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생각했다. 세상에. 아무래도 영화 속에 들어온 게 틀림없었다. 한국에 숨겨진 작은 마을이 있고 거기에는 신비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같은 학교 학생이래. 어느날 갑자기 버스 추락 사고로 이세계에 전생해도 이보다 놀랍지는 않겠다.
그래서 하루는 제 팔을 꼬집어보았다. 겁나니까 세게는 아니고 살짝.
“아오.”
아프다. 그럼 꿈은 아니라는 건데.
우연과 미래가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며 웃었다. 하루는 머쓱해 뒷머리를 긁었다.
“제가 알아들은 게 맞다면 세상에 정령이라는 게 있단 거지요?”
“그렇게 부르고 싶지는 않지만, 네. 맞아요. 제가 보는 끈이란 것도 조금 특수한 종류일 뿐 그 일부니까요.”
사람과 사람 혹은 사람과 사물 사이를 잇는 영(靈)이라고 하면 좋을까요, 라며 우연이 덧붙였다.
“그런 것에도 영혼이 있군요.”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투로 하루가 말했다.
“무당들이 바로 그 목소리를 듣는 거예요. 저는 그걸 눈에 보이는 형체로 보는 것뿐이고요. 그 끝에 걸린 사람 자체를 신으로 섬기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건 전 잘 모르겠네요.”
제 눈에 그저 사람들이 모두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보이니까요.
우연의 담담한 목소리에 하루가 갸웃거렸다.
“그럼 우연씨는 항상 눈 앞이 온통 거미줄 같겠네요? 불편하지 않으세요?”
아, 하며 우연이 웃는다.
“그렇진 않아요. 집중하지 않으면 흐려지거든요.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는 주의가 산만하긴 해요.”
저희끼리는 다 비슷해서요.
‘그렇지?’하고 우연이 미래를 바라보았다. 미래는 ‘아무래도.’라며 얼버무렸다.
“계속 신경쓰고 있지 않으면 엉뚱한 목소리에 답을 하거나 남들에겐 보이지 않는 걸 잡으려고 할 때가 있거든요. 그러다보니 밖에 나와서는 산만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지금이야 적응했지만 다들 한 번씩은 힘들어했던 시기가 있네요.”
우연이 말을 마치고 목을 축였다. 그제서야 정신이 든 하루도 휴대폰을 들어 시계를 보았다.
“저런.”
미래가 안쓰럽다는 듯 중얼거리고, 하루가 허둥지둥 가방을 챙겼다. 부재중 전화가 7통. 난 죽었다.
“감사했습니다! 저 가볼게요!”
“다음에는 시간 여유있을 때 와요. 식사라도 대접할게요.”
하루를 마중하며 미래가 말했다. 뒤에 선 우연이 손을 흔들었다. 잎새는 두 사람에게 가려 보이지 않았다. 하루는 그게 아쉬웠지만 발길을 멈출 수는 없었다. 다음 전화가 오기 전에 먼저 전화를 걸어야했다.

시간은 흐른다. 아무리 하루가 성실하지 않는 학창시절을 보내고 있다고는 해도 수험생이었다. 학교와 학원으로 빼곡한 시간표에 비일상의 신비가 스며들 틈이 없었다. 잎새와는 이따금 쉬는 시간에 만나 이야기를 하곤 했지만, 이 애는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과묵해서 한껏 부푼 호기심을 채울 수가 없었다.
이런 식이다.
“마을을 구해달라는 게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야.”
“무슨 위험이나 위기가 있는 거야?”
“응.”
“내가 뭘 할 수 있는데?”
“글쎄.”
순진한 눈망울에 한숨을 푹 내쉰 하루가 기지개를 쭈욱 폈다. 두 사람은 더위를 감수하고 사람이 드문 벤치에 앉아있었다. 뒤늦게 알게 된 거지만 잎새는 조심성이라고는 없는 아이였다. 사람이 있건 없건 아무 때나 하늘로 날아오르려고 해서 붙잡고 주의를 줘야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래서야 지금까지 들키지 않은 게 아니라 다들 보고도 못 믿은 게 틀림없었다.
“미래씨랑 우연씨도 걱정이 많겠다.”
왜? 라고 묻는 듯한 얼굴로 잎새가 하루를 바라보았다. 하루는 피식 웃으며 잎새의 머리를 헝클었다. 잎새는 얌전히 손길을 받아들이곤 손이 치워지자 눈 앞을 가리는 머리카락만 대충 치웠다. 하루는 그걸 보며 낄낄거린 후 머리를 정리해주었다.
“주말에 놀러가도 돼?”
“응.”
잎새가 고개까지 끄덕이며 눈을 빛냈다. 하루가 웃으며 잎새를 끌어안았다. 에구, 귀여운 거. 잎새가 몸을 조금 움츠렸다가 팔을 뻗어 마주 끌어안는다. 하루가 장난스레 웃으며 꽉 힘주어 끌어안자 잎새가 허둥거렸다. 다시 깔깔 웃으며 놓아준다.
“그럼 내일 봐.”
하루가 손을 반짝반짝 흔들었다. 잎새가 어색하게 따라하곤 달아나듯 뛰어 건물로 들어갔다.

그 주 토요일, 하루는 아침 일찍 약속 장소로 향했다. 휴대폰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잎새 덕분에 간신히 잡은 약속이었다. 다른 친구들처럼 생각하고 느긋하게 있었더라면 만나지 못 했을 것을 다행인지 불행인지 미리 연락처를 받아두지 않은 덕에 약속을 잡을 수 있었다. 전화만 겨우 받을 줄 알고 제 연락처도 기억하지 못 하는 걸 보고 할머니가 절로 떠올랐더랬다. 요즘 애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새삼스럽게 신기한 애라고 생각하며 하루는 흥얼흥얼 길을 걸었다.
오늘은 드디어 호기심을 푸는 날이다. 잎새와의 답답한 대화도 끝이었다. 잎새와 친구가 된 건 좋지만 그 애는 결코 좋은 대화 상대가 아니었다. 모든 대화가 단답이나 몸짓으로 끝나는 사람이 어딨어요, 세상에! 그런데 그런 사람이 옆에 있었다. 어이가 없었다. 나는 친구들이 꼬시는 것도 다 물리치고 노는 건데 너무하지 않아? 하루는 피식 웃었다. 어쩌면 잎새는 그런 점까지 매력일지도 모른다. 현실성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기이함이 좋았다. 얼마나 좋은지 근래 잎새와 어울리느라 친구들에게 짜증 섞인 불평을 들어도 그렇게 서운하지가 않았다. 이전이었다면 제법 상처를 받았을 법한데, 잎새를 만나면서부터 세상이 180도 달라진 느낌이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잎새가 먼저 나와있었다. 시간을 확인하니 약속 시간이 되기까지 15분은 남아있었다.
“언제 왔어?”
잎새가 고개를 갸웃했다. 모른다는 뜻이리라. 하루는 어깨를 으쓱했다.
“가자.”
“응.”
잎새가 앞장서고 하루가 뒤따른다. 다시 한 번 두 사람이 길을 나선다. 자그만 잎새의 머리칼이 하늘하늘 흔들리고 뜨거운 공기가 흐른다. 하루는 이 시간이 영원히 지속될 것 같다는 이유 모를 환상에 휩싸였다.
“하루양?”
의아한 낯으로 걱정스레 자신을 쳐다보는 미래와 마주할 때까지.

잎새의 뒷모습만 보고 걷다보니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고 있었다. 분명한 건 저번과는 다른 장소라는 것이었다. 이번에 도착한 곳은 저번의 그 집보다 조금 넓었고, 훨씬 삭막했다. 식물이라곤 하나도 없고, 그저 책, 그리고 또 책 뿐이었다. 책으로 가득찬 건 아니지만 책 말곤 있는 게 없었다. 하루는 어리둥절한 채로 집에 들어섰다. 잎새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방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우연이는 조금 늦어요. 편히 앉아요.”
우리집도 아니지만, 하고 미래가 웃었다.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는 편해보인다. 하루는 조금 당황했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미래씨. 저번에 하던 이야기 말인데요.”
안내받은 대로 식탁에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하루가 꺼낸 말이었다. 미래가 실소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얘기해줄 사람이 올테니까.”
그 말은 사실이었다. 말이 끝나자마자 굳게 닫혀있던 방문이 열리고 사람이 나타났다. 사납다고 느낄만큼 형형한 눈빛이 인상적인 여자였다.
“저 사람이야?”
그가 물었다. 미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인사해, 하루씨야. 잎새 친구분.”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씨, 이쪽은 은아예요. 임 은아.”
“처음 뵙겠습니다.”
하루가 고개를 숙였다. 은아가 식탁 반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쏘아보는 듯한 시선이 매서웠다. 하루는 슬쩍 미래를 보았다가 난감하게 웃는 얼굴을 보곤 다시 당당하게 은아를 마주보았다. 은아는 말없이 그대로 하루를 노려보다가 자세를 조금 바꾸었다.
“친구들에게 이야기 들었어요. 잎새가 당신을 데려왔다고요.”
“데려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네. 같이 놀기로 해서요.”
은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당신이 조금 특별하다고 들었는데요.”
“그렇대요.”
하루가 아무렇잖게 말했다. 은아의 얼굴이 점점 굳어가는 것을 본 미래가 안절부절 못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료수 가져올게.”
은아가 어찌나 화난 것처럼 보이는지, 하루는 자기가 뭘 잘못했나 잠시 고민해보았다. 당연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이제 막 만나서 인사했을 뿐이니 잘못이랄 게 없었다. 그래서 하루는 당당하게 어깨를 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숙이고 들어갈 필요 있나.
“잎새는 아직 어려요. 게다가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편이죠.”
“네?”
저보다 한 살 밖에 안 어린데요. 황당해하는 하루의 반문에 은아는 잠시 말을 멈춘다. 미래가 건넨 물 한 잔을 받아들고서 깊게 한숨을 내쉰다.
“당신이 나설 문제가 아니에요. 그 말을 하려고 했어요.”
“다른 분들은 아닌 거 같던데요.”
하루가 불퉁하게 말했다.
“어디까지 참견할 생각인데요? 수험을 포기하고 집을 떠나기라도 할 건가요?”
“그건 들어봐야 알죠.”
결국 하루가 짜증을 냈다.
“은아야.”
미래가 조용히 불렀다. 은아가 입술을 꾹 깨문다.
“그럼 들려줄게요.”
은아가 차갑게 얼어붙은 눈으로 하루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루는 삐딱하게 앉은 채 입술을 내밀고 있었다.

나영도는 한때 정령의 섬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지금이나 그때나 한적한 시골이긴 마찬가지였지만 조금 더 신성하게 여겨진 적이 있다나 뭐라나. 아직 서양의 과학이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전의 일이었다.
그때까지만해도 섬 사람들은 섬 밖으로 멀리 나가서도 그들이 목소리를 듣고 신비한 힘을 행할 수 있었다고 하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나영도 사람들은 섬에서는 일개 서민이지만 섬 밖에 나가면 어지간한 무당보다 신비로운 존재였다.
그 힘이 약해지기 시작한 건 정확히 일제 치하의 일이다. 일본이 무엇을 잘했고 못 했고를 떠난 문제였다. 일본이 국토를 해치기 시작하면서부터 모든 일이 시작되었다. 어쩌면 단순히 국토의 문제가 아닐지도 몰랐다. 그저 그들의 힘이 약해진 것이 모든 것의 원인인지도.
분명한 것은 섬에서 벗어나면 그들의 목소리가 점차 들리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섬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떠난 사람부터, 조금씩 가까운 곳으로 영역이 줄어들었다. 요즘은 섬에 사는 주민 중에도 그들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거기까진 괜찮았다. 사실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게 그리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시절이 갈수록 섬 사람들의 독특함은 그들을 사회에서 유리시켰다.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듣고, 부릴 수 없는 것을 부리는 것을 좋게 보는 사람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규격에 맞는 삶을 살아야한다는 목소리가 섬 내부에서도 점점 커졌다. 그래서 섬을 떠나는 사람도 있었다.

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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