나왔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루의 눈은 아직도 점심 시간에 보았던 벤치와 휘몰아치는 바람을 보고 있었다.
어느샌가 하루는 우두커니 서있었다. 정확히 아까 그 자리였다. 지나가다보면 곁눈으로 벤치가 흘깃 보이는 구석자리. 정확히 같은 각도로 같은 장소를 바라보았다. 조용했다.
넋을 놓고 선 하루를 지나가던 친구들이 한대씩 툭툭 쳤다. 하루는 건성으로 대꾸했다. 말을 걸어보려는 친구가 두엇 있었으나 하루의 무심한 대응에 금세 멀어졌다. 하루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있었다.
썰물처럼 학교를 빠져나가는 학생들의 물결이 사그라들고 나서야 하루는 움직였다. 천천히 느린 걸음으로 벤치로 다가선 것이다. 정오가 지나고 햇빛이 사그라들자 겨우 사람이 머물만해진 벤치는 아직 열이 오른 채였다. 햇살이 완전히 물러간 것도 아니었다. 하루는 삐질삐질 흘러나온 땀을 한 손으로 훔쳤다.
말을 거는 사람도 지나치는 사람도 사라지자 그제야 제정신이 돌아오는 듯했다. 하루는 생각했다. 잘못 봤겠지. 물론 그럴 리는 없었다.
하루는 마지막으로 여자아이가 서있던 곳, 그러니까 떠있는 소녀의 발이 닿았을 법한 곳에 섰다. 그 아이와 제 키차이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 줄은 모르나 내려다보인 것을 생각하면 그 아이의 눈길이 닿았던 곳이 지금 하루가 보는 곳과 크게 다르진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하루는 나무 앞에 섰다. 바람에 휘감긴 소녀가 바라보던 나무였다.
그건 그냥 나무였다. 특별한 것도 없었고, 눈에 띄는 것도 없었다. 하루는 눈 앞의 나무 줄기를 유심히 뜯어봤으나 그 애가 무얼 보고 있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굵은 가지가 갈라져 있었다. 먼지가 쌓였다. 나무껍질은 울퉁불퉁 거칠게 생겼다. 가끔 까진 자리가 있다. 이파리는 조금 위쪽에 있는 잔가지에 있어서 여기엔 정말 볼 게 없었다. 힘이 쪽 빠졌다.
하루는 콧방귀를 한 번 뀌었다. 흥.
훽 돌아섰다. 그대로 학교를 빠져나갔다.

수험생의 하루는 온종일 실내에서 흘러간다. 책상 앞에 오래 앉아있을수록 대학을 잘 간다는 믿음은 수험생의 일상을 일종의 종교 수행처럼 만든다. 진리를 쫓는 구도자 같은 자세로 줄줄이 앉은 아이들을 잔뜩 실은 채로 수업은 둥실둥실 흘러갔다.
하루는 그날 끝내 공부에 집중하지 못 했다. 그러면서도 수험생의 자격에 대한 의문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머릿속은 점심 시간의 일로 가득하다. 잘못 본 걸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하지 않았다. 그런 착각을 하기엔 그 순간이 너무나 선명했다.
그 애는 대체 누구였을까. 교내에서 같은 교복을 입고 있었으니 같은 학교인 건 분명하고,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같은 학년일 가능성은 적었다. 유난히 조그만 것을 보면 일학년일까. 확신할 수는 없지만 워낙 자그마하니 그럴 것만 같았다. 순간적으로 보였던 얼굴은 선명하지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색소가 엷은 인상이었다는 것만은 기억이 났다. 크게 눈에 띌 정도는 아니지만, 뭔가 느낌이 그랬다.
건널목 앞에 서서 뺨을 간질이는 바람만으로도 그 애 생각이 났다. 바람이 엄청나게 불기는 했지만, 그 애가 떠올랐던 게 정말 바람 탓이었을까? 바람이 사람을 그렇게 안정적으로 띄우는 게 가능한 일일까? 가벼운 몸에 날개를 넓게 펼칠 새들마저도 기류를 타야만 날 수 있는데 바람이 그런 식으로 사람을 공중에 띄울 수는 없지 않을까.
그럼 역시 잘못 본 걸까? 그럴 리는 없었다. 하루가 하루 스물 네시간 안에 가장 정신이 또렷했던 게 그 순간이었다. 잘못 본 거라면 그게 더 이상했다.
하루종일 그 애 생각을 한 탓인가. 옆에 선 사람이 그 애처럼 보였다. 교복은 아니었지만 조그만 몸집이나 부스스한 머리모양이 꼭 닮았다. 그 애면 좋겠다고 하루는 무심히 생각했다.
신호가 초록으로 바뀌고 그 애를 닮은 사람이 앞서 걸었다. 날씬한 등을 지켜보던 하루는 갑자기 어떤 예감에 사로잡혔다. 그대로 발뒤꿈치를 강하게 찼다.
“잠깐만요.”
분명 점심에 본 광경은 평범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벌어지고 있는 일도 평범한 일은 아니다. 인간 은하루는 결코 처음 보는 사람의 팔을 덥썩 잡을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일은 벌어졌고 붙들린 사람이 고개를 돌린 순간, 하루는 어떤 벼락 같은 감각이 온몸을 관통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아마도 환희라고 불릴 감정이었다.
“찾았다!”
하루는 외쳤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온통 이쪽으로 쏠린 건 어쩔 수 없었다. 횡단보도 한 중간에서 멈추어버린 탓에 뒤늦게 신호를 따라 달려야 했음은 물론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엔 중요하지 않았다. 하루의 만면에 웃음꽃이 피었다. 잔뜩 들뜬 목소리로 하루가 말했다.
“너를 찾고 있었어.”
바람이 불었다. 그 애의 단발머리에서 삐져나온 잔머리들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다행히 그 애는 하루의 손을 뿌리치고 달아나지는 않았다. 그저 조그맣게 말했을 뿐이다.
“놔줘.”
거의 동시에 빠앙하고 경적 소리가 울렸기에 하루는 손을 놓기보다는 붙들고 달렸다. 그래도 강한 힘은 아니었다. 빼내려면 얼마든지 빼낼 수 있었지만 그 애는 얌전히 하루를 뒤따라왔다.
길 건너에 이르러 자연스럽게 손이 풀렸다. 대신 하루는 그 애를 마주볼 수 있었다. 그 애는 말이 없었지만 대신 눈을 똑바로 뜨고 하루를 바라보고 있었다. 긴장감이 들 정도로 오롯한 시선이었다.
하루는 말했다.
“난 하루야. 은하루. 점심에 봤지?”
그 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는 벙긋 웃었다. 그 애가 자길 기억하는 게 하염없이 기분 좋았다.
자기 소개도 했겠다, 그 애의 이름도 물으려 했다. 그런데 그때 그 애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어리둥절해 눈만 껌뻑이자 그 애가 여전히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이쪽.”
그리고는 앞서 걷는 것이다. 집에 가야한다는 생각과 어서 따라가야한다는 생각이 동시에 떠올랐다. 하루는 재빨리 걸었다. 그 애의 작은 등을 쫓아서였다.
길을 가며 하루는 몇 번이나 말을 걸었다. 대답은 하나도 듣지 못 했다. 그 애는 하루가 말을 걸 때마다 하루를 바라보았지만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루는 조금 기분이 이상해졌다. 끝까지 따라갔다가 장기라도 팔리는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걸음을 늦출 생각은 들지 않았다.
타박타박 걸어서 도착한 곳은 사람이 별로 없는 한적한 골목이었다. 사람 대신 바람이 소란스러운 곳. 그 곳에 선 아이가 마침내 걸음을 멈추고 하루를 돌아보았다.
“바람, 좋아해?”
그 애가 물었다. 하루는 대답하지 않았다. 생각해본 적 없는 질문이었다. 뭐라고 말해야할지 몰라 대답할 수 없었다.
“얘들은 네가 좋대.”
그 애가 웃었다. 배시시 작게 시작되어 만면 가득 피어나는 웃음이었다. 눈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활짝 웃는 낯으로 그 애가 말했다.
“나도 네가 마음에 들어.”
하루. 은하루. 그 애가 속삭였다. 시끄러운 바람 속에서도 선명하게 들리는 게 이상했다.
“나는 잎새야. 잘 부탁해.”
잎새가 작게 소리내어 웃었다. 그리고는 하루를 향해 날아왔다. 마치 바람에 떠밀리는 듯한 움직임으로.
“잘 부탁해.”
윙윙 바람이 불었다. 귓가가 소란스러웠다.

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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