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서였을까. 의심과 싸우던 하루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그저 부모님과 함께 차 타고 멀리 나간다는 게 기뻐서 신나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었다. 그때의 하루는 꼭 우연처럼 눈을 빛냈었다. 이제는 멀어져버린 흐린 기억 속 추억.
그런 생각이 드니 왠지 우연이 나쁘게 보이지가 않았다. 어쩌면 신종 사기 수법일지도 모르지만 돈도 없고 나이도 어린 자길 데려다 뭐에 쓰겠는가. …까지 생각하고 보니 어쩌면 납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자신과 싸우고 있는 하루를 보고 우연이 키득거렸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제가 잘한 게 맞는 건가 하는 생각이요.”
흐음. 우연이 작게 신음했다.
“그러게요. 우연씨에게는 딱히 좋을 게 없는 일이네요.”
“납치만 아니면 좋겠어요.”
하루가 솔직하게 고백하자 우연이 다시 킥킥 웃었다.
“그런 걸 걱정하고 있었군요?”
“네…. 좀 무서운 것도 같고.”
흘긋 운전대를 잡은 은아를 보고, 우연에게로 돌아온다. 피식 웃는다.
“이걸 제가 말하니 좀 웃기긴 하네요.”
“왜요?”
우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제가 가자고 했거든요.”
하루는 그렇게 말하곤 의자에 등을 기댔다. 갑자기 방금까지 하던 모든 걱정이 바보 같아졌다. 그래, 내가 가자고 했었지. 난 뭘 걱정한 거람.
하루는 흘긋 잎새를 바라보았다. 저 애를 보면 마음이 편해진다. 잎새는 존재 자체로 신비 그 자체였지만, 신기할 정도로 위험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 우연도 은아도 미래도 믿을 수 없지만 잎새는 믿을 수 있었다. 하루는 잎새를 통해 이 사람들을 믿기로 했다.
“하루양이 먼저 말씀해주셨군요. 그럴 거라곤 생각하지 못 했는데요.”
우연이 놀랍다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하루는 빙긋이 웃고는 앞을 바라보았다. 도로가 뒤로 힘차게 달려가고 있었다.
“제가 좀 행동파라서요. 그건 그렇고….”
“네?”
“전부터 궁금했는데 저한테 계속 존대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존대하고 있기는 한데요.”
왜 그러시는 거예요?
하루가 물었다. 하루라고 꼭 나이가 어리면 말을 편하게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잎새는 처음 보자마자 말이 짧았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하나같이 말을 높이니 뭔가 이상했다.
“불편한가요?”
우연이 물었다.
“조금요.”
어쨌든 하루는 고등학생이다. 대학생이면 나이차가 많이 나지는 않을지도 모르지만 어른이었고, 하루는 어른에게 존대받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우연은 가만히 하루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말 편하게 할게. 다른 친구들도 그렇게 해주는 게 낫겠어?”
“네.”
“그럼 하루도 편하게 말해주겠니?”
하루는 잠시 고민했다.
“응.”
한 번 더 고민한다.
“언니…?”
“이름으로 불러도 괜찮아.”
우연이 말했다. 하루가 어색하게 웃는다. 그게 더 힘들 것 같은데…. 머리를 한 번 긁적인다.
“알았어.”
이름을 잘 기억해둬야겠다. 하루는 생각했다.

우연과 대화하는 것도 다소 지루해질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차가 멈췄다. 하루로서는 처음 보는 장소였지만 그다지 낯선 풍경은 아니었다. 낮은 건물이 굴곡진 땅 위에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하늘은 여전히 낮고 창백했으며, 길이 좁았다.
다른 사람들을 따라 언덕을 올랐다. 빼곡한 집들 사이로 난 골목을 걸었다. 주말 오후 시간대의 주택가라 붐비지는 않았지만 인적이 드문 것도 아니었다.
“높네.”
하루가 말했다.
“응.”
잎새가 대답했다.
“좀 그러네.”
우연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얼마나 더 가야해?”
하루가 물었다.
“거의 다 왔어.”
은아가 말했다.
“저 골목.”
잎새가 가리킨다.
잎새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에는 주변 집들에 비해 높은 건물이 있다. 오 층 가량 되는 깨끗한 건물이었다. 다가가보니 골목은 중간에 막혀있다. 흔한 건물과 건물 사이의 무의미한 틈이었다.
“…거기서 뭐해?”
골목을 다 살피고 돌아선 하루의 질문이었다. 멀찍이 선 세 사람이 하루를 바라보고 있었다. 성가시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손을 팔랑거리던 잎새가 말했다.
“안 된대.”
“우리는 그 쪽으로 가기가 힘들어.”
우연은 미안한 표정이었다. 하루는 그제야 겨우 아까 나눈 이야기를 떠올렸다. 맞다. 가까이 가기 힘들다고 했지.
“그 안에 있을거야. 부탁할게.”
하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큼 골목에 들어선다. 아무것도 특별한 느낌은 없었다. 그늘에 들어서니 조금 서늘해졌을 뿐이다. 문제는…,
“돌멩이 같은 건 없어.”
골목은 너무 깨끗했다. 돌은 커녕 담배꽁초 하나 없다. 새로 지은 건물이라 관리를 철저하게 하는 모양이라고 하루는 생각했다. 뒤에서 은아와 우연이 당황하는 게 보였다.
“어떻게 해?”
하루가 물었다.
“그럴 리 없어.”
“분명 뭔가 있을 거야. 자세히 봐줘.”
은아와 우연의 말이었다. 하루는 고개를 저었다.
“거기서도 대충 보이잖아. 아무것도 없어.”
그 말은 부정할 수 없는지 두 사람이 조용해졌다. 심각해진 표정을 보니 안쓰러웠지만, 없는 걸 어쩌겠는가. 하루는 마지막으로 한 번만 골목을 둘러보고 나가기로 했다.
이번에는 조금 더 신중하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본다. 어차피 보이는 건 없지만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시늉이라도 하자는 생각이었다. 반듯한 회색의 돌벽과 울퉁불퉁한 하얀 돌바닥의 대비가 낯익었다. 반대편에는 옆 건물 벽이 있고 정면에는 벽돌색 담장이 있다. 울퉁불퉁한 바닥 사이에 뭔가 껴있기는 했지만 자갈이나 먼지에 가까운 것을 가져다 달라고 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한 바퀴 휘 둘러보고 나니 볼 게 없었다. 하루는 몸짓으로 아무것도 없다는 표시를 했다. 은아와 우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는 그대로 골목을 빠져나왔다.
아니, 빠져나오려고 했다.
골목에서 나오는 순간, 강렬한 예감 같은 것이 뇌리를 스쳤다. 하루는 뭔가에 잡아끌리듯 뒤를 돌아보았다. 있었다. 새카만 돌. 검게 빛이 나는 듯한 기이한 돌. 이런 것을 못 보고 지나쳤을 리가 없었다. 없던 것이 생겼다. 하루는 성큼성큼 다가가 돌을 집어들었다. 손에 들린 돌은 좀 검을 뿐 평범했다. 빛나던 것도 사라졌다. 이해할 수 없는 확신이 들었다. 이거다.
하루는 돌을 들고 돌아섰다. 세 사람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하루를 보고 있었다. 하루는 자신있게 다가가 돌을 내밀었다.
“자.”
“이건….”
한 손에 꽉 차고도 남는 크기의 돌을 골목 한 가운데서 주웠다. 그 자리에 없던 것이 생겼다는 건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은아가 머리를 부여잡으며 인상을 찌푸리고 잎새가 달아나듯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우연이 돌을 받아들려다가 손을 움켜쥐었다.
“미안. 잠깐 들고 있어줄래?”
하루는 그러겠다고 했다.
하루는 손에 쥔 돌을 가만 쳐다보았다. 검고 큰 돌멩이다. 표면이 거칠고 묵직하다. 이걸 어떡하면 좋을까. 고민한다. 아무래도 저들에게 넘기는 건 힘들어보이는데. 잠시 고민하는 사이 은아와 우연이 말을 맞췄는지 하루에게 조금 다가왔다. 겨우 대화하기에 어색하지 않을 정도의 거리였다.
“미안. 그걸 우리가 들고 갈 수는 없을 것 같아.”
미리 생각했어야 하는데 미안하다는 말이 이어졌다.
“괜찮으면 그걸 가지고 있어 줄래?”
하루는 별 생각 없이 그러마 했다. 설마 그게 이런 요절복통으로 이어질 줄은 모르고 내놓은 대답이었다.

돌멩이를 트렁크에 싣고 은아네 집으로 돌아와서 하루는 돌멩이를 들고 집으로 향했다. 들고 가는 동안은 별 문제가 없었다. 몇 번 길 가던 사람들과 부딪힐 뻔 했을 뿐이다. 오늘따라 유난하네, 하는 생각은 들었지만 특별한 일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집에 도착해서 문을 열고 들어가며 인사를 했는데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집에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닌데 아는 척하는 사람이 없는 게 이상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인사 좀 못할 수도 있지. 방에 들어가 돌덩이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대로 침대에 몸을 던졌다. 날이 어두워 저녁 시간이 다 된지라 저녁 식사가 준비되었은데 엄마가 하루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언제 왔어?”
“아까 왔는데?”
세상에. 간 떨어질 뻔 했네. 엄마가 가슴을 끌어내렸다. 식탁에는 하루의 밥이 없었다. 하루는 직접 밥을 퍼와서 저녁 식사를 했다.
자고 일어난 다음 날은 일요일이었다. 아침부터 엄마의 비명소리에 잠을 깼다. 졸린 눈을 비비며 밖으로 나가니 엄마의 서러운 목소리가 하루를 반겼다.
“얘들아.”
베란다에 있는 작은 정원에서 엄마가 주저앉아있었다.
“뭐야? 왜 이래?”
하룻밤 사이에 생기 넘치던 정원이 누렇게 죽어있었다. 하루도 깜짝 놀라 베란다로 나가 화분 상태를 살폈다. 파릇파릇하던 잎과 가지가 다양한 형상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나 감기 걸린 거 같아.”
뒤늦게 나온 동생이 코맹맹이 소리로 말했다. 배를 내놓고 잤나. 배탈 기미도 있다며 동생이 제 배를 어루만졌다. 하루는 엄마를 부축해 안으로 모시고, 동생에게 감기약을 챙겨주었다. 일요일에 여는 병원도 없으니 상비약으로 버텨야했다. 내일도 안 좋으면 병원에 가보자고 이야기하는 새 갑자기 돌멩이가 떠올랐다.
만물에 깃든 힘인 정령이 살기 힘든 땅. 거기에서 발견한 수상한 돌멩이.
동생이 감기에 걸린 것뿐이라면 의심하지 못했을 것이다. 건강하긴 하지만 여름 감기 정도야 운이 좀 나쁘면 누구라도 걸릴 수 있는 거니까. 하지만 엄마의 정원은 달랐다. 어제까지 생생하던 걸 분명 확인했다. 엄마가 물을 주면서 흥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니까.
“나 잠깐 나갔다 올게.”
하루는 급하게 옷을 챙겨입었다.
“또 어디 가.”
엄마가 말했다.
“금방 올게!”
돌멩이를 챙겨서 구르듯 집안을 빠져나왔다. 내가 생각보다 큰 일을 맡아버린 게 아닐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들을 찾아가려고 했으나 은아의 집도 우연의 집도 정확히 위치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무작정 돌덩어리를 안고 집을 빠져나온 하루는 아파트 입구에서 고민하다가 잎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세 번째가 되어서야 겨우 전화를 받는다. 하루는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학교에도 휴대폰을 두고 다닐 때가 대부분인 잎새니 밖에 있었으면 전화를 안 받았을 게 틀림없었다.
- 여보세요.
간신히 들리는 크기로 잎새가 말했다.
“지금 어디야?”
- 집.
“나 좀 데리러 와. 당장 할 얘기가 있어.”
- 응.
묻지도 않는다. 당연하다는 듯한 답 뒤로 전화가 끊겼다. 어디서 만날지도 정하지 않은 채 끊긴 전화에 잠시 황당했지만 매번 만나던 곳으로 간다. 거기가 아니면? 다시 연락해봐야지, 뭐. 태평스럽게 생각하며.

Posted by f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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